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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호칭 ㅣ 문학동네 시인선 18
이은규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4월
평점 :
문학동네 시집이 몇 권 있다.
맘에 안 드는 구석이 몇 군데 있다.
일단, 제본 상태가 깔끔하지 않다.
새책을 펼치면, 헌책처럼 활라당~이다.ㅠㅜ
그리고 종이 질이 지나치게 눈부신 백색이다.
무엇보다, 시집의 제목을 따로 붙인다는 거...
내가 시집을 읽어온 게 어언 30년이 다 되어가는데... (늙었구나, 어이쿠야...ㅠㅜ)
시집의 제목을 보고, 그 표제시를 맨 먼저 찾아읽는 걸로 질이 들었는데...
이 시집들은 항상... 헛다리를 짚고 씁쓸하기 일쑤.(불평, 끝!)
우리가 혁명의 스위치를 올리는 순간, 세상이 점등될 거라 선언해요 (점등, 부분)
젊은 시인인데,
시어들이 생경하지 않아 다정하다.
그의 시를 통하여 스위치가 번쩍 올려진 것처럼,
한 순간에 세상은 밝아질 수 있다는 것처럼...
혁명의 점등을 꿈꾸는 시인...
그 영혼은 아름답다.
지문에 새겨진
그 바람의 뜻을 읽어낼 수 있을 때
그때가 멀리 있을까,
멀리 와 있을까 (바람의 지문, 부분)
평균 수명과 사라지는 시점은 일치하지 않는다
한 구름이 다른 구름이 되는 동안
보이는 그가 보이지 않는 그가 되는 시간(구름을 집으로 데리고 가기, 부분)
분다, 바람이
소금사막의 불편한 이름들은 바람의 입김을 타고 온다
구름 근처엔 바람도 없고
기억에서 떨어진 모래알은 반짝
잠든 나비의 흰 잠이 차가운 이마에 닿는 순간
분다, 당신이 (누가 나비의 흰 잠을 까만 돌로 눌러놓았을까, 부분)
그의 시어들은 바람과 구름처럼...
흘러가는 것들을 잡아채는 잠자리채라도 하나쯤 가지고 있나보다.
이소라의 노래를 들으면, 그 쓸쓸한 심사가 마음이 새겨지듯...
시를 통해서 바람과 구름이 마음에 사로잡히는 경험...
전달되지 않았더래도... 시인은 그 마음을 쓴다.
남겨두기 위해서라도...
봄은 파열음이다
그러니 당신, 오늘의 봄밤
꽃잎의 파열음에 귀가 녹아 좋은 곳 가겠다
생을 저당잡히고도 점괘 받는 일이 잦을 당신이겠다 (벚꽃의 점괘를 받아적다)
이 시인의 귀는 정말 센서티브하다.
얼마나 감도가 높은지... 못 듣는 소리가 없다.
안 들리는 소리가 없다.
그 소리를 또 잡아채는 솜씨가,
소리의 순간을 잡아채서 시어로 박제하는 솜씨가 탁월하다.
그저 입 벌리고 멍하니 읽을 따름...
당신을 듣기 위해 항상 열어두었던 내 귀
채집된 음을 기억의 서랍 속에 숨겨놓은 날이 길다
귀는 깊어 슬픈 기관일 거라는 문장
함께 받은 처방은
구름의 운율에 따라 문장 읽기를 하라는 것
혹은 가슴에 귀를 대고 기다려주기
청진, 듣는 것으로 보다
모든 병은 마음이 몸에게 보내는 안부
말에 지칠 때마다
당신은 구름이 잘 들리는 내 방 창문을 두드렸다
문장 읽기를 하다 당신의 가슴에 귀를 묻으면
금세 꿈꾸는 숨소리, 차라리 음악이었고
어느 의사가 병명을 알 수 없는 환자가 안타까워 체내의 음에 귀 기울인 데서 시작되었다는 청진의 기원
이제 당신은 멀리 있고
청진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 것이므로
두 귀는 고요한 서랍이다
그때의 구름만 내재율로 흐르는 창 (청진의 기억, 부분)
듣고 싶은 자는 들을 수 있다.
구름 속을, 바람 사이를 내재율로 흐르는 소리를...
들리지 않는 소리를 안타까워하며 애써 들으려 귀기울리는 청진의 아름다운 마음을...
시인은 듣고 글로 사로잡는 사람이다.
누군가
물수제비로 새겨넣은 문장을 오래 듣는 귀가 여기 있다
그는 이제 허공에 발자국을 찍을 수 있는 종족
물수제비 문장을 기억하는 바람에게
물 위에 찍힌 새의 발자국은 누가 지울까
하릴없이 묻는 날이 길다
아직 눈물이 아닌 질문 몇 점 후둑, 후두둑
그날의 적막에게 어떤 문장은 마침표 없이도 지워지지 않는다는 걸 배운다 (물 위에 찍힌 새의 발자국은 누가 지울까, 부분)
그에서 언어란,
허공에 발자국을 찍듯,
물수제비가 물 위에 흔적을 남기듯,
어쩔 수 없이...
사로잡고 싶은 마음 가득하지만,
하릴없이 물을 수밖에 없는... 그런 것이다.
마침표 없이도 지워지지 않는,
언어란, 마침표 하나로 정의되지 않는 그런 것임을 그는 읽고 쓴다.
언젠가
얇은 담요 사이로 그녀의 맨발을 본 적 있다
기어이 가는 봄날의 꽃잎처럼
살에 감기는 바람결에도 색을 잃을까, 야위어갈까
애를 태우던 그녀의 살빛
살이라는 말처럼 연한 발음이 있을까
또 발이라는 시린 말은 어떻게
지나간 걸음걸이를 추억한다
또옥 똑, 봄의 운율로 걷던
그녀는 살아서 나비의 후생이기도 했을 것(모란을 헛딛다, 부분)
그에게 모란은,
봄의 운율이고,
애타는 빛이다.
살빛의 연한 소리이고,
발이라는 시린 말이다.
눈으로 본 것을 소리로 옮기는 통역가.
그의 시를 읽는 일은 그 아슬아슬한 통역의 과정을 바라보는 일.
오역은 없을까, 아슬아슬한 마음, 조마조마한 심정...
순간은 얼마나 긴 영원인가
다시는 배웅할 수 없는 지난 생이
천천히 소실점으로나마 사라지고
아픈 피를 해독한다는 백작약 앞에 선다
꽃그늘에 후둑, 빗방울 (꽃그늘에 후둑, 빗방울, 부분)
백작약 앞에서,
순간의 마음을 적는다. 긴 영원처럼...
왜 당신의 책을 거꾸로 읽고 싶었을까
마지막 장에 찍힌 쉼표
마침표 대신 쉼표 쪽으로 휘어져 있음을 알겠다
끝 문장으로 첫 문장을 되묻는
이번 생도 도돌이표의 구름이 되어 오래 흐르겠다
먼저 부를 수 없는 허공을 가진 꽃처럼
먼저 부를 수 없는 당신의 시는 거꾸로 읽기 알맞다
끝 문장의 쉼표는 첫 문장 마침표의 도돌이표 (역방향으로 흐르는 책, 부분)
이렇게 문장의 흐름을 이어주고 끊어주는
쉼표와 마침표, 드리고 그 도돌이표의 흐름을 느낄 줄 아는 마음을 만나는 일은 행복하다.
그의 시를 읽고 있으면,
삶의 행간을 읽는 것 같다.
그가 눈빛보다 미간을 좋아한단 말은,
언어보다 언어에서 느껴지는 느낌,
음성 사이에서 재생되는 삶의 희열과 좌절,
이런 것들을 바라보는 것에서 관조의 시를 쓴다는 말로 읽힌다.
먼 눈빛보다 미간이 좋아
바라보며 서성이는 동안 모든 꽃이 오고 간다 (미간, 부분)
좋은 시인을 만나면 그의 건투를 빌게 된다.
이은규,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