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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보이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평점 :
그냥, 이 책을 읽으면서 작가의 롤모델은, 이외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외수는 젊어서부터 판타지 소설을 써 왔다.
요즘엔 블로그질 이후로 격언 비스름한 것들을 시처럼 휘갈겨서,
젊은이들의 감성을 자극한다.
이외수의 책 <아불류 시불류>에서 몇 마디 건져왔다.
내가 흐르지 않으면, 시간도 흐르지 않는다...는 제목이다.
이것 봐. 방금 니가 씨팔이라고 말하는 순간, 별 하나가 깨져서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니까.
지구에도, 우주에도 봄여름가을겨울이 있다.
물론 사람들 인생에도. 하지만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인생 전체가 봄이기를 바라기 때문에 불행해진다.
길가다 옷자락만 스쳐도 인연이라지요. 밤새우며 글자락을 스치면 얼마나 큰 인연일까요.
"사랑이 현재진행형일 때는 서로가 상대에게 애인으로 존재하게 되지만, 과거완료형일 때는 서로가 상대에게 죄인으로 존재하게 된다. 하지만 어쩌랴. 죄인이 되는 것이 겁나서 이 흐린 세상을 사랑도 없이 살아갈 수는 없지 않은가"
이 책은 <후일담 판타지 힐링 추억담 소설>로 분류할 수 있다.
무엇보다 1970년대 흑백 텔레비전의 추억에서 가장 인기있었던,
변웅전 아나운서와 묘기 대행진,
그리고 그 당시 유행했던 세계를 구하는 미국 인물들,
육백만불과 원더우먼을 본딴 제목 자체가 그 당시의 추억을 회상해 주시길 요구한다.
요즘 원더걸스의 만두를 생각하는 아이들에겐 회상자체가 무리일 수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의 주된 독자는 40대 이상 공감, 일 것이다.
80년대 전두환의 폭압의 시대, 그 자식은 아직도 육사를 방문하여 사열을 받는 등,
활기등등하게 제 팔자를 누리고 있지만, 아무리 박정희의 망령이 되살아나는 시절이라지만,
죽일놈이 그 꼴깝을 떠는 걸 보면, 참 세상 돌아가는 꼴은 한심하다.
열받아야 마땅한데, 뭐, 그런 새끼도 공이 수십 개 붙은 인종 중의 하나였다고 생각하면,
사는 거 정말 빌 공 자 아닌가?
난 김연수가 좀더 용감했기를 바라면서 이 소설을 펼쳤다.
<원더 우먼>은 1970년대 그 쬐끄만 인간들에게 베트남에서 쪽팔리게 지고 돌아와,
정신 병자가 되어버린 <람보>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서 탄생한 캐릭터다. <슈퍼맨>, <6백만불>과 마찬가지다.
그렇게 폭격을 했고, 무지막지한 여론의 반대에 부닥치면서 병신이 된 나라의 이미지를 <정의>로 치장하려고 한 거다.
이왕 <원더 보이>를 창조했다면 말이다.
강풀의 26년처럼 용감한 김연수를 나는 바랄 정도는 아니지만 말이다.
적어도... <원더 보이>가 21세기의 내 마음에 작은 별빛 하나 남겨 줬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21세기 한국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힐링>이고 <위안>이다.
물론 이 소설이 추구하는 바에 그것이 들어가 있기는 하나... 미약하다.
두렵고도 치떨리는 단어, '분신'을 그렇게 들이대지 말았으면 좋았을 걸 그랬다.
김연수가 '분신'의 현장을 그리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마물릴 거였으면, 분신이란 말은 꺼내지 말았으면 좋았을 거 같다. 무서웠다. 그 단어가 주는 함의는 광주나 제주도 4.3만큼 내겐 두려움이다.
인간은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린다.
이외수 형님이 할 법한 이야기 아닌가?
양자론의 세계와 반만 죽고 반은 살아있는 고양이...
김연수, 머리 좀 더 길러 보면... 고양이를 살릴지, 죽일지... 한방 맞을지... 어쩔지...
아빠는 그곳의 밤은 천 개의 눈을 가진 짐승처럼 아름다우니 같이 구경가자고 말했다.
우리는 농가들 사이로 난 소로를 따라 걸었다.
벌판은 표백한 이불 홑청처럼 펼쳐져 있었다.
밀가루를 뒤집어써 화가 난 뚱보들처럼 서 있던 짚단들,
심연처럼 어두운, 얼어붙은 개울의 표면.
사방이 적설의 풍경이었음에도 그 밤이 내게 건기의 밤으로 기억된다.
하늘의 별빛과 땅의 눈빛이 서로 환했다.(116)
이런 서정적 문장이 김연수의 장점이다 .
그런 걸 좀 잘 살려서 쓸 수 있는 스토리가 필요하지 않을까?
이 스토리의 시대, 또는 소재가 김연수가 받아들이기엔 아직 과부하였단 느낌이 남는다.
이외수를 좀 더 읽든가.
이 인생에서 내가 할 일은? 그건 더욱 내가 되는 일.
아름다움은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구나,
그 구절을 읽고 나는 죽을 때까지 부끄러움을 아는 인간이 되기로 결심했지.
좀더 이외수스럽게 되려면 말이다.
자기 말로 떠벌여야 한다. 토마스 만 같은 애를 들고 들어오면, 소설에서 반칙 아닌가?
시나 노래에서 '아~!' 이렇게 감탄사를 작가가 직접 삽입하듯이, 일종의 폭력 아닐까?
이해란 누군가를 대신해서 그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
그리고 그 이야기를 통해서 다시 그들을 사랑하는 일이야.
또 이외수. ^^
그래. 나는 소설을 읽고 '세상에 나처럼 비루하게 사는 인간도 많구나~' 이런 이해를 받고 싶은 거야.
그래서, 나 대신 그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이야깃 속 그들을 사랑하게 되고,
이야기를 벗어나서 그 시대의 나와 지금의 나까지 사랑하게 되길 바란다구.
근데, 왜, 소설가가 이외수처럼 날것으로 저런 이야길 늘어 놓냐구~.
누군가의 슬픔 때문에 내가 운다면, 그건 내가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라는 걸...
깜짝 놀라서 울어준 사람, 정말 고맙지.
나도 누군가를 슬퍼해서 울어주었거든. 그게 사랑이라네...
근데, 아무리 봐ㄷ... 자꾸 이외수가 떠오른다.
모든 고통은 공포보다 더 강해요.
그게 자신의 고통인 한에는.
하지만 아무리 엄청난 고통이라고 하더라도 나의 고통이 다른 사람에게 고스란히 전달되는 경우는 없어요.
그게 우리의 한계예요.
그 한계때문에 우리는 이런 국가를 가지게 된 거예요.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의 고통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면,
어떤 국가나 권력도 개인을 억압할 수 없었을 거예요.
타인의 고통을 공포보다 더 강하게 느껴야만 한다는 건 그런 뜻이에요.
지금과 다른 국가를 원한다면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자기 것으로 여겨야만 해요.
등장 인물들의 관계가 명징하지 못하고, 형상화에 뚜렷하게 성공하지 못했을 때,
작가가 맘이 성급하여 튀어나오는 목소리가, 제 목소리다.
작가는 특정 인물의 언어로 이야기해야 하는데, 많은 후일담 소설들이 실패한 이유가 그거다.
작가가 제 목소리를 들려주는 것. 그런 소설은 독자를 불편하게 한다 .
불편한 소설은 독자를 깨어나게 하지 못하고, 움츠리게 만들 뿐이다.
우리 몸의 지방 덩어리만 혈관을 막아서 핏줄이 터지게 하는 건 아니다.
작가의 욕심도 이야기의 흐름을 방해하여 엉뚱한 데서 터지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더라면...(이건 류시화 비슷하다. ㅋ)
난 소설에 무슨 '수첩' 나오는 거 싫어한다.
소설에는 '인물'들이 좀 단순하게 나오고, '사건'으로 엮이며, 시대적 공간적 배경과 잘 녹아있어야 한다.
조정래, 박경리의 글들이 8시 연속극처럼 인물에 빠져들게 만드는 요소가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무지랭이들이지만, 그 무지한 대화들, 행동들 속에서 공간적, 역사적 배경이 잔뜩 묻어난다.
그래서, 김연수가 좀더 무르익기를... 그리고, 욕심을 다이어트 하기를 욕심내는 것이다.
이외수를 들이댄 것도 그래서다. 그가 싫어서가 아니다. 왜 내가 그를 싫어하겠는가...
우리의 밤이 어두운 까닭은
우리의 우주가 아직은 젊고 여전히 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다른 사람의 몸이 그토록 뜨겁게 느껴질 수가 있을까.
그건 어쩌면 그때 우리가 아직은 젊고 여전히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지도.
이런 막연한 후일담과 희망을 주는 일은 의미가 커 보이지 않는다.
이제 우리가 살아갈 세상은 완전히 다를 거라고,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고,
만약 누군가 그런 짓을 하려고 든다면,
우리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고,
뭐라도 할 것이라고,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
우린 혼자가 아니라고...
이 부분을 읽으면서 쓴웃음이 슬슬 난다.
과연 세상은 달라졌는가?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 같은가?
가만히 있지 않고 뭔가 할 것인가?
과연 우린 혼자가 아닌가?
소설에서 이런 말 나오면, 그건 실패의 증거 아닐까?
그러므로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