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VS 철학 - 동서양 철학의 모든 것, 철학 대 철학
강신주 지음 / 그린비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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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도 자체가 신선하다.

그런데... 대결 구도에 어울리는 철학자들이 있는가 하면, 아닌 철학자들도 있게 마련인데...

그걸 꼭 vs 구도에 넣으려다 보니 무리한 구석도 있는 듯...

 

그렇지만, 철학이든 문예 사조든...

이전 시대의 정설로 받아들여진 패러다임에 문제제기를 하고,

반대되는 의견의 구조를 수립하려던 거였다보니... 강신주처럼 설명하는 것이 일리가 있기도 하다.

그치만, 모든 철학자들이 그런 구도에서 명확히 대립되는 것은 아닌 바...

더 치중하여 설명하고 싶은 철학자와 개념도 있었을 거고,

가벼이 넘기고 싶은 철학자도 있었을 건데... 암튼, 이런 대작을 기획하여 밀고나온 힘이 부럽고 대단하다.

내가 이런 작업을 할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한다면,

같은 시대에 이런 젊은 철학자가 모국어로 책을 왕성하게 쓰고 있다는 것에 감사할 노릇이다.

 

강신주는 '정신적 키가 한 뼘 정도 자랐다'는 말을 좋아한다.

철학 서적을 탐독한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땅딸보 철학자 신드롬'이다. ㅋ

그래서 자기가 무지 큰 줄 알고, 늘씬한 줄 알고, 맨날 짝붙는 티를 입으시나부다.

그게, 철학의 장점이기도 하고, 약점이기도 한데,

정신적 성장을 도와주는 점이라면,

철학에서 활용되는 언어가 상당히 도식적이고 분석적이어서 현상을 객관적으로 분석하는 틀을 제공하는 역할을 하는 점이다.

그러나 철학적 사유가 주는 약점이라면,

인간의 삶은 늘 뼈대로만 이뤄지지 않고, 실존 인간이 놓인 시대적 사회적 주변 상황과 배경을 고려하여 복잡하고 유기적으로 이뤄지는 것이어서, 그 사유의 토대로만 세상을 바라보는 일은 자칫 오류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특히 한국처럼 이데올로기의 각축장이었던 곳에서는,

말잘하면 공산당... 취급을 받았던 바,

철학하면 말잘하게 되고, 바로 매카시즘의 공격 대상이 되기 십상인 것이었고...

그래서, 철학적 토론의 토양은 백안시되었던 곳이 이 나라였다.

 

타자와의 마주침에서 새로운 배치, 즉 아장스망을 실현하는 일로 인해,

내가 영위해온 삶의 규칙은 완전히 새롭게 재편된다.

타자가 가능 세계라면, 나는 과거의 한 세계이다. (160)

 

들뢰즈의 한 마디는,

철학이 만들어주는 위험한 인간을 규정한다.

타자가 '하나의 위협적인 세계의 가능성'이라면,

철학 역시 '위협적인 세계관의 가능성'을 가진 도구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 속에서는 '사랑'의 문제에 탐닉할 수밖에 없는데,

라캉의 <욕망 = 요구 - 욕구>의 공식으로만 해결되는 건 아니고,

바타유처럼 "에로티즘은 사회적인 것"이라고 규정하는 일도 큰 의미가 있다.

최근 한국의 젊은이들이 <쿨한 사랑>을 외치는 것 역시, 삶의 조건의 팍팍해진 사회적 반영임을

정이현의 <사랑의 기초>에서 명확히 짚어내지 못하는 일 역시, 바타유를 제대로 못 봐서 그렇다.

같은 작업을 한 알랭 드 보통의 책이 사랑의 본질에 명확히 다가가는 것을 보면,

철학은 세상을 바라보는 명확한 시선을 제공하는 [지혜안]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하긴, 세상은 늘 대립의 연장이다.

강신주가 툭하면 내미는 슈미트의 <정치적인 것은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것>이란 말에 대적하는 아감벤.

아감벤은 <정치가 존재하는 것은,

인간이 언어를 통해 자신에게서 벌거벗은 생명을 분리해 내며,

그것을 자신과 대립시키는 동시에 그것과의 포함적 배제관계를 유지하는 생명체이기 때문>이라고 하며 푸코를 계승한다.

 

이렇게 나누는 일 역시 쉽지 않은 바,

강신주의 철학적 전통에 대한 통찰이 이 책을 이끌어 냈다면,

앞으로도 더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책들로 그 간극을 가득 채워주길 바라는 마음이 크다.

 

서양철학자에 버금갈만큼 훌륭한 동양 철학의 그림도 다양한데,

그의 동양철학사가 목하 집필중이어서 그 부분에서 더욱 세밀한 그림을 그려주길 바란다.

철학자라도 보고싶지 않을 철학 사전에 비하면, 이 책의 발견이야 말로,

<평행으로부터 어긋나는 미세한 차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것 같은 미세한 편차>를 칭하여,

루크레티우스가 설정한 <클리나멘>의 순간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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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마음을 열어주는 위대한 우화
정용선 지음 / 간장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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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를 읽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가장 널리 읽는 건, 장자라는 텍스트가 재미있는 함축적 이야기로 되어있기 때문에, 이야기로 읽는 법이다.

이야기를 풀이해 놓고는,

그 이야기를 하게 된 배경과 상황을 풀이해 주면서 인생의 교훈을 주는 식의 책이 많다.

 

그 다음은, 한문 구절을 풀이해 가면서 주해를 다는 식인데,

한문 문장이 일단은 길어서 집중이 쉽지 않고, 쉽게 접하지 않는 한자들도 많아 어려운 편이다.

그런 책들을 읽으면... 교훈을 중심으로 읽기 어렵다.

 

이 책은 두 가지 특장을 모두 살리려 한 책이다.

 

우선 이야기들의 틀을 작은 제목을 붙여 나눈 뒤,

한문 원문을 붙여 둔다.

그리고 한문 원문의 풀이를 따로 제시하지 않았으면서,

각 글의 내용을 충실하게 풍족하도록 이야기를 풀어 낸다.

그리고 원문에서 전개하는 내용은 '바다색' 글자로 두드러지게 돋보이게 한 점이 멋지다.

 

장자는 마음의 쑥구렁을 인정하는 책이다.

마음의 쑥구렁을 싸~악 치우고 단정하게 살라고 하지 않는다.

다만, 네 마음에 쑥구렁이 가득하여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임을 알라...

너라는 존재는 원래 모든 가능성의 잠재태인 것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이런 교훈을 담고 있기도 하지만,

유교 중심 국가에서 오랜 세월 살던 역사를 고려할 때,

장자에 담긴 이야기들이 자칫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된 일이 많은 것 같아 아쉽다.

 

장자는 이런 이야기다.

 

장자를 읽고 무언가 정신적으로 거듭났는가?

답답하게 현실에 매여 기어다니던 마음이 날듯이 자유로워졌는가?

스스로 번데기의 허물을 벗고 나비가 되었는가?

혹은 무언가를 깨달았는가?

아니면 잠시 알 듯도 하다가 모르는 상태로 되돌아 오는 단계인가?

어떤 경우라 해도 무언가를 아는 '나'는 모두 꿈에 지나지 않는다. (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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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방을 찾아서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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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인가, 김지하가 '중심의 무거움'이란 시를 썼다.

그때부터 김지하는 읽지 않았다.

시인이 중심에 놓이는 순간, 그는 '시의 가슴'을 잃는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소설가는 좀 다르다.

소설가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하는데,

그 이야기가 상업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기회를 잡으면 성공할 수도 있다.

공지영의 '우행시'와 '도가니'가 그런 예다.

그의 다른 책들에 비해 이 두 책은 서사도 치밀하고, 영화도 괜찮았다.

 

신영복이야말로 변방의 지식인이다.

변방이 그를 지식인으로 기른 셈이다.

20년의 감옥생활이 없었다면, 그가 그토록 글을 치밀하게 쓰고, 읽지 못했을 수도 있다.

감옥은 그에게 또 하나의 대학이었다.

 

신영복의 글씨는 변방의 글씨다.

주류의 글씨가 중국의 '전예해행초'를 답습하는 반면,

그의 글씨는 자유로운 행보를 보인다.

물론 기본적 운필은 한자의 필법을 무시하지 않고 있지만, 민중체라고 불릴 만한 힘이 가득한 필체가 유려하다.

 

그의 글들이 놓인 곳을 찾아가는 길을 적은 책이다.

책은 얇고 가볍다.

그렇지만, 이 책에서 읽어낼 수 있는 사유는 결코 가볍지 않다.

이 책의 중심은 '글자'라고 생각하여 예술 서적으로 읽었지만,

그 안엔 철학도, 역사도 다 들어 있다.

 

지금... 한국 사회가 가고 있는 곳은, 지옥이 아니라, 현실에서 지옥을 완성시키려는 잠재태인 것처럼 보인다.

부모들은 자식들을 고통으로 몰아넣으면서 그걸 사랑이라 착각하고,

가정은 파괴되어 모두 아프나, 누구도 아프지 않은 체 한다.

술집과 모텔은 짝짓기에 혈안이 된 짐승들로 넘쳐나는데, 이렇게 아프지 않을 수 있는 세상이 웃긴다.

대학은 누구나 나와야 한다는데, 대학생들은 실제로 공부를 하지 않고 취업 준비만 한다.

뭔가, 온갖 비명이 다 존재하는 곳...

정치권도, 종교적 집단도, 학교도, 돈벌이의 세상도, 가정마저도...

모두 피비린내와 돈냄새를 향한 똥냄새로 아비규환을 이루고 있다.

 

<지옥도>를 현실에서 가능하게 할 수 있음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학계가 모두 힘을 합쳐,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사람들이 똘똘 뭉쳐 <잠재태>를 <가능태>로 바꾸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 <지옥도>를 가까운 미래에서 <현재완료>로 진행시키기 위한 정치가 목하 진행중이다.

진보진영은 까발리고, 추잡하게 욕보인다.

이명박 무리의 추잡함은 검찰에서 무죄로 떠든다.

친박의 무리는 무조건 입다물고 조용히 있는다.

지옥도의 완성은 멀지 않아 보인다.

 

신영복의 글자가 있는 곳, 땅끝 마을의 도서관, 고 노무현 대통령 묘소, 박달재, 서울시청, 홍벽초 문학비...

사연은 달콤하고, 애리고, 서글프고, 눈물겹다...

모두, 변방 아닌 곳 없다.

 

서울 시장실의 글씨를 찾으러 가니, 박원순 시장이 '변방이 중심부로 진입하는 과정'이 역사란 말을 한다. 따뜻하다.

다행이다. 시장이 다섯 살 훈이였으면... 재수 없을 뻔 하지 않았나.

 

변방은 과연, '낙후되고 소멸해가는 주변부로서가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의 전위'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인지...

이성적으로 비관되더라도, 의지로 낙관하여야 한다는 그람시의 말을 힘으로 삼아 본다.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에서 나온다는 말.

저항이야말로 창조이며, 창조야말로 저항이다... 변방에게 들려줄 좋은 말이다.

 

허균, 허난설헌의 기념관에 가서, 매화를 보고는

한고를 겪고 청향을 발하는 매화, 그것도 변방의 창조성으로 읽는다.

 

유감스럽게도 세상엔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 있다.

지혜로운 사람은 세상에 자기를 맞추고,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에게 세상을 맞추려 한다.

어리석게도 세상을 인간적으로 바꾸려고 노력한다는 것.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처럼 우직한 어리석은 사람들에 의해 세상은 조금씩 새롭게 바뀌어져 왔다는 사실...(57)

 

이런 것이 변방을 찾는 의미다.

상원사 표지석을 쓰면서 '分과 析이 아닌 圓融이 세계의 본모습'임을 생각하며 한 돌에 쓴다. 좋은 말이다.

상원사 동종을 치는 구절도 일품이다.

 

엄청난 충격이 전신을 강타했다.

단정하고 겸손한 모습과 달리 종소리는 높은 파도가 되어 온몸을 덮쳤다.

깨달음이란 우선 이처럼 자신이 깨뜨려지는 충격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옳다.

종소리는 나를 깨뜨리고 멀리 오대산 전체를 품에 안았다.

나는 나를 남겨 두고 종소리를 따라가고 있었다.

오대산 1만 문수보살의 조용한 기립이 감은 눈에 보이는 듯하다.

종소리는 긴 여운을 이끌고 가다가 이윽고 정적이다.

소리가 없는 것을 靜이라 하고 움직임이 없는 것을 寂이라 한다.

1만 문수보살은 다시 산천으로 돌아가고 세상은 적멸이다.(100)

 

이 책을 쓴 이유는 이것이다.

 

중심부에 대한 환상과 콤플렉스가 청산되지 않는한 변방은 결코 새로운 창조 공간이 될 수 없다.

중심부보다 더욱 완고한 아류로 낙후하게 될 뿐이다.

 

신영복 선생이 더욱 건강하여 변방의 축성에 많은 돌을 놓아 주시기를 바란다.

 

 

 

이 책을 읽으며 새로 느낀 말 : 순애보(殉愛譜) 따라 죽는 사랑의 기록... 난 대략 순정한 사랑(純愛譜)으로 생각했는데,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사랑을 위해 목숨거는 일을 일컫는다. 한자에 따라 뜻이 달라진다.

 

41쪽. 미황사의 금강스님... 도서관 글씨를 부탁한 장본인이다.... 장본인...은 사고친 넘을 일컬을 때 쓰는 말이다. 좋은 의도일 땐 '주인공'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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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rk182s 2012-06-13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왕,, 신교수님 책이 나왔군요,,

글샘 2012-06-14 10:47   좋아요 0 | URL
꼭지가 오래 진행이 못돼서 책이 얇은 아쉬움은 있지만, 내용은 알찹니다.
명불허전이에요.
 
원더보이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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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이 책을 읽으면서 작가의 롤모델은, 이외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외수는 젊어서부터 판타지 소설을 써 왔다.

요즘엔 블로그질 이후로 격언 비스름한 것들을 시처럼 휘갈겨서,

젊은이들의 감성을 자극한다.

 

이외수의 책 <아불류 시불류>에서 몇 마디 건져왔다.

내가 흐르지 않으면, 시간도 흐르지 않는다...는 제목이다.

 

이것 봐. 방금 니가 씨팔이라고 말하는 순간, 별 하나가 깨져서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니까.

 

지구에도, 우주에도 봄여름가을겨울이 있다.

물론 사람들 인생에도. 하지만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인생 전체가 봄이기를 바라기 때문에 불행해진다.

 

길가다 옷자락만 스쳐도 인연이라지요. 밤새우며 글자락을 스치면 얼마나 큰 인연일까요.

 

"사랑이 현재진행형일 때는 서로가 상대에게 애인으로 존재하게 되지만, 과거완료형일 때는 서로가 상대에게 죄인으로 존재하게 된다. 하지만 어쩌랴. 죄인이 되는 것이 겁나서 이 흐린 세상을 사랑도 없이 살아갈 수는 없지 않은가"

 

이 책은 <후일담 판타지 힐링 추억담 소설>로 분류할 수 있다.

 

무엇보다 1970년대 흑백 텔레비전의 추억에서 가장 인기있었던,

변웅전 아나운서와 묘기 대행진,

그리고 그 당시 유행했던 세계를 구하는 미국 인물들,

육백만불과 원더우먼을 본딴 제목 자체가 그 당시의 추억을 회상해 주시길 요구한다.

요즘 원더걸스의 만두를 생각하는 아이들에겐 회상자체가 무리일 수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의 주된 독자는 40대 이상 공감, 일 것이다.

 

80년대 전두환의 폭압의 시대, 그 자식은 아직도 육사를 방문하여 사열을 받는 등,

활기등등하게 제 팔자를 누리고 있지만, 아무리 박정희의 망령이 되살아나는 시절이라지만,

죽일놈이 그 꼴깝을 떠는 걸 보면, 참 세상 돌아가는 꼴은 한심하다.

열받아야 마땅한데, 뭐, 그런 새끼도 공이 수십 개 붙은 인종 중의 하나였다고 생각하면,

사는 거 정말 빌 공 자 아닌가?

 

난 김연수가 좀더 용감했기를 바라면서 이 소설을 펼쳤다.

<원더 우먼>은 1970년대 그 쬐끄만 인간들에게 베트남에서 쪽팔리게 지고 돌아와,

정신 병자가 되어버린 <람보>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서 탄생한 캐릭터다. <슈퍼맨>, <6백만불>과 마찬가지다.

그렇게 폭격을 했고, 무지막지한 여론의 반대에 부닥치면서 병신이 된 나라의 이미지를 <정의>로 치장하려고 한 거다.

 

이왕 <원더 보이>를 창조했다면 말이다.

강풀의 26년처럼 용감한 김연수를 나는 바랄 정도는 아니지만 말이다.

적어도... <원더 보이>가 21세기의 내 마음에 작은 별빛 하나 남겨 줬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21세기 한국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힐링>이고 <위안>이다.

물론 이 소설이 추구하는 바에 그것이 들어가 있기는 하나... 미약하다.

두렵고도 치떨리는 단어, '분신'을 그렇게 들이대지 말았으면 좋았을 걸 그랬다.

김연수가 '분신'의 현장을 그리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마물릴 거였으면, 분신이란 말은 꺼내지 말았으면 좋았을 거 같다. 무서웠다. 그 단어가 주는 함의는 광주나 제주도 4.3만큼 내겐 두려움이다.

 

인간은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린다.

 

이외수 형님이 할 법한 이야기 아닌가?

 

양자론의 세계와 반만 죽고 반은 살아있는 고양이...

김연수, 머리 좀 더 길러 보면... 고양이를 살릴지, 죽일지... 한방 맞을지... 어쩔지...

 

아빠는 그곳의 밤은 천 개의 눈을 가진 짐승처럼 아름다우니 같이 구경가자고 말했다.

우리는 농가들 사이로 난 소로를 따라 걸었다.

벌판은 표백한 이불 홑청처럼 펼쳐져 있었다.

밀가루를 뒤집어써 화가 난 뚱보들처럼 서 있던 짚단들,

심연처럼 어두운, 얼어붙은 개울의 표면.

사방이 적설의 풍경이었음에도 그 밤이 내게 건기의 밤으로 기억된다.

하늘의 별빛과 땅의 눈빛이 서로 환했다.(116)

 

이런 서정적 문장이 김연수의 장점이다 .

그런 걸 좀 잘 살려서 쓸 수 있는 스토리가 필요하지 않을까?

이 스토리의 시대, 또는 소재가 김연수가 받아들이기엔 아직 과부하였단 느낌이 남는다.

이외수를 좀 더 읽든가.

 

이 인생에서 내가 할 일은? 그건 더욱 내가 되는 일.

 

아름다움은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구나,

그 구절을 읽고 나는 죽을 때까지 부끄러움을 아는 인간이 되기로 결심했지.

 

좀더 이외수스럽게 되려면 말이다.

자기 말로 떠벌여야 한다. 토마스 만 같은 애를 들고 들어오면, 소설에서 반칙 아닌가?

시나 노래에서 '아~!' 이렇게 감탄사를 작가가 직접 삽입하듯이, 일종의 폭력 아닐까?

 

이해란 누군가를 대신해서 그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

그리고 그 이야기를 통해서 다시 그들을 사랑하는 일이야.

 

또 이외수. ^^

그래. 나는 소설을 읽고 '세상에 나처럼 비루하게 사는 인간도 많구나~' 이런 이해를 받고 싶은 거야.

그래서, 나 대신 그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이야깃 속 그들을 사랑하게 되고,

이야기를 벗어나서 그 시대의 나와 지금의 나까지 사랑하게 되길 바란다구.

근데, 왜, 소설가가 이외수처럼 날것으로 저런 이야길 늘어 놓냐구~.

 

누군가의 슬픔 때문에 내가 운다면, 그건 내가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라는 걸...

 

깜짝 놀라서 울어준 사람, 정말 고맙지.

나도 누군가를 슬퍼해서 울어주었거든. 그게 사랑이라네...

근데, 아무리 봐ㄷ... 자꾸 이외수가 떠오른다.

 

모든 고통은 공포보다 더 강해요.

그게 자신의 고통인 한에는.

하지만 아무리 엄청난 고통이라고 하더라도 나의 고통이 다른 사람에게 고스란히 전달되는 경우는 없어요.

그게 우리의 한계예요.

그 한계때문에 우리는 이런 국가를 가지게 된 거예요.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의 고통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면,

어떤 국가나 권력도 개인을 억압할 수 없었을 거예요.

타인의 고통을 공포보다 더 강하게 느껴야만 한다는 건 그런 뜻이에요.

지금과 다른 국가를 원한다면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자기 것으로 여겨야만 해요.

 

등장 인물들의 관계가 명징하지 못하고, 형상화에 뚜렷하게 성공하지 못했을 때,

작가가 맘이 성급하여 튀어나오는 목소리가, 제 목소리다.

작가는 특정 인물의 언어로 이야기해야 하는데, 많은 후일담 소설들이 실패한 이유가 그거다.

작가가 제 목소리를 들려주는 것. 그런 소설은 독자를 불편하게 한다 .

불편한 소설은 독자를 깨어나게 하지 못하고, 움츠리게 만들 뿐이다.

 

우리 몸의 지방 덩어리만 혈관을 막아서 핏줄이 터지게 하는 건 아니다.

작가의 욕심도 이야기의 흐름을 방해하여 엉뚱한 데서 터지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더라면...(이건 류시화 비슷하다. ㅋ)

 

난 소설에 무슨 '수첩' 나오는 거 싫어한다.

소설에는 '인물'들이 좀 단순하게 나오고, '사건'으로 엮이며, 시대적 공간적 배경과 잘 녹아있어야 한다.

조정래, 박경리의 글들이 8시 연속극처럼 인물에 빠져들게 만드는 요소가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무지랭이들이지만, 그 무지한 대화들, 행동들 속에서 공간적, 역사적 배경이 잔뜩 묻어난다.

그래서, 김연수가 좀더 무르익기를... 그리고, 욕심을 다이어트 하기를 욕심내는 것이다.

이외수를 들이댄 것도 그래서다. 그가 싫어서가 아니다. 왜 내가 그를 싫어하겠는가...

 

우리의 밤이 어두운 까닭은

우리의 우주가 아직은 젊고 여전히 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다른 사람의 몸이 그토록 뜨겁게 느껴질 수가 있을까.

그건 어쩌면 그때 우리가 아직은 젊고 여전히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지도.

 

이런 막연한 후일담과 희망을 주는 일은 의미가 커 보이지 않는다.

 

이제 우리가 살아갈 세상은 완전히 다를 거라고,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고,

만약 누군가 그런 짓을 하려고 든다면,

우리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고,

뭐라도 할 것이라고,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

우린 혼자가 아니라고...

 

이 부분을 읽으면서 쓴웃음이 슬슬 난다.

과연 세상은 달라졌는가?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 같은가?

가만히 있지 않고 뭔가 할 것인가?

과연 우린 혼자가 아닌가?

 

소설에서 이런 말 나오면, 그건 실패의 증거 아닐까?

 

그러므로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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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6-10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맞아. 김연수에겐 과분한, 감당하기 어려운 주제가 아니었나 생각이 들어요.
마침 어제 한국소설에 대해 생각하면서 읽다 접은 '원더보이'를 떠올렸었는데, 좋네요 ㅎㅎㅎ

글샘 2012-06-14 11:44   좋아요 0 | URL
ㅋ 읽다 접었어? 아직 이런 소설 읽을 나이가 아닐 텐데...
청소년 소설 좋은 거 많아. 그런거도 읽어 보길...
 
명탐정의 아들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63
최상희 지음 / 비룡소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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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한 학생이 자살했다.

유서로 보이는 글에서 괴롭힌 학생을 지목했고, 그 학생은 병원에 입원했다.

여기까지는 '사실'이다.

 

그 진실을 밝히는 일도 중요하다.

아이를 죽음에 이르게까지 괴롭힌 사람이 있다면, 그 나이를 불문하고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진실을 밝히기에 앞서,

청소년 자살 문제에 대하여 지나치게 '선정적' 프레임을 들이대고 있다는 느낌을 사건이 있을 때마다 받는다.

 

선정적... 부채 선, 뜻 정... 감정이 일어나도록 부채질하는 일이다.

작금의 학교 폭력에 대한 과잉 관심은, 작년 12월 한미 FTA 반대 여론을 잠재우고자,

조중동에서 마련한 정책적 프레임이었다.

마치 전 국가적 차원에서 어떤 대책을 마련할 것처럼 날이면 날마다 조중동 1면에서, 9시 뉴스 헤드라인으로 씨부렸지만,

그자들이 한 거라곤... 각 교육청에 '학교폭력과'를 만들어서 장학사를 배치해서,

공문이 졸라 많아진 것 외엔... 아, 보고 공문이 무지무지 많아진 것 외엔... 별로 없다.

 

학생들은 자살한다.

물론 한국 학생들의 자살률이 뭐, 세계 1위란다. (1위 무지 좋아하는 나라면서? 저출산 1위, 고령화 1위, 교통사고 1위 ㅎㅎㅎ)

근데, 학생들을 죽음으로 모는 <사회의 프레임>에는 카메라를 들이대지 않는다.

학교 폭력이 일어나면, 그 원인을 묻지 않고 가해자를 처벌하려고만 한다.

사회가 문제고 학교가 문제인데, 가해자만 문제란다. 이런 젠장~

 

조금 핀트는 다르지만, 얼마 전 김연아의 교생 실습은 '쇼'라고 실언한 교수가 있었다.

솔직히 교생 실습은 한다손 치더라도, 김연아가 체육교육과 4년의 커리큘럼을 이수해서 졸업하는 건 아니잖은가?

한국의 엘리트 체육의 문제는 비껴가면서, 그 교수의 실언 한 마디만 문제인 것처럼 몰아붙인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조차도 생활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판국에 말이다.

김연아는 개인이 아닌, 개인 기업 수준의 부를 획득했다.

그 말고, 그늘에서 시들어가는 '엘리트 학생 선수'들의 삶을 돌아볼 기회를 갖지 못하는 멍청한 사회, 불쌍하다.

 

이 소설은 무지 재미있다.

엄마는 해외로 간다. 무슨 봉사 기구에서 일하는데, 암튼 사라진다.

아빠는 전세를 빼서 탐정 사무소를 차린다. 헐~

근데, 그 사무소에서 하는 일은 주로 고양이 잡기다. 코믹 설정.

 

문제는 이쁜 여학생이 사건을 접수한다.

여동생의 물건 하나를 찾아달라는 사건.

그런데 며칠 후 여동생의 자살 사건이 발생한다.

 

이 소설의 장점은, <선정적 프레임>을 들이대지 않는 데 있다.

아이의 죽음을 둘러싼 가해자의 색출과 가해자 처벌이 중요하지 않다.

일단 아이의 죽음이 발생했다면, 그 아이의 죽음에 모두들 '애도'를 표할 수 있어야 한다.

타살이라면 진실을 밝히는 일이 가장 우선이지만,

단순 사고사 내지 자살이라면 죽음을 둘러싼 애도를 통하여 주변 사람들도 충분히 치유의 기회를 가질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이 소설에서도, 실제 사회에서도...

학교에서 아이가 죽으면 학교는 공황 상태에 빠진다.

애도와 치유보다 <선정적 프레임>의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급급할 따름이다.

 

죽은 아이의 급우, 조금 터프하게 생긴 플룻부는 여학생, 유가련(이름만 가련)의 입을 빌려 작가는 하고 싶은 얘길 한다.

 

"5W1H.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그런데 뉴스를 보면 '왜'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아.

'왜'만 빼고 보도하는 건, 기자 아니더라도 그 자리에서 구경한 사람이면 다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꼭 필요한 것을 뺀 뉴스가 무슨 뉴스냐?

우 달려들어서 실컷 떠들어댈 뿐이야.

그러다 싫증 나면 금방 잊고 잠잠해지겠지. 웃기지 않냐?"

 

한국에 뭐 언론이 제대로 있길 하냐고 묻는다면, 하긴 그렇다... 할 수 있지만,

그 프레임의 문제를 직시하는 소설은 드물다.

 

소설의 주인공인 탐정의 아들 역시 초딩 시절 곤란을 겪었다.

 

놈은 내게 중요한 것이 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았다.

친구들과 함께 놀고, 급식을 같이 먹고, 시시껄렁한 농담을 하는 시간을 내게서 빼앗아 간 것이다.

그 시시한 시간이야말로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사실 학교는 그 시답잖은 시간을 위해 가는 것 아닌가?

 

내가 모든 것을 털어놓았을 때 몽키는 딱 한 마디 했다. 웃기시네~

어설픈 복수극을 연출하거나 서투른 증오심을 불태우는 일 없이 나는 몽키와 같이 학교를 가고,

따로 수업 시간을 견디고, 같이 집으로 돌아와 만화책을 들여다보며 낄낄거렸다.

몽키의 깜짝 놀랄 만큼 무심한 태도가 내게는 가장 큰 위안이 되었다.

몽키만은 나를 믿어 줬다고 말해도 될 것이다.

 

하지만 그 후로도 나는 종종 꿈을 꾼다.

꿈속에서 나는 늘 어두운 교실에 홀로 앉아 있다.

 

다시 김연아...

엘리트 학생 선수들이 잃어버리는 시간이 바로 저거다.

시답잖은 시간을 위해 가는 학교... 오로지 대회만을 위해 달리는 그들은 체육 기계 이외의 학생은 전혀 아닌 것이다.

피해자에게도 충분히 위안이 될 수 있는 글이다.

그리고 학교와 아이들에게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할 필요를 느끼게 하는 글이다.

 

가해자의 의식 역시 명료하게 제시된다. 섬뜩하다.

 

"그게 즐거웠던 거니"

"왜? 안돼? 그런 애는 수도 없이 생겨날 거야.

밟히지 않기 위해서는 먼저 밟아야 하는 걸 애들은 알거든."

"왜 꼭 누군가를 짓밟아야 하는 거지?"

"몰라. 하지만 우리 그렇게 배우지 않았니?

살아남으려면 약한 것들을 밟고 올라서야 한다고.

그게 살아남는 방법이잖아.

그렇게 가르쳐주고 이제 와서 잘못했다는 건 너무하잖아.

우린 배운 대로 했을 뿐이야."

 

그래, 분명 어른들의 잘못, 사회의 잘못도 크다.

다시 피해자 의식으로 들어가 보자.

 

내게 초등학교 6학년 2학기는 검은색이다.

지워버리고 싶어 덧칠하고 또 덧칠했다.

누군가 기억한다면 그놈의 머릿속도 지워버리고 싶다.

아마도 다들 잊었을 것이다.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사소한 일이니까.

기억하는 건 잊으려고 애쓰는 사람들 뿐이다.

 

하지만 나는 죽을 힘을 다해 견뎠다.

그놈에게는 사소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잊지 못한다.

빠져나왔다고 생각하지만 늘 어두운 터널 속으로 되돌아가고 만다.

기억하는 건 상처입은 사람들뿐인지도 모른다.

 

만약 사망한 당사자 오유리의 일기 같은 걸로 이야기를 풀었더라면,

눈물이나 찔찔 짜는 신파가 되어,

또 역시 엉뚱한 프레임에 갇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작가는 오유리의 죽음에는 덧칠하지 않는 기법으로 건너간다.

오유리가 언니에게 보낸 편지는 오히려 가벼워 다행이다.

주인공 아이의 독백을 통해, 학교 폭력의 해결책도 제시된다.

문제는 '자신'인 셈.

 

언제까지나 지속되리라 생각했던 어둡고 긴 터널을 벗어나는 건 아무래도 나한테 달린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금쯤은 내 생각이 틀렸을지도 모른다.

터널 끝에 손톱만 한 빛이라도 비쳐야만 그 빛을 따라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내게는 병아리 발톱을 끔찍이도 무서워하는 얼간이가 하나 있다.

어쩌면 듬직한 등짝을 지닌 녀석도 손을 내밀어 줄지 모른다.

아빠 명탐정도 내가 어두운 터널 속에서 서성인다면 아마도 그들은 내 엉덩이를 차서 터널 밖으로 날려 버릴 것이다.

그 정도라면, 나쁘지 않다.

 

해결책의 핵은 '자신'이고, 그 부차적 '빛'으로는 가족과 친구가 필요하다.

가족을 해체하는 한국 사회.

맞벌이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경제적 부담,

과중한 업무로 인한 늦은 퇴근...

사회가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하고,

언제까지나 피해자와 가해자 학생에게만 잘잘못을 묻는 일은,

결국 국가라는 이름으로 저지르는 <책임 회피>에 다름없다.

 

이 소설은,

피해 학생, 가해 학생 모두에게 읽힐 만한 책이다.

마침 학교 폭력에 관심이 많은 시즌이니,

교육청에 널리 알려서, 초등학교 고학년~ 고등학생 정도라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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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 굉장히 싸게 팔대?... ~하더라 의미일 때, 팔더라... 니깐, '팔데'가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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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나무 2012-06-10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 역시 글샘 짱!!!

글샘 2012-06-10 16:55   좋아요 0 | URL
공감에 감사를 표합니다. ^^
소설이 좋아요. ㅎㅎ

2012-06-12 0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12 07: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12 09: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12 09:4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