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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 워치 - 상 ㅣ 밀리언셀러 클럽 26
세르게이 루키야넨코 지음, 이수연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10월
평점 :
절판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현실 그대로의 모스크바 이면에 '다른 존재들'의 싸움과 '어스름의 세계'가 있다. '다른 존재'란 겉보기엔 평범한 인간이지만 타인의 정신을 조작하고 이차원을 넘나드는 등 여러 가지 특별한 마법력을 지닌 이들로서, 일단 자신을 인식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빛과 어둠 사이에서 선택을 내려 한쪽 편에 들어야만 한다. 빛의 마법사는 오로지 보통 사람들과 세계를 위해 일할 뿐 자신을 위해 능력을 사용할 수 없다. 반대로 어둠의 마법사는 자신의 이익과 쾌락이라는 이기적인 동기를 좇는다.
빛과 어둠의 존재들은 유사 이래 장구한 투쟁을 계속해 왔지만, 결국 공멸을 피하기 위해 '대협약'을 체결하여 서로 상대방을 감시하게 되었다. 빛의 세력이 창설한 '나이트 워치(야간 경비대)'는 어둠을 감시하여 규칙을 위반한 흡혈귀나 변신 괴물, 악한 마법사들을 처단한다. 어둠의 편인 '데이 워치(주간 경비대)'는 거꾸로 낮 동안에 빛의 존재들이 약속을 어기고 지나친 선행을 하지는 않는지 감시한다. 이 두 경비대가 제몫을 다하는 동안에는 선과 악이 균형을 이루고 대립하지만, 자칫 균형이 어그러지면 러시아 혁명이나 제2차 세계 대전 같은 커다란 환란이 벌어진다.
이와 같은 설정 위에 야간 경비대 대원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소설 <나이트 워치>는 3부로 구성되어 각각 중심 에피소드를 가지고 이야기를 펼쳐 나가는데, 전편의 복선이 다음 편에서 꽃피는 복잡한 구조를 보여 준다.(알라딘 책 소개)
작가가 1968년 생이고, 이 작품이 1998년생이니, 30세이 젊은 나이에 쓴 판타지 소설이다.
판타지 소설의 성공은, 독자에게 <새로운 세계의 창조>를 납득시키느냐 못하느냐에 달렸다.
이 작가가 작품을 발표할 당시인 1990년대, 세계는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 당시 가장 인기가 있었던 책이라면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의 정책 브레인이라던 앤서니 기든스의 <제3의 길>이었다.
현실 사회주의의 혼란과 붕괴,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탐욕과 세계화, 이 둘을 모두 부정하고 공생의 길로 나아가자는 것이 상대적 약소국 영국의 제안이었다.
정신적 자부심으로 가득하였을 소비에트 국가에서 살아오면서
'현실에 대한 리얼리즘의 승리'란 예술 정신을 배워왔을 작가에게 세계의 변화는 복잡한 심사를 안겨 주었을 것이다.
그에게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기회를 주었을 때,
그는 부딪치는 두 세력과, 또 하나의 세계... 아직 열리지 않은 세계이지만,
그래서 제대로 보이지 않는 어스름 속에 잠긴 세계이지만,
그러므로 더욱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세계... <더스크> 속에 대한 궁금증을 만들어 냈다.
소설은 황당하게 시작해서 제법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나이트 워치>를 '야간 경비대'로 번역한다든지... 하는 어색함이 계속 거슬리긴 하지만,
(경비대는 아파트 야간 경비를 떠올리게 하여 좀 전문성이 떨어져 보인다.
파수대라든가, 수색대같은 좀 군사학 용어 같은 걸 연구했으면 좋을 뻔 했다.
'다른 존재'는 이 소설에서 중요한 개념인데... 좀 그럴싸한 용어로 번역해 주었다면 맛깔스러웠을 거란 생각이다.
'제3의 존재'라거나... 암튼, '다른'은 너무 일반적으로 쓰는 용어라서 구별이 잘 안 간다.)
나이트 워치는 <빛의 존재>이다.
우리 목표는 암흑 세력을 박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목표는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다.
암흑의 세력은 인간들이 자기 속의 악을 이겨냈을 때에만 사라진다.
또는 인간들에게 빛보다 어둠이 더 좋다면, 그때는 우리가 사라지는 것이다.(상 80)
인간들이 자본의 환락을 선택하면 사라지는 공산주의처럼? 씁쓸함이 입안을 감도는 소설이다.
커피처럼...? 아니 담배맛처럼... ㅠㅜ
어스름이라는 영혼계는 옛날 영화다.
인류가 무사태평하게 잊어버린 아주아주 오랜 옛날 영화.
잊은 채 사는 것이 더 편하기 때문이다.(81)
주인공 안톤이 마법사 올가에게 주는 신뢰는 매우 강하다.
"믿어, 지금 이 순간부터. 그리고 영원히 믿을게."(101)
이런 신뢰를 가질 수 있다면, 어떤 판타지 속이든 헤치고 다닐 용기가 나겠다.
그러나 세상은 믿음을 저버리고, 불신이 승리한다.
"모든 영화 속에선 착한 이가 나쁜 놈들을 이기지.
얘야, 미신이란 위험한 거란다. 그런 것들은 거짓 희망을 불러일으키거든."(143)
붕괴된 모스크바 사회주의... 그 어둠을 바라보는 빛의 시선은 안타깝다.
곳곳에 텔레비전을 켜놓은 것이다. 이것은 이미 습관처럼 되어버렸다.
왠지 끔찍스럽고 초조할 때면 텔레비전을 켜놓고 홈쇼핑에서 뉴스에 이르기까지 닥치는대로 아무거나 시청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어스름의 세계를 보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의 접근을 느낄 수는 있다.(187)
검은 기둥을 찾아 싸우다 스베틀라나를 만난다.
나는 그녀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폐쇄적이고 콤플렉스 강한 책벌레 같은 어린 아이,
그녀를 찾고 있으면 반드시 찾아내고야 말 멋진 왕자님에 대한 아이같은 믿음과 우스꽝스러운 이상과 꿈을 가득 안고 있는 그런 아이같은 사람이었다.(197)
스베따에 관한 묘사를 통해, 작가가 추구하는 이상형이 얼핏 보이는 것도 재미있다.
스베따에게 새로운 운명이 찾아왔을 때, 안톤은 '두 세계의 자유'에 대해 말해 준다.
평행 세계와 또 하나의 세계... 3부작이 기대되는 대목이다.
"그래, 자유에 대해서지. 그들은 모든 이가 삶에서 받을 자격이 있는 자리를 차지하는 거라고 말해.
모든 동정심은 모멸적이며, 진정한 사랑은 눈먼 것이며, 진짜 선량함은 무력하며, 참된 자유는 모든 면에서의 자유라고 말하지."
"그건 거짓이지?"
"아니, 그 또한 진실의 일부야. 스베타, 우리는 절대적 진리를 고르지 못해.
진리란 항상 두 얼굴을 갖고 있는 거야.
우리가 지닌 진리란 더 불쾌한 거짓을 거부할 궈니야.
우리는 힘을 얻기 위해 그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에 대한 입장료로서 우리가 받아들이기를 원치 않는 진실의 일부를 거부하는 것이다. 인간들은 선택의 문제에 놓이지 않아. 그들은 선량한 자도, 악한 자도 될 수 있어.
그런데 우리는 선택을 한 거야."(352)
평행세계는 두 세계가 모두 긍정된다.
선택의 문제이지, 진리의 문제는 아니다. 그 시절에 러시아에서 이런 문학이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은 시대의 힘이다.
세상에는 많은 우연들이 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예정이라는 것 또한 있는 것이다.(하, 57)
판타지를 납득하게하는 힘이 <새로운 세계의 설득력>이라면,
판타지의 설득력이라면 <세계관에 대한 수긍>일 수도 있다.
해리포터 류의 <악에 대한 선의 승리>는 단순한 수긍에 대한 압박이지만,
이 소설의 흥미는 평행 세계에 대한 오픈된 마인드가 힘일 수 있다.
물론, 절대적으로 수세에 몰린 사회주의 국가에서 나온 작품이어서 안쓰러운 마음 감출 수 없지만...
스스로의 현실적 기반이 미약함을 느끼는 작가는 <암흑의 주술사>의 목소리를 빌려 말한다.
"당신들이 이중 게임이네, 간계네, 교사 행위네 하며 늘일삼는 어둠에 대한 비난들은 전부 한 가지 목표를 지니고 있지.
자신의 자생 능력 결핍을 애써 숨기고자 함이지.
세계와 세계의 법칙에 대한 몰이해.
그리고 종국에 와서는 인간에 대한 몰이해일 뿐이야.
어둠 측의 예상이 훨씬 더 정확하다는 걸 그저 인정하기만 하면 되는 거야.
인간 영혼의 자연스러운 욕망 추구는 결국에는 우리 편으로 그 영혼을 끌어들이는 게 되는 거라고 인정을 해야지.
그렇다면 너희가 말하는 도덕성은 어떻게 될까?
너희네 삶의 철학은 어쩌느냐 말이야?(106)
그래. 인간은 그 <욕망 추구>의 늪에서 벗어날 수 없단 말인가?
그러나, 세계가 강제로 인간을 제어하는 것보다는 인간의 힘을 믿어 보아야 한다.
빛이나 어둠의 편으로 인간들을 몰아 넣기란 너무나 쉽다.
하지만 그들 스스로 행동할 때에만 가장 행복할 것이다.(109)
두 세계의 어느 하나에서 살 수밖에 없다면... 스스로 행동할 자유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15년 전에, 러시아의 한 청년이 이런 생각을 했다면, 박수를 쳐 줄만 하다.
그러나, 현실에서 자유는 세계의 압박을 받게 마련.
그들 어둠의 세력들은 자유라고 말하기를 얼마나 좋아하는가.
우리는 얼마나 자주 스스로에게 자유에는 경계가 있다고 설명하는가.
이 모든 게 아마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리라.
그저 사람들 가운데 살며 그들의 가능성을 앞지르지만
추구하는 바에 있어서는 인간들과 전혀 차이가 없는 우리, (122)
자본주의 세계에서 말하는 '자유'는 몰락에이 길이기도 하다.
공산주의 사회에서 자유에도 경계가 필요하다고 설명하는 제약.
평행세계에서 절대악도, 그 반대도 없다.
다만... 모든 게 절대적으로 옳을 뿐...
안톤의 좌절스런 독백은 그 세상에서 공허하다.
"언제나 현실에는 두 갈래 길이 존재하지.
미래는 결정된 게 아니야. 네 녀석은 이걸 알고 있다. 그리고 나 또한 알고 있지."(124)
그는 혼란에 대하여 '빛의 마법사'에게 호소한다. 빛의 길은 고통의 길이라고...
물의 요정에 관한 옛날 이야기 기억하나?
마녀가 그녀에게 다리를 주었지.
그리고 그녀가 걸음을 걷는데 그녀 발바닥에는 마치 불에 달군 칼이 꽂혀 있는듯 고통스러웠지.
이건 우리이 처지를 말하는 거야. 우리는 항상 칼날이 서 있는 길을 따라 걷고 있어.
그리고 이 고통에는 익숙해질 수가 없지.
안데르센은 단지 모든 것을 끝까지 말해주지 않았을 뿐.(147)
한국산 컵라면과 처용의 그림 등이 등장하는 것도 세계화의 한 그림자였을 것이다.
그 속에서 '보통 사람들'은 별 생각없이 세계의 변화를 받아들임에 좌절한다.
"우리는 그들을 보호하고 있다고, 온 정정을 다해 끊임없이.
그런데 왜 그들이 더 나아지지가 않느냐 말이야? 과연 그들 스스로가 어둠의 업을 행해서일까?
왜 그렇지? 우리가 무언가를 상실한 것은 아닐까?
빛의 마법사들이 군대를 죽음의 전장으로 파견하면서 스스로 최전방에서서 나가던 그 예전의 믿음을 상실해서가 아니냐고?
보호하는 것 뿐만 아니라 기뻐하는 능력까지도 잃은 게 아닐까?
만약 감옥의 벽이라면 이 단단한 보호막이 되는 벽이 다 무슨 소용이야?
사람들은 진짜 마법에 대해 다 잊었어. 사람들은 어둠도 믿지 않아. 그리고 빛도 믿지 않는다고.
우리는 병사들이지, 그래, 하지만 전쟁이 날 때에만 군대를 좋아하는 거잖아." (198)
스베타의 진지한 고뇌와 질문에 대한 안톤의 답은 시니컬하다 못해 미약하다.
"우리는 악을 바랄지도 모르지. 다만 우리의 선은 때때로 악과 전혀 다르지 않을 때가 있어."(208)
이에 대한 스베타의 생각은 현실에 더 가깝다.
어둠은 불평등 속에서 끊임없이 경쟁하는 상태를 쉽게 극복해.(265)
한 세계에 대한 다른 한세계의 절대적 우위 내지는 승리가 판타지의 단순성이라면,
이 소설은 여러 세계, 특히 겹쳐지지 않으면서 대립하는 평행 세계에 대하여 이중적 사고를 진행하는 것이 독법의 묘미다.
왜 이런 식으로 되어가는 것일까?
왜 우리의 진실은 무력하며 우리의 것짓은 효력을 발휘하는가?
왜 어둠은 악을 창조하기 위해 진실만을 사용해서도 훌륭히 일을 해결하는가?
악은 누구의 본성인가?
인간의 본성인가, 우리의 본성인가?(288)
과연 이 소설이 어떤 과정을 통해 제3의 길로 접어들 것인지...
자못 궁금하고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