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내 몸에 가시 ㅣ 문학세계 현대시인선(시선집) 172
한정옥 지음 / 문학세계사 / 2000년 9월
평점 :
인간은 참 보잘것없다.
생명도 짧고, 흐느적거리는 것이 힘도 없다.
그런데 나무를 보면 인간과 대조적으로 탄탄하고 든든하다.
복효근의 '고목'을 읽어보면,
늙어가는 고목에 생긴 구멍조차도 매력적이다.
오동은 고목이 되어갈수록
제 중심에 구멍을 기른다
오동뿐이랴 느티나무가 그렇고 대나무가 그렇다
잘 마른 텅 빈 육신의 나무는
바람을 제 구멍에 연주한다
어느 누구의 삶인들 아니랴
수많은 구멍으로 빚어진 삶의 빈 고목에
어느날
지나는 바람 한 줄기에서 거문고 소리 들리나니
거문고 소리가 아닌들 또 어떠랴
고뇌의 피리새라도 한 마리 세 들어 새끼칠 수 있다면
텅 빈 누구의 삶인들 향기롭지 않으랴
바람은 쉼없이 상처를 후비고 백금칼날처럼
햇볕 뜨거워 이승의 한낮은
육탈하기 좋은 때
잘 마른 구멍하나 가꾸고 싶다(복효근, 고목)
한정옥의 이번 시집은 모든 시에 '나무'란 부제를 붙였다.
나무의 속성에서 일궈낸 관조의 밭은 구성지고 풍성하다.
비록 그의 말밭에서 갈퀴로 걸러지는 것들은
아프고, 저리고, 소스라치게 찌르는 감각들이지만,
그 감각이 전이되어버린 '마음의 조응'은
짜릿한 쾌감에 가까운 깨달음을 느끼게 한다.
아픔도 잘만 다스리면,
통증만은 아닌
희열에 가까운 감격에 다가설 수도 있을 것 같단 착각을 하게 하는 시들...
그리움이 깊으면 애 마르고
생각이 깊으면 사무쳐서
배롱나무에까지 불이 붙었다(격렬함에 대하여)
그립다 하기 전에 마음 먼저 떨리어
언제 한번 슬픔 만만했던가
맺힐 때 보석이요 흐를 땐 이미 슬픔이어서
논바닥 쩍쩍 갈라져도 소리내어 울지 못했다(옹이 박힌 슬픔)
그리움으로 가득한 마음
부질없을 수도 있지만,
그 마음을 가진 이에겐 그만큼 간절한 것도 없다.
애마르고, 마음 떨림... 소리내어 울지도 못하는 '옹이 박힌 슬픔'
시인이 이 시집을 낼 때, 딱 내 나이 무렵이었다.
가슴 시림을 느낄 수 있겠다.
부질없어도 좋을 영화의 끝장면은 아름답고
아름다워야 할 인생의 끝장면은 엄숙하다(황소바람)
슬픔은 욕망한테 얻어맞아 생긴 혹이고
눈물은 사랑 끝에 가 앉다 찔린 피이고
나는 왜 이리 부딪칠까
조금만 추우면 벌벌 떨고
내버려두면 풀썩 주저앉고
나는 왜 자연스럽지 못할까
눈빛 하나에 문득 행복해지고 순간 쓸쓸하고
이 바늘끝 같은 신경
쭈그리고 앉아 송판 쪼개 때며
타다닥탁 격렬한 부딪침 끝에 재가 되는
마음을 오래오래 바라보고 앉아 있습니다 (재가 되는 마음)
나이는 먹는 게 아니라 치른다는데
마냥 더디고 퍼지어
싸리비로 쓸어대도 迹이 앉을 근심(보이네 시그리)
* 시그리 : 시거리의 사투리, '바닷물이 번쩍거리는 현상'을 가리키는 강원도 사투리
무슨 격언 만들듯, 대구가 두드러진 구절들이 많다.
그 속에서 영화와 인생이 보이는데,
환상 속의 영화 이야기는 해피엔딩인 반면, 실존의 인생사는 왜 그리 힘든 겐지...
욕망에 얻어 터지고, 사랑에 찔리는 인생사...
그 바늘끝 같은 신경으로...
마음이 격렬함 끝에 재가 되는 것을 바라보고 있단다.
나이를 그저 먹는 게 아니라,
아프게 홍역 치르듯,
인생이란 대상을, 사랑이란 사람을, 치러내는 것이라는데...
그 깨달음이 재바르게 다가서지 못하고,
마냥 더디고 퍼지어
빗자루로 쓸어대더라도 흔적이 앉을 듯한 마음 속.
시그리...란 말이 참 이쁘다.
한정옥의 시를 읽노라면,
외할머니네 툇마루를 닦고 닦아 거울처럼 반지르르한 윤기가 흐르듯,
걸레로 매일 단정하게 닦아낸 마루같은 느낌을 얻게 된다.
그 나무의 건조함에 얹힌 식물성,
그러나 사람의 손때가 그 식물성에 조미한 동물성에 가까운 윤기.
그래서 그의 '나무들'에는 식물성 위로 삶에서 번져나온 '윤기'가 번들거리며 비치어 있는 것이다.
나이듦은 몸도 마음도 자꾸 결리는 경험을 하게 되는 일...
몸이 아플 땐 약으로 다스리지만
마음이 결릴 땐 옴짝도 못한다
자주 깨니 꿈길도 토막
혓바닥에 눈물이 고였다
슬픔은 마음을 울리게 한다
어혈이 풀리는 듯
산이 울었다
산에 물이 빠지고 있었다
산은 말이 없지만
마음을 움직인다 (산이 울었다)
그럴 땐 산을 봐야 한다.
산에 오르고 산을 느껴야 한다.
산도 우니까...
말하지 않지만, 같이 마음을 움직이니까...
마음이 결릴 때, 산 같은 사람과 소줏잔이라도 기울이고 싶을 일이다.
뭐, 그렇다고 깨달음이란 게 객관적으로 존재하지도 않는 거다.
깨달아 여기까지 왔다면 하루가 쓸쓸하고
깨달음도 없이 살았다면 지난날 허전하다
사람들은 쓸쓸한 것을 참을 만큼 믿음이 없고
허전한 것을 드러낼 만큼 희망이 없다
깨달아 여기까지 왔다면 인생이 어리석고
깨달음도 없이 살았다면 하늘 같은 은혜일 뿐 (눈빛 풀린다는 것)
깨달아도, 깨달음 없어도... 쓸쓸하고 허전함은 같은 것.
믿음도 희망도 없는 존재는
어리석은 인생사,
그러나... 삶은 하늘 같은 은혜의 한 계단이라는 거...
기독교적인 세계관이 투영된 시도 많다.
숯이 탈 때 불꽃 튀듯이
요즘 사람이 사랑을 해도 플로지스톤*이 빠져나올까
변화 속에 숨어서
변하지 않는
사랑은 정신없는 첫날밤이 아니라
잘 익은 단감 한 광주리
밤새 아우네 광주리로 옮겨 놓는 일
과일도 옛날 맛이 아니고
우애도 다 옛말인데
은하수에 쪽배 찾고 있으니
위험하다
사람들은 왜 쓸쓸할 때 정신이 날까
삭풍이 후려쳐야 정신 차릴까 (참나무)
* 플로지스톤 설 : 물질이 탈때 플로지스톤이라는 물질이 빠져나간다고 주장하는 것
사랑은 위험하다.
사랑도 타오를수록 그 질량이 가벼워지는가?
정신없는 첫날밤... 그 속에 사랑이 있지 않다.
사랑은 변화 속에 숨어서 변하지 않는 마음을 찾는 일...
쓸쓸해진 연후에야 사랑을 놓치고,
뺨이라도 한 방 후려쳐져야 정신을 차린다.
사랑은 어디 있어야 하는 것인지를...
나이들면서 지혜로워져야 한다.
사랑에 지치지 아니하고,
사람에 질리지 아니하고,
삶에 흔드리지 아니하고...
그런 지혜를 얻기 좋은 곳, 나무라는 듯
온몸으로 밀고 나가며 시를 쓴다.
지친다 하지 않고
물든다 이르시고
환한 빛 차오를 땐
밤을 생각하라던 말씀...
침잠이 깊어갈수록
사방에 소리 열리니
영혼을 깨우는 기침 소리
또렷한 고통의 나이테
부끄러움은 세상에서
가장 이쁘게 물드는 이파리 (사람도 나무처럼)
보이는 세계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이상해라 보이는 대로라면 왜 지혜가 필요할까 (보이지 않는 세계)
다들 집에 없었다 사방 넘치는 물소리에 가슴 젖는
산으로 들로 누구는 은하수 건너 몇 마장 더 달려나가
다 풀꽃 따 문 채 곤한 잠이 들기도 오늘같이 왕소금별
새파랗게 그리움 비벼 씻는 밤이면 꼬박 샌다고 해도
아깝지 않은가 다들 집에 없었다 봄밤은 빈 가슴 누구
나 별이 비치는 湖水 가끔 맑은 물소리 찰랑 영혼의 기
슭에 와 부딪는 소리 부시게 (다들 산으로 들로)
보이는 것은 풋풋할수록 환하고
보이지 않는 것은 삭아서 비치던가
참아도 끝은 보이고
울어도 끝이 닿으니
화가는 마음에 산을 그리며
손놓는 연습을 하고
詩人은 가슴에 자라는 나무를 보며
마음을 쓰는 공부를 한다
숲속이 그윽한 것은
마음이 푸름이요
살 속이 따뜻한 것은
마음이 피기 때문
山은 늙지 않는다
썩을 뿐이라
비 오길 바라지 않아도
장대비 종일 (마음 쓰는 공부)
그래.
삶은 공부다.
화가의 연습처럼
시인의 습작처럼
어느 한 순간 답이 나오지 않는다.
늙지 않고 썩을 뿐인 산...
그러나 늙어가고 썩기도 할 삶...
비 오길 바라지 않아도
장대비 종일 온다면...
마음을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
마음을 어디 두어야 할 것인가?
궁금하면, 한정옥을 만나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