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얼간이
체탄 바갓 지음, 정승원 옮김 / 북스퀘어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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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세 얼간이여서 바보들 이야긴 줄 알았다.

그런데 MIT, 버클리공대 다음으로 친다는 인도공과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의 에피소드다.

 

주제는 '죽은 시인의 사회'에 비견할 수 있고,

재미는 코메디 영화를 보는 기분이 들 정도다.

주인공 세 명이 저지르는 소동들이 유쾌하면서도 웃지 못하게 하는 삶의 페이소스로 가득하다.

 

카이스트라는 수재들의 집단에서 최근 몇년 사이 자살, 자퇴 등이 잇따랐다.

그것은 수재들에게 편안한 연구 환경을 조성하는 대신 '경쟁'을 통한 발전을 추구한 때문이었을 거다.

안 그래도 수재들끼리 모여있는 과학고 출신들로 가득한 곳이어서

청년들이 받는 스트레스는 여간한 것이 아니었을 터인데, 거기서 지옥같은 경쟁이라니...

 

카이스트 학생들은 이 책을 꼭 읽을 일이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10점 만점에 10점을 받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이 책에서 배워야 한다.

삶은 '재밌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지,

높은 점수를 얻는다고 삶이 가득차게 되는 것은 아님을 깨닫는 일도 소중한 것이다.

 

IIT는 미국과 관련이 깊었다.

우리에게 돌아오는 외국의 지원 대부분이 거대 미국 기업으로부터 나온 것이었고...

인도에서는 이렇게 미국으로 고급 두뇌 유출이 이뤄지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마음이 미국쪽에 기우는 것은 그리 놀랄 만한 것도 아니다.(69)

 

이런 부분은 한국도 마찬가지다.

한국만 미국 박사가 무지 많다. 서울대 박사의 90%가 미국 박사란다.

공학 계열은 훨씬 그 의존도가 심각할 것이다.

 

사랑에 빠진 하리가 원하는 것은

 

네가 되는 것.

 

이었단다. 나는 네가 되고 싶어.

너 날 수 있어? 나는 너일 수 있는데... 이런 마음... 알듯도 하고 모를듯도 한...

 

카이스트처럼 IIT처럼... 경쟁이 미만한 곳에서 읽어야할 이야기고, 봐야할 영화다.

 

평점이 좋은 학생을 만들 수는 있어도,

좋은 사람을 만들 수는 없다는 사실...(321)

 

평점만을 추구하는 삭막한 학교...

한국이야말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세상 아닐까?

 

참 이상한 일도  다 있지?

나는 분명히 IIT를 졸업했는데,

어떤 면에서 내 영혼은 여전히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331)

 

학교란 이런 곳이다.

지옥처럼 학생들을 달달 볶다가도,

악마같은 교수들이 설쳐대다가도,

악마가 지옥에 가니 그곳이 곧 천국이더라~ 하는 야~한 농담이 생각날 정도로,

추억의 공간이기도 한 것인데,

그것은 '친구'들과의 추억 때문일 것이다.

 

학교를 경쟁의 구도로만 밀어붙여선 안 되는 이유를 이 책에서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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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2012-07-20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회가 된다면 책보다는 영화를 한번 보고 싶어요.

날씨가 다시 또 더워지네요. 불금!!!!!!!

글샘 2012-07-20 21:44   좋아요 0 | URL
글쎄요. 저도 영화로도 보고 싶네요. 파일은 있는데...

무지 덥습니다. 건강 조심~!
 
뛰어, 뛰어! - 42.195Km, 형은 반드시 돌아온다 오늘의 청소년 문학 2
슈리람 아이어 지음, 최현빈 옮김 / 다른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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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청각 장애인으로 침묵의 세계에 갇힌 소년, 라지.

반면에 동생 사우라브는 만능이다.

라지는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고, 얻어맞고, 우울증에 자기 방에서 죽음을 생각하고,

사우라브는 세계적 테니스 선수가 될 재능과 운을 한꺼번에 거머쥔다.

 

라지가 마라톤에 삶의 목표를 두게 되고,

그 사이에 끼어든 샬리니란 미녀 덕에,

사우라브는 본의 아니게 형의 인생에 관심을 주는데...

 

인도에서 미국, 소련을 넘나드는 이야기는 흥미진진하면서도 경쾌하다.

인도 여성들이 겪는 편견에의 차별도 가슴 아프게 읽힌다.

 

기회는 라지를 저버리지 않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모의 재력이 부패한 권력자들의 입에 기름칠을 해준다.

 

삶은 만만하지 않다.

그렇지만, 또 삶은 누구에게나 버거운 거리다.

하지만 누구나 자기 삶의 페이스대로 삶을 달린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지막 8킬로미터가 남았을 때 페이스 조절이다.

 

이 책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마라톤은 혼자 달리지만,

인생길의 레이스는 경쟁자와의 레이스가 아니다.

 

마지막 8킬로미터부터 초인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기 위해서는,

든든한 '친구'들의 응원이 필수적이란 것이다.

혼자서는 완주할 수 없는 길을,

좋은 친구들과 달린다면,

페이스를 잘 조절해가면서 숨가쁘지만 기쁨으로 넘치게 레이스를 펼칠 수 있을 것이란 것이다.

 

그 교훈을 즐겁게 던져 준다.

장애로 힘겨운 가족들에게도 힘을 줄 수 있고,

형제애를 고민하는 아이들에게도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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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은 간다 - 공제控除의 비망록
김영민 지음 / 글항아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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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 철학 교수인 모양인데, 단행본 25권의 저자라고 프로필에 나온다.

그의 책을 찾아 읽은 적 없으나, 이 책을 보고 나니, 한번 찾아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스물 다섯 권이면 올 여름은 너끈히 나겠다.

그의 '동무론'이나 '연인과 동무' 정도는 제목만 들어본 정도.

 

이 책은 <공제의 비망록>이란 부제를 달고 있다.

공제는 '덜어낸다'는 뜻이고, '비망록'은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하는 메모장을 뜻한다.

수필처럼 생각을 골몰하여 글을 꾸며낸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떠오른 단상들을 기록한 것이다.

 

만화가 허영만 씨는 "메모는 내 머리의 일부분"이며, "메모야말로 끊임없이 아이디어와 캐릭터가 쏟아져 나오는 보물 창고"라고 한다. "인터넷, 편하죠, 그러나 그곳의 지식은 향기가 없고 감정이 없습니다. 특별한 무언가를 만들고 싶다면 자신만의 지식 창고가 있어야 합니다. 그 시작이 바로 메모입니다."라고 한다.

 

블로그도 충분히 메모장의 역할을 할 수 있음에 낯설어하는 말이겠지만,

암튼 '공제의 비망록'에는 생각을 불러일으키고, 자라게 하고, 길들게 하고, 다투게 하는 다양한 꼭지들로 가득하다.

철학이란 '나'로부터 시작해서, '나'와 관계를 짓고 사는 사람들, 직장이나 기관, 국가의 사이에서 발생하는

온갖 더럽고 잡다구레한 것들을 다 따져보고 생각하여 이야기하는 것인데,

철학자의 이야기를 통해, 언어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도 갖게 된다.

 

산책길에서 만난 '며느리밑씻개'를 통하여 '며느리'란 낱말에 묻은 애환의 단층을 짐작케 한다.

가족들 사이의 교통을 맨몸으로 개척했던 '며느리'를 그 구조의 사북으로 여기는 일도 당연했을 터.

그러면서도 그 첫 고비에 치러야 할 비용이 그토록 높았다는 사실은 나와 타자 사이에 가로놓인 심연에 대한 원초적 공포를 지악스레 드러내는, 히스테리 전설의 표현... 며느리-꽃.(41)

 

한국 사회는 아직도 '봉건' 사회다.

며느리와 '시-'의 관계가 가장 그러하다.

그 사이에서 가족은 '외가'에 가깝게 변해가고 있다.

'시-'들이 착취한 과거를 생각하면, 자연스런 세태다.

철학적으로 반성하지 않는 사회는 말라 죽게 되어있다.

한국 사회의 '시-'들은 시들어 죽어야 한다.

그 자리에서 눈물 젖은 '며느리-꽃'들이 마치 '친정-나-시집'의 갈등을 상징하듯,

매끈한 삼각형 이파리로 젖어 나올 것이다.

 

 

'봄날은 간다' 꼭지에서

노인들이 '죽음의 준비' 테마 이야기하다가,

<산 사람들과 이별을 위한 화해>가 등장한다.

"죽기 전에 다 찾아가서 화해해야지, 아무렴."한다.

 

이런 것이 뭔 의미가 있을까?

형식적으로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그걸 철학자 아저씨, 어려운 말로 설명한다.

 

 

콘텍스트를 무시한 텍스트의 동거,

 

아무런 실질적인 변화 없는 낭만적 화해,                                    <며느리 밑씻개>

따짐도 헤아림도 분명하지 않은 감상적 청산,

결국 망각에 불과할 뿐인 용서...

이들은 내게 한심한 나태, 두루뭉술한 미봉에 다름아니다.(95)

 

 

 

콘텍스트(맥락)을 무시한 텍스트의 동거...

시댁과 '며느리'의 관계만큼 이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관계가 있는가?

봉건적 사회 질서에 불과했던 관습에 얽매인 사고는... 미봉에 의하여 많은 사람에게 상처만 줄 따름인데,

시간이 갈수록 골은 깊어만 가는 것 같다.

 

봄날이 가는 것은 누구나 안다.

그러나 아무나 그 사실을 살아내진 못한다.(228)

 

콘텍스트를 무시한 텍스트를 살아내는 것만으로 봄날의 가는 것을 슬퍼만 해선 안된다.

자기가 봄날을 살고 있음을, 그 지난한 삶에서

잠시 나온 이 소풍같은 삶이 아름다웠음을 웃으며 갈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동무'가 필요한 게다.

 

J에게란 글이 짧으면서 좋다.

 

생각이 좋은 사람보다 글(쓰기)이 좋은 사람이 되십시오.

글이 좋은 사람보다 말(대인대물 상호작용)이 좋은 사람이 되면 더 좋지요.

말이 좋은 사람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면 생활 양식이 좋은 사람일 겝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더 좋은 것은 '희망'이 좋은 사람이니,

그런 사람이 되도록 애쓰십시오.

물론 이중에 당신이 '생각'하는 것은 아무런 희망이 아니라는 사실도 잊지 마세요.(152)

 

희망이 중요하다.

그런데 그 희망은 '실천'하고 있는, 온몸으로 살아내고 있는 '희망'이어야지,

생각만 하는 '희망사항'에 불과해선 안된단다. 정말, 그렇다.

 

그가 '부사'에 몰두하는 면은 신선하다.

 

많은 위대한 사상가 중에 소크라테스만이 자신의 사상을 기록하지 않았단 사실은 매우 중요한 강점이다.(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진리를 말하겠다는 의욕 속에는 이미 혼잣속의 글이 진행되고 있어 퇴행적이다.

더불어 어울리게 되면, 너도 나도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이 그 대화적 긴장의 부사성 속에서 은근히, 그러나 돌이킬 수 없이 체감되기 때문이다.(부사, 혹은 무기록의 삶)(163)

 

'게임'이라는 것들이 놀이-몸들의 어울림을 통해 부사적으로 공동체성을 현시할 수 있었던 잠시의 장소-를 추방시킨 것처럼, 볼거리 속에 각색, 극화되어 재생산되는 행운은 행복의 길을 삭제하고 있는 것이다.

 

동사나 명사에 대조적으로 '부사'는 겨우 곁따르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서, 하나의 문장에서 결정적 성분이 아니다.

없어도 되는 이것은, 있음으로써 얻는 소득과 그 보람 속에서 어떤 징후를 보인다.

명사와 동사적 존재들의 명목 가치가 기존 체제와 그 질서를 지킨다면,

실은 인간의 무늬에 유의하는 사람에게는 이 존재들의 체계 탓에 <어긋나는 삶>으로 경험된다는 것인데,

명사와 동사로 구성되는 정신문화적 '경부고속도로'의 바깥에서 이 어긋남을 어긋냄으로 되받아치는 것을

'부사적'이라고 하며, 그같은 움직임, 생활양식, 의욕을 '동무'라고 부른다.

 

'동무'라는 움직임 혹은 관계를 부사적이라고 부른 이유는, 그것이 체계나 제도에 접속하지 않고도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며, 오히려 거기 틈을 내고 방향을 바꾸는 의욕을 부리기 때문이다.

당신이 접속 on 하면서도, 그 논리와 욕망을 바꾸며 어긋내는 against 벡터일 때,

우연찮게 포함되긴 하지만 소속될 수 없는 희망을 지펴 살아갈 때,

동무들은 당신을 한 템포 느리게 '동무'라고 부르는 것이다.(275, 명사에서 동사로, 동사에서 부사로)

 

부사는 부차적이다.

그러나, 그 부차적인 <어긋남>의 클리나멘의 존재로 인하여,

삶은 윤기가 난다.

명사와 동사가 삶의 기본 뼈대인 문장인 것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기본 문법의 틀만으로는 발전이 없다.

말해지지 않는 진리가 중요한 것이 될 수 있듯이,

중심적이지 않은 움직임이 중요한 것이 될 수 있는 것이 세상 사는 이치다.

 

그 부사적 움직임(벡터)는 정태적인 삶(스칼라)를 희망차게 간질여서 웃게 만들 것이다.

그게 '동무'의 할 일이다.

신 나고 즐겁고 기쁘고 재밌게 살게 하는 힘, 그것이 '동무'와 '부사'의 노릇인 셈이다.

 

그는 학생과 그 애인들을 통해 '인력과 척력'의 관계를 고찰한다.

 

내게 있어 학생과 그 애인은 자기동일성의 타락과 타자성의 심연이라는 두 대극적 이미지로 유형화된 셈이다.

인력이 있어 타락이었다는 변함없이 새로운 발견과 그 충격,

그리고 척력 역시 형적 없는 그림자에 불과했다는 새삼스러운 확인.(213)

 

인간은 '밀고 당기기'를 통해 관계 맺는다. 거기서도 인력과 척력이 작용하는 바,

제자와 스승의 만남에서도 여지없이 보이더란 이야기는 재미있다.

 

그의 '가난'론은 서글프면서 공감이 간다.

 

가난이 가난일 뿐이었다면, 나 역시 낙엽처럼 바스러졌을 것이지만,

나는 기이할 정도로 유년기의 기억을 거의 소실하고 말았는데...

물론 이것은 유년기의 외상을 회피하려는 끈질긴 방어기제다.

내가 파편으로 분열되거나 상처로 응축되지 않으려는 본능적인 몸부림의 자기 최면이 것이다.

미래를 앞서 초대해야만 살아날 수 있는 최면술.

내가 수많은 독서의 내용을 깨끗이 기억하는 것과 실로 의이할 만한 대조.

 

프랭클의 말처럼 에로틱은 메타-에로틱이고,

만하임의 말처럼 이데올로기는 메타-이데올로기이며,

노직의 말처럼 유토피아 역시 메타-유토피아라면,

내게 가난은 메타-가난이었으리라.(242)

 

'메타-'란 것은 무엇의 기저에 작용하여 다른 모든 활동에 영향을 미치는 원리적 작용이 되는 현상을 말한다.

어린 시절의 가난은 삶의 모든 사유, 행동, 삶의 편린들에 원리적으로 작용한다.

메타-가난... 실로 무서운 것이다.

한국 사회의 '과외 열풍' 내지 '제 자식 감싸기'의 원인은 이런 것들이다.

 

김영민의 메모장들을 들여다보면,

윤기로 반들거리기보다는 버석거리고 푸석푸석해 뵌다.

 

그건 그가 '공제'했기 때문일 것이다.

공제의 비망록...의 의미는 이 책을 읽고 나서야 알게 된다.

 

어쩜, 그건,

봄날이 가는 걸~ 봄날을 지내놓고 아쉬운 맘이 들고서야, 알게 되는 서러운 이치나 한가진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내 봄날은 간다.

재밌게 살 일이다.

 

 

--------------

27. 49제... 49재가 맞다.

     재(齋)는 인도 산스크리트uposadha의 번역어로 재계齋戒와 재회齋會의 뜻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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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렌 그리모의 특별 수업
엘렌 그리모 지음, 김남주 옮김 / 현실문화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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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한 편의 우화다.

부제가 '피아니스트 엘렌 그리모가 여행길에서 띄우는 삶의 피아니시모'인데,

피아니시모는 '아주 여리게'라는 뜻이다.

그미의 연주를 보면, 힘이 넘치다 못해 피아노를 두드리듯 연주하는 기교파이며,

청중을 무지 의식하는 <관객파> 연주자임을 생각해 보면, 그의 '피아니시모'는 스스로 반성의 의미를 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관객 없이 연주의 구조적인 단단함과 예리한 리듬감을 추구하는 '글렌 굴드'를  <우상>으로 섬긴다는 그녀는

<관객파>와 <순수 연주파>의 ,

그러니까 호로비츠와 리흐테르의 양편을 모두 욕심내는 욕심쟁이일 테다.

 

근데 이 욕심쟁이는 피아노 연주에만 몰두하지 않고, 이렇게 글을 쓴다.

근데, 이 글이 단순한 '기행문'에 머무르지 않는다.

꿈을 열고 닫으며 드나드는 품이, 장자깨나 읽은 품이다.

 

<나는 심한 허기를 느끼면서 잠에서 깼다>로 시작하는 소설은, <잠에서 깨니 정오였다>로 마친다.

코엘료의 우화 소설처럼 읽어 달라는 주문으로 보고 넘어가겠다.

 

장자의 나비의 꿈을 염두에 두고 쓴 이야기 구조가 아닐는지... 뭐, 아님 말고~ ㅋ~

훌륭한 사람은 유쾌해야 한다. 그가 훌륭한 사람이라면 농담도 이해할 거다. ㅎㅎㅎ

 

 

피아노 앞에 앉아 내가 원하는 소리, 공격적일 정도로 절실하지만

명징한 동시에 어둡게 남아 있는 그런 긴박하고도 직접적인 소리를 끌어내야 했다.

소리?

당연히 명료해야 하지만 물리적인 공격으로 느껴질 정도로 사람을 휘감지는 말아야 하는 것이다.(16)

 

이것이 그의 '허기'의 본질이다.

자, 그는 욕심쟁이이므로, 늘 허기에 시달렸을 터이다.

절대음에의 도달이 아니라, 호로비츠와 리흐테르 사이를 욕심낸다면, 이런 허기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필연에 부딪칠 거다.

그가 원하는 소리는

<관객이 충격을 받을 정도로 공격적이며 절실한 소리>여야 하지만,

<관객과는 상관없는 명징한 소리> 그리고 동시에 그저 명징하게 순수하기만 한 게 아니라 깊이가 있는 음감,

즉 <어둡게 남아있는 긴박하고 직접적인 소리>를 얻고자 하는 왕 욕심쟁이임을 방증한다.

그러므로 리흐테르 편에서 <명료>가 필수요건이지만,

지나치게 <명료>에 강박적으로 응대하노라면, 호로비츠 편에선 <강박적 물리적 공격>으로 느낄지도 모르겠단 거다.

우~~~ 이 아가씨, 무지 대왕 욕심쟁이다. ㅋ~

 

욕심쟁이가 잠에서 깨며 <허기>에서 시작했으니,

그 소설이 <고갈>에서 시작하는 건 당연지사... 근데, 사전을 뒤적거려, 고갈의 상대 개념을 처방으로 삼는 것도 유쾌하다. ㅋ

반의어 : 충만, 부유, 풍요, 호화, 번영, 개화...를 뒤적거려 <떠나리라, 걸으리라, 숨쉬리라>는 꿈을 꾼다.

 

피아니시모를 찾아 떠나는 여행.

열렬한 <명징>과 <공격>의 틈바구니에서

<포르테 f (강하게)>정도가 아니라

<포르티시시시모 ffff>(아주아주아주 강하게)적인 삶을 살아온 그녀로서는

<숨쉬리라>의 빈칸, 또는 '숨표'를 강하게 요구했을지도 모른다.

 

그처럼 사노라면 조급증과 안달함이 심리의 기본 바탕이 되기 쉽다.

그것을 기다림의 미학이 가득한, 피아니시모의 레가토(부드럽게 연결하듯 건반을 바꿔 누름)로 변화시키려면, 여행이 답인 건 옳다.

 

어린 시절 유럽의 단조롭던 음악 체험에서 떠난 그는 미국의 음악에서 '푸가'를 경험했단다.

처음엔 여러 선율이 동시에 웅장 장엄하게 울려퍼지는 푸가 양식에서 감동을 받던 그도 그 생활에 질려 유럽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적은 것이 이 책이다.

 

그녀가 처음 만난 나이든 교사는 <스승의 가치>를 역설한다.

아마 <초심>을 일깨우는 역할을 하는 것일 게다.

"인간이란 각자의 운명에 의해 읊조려진 음악일 뿐"이란 스승의 말에서,

엘렌의 운명은 피아니스트란 운명을 타고나 거기서 즐거움을 찾아야 한다는 소박한 깨달음을 전해주는 듯 하다.

 

허기진 그녀에게 교사는 말한다.

 

인간은 배움의 과정 가운데 열심히 헌신하기만 한다면,

인간의 최상의 것을 해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현재 있는 것을 무시하지 않는 겸손,

아직 오지 않은 것에 대한 소망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오만을 가져야 하죠.(44)

 

<처음처럼>이라도 한잔 마시면서 나눌 이야기 아닐까? ㅋ~

좀 지나치게 우연을 강조하여 우화가 시시해지려고 하지만, 대단한 사람의 이야기임을 염두에 두고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삶의 힘이란,

상대를 향한 생의 약동,

상대의 자유를 완벽하게 존중하면서 아무런 강요 없이 상대를 사랑하고 경탄하는 능력입니다.

삶의 힘, 곧 권력이 아닌 그 힘에 집중할 때

우리는 새처럼, 물고기처럼 자유로워집니다.(49)

 

힘 power과 권력 force 정도를 가르려는 것일까?

사랑하는 이가 힘을 얻을 수 있다. 권력에 집중하면, 자유로워지지 못한다.

그 힘은 억지로 얻으려해도 안된다.

'겸손'과 '오만'의 미묘한 밀고 당기기의 적절한 배려의 어디쯤에 묘미가 있다.

 

노 교사와의 대화를 마치고,

소나타의 마지막 음이 끝났을 때처럼,

침묵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이 풍미있는 이야기에 대한 진정한 찬사였고,

우리는 미소를 지었고 바깥 풍경을 응시했다... 고 감상을 이야기한다.

 

수녀원의 일꾼 베아트리스에게서 얻는 교훈은 '자연스러움'이다.

 

자연속에서 제가 들을 수 있는 어떤 방대한 음악,

존재 전체를 뒤흔들고 그 울적함에서 놓여날 수 없는 음악을 찾게 되지 않을까요?

제게 음악이, 내밀하고 본질적인 음악이 될 수 있는

어떤 소리, 어떤 외침, 어떤 한탄, 어떤 소음...을 말이죠.(87)

 

작가가 직업적 작가라 해도 이런 정도 교훈을 나무라긴 힘들 터인데,

그미는 전문 피아니스트 아닌가. 뛰어나다고 찬탄할 밖에...

 

그녀에게 '그저 존재한다는 것이야말로 둘도 없는 행복함' 가르쳐 주려고 심부름도 시킨다.

결국 그녀는 <나 자신이 된다는 것은 내 영혼의 가치에 어울리는 존재가 된다는 것>임을 깨닫는다. (246)

 

상당히 동양적 사고를 하는 엘렌은 베아트리스의 힘을 빌려 관계의 인드라망을 이야기하려 한다.

 

하나의 아이리스는 보이지 않는 땅 속의 핏줄로 때로는 수백 미터 떨어져 있는 또 다른 아이리스와 연결되어 있답니다.

또한 많은 야생초들 간에는 수액과 힘과 생기를 순환시키는 무수한 도관과 뿌리줄기의 그물망이 있는 셈이죠.(103)

 

옳다. 존재는 홀로가 아니다.

음악은 명징함을 추구하여야 하지만, 독고다이로, 글렌 굴드처럼만 살 순 없는 법.

 

늑대에 대한 부분은 <대인관계, 또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와 연관된다.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서로 이해하는 방식이 다른 인간, 또는 늑대와 말이다.

 

내가 그를 사랑하므로 그도 나를 사랑한다는 대전제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기분은 좋지만 실상과 달랐다.

그것은 너무나도 단순하고 자기 중심적인 생각이었다.

인간과 동물의 관계든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든

시작되었다고 해서 상호적인 강렬한 친밀감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 관계는 줄곧 가꾸어 나가야 한다.

관계의 설정만으로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고 내어줄 것도 없다.

귀한 관계일수록 - 늑대와의 관계는 얼마나 경이롭고 귀하며 특별한가 - 깨어지기 쉽고 통제하기 어려운 법(135)

 

그렇다. 사랑은 시작이 반이 아니다.

언제나 귀한 관계일수록, 손님처럼 온 마음을 다해 대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할 일이다.

 

요가는 동작과 동작 사이가 떨어진 듯 이어져야 한다.

피아노 용어로 '레가토' 기법이다.

삶 역시 그런 것 아닐까?

삶도 분절된 사건들을 하나하나 밟아나가는 것이 아니라,

이런 저런 삶의 이야기들이 떨어진 듯 이어져 나가는 것이다.

엘렌은 그런 삶의 흐름을 피아노의 '레가토'와 연관지어 파악하고 있다.

그래서 '포르테시시시모'에 가까운 삶으로 점철된 과거를 돌아보며, 피아니시모를 추구하는지도 모른다.

 

뮤직 박스 이야기에서 동양적 사고가 짙게 풍긴다.

 

"당신이 가진 뮤직 박스는 수집가에게 무척 흥미로운 물건입니다. 제가 사고 싶은데요."

"저로서는 이걸 판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사실 이 물건은 제 것이 아닙니다. 잠시 빌린 것, 아니 맡아두고 있을 뿐이죠."

"잘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삶이 그렇듯이 말이군요."

 

삶은 우주에서 잠시 기운을 빌린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마치 삶이 영원한 자기 소유인 양 여기고 산다. 겸허해질 노릇이다.

포르테시시시모에서 피아니시모로... 허기를 숨기며 겸손하게...

 

인생은 제각기 나름의 향기를 가진 것들이다.

그 향기를 제대로 파악하고 풍길 줄 알면 남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

 

구름에는 미묘하고 수줍은 빛깔에다 먼 남쪽 하늘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더하고, 거기에 바람의 서명을 남겨두었다.

바람마다 특유의 문장을, 자신의 테시투라(음역)를, 자신의 지형을 갖고 있다는 것.

독특한 형태로 하늘을 장악한다는 것을 아는가?

늑대들과 함께 길게 누워있는 나를 커다란 그림자로 어루만져 주는 구름을 나는 사랑한다.(215)

 

자연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와 미묘한 흐름을 읽는 일...

거기 따라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일... 그것 역시 동양적 사고에 가깝다.

그녀가 마지막 찾아간 목적지에서 역시 큰 얻음을 깨닫는다.

 

오늘날 우리는 음악을 사탄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오늘날 음 하나하나, 휴지부 하나하나에 자신의 삶 전체를 투사하지 않고

열정 없이 기계적으로 연주하는 건 비단 음악만을 배신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 전체를 배신하고 영혼을 배신하고 나아가 신을 배신하는 것.

인간은 자신이 훼손한 아름다움, 조롱했던 사랑에 헌신해야 한다.(225)

 

예술이 음악이 찾아야할 것.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아야할 지점을 생각한다.

삶의 한 순간 한 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가지 못하면, 삶의 나침반을 잃어버린 것과 마찬가지듯,

음 하나하나, 쉼표 하나하나도 열정으로 짚어야 하는 자세를 생각한다.

 

결국 작가 엘렌은 길은 누구에게 물을 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길은 아는 사람에게 묻지 마라.

길은 너처럼 길을 찾는 사람에게 물어야 한다.

갑자기 장애물이 나타나 발이 걸릴 수도 있다. 슬픔이라는 장애물에 비틀거릴 수도...(234)

 

길은 거기 있는 것이 아님을 발견하는 것이다.

누구도 가르쳐줄 수 없는 것이다.

장애물이 나타나 비틀거릴 수도 있으나,

길은 찾고 물으며 나아가는 것일 뿐. 완성태의 '존재'가 아닌 것이다.

길은 영원히 '-되기'의 형태로 나타나는 '리좀 Rhizome'의 일종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베아트리스를 빌려 '뿌리줄기'란 표현을 집어넣은 모양이다.

 

늑대 토템의 후예,

영원한 유목민의 자유를 추구하는 엘렌.

그에게 '노마디즘'은 자연스런 철학적 만남이었을 것이고,

그에게 세상은 '천 개의 고원'이더라도, 그 고원은 낯설고 힘들게하는 곳이라기보다,

찾아가 보고 싶고, 거기서 새로운 삶을 만나고 누려 보고 싶어하게 만드는, 일종의 유혹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그는 자신이 세상과 하나로 연결되어있는 한뿌리임을 찾는다.

 

세상이라는 웅장한 교향곡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킨다면 그런 심오한 관점이,

청중이 없는 그런 연주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서로 나누지 않는다면 사랑, 예술, 음악, 자연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성인이 광야에 있다면 그게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인가?

아무도 읽지 않는다면 완벽한 책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리하여 그는 다시 세상 속으로 돌아온다.

꿈을 깨는 것만으로도 그는 바로 복귀가 가능하다.

삶은 한바탕 꿈에 불과한 것일 뿐.

 

피아노 앞에 앉아 내가 원하는 소리, 공격적일 정도로 절실하지만

명징한 동시에 어둡게 남아 있는 그런 긴박하고도 직접적인 소리를 끌어내야 했다.

소리?

당연히 명료해야 하지만 물리적인 공격으로 느껴질 정도로 사람을 휘감지는 말아야 하는 것이다.

 

수미상관.

그가 원하는 소리는 '명징'해야 하지만,

'물리적 공격'으로 느껴질 정도로 사람을 압도해서는 안된다는 깨달음을,

그는 '교향곡' 속의 자신, '청중이 필요한 연주'로 회귀한다.

 

결국 '궁한즉 변하고 변한즉 통한다. 통하면 아프지 않는다. 통하는 것은 오래 간다'는 주역의 도돌이표를 읽는 듯 마무리한다.

 

예술과, 문학과, 삶과 꿈을 비볐는데도,

각각의 맛이 산뜻하게 살아있는 책을 찾는다면, 이 책도 아주 괜찮은 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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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수업 - 나이에 지지 않고 진짜 인생을 사는 법
가와기타 요시노리 지음, 장은주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3월
평점 :
절판


난 내가 '중년'이라 생각하고 이 책을 주워들었는데,

읽어보니, 이 책은 퇴직 후의 삶에 대한 지침서 비스름한 거였다.

이 책에서의 중년은 내가 생각하는 노년의 모습이었다.

 

암튼, 읽노라니,

지금 내 삶에 큰 위안을 주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퇴직하게 되는 17년 후...

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를 생각해 보게 된다.

 

활발하게 노년의 새 삶을 만들어 나가고 있을까?

몸은 건강할까?

아내랑 친구랑 다들 건강하게 나랑 잘 놀아줄까?

책도 잘 읽고 그림도 잘 그릴 수 있을까?

손자 손녀들이랑 신 나게 뛰어노는 발랄한 할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

동화책 읽어주고, 틈나면 과자도 구워주는 멋쟁이 할아버지가 되어 있을까?

....... 아니면... 어느 것도 못하는 왕따가 되어 우울하게 살고 있는 연금생활자가 되어있을까?

 

저자는 퇴직 후가 <알짜배기 시간>이라고 한다.

충분히 일리가 있는 이야기다.

퇴직하고 5년~10년 살다가 세상을 하직한다면 대충 마무리해도 별무이상일 게다.

하지만, 60세에 퇴직한대도, 70세까진 어영부영 일을 한대도, 90세이상 산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제대로된 직장을 갖지 못할 것이 당연지사이므로,

남는 시간을 <알짜배기>로 만드느냐, <종일재가>의 우울한 나날을 보내느냐를 미리 준비함이 옳다.

 

<오래될수록 가치를 발하는 놀이>를 개발해야 한다.

그러면 노년도 즐거울 수 있을 게다.

고스톱이 즐겁다면 그것도 좋다.

술과 담배는 글쎄다.

예전 농촌 노인들은 체력이 뒷받침되어 술담배가 가능했는지 몰라도, 난 그건 아니다.

이미 담배는 손에서 놓았고(체력 고갈이 느껴져서), 술도 용감함을 버린 지 오래다.

책은 노년이 되면 아마 시시할 거 같다.

괴테처럼 이쁜 여자친구가 생긴다면 생의 활기를 찾게될지 모르지만,

그 나이의 손녀랑 노는 게 더 재밌는 할아버지가 되어 있을 거 같다.

내 주특기가 아이들이랑 놀아주는 것이니 말이다.

 

난 퇴직하고도 아이들과 놀아줄 수 있는 무언가를 간직하고 싶다.

그래서 지금도 연구하고 있는 게, '공부하는 방법의 지도'다.

할아버지가 아이들과 상담하면서 놀아주기론 제법 괜찮은 테마 아닐까?

물론 애들은 과자로 꾀어야 하고, 내 학벌 정도면 재능기부한다고 깝쳐도 뭐 괜찮을 거다. ㅎㅎ

한국이 학벌 사회에서 벗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게다.

 

무엇보다 '독립'이 중요하다.

옳다.

지금의 노인 세대는 여기서 실패한 이들이 많다.

국가는 총체적 복지 부실이다.

미래의 노인 문제는 개인의 '독립'이 최우선 과제다.

일본처럼 초고령 사회로 들어간 나라나, 한국처럼 초고령 사회로 진입하는 사회는

모두 복지와 개인의 노력이 노년의 삶을 '독립' 시켜줘야 한다.

 

휴, 한국은 참 독립할 거 많다.

일단, 국가적으로 정치적 독립 돼야 하고~ ㅠㅜ

청소년기 끝나면 청년기 젊은이들을 가족으로부터 경제적으로도 독립시켜 줘야 하고,

가정으로부터 성인도 <개인>으로서 독립하여야 하고,

노년의 독립도 노력해야 한다.

 

LiG 생명보험에 아무리 띠링띠링 해둔대도,

그걸로 만족할 수 없을 게다.

사회 전체적 합의가 일정정도 필요하다.

개인의 독자적 책임으로 밀어붙이는 사회는 정글 그 자체일 것이므로...

 

노년엔 '직함 아닌 명함'을 가져야 한단 말도 재밌다.

직장인에겐 직함이 있다.

그러나 노년의 황혼기엔, 직장은 접었을 거고~ ㅋ~

나름대로 명함을 팔 종목을 찾아야 한다.

 

내가 어느 회사 서평단 활동에서 우연히 얻게된 명함에는

'책읽고 글쓰는게 행복한 남자'란 글귀를 넣어 두었다.

그 글귀를 보는 사람들마다, 참 색다른 명함이란 이야기들을 했다.

그저 00학교 국어 교사, 또는 00학교 생활지도부장교사~ 이런 명함은 '직함'이지 나의 특징을 전혀 반영하지 않는 거다.

그런 명함.

당신에겐 어떤 명함을 파 드릴까요? 하고 물었을 때,

하루 정도 고민하고 나면, 이러구러한 명함을 파 주세요~ 할 수 있으면 참, 좋겠다.

 

노년기엔 몸의 변화를 준비해야 하고, 떠나고 비울 준비를 해야한다는데,

뭐, 그거야 언제 올지 모를 사자를 굳이 기다릴 필요 있겠나 싶다.

노년에도 뭔가 조금은 움켜쥐고 욕심내야 몸이 건강하다는 이론도 있음을 생각한다면,

텅 비우고 다 나눠주고 나면, 삶이 재미없을지도 모를 일이니 말이다.

 

암튼, 젊으나 늙으나...

요지는 <재밌게>다.

난 노년에 명함에 이렇게 새겨 넣고 싶다.

 

한때 책에 미쳤다가 그림에 빠졌다가, 요즘엔 하냥 재밌게 사는 남자 사람

 

ㅋ~ 노인이란 말은 쓰기 싫단 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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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2-07-17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년을 준비한다는 것이 어느샌가 경제적으로 준비하는 것이 전부인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만약 그것이 노년 준비의 전부라면 우리의 노년은 필연적으로 우울할 수밖에 없겠지요? 전 어던 노년을 준비해야할까요? 아직 30대 중반인데 쓸데없는 고민인가요? ㅎㅎ

글샘 2012-07-17 15:19   좋아요 0 | URL
40대 중반인 저한테 그걸 물으심 어쩝니까? ㅎㅎㅎ
암튼 물심양면으로 준비를 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