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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충격 - 지중해, 내 푸른 영혼
김화영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7월
평점 :
부조리란 말을 읽고도 '부조리한 현실'에 치를 떨지 않는 사람은 실감을 하지 못한다.
난 고삐리때까지 당연히 착실한 모범생이었고,
대학생들이 왜 데모를하는지... 몰랐으며,
데모하면 집안 말아먹으니 대자보 옆에도 가지 말란 소릴 듣고 대학엘 갔다.
그러나 5월이 되었을 때쯤, 모든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고, 교문에서 끊임없이 돌을 던지고 있었다.
불어로 '레트랑제'란 발음을 들은 뒤, 카뮈의 이방인을 읽고 '부조리한 세상'의 부조리에 치를 떨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뫼르소의 머릿속은 지중해의 작열하는 태양 말고도 제국주의의 부조리와 식민지 현실이 자리잡고 있었던 거다.
Camus란 술이 있다.
몹시 쓰다. 위스키보다 오래 숙성시킨 블렌디의 일종인데,
술 이름에 카뮈를 붙인 건... 예찬일까? ^^
내 뒤를 걷지 말라. 이끌지 못할지도 모른다.
내 앞에서 걷지 말라. 내가 따라가지 않을지도 모른다.
단지 내 옆에서 걸어가며 친구가 되어달라.
카뮈의 말이다. 이렇게 지중해를 걷는 김화영의 발걸음에는 카뮈의 목소리가 가득차 있다.
뫼르소의 어지러운 머리보다는, 경쾌한 지중해의 화창함이 이 책 내내 가득하다.
1975년. 박정희의 유신의 어둠이 가장 캄캄할 때,
그 때 엑상프로방스를 방문한 불문학도 김화영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1990년대 이후, 세계화를 빌미로 온갖 해외 여행이 유행한 이후, 해외여행기가 러시를 이루었지만,
그들의 해외 여행은 <체험>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나, 암흑기 1970년대의 지중해를 본 김화영은 뫼르소처럼
그 지중해의 빛에서 <영혼의 충격>을 얻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기분으로 읽었다.
그래서
자정의 어둠 속에도
지중해는 항상 최초의 아침이다.
내 최초의 영원한,
내 최초의 청춘이다.
이렇게 붙인 프롤로그가 충분히 이해가 갔다. 슬펐다. 홍세화도 떠올랐고...
참으로 떠나는 것은 두렵다.
낯선 공간으로 이동하는 공포, 몸에 익은 공간으로부터 밖으로 나가는 자의 공포.
이 공포는 아마도 정신적 공포가 아니라 몸의 공포일지도 모른다.(22)
그 시절, 유럽은 하나의 충격이었을 것이다.
달콤한 시럽처럼, 씁쓸한 커피처럼, 강렬하면서 충격적인 맛을 본 그의 젊은 영혼이 이 책에 그대로 감광되어 비추인다.
인화지에 드러난 그림자는 그가 놓여진 위치의 흔적이지만,
빛이 투과되지 못한 부분이 빛을 감각하지 못하여 인화지에 다양한 형상을 그려내는데,
빛을 바라본 적이 없던 어둠 속의 인간은,
어떤 감광의 결과를 기대할 수 없었기에, 더욱 공포로부터 출발하였을지 모르겠다.
파리에서 누군가에게 Aix(엑스)를 아느냐고 물으면 그는 물론 엑상 프로방스를 머리에 떠올린다.
'아름다운 도시', '다정한 도시'라고 대답하는 파리 사람들의 표정 속에는 꿈과 선망이 담겨 있다.
그 꿈은,
어느 여름 오후를 보낸 쿠리 미라보의 카페,
그늘지고 조용한 구시가의 작은 골목에로의 산책,
벤치 위에 내리는 햇빛의 반점들, 서점에서 만난 초록빛 눈의 처녀,
부활절 무렵부터 늦봄까지 피는 코클리코 붉은 야생화,
자동차로 십오 분이면 항상 눈앞에 출렁거리는 지중해,
근교의 푸른 하늘을 물들일 듯한 보랏빛 라벤더의 광활한 고랑들,
언덕배기에 자욱한 향료 텡(타임)의 그윽한 냄새,
토르네 성으로 넘어가는 언덕길,
양 옆의 숲 속에 드문드문 자리잡은 하얀 별장들,
작열하는 태양에 빛이 바랜 붉은 기와,
시 인구의 반을 차지하는 학생들이 이 소도시를 가득히 채우는 영원한 청춘의 설렘,
카페의 카운터 앞에 서서 낯선 사람과 어깨를 툭툭 치며 웃으면서 마시는 차디차고 독한 파스티스,
목마른 자에게 물의 정수를 맛보여주는 녹색의 박하수,
골목골목에 나직이 고요의 소리를 보태는 분수,
그리고, 아, 그리고 모든 것, 은밀하면서도 다정한 것들.
이 모든 기억들 쪽으로 그의 꿈은 남몰래 열려 있다.
그러나 엑상 프로방스는 능률을 찾는 자, 시간이 바쁜 사람, 견문을 넓히려는 교양인, 소유의 노예들,
그리고 돈으로 살 수 있는 모든 것을 요구하는 이들에게 일체의 환상을 거부한다.(37-38)
이렇게 아름다움을 발견한 구절을 묘사한 문구들을 다 베끼자면, 이 책은 독서를 거부한다.
거의 모든 페이지에 밑줄을 긋고, 거의 책 전부를 베껴야 할 거다.
사철 밝은 햇빛이 구름을 타고 내려와 베란다 위에, 풀밭에, 거리에, 카페에 잘도 내리 비치고,
소나무와 잡목림이 곳곳에 무성하며,
아름드리 가로수가 드넓은 포도 위에 그 너그러운 그늘을 드리우고,
아르크의 실개천이 엑스 시를 굽이돌며 그 빛 밝은 전원 풍경을 안고 흔들어 재우는 풍경...(47)
이렇게 묘사하면서도, 그는 불안감을 느낀다.
막연히 나의 육체, 나의 감각은 이 고장의 나무랄 데 없는 풍경과 기후에 저항을 느끼는 것이었다.
까닭을 알 수 없는 불안감 때문에 나의 마음은 쉬 안정되지 않았다.
1970년대임을 생각한다면,
어둠 속에서 빛으로 걸어나간 이의 눈부셔함을 이해할 만도 하다.
찬란함을 오히려 견뎌하지 못하는 이의 애처러운 모습이 떠오른다.
불안감을 가장 먼저 느끼는 것은 육체다.
속이 울렁거리고 위장이 먼저 반응을 보인다.
손이 덜덜 떨리고 다리가 후들거린다.
지중해의 맑고 다사로운 물에 그대의 젊은 살을 담아보라.
알 것이다.
참으로 그대의 살은 알 것이다.
생명이 간직하는 것은 오직 새로이 시작하는 현재, 오직 영원한 현재뿐임을.(63)
지중해의 짭쪼름한 바닷물에 젊은 살을 담가 보고서야,
살이 깨닫는다. 영원은 현재에만 드리울 수 있는 빛과 그림자임을...
프로방스인의 하나였던 장 지오노를 '가장 뜨거운 열정과 삶의 충동에 불타던 작가'라고 칭송하며,
삶의 현재성을 역설하는 부분도 참, 멋지다.
하루해는 어둠의 혼란된 시각에서 시작하고 끝난다.
하루해의 모양은 길지 않다.
화살이나, 길이나, 인간의 경주처럼 어떤 목적을 향해 가는 긴 모습이 아니다.
그것은 둥근 모양을 하고 있다.
태양이나 세계나 하느님의 모양처럼, 영원하고 움직이지 않는 것이 가진 둥근 모양을 하고 있다.
문명은 우리들이 무엇인가를 향하여, 어떤 머나먼 목적을 향하여 가고 있다고 설득시키고자 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의 유일한 목적은 사는 것이며, 삶은 우리가 매일같이 항상 하고 있는 일이며,
하루의 매 시각 우리가 살기만 한다면 우리는 진정한 목적을 다 달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문명인들은 날들이 길다고 말한다.
아니다. 날들은 둥글다.
우리는 그 어떤 목적을 향해 가는 것도 아니다.
왜냐햐면 우리는 바로 모든 것을 향해서 가고 있기 때문이다.
날들은 과일과 같다.
우리들의 역할은 그 과일들을 먹는 일이다.
우리들 본성에 따라 부드럽게든 탐욕스럽게든 그 과일들을 먹는 일이다.
그 과일이 담고 있는 모든 것을 섭취하여 우리의 정신적인 살을, 우리의 영혼을 만드는 일, 즉 사는 일이다.
산다는 것은 그 밖의 어떤 목적도 없다.
지상에 태어나 이 사물들을 본 필멸의 생명은 행복하여라.(79-81)
생의 감각을 일깨우는 프로방스와 지중해.
어둠에서 나가 너무도 찬란한 빛을 접한 그의 망막은 어쩌면 '충격'으로 한순간 먹먹했으리라.
책으로만 읽었던 자유와 평화와 삶과 죽음은 그 앞에서 혼란의 혼돈 속에 가득 잠겨 있었으리라.
40년이 다 된 책을 읽는 일은 그래서 더 많은 상상의 날개를 필요로 한다.
마르세유의 페스트와 전쟁, 그것도 삶을 향한 인간의 욕망을 짓누를 순 없었으리라.
강렬한 '첫 키스의 추억'으로 남은 지중해는 그에게 영원한 낙인처럼 각인된다.
그 후 지중해의 행복한 섬처럼 내 달뜬 가슴이 밤중에도 더러는 출렁거린다.(145)
기억 속의 빛은 늘 상대적인 법.
다시 어둠으로 들어온 그의 홍채는 확장의 기능을 잃어버린 듯, 어둠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한다.
1974년 6월 수년 만에 돌아온 내 나라 공항에 내려서 한국어로 계원과 말을 주고받을 때 발견한
그 철통 같은 국경 앞에서 나는, 그리도 넘기 쉽던 유럽의 모든 국경들을, 가슴을 떨면서 기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제쯤 이 굳게 닫힌 국경의 문들이 세계로 열리고 그 시원하게 열린 문으로 세계사의 봄,
지구의 부활절이 우리에게도 찾아올까!
이제 이 땅에도 국경은 자유롭게 열렸다.
그러나 그 자유는 돈이 타넘어다니기 쉽도록 장치한 자유에 불과하다.
과연 부활절이 찾아올 날은 언제일지... 아직도 기다려야 한다.
이국의 징표로 가장 두드러진 것은 빛이지만, 사람을 가르는 것은 '언어'다.
언어가 다르다는 것이 존재의 고독을 바로 불러일으킨다.
다수 앞에서 비로소 부재와 욕망이 오롯이 살아난다.
여행은 그런 것을 가슴으로 보여주는 행로다.
서로 헤어진다는 것이 바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다수의 세계,
그리하여 부재가 있고 거리가 있고 그로 인하여 다가가고 합일하려는 욕망도 있는 이 언어의 세계만이 우리들의 왕국이다.
그 따뜻한 왕국 위에 오늘도 좋은 부활절 햇빛이 내린다.
내 눈이 보고 내 살이 느끼는 이 햇빛과,
그리고 대낮과 밤의 세계 저 너머에 천국이 있는지 지옥이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 어느 것이 있어도 나는 알지 못한다.
아마도 그런 세계가 있다면 적어도 그곳에 언어는, 인간의 언어는 없을 것이다.(159)
영화 '코리아'를 볼 때,
하지원이 배두나를 보고 울며 말했다.
"언니, 헤어질 때,
편지할게, 전화할게, 이렇게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지만,
우린, 아니 나는 편지할게, 전화할게 이런 말로 인사하지 못하면... 무슨 말을 해야 해?"
존재의 벽은 부재에서야 비로소 느끼는 상처다.
물의 도시 피렌체에 가서 카뮈가 스승 장 그르니에에게 바친 '사막'을 들춰본다.
산다는 것은 물론 표현한다는 것과 어느 정도 반대되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침묵과 불꽃과 부동 不動 속에서, 이렇게 세 번에 걸쳐 증언하는 것을 의미한다.
존재의 참된 증거인 살과 뼈를 그 자체로서 바라보기 전에 우리는 그 사람의 신분, 이름, 그의 보이지 않는 생각과 인격에 따라서만 그 사람의 모습을 해석하려 든다.
그러나 그 모든 것 이전에 사람의 얼굴은 생명이 약동하는 살과 뼈로 거기 있다...
의미 이전에 그의 얼굴이 바로 내 눈앞에 존재하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버리기 쉽다.
침묵 속에, 그 의미 이전의 생명이라는 불꽃 속에,
존재로 나타나기 위하여 잠시 육체가 정지하고 있는 부동 속에, 삶이 그의 전모를 드러낸다.
조토,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회화 속에는 그 세 번 증언 된 삶이 표현되어 있다.(174)
삶은 침묵으로, 불꽃으로, 부동의 몸짓으로 증언된다고 한다.
말해진 것은 존재증명으로서는 불가능의 영역에 도전한 것일 게고,
존재 증명을 위해 내세우는 서류 나부랑이들은 불꽃같은 열정 앞에선 무용지물일 게고,
어떤 동작으로 오버액션을 취한다 하더라도, 부동의 행간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삶은, 말하지 않아도, 불꽃처럼 타올라도, 행동하지 않아도,
그 표정을 보면 알게 된다. 표현하지 않아도, 삶은 표출되는 것이다.
지중해는, 모든 것의 출발이고, 모든 것이 이르는 목적지이다.
그곳에 삶의 씨앗이 있고, 그 씨앗을 두꺼운 죽음이 감싼다.
모든 떠난 자들은 그곳으로 돌아온다.
모든 돌아온 자들은 그곳에서 떠나보낸다.
그래서 그 햇빛, 바람, 나무, 돌들의 시원 지중해는 덧없고 행복한 생명들의 '중심'이다.
모든 '중심'이 그러하듯 일몰의 시각이 다가오면 지중해는 둥글게 둥글게 익는다.
그 생명의 과일이 익는 시각,
아! 우리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던 것을 마지막으로, 그리고 비로소 배운다.
해질 녘, 초록색의 황혼녘, 바닷가에 서면,
눈을 감아야 참으로 보이는 나의 별, 잘 익은 과일.
하루에 한 번 익은 지구가 바로소 내 가슴에 깊이깊이 들어앉는다.
내가 그 별 속에 살고, 그 별이 나의 속에서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자전을 시작한다.
당신은 혹시 보았는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자라나는 그 잘 익은 별을,
혹은 그 넘실거리는 바다를.
그때 나지막이 발음해보라.
"청춘" 그 말 속에 부는 바람 소리가 당신의 영혼에 폭풍을 몰고 올 때까지.(229)
여행기도 아니고, 감상문도 아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간 탈출기이기도 하고,
그 빛에 매혹된 연애 편지이기도 하다.
그 연애 편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자가, 저 쓰디쓴 블렌디 카뮈였으니,
이 책을 읽노라면, 옆에 카뮈의 이방인, 페스트 정도는 구비해 두고 읽으면 금상 첨화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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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ㅋ~ 프랑스에서 프로방스까지는 멀다~ '빠리'에서가 아닐까?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