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랑, 그 환상의 물매
김영민 지음 / 마음산책 / 2004년 8월
평점 :
품절
김영민이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에 대한 사숙을 남긴 책이다.
롤랑 바르트는 무한한 '박학'과 '독지'를 자랑하는, 사랑의 백과 전서를 기획했다면,
김영민은 거기에 대한 '절문'과 '근사'를 지향하는, 사랑의 개념화를 시도하고 있다.
(박학이독지, 절문이근사, 인재기중의...
널리 배우고, 돈독히 뜻을 갖고, 절실히 묻고, 이치에 가까이 사고하면, 어짊은 그 안에 있다.)
김영민의 언어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겐, 조금 낯선 용어들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사랑에 대하여 적은 책들이 감정에 대하여 적고 있는 깊이가 얕은 책들이 많아 아쉬운 점을 커버할 수 있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영민 책의 가장 큰 아쉬움은...
일반인이 사용하지 않는 언어 방식을 혼자서 고수하는 것이다.
우리말을 살려쓰는 것은 좋은데, 자연스러운 한국어로 읽히지 않아 그의 글을 읽을 때 간혹 고통스럽다.
사랑의 대체는
초기증상과 어떤 후유증의 범벅이지요.
이 증상의 특색은 오직 반복이라는 형식일 뿐인데,
이 형식 속에서 사랑은 온갖 세상을 거느리며 아름답게 불순해집니다.(책머리에)
처음부터 이렇게 나오면 어렵다.
뭐, 대~충 알아 먹는 수밖에...
사랑이란 것은 '초기증상 - 한눈에 반해버린 호감'과 '후유증 -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난 일들의 영향력'이
특별한 인과관계 없이 '범벅'되어 이뤄지는 것이란 말이렷다.
그런 일들이 반복되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특별히 고귀하거나 아름다운 것이라기보다도, 이렇게 일상적이고 '생활' 속에 누추하게 놓인 것이다.
사랑하는 이에게 연락되지 않는 전화는 지옥이라고 한다.
역시, 호감을 주고받으며 연락을 해야 사랑이 유지되는데, 연락이 끊어진 상태로는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범벅을 헤치고, 어떤 뼈대, 내지는 특징이라도 발견해 보려는 노력이 이 책이다.
사랑은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 그게 '환상'적인 것이다.
그렇지만, 사랑은 제자리에 가만히 있는 황홀은 아니다. 번득이다가 기울임에 따라 흐르고 변한다. 그게 '물매'다.
사랑의 언어는 사랑을 실어나르지 않으며, 그 언어의 무늬가 곧 그대로 사랑인 것이다.(26)
사랑한다고 아무리 편지지에 적어도,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없다.
그러나, 그 편지지를 보낸 것 자체가, 그 편지 자체가 마음을 전해 준다.
사랑한다면, 어떤 언어든, 가고 오는 사이에 언어를 주고받는다는 자체가 사랑을 증명하는 것이다.
꼭 '사랑해'라고 적지 않아도,
이런 저런 일상 이야기를 조근조근 적어 보내고 받는 것만으로도 사랑은 충분히 오간다는 것이다.
연인이 연인의 살을 아무리 탐색해도 에로티시즘의 논리적 실마리는 없다.
그래서 그것은 내게서 늘 도망가버리는 '무딘 의미'인 것이다.
따라서 메타화하거나, 이론적으로 심오화하면 할수록 에로티시즘은 더욱 공소한 중심을 내보이면서 뜨악한 표정으로 우리 연인들을 쳐다보고 있을 것이다.(63)
언어만으로 부족하여 연인들은 '살'을 맞대고 비비는 것으로 서로를 확인하려 한다.
그러나, 살을 맞대는 것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보여줄 순 없다.
사랑에 대한 '이론'의 메타화는 그래서 불가능한 것이면서,
또 사람을 애타게 만드는 건지도 모른다.
그가 보여주는 사랑의 실마리, 가능성을 '오아시스'를 빌려 이야기한다.
유형화된 '마음'을 멀리하고, 대신 말과 살을 달리 '대접'하라는 것.(65)
사랑하는 이가 시인이 되듯,
사랑하는 마음을 철학하듯 해야 한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하는 자세는 철학자의 자세가 아니다.
'우리 사랑은 영원한 것' 이런 유형화된 마음을 버려야 한단다.
대신, '주고받는 모든 말'과 '접촉할 수 있는 살'의 관계를 특별하게 '대접'하는 속에서,
진정한 사랑에 대하여 관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얻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
나도 나이어릴 때의 사랑은 '살'을 추구하는 그것이었다.
어떻게든 이성과 가까이 가서 접촉을 해 보는 것이 내 유전자의 지상 명령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제 나이들어 '사랑'에 대한 책을 접하노라니,
'사랑'이란 것의 실체를 명확하게 정의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겠다.
그래서 사랑에 대하여 고민할 때, <유형화된 마음>을 고정하지 말고,
주고받는 '언어'과 '접촉'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말에 깊이 공감한다.
결혼해서 살을 맞대고 자도 전혀 흥분되지 않는 부부일수록,
주고받는 언어가 어떠해야 하며, 둘 사이에 특별한 기념일, 선물, 문자, 쪽지, 메일 등의 접촉 수단을
우습게 보면 안 된다는 이야기도 될 수 있겠다.
사랑은 하찮은 것들로 구성된 귀중한 것이다.
혹은 귀중하다고 하는 기표들로 구성된 하찮은 기의다.(86)
말과 살, 이런 접촉들은 하찮을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사랑은 귀중한 감정이다.
귀중하다고 하는 기표들...은 드러난 언어, 선물 같은 것이다.
그 속에 담긴 기의... 의미는 보이지 않지만, 마음을 대신하기도 하는 법.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사랑'이라는 것보다,
더 맞는 말들이 많아요.
나는 지금 너의 이런 부분이 좋아.
그런데 다음날이 되니까 그게 아니라 다른 점이 좋아.
너의 손을 만지고 싶어.
너의 마음 씀씀이가 참 고마워.
너랑 있으니까 마음이 따뜻해지고 몸이 편안해지네.
외로웠는데 네가 같이 있으니까 참 좋다 등등...(홍상수, 142)
사랑이란 것을 표현하기엔 그래서 '자투리 말'이거나, '사소한 상징물' 하나가 중요한 기의를 전달할 수 있다.
'사랑해'라는 기표보다 '돌멩이 하나', '음악 한 곡', '책 한 권', '시 한 편'이 더 중요한 선물일 수 있는 게다.
둘이 같이 사랑하는 사이라면, 함께 나눈 감자전 몇 장, 조개탕, 소주 두어 병이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인 것처럼...
사랑은 반복되는 나날과 삶으로부터 우리를 일탈시켜주거나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반복을 온 마음으로 기다리게 하는 것으로 우리를 구원한다. 또 보고 싶고...(장정일, 165)
사랑이라면...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반복해서 만나는 나날과 삶이 이어진다고 해서 마음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아무리 반복하여 마주하여도, 온마음으로 기다리게 하는... 보고 싶고 또 보고 싶은... 그런 마음이 사랑일 게다.
실연이 사랑의 본질이다.
우리가 사랑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은 우리 사랑 중의 대부분이 실수였다는 사실 뿐.
오류를 알기 위해서라도 그 진실이 필요하였다.(243, 포퍼)
그렇기도 하다.
옆에 있을 때, 소중한 줄 모르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기도 하다. 어리석음...
사랑은 늘 어색하고 어눌하고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다가선다.
그러다가, 잃고 나서야 땅을 치고 후회하는 것.
사랑,
그 고귀한 이름을 드높이기 위해서는...
홍상수의 <생활의 발견>처럼, 자잘하고 볼품없는 것에서 빛나는 정수를 느끼지 못하는 자,
어떤 곳에서도 사랑하는 사람과 달콤한 '말결'과 '살결'을 맞댈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이 가르쳐 주는 바는 뭐, 이런 거 같은데~
말이 좀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