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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중인 나의 왕
아르노 가이거 지음, 김인순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4월
평점 :
절판
치매는 dementia라고 한다.
멘탈이 딜리트된... 정신이 없어지는... 상태를 일컫는다.
치매의 원인으로는 알츠하이머가 50%쯤 되고, 혈관성이 또 나머지의 절반, 그 나머지는 여러 가지가 있다 한다.
나이가 들면서 뇌가 경화되고 쭈그러들면서 여러 가지 증상을 보이는 치매.
이 이야기 속의 아버지는 기억력의 손상은 심하지만,
언어적 측면에서는 오히려 신선하다.
아버지는 프란츠 카프카나 토맛 베른하르트의 소설 주인공이 말했음직한 문장들을 말했다.
하지만 나는 심하게 무능력해
정말 심하게 무능력해.
나는 모든게 이해되지 않아.
난 뭐가 뭔지 모르겠어.(128)
아버지의 입에서는 낱말들이 거침없이 쑥쑥 나왔다.
아버지는 느긋했다.
생각나는대로 말했고, 그렇게 생각나는 것은 종종 독창적일 뿐만 아니라 깊이가 있었다.
왜 나는 저런 말이 안 떠오를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표현이 어찌나 정확한지, 어조가 어찌나 적절한지,
또 단어 선택은 어찌나 능숙한지 감탄스러울 지경이었다.(116)
여긴 내 집이 아니야.
주소는 맞지만,
그건 누가 문패를 훔쳐서 여기다 갖다 붙여놨어.(60)
치매 환자는 모든 지능이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보다.
오히려 엉뚱한 사고력은 새로운 고리를 만들기도 하는 것 같다.
치매 환자는 천차만별이어서 일반적으로 말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환자의 본성을 헤아리기는 어려우며
치매는 환자마다 제각각 능력과 감정, 병세가 다른 특수한 병이다.(108)
흔히 치매 환자는 어린아이 같다고들 한다.
이것은 화가 치미는 비유다.
아이들의 본성은 앞을 향해 발전하는 것인데,
다큰 어른이 어떻게 어린아이로 뒷걸음질 하겠는가.
아이는 능력을 얻고, 치매 환자는 능력을 잃는다.
아이와 같이 지내면 발전을 보는 안목이 날카로워지고,
치매 환자와 같이 지내면 상실을 보는 안목이 날카로워진다.
노년은 일종의 미끄럼틀이고,
노년이 안겨주는 커다란 걱정거리 하나는 그것이 너무 길다는 것이다.(17)
그렇겠다.
비슷한 천진함을 보이지만,
아이들은 급격히 재바르게 발전하는 반면,
노인들은 완만하게 상실의 경험을 두고두고 반복하는 지루한 날들이라는 것.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가면 없어지나니
그 있던 자리도 알지 못하거니와...(시편 103:15)
스러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이야기다.
그런데, 인간 백세의 시대. 장수만세의 꿈이 이루어졌지만,
인간의 고귀함이 함께 담보되지 않아 쉽지 않은 문제다.
뭘 해도 제대로 되는 게 하나 없어.
하지만 많은 게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도 불행하지는 않아.
이제 다 지나간 일이야.
다른 사람들이 잘해내면 같이 기뻐해 줄 수는 있어.
하지만 내 태엽은 빠져버린 것 같아.(177)
노인이 죽음에 다가가는 것은 쌍곡선이 직선에 다가가는 것과 같다.
아주 서서히 방향이 달라지고 있어서 서로 가장 가까이 있음에도 언제 만나게 될지는 불확실했다.(토마스 하디, 164)
저항하는 것 말고 다른 선택은 없어.
저항하지 않으면 우리는 불쌍한 개나 다름없지.(153)
아내가 요양병원에 근무해서 듣는 일이 많은데,
치매도 착한 치매가 있고 나쁜 치매가 있단다.
이 할아버지는 평소에 착하게 살았나보다.
나쁜 치매 환자는 계속 욕설을 하고 폭력적으로 변한다고 하니...
상태는 급변했고, 얼마나 성심껏 보살핌을 받느냐에 좌지우지되었다.(118)
치매 환자에게는 심리적 안정과
가족의 지지가 참 중요한 것이라고 한다.
이런 건 아내의 대학원 논문 준비과정에서 주워들은 말이다.
어머니가 집을 나가면서
아버지가 생각에 잠겨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무위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마치 마음 속의 마지막 용수철이 튕겨나간 것만 같았다.(24)
결혼 과정에서 이성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보통 결혼생활동안 높은 이자를 붙여 갚아야 한다.(91)
부모님의 결혼생활은 바벨탑에서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서로를 설득하고
각자 자기만의 언어로 '당신은 날 이해 못해'라고 말하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아버지의 중대한 주제는 안식처, 안주, 안정감이었고,
어머니는 자극을 찾았다.
어머니는 세상을 향해 마음을 활짝 열고 새로운 것을 열망했다.(93)
결혼을 잘못한 부부는 많다.
그들의 성격 차이가 그리 큰지는 살아 가면서 알게 된다.
그렇지만 아이들을 낳고 스스로를 닳게 하면서 살게 되지, 쉽게 헤어지지 않는다.
헤어지는 것 역시 고통의 하나니까.
그렇지만, 배우자의 상실은 심리적 지지의 측면에서 상실감 지수가 가장 크다고 한다.
고통이 치매를 유발할 수 있겠다.
아버지, 사는 동안 언제 제일 행복했어요?
아이들이 어렸을 때.
아버지랑 형제분들이요?
아니, 내 아이들이.(85)
치매 환자들에게 가까운 과거는 잊히지만,
먼 과거는 추억의 앨범으로 남는다고 한다.
가장 행복했던 시간조차 잃는다면, 치매 환자가 반추할 양식이 없으니,
그나마 하느님이 주신 노후의 선물이 아닐까?
어제 '지중해 심연으로 사라진 프리다이빙의 여왕'이란 기사를 보았다.
9분 이상 잠수할 수 있었던 이 여성이
잠수한 후 돌아오지 않았던 것은,
사고일 수도 있지만,
누구도 들어오지 않을 자신만의 집을 물속에 지어 두고
스스로 왕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유폐되는 일은 슬프다.
그렇지만, 왕은 당당하게 살아야 한다.
노년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책.
http://blog.daum.net/hanjeonman/1130188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