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색 문학과지성 시인선 473
송재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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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과 어둠이 서로 물고 있는 지하실 풍경이 텍스트이다.
어둠이라고 적었지만
그건 햇빛이기도 하고 메아리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시선(視線)이기도 하다.
그게 무엇인들,
“검고 깜깜하거나 거무죽죽하며 거무스름하면서
꺼뭇꺼뭇한 얼룩”(「검은 창고」)들이 아닌가,
더 검은색의 언어에 다가서는 일정 일부이다. (시인의 말)

 

본 것이 적은 사람은 해오라기를 기준으로 까마귀를 비웃고 오리를 기준으로 학을 위태롭다고 생각한다.

만물은 스스로 괴이할 것이 없는데 내가 공연히 걱정을 하고,

하나라도 같지 않으면 만물을 모함해 댄다.

! 저 까마귀를 보라.

덧없이 검은 깃털이 갑자기 흰빛으로 물들고 다시 녹색으로 반짝이며,

햇빛이 비치자 자주색으로 변했다가 눈이 부시면서 비취색으로 바뀐다.

그러니 내가 푸른 까마귀라 해도 무방하고, 다시 붉은 까마귀라 해도 무방하다.

그것은 본래 정해진 색이 없는데 우리가 눈으로 먼저 정해 버린다.

심지어는 눈으로 보지도 않고 먼저 마음에 정해 버린다.

! 까마귀를 검은색에 가두어 버리는 것도 그렇더라도,

까마귀를 가지고 천하의 모든 색을 가두어 버리는구나!

까마귀는 과연 검은색이로되, 이른바 푸르고 붉음이 색 가운데의 빛임을 누가 다시 알겠는가!(박지원)

 

정약전은 흑산도라는 이름이 주는 어둡고 처량한 느낌을 매우 싫어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玆山魚譜서문에서 흑산이라는 이름은 어둡고 처량하여 매우 두려운 느낌을 주었으므로

집안 사람들은 편지를 쓸 때 항상 흑산을 玆山이라고 쓰곤 했다.

과 같은 뜻이다고 밝히고 있다.

정약전이 검을 현이 겹쳐진 로 읽었는지 으로 읽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흑산도를 현주라고 불렀기 때문에

玆山현산으로 부를 수 있는 가능성, 타당성은 충분한 셈이다.(현산어보를 찾아서)

 

흔히 검은색은 부정적인 개념으로 읽기 쉽다.

그러나 박지원은 까마귀의 검은 빛을 통하여 인간 관념의 한계를 지적하였고,

정약전 역시 흑산도의 부정적 어감을 현산으로 불러

같은 검은빛이지만, 그 깊이를 더한 일이 있다.

 

이 시집에서 여러 차례 읽은 시가 '검은 창고'다.

 

   들판의 창고는 대체로 회색이다 녹색 창고만 해

도 들판과 어울리지 않기에 적재가 쉽지 않다 회색

창고라면 편하겠지만 내가 본 것은 검은 창고, 고산

족(族)의 다랑이논 옆에 있다 반추동물처럼 엎드렸

는데 귀도 눈도 없이 느리기만 하다 먹거리 쟁여놓

은 창고가 아니다 높이와 깊이가 필요한 고산협곡에

서 바람을 선택한 검은색이니까 바람은 쉬이 창고의

기별과 겹친다 내가 원했던 검은색이다 야크의 털이

검은 게 아니라 그 시선이 어둡다 이목구비가 없는

것들에게 검고 깜깜하거나 거무죽죽하며 거무스름

하면서 꺼뭇꺼뭇한 얼룩은 때로 몸이고 생각이다 또

한 검은색은 늙은 손바닥의 색이다 산을 넘어야 하

는 우편낭도 검은색이지만, 유서를 남기는 편지의

감정마저 검은색이다 밤의 결혼식을 보았다면 산과

저녁의 어름은 검은색 청혼을 먼저 지나왔겠다 입을

한껏 벌린 검은 짐승의 하품까지 모두 검은 창고에

보관된 유물이다(검은 창고, 전문)

 

이 검은색은 '깊다'

흔히 만나는 검은빛이지만, 삶과 죽음의 어름을 담당하는

그런 빛이다.

그 검은 빛은 슬프고 한맺힌 빛깔이라기보다는

웅숭깊은 사나이의 우물같은 눈동자를 응시하는 느낌이랄까.

 

내 관심사는 각 인칭들의 시들이 품고 있는 근원적인 욕망의 정체다.

1인칭의 시인이 나를 고백할 때, 그것의 배후에 있는 것은 '나는 이해받고(사랑받고) 싶다'라는 욕망이다.

심지어 자기 자신을 이해할(사랑할) 수 없는 괴물로 그릴 때에도 그렇다.

2인칭의 시인이 너를 탐구할 때 그가 원하는 것은 '너를 소유하고 싶다'라는 것이다.

너는 나만의 것이 아니지만 내가 인식한 대로의 너는 오직 나만의 너이기 때문이다.

3인칭의 시인이 또 하나의 세계를 창조해내는 것은 '세계를 바꾸고 싶다'는 욕망 때문일 것이다.

비참한 세계를 고발하거나 이상적 세계를 꿈꾸는 작업은 그 욕망의 앞뒷면이다.

1인칭의 시는 나르시시즘으로 흉해질 수 있고,

2인칭의 시는 대상에 대한 폭력이 될 수 있으며,

3인칭의 시가 긴장을 잃으면 보고서나 망상이 될 수 있으리라.

송재학의 시는

그의 욕망은 내면에 뭔가 중요한 것이 있어 그것을 드러내야겠다고 생각하는(1인칭 시의) 욕망이 아니라,

내면이 비어있다고 느끼는 갈증때문에 거기에 무언가를 채우려는 욕망이다.

또 그의 욕망은 세계를 바꾸고 싶다는 (3인칭 시의) 욕망이 아니라,

이 세계의 깊이를 다 파악하고 싶다는 욕망이다.

즉, 그는 본질적으로 2인칭의 시인이고,

그의 시는 대부분 대상(너)에 대한 집요한 탐구의 결과물이다.(신형철의 해설 중)

 

 

<내면의 비어있음의 갈증>을 나타내는,

또 <이 세계의 깊이를 다 파악하고 싶음>을 표상하는 빛으로

그는 <검은색>을 들이민 것이 아닐까?

 

   자기만의 해안선을 가진 사람이 있다 자기만의 고

독이다 해안선이 챙겨두었던 고독과 고독을 대신하

는 리아스식 해안이 뒤엉켰다 잎이 넓은 후박나무

서랍에서 뒹굴던 고독이다 해안의 오래된 비석을 읽

을 때 더듬더듬 끊어지면서도 따라가는 건 돌과 글

의 고독이 닮았기 때문이다 지구의 자전을 따라 해

안선을 걷다가 알기 힘든 옛 글자가 나올 때쯤, 矜恤

(긍휼)이 있고 빈집이 있다 납작한 지붕이 있다면 고

독이 닥딱해진 글자를 삼킨 것이다 먼바다에서 금방

떠내려온 섬이 그 집 앞에 있다(해안선, 전문)

 

그는 세상에 가타부타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신형철의 용어로 3인칭의 시점으로 쓰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아픔을 과장되이 부르짖지도 않는다.

다시 신형철로 1인칭의 시인이 아니다.

 

곧 그는 텅 빈 눈으로 세계를 바라본다.

그의 바람같은 텅 빈 눈에는

세계가 평가되지 않은 상태로 담긴다.

그것이 '자기만의 해안선'일지 모르겠다.

 

거기 알기 힘든 옛글자도 있고

납작하게 불쌍한 빈집이 있고,

먼바다에서 떠내려온 섬처럼,

고독한 사람이 있다.

 

그 고독을,

나의 고독이라고도 하지 않고,

세상 탓으로 고독하다고 하지도 않는다.

그저,

 

떠내려온 섬,

이 그 집 앞(그 집은 납작한 지붕의 긍휼이 있는 집이다.)에 있다고 말했을 뿐이다.

 

나는 이 시인의 시가 마음에 착착 와서 감기지 않았다.

그저 바람이나 구름처럼, 눈길에 지나갔고, 머리를 통과했다.

고개를 끄덕일 수도 없이 그저 바라보게 되었다.

그런데, 좋았다.

 

그게 검은빛의 힘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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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그 Hug
지미 리아오 지음, 김진아 옮김 / 리틀빅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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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예쁜 그림책이다.

어린 아이들이 좋아할 만 하다.

 

모든 허그는 오래오래 기억나고,

삶의 위안으로 작용한다.

 

고독한 사자의 허그를 찾아가는 이야기는 단순하지만 아름답다.

향긋한 비누향 풍기는 아기를 꼬옥 안고 있고 싶게 만드는 예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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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과 상처 - 김훈 기행산문집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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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가 팔레트 위에서 없었던 색을 빚어내듯이

나는 이미지와 사유가 서로 스며서

태어나는 새로운 언어를 도모하였다.

몸의 호흡과 글의 리듬이 서로 엉기고,

외계의 사물이 내면의 언어에 실려서 빚어지는 새로운 풍경을 나는 그리고 싶었다.

그 모색은 완성이 아니라 흔적으로 여기에 남아 있다.(개정판을 내며 중)

 

김훈의 초기 수필들이다.

여행 다니면서 남긴 글들도 있고,

시론의 형식을 띤 글들도 있다.

이제는 다양한 소설들을 통하여,

'칼의 노래'도 '현의 노래'도 익숙하고,

'젊은 날의 숲'속에서 헤매이던 시간도,

'남한산성'의 굴욕적 시간도

'흑산'의 검은 빛이 '현산'이 되기까지 농익은 작가가 되었지만,

초기의 글들은 그의 직선적인 사변이 잘 담겨 있다.

 

그의 소설들과 '자전거 기행'을 모두 품고 있는 잠재태가 이 책이었을 것이다.

 

그것들은 하필이면 묵어버린 논이나 밭의 가장자리,

경작할 수 없는 야산의 비탈처럼 버려진 자리만을 골라서 서식한다.

가을이 깊어지고, 습기가 빠져가는 땅이 메말라지면

그 척박한 자리에서 그것들의 삶은 한 해의 마지막 햇볕 아래서 바래어진다.

바래어지는 삶의 고통을 일끌고 그것들은 가벼움을 완성해 낸다.

그것들의 목숨 안에서 무게의 총화가 가벼움이고,

습기의 총화가 메마름이다.

초겨울의 마른 들에서 그것들은 헛것의 투명함과 헛것의 가벼움으로 바람에 흔들린다.

그것들은 빛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바람이 부는 쪽으로, 숙일 수 있는 머리를 끝까지 숙이지만,

그것들의 뿌리는 바람에 불려가지 않는다.

그것들은 바람에 시달리면서, 바래고 사위면서,

그 시달림 속으로 풍화되면서, 생사의 먼지로 퍼지고 번진다.(166)

 

'억새 우거진 보살의 나라'에서 묘사한 억새다.

이 억새를 읽노라니, 이제 나이가 든 김훈의 모습이기도 하고,

이 땅의 민중이기도 하다.

마치 김수영의 '풀'을 확장하여 읽는 느낌인데,

그것이 '운주사'와 어울렸으니, 말이 필요없다.

합장...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이 맞은편 골목에서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없었습니다(서시, 이성복)

 

이성복의 '남해 금산'에 맞대어, 서시를 읊는다.

마지막에 실린 시는 이렇다.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강이 끌어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남해 금산, 전문)

 

'한 여자'가 '그 여자'가 되는 과정,

화자가 돌 속의 여자를 만나러 들어가는 과정을 통해,

그 여자 떠나간 자리에,

나 혼자 남은 시.

그를 둘러싼, 푸른 하늘가,

그와 함께한 푸른 바닷물...

 

이것들은 남해 금산에 오른 사람이면 아~ 하고 느낄 문장이다.

'한 여자'와 '그 여자'에 대한 이야기도 멋지다.

 

한 여자는 살아있는 구체적인 여자로 떠오르기 이전의, 여자의 고통스런 잠재태이다.

'한 여자'는 모든 여자일 수 있지만,

 '그 여자'는 다시 태어나서우리에게 안겨야 한다.(86)

 

한 여자와 그 여자로 두 페이지를 채운 김훈도 굉장하다.

 

저녁 무렵의 바다를 한나절씩 들여다보는 일뿐이었다.

시간과 교접하는 바다는 수많은 색깔로 다만 흘러가고 흘러올 뿐이어서

내 가엾은 친구는

올 여름 내내 기름 물감을 배합하지 못하고 있었다.

선택은 곧 배반일 것이었다.

유화를 버리고 수묵화를 해야 할까보다고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기름으로 그리기를 버리고 물에 찍어서 그려보아야겠다는 것이었다.

"이 사람아, 그것은 물이냐 기름이냐의 문제가 아닐세."

더위와 매미소리가 한도 없이 남아 있는 여름의 한복판이었다.(73)

 

바다를 그리는 일은 어려울 것이다.

멈추지 않는 시간을 잡는 일만큼이나.

그래서, 그것은 소재의 문제가 아니라,

보는 사람의 마음의 문제가 되어야 한다.

 

삶도 그렇다.

너희와 우리의 문제가 아니다.

그 '사이' 균형의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정현종'에 주목한다.

 

잠과 각성 사이의 표정처럼

무서운 건 없다

그 모습처럼

참담한 건 없다

모든 '사이'는 무섭다

모든 '사이'는 참담하다(모든 사이는 무섭다, 전문)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섬, 전문)

 

이런 '사이'는 人間의 '사이 간'이기도 하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균형은 늘 깨어지기 쉽다.

쨍그랑, 유리가 깨어지듯,

금세 금이 가고 갈라진다.

 

물이냐, 기름이냐의 문제가 아닌 곳.

너희와 우리의 사이가 문제인 곳.

 

그것이 인간 세상인 모양이다.

 

김훈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초기 그의 문체를 버석거리며 쓸어 보듯 느낄 수 있는 글들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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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원 1 - 요석 그리고 원효
김선우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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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세자

 

미쳐서 아버지 영조가 궐마당에서 뒤주에 넣어 죽게됨.

 

원효

 

자유분방한 땡중이라 유학은 안 가고 해골물 마시고 도통한 뒤, 요석궁 앞 연못에 빠져서 어찌어찌 설총을 낳음.

 

 

이렇게 일방적인 주장을 역사적 사실이라 알면서 살아왔는데,

영화 '사도'와 설민석의 책, 그리고 이덕일의 책을 읽으면서,

'실록'과 '사도의 아내,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의 주장이 편견임을 공부하면서

<역사의 관점>이라는 것이 얼마나 함부로 굴려서는 안 되는 것인지를 깨닫는 요즘이다.

 

원효 역시 그랬다.

이 소설은 김선우의 원효에 대한 오마주지만

김선우가 그리고자 했던 것은

하대 신라의 여왕 시대가 끝나던 시점,

태종무열왕 김춘추 시대의 '호국 불교'가 가진 관점과

인간의 해방에 대한 원효의 사상이 대립하는 지점에서의 사태를 묘사하려는 것이었다.

 

마지막에 덧붙인 강신주의 해제가 더 애절했다.

원효와 의상에 대한 '송고승전'의 기술에서는 의상의 여자 선묘에 대한 이야기가 주인데,

호국불교의 이념으로 기술한 일연의 '원효'에서 그는 바람둥이이자 괴짜로 묘사되는 것이다.

 

역사라는 것은 이렇게 자기가 쓰고 싶어하는 면을 쓰는 <사관>에 따라 천차만별이 되는 것이다.

객관적인 역사 서술을 하는 일은 그래서 힘들지만,

편협된 권력자의 역사 서술을 하려는 시도는 또한 인류의 삶과 함께 꾸준히 지속될 것 같다.

작금의 역사교과서 사태 역시 그런 것이다.

 

이 소설은 하대 신라의 불교 문화를 통해,

세상은 가진 자들이 부귀영화 독점을 지속하기 위해 파괴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못가진자들의 마음이 평안을 위한 종교의 문제와 파괴적 전쟁의 피해를 바라보는 관점이 대립하는 지점을 그린다.

 

겉보기에는 원효와 요석의 사랑을 그럴싸하게 낭만적으로 그리지만,

의상과 원효만큼이나 다른 황룡사와 분황사,

귀족들의 사고방식과 민중의 사고방식,

이런 것들을 '아미타림'이라는 공동체를 통해 형상화하고 있다.

 

결국 '호국불교'로서의 화엄종과, 원효의 아미타 사상의 정토종, 쉬운 불교가 어떤 지점에서 근본적으로 다른지를

소설을 통해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권력자의 편에서 미워할 만한 대척점에 선 원효를

기록에서 바람둥이로 묘사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자기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자에 대한 압박은 권력자의 치사한 역사다.

 

누가 내게 자루없는 도끼를 주겠는가,

나는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을 찍어 내리라.

 

이런 시구절을 요석과 바람나고 싶은 땡중의 요설이라고 해석해서 소문내는 자들은,

전두환의 수천 억원(지금 시가로는 수십 조가 될 액수)는 모르쇠 하면서

노무현의 몇 억원에는 침튀기며 욕을 퍼붓는 자들의 심보와 같은 것이다.

 

원효는 누군가 자루 없는 도끼를 주면 그걸로 하늘을 지탱하는 기둥을 자르겠다고 노래.

동양 전통에서 자루는 권력을 상징.

즉, 자루없는 도끼, 몰가부는 권력자 없는 권력, 권력 아닌 권력, 최소한의 권력이다.

이것으로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을 베어버리겠다고 한다.

곧 혁명을 뜻하는 것.(2권, 304)

 

역사 교과서야 어찌 되었든 올바르게 가르치면 되지 않겠냐는 순진한 발언도 있다.

그러나, 역사 교과서를 통합한다는 것은,

다른 가르침을 불허하고 억압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함유한 언사인 셈이다.

 

원효를 혁명가로 서술하지 않고,

구멍 찾는 바람둥이로 기술하는 것은 혁명에 대한 의지를 가리려는 쇠항아리의 해석이었던 셈이다.

 

한동안 역사를 찾아 읽어야 할 모양이다.

 

'나라없는 나라'를 읽고 있는데,

거기도 짙은 노론의 그림자가 민비와 함께 드리운다.

 

아, <노론 300년>도 찾아 읽어야 할 모양이다.

이덕일의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와 함께...

 

 

 

고칠 곳 하나...

 

요석이 퀭한 눈으로 별궁의 대들보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보슬비에 촉촉이 젖은 대들보에 한동안 이마를 대고 있던 요석이 말했다.(175)

 

대들보는... 아주 높은 곳에 있다. 거기 이마를 대고 있거나... 손으로 쓸어 보기에는... 요석이 거인증이라면 몰라도~ 문설주 정도가 아니었나 싶다. 김선우가 생각했던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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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의 요리 - 요리사 이연복의 내공 있는 인생 이야기
이연복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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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복의 이야기를 적은 책이다.

이연복 지음이라고 되어있지만, 대담과 구술을 통해 적은 것이라 적었다.

 

'냉장고'에서 그를 보았는데,

요리의 레시피를 주절주절 불러댔다.

 

그런 비법을 다 말해주면 어떡하냐?

그런 건 상관없다. 더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데 도움이 되면 된다.

 

하긴,

그 몇 마디 주절대는 레시피를 통해 어떤 경지에 다다를 수 있다면, 그 사람 역시 굉장한 사람이겠지.

 

이 책을 통해서 화교의 삶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다.

한국인들이 이 터를 떠나서 이국땅에서 온갖 고통 속에서 삶을 겨우 영위하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듯 싶었다.

화교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그가

열한 살부터 칼을 잡고, 좌충우돌 요리를 하게 된 이야기는,

삶에 대해 이리재고 저리재는 젊은이들에게 교훈을 줄 수도 있겠다.

 

딸이 가장 좋아하는 동파육을 바쁘다는 핑계로 잘 해주지 못했다.

여섯 시간 동안 약불에 조리는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딸아이를 향한 내 마음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비록 표현은 잘 못하는 아빠일지 몰라도 이렇게 세심하고 소중하게 항상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까?(105)

 

부모가 재산을 물려주는 것도 좋고,

삶의 멘토가 되어주는 것도 좋지만,

그저, 이렇게 '실눈뜨고 볼 것'을 잊지 않는 일도 충분히 좋다.

 

내가 늘 이야기하는 게 '간만 잘 맞춰라'인데 아내는 그걸 잘 잡아냈다.

제아무리 좋은 재료를 써도 간이 안 맞으면 안 된다.

그리고 모든 요리가 100% 완벽하게 나오는 건 힘드니,

80% 정도 맛을 내겠다고 자신있게 덤비다 보면,

그렇게 해서 자기만의 맛도 찾고 실력도 느는 것이다.(142)

 

세상 최고의 맛은 '소금'이라고 한다.

소금이 없으면 어떤 맛도 낼 수 없으니...

 

나도 나이가 들면서 주방에서 뭔가를 하려고 서성대는데,

요즘엔 스마트폰을 잠시만 끄적거리면 레시피를 금세 찾을 수 있어 좋다.

그래서 이런 구절은 용기를 주는 말이었다.

80%만 해라. 좋다.

 

그의 음식에 대한 철학은 '정확, 정직'이란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할까

이런 망설임은 갖지 말자.

가야 할 길을 바르게 가는 것.

속임수나 꼼수 없이 정직하게 하는 것.(177)

 

나도 지금 직업을 27년째 하고 있다.

이제 14년 남았는데,

요즘들어 이런 생각을 늘 하게 된다.

다른 생각하지 말고,

가야 할 길을 가자는 것.

 

벼는 농부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영근다고 했으니,

아이들을 한 번이라도 더 쓰다듬어 주면서 남은 기간을 보낼 작정이다.

정직하게.

다른 사람들은 담임을 하기 싫어하는데,

나는 담임을 하지 않으면 재미가 없으니, 다행인 셈이다.

 

요리의 기초를 익히는 것은 무림에서 실력을 쌓는 것과 한 가지다.

어느 날은 수없이 칼질만 하고,

어느 날은 수없이 밀가루 반죽만 하고,

어느 날은 수없이 피만 밀고... 사소한 것부터 미치도록 잘해야 한다.

그게 바로 실력을 쌓는 것이다.

기술 하나를 제대로 익히고, 재료 하나를 끝까지 이해하고, 이론적인 것들에 대해서도 완벽하게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

 

그는 축농증 수술 후유증으로 냄새를 못 맡는다 한다.

맛으로만 요리를 하는 것은 요리사에게는 치명적인 핸디캡일 것인데,

그는 실력으로 부족한 부분을 커버한다.

 

자기 탓을 하지 않는 요리사를 만날 때가 있다.

손님이 없는 동네였다, 음식은 맛있는데 비싸서 사람들이 안 사 먹는다,

사장이 투자를 너무 안 했다 등 이유가 많다.

그런 게 다 이유일 수는 있다.

그러나 우선 자신을 돌아보라고 이야기해주고 싶다.(244)

 

어떤 직업이라도 그렇지 않을까?

'충분한 월급'은 세상에 없다고 한다.

자본의 사회에서 월급은 어쨌든 상대적으로 적은 것이니.

안 되는 데는 이유가 당연히 많다.

그러나, 우선 자신을 돌아보라는 충고는... 충분히 고맙다.

 

이 사회에서 교사를 하는 일은 참 고되다.

구조적인 문제도 있고 현대사의 질곡도 있으며,

학부모이 문제들도 있고, 교육과정의 문제나, 학생들의 문제도 많다.

그러나, 그것들만 탓하면 우리 직업은 힘겨워서 못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충분히 하고 있는지 돌아보는 일.

요즘처럼 세상이 거꾸로 갈 때일수록,

내 자리에서 나를 지키는 일이 소중함을 일깨워준, 고마운 책.

 

고마워, 연복이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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