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구에 돈 벌러 오지 않았다
이영광 지음 / 이불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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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시가 나올 리가 있겠나?

이 험한 시대에...

씨발~ 하는 한 마디 욕설이 더 시적인 함축을 담는 시대에.

 

이영광의 역설적 '잠언들', 그리고 '시대의 평론', 그리고 시를 가르치며 떠오른 '시 평론'을 단출하니 묶었다.

짧지만 읽는 마음은 무겁다.

그래.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라면,

이런 글이라도 읽어야 산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이성복, '그날' 중에서)

 

내 나라라는 적진에서 사는 것만 같다.

사라진 나라에서 살고 있는 것만 같다.

표절이 화제라니, 패러디나 해볼까?

 

모두 미쳤는데 아무도 정신을 잃지 않았다.(107)

 

아파야, 그게 인간이다.

남의 아픔 앞에서 우적우적 햄버거를 처먹는 것은 돼지새끼고 악마다.

그 아픔 앞을 스르륵 지나가는 것들은 유령이고 악마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최승자, '일찍이 나는' 중에서)

 

내 생은 루머에 불과하다고 신음했을 때,

그녀는 아마도 자신의 공동체와 등 뒤에 너울거리는 거대한 괴물의 그림자를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공포를 이기고 불어오는 어떤 낯선 목소리를 들었을 것이다.(108)

 

온통 아픔투성이인 삶의 조건들 속에서,

오늘도 선거만을 생각하는 정치인들을 보노라면,

내 나라라는 적진에서 살고 있는 오늘이 슬프다.

살아있다는 루머가 꿈만 같다.

 

책을 많이 읽어도 정신의 키가 안 자라는 사람들이 있다.

책을 먹고 눈다고나 할까.

세상에 아름다운 배설물은 없다.

앎은 소중하다. 하지만 이들은 대체로, 아니 언제나, 모르지 않으려 한다.

모름을 무시하려 한다.

책은 더 잘 모르기 위해 읽는 것 아닐까?(24)

 

뜨끔하다. 모르지 않으려 한다는 말에...

아는 체 나서는 것이 자랑이라 여기는 인간이라서...

 

 그가 쓰는 역설들은

모순이어서 더욱 간절하다.

 

인생이라는 것보다 더 큰 과장이 애초에 있을까.(32)

 

싫지 않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좋지 않다는 게 문제다.

싫지 않은 것은 참아야 하고, 좋지 않은 것은 참을 수 없다.

좋아야 한다.(51)

 

알아주는 것보다는 알아보는 것이 더 중요한지도 모르겠다.(58)

 

의문으로 가득찬 사람을 만나면 행복하다.

대답으로 가득찬 사람을 만나는 건 끔찍하다.

더구나 단 하나의 대답을 가진 경우엔.(68)

 

그의 잠언들은 알쏭달쏭한 속에서 말장난인듯도 하지만, 씹는 맛이 있다.

아무튼, 끔찍한 인간이 되지나 말아야지... 하게 된다.

 

진심은, 늘 조금 늦게 오는 것같다.

문제는 진심을 생의 모든 시간으로 확장시키질 못한다는 것.(33)

 

죽고 싶은 것, 그것이 삶이다.

살고 싶은 것, 그것이 죽음이다.(74)

 

포기가 습관이 된다고? 습관이야말로 포기다.(76)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곰곰 읽어보면 엉켜있다.

그게 삶이고, 죽음이다.

죽어야 그 삶의 본모습이 온전히 보인다.

 

그의 시대 평론은 '感時'란 말을 쓴다.

두보의 시'춘망'에 감시화천루... 란 구절에서 온 거라 한다.

시절을 애상히 여긴다는 뜻이라 한다.

아, 정말 슬픈 시절이다.

(고교에서 배우는 두시 언해에는 '시절을 감탄하니 꽃이 눈물을 뿌리게 코'라고 나온다. 꽃이 눈물을 뿌리게 한다는 뜻이다.)

 

문학은 들을 테면 들어보라고 떠벌리는 일이 아니라

먼 곳의 희미한 말을 초조하게 들으려 하는 일,

그 말들이 날 몰라볼까봐 조바심내며 귀 기울이는 일.

내가 문학을 조금만 더 알았더라면 그 말들을 더 잘 듣고 더 잘 잊지 않게 되었을텐데.(169)

 

그의 문학 평론 수업은 심심하다.

문학이란 것이 거창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작고 희미한 것들을 마음으로 듣는 일이어서,

문학을 가르치는 일은 큰 소리로 외칠 것이 없다.

 

배운 걸 잊을 것.

하지만 그보다는 잊는 걸 배울 것.

잊음을 배울 것.(198)

 

삶은 자살의 바다에 무시로 깃털을 스치는 위태로운 비행같은 것이다.

술에 취해 '다 죽여 버릴거야'라고 외치던 청년이

발음이 꼬여 '다 죽어 버릴거야'로 발음된,

세상을 향한 칼끝이 돌연 저 자신을 정통으로 겨눌 때,

진심은 의식의 희미한 방심상태를 뚫고 저도 몰래 고통스런 얼굴을 드러낸다.(203)

 

문학도 여러 층이다.

 

나는 강신무와 투시자와 미친 시인의 격렬한 세계에 꽤 오래 끌렸지만,

요즘은 다소 혼란스럽다.

영빨은 유한하고, 기예의 수련에는 끝이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투시자건 예술가건 결국 모릅을 상대할 수밖에 없지 않나.

모르는 말은 일면 앎의 코드로 번역되어야 하고,

아는 말의 벼림이 지극한 곳에선 늘 모르는 말이 태어나므로...(226)

 

문학의 언어는 그렇게 앎과 모름의 틈에서 깨어나는 알이다.

그래서 모든 예언은 반쯤만 말한 곳에서 해결책을 제시하고,

원전보다 훨씬 두꺼운 주석서들을 양산하게 되는 거다.

 

시는 막막한 외로움, 공포와 크게 다른 것이 아니다.

시인은 기쁨을 노래할 때도 막막해하는 족속이다.

세상에는 너무도 많은 알묘조장의 어리석음을 저지르는 자들로 가득하다.

얻기 위해 애쓰고, 해치고 빼앗는 패악을 권하는 세상.

여기서 시인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질까 우려하는

기나라 사람의 '백색 공포'를 잡아내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한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다면...

그것은 시인이 탄식해야 할 자리다.

 

문학이 그 아픔의 씻김굿을 보태야 할 자리다.

 

인생이 루머같을 때,

기우라도 탄식하는 이의 소리를 같이 들을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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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13 15: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벌레 강씨 2016-01-13 16: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막연히 생각하던것들과 더 깊고 확실한 내용을 담은 시들... 읽고 배워보고 해야겟군요
 
표백 - 제1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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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로 표백(漂白)이라 쓰고 N포 세대라 읽는다.

2011년에 N포 세대라는 말이 없어서 작가는 표백 세대란 말을 썼을 뿐이다.

이전의 X세대라든지, 그런 말들에는 가능성이 그나마 들어 있지만,

작금의 88만원 세대 이후에 생긴 비관적인 말들에 대한 돌직구가 이 소설이다.

 

대학을 졸업하면 취업이 되고,

다들 그만그만한 사람을 만나 아이 낳고 기르면서 살아가게 될 줄 알았던 세대가 <1988> 응팔의 세대다.

IMF 구제금융기 이후,

한국에서 제조업은 급격히 쇠퇴하였고,

제조업 관리직 분야 역시 사라져 일자리 자체가 없어졌다.

 

당연히 취업하고 결혼해서 나이 마흔이면 <졸업 20주년> 기념으로 호텔 강당을 빌려 은사님 모시고 큰절도 하고 하던 풍속도는 급격히 사라지고 있다.

 

이 소설은 충분히 '문제' 소설이다.

비난을 염두에 둔 듯,

어디에서도 자살선언문을 보게 되지 않길 바라며...라고 썼지만,

행복한 삶을 누리는 일이 쉽지 않게 된 시절에, 그런 희망은 난망이다.

 

행복한 삶은 시대가 주는 것이 아니다.

어떤 시대가 오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튼튼해야 한다.

지금 이 시대가 역사상 가장 참혹한 시기도 아니다.

유태인 절멸 수용소에도,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도 참혹은 있었고,

그야말로 1988 시대의 군대에서도 무지막지한 폭력과 비인간성은 있었다.

그러나, 이곳만 벗어나면... 하는 희망이 있어서인지, 자살하지 않았다.

 

인생은 아름다운가?

Why do U live? 닷컴...이라니...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다.

 

알베르 카뮈가 남긴 이 말이 절절한 때,

이 소설을 읽어볼 일이다.

 

왜 자살하지 않는가? 하는 질문을 '자살해라'는 '사주'로 읽는 사람도 있겠으나,

삶의 철학이란,

결국 왜 사는가?를 골똘히 생각하지 않으면 부조리투성이인 자기 삶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겠다.

 

장강명은 다시 묻는다.

왜 살고 있느냐고.

소설 속에서는 죽음이 가득 이야기되지만,

부조리한 시지프의 하루는 이렇게 저물어 가는 속에서 삶의 희망을 되찾는다.

 

자식을 죽음으로 몰고가지 않기 위해서는,

아이들을 학원으로 공부로 몰고가지 않아야 하고,

비록 세상이 더이상 변화의 기미가 보이지 않더라도,

서로 다사롭게 등 두드리며 살 수 있는 가정이 있어야 한다.

 

삶의 철학이 없다면, 결국 죽음의 철학 앞에서 부조리한 삶은 이길 수 없다.

 

우리 세대가 하루하루 좌절에 빠지는 이유가 우리 개개인의 잘못이 아님을 알고,

그 좌절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일을 해야할지 고민하고 있다면...(182)

 

산업화와 민주화를

그것도 전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드라마틱하게 이뤄낸 세대가

우리 세대를 우습게 보고

열심히 노력하지 않는다거나 분노할줄 모른다고 비아냥거리는 이유는...

더이상 이 시대는 혁신적 사상의 시도가 없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잘못이 아니다.(190)

 

표백된 세계는

아무도 더 나은 시스템을 떠올리지 못한다.

거대한 흰색 세계는 모든 빛을 흡수하며 무결점 상태를 유지한다.(192)

 

젊은 세대들의 부조리한 삶을 손가락질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현실을 직시하고, 알바 최저 시급을 높인다든지 해서 삶의 질을 보장하여야 한다.

 

이 소설의 스토리 구조는 마치 오십 년 전의 최인훈을 읽는 기분이다.

사회 경제적 토대의 분석과 사회의 불안한 모습을 엇갈려가며 토론하는 식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는

최인훈의 <회색인>이 내세운 지식인의 중간지대 어정쩡함이었는데,

장강명의 소설은 아예 회색지대조차 부정된 <표백의 세상>을 설정하여 그 곤란도를 설명하고 있다.

 

N포 세대라는 친구들에게

행복한 미래를 꿈꾸라는 <세상을 바꾸는 시간>들은 참으로 허무하다.

물론, 어떤 척박한 삶에서도 누군가는 유대인 수용소 내의 <카포>마냥,

다른 불행한 사람들과는 다른 소수의 감독관이 있을 수 있다.

 

자신의 처지를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야 한다는 투의 <네 잘못 론>으로는 젊은이들의 좌절을 감싸안을 수 없다.

민주화된 시대의 사회적 보호망이 더 강화되어야 하는 세상인 것인데...

시절이 하수상하니... 어떤 말도 힘이 되지 않는다.

 

아무튼 문제작을 이렇게 만나고 나니 장강명의 힘에 기대도 큰 한편,

처음부터 이렇게 큰 문제의식에 맞서고 나면, 그 쓰는 힘이 소진될까 걱정되는 마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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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책에는 없는 20가지 의학 이야기 - 현직 의사가 쓴 생활 속 질병과 의학의 역사
박지욱 지음 / 시공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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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오'는 라틴어로 회색이란다.

소아마비를 '폴리오'라고 하는데, 우리 어린 시절만 해도 소아마비로 고생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그런데 소아마비는 가난한 집보다 부유하고 청결한 집 아이들이 잘 걸리는 경향이 확연했다고 한다.

세상에나... 수인성 전염병인데, 지저분한 환경이 오히려 낫다니...

이 책에서 가장 감명깊었던 것이 폴리오의 퇴치를 위한 학자들의 연구였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폴리오 환자가 아니었다면 아직도 폴리오는 정복당한 질병이 아닐지도 모른다.

다만... 아직도 9.11 테러 이후 심각한 전쟁 중인 아프가니스탄 등에는 백신이 닿지 않는다는...

결국, 질병도 정치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다.

 

이 책에는 다양한 의학적 역사 상식이 가득하다.

그리고 질병에 대한 쉬운 설명들도 유용하고,

결핵의 역사와 현황, 당뇨와 고혈압 등에 대한 이야기들도 흥미롭게 읽었다.

 

췌장의 랑게르한스 섬과 인슐린(섬이란 뜻) 이야기 같은 것들을 읽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책을 읽게 된다.

 

의학자이거나,

과학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

의대를 지망하는 학생들이라면 아주 흥미롭게 읽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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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안드레아 - 열여덟 살 사람 아들과 편지를 주고받다
룽잉타이.안드레아 지음, 강영희 옮김 / 양철북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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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1988이 바야흐로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이제 아이들이 성인이 되었는데,

대국에 지쳐 잠든 아들과 의대생으로 고단한 나날을 보내다 픽 쓰러진 아들을 바라보는 부모의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공사에 들어간 정팔이 부모도 아이의 자는 모습을 넋을 잃고 보고 있었다.

그래, 피곤해서 곤하게 자는 아이를 바라보는 일만도... 부모에게는 '사랑법'이다.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리고도 남는 시간은

침묵할 것.

 

또는 꽃에 대하여

또는 하늘에 대하여

또는 무덤에 대하여

 

서둘지 말 것

침묵할 것.

 

그대 살 속의

오래 전에 굳은 날개와

흐르지 않는 강물과

누워있는 누워있는 구름,

결코 잠깨지 않는 별을

 

쉽게 꿈꾸지 말고

쉽게 흐르지 말고

쉽게 꽃피지 말고

그러므로

 

실눈으로 볼 것

떠나고 싶은 자

홀로 떠나는 모습을

잠들고 싶은 자

홀로 잠드는 모습을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 뒤에 있다. (강은교, 사랑법)

 

아들의 잠든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엄마인데,

이 책의 엄마는 아이가 독일에서 살고 있다.

국제 결혼을 하여 말도 언어로 깊은 내용을 소통하기도 쉽지 않고,

문화도 다른 세상에 사는 아들과 소통을 위하여 애쓰는 모습은

아름다운 한편 쓸쓸한 빈 공간이 언제나 느껴질 것 같아 짠하다.

 

독일이나 홍콩이나 금연 정책은 똑같아요.

하지만 두 나라의 금연 정책엔 근본적 차이가 있어요.

독일에서는 먼저 길고 긴 갑론을박이 있었지만, 홍콩에는 없었다는 것.

홍콩 정부능 일단 하겠다고 하면 곧장 강행할 뿐 아니라,

무슨 초능력이라도 가진 것처럼 정부가 하는 일이면 그게 뭐든 '모든 사람이 한 마음'이라는 모양새죠.(258)

 

사소한 금연 정책에 대하여도 합리적 세계에 사는 사람들과,

일방적 소통 부재의 국가에 사는 사람들의 대응은 다르다.

 

열여덟 아들부터 스물 하나가 되기까지 주고 받은 편지글들 속에서는

지적인 어머니의 세상에 대한 통찰도 가득하고,

한창 성장중인 아들의 상념도 가득하다.

 

먼 길에서 아들의 성장을 마음 태워가며 지켜보기만 해야할 어머니의 마음이

표지에 담긴 사진처럼,

안쓰러움이 가득 담긴 걱정스런 모정으로 가득하다.

 

사소한 습관에서부터 세계관에 대한 이야기까지 둘의 대화 주제는 끝없지만,

읽으면서 그 행간에서 끝없는 아쉬움이 읽힌다.

밤새 이야기나누기보다는,

그저 잠자고 있는 눈감은 아들만 바라보는 일이 더 배부른 모성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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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린 세상 맑은 말 - 정민 교수가 가려 엮은 명청 시대 아포리즘
정민 지음 / 해냄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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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린 세상'은 언제나 그런 모양이다.

'맑은 말'은 '청언'이라고 하는데, 자신을 일깨우는 말이나, 부유함을 부러워 말라는 경구이기도 하다.

 

정민의 이 책은 그야말로 청언 소품의 원문과 번역한 부분을 싣고, 간단한 자신의 사색을 담은 책이라 가볍다.

 

속마음 서로 훤히 비추어 보매

천하와 더불어 함께 가을 달빛 나누고 싶고,

의기가 서로 투합하니

천하와 더불어 따스한 봄바람 속에 앉아 있고 싶구나.(31)

 

요즘은 인터넷으로나마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이들을 만날 수 있다.

그렇지만 요즘도 주변에서 나만 이상한 사람처럼

모두들 세상살이에 별 문제도 못 느끼며 살고 있다는 걸 느낄 때 나는 무척 외롭다.

직접 사람을 만나는 일 외에는 소통이 불가능하던 시절,

논어의 첫구절도 '학문을 즐기는 이'가 '친구를 만나는 일'이 즐거움이라 할 만 했을 것이다.

 

일찍 혼인해야 한다고 말하지 말라.

혼인한 뒤로는 할 일이 적지 않다.

승려나 도사가 부럽다고 말하지 말라.

승려나 도사가 된 뒤에는 마음이 편치 않다.

다만 만족을 아는 이는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며 새벽까지 달게 자고,

오직 한가로움을 즐길 줄 아는 이는 편안하게 늙음에 이른다.(44)

 

결혼이 늦다고 쓸데 없이 걱정하고,

자신의 번잡한 처지를 늘 불평한다.

다 마음의 번잡을 안고 살아 그렇다.

그런데, 한가함을 즐기는 것에 대해서도 역시 경계를 한다.

 

젊은 시절에는 편안한 환경에 안주해서는 안 되고,

늙어서는 역경에 처해서는 안 된다.

중년에는 한가로운 경계에 놓임이 좋지 않다.(49)

 

특이한 것이 '중년'이다.

은퇴한 나이가 되기 전까지가 중년일 터인데, 그때 이미 한가로운 경계만을 추구하는 일에 조심하란 뜻이다.

 

젊은 시절의 독서는 벽틈 사이로 달을 엿봄과 같고,

중년의 독서는 뜰 가운데서 달을 바라보는 것과 다름없다.

노년의 독서는 누각 위에서 달을 즐김과도 같다.(124)

 

그렇다.

중년은 일도 열심히 해야하지만, 독서도 부지런히 해야한다.

젊은 시절은 가슴이 뜨겁지만 전체를 보기 힘들다.

중년이 되면 달을 바라볼 수는 있게 된다. 그렇지만, 노년이 된다면, 그 풍광을 즐길 수 있다고 하니, 참 좋은 말이다.

(책에서는 '달 구경'이라고 했으나, 玩月은 그저 구경하는 것만은 아닌 듯 싶다.)

 

고요함 속에 위엄이 깃들고

조급함 속에 위엄은 사라진다.(65)

 

나이가 들면 조급함이 조금씩 사라진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위엄이 저절로 생긴다.

그런데 나이들어 추한 모습이 입을 자꾸 벌리는 일이다.

조급히 입을 열지 말고, 지갑을 열 일이다.

 

남을 증오하는 모습은 술잔에 떨어뜨리고,

세상을 슬퍼하는 마음은 시구 속에 감추어 둔다.(72)

 

시의 소용은 그런 것이다.

세상에 분노할 때, 세상사가 뜻같지 않을 때... 감추어 두는 용도.

 

책을 쌓아두기만 하고 읽지 않는다면 책가게의 책장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읽기만 하고 실천할 수 없다면 이른바 두발 달린 '책장'이다.(137)

 

반성할 노릇이다.

도서관장을 하면서 책을 사서 부려 놓고는, 욕심만 많다.

내 몸이 책장과도 같다.

소중한 책을 가지는 '장서가'는 못되더라도,

스스로가 그저 책장이나 되어버리는 일은 없어야겠다.

올해는 많이 읽고, 읽는 족족 책을 내가야겠다.

 

산에서 지내는 네 법이 있다.

나무는 줄지어 심지 않고, 바위는 제멋대로 생긴대로 놓아두고,

집은 거창하게 짓지 않고, 마음에는 속된 일을 들이지 않는다.(182)

 

세상과 어울리는 법은 가만히 씩 웃는 데 있고,

세상을 초탈하는 법은 차갑게 반만 말함에 있다.(210)

 

應世法 微微一笑 度世法 冷冷半語

 

'응세'를 사전에서 찾아 보면,

세상() 형편(便)에 따름

이라 되어 있고,

'도세'는,

①삶과 죽음의 현실()을 극복()하고 열반()에 들어감  ②도생(). 중생()을 제도()함

이라 되어 있다.

 

응세는 처세와 비슷할 것이고, 도세는 초월자에 비슷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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