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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평점 :
윌리엄 스토너는 박사학위를 받고 강사가 되어 강단에 섰다.
그는 조교수 이상 올라가지 못했으며,
그의 강의를 들은 학생들 중에는 그를 조금이라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8)
이상한 소설이다.
여느 소설이라면,
가장 화끈한 장면을 맨 앞에 놓아서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을 궁리에 빠지기 쉬울 터인데,
아니, 선명하게 기억하는 사람도 거의 없을 스토너를 위한 이 책을 읽으라니...
그래서 나도 이 책의 수십 페이지를 읽지 못해 덮어 두었는데,
빨간 책방의 '스토너'편을 들으며 출퇴근 하다가,
'바위'같은 남자... 스토너가 캐서린과 연애를 하는 이야기도 있음을 듣고
12장부터 읽기 시작해서 끝까지 읽은 다음,
다시 처음부터 11장을 읽었다.
저녁 풍경 속을 천천히 걸으면서 그 향기를 들이마시고,
혀에 닿는 싸늘한 밤공기를 맛보았다.
그가 걷고 있는 지금 이순간만으로 충분해서
더 이상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은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265)
스토너가 캐서린과 사랑하는 마음을 느끼는 부분의 묘사다.
이 소설은 마치 잘 짜여진 직조물을 감상하듯 부분부분 빛나는 문장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일이 지나고 나서야
그 일의 의미를 곱씹으며 정리를 하듯,
챕터의 마지막 부분에서 재미있는 표현들을 부려 둔 것들을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아무 재미도 없을 것 같은 표지의 남자, 스토너의 삶을 읽는 일은 재미있지만은 않다.
히스테릭한 아내와의 불행한 결혼 생활로 인한 고난과,
학과에서 소외당하는 학자의 모습은 삶의 빛을 무채색으로
표지의 그림처럼 연필 소묘처럼 느껴지게 한다.
그런 소설에서 갑자기 화사한 수채화가 그려지게 하는 부분이 12장 부터이다.
나이 마흔셋에 윌리엄 스토너는 다른 사람들이 훨씬 더 어린 나이에 이미 배운 것을 배웠다.
첫사랑이 곧 마지막 사랑은 아니며,
사랑은 종착역이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라는 것.(272)
사람은 누구나 이런 것을 꿈꾼다.
텔레비전의 수많은 막장 드라마들 역시, 이런 로망을 담고 있는 것이리라.
그래서 이 책을 집어들고 지루함에 던져두고 싶은 사람이라면,
나처럼 12장부터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그대 내게서 계절을 보리
추위에 떠는 나뭇가지에
노란 이파리들이 몇 잎 또는 하나도 없는 계절
얼마 전 예쁜 새들이 노래했으나 살풍경한 폐허가 된 성가대석을
내게서 그대 그 날의 황혼을 보리
석양이 서쪽에서 희미해졌을 때처럼
머지않아 음흑의 밤이 가져갈 황혼
모든 것을 안식에 봉인하는 죽음의 두 번째 자아
그 암흑의 밤이 닥쳐올 황혼을
내게서 그대 그렇게 타는 불꽃의 빛을 보리
양분이 되었던 것과 함께 소진되어
반드시 목숨을 다해야 할 죽음의 침상처럼
젊음이 타고 남은 재 위에 놓인 불꽃
그대 이것을 알아차리면 그대의 사랑이 더욱 강해져
머지않아 떠나야 하는 것을 잘 사랑하리(21)
이 소네트의 가르침이 스토너의 주제를 함축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이집에 온 뒤로 누구든 자신의 이름을 부른 것은 지금이 처음임을 깨달았다.(89)
결혼을 허락받기 위해 처가에 간 윌리엄에게
성급하게 결혼을 밀어붙이는 가족의 모습을 이렇게 한 마디로 정리한다.
이 대목에서 이미 불행한 전조가 보인다.
얼마 뒤 그는 지금껏 이디스가 우는 소리를 들은 적이 한 번도 없었음을 깨달았다.(115)
결혼과 히스테리와 불행한 나날...
사랑할 수 없는 관계 속에서 뒤늦은 '깨달음'들이 이어진다.
이제 중년이 된 그는
사랑이란 은총도 환상도 아니라는 것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사랑이란 무언가 되어가는 행위.
순간순간 하루하루 의지와 지성과 마음으로 창조되고 수정되는 상태였다.(274)
젊은 시절, 이디스와의 불같은 사랑이 상처의 화인만 남긴 시간에,
그는 사랑이란 것이 목적이 아니라 과정임을 알게 된다.
스토너는 그 사실을 깨닫고 자신이 그것을 미리 알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그녀가 차마 하지 못한 말을 담은 마지막 편지를 남기지 않았다는 것에 감사했다.(305)
그는 그녀에게 적어도 그런 생활이라도 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레이스가 술을 마실 수 있다는 사실이 고마웠다.(351)
스토너의 애인과 딸이 고통을 겪으며 이별하고 알콜중독에 빠지게 되는 상황을,
이렇게 감사하고 고마움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질끈 넘길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인생이기라도 하다는 듯이 씁쓸하다.
손가락에서 힘이 빠지자 책이 고요히 정지한 그의 몸 위를 천천히,
그러다가 점점 빨리 움직여서 방의 침묵 속으로 떨어졌다.(392)
이 마지막 구절에 도달하기까지,
작가 존 윌리엄스는 마지막 구절을 어떻게 맺을지... 무척이나 궁금했는데,
역시 책과 함께 죽음을 맞는 장면으로 마친다.
삶에 대하여 관조할 수 있는 이야기.
다소 지루할 수 있으나,
대학의 구조가 그럴 수밖에 없음을 담아 내는,
그 속에서 고루해보이지만 스스로 빛을 찾아가는 삶을 읽을 수 있는 책.
빛나는 묘사들과 심리에 대한 서술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읽어볼 만한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