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곤궁하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1801년 음력으로 11월 22~23일 쯤 역적죄인 신분으로 다산은 머나먼 바닷가 강진읍에 도착합니다. 무서운 전염병 환자라도 만난 듯, 사람이면 모두 문을 부수고 담장을 넘어뜨리며 달아나 상대도 해주지 않을 때에, 어느 주막집의 늙은 노파가 다산이 거처할 집을 허락해주었습니다. 천추에 칭송을 받아야 할 의로운 여인이었습니다.
강진읍내의 동문 밖 샘거리에 있던 흙으로 지은 토담집이었습니다. 추위에 언 몸을 녹이고 주린 배에 밥과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잠을 자고 책을 읽을 수 있으며 천한 집안인 아전들의 아들들을 가르칠 수가 있었던 곳이 바로 흙담집 초가삼간의 그 집이었습니다. 누추한 주막집, 그곳이 다산의 학문이 익어가던 요람이 될 줄 그 누가 알았겠습니까.
“사의재란 내가 강진에서 귀양살이하며 살아가던 방이다.
생각은 마땅히 맑아야 하니 맑지 못하면 곧바로 맑게 해야 한다.
용모는 마땅히 엄숙해야 하니 엄숙하지 못하면 곧바로 엄숙함이 엉기도록 해야 한다.
언어는 마땅히 과묵해야 하니 말이 많다면 곧바로 그치게 해야 한다.
동작은 마땅히 후중하게 해야 하니 후중하지 못하다면 곧바로 더디게 해야 한다.
이런 이유로 그 방의 이름을 ‘네가지를 마땅하게 해야 할 방’(四宜之齋)이라고 했다. 마땅함(宜之者)이라는 것은 의(義)에 맞도록 하는 것이니 의(義)로 규제함이다...” 1803년 음력 11월 10일 동짓날 그날 <주역>의 건괘(乾卦)를 읽었다는 날짜까지 밝혔습니다.
생각, 용모, 언어, 동작 등 학자가 지녀야 할 태도에 조금이라도 소홀함이 있다면 철저하게 반성하고 올바르게 규제하면서 학자적인 행동으로 돌는 스스로의 다짐이자 외부에 대한 선포라고 생각됩니다. 비록 비좁고 누추한 방이지만 하늘 우러러, 그리고 땅을 굽어보아 한 점 부끄러움 없이 당당하고 떳떳하게 마음의 자유를 만끽하면서 살아가겠다는 선비다운 주장이었습니다. 이 방에서 다산의 상례(喪禮)와 주역의 연구가 이루어졌으니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집이지만 생각하면 매우 의미가 큰 집이 아닐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