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경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 / 엘릭시르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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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네자와호노부의 책은 '왕과 서커스'를 조금 본 정도인데,

이 책을 읽어보니 재미있어 보인다.

 

몇 편의 단편이 있는데,

'야경'의 마무리가 유달리 짠하다.

직업에 맞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면 주변에서 잔소리와 구박이 심하게 마련인데,

당사자에게는 여간 스트레스가 아니다.

평범해보이는 사건의 이면에 감추어진 비밀을 들춰보면 삶이란 게 참 짠하다.

 

문지기라는 소설의 기이한 결말이나,

사인숙에서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안도의 한숨 곁을 지나는 당황스러움 같은 것도 소설을 읽는 재미다.

 

석류의 질투는

내가 좋아하는 석류꽃만큼이나 매혹적인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막상 아름다운 열매 속의 시디신 액즙처럼 소름돋는 이야기다.

 

사는 일은

등차수열처럼 나란히 차근차근 전개되지 않는다.

교과서처럼 한 단원이 마치면 다음 단원이 시작되지도 않는다.

 

규칙도 없고 원칙도 없다.

법칙도 없고 그래서 늘 회한으로 가득하다.

그런 이야기를 드려주려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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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빈리 일기
박용하 지음 / 사문난적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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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 사는 시인, 박용하.

주로 논둑길을 걷다가 뛰고는 한다.

그리고 캔맥주를 여덟 개, 열두 개, 열네 개,

마시고 뻗는다.

 

2009년, 그 해엔 유독 속상한 일이 많았지.

전임 대통령의 죽음을 맞았고,

용산 사고도 있었지.

사대강은 파헤쳐지기 시작했고...

 

그러나, 꽃들은 지천으로 피었고,

열매를 맺어 살구를, 앵두를, 홍시를 매달았으며

쪽파, 마늘, 배추, 호박꽃조차 빗속에 아름다이 피워올렸다.

 

인간처럼

뜨겁고 쓸쓸한 나무도 없을 테지만,

 

내 속에 너무 많은 인간이 들어와 있다

그게 나를 망치고 있다(221)

 

텔레비전이라곤 EBS가 좀 볼만하다는 말도 아프게 들리고,

그의 음주벽은 고통스런 현실을 사는 몸부림이기도 했다.

 

주변에는 욕심없는 노인들로 가득하지만, 세상은 또 뜨거웠다.

 

우리는 아직도 시민 이전에 있고,

시민 의식 이전에 있고

시민 사회 이전에 있다.

이슬만한 양심 이전에 있다.(118)

 

그런 시대였다.

비루한 시대였고, 슬프지만 무릎꿇던 시대였다.

 

하루가 일생에서 사라지는 것처럼 절박한 게 또 있을까(168)

 

오빈리라는 마을에서

하루를 사는 일은 물음표의 나열이다.

 

오후에 오빈리 십만 평 황금빛 들녘을 걸었다.

메뚜기도 심심찮게 뛰었다.

뛰지 말고 걷고 싶은 날씨였다.

천지사방이 그윽한 빛의 잔치였다.

빛이 물들고 있었다.

살았고 살고 있고 살 것이다. 그리고 멸할 것이다.

저녁에 동쪽 산마루 위로 솟아오르는 보름달을 옥상에서 지켜봤다.(199)

 

그렇게 하루씩 사는 시인의 일기는 슴슴했다.

그게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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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 손철주의 음악이 있는 옛 그림 강의
손철주 지음 / 김영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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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의 '금시조'에 이런 구절이 있다.

 

藝는 道의 香이며

法은 道의 옷이다.

道가 없으면 藝도 法도 없다.

 

서도를 이루기 위해서는

서예는 향기고

서법은 격식의 옷이다.

도가 없이 예나 법을 운하는 일은 무의미하다... 이런 의미일까?

 

음악은 소리가 그리는 그림이요,

그림은 붓이 퉁기는 음악이다.(6)

 

옛 사람들 참 대구 좋아한다.

옛 그림과 음악의 흥을 이야기하려니 대구가 튀어오르나보다.

 

거문고를 배우는 것은

기술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배우는 것이다.(사기, 공자세가)

 

이문열의 법이나 예가 격식이나 기예라면, 배우고자 하는 것은 도라는 이야기겠다.

 

하늘에서 나와서 사람에게 깃들고

빈 것에서 발생해 자연에서 일궈진 소리...

악기는 소리를 내는 도구지만,

소리를 내지 않는 악기의 연주에서

우리는 음악의 근본을 찾는다.

이것이 무현금의 의미다.(21)

 

좋은 친구는 아무 말이 없이도

서로 따로 폰을 보고 있어도,

그냥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친구다.

아름다운 소리도 좋지만,

음악은 그 무음도 즐겁다.

 

그림을 읽어주는 솜씨도 즐겁고,

이야기가 끝도 없이 퍼지는 질펀함도 흥겹다.

 

처마 끝의 빗소리는 번뇌를 끊어주고,

산자락의 폭포 소리는 속기를 씻어준다.(47)

 

은일사의 경지까지야 이르지 못할지라도,

매화 핀다고 유원지를 난장판으로 만드는 시속 사람들의 작태는 피할 노릇이다.

 

아취는 비근해서 익숙하고 습관적이어서 통속화된 것을 벗어나

늘 반성하듯 돌아보고 절도 있게 행동하는 가운데

고아한 정취와 은근한 멋이 우러나오는 삶의 태도입니다.(197)

 

은일함과 우아한 모임에서 느끼는 <풍류>

이 세가지가 이 책의 주제다. 은일, 아집, 풍류...

 

모여서 논하면서 반성하고

세상을 돌아보는 멋,

비록 양반들만의 그것이지만 멋진 일이다.

 

조선은 상놈을 무시하고,

그깟 양반놈들의 나라로 망해버리고 말았지만,

그래서 오히려 은일자들의 쓴맛 가득한 비판의 질정으로 그득하지만,

그것을 통해 현대를 바라볼 수 있는 관점까지 손철주가 제시해 주었더라면 더 좋았지 싶어 아주 조금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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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유토피아
리아 페이- 베르퀴스트·정희진 외 62인 지음, 김지선 옮김, 알렉산드라 브로드스키 & 레 / 휴머니스트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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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은 지나치게 단편적인 글들로 가득하다.

처음 수십 페이지를 읽을 때는,

일관성도 없고 특별한 주제에 따라 진행되지 않는 파편들에 실망했다.

(그래서 별을 하나 깎았다.)

그렇지만 읽어나가는 동안,

페미니즘의 관점은 어느 한 측면에서 시작하여 밀고 나가기 힘든 것임을 염두에 두고,

다양한 종류의 이야기를 늘어놓음으로써,

페미니즘의 다양한 주장의 초점들을 독자가 구성해나갈 수 있도록

열린 스토리를 구성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고개를 주억거리며 읽었다.

 

마지막 부분에 페미니즘의 다양한 측면을 찾아읽기 형식으로 인덱스를 붙여둔 것을 보니,

역시 그런 의도였구나 싶었다.

 

표지에는 여러 여성들의 모습이 조합되어 있다.

유색인종도 있고, 주근깨가 두드러지며,

미모보다는 자신감있는 여성의 모습이다.

 

한국 여성의 글도 몇 편 보인다.

한국 수준의 페미니즘과 다양한 유럽의 그것은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직도 진보적인 사람들조차

퀴어 축제나 성소수자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발언하기 힘든 것이 현실이고,

희한한 기독교의 나라에서 페미니즘에 저항하는 기독교가 가득한 것이 이 나라다.

 

여성 대통령이 먹통이 되어 감옥에 가게 생겼고,

이정미 헌재 재판관의 헤어롤이 재미있는 이야기로 회자된다.

 

미국에서도 70년대 이후 물가는 뛰는데 월급이 인상되지 않자

여성들이 일터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더블 인컴이 되어야 겨우 살 수 있는 9시부터 5시까지 일하는 여성들의 고단한 삶을 그린 영화가

9 to 5 였다.

이제 더블 인컴에 노 키드(DINK)라야 산다는 딩크족도 생기는 판이다.

 

유색인종 여성에게는 더욱 심한 족쇄가 작용할 것이다.

 

정희진의 글에서,

그가 유학가려는데, 모든 가족들이 말했다는 걸 보고 반성했다.

 

식구들 밥은 어떡하고?(55)

 

나도 음식을 사먹는 걸 넘어서서 같이 만들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원합니다.

모두가 연대와 순환의 품 안에 있음을,

우리가 아주 작음을 알 것을

우리 별은 아주 작고 작아서,

그 안에서 조각조각 나뉜 나라란 게 우스워 보일 지경임을 알 것을

우리 모두가 하나하나의 나라이며

그 모임은 더 큰 생명의 일부임을 알 것을

그게 바로 내가 꿈꾸는 세상입니다.(140)

 

막연하지만, 다름을 소재로 서로 치고박고 싸우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강남역 살해를 계기로 메갈리아라는 여성들의 저항이 굉장했던 모양이다.

아직 더 시끄러워져야 한다.

 

레즈비언이라 놀리고 따돌리는 것,

그건 폭력의 한 유형이에요.

집단 따돌림은 인종주의, 성차별, 호모포비아, 트랜스포비아에서 나오죠.

교육은 이런 무지와 폭력을 멈추는 대신

연민과 사랑을 키워줍니다.(178)

 

대학 엠티에서 명문대생을 불문하고 성추행, 성폭력 추문에 휩싸인다.

닫힌 사회의 자화상인 셈이다.

사회는 닫아놓고, 야동의 상상만 활짝 열어 놓고,

아이들을 괴롭힌 결과다.

 

역시사지 잘하는 것도 능력이다.(195)

 

더 나은 사회를 설계하고,

자기들이 거기 속하는 사람과 속하지 않는 사람을 가려내는 방식에

도덕적 합리적 추론 과정을 갖다 붙이는 것,

그것은 제노사이드로 가는 길이다.

누가 속하는가?는

속하지 않는 사람들을 어떻게 축출할 것인가...다.(268)

 

세상은 남성 중심으로 활짝 열려있다.

조선은 그 기울기가 극단적이어서 한국은 아직도 지독하게 심한 곳임을 알아야 한다.

 

여성들이 좋은 남성을 기다리기보다

남자에게서 자유로워지기를 바란다.

남성이 없어도 인생에 별일이 생기지 않는다.(282)

 

시댁, 육아, 직장, 명절...

이런 것이 행복한 결혼 생활에 지장주지 않는 사회라야,

유토피아에 조금 더 가까이 갈 것이다.

그것은 교육과 공화국의 국가가 할 일이 많다는 앞날을 상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교육과 국가를 움직이려면,

계속 관심을 가지고 촛불을 드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

 

희망적인 것은,

촛불드는 남학생보다 여학생이 많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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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이 지옥일 때
이명수 지음, 고원태 그림 / 해냄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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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살기 힘들다.

안철수가 힐링캠프 나와서 '출산 최저, 자살 최다'라는 말을 했다.

헬조선의 현실을 보여준다.

나쁜 것의 지수는 최고 높고,

행복 지수나 이런 긍정적 지표는 늘 바닥이다.

 

어른도 그렇고 아이들도 그렇다.

그렇다고 지옥을 벗어날 수도 없다.

우리말은 어디에서도 통용되지 않고,

사실 이 나라는 섬나라다.

 

사람들이, 마음이 지옥인 거대한 난파선에서

시의 구명보트를 타고 탈출하는 광경은 상상만으로도 장엄하고 설렌다.(11)

 

이 책은 커다른 위안의 샘이다.

천천히 읽어도 좋고,

대충 읽어도 좋다.

참 좋다.

 

웃음과 울음이 같은 音이란걸 어둠과 빛이

다른 色이 아니란 걸 알고 난 뒤

내 音色이 달라졌다(생각이 달라졌다, 천양희)

 

웃음과 울음에서 음이 보이다니...

아재 개그치고는 고급이다.

고급은 멋지다.

 

사람들의 기대를 배반해야 내 삶이 편안해지는 때가 있다.(168)

 

때론 간큰 사람이 되는 것도 괜찮다.

사실 남들의 기대란 나의 기대와는 무관한 경우가 많으니깐.

 

외부노출형 엘리베이터 유리벽 너머 저켠에서 한 아가씨가

차를 놓칠세라 힘차게 달려오고 있었는데

아, 저 아가씨, 탐스러운 길다란 생머리가

온통 출렁거리고 있었는데, 이런 식의,

출렁거림의, 역동성의 아름다움이란 생전

처음이었는데, 정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174)

 

생동감

생명력

이런 것으로 아름다움을 느끼는 날은

살고 싶은 날이다.

 

고통받는 이를 위로할 때는

논리적인 이유를 찾지 말고

침묵 가운데 함께 해야한다.

논리적인 이유를 찾는 행동은 도움이 되지 않으면서

나쁜 결과를 만든다.(187)

 

교황의 말이다.

세월호 직후, 그 지옥에서 남긴 말은 위로가 된다.

 

나비는 꽃이 쓴 글씨

꽃이 꽃에게 보내는 쪽지

나풀나풀 떨어지는 듯 떠오르는

아슬한 탈선의 필적

저 활자는 단 한줄인데

나는 번번이 놓쳐버려

처음부터 읽고 다시 읽고

나비를 정독하다, 문득

문법 밖에서 율동하는 필체

나비는 아름다운 비문임을 깨닫는다

울퉁불퉁하게 때로는 결없이

다듬다가 공중에서 지워지는 글씨

나비를 천천히 펴서 읽고 접을 때

수줍게 돋는 푸른 동사들

나비는 꽃이 읽는 글씨

육필의 경치를 기웃거릴 때

바람이 훔쳐가는 글씨(나비를 읽는 법, 박지웅, 전문)

 

세상을 읽는 법은 이렇게 답이 없다.

답,답,한 세상은

답이 없다.

 

그렇지만, 직선이 아니라도

그 나풀거림의 시어 속에서

답,답이 필요 없음을,

어차피 삶은 답이 없는 문제였음을 알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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