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 천황 히로히토는 이렇게 말하였다 - '종전 조서' 800자로 전후 일본 다시 읽기
고모리 요이치 지음, 송태욱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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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은 게 거의 3년 가까이 된다.
조금씩 조금씩 읽다가 잊다가 했는데, 이제서야 마무리를 짓는다. 

강유원 선생으로부터 책과 세계에 대한 강의를 듣던 중, 일제 강점기와 관련지은 책으로 소개한 책이다.
한국 사회는 일본 사회에 대하여 아는 것이 거의 없다.
아니, 고의적으로 일본에 대하여 비밀스럽게 감추는 것 같다.  

6,70년대 교과서에선 일제 강점기의 징그럽게 비참했던 수탈상이 그려진 것 같았지만,
그건 두려움의 경지였지, 국가의 차원에서 어떤 보상을 받는 데는 실패하고 만 것 같다.
3년의 지배를 당한 필리핀에 비하여 35년의 보상으로 절반 조금 넘는 보상에 도장을 찍고 만 박정희 정부는,
미국과 일본의 3자 구도에서 어떤 밀약을 맺은 것인지...
아직도 감춰져 있다. 

김종필이가 일본으로 건너가 맺은 밀약 안에 도대체 무엇이 들었기에,
노무현 정부조차도 정신대 문제 같은 것이나 독도 문제에 대하여 명확한 의견을 피력하지 못하는 것인지... 답답할 따름.
독도가 한국 영토라면 응당 해군이나 육군이 지켜야 하는 일이거늘,
외교적인 문제라면서 경찰이 파견되어 있는 일도 수상쩍은 일이고,
이메가처럼 기다려달라...는 식의 피력은 그 밀약은 보통 수준이상의 합의로 볼 수 있겠다. 

역사를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지만,
이 책처럼 공식적인 문건을 통하여 세상을 읽을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것은 가장 훌륭한 역사 읽기의 한 종류라 생각한다. 

히로히토의 '종전 조서'를 읽어 보면, 

미영중소 4개국에 공동선언을 수락한다.
미영과의 전쟁에 최선을 다했으나 전국이 호전되지 않았고(패전했단 말은 안 함, 그리고 일본의 적은 미영뿐임. 중국도 조선도 없음...),
적은 잔학한 무기로 무고한 백성들을 살상하였다. (일본인은 피해자가 됨) 

교전이 계속되면 민족멸망, 인류문명 파괴를 우려하여 공동선언에 응하게 하였다.(참 아량도 넓으셔)
제국과 함께 동아 해방에 협력한 맹방에 유감의 뜻을 표한다.(조선은 여기 일제와 한 동아리로 묻어 넘어간다. 조또, 식민지 지배따윈 한 적도 없는 맹방이란다. 와... 일제와 조선은 베프였단 말씀? ㅍㅎ) 

제국 신민으로서 전진에서 죽고 직역에 순직했으며 비명에 스러진 자 및 그 유족을 생각하면 오장육부가 찢어진다.
또한 전상을 입고 재화를 입어 가업을 잃은 자들의 후생에 이르러서는 우려가 크다.(음, 조선은 이렇게 일제를 위하여 죽고, 순직한 거임?) 

그러나 짐은 시운이 흘러가는 바
참기 어려움을 참고 견디기 어려움을 견뎌,(캬, 일제와 천황 폐하는 많이 참고 견뎠구나. 피해자 의식 출중하도다.) 
이로써 만세를 위한 태평한 세상을 열고자 한다. 

짐은... 너희 신민과 함께 할 것이다.
아무쪼록 거국일가 자손이 서로 전하여 굳건히 신주의 불멸을 믿고... (아, 천황이 신이심을 믿나이다?) 

맥아더와 히로히토의 회담 내용에서 <황족 내각>은 인정받고,
천황의 책임을 뒤로 사라지며, <일억총참회론>으로 핑계를 돌리는 등,
정치적 수사학으로 가득한 당시의 문서들을 읽노라면,
명확한 법적 근거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모호한 사과와 결정들이 두루뭉술 적힌 것을 느끼게 된다. 

히로히토는 전쟁의 근원 자리에서 쏙 빠지고,
오로지 신민의 안위를 위하여 '종전'을 주장한 평화로운 자로 기록되고 있으며,
해마다 반복되는 <참기 어려움을 참고 견디기 어려움을 견뎌>온 동지로 남아 있다. 

종전 조서에서 '책임과 반성'은 휘발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맥아더는 전쟁 중 일본군의 극악함을 염두에 두고 본토 상륙을 무척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러나 본토에 상륙한 연합군은 온순하기 그지없는 일본인들을 보고 참으로 의아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1946년 루스 베네딕트에게 의뢰하여 '국화와 칼'이란 일본인 이야기를 썼다고도 한다. 

맥아더는 헌법9조를 통하여 천황제를 남기고 평화주의에 입각한 헌법을 제시한다.
천황에 대하여 상당히 수동적인 존재로 조사 결과를 남기고, 천황제가 유지되도록 하여야 한다고 강변한다.
결국 맥아더를 통한 미국의 전략은 일본을 미국의 전쟁 따까리로 만들면서도 이웃 국가들의 피해의식에 최소한의 책임만을 질 수 있도록 압력을 행사하려는 것이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가상의 적군 소련에 대응하기 위하여 히로히토로 하여금 오키나와에 공군 기지를 남겨둘 수 있도록 요새화하도록 했다. 

미합중국은 일본이
공격적인 위협이 되거나 국제연합 헌장의 목적과 원칙에 따라 평화와 안전을 증진하는 것(은 완전 가능하고)
외에 이용될 수 있을 만한 군비를 갖는 것을 항상 피하면서,
직접 및 간접 침략에 대한 자국의 방위를 위해 점증적으로 스스로 책임질 것을 기대한다.(260)
고 함으로써, 평화헌법에 따른 군비 불가능을 풀어주게 된다.
역시 주어는... 미합중국은... 이다. 

전쟁을 위한 나라, 가 지구상에 하나 있다.
2001년 9.11이 일어난 지 이미 10년이 지났다.
그라운드 제로... '폭발이 있었던 지표의 지점'이란 용어인데,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이어 뉴욕에서 발생한 비극. 

그러나 9.11이 일어난 후 벌어진 테러와의 전쟁, 이라크 전쟁과 최근까지 이어진 모든 <불의와의 전쟁>에서 늘 앞장선 슈퍼맨이자 배트맨이자 스파이더맨인 나라. 그들을 위하여 모든 약소국의 정치는 바다에 정박한 선박들처럼 한 방향으로 차렷자세로 늘어서서 꼼짝마 자세로 대기중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약소국의 정치란, 결국 강대국의 의도대로 톱니바퀴가 바스러지더라도 굴러가는 것임을, 깊이 깨닫게 되어 슬프다. 결국 히로히토의 반성 없음은 미국이란 강대국의 이익과 맞물려 돌아가는 것임을 보게 된다.  

아, 세상은 복잡하게도 이어져 있지만, 또 그래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일이 불가능에 가까워보이기도 해서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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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읽는 토론학교 : 역사 - 토론으로 다시 쓰는 역사교과서 청소년을 위한 토론학교
전국역사교사모임 사료모임 지음 / 우리학교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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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선, '국사'란 말과 '역사', 그리고 '한국사'란 말에 대한 나의 생각.  

'역사'는 세계사를 포함한 인류의 기록이라면, '한국사'는 '대한민국'을 둘러싼 국가의 기록이겠다.
'국사'라는 말은 일본의 과목명을 그대로 무비판적으로 표기한 말로, <국가의 역사>라는 말로 두루뭉술하게 표현함으로써 그 국가의 범위나 민족의 범위가 불명확하기도 하다. 

세계 유일(세계 최초 이런 거 좋아하는 나라이니) 분단 국가이므로, '한국사'라는 말은 어불성설이렷다.
물론 '한'민족이라는 말도 있지만, 지금은 명백히 '(대)한(민)국'의 국명으로서 한국이 존재하고, 그 상대항으로 '북조선~~'이 있으니 말이다. 빨리 통일이 되어 '조선사' 내지 '코리아사' 같은 역사책이 서술되길 바란다.

암튼, 역사를 소재로 했다 해서, 나는 당연히 '역사는 객관적 기록이 가능한가? 모든 역사는 날조인가?' 이런 접근이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목차를 살펴 보니, 조금 실망할 법한 소재들... 단군~ 식민지 근대화까지 열 꼭지의 주제는 우리가 배워왔던 국사 교과서 판박이 같다.  

2. 그후로도 오랫동안 '한국사 없는 국사'
                '내일을 읽는(?) 토론학교 - 역사, 의 지향점에 대하여

단군왕검의 국가에 대한 '환단고기' 같은 기록들을 얼마나 신뢰할 것인가, 신화로 치부할 것인가부터 시작하여 이 역사 토론서 역시 일제 강점기에서 '스톱' 되고 만다. 

'한국'의 역사라면,
당연히 대한민국의 기원은 1919년 4월 13일 대한민국임시정부인가, 1948년 8월 15일 남쪽 정부 수립인가로 시작하여,
북조선을 국가로 볼 수 있는가, 임의단체로 보아야 하는가,
분단과 통일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독재가 인민 대중의 삶에 도움이 되었는가, 해악으로 남았는가,
한국의 미래에 세계화는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가,
미래 한국에서 민족 문제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런 문제들이 제기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나의 소감과는 전혀 다르게, 

'단군과 고조선', '삼국 통일', '서경 천도', '왕권과 신권', ' 임란', '붕당', '개화', '근대화' 까지만 기록함으로써,
이 나라는 단군할아버지나 이씨왕조의 후예(그러고 보니 그 작자가 이씨네.)가 아직도 다스리고 계신거 아닌가 하는 생각에 젖는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에서 배우지 못한 민족의 미래는 없다.' 

식민지와 전쟁을 거치면서, 폄하될대로 낮아진 조선민족의 역사. 
지금도 툭하면 수구꼴통 중심의 보수주의자들은 '국사'를 시험에 넣어야 한다는 둥, 교과에서 빠졌다는 둥 떠든다.
그리고 그것들은 실제로 누더기된 교육과정에 반영되곤 한다.  

국사를 가르치면 정말 세계관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될까?
과거엔 우리 민족이 제일 잘 나갔다. 이런 걸 가르치려는 걸까?
과연 지금이 식민지라도 된단 말인가? 

그러나, 역사란 늘 과거의 잘못에서 배울 점들이 있다는 역설에서 시작한다.
사마천의 수치스런 기록이 역사의 시작이 되었던 것처럼.
그러나, 자랑만 늘어놓은 역사에서 과연 배울 미래가 있을 것인지...는 의문이다.

4. 아쉬움을 남긴, 토론학교 역사... 

이런 몇 가지 아쉬움이 많이 남는 책이다.
물론 학생들에게 토론거리로 제공할 자료를 뒤지면서 어불성설의 편도 들어야 하는 토론책자 저술의 어려움이 느껴지지만,
표지에 당당하게 '역사'라고 적었다면, 좀더 '역사' 전반에 대한 고민들이 담기지 못한 데 대한 아쉬움이랄까.
하여, 이 책은 범교과적으로 쓰이기보다는, 국사나 한국사 시간에 활용될 법한 책으로 제한된 느낌이 많다.

----------- 이 책의 편집에 몇 가지 시비 걸기...

* 200. '대원군'과 '흥선대원군'이 뒤섞여 쓰인다. 물론 조선의 4명의 대원군(아들이 임금이 되고 그 아비를 부르는 말) 중 흥선대원군이 가장 유명하여 보통 대원군 하면 그를 일컫긴 하지만 한 페이지에서 이러저리 뒤섞여 쓰이는 건 이해하기 어렵다. 처음엔 흥선대원군으로 쓰고 (이하 대원군)이라고 표기하는 게 나을 듯. (통일성의 문제이니 사소한 것임)

** 251. 일제 강점기는 35년, 36년? 

36년이라는 세월은 짧지 않습니다. 1970년의 서울과 그 36년 후인 2006년의 서울 풍경을~~ 그러나 1910년과 1945년의 삶의 모습은~~ 

물론 양편넣기를 하여 36년으로 일컬을 수도 있고(한국에선 그렇게 많이 헤아린다. 만 2년상도 3년상이라 하고, 만 2일장도 삼일장이라고 하니깐), 한편넣기를 하여 35년으로 일컬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같은 페이지에서 일어나는 숫자 계산의 차이는, 생각없어 보인다. (요건 명백히 고쳐야 할 오류임)

*** '일제시대'라는 용어에 대하여 (요것도 회의를 해서 고쳐야 할 오류임)

171.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조선인은 의타성, 파벌성이 생길 수밖에 없는 민족'이라고...  
마지막 꼭지에선 전체에서 대놓고 '일제시대'라는 말을 쓴다.

<조선> 시대라고 하면, 조선 사람들이 삶의 중심이 된 시대다.
일제 시대라고 부르면,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이 세상의 중심이었단 의미가 강하다.
마치 한일 합방처럼 두 나라가 자연스레 병합되었단 느낌을 담은 용어다. 

아래 기사에서처럼 '일제 강점기'가 공식 용어이므로 수정이 필요할 것이다. 

----------

'일제시대'라는 용어는 일본에 의해 강제로 점령 당한 시대를 우리가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되는 말이다. 2000년 들어 국어학자와 역사학자들의 끊임없는 수정 작업을 통해 '일제강점기'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했다. 또 국내에서 개발한 한글 프로그램에도 '일제시대'라고 입력하면 자동으로 '일제강점기'라고 변경돼 나온다.  

<관련 기사> ‘1박 2일’ 감동 분위기 깬 4글자 자막 ‘일제시대’ 

http://isplus.liv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6128690&cloc= 

 

유홍준 교수 "석굴암, 일제시대 잘못된 보수공사로 병들기 시작" 

http://osen.mt.co.kr/news/view.html?gid=G1108250003 

24일 MBC '무릎팍도사'에 출연한 유홍준 교수는 "우리나라 모든 문화재 중 석굴암만 있으면 세계 어떤 문화재에도 뒤지지 않는다"고 말문을 열었다.
 
이어 석굴암의 완벽성에 대해 설명하던 유 교수는 "일제시대 때부터 병들어가고 있다. 일제시대 때 우체국 직원에 의해 우연히 발견됐는데, 당시 발굴 공사를 하면서 불쌍 2개가 없어졌다. 보수 공사한답시고 모든 것을 해체하고, 그 위를 콘크리트로 덮었다"고 석굴암의 수난에 대해 말했다.(뭐, 역사학자도 아니지만, 그래도 좀 이런 예는 없으면 좋겠다. 문화재 청장이었으면 나름 공인 아닌가?)

**** 271. '수출량'과 '유출량' 

그래프의 제목은 유출이고 범례는 수출이다. 일제 강점기에 쌀을 빼앗긴 것이지, 수출한 것은 아니므로 '유출량'이 옳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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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쓰는가 - 조지 오웰 에세이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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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읽고 쓰는 일이 전문가의 그것에서 누구나의 그것으로 변화해가고 있다.
환경도 컴퓨터 앞에 앉아서 쓰던 것에서 지하철이나 커피숍에서 휴대기기로 입력하는 것으로 변화해 실시간으로 전달이 가능한 시대로 급속이 바뀌고 있다. 

그러나, 조지 오웰이 펜으로 또는 타자기로 글을 쓰던 70년 전이나 지금이나 바뀌지 않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글의 품질을 좌우하고, 읽는 맛을 판가름하며, 좋은 글을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 
그게 글의 내용이고 콘텐츠이며 글 쓰는 방법이고 이유일 것이다.

지난 주, 안철수가 서울 시장에 출마한다는 '설'이 나돌았을 때, 사람들이 환호했다고 한다.
뭐, 철수가 나오니 공주님보다 인기도가 높았다고 하니, 공주님의 인기도가 얼마나 허상인지 알 만하단 점에서 의미가 있었지만, 비정치인이 정치가보다 훨씬 인기가 높다는 것은 이 나라의 정치적 혐오감이 극에 달한 것임을 강변한다.
이제 한명숙이 박원순을 밀어주는 형국이 되는 모양인데, 글쎄, 사람들은 또 박원순을 좋아할 것인지는 미지수다.
사람들의 생각은 몇 가지의 잣대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안철수의 인기의 비결은 '2002 월드컵 열풍'이나 '황우석 신드롬'과 유사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왠지 근거를 대기는 어렵지만, <대한민국의 미래에 대한 기대 내지 희망>을 그에게서 본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한명숙이나 박원순에게 그런 아우라가 있는 것인지, 잘 살펴 봐야 할 것이다. 

인터넷의 속성상 기사로 도배를 해야할 콘텐츠가 있는데 이상하게 조용한 소재가 있다.
바로 '강호동 현상'이다.
일개 개그맨이자 사회자인 '강'을 '유재석'과 빗대어 2대 엠씨 어쩌고 하는데, 나는 그 말에 어폐가 있다고 느낀다.
강호동은 모든 방송국을 휘어잡는 '실세'였던 반면, 유재석은 '부드러운 카리스마' 어쩌고에 기대는 사람이다.
카리스마는 부드러울 수 없다. 모든 카리스마는 모종의 폭력적 일방성을 전제로 한다. 

강호동은 씨름 선수여서 몸의 카리스마가 넘치고, 나이가 들면서 양기가 '조디'로 올라왔는지 현란한 말빨로 화면을 가득 채운다. 어쩌면 한국인이 필요로하는 태음인적 든든함을 그에게서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의 방정맞은 조디는 소양인적 인기도 담고 있었고. 
무식한 운동 선수라는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하여 '야심만만' 시절부터 그는 김제동 유의 진지함을 상업화했다.
누가 적어준 것일 수도 있고, 자기가 찾아온 것일 수도 있지만, 그런 '아는 체'는 다른 진행자에겐 없는 신선함이었다.
본격적 토크쇼를 그만큼 웃기는 차림새로(무당처럼) 진행하기도 힘들 것이고,
스타킹이나 강심장처럼 시시한 연예인들 줄등장시키는 프로그램이 인기를 얻기도 힘들 것이고,
예닐곱 명의 사내들이 좌충우돌 장난치는 1박2일같이 시시한 프로그램을 그토록 시끄럽게 만들기도 힘들 것이다. (유사한 패밀리가 망한 걸 보면 대조가 된다.)

그런 한 사람을 '한 방'에 보내버리는 것이 어찌 보면 무서운 사회의 단면처럼 보인다.
거대 권력인 방송국에 '개인 기업'처럼 보이는 인기인이 대들기 시작하면, 앞으로 방송국은 비실비실 웃기게 될 게 뻔하다.
그렇다고 개인을 그렇게 무참히 짓밟는 처사는 이 사회가 무엇을 추구하는지를 보여주는 잣대가 될 것이다.  
왜 '무죄 추정의 원칙'은 '고대 성추행범'같은 것들에겐 철저하게 적용되면서, '노무현, 한명숙, 곽노현, 강호동' 들에겐 철저히 무시되는 것인가?

써야 할 것에 대하여는 진지하게 쓰지 못하고, 왜 사소한 일들에는 목숨을 걸고 덤벼드는 세상이 되었는지, 답답하다.

각설하고, 이 책은 1940년대에 적은 조지 오웰의 평설들을 모아둔 책이다.
주제가 '인간은 왜 쓰는가'와 상통하지 않는 글들도 많다. 

그의 '나는 왜 쓰는가'란 에세이에서 <사실 모든 책은 실패작>이란 구절이 있다.
작가는 자신의 의도를 100% 드러내기 힘들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는 자신의 작업에 대하여 '어느 서평자의 고백'이란 꼭지에서 <그냥 두면 아무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않을 책에 대한 반응을 계속해서 날조해내는 작업>이라고 혹평한다. 요즘 기자들도 이 구절을 읽으면 쿡, 감흥이 올 것이다.  

이 책에서 오웰은 1945년 8월 일본에서 자행된 원폭 살상에 대하여 분노하면서, 현대 과학이 가진 힘과 능력은 무엇인지 되짚어 보기도 한다. 세상은 비행기로 경계를 허물 만큼 좁아지기도 했지만,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경계를 핵무기를 통해 만들고 있기도 하다. 그것이 <세계화> 시대에 읽는 조지 오웰의 힘이다. 세계는 글로벌로 이웃이 되지만, 빈익빈부익부는 심화 정도가 아니라 절대화 되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오웰의 시대를 휩쓸었던 <민족주의>에 대하여 많은 논고를 쓰고있는데,
'인류를 곤충 분류하듯 나눌 수 있으며 수백만이나 수천만의 사람들을 싸잡아 좋으니 나쁘니 하는 딱지를 붙일 수 있다고 여기는 모든 습성'이며,
'자신을 단일한 나라 또는 다른 집단과 동일시하되, 그것을 선악을 초월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그것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것만이 전부라고 여기는 습성'이라고 정의함으로써 '민족주의'의 해악을 간단히 드러내며 혐오감을 표시하고 있다.
물론 오웰의 사고는 다양한 정치적 반영이 드러난 걸리버 여행기 같은 작품들의 분석에 이어질 만큼 여러 상황과 관계지은 것이다. 한국처럼 그로기 상태에 몰린 권투 선수가 마지막 카운트 블로 한 방을 노리는 상황에서 기대는 <민족주의>만큼 위험한 상황을 그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는 4,500만의 영국 사람은 '부자와 빈자'라는 두 민족으로 나뉘는 것으로 유명하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시대에 산 사람이다.

오웰의 글을 읽다보면 사람이 얼마나 종합적 사고에 무지한 존재인지 느낄 수 있다. 그가 식민지에서 경험했던 '사형수가 물웅덩이를 살짝 피해가는 모습'의 응시와 '코끼리보다 무가치한 노동자'의 존재에 대한 관찰을 읽노라면, 사람의 생각은 자신의 경험 총합을 넘기 힘든 것 같다.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서정시란 '가족들끼리의 농담'일 수 있다거나,
기록된 역사 대부분은 거짓인데, 오웰의 시대엔 <역사가 진실하게 기록될 수도 있다는 개념 자체를 포기>한다는 거란다. 

다시 강호동을 생각한다.
강호동은 연간 수백억의 수익을 올리는 개인 사업체나 마찬가지여서 또 연간 수십억의 세금을 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수입과 지출에 관하여는 매니저나 소속사가 관리하여야 할 부분이지 전적으로 그가 포탈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다. 세금 잘못냈다고 죄인이라면, ㅎㅎ 대기업은 모두 참살시켰어야 하나? 

강호동 사태의 본질은 '권력'의 시녀로서의 방송에 저해가 되는 존재는 이렇게 만들 수 있다는 '본보기'로서
언론 권력의 힘을 보여준 것이 아닐까? 

나의 상상이 미치지 못하는 부분도 있을 수 있지만,
결국 오웰이 관심을 가지고 쏟아낸 글들의 많은 수가 그의 관찰과 상상을 통한 글쓰기의 힘이 얼마나 강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이 책은 글쓰는 이에게 한 권의 교본과도 같은 역할을 할 것이다. 

상상력이란 야생동물과 비슷한 것이어서 가둬두면 번식하지 못한다.(240)
인간은 자기 삶에서 단순함의 너른 빈터를 충분히 남겨두어야만 인간일 수 있다.(248) 

이런 단편적인 구절을 쓰면서,
오웰은 자신이 '갇혀버리기 쉬운 감옥'으로서의 언어에 얼마나 한계를 느꼈을 것이며,
'단순함의 빈터'를 잃어버린 스스로에 한숨쉬지 않았을는지... 약간의 공감을 보내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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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도덕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안진환.이수경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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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가 백만 권 이상 팔렸다고 하는데, 나는 이유가 좀 궁금하다. 
과연 한국 사회에 이런 사회과학 서적이 백만 권 팔릴 풍토가 조성되었는지가...
이 책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주변에 별로 없는데 말이다. 

전편에서도 그랬지만, 이번 책을 읽으면서도,
<사회과학> 서적은 그 책의 저자가 속한 <사회>에 국한된 것이기 쉽다는 한계가 질곡으로 작용한다는 생각을 했다.
미국 사회 내의 <학문적> 풍토는 내가 살고있는 이 땅의 그것과는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사고방식 내의 '밭둑'과 저자의 '밭둑'이 질러진 카테고리가 너무 달라서,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지경에 이르러 버렸다. 

우선 제목부터 그렇다.
와이 모랄리티...라고 하면, 현대 사회에서 철학적 정신적 차원에서 다뤄지는 도덕과 윤리적 측면을 문제삼아 이야기하겠다는 의도가 느껴지지만,
왜 도덕인가...란 제목에선, 현대사회의 문제들에서 도덕적 품성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이런 측면의 문제제기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다만... 

공리주의가 주도적이던 영미의 도덕적 개념에 반론을 제기한 롤스의 '정의론' 이야기가 여기서도 나온다.
공리주의가 '좋음'을 극단적으로 선호했다면, 롤스는 '옳음'의 입장을 들이민 모양인데,
한국사회처럼 '좋음'이나 공리주의가 언제 있어보기나 했었던가를 돌아보면,
이 땅에 태어나 살고 있음 자체가 이런 학문적 논리를 따르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취약한 기반임이 생각나서 참 좌절스럽다. 

독재자에 바람둥이(채홍사가 다 있었다는)에 난봉 술꾼으로 남한산성에서 유명하던 급사한 어떤 사람도
온통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었으며 지극히 도덕적이고 민족의식으로 무장한 위인으로 둔갑하기 쉬운데, 그것이 도덕의 힘이 아닌가 싶다. 

한국 사회처럼 무슨 장관 한 사람 임명하겠다고 신상을 털어 보면,
순 도둑놈에 날강도들이 아닌 경우가 없다.
박지원의 '양반전'에서 양반을 사려던 부자가 "나더러 도둑놈이 되라는 거요?"하면서 양반을 거부하고 나가버렸듯이,
위장전입, 병역의무 의혹, 땅투기 의혹 등에 연루되지 않은 고위층은 없는 일인지...
하기야 박지원의 '허생전'에서도 '무명의 와룡선생'을 천거한다면 쓸 수 있겠는가고 물으니 그건 어렵다던 이완 장군이 나오는 것처럼, 도덕적으로 맑은 사람을 찾아 지위를 주기는 쉽지 않은 노릇인 모양. 

<힘>이 도덕이고 정의던 로마가 무너지고,
<종교>가 도덕이던 중세도 지나갔다.
<시민>의 <인간의 힘>이 도덕이던 자유, 평등, 박애의 시대가 풍미하였으나,
<공산주의>란 철학적 도덕의 시대가 피바람 속에 사라져 버린 자리에,
오로지 <금권>의 도덕만이 철권을 휘두르고 있는 게 세상이다. 
저자의 말로 하면 <시장중심주의, 고삐풀린 자본주의>의 폭풍이...

국가간의 1:1 교류는 금세 흐트러지고,
지구가 글로벌로 묶여 <금권 통치>의 도덕은 더욱 한 방향으로만 전개되는 양상인데,
그것 역시 미래를 점치기 쉽지 않다. 

샌델은 대안으로 공동체 강화, 경제구조의 개혁, 도덕적 종교적 담론의 분리 음모 극복 등을 제시한다.
근본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이 발을 들여놓기 두려워하는 영역으로 거침없이 돌진한다.(318)
따라서 자유주의자들이 해야할 해법은 도덕적 논의를 피해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것. 이란다. 

이 나라는 2년 전, 제법 괜찮았던 한 대통령, 그렇게 개무시하던 대통령을 잃고 많이 울었다. 
전직 대통령을 그토록 수치스럽게 만들었던 것이 바로 '도덕'이란 허울 좋은 <권력의 칼날>이었다.
'도덕'이란 칼로 전직 대통령의 아내, 자식, 친척, 수하들을 모조리 단죄했다.
그렇다면, 30년 전에 수천억원(지금이라면 수백억)의 돈을 먹었다는 대머리 아저씨의 마누라, 새끼들, 친척들, 부하들은 과연 얼마나 도덕적으로 단죄했던가를 돌아보면,
도덕이란 허울좋은 칼날로 힘을 과시한 깡패짓에 다름아니다. 

지금 서울시 교육감이란 자리가 다시 도덕이란 칼날로 유린되려 하고 있다.
한명숙 전 총리 역시 말도 안 되는 재판에 시달린 일이 많지 않은가. 

한국사회처럼 닫힌 사회.
그리고 온갖 개념이 짬뽕되고 떡이 되도록 뒤섞여 있어서,
좌파나 우파가 뭔지도 모르고, 강남 좌파란 웃기는 말도 등장하고 있다. 

도덕이란 것은 <인권>에서 출발한다.
<인권>이 지켜지려면, 기본적인 공동체가 있어야 한다는 말에도 공감한다.
한국처럼 공동체가 급격히 파괴된 사회에서는 도덕에 대한 접근 자체가 새로이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에서 '회식' 문화가 새로운 공동체 역할을 하던 것도 주목할 법 하지만,
이제 그런 정도의 공동체 문화도 슬슬 무너지고 있다. 

[허용과 지지]는 엄연히 다른데도,
툭하면 개념을 뒤섞어 말아 먹는 역할을 하는 것들은
소위 '공인'이어야 할 방송과 신문 등의 언론사들이다. 

빨갱이, 하면 무조건 죽일놈이었는데, 그건 아직도 여전하다.
국가보안법이 창창히 살아있어서 그렇고,
전쟁 후유증이 아직 상처가 깊어 그렇겠다. 

그러나, 나는 빨갱이다... 하고 밝힐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
그 사람을 지지하건 말건...

공휴일을 늘리자고 하면 <금권>을 지닌 세력은 반대한다.
방송도 맨날 '서민은 우짜라고' 하며 짜는 소리를 내보낸다.
집회 시위가 있으면 맨날 '차가 막혀서...'하는 방송을 식상하게 하듯 말이다. 

<도덕이 세상을 자유케 하리라>가 이 책의 주제라고 하면 오버일까?
자유의 의미를 이렇게 정한다면...

인간이 자신의 목적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 자유(270) 

인간이 선택할 수 있으려면, 모든 것이 오픈되어 있어야 한다.
공공의 선에 큰 지장을 주지 않는 한, 허용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헌법에 보장된, 인권, 행복추구권, 노동권, 그리고 집회 결사의 자유 같은 것을 주면서 말이다. 

자유를 맛본 사람은 그 맛을 잊을 수 없다.
이 나라는 다시 자유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도덕'에 대한 고민은 계속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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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jy 2011-09-01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의란 무엇인가> 책은 아직 못 읽었습니다. 근데 백만권이나 팔린겁니까? 세계적으로가 아니라 한쿡에서만요?
우와~~ 저는 마케팅의 성공이라고 봅니다^^; 세상에나 그렇게 책이 많이 팔렸고, 구매자의 반정도만 실제로 읽었더라도 사회적으로 아니면 주변에 구설로라도 뭔가 논의가 지속되고 달라지는게 나타나야되지 않겠습니까? 저도 글샘님처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없었서 진짜 신기하게 생각되는 백만부 판매실적이네요-_-;
ebs방송으로 몇번 보긴 보았습니다~
가치관은 많이 다르지만 성격은 똑같은 급한 아빠와 저녁식사후 목청 크게 대화하다가 울컥 했더랬지요~ 엄마가 시끄럽다고 성질 좀 냈었죠ㅋㅋ
당시엔 치열하게 부녀100분토론을 했는데요~ 젤 토론이 격렬했고 기억나는 부분은 불임부부가 대리모를 통해 아기를 매매하는 거에 관련된 내용입니다^^;

정의에 대해서 주변에서 말이 없는것처럼, 도덕이란게 다 자기편에게만 유리하게 적용되는게 당연하다는 이 사회 ㅠ.ㅠ 도덕이 자유라면? 그게 도대체 모냥새가 어떻게 되야되는지 말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으면합니다..그게 다르던 틀리던 옭던 그르던지 말입니다요~

글샘 2011-09-01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ttp://jsapark.tistory.com/1526
네 백만권이 팔렸지만,
제 생각은요....
백만명이 읽은 건 아니구요.
워낙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 살다보니, 정의란 무엇인지, 궁금해서 사긴 했는데 대부분 그냥 처박아 뒀거나, 남 줬거나... 그렇지 않나 싶네요. ㅎㅎ 그리고 386 세대들이 거의 수백만 되니깐(80-85정도만 해도) 대~~~충 본 사람이 그정돈 되지 싶네요.

뭐, 관심이란 게 워낙 척박한 데서 나오니 말입니다.

누구도 정의에 대해서 도덕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않는 어두운 세상. 그게 무섭죠.
 
언어의 감옥에서 - 어느 재일조선인의 초상
서경식 지음, 권혁태 옮김 / 돌베개 / 2011년 3월
평점 :
품절


서경식은 '디아스포라'라는 말을 가르쳐준 사람이다.
서승, 서준식 형제의 동생으로도 유명했고, 프리모 레비의 인간에 대한 고뇌도 알려주었다. 

그의 비평들을 모은 책인데, 상당히 무겁고 답답한 느낌을 준다.
모어와 모국어에 대한 사고 전개는 그만이 펼칠 수 있는 세계가 있으므로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그러나, 3부의 일본 사정에 대한 글들은 일본의 속내를 잘 모르는 나로서는 읽기가 쉽지 않았다. 
통일에 대한 이야기는 누가 무슨 말을 하든, 어차피 탁상공론이니 그렇다 치고. 
남북 정상이 마주앉아 이야기하는 외의 통일 논의는 모두 헛소리일 수밖에 없다. 

한국인이라면 '모어'와 '모국어'를 구별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서경식에게 모어는 일본어고 모국어는 한국어다.
그는 '모어'로 사고할 수밖에 없고, 그에게 모국어는 외국어이다.
모국어로 기본적 의사소통이야 되겠지만, 깊은 사고는 모어로 할 수밖에 없는 것이므로... 

특히 2부의 평론에서 '재일 조선인, 자이니치'에 대한 역사적 무관심에 대한 이야기를 읽는 일은,
그의 글을 읽을 때면 늘 겪는 일이지만, 아픈 일이다.
남과 북의 분단,
남한의 독재 정권에 의한 기민정책, 북조선의 동포 북송정책은 모든 자이니치들을 '있지만 없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청도 운문사 앞마당에 가면 규화목이란 나무가 있다.
나무 속에 규소 성분이 가득 들어차서 이젠 나무의 형태를 갖추곤 있지만,
내부는 광물이 되어버린 나무. 

규화목을 나무라고 하기에는 그 성분이 속속들이 모래알과 같은 규소고,
그걸 돌이라고 하기엔 그 생김새와 조상이 명확한 나무인 셈. 

자이니치의 처지가 규화목처럼 서글픈 거나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일본인이라고 하기엔 삶의 곳곳에서 한국인의 핏줄이 펄쩍이고,
한국인이라고 하기엔 그 삶의 양태가 더욱 일본인의 삶이 되어버린... 

서경식이 본문에서 간혹 사용하는 '스테레오 타입' 역시 자신의 그런 애매한 위치에서 날카롭게 찌르는 용어라 더욱 남다른 감정이 묻어나는 문구가 아닌가 싶다.
남들과 통념상 비슷한 거, 개성을 드러내기보단 비슷하게 가는 거, 운동에서도 반복 연습해서 반사적으로 나오는 거, 한국인이라면 보통 그렇고, 화장하는 여자라면 보통 그렇고, 경상도 문디라면 보통 그런... 고정관념이나 통념과 가까운 스테레오 타입. 

한나 아렌트도 자주 인용되는데,
개개의 행위의 '죄'는 개인으로 귀속되지만,
공동체의 성원에게는 언제나 정치적 의미에서의 집단의 책임이 부과된다
는 이야기가 여러 번 등장한다. 

한국이 베트남에서 저지른 만행은,
미국의 앞잡이인 한국의 군사독재정부가 저지른 것이 아니다.
개별 한국인의 '따이한'들이 저지른 일이다. 그들이 퍼질러 낳은 아이들도 많다.
그렇지만, 한국인들에게는 언제나 정치적 집단의 책임이 부과된다.
한국인의 베트남 사람들, 캄보디아 사람들에게 무죄가 아니란 말이다. 

일본인들은 '이제 일본인을 그만두고 싶어'라고 하지만, 그것은 간단하지 않은 일이다. 

이승연이 위안부 복장을 입고 화보를 찍든,
임재범이 히틀러 복장을 입고 노래를 하든,
그것은 그들의 자유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을 보는 사람들의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을 것임을 고려했다면,
자기의 여성스러움과 섹시미를 더 강조하려고,
자신의 남성다움과 터프함을 더 강조하려고,
돈을 벌기 위해 그런 컨셉트를 차용하는 일은 사전에 조율했으면 지혜로웠을 거다. 
한나 아렌트의 말을 빌려,
공동체의 성원에게는 언제나 정치적 의미에서 집단의 책임이 따른다는 말 같은 걸 덧붙이지 않더라도 말이다.

다른 사람의 이나 눈에 상처를 주면서,
보복에 대해서는 관용을 주장하는 그런 인간과는 절대로 가까이 지내지 말라. (루쉰, 죽음, 322) 

일본이 지배했던 식민지 조선은 '남한, 북조선, 연변 조선족'을 아우르는 것이었다.
박정희 군사 독재 정부가 일본과 맺은 밀약과 한일협정으로 '화해'와 '관용'을 내세우는 자들이
일본에도 있고, 한국에도 있다.(여기서 한국이라는 말은, 한국의 민중보다는 한국의 친일파 족속 몇몇을 일컫는 말이어야 한다.)

뭐,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인가?
왼뺨을 맞았으니 오른뺨도 내밀라는 말인가?
일본의 우익은 <도의적 책임>이라는 레토릭(정치적 수사)으로 자신들의 조상이 저지른 <정치적, 물리적 책임>은 회피하려 한다.
또 식민지 조선을 괴롭힌 건 <우리가 아니라 우리 조상>들이었다는 말도 뻔뻔스레 한다.
거기 부화뇌동하여 <화해>와 <관용>을 내세우는 '대 학자'들이 한국에도 계시단다.  

견강부회라는 말이 있다.
끌 견, 강할 강, 붙일 부, 모일 회.
소를 강제로 끌고 가서, 암수를 모아 놓고 붙이려고 하듯이,
얼토당토않은 논리를 강제로 들이대는 통속을 비판하는 말이다.
속속들이 일본의 논리를 사랑해 마지않는 자들에게 욕을 한 바가지 퍼붓고 싶다. 

'화해'라는 미명으로 '굴복, 굴종, 타협'을 강제한다.
이것을 작가는 '화해라는 이름의 폭력'으로 썼다.
전두환이 그렇고 지금의 장로 대통령도 그렇다. 결코 화해할 수 없는 것들과는 화해를 거부할 수밖에 없음을 서경식은 잘 알고 있다. 화해 이전에 문제 해결을 위한 적극적 노력이 우선되어야 함을, 그처럼 절실하게 느끼는 위치도 드물 것이다. 

자본주의는 <장벽>이 있어야 이득을 볼 수 있다.
그들이 말하는 Free Trade는 말이 자유 무역이지, 장벽을 쌓고, 그 장벽을 넘는 데 따른 이득을 얻고자 하는 자들이
자본주의 강국들이다. 

이 구조는 새로운 디아스포라들을 양산한다.
끝없이 재편성되는 <장벽>과 <디아스포라>의 흐름은 갈수록 난맥상인데,
그 복잡한 잎맥들도 잘 찾아보면, 줄기에서 물길을 끌고 오는 원맥이 있게 마련이다. 

이 복잡한 세상을, 힘이 지배하는 세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서경식같이 세상을 읽는 힘을 가진 이들이 글을 써 보여줘야 한다.
그리고 나처럼 눈이 부족한 사람은 그런 책을 읽어야 하고, 그래야 극복에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는 게 된다. 

언어의 감옥에서 창밖의 자유로운 새와 푸른 하늘을 바라보는 것은,
디아스포라만의 처지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약자일수록, 난민일수록, 외국인노동자일수록,
자신의 언어는 <자유의 수단>, <소통의 수단>이 되지 못하고,
자신을 <감옥>에 가두는 속박의 수단, 남들보다 뒤처져보이게 하는 열등의 도구가 되기 쉬운 것이다. 

언어가 우리를 자유케 하기 위해서는 <장벽>을 낮추고, <난민>을 보호해야 한다.
난민도 살 수 있는 사회.
약자를 이해해 주는 사회.
이것이 앞서야지,
기업이 살기좋은 나라,
국가가 파워풀한 나라...
이것은 역시 약자를 짓밟는 구조를 재생한하는 것임은, 명약관화하다. 

언어의 감옥에서 보내는 편지는,
그래서 감옥을 벗어날 수 있는 힘을 생각하는 굳센 길을 걷는 일이 되기도 한다.
서경식의 글들이 더욱 탄탄한 힘으로 그 길을 다지길 바란다.

 

 ---------- 수정할 거 하나(편집자님이 보시면 댓글 달아 주세요. 지우겠습니다.)

191. 북위 16도선을 기준으로 베트남을 남북으로 분할하고... 베트남의 38선은 북위 17도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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