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식사 - 위화 산문집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휴머니스트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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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위화의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를 읽은 나로서는 큰 흥미를 느끼게보다는,

유사한 이야기가 반복되는 느낌을 받은 책.

그렇지만, 중국이란 국가에서 사람이 살아가는 양식을 이해하게 되었고,

나아가,

삶은 어떠한 것인지를 생각하게도 되었다.

 

치과의를 하던 위화.

그러던 어느 날 창밖 거리를 바라보다가 마음 속에서 처참한 느낌이 용솟음쳤다.

얖으로 평생 이 거리를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하니 미래가 없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바로 그 순간,

나는 앞으로의 일생을 어떡할 것인가 고민하기 시작했고,

내 운명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나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177)

 

중국 남부의 한 시골 마을에서 살던 그에게는,

그 '거리'가 갑갑하기 그지없었을 것이다.

평생 읽고 쓰기를 낙으로 삼는 그는 역시, 독서인일 수밖에 없다.

 

지난 20년동안 나의 가장 큰 수확은 고전작품들을 읽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역사와 조상들이 읽고 남긴 작품들을 믿어야 한다.

그 작품들은 이미 시간의 검증을 거쳤고, 고전작품에는 절대 속을 일이 없다.

그것들은 인류의 지혜가 낳은 결정품이자 인류의 영혼이 지나온 기나긴 여정이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가 소년 시절에 고전작품을 읽는다면 그의 소년 시절은 고전작품 속의 진실한 사상과 정서에 이끌리게 되고,

성인이 된 후 인류가 공유한 지혜와 영혼이 자신을 통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199)

 

고전을 읽는 이유.

게다가 '문학의 역량'에 대한 생각도 멋지다.

 

문학의 진정한 역량은,

바로 단테의 시 속에서, 보르헤스의 비유 속에서, 순식간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경지와 생생하게 숨쉬는 독백 속에서,

절묘한 동시에 현실보다 더 생생한 묘사 속에 있다는 것.

이 모든 것들은 유약하지만 비할 데 없이 풍부하고 예민한 영혼이 창조한 것으로,

우리를 깨닫게 하고, 흥분시켜 잠 못 들게 하며,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 열렬히 사랑하게 하고,

영원한 이별 가운데서도 서로를 사랑하게 한다.

"인간은 불행을 감당하는 지축이다.

세상에 어떤 물체가 지축보다 더 의지할 만하단 말인가?"

 

이런 '고전'과 '문학'을 읽는 것은, 삶의 유한성 때문이다.

 

세상에 중복되는 길은 없다.

그리고 그 어떤 것도 한 사람의 인생을 대체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의 경험은 자기 삶에 한정되고,

세상의 다채로움과 달리 개인 공간의 협소함은

독서로 하여금 우리 눈앞에 개인의 공간을 열어 젖히고,

하늘의 무한함과 대지의 광활함을 느끼게 하고,

우리의 인생의 길을 단수에서 복수로 변형시킨다.

타인의 이야기가 자신의 삶을 풍부하게 한다.(247)

 

문학의 힘에 대하여 이야기하지만,

또 그는 창작의 한계도 이야기한다.

 

창작에 있어서 절대적인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그저 사실뿐이다.

어떤 지식도 까놓고 말하면 결국은 어떤 입장이나 각도에 대한 강조에 불과하다.

사물에는 언제나 두 개 이상의 설명 방식이 있고,

각기 다른 설명 방식은 자기가 장악한 세계의 진실을 표방하고,

진실은 영원한 처녀이고,

모든 이론은 결국에는 제 잘난 맛에 까부는 수음에 불과하다.(299)

 

창작의 지난함에 대하여... 이렇게 처절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쓰면서도 늘 가슴에 묵직한 맷돌 하나 얹어둘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한계에서 벗어나,

유쾌한 필체로 글을 적어내는 그의 작품들은 오히려 그래서 더 무게가 있다.

 

뜻밖에 그가 광주 이야기를 한다.

 

내가 본 광주항쟁 희생자의 사진 가운데 어느 것 하나 눈이 감긴 것이 없었다.

그들의 무심한 눈에서 나는 전율을 느꼈다.

그 후로 나는 그들의 눈이 한국의 눈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142)

 

그의 아이를 대하는 눈에서부터,

세 테너에 대한 감상까지(154),

온갖 것에 대한 감정을 나름대로 잘 정리해 둘 수 있는 것이 그의 필력처럼 보인다.

 

이 책은 중국의 현대 이야기보다는,

위화의 문학에 대한 생각들을 주로 읽을 수 있어 좋았다.

그치만... 여러 곳에서 짜깁기한 이런 책들은... 역시, 단행본으로서의 의미보다는,

자료로서의 가치가 더 많아 보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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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아이즈 2013-04-15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금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토론하고 들어왔습니다.
글샘님, 눈물 겹도록 좋은 책이었어요. 제겐 글빨, 생각빨, 구성빨 다 먹히는 책이었어요.
그럼에도 동어반복이라면 이 책은 다시 안 읽어도 되나요?

위화처럼 산문을 쓸 수 있다면 소설은 무용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제 생각이 틀렸다고 힘을 실어주시어요.^^*


글샘 2013-04-15 15:40   좋아요 0 | URL
틀렸습니다. ㅋ~
위화의 소설은, 그 생각을 '형상화' 한 사람들과 시대가 그대로 이야기로 드러나는 거죠.
이 책은 3부로 이뤄졌는데,
1부. 아이를 기르는 단상 위주로... 삶의 단편적 모습을
2부. 문학에 대한 상념들
3부. 여러 가지 책들에 쓴 발간사 모음
이렇게 잡다하답니다.
 
필경사 바틀비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세계명작
허먼 멜빌 지음, 공진호 옮김, 하비에르 사발라 그림 / 문학동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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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유명하다.

이 소설은 특이하다.

이 소설은 신기하다.

이 소설은 재미없다.

 

그렇지만, 이 소설은 궁금하다.

 

19세기 월스트리트에 취직한 필경사 바틀비.

필경사는 열심히 남의 서류를 베끼는 작업에 몰두해야 하건만,

바틀비는 아무 이유도, 연유도, 까닭도, 연원도 밝히지 않고,

무작정,

저는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고 반복하여 말한다.

 

이 소설을 들고 있으면서, 당혹스러웠고,

도대체 이야기하는 바가 뭘까 의아했고,

바틀비의 경직된 자세에 내가 다 어쩔 줄을 몰라하며 읽었다.

 

결국 이 책을 다 읽은 지금 갖게 되는 느낌은,

작가는 이 책을 통하여 어떤 이야기를 전달하려한 것이라기보다는,

작가는 이 책의 바틀비를 통하여 어떤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왜 자신이 해야할 일을 고집스럽게 안 하겠다는 말을 반복할까?

현대의 파편화된 인물들은 이유없이 어떤 일엔가 몰두하고 있다.

자신이 하는 일이 전체 조직이나 구조에서 어떻게 유기적으로 기능하고 있는지에 대하여는 생각하지 않은 채...

 

바틀비가 '안 하는 편을 택하겠다'고 말한 것은

'하지 않겠다'와는 다른 느낌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는 편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

관료사회를 살아가는 파편화된 개인들에 대한 반성도 좀 하게 되고,

과연 현대 사회에서 '선택'이란 가능한 것인지도 돌아보게 된다.

 

검푸른 바다로 흰 고래를 잡으로 떠나던 현대의 오딧세이아를 쓴 멜빌이,

대도시 한복판에서 세이렌의 노랫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온몸을 돛대에 묶고 눈과 귀를 모두 가려버린 오디세우스처럼,

어쩔 줄 몰라하는 '벽'으로 가로막힌 월 스트리트를 오가는 사람들에게,

불현듯 나타난 바틀비의 강경한 목소리는

우리가 아무 생각없이 도돌이표를 되밟는 일상을 살아가는 일에 대하여,

어떤 '부정'과 '선택'의 가능성이 있는 블루 오션도 원래는 존재하였음을...

그리하여, 블루 오션을 향한 항해의 가능성을 열어 둘 수도 있지 않겠냐는 물음을...

불친절하게 툭, 던져주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묵묵히, 창백하게, 기계적으로 필사했다.(27)

 

바틀비는 우리와 다름없는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그가 주어진 일을 거부하면서,

아니, 안 하는 편을 '선택'하면서,

그는 두 눈의 모습이 달라진다.

 

우리는 두 눈이 바라보는 세상은 같다고,

하나의 초점으로 상이 맺힌다고, 착각하고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선택' 이후, 좌우 양안에 비추이는 세상은 전혀 다른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다양한 생각을 시작하게 만드는 바틀비,

그의 불친절함에 대하여,

그의 불친절한 '선택'에 대하여... 생각만 많고,

삶의 선택엔 정답이 없음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는 금요일 오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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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기술 밀란 쿤데라 전집 11
밀란 쿤데라 지음, 권오룡 옮김 / 민음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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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 전집의 11번째 책.

 

밀란 쿤데라의 소설들 역시 상당 부분 현실과 넘나드는 이야기들이 많아서,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소설 읽기 이상의 힘을 기울여야 겨우 읽어낼 수 있을 정도의 독자에 불과한 나는,

유럽의 다양한 소설 세계,

특히 번역의 문제까지를 다룬 밀란 쿤데라의 이 책을 설렁설렁 읽어 넘기기엔 무리였다.

 

더군다나... 알라딘 서평단에서 '에세이' 분야의 서평자로서 읽어야 하는 책 치고는...

상당한 수준의 에세이를 만난 셈이다.

보통 여느 문맥에서 말하는 에세이처럼 신변잡기나 한 주제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기대한 내게

무지한 복병이 등장한 셈.

더군다나 해외 수학여행까지 겹쳐 책을 일어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 책을 읽으려면, 유럽 소설에 대한 다양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

우선, 밀란 쿤데라의 소설들, '농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웃음과 망각의 책' 같은 것들을 읽어야 하고,

카프카의 소설들도 '성, 심판, 변신' 같은 것들을 읽어 주어야 할 듯 싶다.

 

소설(로망)이라는 것들이 중세에 등장한 기사들의 사랑 이야기에서 발단된 것이라지만,

현대의 소설은 현대의 역사를 담고 있을 수밖에 없다.

밀란 쿤데라처럼, 체코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살아가는 이라면...

그의 언어 체코어나 불어가 담고있는 역사와 무관할 수 없는 것이다.

20세기 양차 세계대전과 지독한 민족주의 전쟁들 와중에서, 과연 '소설'은 어떤 기능을 하게 되는가?

 

괴물은 바깥에서 온다.

사람들은 그것을 역사라고 부른다.

이 역사는 모험에 나서는 사람들의 행렬과는 더이상 비슷하지 않다.

비인격적이고 다스릴 수도 예측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그런데 아무도 그것에서 빠져 나가지 못한다.

바로 이 순간(1차 대전 직후)에 중부 유럽의 위대한 소설가들은 근대의 종말적 역설을 느끼고 체험하고 포착했더 것(24)

 

역사는 인간을 하나의 파편으로 전락시키고 만다.

인간을 둘러싸고 있던 매력적인 아우라는 사라지고,

아우슈비츠의 아이히만처럼, 인간은 '관료 조직'의 말단 조작체에 불과하게 된다.

 

우리 시대에 와서 세계는 우리 주위로 갑자기 좁아져 버렸습니다.

세계가 덫으로 바뀌는 이러한 변화에 있어서 결정적인 계기는 아마 1914년의 세계대전일 거예요.(44)

 

카프카에게 제도는 그 자체의 법칙만을 따르는 메커니즘이다.

그 법칙은 언제, 누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지도 알 수 없고,

인간적 이해관계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으며 이해되지도 않는다.(147)

 

 

그럼, 그는 왜 소설을 쓰고, 소설에 대하여 이야기하는가?

인간을 비인간화 시키는 세계에 대하여,

적어도, 인간은 인간이라는 소리를 지르기 위하여,

최소한의 저항을 위하여 이런 이야기들을 늘어놓는 것이나 아닌가 싶다.

 

소설은 실제를 탐색하는 것이 아니라 실존을 탐색하는 겁니다.

그런데 실존이란 실제 일어난 것이 아니고 인간의 가능성의 영역이지요.

인간이 될 수 있는 모든 것,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입니다.

소설가들은 인간의 이러저러한 가능성들을 찾아내 실존의 지도를 그리는 것이죠.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존재한다는 것은 '세계-안에-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인물과 그의 세계를 '가능성으로 이해해야만 하는 겁니다.(65)

 

카프카에게서도 잘 드러나듯,

소설 속 세계는

인간적 세계의 극단적인, 그러나 현실화되지 않은 가능성이다.

 

안나 카레니나를 들먹이면서 톨스토이의 업적을 이렇게 쓴다.

 

사람들의 행위에 있어 비인과적이고 가늠할 수 없으며

심지어는 신비롭기까지 한 측면에 대한 조명이라는 문제에 대한 일종의 비유.(88)

하나의 결정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또 그것은 어떻게 행위로 전환되며 행위들은 또한 어떻게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모험을 이루게 되는가.

 

소설은 결국 인간 세계의 가능성을 이야기 속에 형상화해내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통해 독자는 인간 삶의 '우발성'과 그 결과의 '필연성'에 대한 실존적 고민을 읽으며,

자신의 삶과 주인공의 삶을 나란히 두면서 긴장하고 안도하는 것이다.

 

이 책에는 그의 다양한 연설, 대담도 등장해서, 소설에 대한 그의 다양한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

(다양함은 늘 풍부하게 헷갈릴 수 있다는 약점도 품고 있는 법)

 

그래서 그는 소설이 담고 있는 주제에 대해서 이렇게 정리한다.

 

주제란 실존적 질문이죠.

소설은 우선적으로 몇몇 기본 단어 위에 기초합니다.

주된 단어들은 소설이 진행되는 동안 줄곧 분석되고 연구되고 정의되고 다시 정의되어,

마침내 실존의 범주로 변환됩니다.

소설은 마치 집 한 채가 몇 개의 기둥 위에 세워진 것과 마찬가지로 몇 개의 범주 위에 세워진 것이죠.(124)

 

실존적 질문을 위하여 선택한 단어들과 그 단어들이 드러내는 실존의 범주.

결국 그는 자신의 소설을 설명하기 위하여,

키워드들을 정리하기에 이른다.

6부 소설에 관한 내 미학의 열쇠어들...

 

소설은 무엇을 드러내기 위한 것인가?

밀란 쿤데라 자신은 왜 소설을 써서 자신을 드러내는가?

이런 문제에 대하여 한 마디로 질문하기 어려우니,

이런 길고 난삽한 글들을 하나로 묶어 책으로 펴냈을 것이다.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 역시 이 책에서 엿볼 수 있다.

 

찌질하기 그지없이 사는 나의 삶은 참으로 비참하다.

그치만, 주변 사람들을 아무리 둘러봐도 다들 번드르르하게 잘도 적응하며 사는 거 같다.

나와 '유사'한 인물들은 현실 세계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텔레비전 속 연속극 주인공들 역시 늘 해피엔딩으로 잘도 살고 있다.

소설 속에서 세계와 갈등하며 대치하고 패배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하여,

슬프기 그지없는 삶의 '실존'을 만나면서 긍정의 고갯짓을 끄덕이게 되는 것이다.

 

시적인 독백은

심리적 공감이 큰 삶에게는 무한한 울림을 전달할 수 있다.

그렇지만 복잡다단하고 부조리한 세계에 맞닥뜨린 인간들에게,

남의 독백을 쉽사리 공감하고 수용하라고 하기에는 '시'의 공감대가 멀어져가고 있나보다.

왜, 이 시대의 소설을 이야기하는가...

같이 들어볼 만한 이야기가 많다.

(듣고 알아먹지 못한 부분이 많다는 고백이다.)

 

한자 하나 고칠 곳...

162쪽. 非時的... 時가 아니고 詩로 고쳐야 옳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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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적인 은총 아르망 가마슈 경감 시리즈
루이즈 페니 지음, 이동윤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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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즈 페니의 소설에는 '가마슈 경감'이란 경찰이 등장한다.

캐나다의 퀘벡이란 지역의 특수성을 감안한다면,

이 소설은 상당히 프랑스스러운 인간상을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또한 불어의 진한 어휘의 향을 가득 풍기려 노력하는 소설 같기도 하다.

 

프랑스인이나 불어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별로 없지만,

작가가 창조해낸 가마슈 경감이란 남자, 참 맘에 든다.

이제 나잇살이 점점 중력의 영향 아래 놓이는 나이여서,

나이 들어 흉한 사람들을 워낙 많이 만나다 보니,

저렇게는 나이들지 않고 싶다는 희망 사항을 가지게 되는데,

이 책에서 가마슈 경감이 드러내는 날카로움과 지적인 통찰력, 그리고 인간미까지...

그를 따라 나이들 순 없으리라만, 암튼, 멋진 중년 남자를 하나 만날 수 있다.

 

가마슈가 집에 들러 아내와 만났을 때, 평범한 만남이지만 아름다움을 읽을 수 있다.

 

그는 그녀를 끌어안고 코트 사이로 그녀의 부드러운 몸을 느끼며 키스했다.

두 사람 모두 처음 만났을 때보다 살이 올라 있었다.

양쪽 다 결혼식 때 입었던 옷을 더이상 입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면에서도 역시 성장했고, 가마슈는 살이 붙은 것 정도는 남는 장사라고 생각했다.

인생이란 사방으로 성장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가마슈는 현재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렌 마리는 그를 다시 안아 주었다.

그의 코트는 눈을 맞앗 그녀의 스웨터마저 축축해졌다.

그러나 그녀는 남는 장사라고 생각했다.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해서 커다란 위안을 얻었으니까.(169)

 

그래. 살면서 불편함을 감수하더라도,

커다란 위안이라는, 또는 현재 모습이 마음에 들게 해 준,

배우자를 향하여 <남는 장사>라고 생각한다면, 불만은 없을 것이다.

 

모든 색을 하나로 합치면 어떻게 되는가? 흰색이 된다.

흰색은 신성과 균형의 색이다.

목표는 균형이다.

이를 달성하기 위한 유일한 길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

더 나아가서 흰색의 장막 아래 두는 것이다.(82)

 

과학 시간에 배우는 바로는 '색'을 합치면 '검정'이 되고, '빛'을 합치면 '흰색'이 된다.

번역이 잘못되었거나, 원문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고, 불어의 번역상에서 실수가 있을 수도 있겠다.

이 소설의 원 제목인 '동사'를 영어권에서 내용을 고려한 '치명적인 은총'으로 바꾼 것은,

내용을 살려보려는 의도는 있었으나,

다시 한국어로 번역되면서 '숙명적인, 운명적인' 의미를 지닌 fatal이 '치명적'으로 번역되면서,

죽음을 부르는...의미에 한정되게 된 점은 못내 아쉽다.

 

이 소설의 주제는, 삶의 균형에 관한 것이다.

세 그루의 소나무 마을 - 스리 파인스에 사는 사람들의 평범해 보이는 삶 사이로,

삐뚤어진 삶 역시 공존하게 마련이다.

모든 빛이 뒤섞여 흰 빛이 된다지만,

그리하여 세상은 균형을 이룬 흰 빛의 세상이라지만,

그렇게 스리 파인스 마을은 흰 눈 아래 뒤덮이지만,

그 안에는 지워버리고 싶은 추한 빛 역시 존재할 터이다.

 

모든 색을 결합하면 흰색이 된다는 거예요.

반면에 검은 색은 모든 색이 부재한 상태인 거고요.

그래서 CC에 따르면,

모든 감정은 색이고 사람들은 감정적이기 때문에

분노나 슬픔, 질투 같은 어떤 감정이든 하나의 색이 우세하게 되면 균형 상태가 깨지게 되죠.

이 사상의 요점은 흰색을 달성하는 거예요.

모든 색, 모든 감정을 가지런하게 정리해 놓으면서요.(250)

 

중도를 말하는 이, 중립을 지키라는 이가 저지르기 쉬운 오류는,

중도나 중립이 이미 가진자들의 이데올로기에 기여한다는 것을 간과한다는 점이다.

이처럼 균형을 말하는 자들 역시, 인간의 다양성을 무시할 수 있는 두려운 가능성을 가진 존재란 것.

 

나는 사람이라는 집의

마지막 방을 조사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스스로에게도 걸어 잠그고 숨기곤 하는 방 말이에요.

그런 방에는 악취가 나도록 썩어가는 괴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 직업은 생명을 앗아가는 사람들을 찾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동기를 알아내야하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그 사람들의 머릿속으로 들어가서 마지막 문을 열어야 합니다.

하지만 다시 밖으로 나오게 되면...

세상은 갑자기 더욱 아름다워지고, 더욱 생기가 넘치며,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사랑스러워집니다

최악의 상황에 직면했을 때야말로 최선을 알아볼 수 있는 겁니다.(443)

 

이렇게 자기 직업의 의미를 말할 수 있는 중년의 남자는 멋지지 않은가?

나 역시 사람이라는 집의 방들을 조사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직업이긴 하다.

그 대상이 생명을 앗아가는 사람들은 아니지만,

한창 자랄 나이의 아이들이 갖고 있는 방들 역시,

악취가 나도록 썩어가는 괴물이 기다리고 있는 방들을 가지고 있다.

그 방들의 마지막 문을 열어 젖힐 것인지 말 것인지,

범죄를 재구성하기 전까지는 판단 보류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선함과 악함,

얼룩진 인간과 균형잡힌 인간성.

이런 것들을 어느 한 편의 손을 들어줄 수 없는 노릇이다.

 

이 소설이 이끌고 있는 추리의 라인과 반전 역시 그러하다.

인간의 선함은 어디까지이며,

인간의 악함 역시 처벌받을 수 있는 것인지...

여러 빛의 종합적 균형인 흰색과,

빛의 없음의 저주인 검은색은,

자칫, 세상을 흑백 논리로 재단할 위험을 가진 빛들 아닌가.

 

말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때로는 죽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으니까,

그리고 때로,

말은 사람을 치유하기도 하지.(499)

 

이런 이야기를 왜 읽을까?

언어를 접하는 일은 위태로움의 지경에 대신 서보는 간접 체험을 주기도 하고,

때때로, 치유가 되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

말로 벌어먹고 사는 사람으로서,

특히나 한창 여리고 순수한 아이들을 대하는 한 사람으로서,

치유하는 말을 써야지, 상처입히고 죽이는 말을 써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사랑해, 크리.

누구라도 당신을 원하지 않을 수 없을 거야.

자기가 얼마나 아름답고 재능이 넘치는 사람인지 모르지?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멋진 여자야.

난 절대 당신을 떠나지 않아. 크리.

그리고 그 누구라도 당신에게 상처를 주지 못하도록 하겠어.(501)

 

시트콤 주인공 '미달이'가 이름때문에 받았던 스트레스를 상상한다면,

영어권에서 '크라이'의 의미인 '크리'를 이름으로 준 것에 대한 저주는 상상하기도 어렵다.

인디언들은 나무를 제거할 때, 빙 둘러서서 저주의 말을 퍼붓는다지 않는가.

크리. 그 아잉게 이렇게 사랑스런 말을 쏟아부어줄 때,

언어의 힘은 가장 큰 에너지를 발산할 것이다.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멋진 여자야.

자기가 얼마나 아름답고 재능이 넘치는 사람인지 모르지?

 

이렇게 사랑스런 말을 듣고 자랐다면, 크리 역시 얼마나 사랑스런 캐릭터로 성장했을 것인지...

사람의 말을 곱씹어 보게 하는 소설이다.

 

사건을 해결하고 뿌듯해하기보다는,

삶의 온기를 느끼면서 애틋한 정을 느끼게하는 가마슈 경감.

 

백미러에 비친 스리 파인스가 보였다.

가마슈는 차에서 내려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집들은 따뜻하게 손짓하는 불빛으로 빛나며,

가끔은 너무 차가운 세상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해주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눈을 감고 달음박질하는 가슴을 진정시켰다.(515)

 

이런 따뜻함이 루이즈 페니의 소설이 가진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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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27 09: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27 15: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27 20: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무개 2013-02-27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새 정말 심각하게 노후가 걱정스러워요.
저렇게 되고 싶다는 사람보다는 저렇게 늙지 말아야지 하는 사람만 주위에 있다보니
왠지 노후가 더 공포스럽게 느껴지는거 같아요.

글샘 2013-02-27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그렇더라구요.
인덕이란 게,
사람들이 날 돌봐줘서가 아니라,
저렇게 되고 싶다~ 이런 사람 많이 만나는 게 인덕이 있는 거 아닌가 합니다.
잘 둘러보면... 멋진 사람도 많아요~ 세상에는...
 
시작은 키스
다비드 포앙키노스 지음, 임미경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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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답다.

영화를 볼 때도, 참 프랑스다운 영화다 싶었는데,

소설을 읽으니 또 참 프랑스다운 소설이란 생각이 든다.

 

제목은 '델라카테스'다.

델리카~한 상황이라는데,

섬세하고 미묘하고 상처받기 쉬운 오묘한 심리적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라고 한다.

 

사람이 사람에게 매혹되는 건,

전적으로 외모에 의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의 어떤 특별한 조건에만 이끌려 사랑이 싹트는 건 아니다.

사랑이란 건,

마치 탄소와 기타 영양물질들과 40여 킬로그램의 36.5도짜리 물을 넣고 뒤섞는다고 사람이 탄생하지 않는 것처럼,

남자와 여자, 그리고 기타 몇 가지 조건을 맞춰 준다고 싹트는 게 아닐 거다.

 

사람마다 다른 미묘한 점.

그 델리카한 면들을 이렇게 절묘하게 잡아내는 일은,

어쩌면 초중고 교육과정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작문 교육을 받는 것과는 무관한 건지도 모른다.

공기 중에 떠도는 산소들을 캡처하는 호흡의 과정들처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문화를 통하여 익히고 있어야 할 것이다.

 

남편의 죽음으로 실의에 빠진 여주인공 나탈리,

어느날 이유도 알 수 없는 돌발 행동을 한다.

그건 뜨거운 키스~!(ㅋ 마르퀴스, 좋았겠다. 매력적인 직장 상사의 돌발 키스라니...)

그 남자는 마르퀴스라는 참으로 재미없어보이는 스웨덴 남자인데,

그 남자와 만나면서 읽게 되는 델리카테스들은,

사람이 어떻게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가를 이론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구석까지

섬세하게 마음의 움직임을 행동을 통하여 보여준다.

 

나탈리는 아주 신중한 성격이었다.

 

로 시작하는 이 소설.

아주 신중한 성격인데... ㅋ~

직장에서 그것도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키스라니...

 

연인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관계에 대해 환상을 품고 싶어 한다.

자신들의 만남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색다를 것 없는 지극히 평범한 그 숱한 관계들도 종종 갖가지 자질구레한 사연으로 치장되곤 하는데,

그런 것들이 가벼운 황홀감을 불러일으키다 보니 급기야 무슨 일에든 의미를 갖다 붙이려 들게 되는 것이다.(10)

 

남편 프랑수아와 만날 때의 델리카함에 등장하는 구절이다.

그렇지만, 이런 구절은 우리가 사랑에 대해서 얼마나 환상을 추구하는지...

갖가지 델리카테스들의 이면에는 우리가 환상을 품고 싶어하는 욕구가 깔린 것은 아닌지,

과연 그 욕구의 밑바탕엔 무엇이 있는지...

소설을 따라가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자기에게 어울리는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데,

도대체 어떤 면을 보고 자기와 잘 맞는다고 생각하게 되는 걸까?

에 대한 델리카한 비유라고나 할까?

 

그녀는 이제 자신에게 지금의 이 행복을 붙잡을 힘이 생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266)

 

결국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객관적 상황이란 없다는 것이다.

사랑받아 마땅한 객관적 인물도 없다.

왜, 그를 사랑하는가?

왜,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가?

 

그것은 그가 사랑스럽고, 우리는 서로 사랑스러워서가 아니라,

내가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 바로 '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라면 나는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와 함께일 때 행복한 것이다.

 

물론, 사람에 따라 미묘한 차이는 다를 수 있다.

그 미묘함에 사랑의 묘미가 있는 것이기도 하다.

 

하염없이 환상적이면서,

하염없이 정교하게 직조된 태피스트리같은 작품을 만나고 싶다면, 이 책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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