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전달자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20
로이스 로리 지음, 장은수 옮김 / 비룡소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이런 책을 읽을 때는, 처음이 쉽지 않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와 전혀 다른 중력장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위도에서 전혀 느끼지 못하는 상태로 지구의 자전을 받아들인다.

북위 30도 정도에서는 시속 800킬로미터 가량의 속도감을 까먹고 껌딱지처럼 지구에 붙어 사는 것이다.

적도에 사는 사람들은 시속 1000킬로미터를 달린다고 한다.

 

매트릭스란 그런 것이다.

거기 붙어서 살 때는 전혀 깨닫지 못하는 것.

 

그런데, '여기'서 '저기'로 갈 때,

말하자면, 적도에서 북위 30도로 물체가 이동할 때, '차이'가 발생한다.

그 힘을 '전향력'이라고 하는데, 푸코가 빠리의 팡테옹에서 실험한 것이 작년 수능 국어영역에 출제된 일이 있다.

진자를 정남에서 정북으로 보내면, 그것이 그 미세한 '전향력'의 영향으로

정북에서 미세하고 오른쪽으로 간다는 것이다.

그 진자는 다시 정남보다 미세한 왼쪽으로 돌아오고,

길게 본다면, 진자는 회전하게 된다.

 

사람들이 나이에 따라 알맞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다.

그게 다 매트릭스의 조화다.

예전엔 남자 13세 여자 15세 정도면 결혼해서 애낳고 살았는데, 요즘엔 애들로 취급한다.

 

이 소설 역시 미래형 판타지인데,

나이에 따라 적합한 일을 위원회에서 지정해 준다.

산모도 있고 노동자도 있다.

주인공 꼬마는 기억 보유자로 지정받아, 기억 전달자로부터 '기억'이라는 것을 얻게 된다.

 

이런 사소한 아이디어로 책을 쓴다는 것이 재미있다.

인간이 가진 능력 중 하나인 '연역'의 힘이다.

'호모 루덴스'는 놀이하는 인간, 이라는 말인데,

'책'은 인간의 놀이 중 최고봉이 아닐까 싶다.

판타지 소설은 '연역'하는 인간의 두뇌가 만드는 가상 현실을 최대한 실현한다.

 

이 책에서 역시 책을 소유하고 있는 것은 기억 전달자 뿐이다.

과거 인간의 삶과 인간 삶의 '진실'을 볼 수 있는 것은 '기억 전달자'와 '기억 보유자' 뿐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뭔지도 모르고 세상의 논리를 받아들인다.

 

임무 해제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의심을 가질 필요도 없이 살아간다.

그러나, '기억'이라는 것을 본질로 삼은 주인공 조너스는 '평화로운 마을'의 거짓을 깨닫는다.

 

완벽한 행복에 이르기 위하여

개인의 선택에 따르는 어떠한 종류의 잘못도 없다는

어떠한 종류의 차별도 없는 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위험의 소지를 모두 제거해 버린 곳.(304)

 

어떤 이유로든, 통제의 가지치기는 거짓이다.

아무리 인간의 기억을 지워나가려 해도, 삶의 지혜는 '기억' 속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그것이 책의 힘이니까.

 

'늘 같음 상태'와 예측 생활에서 벗어난 후,

조너스는 길모퉁이를 돌 때마다 나타나는 신기한 풍경에 압도되었다.(289)

 

지구에 붙은 껌딱지 같은 인간은 전향력을 느낄 수 없다.

늘 같음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통제 사회는 그렇게 해서 불평등한 균형을 유지하려 애쓴다.

그 균형에 해가 되는 존재는 '임무 해제'시키면 그만이다.

 

조너스는 방안에 노인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혼란에 빠졌다.

마을에서 노인들은 절대로 노인의 집을 떠나지 않았다.

그곳은 그들이 존경받으며 훌륭한 보살핌을 받는 곳이었다.(210)

 

이 과거의 미래는 이미 현재가 되어버렸다.

상상 속의 미래는 현실이 되어버렸다.

방안에 노인들은 없다.

훌륭한 보살핌을 받으며 모두 노인병원에서 죽기만을 기다린다.

까뮈의 '이방인'에서 어머니가 죽기 전 남친을 사귀던 그런 곳에서...

 

눈이나 썰매는 어떻게 된 건 가요?

날씨를 통제한 거지. 눈이 내리면 식량들이 잘 자라지 않거든.

교통이 거의 마비 상태에 빠지기도 했단다.

그건 전혀 실용적이지 않았지.

언덕도 마찬가지란다.(143)

 

실용적이지 않은 것들은 모두 '통제'하거나 '제거'하는 사회.

 

마을 안의 책들은 마을 생활에 도움을 주는 참고 서적들, 마을 소개서, 규칙을 실어 놓은 규정집... 이었다.

하지만 이 방은

벽이 천장까지 온통 책꽂이로 덮여 있었으며

거기에 책이 가득차 있었다.

책의 종류는 수백 권, 어쩌면 수천 권은 되어 보였고,

반짝거리는 글자로 제목이 새겨져 있었다.(126)

 

기억 보유자로서 기억 전달자를 처음 만난 장면이 서가였다는 대목은 의미심장하다.

 

판타지 소설 속에서 나는 통제 사회에서 벗어나려는 '사상의 자유'를 본다.

아주 저렴한 이름 '해리 포터'가 블링블링한 집안의 '헤르미온느 그레인저'보다 나아질 수 있는 곳이며,

질서라는 이름으로 획일화를 강요하는 '빅 브라더' 들에게,

빠큐~를 날려줄 수 있는 '창의성'의 파워를 느낄 수 있어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이브
우르줄라 포츠난스키 지음, 안상임 옮김 / 민음사 / 2014년 3월
평점 :
절판


꼭 해야 할 일을 소홀히 하는 것은

위험에게 전권을 부여하는 일이다.(셰익스피어, 399)

 

오스트리아 작가의 소설.

유럽 작가들의 소설은 미국 작가들과 상당히 다르다.

친환경적 주제, 또는 여성들의 삶, 그리고 고전에 대한 애정 같은 것들이 많이 묻어난달까...

 

이 소설은 신선하다.

제목 파이브는 독일어로 퓐프(5)를 영어로 그대로 번역한 건데,

다섯 군데의 좌표를 '지오캐싱'이라는 게임을 통해서 범죄와 엮어 놓는 스릴러다.

 

처음엔 상당히 신선하게 시작한다.

그러나, 소설의 두께를 고려할 때,  지루한 부분도 많다.

 

괴테나 셰익스피어의 문장을 암호처럼 메시지로 보내는 범죄자라니...

좀 치밀하고 지적인 범죄자다.

 

현대 문명의 이기를 접목시킨 점도 돋보이고,

지적인 스릴러를 구성하려는 노력도 높게 쳐주겠지만,

전체적인 구성이 좀더 조밀하게 짜여져 있으면 좋겠다.

 

흥미를 돋우기 위하여 주인공 여형사 위주의 서술 사이사이에

범죄의 현장을 간단히 끼워 넣었는데, 그런 것들이 긴밀하게 긴장감을 유지하지 못하는 건 조금 아쉽다.

그리고 살인의 동기가 밝혀질 때,

독자의 가슴에서 싸~하게 일어나는 공감이 스릴러의 생명이라면,

글쎄, 그런 것이 좀 약해 보인다.

 

베아트리체와 플로린의 애정 전선도 좀더 짜릿한 교감을 보여주면 좋겠는데,

베아의 팍팍한 가정사를 상쇄해줄 만한 사랑이 그려지지 않은 점은 아쉽다.

이래저래 유럽의 스릴러는 아직 익숙하지 않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99. 아힘은 머리를 흔들며 눈알을 굴렸다... 이런 말은 좀 어색하다. 눈길을 돌린 것이나 뭐 그런 편이지 않나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반 일리치의 죽음 창비세계문학 7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이강은 옮김 / 창비 / 201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반 일리치의 죽음>

 

이반 일리치는 세속적인 의미에서 제법 잘 나가던 판사였다.

그럭저럭 고위직을 잘 누리고 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병에 걸린다.

그러면서, 인생에서 '자기'에 대한 평가가 달라진다.

이전까지는 직위를 통하여 얻던 평가가 싸악 사라지고 이제는 불쾌한 병인으로 삶을 마무리하는 것이다.

 

톨스토이의 이 소설은 1886년 발표된 작품이니 작가가 환갑이 다되어 쓴 소설이다.

당시엔 인간의 죽음에 대하여 진지하게 통찰한 소설이 드물었을 것을 고려한다면,

발표 당시 톨스토이의 시선이 얼마나 통찰력있는 것이었을지 느끼게 된다.

 

사람은 죽음을 늘 남의 일로 여긴다.

손범수, 이순재가 보험의 앞잡이가 되어 외치듯이,

그래, 암은 내가 걸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암보험을 안 드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죽지 않는 사람은 없다.

죽음 앞에서 생각할 때, 내가 이제까지 누리던 행복과 자유의 근거가 얼마나 희박했던 그것이었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내 노력이든, 내 재능, 내가 물려받은 물적, 심적 재산들이 한 순간 무가 될 것이 명백해질 때,

인간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이반일리치의 삶은 자신이 생각하고 기대한대로

그렇게 별일없이 즐겁고 나름대로 품위있게 흘러가고 있었다.(36)

 

누구나 다들 이렇게 살고 있을 것이다. 나름대로 품위있고, 즐겁게...

 

그리고 몸은 피곤하지만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빼어나게 연주를 해낸 오케스트라의 제1바이올리니스트처럼

뿌듯한 마음으로 귀가하곤 했다.(46)

 

그래. 다들 이렇게 퇴근했을 것이다. 뿌듯해서.

 

그는 파멸의 끝자락에서 자신을 이해하며 마음 아파하는 사람 하나 없이

홀로 외롭게 살아가야만 했다.(62)

 

이 소설에서 톨스토이가 들려주고자 했던 이야기는 이런 것이다.

이반 일리치라는 형상화된 사람의 삶과 죽음을 통해,

너도 이반이지? 그런 어리석은 바보지?

이런 물음을 던지는 것이다.

 

이사야 벌린은 '고슴도치와 여우'라는 책에서 톨스토이를 '본래 여우였지만 스스로 고슴도치라고 믿었던 사람'으로 정리한다.

여우형 인간은 생각이 분산적이고 산만하지만 다양한 목표를 추구하며 다채로운 경험과 본질을 포착하는 사람이다.

고슴도치형 인간은 모든 것을 하나의 핵심적 비전, 즉 명료하고 일관된 하나의 시스템과 연관시키는 사람이다.(124)

 

이 책을 통하여 여우형 톨스토이는 직장 동료를 통하여, 가족을 통하여, 그리고 죽음을 맞는 당사자를 통하여,

삶이라는 단선적 형식을 다양한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게 도와준다.

그렇지만, 그는 또 고슴도치처럼, 삶의 진실성을 명료하게 느낄 수 있게 지원하기도 하는 것이다.

 

어제, 보지않던 jtbc 9시 뉴스를 보다가 엉엉 울었다.

아직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기다리는 투박하게만 생긴 아버지의 울음에 전염되어서다.

그이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을 후벼팠다.

선실 안에서 죽음의 순간을 맞아야 했던 아이들의 가슴은 얼마나 막막했을까?

 

보통 죽음을 앞둔 환자의 마음을 5단계로 나누어 표현한다.

부인, 분노, 타협, 우울, 수용... 등으로...

죽음에 대한 인식을 차츰 수용하게되는 정상적 죽음에 대하여 할 수 있는 이론이다.

 

급박하게 닥쳐온 죽음 앞에서 떨었을 아이들을 생각하면 잠을 못 이룬다.

이 아이들은 한국에서 태어나서 죽은 것이다.

아프고, 그냥... 아프다.

 

150. 가장 중요한 연표의 출생 연도가 틀렸다. 1828년생을 1928년생으로 적었다.

 

러시아 이름은 아무리 봐도 헷갈린다. 주인공 이름도 한 페이지 넘기면 헷갈린다.

그런데, 창비는 등장인물 이름과 관계를 '책갈피'에 넣어 주었다. 멋진 아이디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무개 2014-04-29 0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멋진 아이디어네요.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읽을때 등장 인물들 이름 줄줄이 메모 해놓고 봤었던 기억이 ^^:::

글샘 2014-05-01 09:48   좋아요 0 | URL
네. 이 시리즈의 가장 큰 장점이 책갈피인 듯...
 
이방인 - 개정판
알베르 카뮈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1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성공작이다.

실존주의의 시대를 풍미했다던 샤르트르와 카뮈를 읽던 20세기 중반에서 묻혀버린 카뮈의 소설을

다시 베스트셀러로 올려놓았다.

 

아마도, 그 시절에 청춘을 보낸... 그러나, 그 청춘은 참으로 가난하고, 또 치열하였던 사람들에게,

카뮈의 <이방인>은 이해하기 힘들었던 텍스트, 였을 것이고, 이해했더라도 이제 나이가 들어 다시 읽어보고 싶었던 텍스트였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이방인을 다시 읽도록 한 구절은,

노란 띠지의 저 말,

<우리가 읽은 이방인은 카뮈의 이방인이 아니다>라는 말이었다.

 

이 책이 나오기 전부터 블로그에 그 번역 노트를 게재했다는 사실은 요즘 알았다.

이 책을 다 읽어가던 시점에,

무서운,

일어날 수도 없었고, 일어나서도 안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세상에...

 

실존주의는 '본질'에 대한 '인간'의 저항이고 거부다.

'본질'이라는 것은 그 이전까지 있었던 '구세대의 고정관념'에 가까운 말이랄까...

아무튼 내가 이해하는 바는 그렇다.

 

어떤 '이념'을 앞에 내걸고 투쟁할 때, 결국 이념은 보이지만 사람은, 그 투쟁 사이에서 짓눌리고 으깨지는 사람은 인식되지 못한다. 그래서 사르트르가 한 말이,

실존은 본질에 우선한다, 라는 말이었다.

인간 존재는 어떠한 '이념'이나 '사상'보다 소중한 것이라고...

 

이 책의 제목, 불어로 (르) 에뜨랑제...는 이방인(외국인, 방랑자)란 말의 함의와 다른 의도로 씌었을 수 있다.

제대로 시비를 걸려면, 제목부터 좀 시비를 걸어 주었더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이 이방인은... 아웃사이더(국외자)나 소외당하는 인물의 개념이었을 게다.

조세희의 '난쏘공'의 '난쟁이'이거나,

최인훈의 '광장'의 '이명훈'처럼,

<나치즘>이나 <제국주의>의 본질에 의하여 희생되어가는 '인간의 실존'에 대한 문제제기다.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의 한 청년.

뫼르소라는 청년은 어떠한 사유에서든 살인을 저지른다.

그 살인은 이 소설에서 가장 웅장한 '운명'을 들려준다.

 

그것은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네 번의 짧은 노크 같은 것이었다.(81)

 

이 짧은 노크 네 번 이전까지의 뫼르소의 삶은,

그야말로 지극히 개인적이고, 가볍고, 자유로운 것이었다.

그때까지 그에게는 아프리카의 뜨거운 햇볕과 지중해의 황홀한 바다를 즐기는 '자유'가 함께했다.

요양원에서 쓸쓸히 죽어간 어머니의 부고 역시 그의 경쾌한 삶에 큰 방점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소설의 2부에서,

그는 세계 질서 안으로 편입된다.

법정에서, 법관과 검사, 그리고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국선변호인, 그리고 배심원...

그들의 언어는 1부의 경쾌한 언어와는 전혀 다른 질의 것이다.

 

1부에서는 가볍고 반짝반짝 빛나던 삶의 편린들이,

하나하나 모두 무겁고 끈적거리는 거미줄이 되어 뫼르소를 옭죄는데 소용된다.

그는 자유인, 주체적인 인간에서 갑자기 '아웃사이더'의 처지로 전락한다.

 

실존의 위기가 최대치가 될 때는 죽음 앞에서이다.

 

아, 죽음...

죽음 앞에서 당당하게 죽음을 맞는 것을 말하는 자.

자신은 죽음 앞에 서지 않을 것이라고 착각하거나, 아니면 해탈한 사람이거나 그럴는지 모른다.

 

실존주의는 늘 죽음을 앞둔 사람을 형상화한다.

 

그러니까 그(부속사제)는 이해할까?

모든 사람은 특권자라는 것을.

특권자밖에 없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 역시, 언젠가는 선고를 받을 것이다.

그 역시, 선고를 받을 것이다.

만약 그가 살인범으로 고발되고 그의 어머니 장례식에서 울지 않았다는 이유로 처형된다 한들 그게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아주 오랜만에 다시,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그녀가 왜 말년에 약혼자를 갖게 되었는지,

왜 그녀가 새로운 시작을 시도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 거기에서도, 삶이 점차 희미해져 가는 그곳 양로원에서도,

저녁은 쓸쓸한 휴식같은 것이었다.

죽음에 인접해서야 엄마는 해방감을 느끼고,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준비가 됐다고 느꼈음에 틀림없었다.

 

나는 세계의 부드러운 무관심에 스스로를 열었다.

이 세계가 나와 너무도 닮았다는 것을,

마침내 한 형제라는 것을 실감했기에, 나는 행복했고, 여전히 행복하다고 느꼈다.(166)

 

 

그가 속한 나라 알제리에서도 그는 이방인이었다.

그는 지배계층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세상의 '윤리'에 어긋났기 때문이었다.

'윤리'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인륜 륜 倫'이란 자는 '무리'라는 뜻이다.

인륜은 자연스럽게 절대적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무리'가 정하는 것이다.

'다수'가 정하는 것이다.

그 '다수'는 당연히 민주주의의 원칙에 따라 다수결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힘센 자들을 '다수'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정서의 이 책은 '윤리'에 어긋난다면서, 비윤리적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았다.

재미있다.

중립이라는 투로 말하는 사람들이 가만 보면, 스스로 어느 '무리'를 대변하는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정서 편을 들고 싶다.

그가 기존 번역에 반기를 든 행위가 한국 사회에서 정말 '큰 용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 그런 면에 '침묵의 나선 이론' 운운하며 동조한 페이퍼를 쓴 적이 있다.

읽고 보니, 그때 내 생각이 더 굳어졌다.)

 

http://blog.aladin.co.kr/silkroad/6972110

 

온 국민이 침통해하는 사건이 일어난,

전임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아 넣던 가증스런 넘들의 시대보다 더 비참한...

그런 시대에, 무기력한 정부의 구조에 항의하는 유족을 <미개하다>고 말한 '재벌의 자제분'이 계셨단다.

 

그래... 미개한 건, 다 이방인이다.

(르) 에뜨랑제가 그런 심사를 대변하는 것이고, 영어제목 스트레인저란 말도 그리 알아 들으리라...

 

자국 내에서도, 주류이거나 권력이거나 기득권을 조금이라도 가진 사람들은 말한다.

우리편이 아닌 너희는 모두 이방인이라고...

 

이 책이 아니었던들, 김화영의 '이방인'을 펼쳐 읽지 않았을 것이다.

이정서의 문장과 김화영의 그것을 꼼꼼하게 대조해 가며 읽지도 않았고,

누구의 번역이 더 나은지를 감별할 수도 없었지만,

마케팅에 대한 비난이나, 비도덕적이란 비난 같은 것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깨무는 짓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그 논쟁 안에는 '김화영'도 있고, '이정서'도 있지만, '카뮈'가 없었기 때문이다.

김화영도 이정서의 교정에 많은 부분 공감할 것이다.

 

이 책을 딛고, 더 멋진 이방인을 만날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다.

 

그나저나, 식민지 시대도 아닌 지금,

자국민을 이방인 취급하는 이 현실의 부조리를... 어이할 일이냐...

슬프고... 분하고... 날마다 마음이 북받친다... 이런 걸 일컬어, 비분강개...라고 했던가...

 

비분강개 : 悲 : 슬플 비 憤 : 분할 분 慷 : 강개할 강 慨 : 분개할 개

의롭지 못한 일이나 잘못되어 가는 세태가 슬프고 분하여 마음이 북받침을 일컫는 말.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oren 2014-04-23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샘 님의 '새움판 이방인'에 대한 두 번째 글도 참 좋군요. 이 글 가운데 특히 "마케팅에 대한 비난이나, 비도덕적이란 비난 같은 것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깨무는 짓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그 논쟁 안에는 '김화영'도 있고, '이정서'도 있지만, '카뮈'가 없었기 때문이다."라는 대목엔 저도 특히 공감하게 됩니다.

만약에 이번에 새롭게 번역되어 나온 <이방인>이 '역자노트'조차 미련없이 다 내버리고 '숨을 죽인 채 조용히' 알몸으로 등장했더라면 과연 독자들의 반응이 어땠을까, 저는 그게 정말로 궁금하더군요. 그랬더라면 혹시나 쇼펜하우어가 말한 '진실의 세 단계' 가운데 앞의 두 단계는 훨씬 더 수월하게 건너뛰고 막바로 세번째 단계로 직행할 수도 있었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마저 들더군요.
* * *
모든 진실은 세 단계를 밟는다.
첫째, 조롱당한다.
둘째, 격렬한 저항을 받는다.
셋째,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도토리 자매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4년 3월
평점 :
일시품절


아무렇지 않은 이야기를

모르는 누군가에게 보내고 싶은 날...

 

이런 날이 있다.

친구라고 해도, 가족이라고 해도...

어떤 이야기든 아무렇지 않게 할 수는 없는 법이다.

나는 정말 아무렇지 않게,

답답한 내 속을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후련할 것인데,

내가 그 이야길 누군가에게 한다면, 그가 걱정할지 모른다.

그래서 이야기하지 못하게 된다.

 

돈코, 구리코...

돈구리는 도토리라는 말이다.

내가 좋아하는 일본어 단어가 몇 있는데,

돈구리도 그중 하나다. 돔보~ 잠자리나, 꼬모레비~ 잎사귀 사이로 비치는 빛... 같은 단어도 예쁘다.

그리고 그림자... 카게~도 예쁜데,

바나나가 '키친'에서 주인공을 '미카게'라고 불렀다.

그런 입맛이 같은 사람을 만난다는 일은... 묘한 흥분을 불러온다.

 

바나나의 소설은 애잔하다.

그러나 슬프지는 않다. 삶이 그러하듯이...

 

돈코의 활발한 모습이나 구리코의 조금 우울하고 침체된 모습은

인간에게라면 누구에게나 동전의 양면처럼 감추어진 모습들이다.

한국엘 와서 간장게장, 삼계탕 등에 열광하는 열정적인 언니의 모습도,

침참하면서 문득, 친구의 죽음을 예감하는 히키코모리 류의 동생의 모습도... 낯익은 풍경들이다.

 

어른으로 산다는 일은 참 쉽지만은 않은데,

그 중 하나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말을 어디에도 뱉기 힘든 일이다.

마음 속에 대숲 하나 기르고 싶은 것이 인간의 욕심이라면 욕심일 게다.

 

돈구리 자매가 대숲이 되어준다면...

그리고 그들이 부담없이 이야기를 들어 주고, 기약없이 메일을 보내주기라도 한다면...

사람들은 그런 이들에게 메일을 쓰고 싶어할 것 같다.

 

저 사람이 내 메일을 어떻게 여길까?

이런 걱정없이 메일을 쓸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이 소설은, 신선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