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시골의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
프란츠 카프카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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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가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부산은 노무현도 떨어진 '시장'자리인데, 이번에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그랬더니, 언제부턴가 갑자기 '서병수' 플래카드에 서병수는 사라지고 박그네 얼굴이 붙어있다.

참 못된 사람들이다. 부산 시장 후보가 서병수인데 거기 박근혜가 들어가고, '한번 봐줍쇼~' 하는 건 얼마나 추잡한가.

 

이번에 참사를 겪고,

이놈의 국가라는 것이 그 참사를 대하는 꼬락서니를 보니,

아, 이 나라에서는 누구라도 당장 내일 아침에,

스스로가 벌레가 되어버린 당황스러움을 느낄 수 있겠구나. 싶은 마음이 잊혀지지 않는다.

 

치욕스럽고 더럽지만, 그런 것들이 돈을 벌어서 권력을 잡고 있으니 어떻게 처벌도 되지 않는다.

자식들을 생매장한 부모의 마음이 마음일 것인가?

그런 그들은 하루라도 살고 싶은 생각이 없을 것이다.

그들의 마음을 생각하면 평소 무심한 나조차도 이렇게 마음이 애린데,

가족을 잃고 분하고 화가 나는데,

국가가 나서서 솔선수범 거짓말과 핑계, 회피, 조작을 일삼으니 얼마나 분노와 좌절에 억장이 무너지겠는가.

 

결국 유가족이 국회로 들어가서 쪽잠을 잔 연후에야

당연히 진작 열렸어야 할 국회가 조사에 합의를 했다고 하지만,

그들은 오늘 팽목항 가는 데 참여하지 않았다.

 

정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인 벌레 취급을 받으면서 이 나라 국민으로 살아야 하는가?

그렇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은,

연속극에서나, 또는 고승덕 전처의 친정처럼 재벌 집안이 아니어서,

훌쩍 미국으로 가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벌어올 때는 가장 핵심 멤버인 것처러 여겨지던 존재가,

어느 날 병이 들거나, 조직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해직을 시켜버리거나 하면,

그레고르처럼 벌레가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 철저히 노블리스 오블리주라고는 듣도보도 못한 잡것들이 권력을 잡은 나라에서는,

사소한 일로라도 법 앞에 서게 되거나,

이런 저런 소송에 걸리거나,

의료 분쟁 내지는 산업 재해, 이번처럼 참사를 겪게 되는 경우에도,

또는 국가가 개입하여 저지르는 용산, 쌍용차 처럼 장기간 고통을 겪는 경우에도,

피해자를 철저히 한 순간에 벌레로 만들어 버린다.

 

그 왜소한 존재들이 가진 힘이라고는,

<잊지 않고 있습니다>라는 연대와

남의 고통을 잊지 않고 있어야, 나의 고통을 그들도 잊지 않고 행동으로 옮겨준다는 미약함이다.

 

그러나, 낙숫물이 바윗돌을 뚫듯,

작년에는 부정선거 규탄으로 날이 새던 정국이,

올해는 무능정부 규탄으로 이렇게 흘러간다.

 

사고가 났으면,

전 세계가 경악할 만한 사고가 나고 정부의 무능이 백일하에 드러났다면,

그 사고의 원인을 밝히는 일에 정부와 여당이 나서야 하는 일은 당연지사이거늘,

유가족이 나서서 '원인 규명'을 목숨걸고 구걸해야 하는 게 나라라면...

나라는 국민을 벌레보듯 보는 조직이 맞나보다.

 

변신이란 소설을 판타지로 읽었고,

자본주의 사회의 알레고리로 읽었을 때는 재미있었는데,

참사 이후,

변신을 읽으면서, 소름이 끼치고 분노가 멎지 않는다.

 

나도 당장,

내일 아침,

벌레로 변할 수 있다는 공포에서 오는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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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6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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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원 선생의 '고전 읽기' 강좌를 들은 적이 있다.

선생은 고전에 대하여 '다시 읽는 책'이라고 정의했다.

 

"요즘 무슨 책 읽으세요?"

"응, 카뮈의 이방인을 '다시' 읽고 있어."

이런 책을 고전이라고 한다는 말을 듣고 그럴듯하다고 여겼을 게다.

 

카뮈는 신화가 되었다.

그를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는 이제 별 의미가 없다.(롤랑 바르트)

 

이방인은 엄격한 질서를 갖춘 고전 작품으로,

부조리와 관련해서, 그리고 부조리에 맞서 쓰인 책이다.(장 폴 사르트르)

 

신화는 그 내용에 이러니 저러니 토를 달수 없는 이야기다.

곰에게 쑥과 마늘을 먹이면 과연 웅녀가 될는지 '스펀지'에 실험을 부탁할 수 없는 것처럼...

 

이미 '고전'이라고, '신화'가 되어버렸다고 말하는 카뮈를 '다시' 읽다 보니 이런저런 생각이든다.

먼젓번에 읽던 때와 다른 부분이 눈에 들어오고, 다른 관점에서 부조리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새움 출판사의 이방인을 읽었던 기억이나, 민음사판 책을 읽은 경우나,

읽으면서 별 차이를 느낄 수 없었다.

다만, 몇 부분, 그러니까, '2시 버스' 같은 것들을 읽으면서, 번역 논쟁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지난 번의 독서에서는 뫼르소의 재판 과정에서 '이방인'스러운 부조리에 대하여 느낀 점이 많았다면,

이번에는 레몽의 여자 친구라는 '무어인(스페인계 아랍인 혼혈)' 여인에 대한 뫼르소의 태도와,

노동자 옷을 입고 그들과 부딪치던 '아랍인' 청년들, 결국 죄책감도 느끼지 않고 살해를 저지르는 뫼르소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다.

 

뫼르소는 어머니를 요양원에 보내고 돌보지 못한다고 인정받을 정도로 넉넉하지 못하다.

그리고 뫼르소는 레몽같은 불량스런 청년들이 보기엔 화이트 칼라일 만큼 지적이다.

 

알제리라는 나라는 1830년 프랑스가 지배하여 1950년대 독립한다.

알제리는 프랑스인이 조금 살고 있고, 대부분이 아랍인, 일부가 베르베르인(아프리카 원주민)으로 이루어져 있다.

1942년 발표된 '이방인'의 시대에 프랑스 청년이 아랍인 한 명을 죽이는 일은

분명히 '살인'에 해당하는 심각한 죄로 처벌받는 것은 아니었을 게다.

 

한 발, 그리고 한참 기다렸다 발사한 네 발의 총성은

살육의 광기도, 분노의 표출도 아니었다.

정당방위로 보기엔 지나친 과잉행동이다.

다만, 자신의 존재와는 다른 어떤 존재(이방인)를 훼손했을 뿐이다.

 

그래서, 이 책의 2부에서는 재판이 이루어지는데, 그 재판에 '아랍인 살해'에 대한 단죄는 거의 없다.

아랍인들은 증인으로 채택될 만큼 인격적으로 다뤄지지 않는다.

다만, 그 법정은 하느님을 섬기지 않는 불경한 인간 뫼르소를 단죄하는 데 노력한다.

 

부조리는 '나'와 '그들'이 같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서부터 비롯하는 것일까,

아니 어쩌면 '나'는 '그들'처럼 비루하지 않은 존재라고 생각하는 데서부터 비롯하는 것일까...

 

보잘것 없는 회사원에 불고한 뫼르소는 자신보다 못한 아랍인을 죽이고,

레몽이 두들겨팬 여자인 무어인에게 무고죄에 해당하는 있지도 않은 말을 증언하곤 한다.

 

그러나, 다른 세계에 들어간 뫼르소는 자신이 이방인으로 대접받게 된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실존은 훼손당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이것이 그 유명한 소설의 첫머리다.

어쩌면, 뫼르소가 어머니를 방기한 것은 '어제'라는 과거였을지 모르겠다.

뫼르소를 단죄하는 사람들은 뫼르소의 살인죄보다는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보여준 냉혹함을 단죄하고 있은 말이다.

 

자신의 죽음을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 앞에서 당당한 죽음을 맞겠다는 생각에는,

다른 이들이 자신을 단죄하는 그 가치의 무가치함을 역설하는 생각이 가득하다.

자신의 목숨을 구걸하려고 한번 더 재심의 기회를 가지려고 상소의 기회를 가지려는 생각을 접는 것을 봐도 그렇다.

(삼심 제도인 요즈음 법으로 치자면 항소가 옳겠으나... 책에서는 상고...라고 표현하였다. 이런 것들을 통틀어 상소라고 한다.)

 

새움 출판사의 번역을 마치 '이방인'인양 비판하던 사람들도 있었다.

노이즈 마케팅이든, 도발적인 광고 문구든, 번역물 자체가 신화가 되어서는 안 되는 법이다.

카뮈나 그의 이방인이 신화가 될수록, 시대에 맞는 어휘로 번역도 변화해 가야 하는 법일 게다.

 

고전은 '다시' 읽을 때마다, 새로운 맛을 느낄 수 있는 책이다.

카뮈의 이방인은 그래서 고전의 반열에 드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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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언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8
에밀리 브론테 지음, 김종길 옮김 / 민음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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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클리프가 잘생겼기 때문이 아니라, 넬리,

그가 나보다도 더 나 자신이기 때문이야.

우리의 영혼이 무엇으로 되어 있든 그의 영혼과 내 영혼은 같은 거고,

린튼의 영혼은 달빛과 번개, 서리와 불같이 전혀 다른 거야.

 

 

박경리 '토지'의 '길상'이는 이름이 벌써 '길하고 상서롭다'는 뜻이어서,

주인집 아씨 곁에서 집사 노릇을 하다가 결혼까지 하게 되리라는 추측을 하게 하는 이름인 반면,

이 소설의 '히스 클리프'라는 이름은 들판의 잡초인 '히스'가 가득한 '절벽'이란 의미가 떠올라서,

그 잡초같은 인생의 기울기가 가파르게 시련에 직면하고 말 것임을 예고하는 이름이어서 아프다.

 

'폭풍의 언덕'이란 집 이름 역시,

바람잘 날 없는 인간사를 예고한다.

 

예기치 않게 워더링 하이츠에 들어와 살게 된 이방인 '히스클리프'의 삶은,

예나 지금이나 가진자들의 시선에서는 읽어낼 수 없는 분노와 혼돈 속의 나날이었을 것이다.

 

이 소설은 그 아픔을 차마 정면에서 바라보지 못하여,

세입자와 하녀의 대화 속에 등장하는 에피소드들로 인물을 상상하게 만든다.

 

그의 영혼과 내 영혼은 같은 것이어서,

그가 나보다도 더 나 자신이라고 할 만큼,

그는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라고 말하던 캐써린도,

현실 세계에서는 히스클리프와 맺어지지 못한다.

 

춘향전이나 옥단춘전같은 소설에서는,

계급을 초월하는 결합이 소설같이 이뤄지기도 하지만,

현실에서는,

차마 두드릴 수 없는 문이 거기 놓여있는 것.

 

이런 소설을 읽는 일은 마음 아프다.

그렇지만,

세상이 바뀌었다고 해도,

계급이 없다고 해도,

인간들은 또 다른 위계질서를 심리적으로 가지고 있다.

 

의사 신랑, 교사 신부 같은 직업군들이 절찬 판매중인 한국 사회에서는

또다른 워더링 하이츠와 히스 클리프가

여전히 재연되고 있지나 않을는지... 생각하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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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의 책 - 파블로 네루다 시집
파블로 네루다 지음, 정현종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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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네루다의 시집인 '질문의 책'

 

이 책 속에 담긴 상상의 꼭지들은 마치 젤리처럼 말캉하다.

할아버지가 되어서도 뇌가 연두부처럼 말랑하고 젤리처럼 부드러운 사람이라야,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어른이 되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캉한 질문들을 잊거나,

되려 질문하는 사람들을 호되게 꾸짖는다.

 

죽은 시신처럼 뻣뻣한 사고를 가지고,

"그렇게 해서 어찌 질서를 유지하고 사회 안녕을 꾀한단 말이오?" 거만하게 말한다.

쥐뿔도 모르면서...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 있을까,

아직 내 속에 있을까 아니면 사라졌을까?

 

내가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걸 그는 알까

그리고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걸?

 

왜 우리는 다만 헤어지기 위해 자라는데

그렇게 많은 시간을 썼을까?

 

내 어린 시절이 죽었을 때

왜 우리는 둘 다 죽지 않았을까?

 

만일 내 영혼이 떨어져 나간다면

왜 내 해골은 나를 좇는 거지?(44)

 

누구나 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된다.

그러나 아이적의 순수함은 어디로 갔는지,

다른 삶을 사는 다른 모습의 자신을 보고도 스스로를 자신이라 믿는다.

30년만에 만난 동창들은 모두 다른 모습이 되어버렸는데 말이다.

 

사랑도 지나고 보면 부질없는 것일는지도 모르고,

변해가는 것만이 유일한 진리인 삶을 살아가는 자신에 대해

확신하며 사는 것이 오히려 우습다.

 

뿌리들은 어떻게 알지

빛을 향해 올라가야 한다는 걸?

 

그 많은 꽃들과 색깔들로

대기와 인사해야 한다는 걸?

 

그 역할을 되살아나게 하는 건

늘 똑같은 봄일까?(72)

 

이유없이, 자연스럽게 그러한 것 같지만,

아기의 눈처럼 말랑한 마음은 계속 질문을 찾아낸다.

 

죽음의 통로를 끝까지

간다는 건 뭘 뜻하나?

 

소금 사막에서

꽃을 피울 수 있을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바다에서

입고 죽을 옷은 있을까?

 

뼈들도 사라져버리면

마지막 먼지 속에는 누가 사나?(62)

 

삶은 과정.

통로를 지나 언젠간 끝을 맞는 것.

인생은, 세상은 소금 사막.

생존 조건은 팍팍하고 잔인한 곳.

그러나, 다 사라지리라.

마지막 먼지조차 사라지리라.

그때도, 살아남은 존재를 상상할 수 있을까?

 

삶이란 그렇게,

혹독한 조건이라 해도 살아남아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조건이 아닐는지...

 

날마다 불이 나고, 사람이 죽어나간다.

이것이 국가입니까?

이러면서 묻기 시작한다.

 

질문하지 못하게 하는 마음은

단단하게 고착시켜 자신들의 이익을 공고화하려는 자들의 기도다.

 

물어야 한다.

자꾸 질문하는 것만이,

삶을 조금이라도 더 말랑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이다.

 

당신은 지구가 가을에

무슨 명상을 하는지 아는가?

 

(첫 황금빛 나뭇잎에

왜 메달을 주지 않을까?)(16)

 

주위를 둘러보면,

온통 네모난 것들로 가득하다지만,

원래 자연은 네모난 것 하나 없었다.

 

제멋대로 생긴 존재들을 바라보는 눈.

그것이 시인의 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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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계를 지나면 당신의 승차권은 유효하지 않다
로맹 가리 지음, 이선희 옮김 / 마음산책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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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제목은, 구간별 승차권이 있던 시절,

파리의 철도역에 붙어 있던 푯말이라고 한다.

 

의미심장한 제목에 이끌리고,

로맹가리라는 명성에 붙잡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웃지도 못하고, 덮어버리지도 못하는 야릇한 상황에 직면한다.

 

환갑이 다된 나이에,

젊은 애인과 사랑에 빠진 한 남자.

다 좋은데, 그만 사랑이 잘 안 된다.

그 시대엔, 비아그라가 없었던 것.

 

아, 비아그라여,

로맹 가리에게 희망의 길을 줄 것이지...

절망으로 이런 책을 쓰게 만들 것은 무엇인가...

 

지금이라면 약사와 상의하면 될 일을, 이 책에선 참 구구절절이 많은 방식을 활용하는 그를 보여준다.

하긴, 지금이라면 인터넷에 떠도는 동영상도 구해보고 그러련만,

주인공은 체격 좋은 젊은이에게 돈을 주면서 젊음을 상상하는 장면을 연출한다.

절망이 그를 움직이는 셈일까...

 

늙어가면서 비로소 우리는 늙음을 준비한다.

계절계절이, 단계단계가,

변화를 알리는 표시들이 바로 늙어가는 거였다.

그것에 서서히 익숙해짐은 숙고할 시간을 주고,

준비할 시간을 주고, 채비를 차려 거리를 둘 시간을 주며,

지혜와 평정심을 만들어 주는 것 같다...

그렇다고 해도 나는 여태껏 한 번도 쇠약함을 느낀 적이 없다. 내 감각은 늘 깨어 있었다.(35)

 

참 아무 것도 아닌 걸로 이렇게 깊은 사색에 들다니...

더 안쓰러운 것은, 사색과는 전혀 다르게, 자신은 살아 있다는 저 착각이라니...

그가 고개숙인 남자가 되었을 때, 얼마나 절망했을까...

 

나는 내 일상의 기성복, 냉소 속으로 몸을 숨겼다.(45)

 

멋진 말이다. 일상의 기성복 속으로 숨어드는 자신을 이렇게 읽어 내다니...

 

"자크, 나는 두려워요. 당신하고 이렇게 행복한데...

  모르겠어요. 매 시각 위협당하는 기분이에요."

"이봐, 로라. 당신이 행복하다고 해서 삶이 노여워하진 않아.

  인생에 대해서 뭐든지 말할 수 있겠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해.

  삶은 아무 상관하지 않는다는 거지.

  행복과 불행도 구별할 줄 모르거든.

  삶은 자기 발치도 볼 줄 모른다고."(62)

 

브라질 출신의 젊은 애인과 노인의 대화.

조급해하는 애인을 달래려는 간절함이 느껴진다.

우리 계속 행복할 수 있을까? 이렇게 묻는데, 삶은 속단하고 재단할 수 없다고 위로한다.

과연 위로가 될는지...

 

어린아이가 지닌 시선은 길가의 낡은 것조차도 새것으로 보이게 한다.

로라와 함께하면서 아들이 어렸을 적에 주었던 기쁨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파리는 처음 같았다.(67)

 

이 아저씨 제대로 사랑에 빠진 셈이다.

사랑을 이렇게 관조할 수 있는 시선은, 젊은이의 그것이 아니어서 오히려 원숙하다.

그래서... 독자인 나는 더 안타깝다.

아니, 한편으로는 박범신의 '이적요'가 차라리 살갑게 느껴진다.

이 아저씨는 좀, 지나치게 밝히는 편이랄까...

그런 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니, 좀 민망한 느낌이다.

 

참 더러운 일이에요.

늙어가는데 여전히 마음이 젊다는 것이요... (224)

 

이 책의 주제는 이것이다.

삶의 허덕임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사람들,

그런데 허덕임에서 벗어나고 보니,

밀물처럼 시나브로 밀어닥친 노년에 도무지 익숙해질 수 없다.

 

로맹 가리의 이 소설을 읽으면서,

어떤 대선 후보의 '대필 자서전'(ㅋㅋ 한국식 역설이라니) 제목이 떠올랐다.

희망도 절망도 다 삶의 자양분이 되었다는 뜻이었으리라.

 

로맹 가리 역시, 발기 부전의 곤혹스러움.

이런 걸, 공자 용어로 '불혹'이라고 불렀다고 이권우가 그랬는데,

그에게 절망은 간절함이 되어 소설을 향한 움직임으로 피어났다.

 

나도 내가 느끼는 나는 아직 청춘인데,

초등학교 동창들의 밴드에 들어가보면, 늙수구레한 중년들이 그득하다.

마음은 젊은데...

여전히 젊은데, 늙어간다는 일...

더럽기만 한 일일까?

부끄럽기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 절망은 나를 움직이는 힘이 되리라.

곤혹스러운 나이, 불혹에서야 말이다.

 

불혹의 경계를 지나면... 당신의 거시기는 유효하지 않습니다...

이 소설의 은유는 이런 것이라 좀 거시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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