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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 광년의 고독 속에서 한 줄의 시를 읽다 - 류시화의 하이쿠 읽기
류시화 지음 / 연금술사 / 2014년 6월
평점 :
나는 이 책을 이렇게 읽었다.
우선, 맨 뒤의 '하이쿠의 이해 - 언어의 정원에서 읽는 열일곱 자의 시'를 읽었다.
하이쿠에 대해서 쪼큼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설명문을 먼저 읽어두는 편이 나로서는 유익했다.
하이쿠의 대표주자들에 대해 몇 가지 알아 두는 것이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왜냐. 하이쿠란 것이 한국에 너무 알려지지 않아서다.
그리고 처음부터 각편을 읽어나갔다.
어떤 시는 일본어 히라가나를 입으로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의미와 음률을 음미하기도 했고,
어떤 시는 그냥~ 휘리릭 넘어가기도 했다.
어차피... 한 번만에 촘촘히 다 읽어내기란 뭐, 그렇게 읽어야만 맛이 아니기 때문.
자유율의 하이쿠는 제외하고~
맨 마지막 시편이 '시키'의 시였다.
마음에 꼭 들었다. 그 시를 마지막에 배치한 작가의 마음도...
3천편의/ 하이쿠 살펴본 후/ 감 두 개 (사안제엔노 하이쿠오케미시 가키 후타츠)
마치, 오랜 강의를 마치고 나서 디저트로, 서늘한 홍시 두 개를 대접받은 기분이랄까.
이 책의 장점은 많다.
우선 무지 많은 하이쿠를 접할 수 있어 좋고,
더군다나 이렇게 착실하게 일본어 독음을 달아 준 하이쿠 책은 이적지 본 일이 없다.
(내가 과문하여 더 좋은 책들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전공자들이 읽는 일본문학이 아니라면, 일반인들이 보기에 충분히 만족스러운 책이다.
하이쿠를 이런 저런 말로 설명하려한 사람들도 다 나름대로 신선한 말을 하려 했다.
시는 새를 놀라게 하지 않고 새장으로 들어가는 것 과 같다.(옥타비오 파스)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4/0708/pimg_7243001831034525.jpg)
책에 몇 장 넣은 이런 장식도 아름답다.
하이쿠를 읽으면 이런 맛이 난다.
자연을 보는 신선한 눈.
인생의 페이소스를 짙게 느끼게 하는 말들.
그리고 몇몇의 단에어서 전광석화처럼 꽂히는 감상.
모 심는 여자
자식 우는 쪽으로
모가 굽는다(잇사)
이 시는 마음에 찡~하는 도낏날이 찍혔다.
더 말이 필요없다. 그게 잘 쓴 시고, 잘 한 번역이다.
잇사의 시는 '낯선 땅에서 방황하다가 같은 영혼을 가진 사람을 만난 듯한' 기분(20)
그런 심리적 소통을 얻는다면 시를 읽는 아침은 행복할 것이다.
하이쿠는 지적 경험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실존적 경험(49)
하이쿠에는 많은 설명이 덧붙지 않는다.
그저 읽는 이가 '그렇군~!' 또는 '아~' 하고 한 순간 넋을 놓는다면, 훌륭한 감상법이라 하겠다.
몸에 스민다
죽은 아내의 빗을
안방에서 밟고(부손)
그저 죽은 아내의 빗을 아내의 방에서 밟았을 뿐인데,
몸서리치게 감정이 밀려든다.
그 발의 느낌만으로도...
귀엽고 예쁜 시도 있다.
가는 봄을
거울에다 원망하는
한 사람(세이비, 319)
남자는 죽음을, 여자는 늙음을 두려워한다는데 ㅋ~ 재미있는 시다.
거미로 태어나
거미줄 치지 않으면
안 되는 건가(교시)
하이쿠에는 아픈 사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절절하다.
김훈의 '밥벌이의 지겨움'처럼, 거미의 삶에 투영된 인생이 처절하다.
해설 부분에 와카도 많이 등장한다.
사랑의 감정을 잘 살린 노래가 맘에 남았다.
색깔도 없던
마음을 그대의 색으로
물들인 후로
그 색이 바래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어라(기노 쓰라유키, 595)
바쇼는 역시 하이쿠의 아버지다.
그는 <모습을 앞에 두고 마음은 뒤에 둔다>고 했는데, 하이쿠를 한 마디로 잘 표현했다.
바쇼가 고행자이고 구도자적인 시인이라면,
부손은 예술가이자 탐미주의자로 원근감과 공간 배치에 능했고,
잇사는 인간주의자였다. 안에서 흐른 눈물이 웃음으로 나온다.
이슬의 세상은
이슬의 세상이지만
그렇지마는(637)
쯔유노 요와/ 쯔유노 요나가라/ 사리나가라
이런 종속절의 뒤편에서는 "그렇지만... 이 이슬의 세계를 더욱 완전한 삶을 창조하기 위한 질료로 받아들이자."는
말이 나와야 할 듯하다고 스페인의 철학자 오르테가가 썼다.
하이쿠는 닫힌 듯 보이는 열린 문(블라이스, 707)
시라는 장르는 원래 화자의 마음을 추측하여
유사한 상황을 유추하며 읽는 것이다.
그렇지만 하이쿠처럼 불친절하게 툭, 내던지는 시는 드물다.
어쩌면 선가의 선문답처럼 그저 내지르는 말 같을 때도 있다.
그렇지만, 선문답에 논리적 해석을 덧붙이면 이미 사족이 되고 말듯,
하이쿠도 설명이 덧붙는다면 올바른 감상이 아닐 터.
시를 읽을 때 당신은 그 시를 새롭게 창조하는 시인 자신(멕시코 시인 호세 에밀리오 파체코, 729)
류시화의 설명이 과하지 않도록 많이 애쓴 부분이 보인다.
설명하려 들면 들수록 오해를 부를지도 모를 것들이 숱하게 많기 때문이다.
언어 유희를 누릴 수 있는 부분들은 골라서 설명을 잘 해 두었다.
일본어를 전혀 모르는 독자라도 즐겁게 감상할 수 있도록...
다루가키노/ 시부키 무카시오/ 와스루루나
삭은 감이여
떫었던 옛날을
잊지 말게나(나쓰메 소세키)
이런 시는 사람을 겸손하게 만든다.
바쇼의 대표작, 개구리 하이쿠는 아예 외워야 하겠다.
후루이케야 카와즈 토비고무 미즈노 오토
오래된 연못
개구리 뛰어드는
물소리
금세라도 '첨벙' 내지는 '퐁당' 소리가 들릴 듯하다.
고요함이여
바위에 스며드는
매미의 울음
시즈카사야 이와니 시미이루 세미노 코에(바쇼)
바쇼를 일컬어 하이쿠의 아버지라 부르는 이유를 조금 알 듯도 싶다.
그의 대표작들을 입에 넣어 오물오물 읊조리다 보면,
하나의 오랜 풍경이 떠오르고,
거기서는 정적인 공간과
동적인 시간 속 소리들이
우리 마음의 거문고 줄을 둥~ 하고 오랜 여운을 남기며 울린다.
류시화 시인이 일본어 전공자도 아닐 진대,
이렇게 좋은 책을 만들었을 때는, 참 많은 사람들의 공이 들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내친김에 <바쇼의 하이쿠 기행 1,2,3>을 읽어봐야겠다.
아무튼, 멋진 책으로 하이쿠의 세계를 소개해준 시인과 출판사에 감사할 따름이다.
더운 여름날,
고요한 그늘에서 시원한 물에 발 담그고 읽기엔
딱, 인 책이다.
수정할 곳...
200쪽. '오쿠노 호소미치'를 '오코노 호소미치'로 잘못 썼다. ㅋㅋ 오코노미야키를 떠올린 모양이다. 배고프면 누구나 그렇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