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들을 위한 외국어 사전
샤오루 궈 지음, 변용란 옮김 / 민음사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한창 인기몰이중이던 '비정상회담'이라는 프로그램이 터키인의 사생활 문제로 시끄러웠다.

이국적으로 생긴 사람을 보면,

이전까지 자신이 주변에서 보던 사람들의 일반화된 <매력>과는 다른 매력을 발견하게 되는 법.

 

그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외국인들은 한국어가 능통한 사람들이지만,

그래도 문법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게 마련이고,

발음도 어려워서 '그까짓' 같은 발음도 '그깍지'처럼 발음하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이 소설에는 공산주의 국가 중국, 한 자녀밖에 갖지 못하여 '소황제'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자녀.

그 여자아이가 랭귀지 스쿨 코스를 위하여 1년간 영국에 체류하면서 겪은 일들을 그린 이야기가 등장한다.

 

첫 부분은 참 신선하다는 느낌을 받으며 읽었다.

번역도 그럴 듯 하다는 이야기겠지만,

정말 짧은 영어로 쓴 글처럼, 또는 짧은 한국어로 외국인이 쓴 것처럼,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문화적 차이를 느끼게 한다.

 

처음만나 두 뺨에 키스한 영국 남자에게 마음을 빼앗긴 주인공은

<나는 내 몸속에 달콤한 느낌을 갖고 잠에 빠진다.>는 표현에 꼭 맞게 사랑에 빠진다.

스물 네 살 동양 아가씨가 나이도 가늠하기 힘든(알고보니 스물 몇 연상인) 아저씨에게 빠진 것이다.

 

승합차로 배달 알바를 하고, 조각가이기도 한 영국인 남성의 집으로 옮긴 아가씨,

황홀한 사랑의 허니문을 보내지만, 곧 영국인 남성의 외로움에 맞닥뜨린다.

여행을 혼자 가버린 그의 집에서 <나는 당신 찬장에 속한 작은 외로운 찻잔이다.> 같은 기분을 느낀다.

 

이 소설은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만나서 빚는 균열을 세심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가 돌아와 즐거운 시간을 보냈느냐는 말에

<무슨 말을 하나, 나는 내 안의 바다가 너무 크고, 너무 끝없음을 느껴 말하지 못한다.>고 느낀다.

 

<만일 우리가 새로운 사람과 사랑에 빠진다면, 그건 괜찮아요.

그건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에요.>라고 말하는 남자와,

<그건 무슨 뜻이에요? 우리가 원한다면 우린 할 수 있어요.>라고 말하는 남자.

 

그 말뜻의 사이만큼이나 문화적 괴리감도 크다.

그녀는 프리다 칼로를 보다가 남자를 생각한다.

<당신은 삶의 묵직함을 생각한다.

당신은 어려움과 거칢을 느끼길 좋아한다.

나는 당신이 삶의 무게를 느끼길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이케아 가구들이 가볍고 매끄럽기 때문에 싫어한다고 말했다.>

 

아, 이케아 가구.

이 한 마디로, 그 남자를 보여준다. 멋지다.

그 남자는 신문을 읽으면서 아나키스트 이야기도 들려준다.

공산주의 국가에서 날아온 여자가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를...

<대부분의 아나키스트들은 사실상 부르주아예요. 그들은 정말로 그 어떤 이익도 포기하고 싶어하지 않아요.

매우 이기적이지. 나는 이제 그런 부류의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는 물질적인 것을 포기하고 싶고, 가능한 한 최대한 단순한 삶을 살고 싶어.>

자본주의가 태초에 발생한 나라, 영국에서 '최대한 단순한 삶'을 추구하는 남자와,

공산주의 나라, 중국에서 '부를 위하여 영어를 배우러 간 삶'을 사는 여자의 마주침...

그들의 마주침이 깊은 <만남>을 의미있게 이루기에는 차이가 너무 컸다.

 

그래서 남자는 여자를 낯선 여행길로 내민다.

<우리 몸은 비록 떨어져 있지만, 나는 아직도 내가 당신과 함께 있는 것처럼 느껴요.>

이런 멜을 받고, 여자는 <나는 나 홀로 떠난 여정이 너무도 외롭다>고 보내지만,

<서양에서 우리는 외로움에 익숙해요.

나는 당신이 외로움을 경험하고, 당신 혼자 있는 기분이 어떤 느낌인지 탐험해 보는 것이

당신을 위해 좋다고 생각해요.

얼마 지나면, 당신은 고독을 즐기기 시작할 거예요.

당신도 더 이상은 외로움을 두려워하지 않게 될 거예요.>라는 답을 받을 뿐이다.

 

여자는 여행길에서 만난 많은 남자들과 관계를 맺기도 하고, 결국 임신도 하게 된다.

 

<시간에 관하여,

내가 영어를 공부하며 정말로 배운 것은 시간이 타이밍과 다르다는 사실이다.

잘 맞는 상대와 잘못된 타이밍에 사랑에 빠지는 일은

한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큰 슬픔이 될 수 있음을 나는 이해한다.>

 

남자는 자신의 삶을 찾아 웨일즈로 가게 된다.

 

<그래, 나도 당신과 동감이야. 우린 함께할 수 없어.>

 

이방인과 사랑하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그 나라 말에 능통한다 해도,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까지 이해하는 일은 힘들다.

하긴, 같은 말을 쓰는 사람끼리도, 얼마나 낱말 하나로 삐치고 토라지고 하던가.

 

그녀의 여행에서 만났던 남자들과의 인연을 읽으면서

한비야를 떠올리기도 했다.

그의 책에서 여행은 흥미진진하고 행복한 날들의 연속으로 기록되지만,

실제 여행은 어떠했던지는 그만이 알 것이다.

 

어쩌면 진정한 여행의 맛은,

<흥미의 항진>이 아니라 <흥미를 놓음>에 있는것인지도 모른다.

맛집을 찾아 다니고, 그림같은 펜션을 찾아가는 일도 <항진>의 여행일지도 모르지만,

아무 생각 없이 '바람과 장면'을 바라보는... 그 '풍,경'을 느끼는 <무미>의 여행이,

'텅 빈' vacant  의 의미에 가까운 '휴가' vacation 가 되지 않을는지...

 

<외국어 사전>이라는 소재를

외국어 학습자 입장에서 그 문화를 만나는 사람의 심리와 중첩시켜 소설로 구상한 데는 별점을 5개 주고 싶지만,

중반부부터 여자가 여행하는 대목은 별을 2개 정도 주고 싶을 정도로 매력이 감소하기도 했지만,

처음 만난 인상이 워낙 강렬하고 매력적이어서 별점은 좀 후하게 주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호밀밭의 파수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7
J.D. 샐린저 지음, 공경희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미국 소설은 미국이라는 나라만큼이나 역사가 짧다.

그래서 미국 소설을 읽으면, 아무래도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느낌을 많이 받게 된다.

그 대표작이 '위대한 개츠비'나 '호밀밭의 파수꾼'이 아닌가 싶다.

 

그리스 비극같은 심금을 울리는 운명의 장난도 없고,

세익스피어같은 다양한 인간 군상의 묘사도 없고,

오랜 시간 검증된 '리얼리즘의 승리'도 없다.

 

그런데, 세계문학에 반드시 넣어야 하는 듯,

미국의 팽창기를 틈나고 문학의 목록에 그득하게 들어앉아 있다.

그 저변에는 '노벨상'이라든지 '출판의 힘'이 뒷받침되어 있었을 것이고,

한국의 '문학 선집' 편집 위원의 많은 수가,

김동리를 위시한 '반공주의 문학'의 기수들로 독재시대에 편찬한 작품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초창기에는 청소년들에게 읽혀서는 안 되는 소설이었다가,

이즈음에는 필독서로 꼽힌다는 호밀밭의 파수꾼.

 

이 작품은 '제임스 딘'의 '이유없는 반항'과 시기를 같이한다.

소위 '냉전의 시대' 산물인 '매카시즘'이 미국을 뒤덮던 갑갑하던 시대.

 

 

주인공 홀든은 부유한 집안의 자제로,

유명 사립학교에서 퇴학당하기를 밥먹듯하는 '반항아'이다.

그런 시대적 배경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여기 등장하는 어른들은 모두 '밥맛'이다.

 

스펜서 선생은 다시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코를 후비기 시작했다.

그냥 코를 잡고 있는 것처럼 보이려고 했지만,

사실은 엄지손가락이 콧구멍 속으로 들어가 있었다.(20)

 

선생은 내 말을 전혀 듣고 있지 않는 것 같았다.

자신이 말하고 있을 때는 남의 말을 절대로 듣지 않는 사람이었다.(21)

 

 

 

그렇지만, 그 꼰대들은 아주 '위선적'이라고 생각하는 홀든.

 

훌륭하다니. 난 정말로 그런 말이 듣기 싫었다.

그건 위선적인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20)

 

'멋지다'라니. 내가 싫어하는 말이 있다면 그건 멋지다는 말이다.

너무 가식적인 말이기 때문이다.(144)

 

 

기성세대에 대한 불신은 앤톨리니 선생에게서 극도로 표현된다.

 

갑자기 난 눈을 떴다.

몇 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잠에서 깨버리고 말았다.

뭔가 귀두에 닿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람 손 같기도 했다.

그 순간 난 정말 기절할 듯이 놀랐다.

그런데 내 귀두를 만지고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앤톨리니 선생의 손이었다.

선생은 어둠 속에서 긴 의자 옆에서 바닥에 앉은 채로 내 귀두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뭐하고 계세요?"

"별일 아니야. 그냥 여기 앉아서, 감탄하고 있었지..."(253)

 

늘 입으로는 도덕, 정의를 외치는 어른들의 속내는 이렇듯 추악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

홀든이 묵은 호텔의 맞은편 창으로 비치던 어른들의 우스운 몸짓은,

타락한 세상에 대한 풍자로 가득하다.

 

지금 네가 떨어지고 있는 타락은,

일반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좀 특별한 것처럼 보인다.

그건 정말 무서운 거라고 할 수 있어.

사람이 타락할 때는 본인이 느끼지도 못할 수도 있고,

자신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 거야.

끝도 없이 계속해서 타락하게 되는 거지.(247)

 

이렇게 그럴듯하게 말했던 선생님이,

갈 데가 없어서 찾아온 아이를 성추행하는 현실.

 

나는 늘 넓은 호밀밭에서 꼬마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어.

어린애들만 수천 명이 있을 뿐 주의에 어른이라고는 나밖에 없는 거야.

그리고 난 아득한 절벽 옆에 서 있어.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주는 거야.

애들이란 앞뒤 생각 없이 마구 달리는 법이니까.

그럴 때 어딘가에서 내가 나타나서는 꼬마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 주는 거지.

온종일 그 일만 하는 거야.(230)

 

 

이 구절은 자못 감동스럽다.

현실에서는 부적응하는 반항아가, 꿈으로 가진 것이 평화로운 세상의 지킴이라니...

그런데, 내가 삐딱하게 읽어 그런가,

홀든의 이 꿈에 '팍스 아메리카나'를 외치는 미국의 모습이 비친다.

'앞뒤 생각 없이 마구 달리는' 위험한 <악의 축>을 지키려는 평화의 사도 '미쿡'

슈퍼맨처럼, 배트맨처럼, 스파이더맨처럼, 지구를 구할 것인지...

 

지금 피비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칼라에 코끼리 무늬가 새겨진 파란색 잠옷을 입고 있었다.

그 애는 동물 중에서 코끼리를 가장 좋아했다.(217)

 

호이트씨(택시 기사), 센트럴 파크에 있는 연못을 지나가 본 적이 있으세요?

센트럴 파크 남쪽으로 내려가면 있는 연못이요.

아주 작은 연못이 있어요.

오리들이 살고 있는 곳 말이에요.

오리들이 그곳에서 헤엄을 치고 있잖아요.

봄에 말이에요.

그럼 겨울이 되면 그 오리들은 어디로 가는지 혹시 알고 계세요?

오리 말이에요.

누군가 트럭을 몰고 와서 오리들을 싣고 가버리는 건지,

아니면 남쪽이나 어디 따뜻한 곳으로 날아가 버리는 건지 말이에요.(113)

 

피비를 묘사할 때,

또는 홀든이 오리를 떠올릴 때,

이 소설은 멈칫, 순수를 동경하고 지향하는 듯 하다.

 

어쩌면, 이 지점에서,

그토록 잔인했던 영화 '친구'에서

그 폭력배, 살인자들의 어린 시절,

"조오련이 하고 바다 거북이하고 수영하면 누가 이기는지 아나?"

하면서 순수를 그리던 송도 앞바다의 묘사가 드리우는 씁쓸함을 떠올리게 된다.

 

피비가 목마를 타고 돌아가고 있는 걸 보며,

불현듯 난 행복함을 느꼈으므로,

너무 행복해서 큰 소리를 마구 지르고 싶을 정도였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피비가 파란 코트를 입고 회전 목마 위에서 빙글빙글 도는 모습이 너무 예뻐 보였다.

정말이다. 누구한테라도 보여주고 싶을 정도로.(278)

 

메리-고-라운다... 회전 목마는

신흥 부국 미국의 허상을 상징하는 번득이는 빈공간이 아닌지...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이 작품은 영화화되지 않았다.

샐린저가 이 작품을 영화로 만들도록 허락하지 않은 채 2010년 죽었기 때문이다.

저작권은 사후 70년인가 지켜야 하니, 내가 생전에 이 영화를 보기는 글렀다. ㅋ

 

이 소설이 '고전'이라고 무작정 집어들고 읽었다가는 낭패보기 쉽다.

여느 고전처럼 우아하고 고상한 언어로 가득 넘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책을 읽은 부모라면, 이 책을 자식에게 권해도 좋을까? 를 고민할지도 모른다.

 

존 레넌의 암살범이 이 책을 읽고 있더라는 유명한 일화와 함께,

이 책을 직,간접적으로 언급하는 영화도 숱하며,

전세계에 수십 가지 언어로 번역되어 출판된 유명한 책.

 

이 책을 읽고는 싶으나,

아무래도... 몇 페이지 안 넘겨서 눈이 빙빙 도는 독자라면,

이유를 모르고 종영된 아쉬운 방송, ebs 고전읽기의 '호밀밭의 파수꾼'을 들어보는 일도 유익할 것이다.

 

http://home.ebs.co.kr/humanandclassic/replay/3/view?courseId=BP0PHPK0000000050&stepId=01BP0PHPK0000000050&prodId=10316&pageNo=50&lectId=10147195&lectNm=&bsktPchsYn=&prodDetlId=&oderProdClsCd=&prodFig=&vod=A&oderProdDetlClsCd=

 

 

 

 

 

 


댓글(2)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무개 2014-12-03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도 많은 분들이 그랬겠지만
저는 하루키의 소설속에 언급되었기 때문에
호밀밭의 파수꾼과 위대한 개츠비를 읽었는데요
그게..참...이런게 고전인가? 그런가? 하는 의문만 잔뜩 생겼었어요.
소설을 거의 읽지 않아서 제가 잘 읽을줄 몰라 그런가보다 했었네요....

글샘 2014-12-03 11:18   좋아요 0 | URL
호밀밭과 개츠비는... 워낙 `고전` 목록에서 많이 봤지요.
주어지는 것이 모두 고전이 아닌 것임을 확인하는 것이 독서의 이유이기도 합니다.
안 읽는 사람이 맨날 그러죠. `논어` 속에는 길이 있다고. ㅋㅋ
 
숙명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구혜영 옮김 / 창해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히가시노게이고의 초기작이라고 한다.

주제를 드러내기 위해 상당히 두터운 복선을 깔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흥미 위주의 미스터리 풀이를 위한 책이 아니라,

인생에서 '숙명'은 어떻게든 엮이고 풀리게 마련...이라는 삶의 미스터리를

한번 다뤄보고 싶었던 것은 아닌가 싶다.

이때부터 인간의 두뇌와 조작에 대한 관심도 드러난다.

 

기업은 인간의 몸에는 관심이 없어요.

그걸 무시하면서 성장해가는 거죠.

의사는 필사적으로 기업의 뒤처리를 하고 있고요.

불도저가 짓이긴 모종을 한 그루 한 그루 다시 심는 것과 같은 일이라고나 할까요?(27)

 

처음부터 이 이야기에서는 '끈'이 등장한다.

미사코의 끈이 어디까지 연결되어 있는 것일지를 궁금해하며 읽게되는데,

뜻밖의 끈을 만나면서 대단원을 맺는다.

 

우류가의 나오아키가 죽으면서 '아키히고, 미안하다, 잘 부탁한다...'고 유언을 남기는데,

마칠때까지 그 부탁의 대상이 누구인지는 상상을 불허한다.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고 고민을 털어놓는 일도 없고,

평온한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 아내가 만족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남편.

단순히 가정을 유지하는 것뿐 아니라

인간적인 부분에서도 남편에게 힘이 되고 싶다는 바람을 이해해줄 수 있는 날이 올까?(134)

 

미사코의 처지를 고려하면서 읽으면,

무언가 남편이 이상하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게 되는데,

그 의심의 눈길이 사건의 해결과는 무관한 쪽으로 독자를 끌게 된다.

이런 것 역시 트릭이고 재미다.

 

그렇지만, 이런 속에서 결혼 생활의 의미를 생각해보게 하는 역할도 담고 있다.

부부의 역할은 어떤 것인지, 단순히 가정을 유지하는 것...에 머무는 집이 얼마나 많을지...

 

내 인생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조종되고 있어요.(196)

 

삶에 이런 비밀을 간직하고 산다는 일은 가혹한 일이다.

그렇지만, 또 인생에서 어려움에 봉착할 때, 인간은 그 '끈'에 관심을 갖기 쉽다.

삶은 숱한 끈의 연결 고리들로 엮이는 것인데,

과연 그 연결 고리들을 다 안다면 또 얼마나 싱거울 것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방범 1 - 개정판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25
미야베 미유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미여사의 '모방범'을 진작부터 한번 보고 싶었으나,

도서관에서 탈출한 1권이 1년만에 돌아왔다.

 

세 권이 약 160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이라서 이걸 언제 읽나 했는데, 기우였다.

페이지는 잘도 넘어가고, 스토리도 박진감이 넘치는데,

시점에 따라 이야기가 새로이 구성되는 면도 있지만,

다소 지루한 감을 떨칠 수는 없었다.

분량을 반으로 줄였어도 스토리를 탄탄하게 구성했다면, 더 좋았을 수도 있지 않았겠나 싶다.

 

범죄란 사회가 갈구하는 형태로 일어나기 마련(1권, 111)

 

인간 사회에서 '살인'같은 범죄는 일어나게 마련이다.

그러나 살인이 우발적인 폭력으로 벌어지는 것만이 아니라,

재미삼아 계획적으로 상습적으로 범죄를 일으키는 인간이 생기는 것도,

사회의 한 단면을 반영한 것이라 볼 수 있다는 것.

 

이 소설은 범죄를 단면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는 것에서 모티프가 시작된다.

 

인간이 사실을 정면으로 마주한다는 건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야.

절대로 그러지 못해.

물론 사실은 하나 뿐이야.

그러나 사실에 대한 해석은 관련된 사람의 수만큼 존재해.

사실에는 정면도 없고 뒷면도 없어.

모두 자신이 보는 쪽이 정면이라고 생각하는 것뿐이야.

어차피 인간은 보고싶은 것밖에 보지 않고,

믿고 싶은 것밖에 믿지 않아.(2, 493)

 

그래서 하나의 살인 사건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여러 사람의 관점을 종합적으로 보아야 하는 것.

그것이 이 소설을 여러 파트의 전개로 조직하게 만들었다.

 

시를 쓰는 것은

자신의 마음 속에 내시경을 넣고

그곳에 조직의 일부를 떼내 표본을 만드는 것과 같다.

그래서 위험하다.(2, 387)

 

마음을 감추고자 하는 범죄자에게는

작은 조각도 마음을 반영하는 표지가 되기 쉽다.

 

흘수선을 넘기 위한

밸러스트의 역할로서(2, 469)

 

장르 소설인데 이런 표현이 들어가는 글은 멋지다.

 

태어나면서부터 안정된 자리가 없었던 아이.

어디를 가나 장애물 취급을 받은 아이, 아미가와 고이치.

늘 웃는 얼굴이라 피스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은 불안한 가정환경 속에서 의지할 데라곤 불안정한 어머니 한 사람밖에 없었던 외로운 아이.(3, 457)

     

안정되지 않았다고 해서 모두 살인마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태어나면서부터 안정되지 못한 환경은 충분히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살인이 잔혹한 것은,

살인이 피해자를 죽이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가족의 생활과 마음까지 서서히 죽여가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 가족을 죽이는 것은 살인자 본인이 아니라 그 가족들 자신의 마음이야.(3, 280)

 

아이들에게 사형에 대하여 찬반 토론을 시켜 보면,

피해자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보복하고 싶은, 응징의 심리가 있다.

그렇지만, 응징은 치유와는 별개이다.

아무튼,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은 유가족을 함께 죽인다.

 

여기는 다른 세상이다.

여기서 말하는 것들은 이 세계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진실된 것이지만,

요시오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단순한 이야기일 뿐.

그녀가 이해한 것을 쓰고 있는 한,

그것은 어차피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곳은 그런 이야기를 생산하는 공장일 뿐.(3, 169)

 

문제 해결에 가장 포인트 역할을 하는 마에하타 시게코라는 여자는,

자유롭게 글을 기고하는 역할이다.

그런 프리랜서 칼럼리스트에 의하여 범인은 음지에서 양지로 튀어나오는 괴물이 되는데,

그런 언론의 세계 역시 범죄자나 피해자에게는 무의미한 세계다.

언론은 선정적인 뉴스거리를 찾아다니는 하이에나와 같을 뿐,

진실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시간의 화살 끝은 어디로 향할지 아무도 모른다.

다만, 그것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3, 76)

장르 소설을 읽는다는 일은,

시간의 화살이 어떤 과녁을 향해 갈 것인지를 추리하며 읽는 일이다.

그 움직임이 긴박하게 전개되기도 하고

호기심을 놓지 못하게 하기도 한다.

 

모방범.

존 카첸바크의 'just cause'라는 소설도 등장하는데,

사건의 변곡점이 되는 지점에 놓인 그 소설이 반가웠다.

그 소설에 등장하는 '퍼거슨'이라는 이름은 요즘 신문에서 자주 보인다.

이 소설의 주제인 흑인에 대한 법적 차별이, 요즘 미국에서 '퍼거슨' 시에서 벌어진 사건과 같기 때문에 흥미롭다.

 

지금도 시간의 화살은 움직이고 있다.

그 화살이 어디로 향해가는지 제각기 주장하지만,

진실은 알기 어렵다. 그것이 인간이다.

이런 소설을 읽노라면, 인간은 좀 겸손해질 필요가 있지않나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타나토노트 1 (양장)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폴 빌라드의 소설 '안내를 부탁합니다'라는 소설에는

전화기에서 안내를 찾아 온갖 궁금증과 곤란을 해결하는 꼬마의 이야기가 나온다.

꼬마의 카나리아가 죽었을 때 안내는 이런 말을 드려준다.

 

폴, 죽어서도 노래부를 수 있는 다른 세상이 있다는 걸 잊지 말아요.

 

<안내를 부탁합니다> 소설 읽기...

접힌 부분 펼치기 ▼

http://hide13.blog.me/20004708379

펼친 부분 접기 ▲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다.

그 이후의 세상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인데,

그 세계를 온갖 종교들은 무서운 곳이나 신비스러운 곳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 모든 죽음에 대한 사고를 종합하여 백과사전을 만든 것이 이 책이다.

그런데 그 죽음은 참으로 재미있는 방식으로 탐사되고 있다.

역시 베르나르베르베르는 유쾌한 사람이다.

 

저승을 탐험하는 탐험대의 이름을 '타나토스'에 우주인(애스트로노트)을 붙여서 '타나토-노트'가 되고,

그들은 점점 저승의 모습을 완성하게 된다.

 

깔때기 모양의 저승을 차츰차츰 알아가게 되는데,

나는 그들의 이야기가 마치 배꼽에 연결된 어떤 세계와 유사할 듯한 상상을 하게 되었다.

깔때기 모양의 배꼽이 삶의 비의를 감추고 있는 것처럼,

깊은 저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일은 흥미롭기도 하고 코믹하기까지 하다.

 

죽음을 이렇게 코믹하게 그리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온갖 종류의 종교적 죽음의 묘사가 등장하면서 좀 지루하기도 하지만,

건너뛰고 싶은 부분은 건너 뛰며 읽어도,

작가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어디에서 왔으며, 과연 나는 누구이며, 어디로 가는지...

그 생-로-병-사의 원리를...

태어남과 - 나이듦과 - 노쇠해짐과 - 스러짐의 이치를 본격적인 상상 속에 녹여낸 소설이다.

 

사람들은 쭈글쭈글하거나 그다기 유쾌하지 않은 모습을 지닌 노인들을 홀대하고

생기 발랄한 모습으로 테니스를 치거나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그 시대 사람들은 죽음에 맞서 싸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죽음을 일깨우는 전조를 감추는 것이라고 생각했다.(111)

 

사람들이 나이듦에 대처하는 모습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보여준다.

마치 먼훗날 현대를 되돌아보며 비웃듯 그리면서,

현대인의 성형, 보톡스, 동안 신드롬 등의 정신적 근거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 죽음의 전조를 감추는 것에 불과하다. 막을 수 없는 것을 막으려는 듯...

 

알려지지 않은 세계가 있는 한

우리는 그곳을 향해 언제까지라도 곧장 나아가야 합니다.(243)

 

이런 코믹한 슬로건은 사실 인류가 내세우는 발전의 슬로건이 아니던가.

삶은 어느 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지구에서도 위아래 좌우를 구분하는 것은 상대적인데,

하물며 은하계와 우주를 생각한다면, 모든 것은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곧장 나아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의식은 얼마나 자가당착인지...

 

약물을 이용하여 죽음에 다가서는 방법을 개발한 사람들은,

<새로운 개선문 - 즉 죽음을 정복한 사람들의 개선문>을 건설하려 한다.

 

사람들은 하느님을 오해하고 있다네.

애초에 누군가가 하느님의 말씀을 잘못 해석한 것이지.

가는 귀를 먹은 예언자 하나가 <하느님은 위무르(익살)이시다>라는 말을

<하느님은 아무르(사랑)이시다>로 잘못 알아들은 걸세.

모든 것 속에 웃음이 있다네. 죽음도 예외는 아니지.(453)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비극'뿐일 리가 없다는 가정에서, '희극'편을 찾는 이야기가 '장미의 이름'으로 유명했던 소설도 있다.

세상은 '비극'으로만 점철할 리가 없다. 죽음도 예외는 아니라는 작가의 선언은,

이 소설의 방향이 왜 그렇게 설정되었는지를 설명한다.

그 설명은 허구적이지만 설득력이 있다.

 

두 몸이 하나가 되자 우리의 정신도 기쁨을 향해 서서히 하나가 되어 갔다.

우리의 타오르는 몸뚱이 밖으로 두 넋이 주춤거리며 빠져 나가더니,

황홀경을 맞은 몇 초 동안 우리의 머리 위에서 하나로 융합하였다.(459)

 

이것은 영계의 탐험이 아닌 육체적 결합을 통한 황홀경을 적은 부분이다.

종교들이 죽음과 성적인 경험을 자연스럽게 연관시킨 이유와도 상통한다고 본 것이다.

 

사람은 팽이와 같은 것이란다.

존엄성과 고귀함과 평형을 잃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움직여야만 하지.

사람은 스스로를 해체함으로써 자기를 만들어 가는 거란다. (476)

 

팽이는 지금 수천 년 전의 성인과 같이

내 앞에서 돈다

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김수영, '달나라의 장난' 부분)

 

삶은 정지한 스틸컷이 아니다.

그 스틸컷들의 적분으로 드러나는 무한한 미분계수들의 연결태다.

한 순간도 정지해서는 안 되는 팽이처럼, 삶은 지속된다.

김수영은 그래서 '생각하면 서러운 것'이라고 했다.

반드시 유한해서 서러운 것이 아니다.

태어남  - 나이듦 - 노쇠해짐 - 죽음이 어느 한 과정도 제 뜻대로 살아지지 않아

그래서 서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윤회까지 고려하여 '선업'의 카르마를 쌓기 위하여 세계는 평화로워지는 방향으로 흐른다.

그렇다고 하여 삶의 슬픔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신경림의 '갈대'를 여러 번 읽었다.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작가는 죽음 이후의 세계를 정면으로 뚫고 나가는 것처럼 소설을 쓰지만,

사실은, 너도 궁금하지? 궁금하면 오백 원~하면서 익살을 부리는 것이다.

그 말을 신경림이나 김수영처럼 울음 섞어 하지 않고,

ㅋㅋ 거리면서 익살스럽게 풀어내고 있을 따름이다.

 

번역가 이세욱 씨의 말솜씨는 한국어를 부려쓰는 실력이 돋보인다.

손방(아주 못하는 솜씨), 용고뚜리(골초), 살쩍(귀밑머리), 사날좋은(제멋대로 참견하는), 파락호(재산있는 집안의 난봉꾼) 같은 말들과 함께 소설의 말맛을 잘 살려 주는 부분이 많다.

 

사탱(satin, 매끄러운 코트 안감같은 옷감)은 불어인 모양인데, 한국어로 번역하기 어렵다면 '새틴' 정도의 영어로 번역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