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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드롭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주인공 밥은 외롭다.
한 덩치 하는 그지만, 사촌 마브의 펍에서 바텐더를 하고 있다.
영화로 만들어진 뒤 쓰여진 소설이라 그런지, 소설로서 응집력이 다소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영상으로 보여지기 전,
독자의 머릿속 화면에 상상하도록 묘사해야할 책임이 있는 작가의 마음가짐과,
영상으로 보여주는 영화를 염두에 둔 시놉시스와 콘티를 짜는 작가의 마음가짐은 전혀 다를 터이다.
고독한 괴짜 바텐더 밥.
썩 괜찮은 사내 밥.
거리 눈을 치우거나 술을 사는 것만 봐도 그 정도는 알 수 있으나,
지나치게 내성적인 탓에 대개는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알 수가 없다.
사람들도 결국 대화를 포기하고 공손히 고개를 끄덕인 뒤 다른 사람을 찾았다.
밥도 사람들이 어떻게 말하는지 알지만 그렇다고 원망은 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자신을 객관화하고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는 능력이 있다.(21)
그런 그에게 '나디아'라는 여성 친구와 버려진 개 한마리가 남겨진다.
누구나 상대한테 애기하고 싶어해요.
뭐든 자기 얘기를 하고 또 하고, 하고 또 하는 거죠.
하지만 정작 자신의 정체를 보여줄 때가 되면, 찔끔 움츠리고 말아요.
실제로는 아무것도 없거든요. 그러니까 더 많이 떠들어 위장하는 겁니다.
해명이 불가능한 일을 해명하려는 거예요.
그 다음엔 다른 사람에 대해 심하게 떠들어 대죠. (139)
고독한 밥이지만, 나디아 앞에서는 말문이 트여, 오히려 다변이 된다.
그래. 사람은 누구나 고독한 법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본모습을 알아주는 사람 앞에서라야 마음이 활짝 열리는 것이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떠들어대는 것은 허세에 불과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친구를 찾고, 소셜네트워크에 접속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어쩌면 더 냉랭한 현실 인식뿐일지도 모른다.
버려진 개 '로코'라는 이름이 개들의 수호성인이자, 약사, 미혼남, 누명을 쓴 사람들도 지켜준단다.
로코라는 이름으로도 다양한 함의를 느낄 수 있는 장치를 해 둔 셈.
버려진 존재만큼이나 미혼남과 누명을 쓴 사람도 외로울 것이다.
약사는?
그들 역시 고독하게 손님을 기다리는 직업일지도 모르겠다.
그가 웃었다. 진짜 웃음. 이렇게 웃어본 지가 얼마였던가.
침묵도 아름다웠다.(168)
진짜 친구는 떠들썩할 필요가 없는 사이다.
고독한 사람도 웃을 수 있다면, 그런 친구는 참 좋은 친구다.
이 소설은 밥의 술집에 얽힌 폭력 조직의 충돌과 자금줄의 연관성이 핵심 줄거리지만,
나는 그 줄거리보다는 밥의 성격과 나디아, 개 로코에 눈길이 갔다.
나도 밥하고 비슷하다고 여겨져서일까?
암울했던 시절,
신념과 희망을 잃고, 밤이면 침대에서 절망과 춤을 추고 씨름을 했다.
그때는 소행성을 스치고 지날 때의 우주선 열차단막처럼 마음이 산산조각 나 있었다.
영혼의 조각들이 공중제비를 돌며 우주 저 멀리 날아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니, 돌아왔다.
정신도 대부분 옛날로 돌아왔다.(202)
성당은 나가지만 영성체를 하지 않는 행위를 통하여,
신조차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던 주인공에게,
세상에 대한 불신을 심어준 것도 인간이지만,
우주 저 멀리로 날아가 버린 영혼의 조각들,
산산조각 난 마음을 되찾아 온 것은 역시 인간이었다.
당신이 보는 건, 당신과 비슷한 일부뿐이야.
내 최고의 매력이 아니라. 미안.
하지만 그 사람? 그 사람은 달라.
나를 볼 때면 늘 최고의 나를 찾아내거든.
그게 뭐겠어? 바로 사랑이야.(219)
리사 롬지 형사의 이 말도 맥락은 같다.
자기 스스로도 자신의 매력을 제대로 찾아내기는 쉽지 않다.
여느 사람들은 '최고의 매력'을 발견해 칭찬해주지 못한다.
사랑만이,
자신이 가진 '최고의 매력'을 발견할 줄 안단다.
스펙터클도 스릴러도 뭔가 몰입하기 힘들었지만,
인간을 탐구하는 구절들에서 뭔가 끈끈한 유대를 느끼며 읽은 책.
64. 두 손 두 발을 다 꿇었다...는 번역이 틀렸다.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정도로 고쳐야 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