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소설로 그린 자화상 2
박완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199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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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이르지 않은 나이에 나목을 발표한 후 쉬지 않고 꾸준히 작품을 써오는 작가의 글쓰기 욕망을 늘 부러워하고 있었다. 작가 스스로 내건 부제 '소설로 그린 자화상'이란 문구가, 제목에 나오는 싱아와 무슨 관계가 있을지, 고 예쁜 이름 '싱아'란 무엇인지, 궁금증을 손에 쥐고 단숨에 읽었다. 인생의 황혼녘에 자화상을 그린다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그리게 될까? 붓이 아닌 펜으로 그린다면.

이 소설은 작가의 기억이란는 실타래의 끄트머리를 잡고 풀어헤쳐진다. 단지 기억이라는 것에만 의존하여 쓰는 새로운 글쓰기를 시도했다고 밝히고 있지만, 그것이 그리 새로운 방식이라고는 보아지지 않는다. 어느 글이건 작가가 드러나지 않기란 어렵고 어쩌면 그런 것은 공허한 것으로 독자에게 공감을 주지 못할 지도 모른다. 기억은 주관적이다. 방금 전의 상황도 사람에 따라 각자 다르게 기억되는 것이다. 기억이란 그만큼 자신의 상상력이 개입되지 않을 수 없는, 그래서 그 사람에게는 오히려 처참하리만큼 진실일 수 있는 도구이다.

이 작품을 넘기면서 싱아가 작가에게 다가가는 의미가 무엇일지 생각해 보았다. 고향 산기슭이나 길가 아무데나 있었던 새콤달콤한 맛의 싱아는, 작가가 서울 변두리에서 살 때 아카시아꽃으로 상한 비위를 가라앉히는 데는 그만일 것으로 기억되는 것이다. 차츰 도시의 생활에 젖어들면서 싱아에 대한 기억은 '여전히 지천이었지만 이미 쇠서 먹을 만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된다. 싱아는 고향 박적골에서의 작가의 아름다웠던 유년을 떠올리게 하는 상징과도 같다.

내 유년의 '싱아'는 어디있을까? 나는 지금도 밤하늘의 달을 보기를 좋아한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마알간 얼굴이 내비치는 것 같은 환상과 함께, 내 어릴 적 대사건과도 같았던 기억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어린 내게는 분명 대사건이었다. 저녁에 엄마 심부름으로 외할머니 댁에 갔다오는데 커다란 보름달이 나꾸 나를 따라오는 것이었다. 빨리 가면 빨리 따라오고 천천히 가면 달도 걸음을 늦추는, 그건 황홀한 발견이었다. 집에 들어서면서부터 기쁨에 찬 목소리로 호들갑을 떨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아무도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나만은 그렇게 신비한 경험이었다. 시골에서 자란 적은 없지만 도시 변두리 큰 우물이 있었던 그 넓은 마당을 환히 비추던 그 달을 잊을 수 없다. 내 유년의 싱아, 달은 지금도 깨끗한 얼굴을 내밀곤 한다.

이 작품은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을 잇는 아픈 현대사를 순전히 작가의 기억으로만 썼다고 해서 특별히 점수를 주고 싶지는 않다. 그 시대를 살아온 아버지 어머니들에게서 이런 정도의 아픈 자화상을 찾아내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자신의 기억에 의미있는 상상력으로 그림같은 묘사를 펼치는 작가의 순수성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묘사는 섬뜩하리만치 냉소적이기도 하고, 가슴이 아릴 정도로 아름답기도 하다. 모두 진실의 힘이 아닌가 한다. 작가가 말하는 '자기 미화의 욕구'는 그런대로 잘 자제되었다고 생각한다. 글을 씀으로써 '벌레'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작가의 열정 또한 높이 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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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네의 일기 - 완전판 문학사상 세계문학
안네 프랑크 지음, 홍경호 옮김 / 문학사상 / 199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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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대 때 읽었던 기억을 간간이 건져내며, 완역판 <안네의 일기>을 읽었다. 종전의 것은 원래 안네가 쓴 것의 75% 정도였다니, 안네의 일부만 보았던 것이다. 이 책에서는 안네가 사춘기를 겪으면서 자연스럽게 호기심을 갖게 되는 이성친구와 성적인 고민 그리고 은신처에서 함께 살던 어른들에 대한 신랄한 어조의 글이 그대로 들어있다.

안네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은 투명하다. 자신을 이중 인격자라고 하며, 당당하게 그러나 겸손하게, 자신을 윤색하거나 합리화하지 않고 바라볼 수 있는, 맑은 영혼에서 비롯된다. 안네의 맑은 영혼은 하고 싶은 것을 자신있게 소망하고, 현실을 견디며, 끊임없이 지적 욕구를 충족할 수 있게 한다. 안네는 글쓰기를 죽을 때까지 즐거워한다.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답답한 내면을 숨김없이 토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키티에게 쓰는 편지형식으로 일기를 쓴 것도, '나'의 말에 진정 귀기울여 주는 대상에 대한 갈망이다.

우리는 무엇인가 표현하고 싶어한다, 글로든 말로든. 말은 입에서 나오는 순간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히는 경우가 많다. 생각이 다르고 습관이 다는 사람들 간에 흔히 있는 일이다. 글은 그렇지 않다. 안네가 글로 표현한 것들에는 어쩔 수 없는 사랑과 연민이 느껴진다. 엄마와의 어긋나는 관계에서도 십대 특유의 불거진 자아가 발견되지만, 그것도 혈육 간의 끈끈함 앞에서는 우선일 리 없다. 안네가 타인을 바라보는 눈은, 자신을 바라보는 눈만큼이나 준엄하고 건전한 것이다. '건전함'은, 여전히 불건전한 세상에서 미덕이 아닐 수 없다.

안네의 꿈은 구체적이다. 저널리스트, 작가! 안네가 관심을 기울이고 공부하려는 것도 그렇다. 역사공부에 대하여,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하여... 이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강한 자부심과 힘찬 미래의식에서 나올 수 있는 지적 욕구이다. 안네의 꿈을 알기에, 안네의 미래를 알기에, 구절구절 가슴 저린 대목이 많았다.

은신처에서의 2년 동안 안네는 몸과 마음이 성숙해지며 날마다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러한 안네의 육체와 정신을 있는 그대로 감싸줄 속옷 한 장도, 친구 한 명도 없는 처지에서 3살 연상의 페터는 더할 수 없는 벗이 된다. '또 다른 나'를 찾아가는 성장의 길모퉁이에서 만난 동반자임에 틀림없다. 진지하게 조잘대는 야무진 얼굴이, 흑백사진과 함께, 연상된다.

안네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무엇보다도 맑다. 그 통찰력 또한 흉내내기 쉽지 않다. 극한 상황에서 그런 것은 더 빛을 발하는 지도 모른다. '두렵거나 슬프거나 불안할 때는 밖으로 나가라고!' 자연이 모든 상처를 치유하는 유일한 이름이라는 것을 그 나이에 알아버렸다니. 두꺼운 커튼을 내리고 저녁 8시 이후에는 숨소리, 기침소리도 나지 않게 살았던 안네. 썩은 감자와 양배추로 빈속을 채운 무수한 날들도 안네의 삶을 구차한 것으로 만들지 못 했다. 정신적으로 갇혀 살고 있는 나에 비하여 안네는 진정한 자유를 구가한 평화주의자였다. 유대인에 대한 자긍심, 전쟁(싸움)에 대한 보편타당한 비판, 지구 곳곳의 부와 가난에 대한 통찰... 자신을 참되게 사랑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생각들이 아닐까!

안네가 내 가슴 속에서 부활하였다. 아마도 영원히 자리하고 있을 십대의 친구로, 온전히 다시 태어났다. '나'를 찾아, 밤잠 못 이루고 일기장에 글을 쓰곤 했던 그 나이 때의 내가 떠오른다. 흑백 사진 속에서, 웃는 얼굴이 너무 예쁜 안네가 연필로 무엇인가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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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의 정원 일의 즐거움
헤르만 헤세 지음, 두행숙 옮김 / 이레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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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의 낭만적인 시와 산문이 아름다운 꽃그림과 함께 단아한 책이 되었다. 수선화, 목련, 백일홍, 튤립, 이이리스... 펜 소묘에 수채화로 채색된 꽃그림이 주는 여운은 길고도 향기로운 것이었다. 헤세는 식물과 더불어 사는 시간들을 통해 삶을 관조하고 통찰하며 자연과는 어긋나게 가고 있는 세상을 안타까와했다.

그의 사상은 다분히 동양적이며 신비적이다. '......신이 네 안에서 말씀하시도록 하라......고향은 너의 내면에 있든가 아니면 어디에도 없다.' '나무들에게 귀 기울이는 법을 배운 사람은 더 이상 나무가 되려고 갈망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 이외의 다른 무엇이 되려 하지 않는다. 바로 그것이 고향이다. 그것이 행복인 것이다.' 헤세는 꽃도 시들듯이 그렇게 우리도 '구원의 죽음'만을, '재생의 죽음'만을 죽는다고 한다.

헤세는 '꽃의 향기를 통해 아름답고 소중한 것들'을 떠올리고, '예전에 잃어버린 아득한 소리에 대해 명상하고 모색하고 귀를 기울이며 살아가기'를 바랐던 것 같다. '그 뒤쪽에 우리의 진정한 고향은 있을'거라고. 아이리스 꽃봉오리 속... 그 속은 '세상의 모든 형상들 뒤에 깃들여 있는 신비로운 본질 속'이라고. 예감해 왔던 내면의 세계에 아름다움을 부여하기 위해 통과해야할 몇몇 사람들만의 상징의 문이라고.

헤세는 지상의 어느 예술작품도 꽃보다 더한 것은 없다고 역설한다. '예술은 우리와 세계의 심장 사이에 존재하는 섬세하고 민감한 막'이란다. 그러나 '세계의 심장 속으로 완전히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것마저도 뚫지 않으면 안 되는 것'라며. 우리가 돌아가야 하며 추구해야 하는 고향 혹은 세계의 심장은 꽃으로 상징된다. 그의 단편 '꿈의 집'에서 '노인은 약간 원시가 된 눈으로 웃고 있었다...'

검게 그을린 주름진 얼굴, 예리하게 빛나면서도 따스한 눈빛, 마른 듯 강단있어 보이는 긴 팔로 꽃에 물을 주고, 잡초를 뽑고, 낙엽을 태우는 일들을 경건한 의식을 행하듯 하고 있는 모습을 흑백사진을 통해 가까이서 볼 수 있다. 사진은 선명한 색채의 꽃그림들과 대비를 이룬다. <정원 일의 즐거움>은 두고두고, 나의 정신이 무언가로 혼탁할 때, 근시안적인 생각으로 단순해지려할 때, 아무 장에서나 펼쳐들고 읊조리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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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간다는 것
위화 지음, 백원담 옮김 / 푸른숲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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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간다는 것>이란 제목이 주는 뉘앙스가 독특하여 원제를 보니, 活着이었다. 내 몸에 거머리처럼 들러붙어 뗄레야 뗄 수 없는 숙명과도 같은 것. 그것이 삶이라면, '살아간다는 것'은 삶의 목적이자, 목표가 될 수밖에 없음이다. 어떤 듣기 좋은 화려한 삶의 목표도, 살아가면서 예고없이 찾아와 할퀴고 달아나는 삶의 장난질과도 같은 것 앞에서는 그것이 진정 목표로서의 몫을 못한다. 그저 '살아간다는 것'을 위해 우리는 살고 있고 살아 갈 뿐임을 통감하게 된다.

숙명론자의 한탄과는 다른 여운을 주는 이 소설은, 끈질기게 목숨을 부지하며 인생의 파도를 타고 흘러흘러 온 한 촌부의 육성이다. 그에게 삶은 관대하지만도, 날카롭지만도 않다. 영문도 모른 채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울고 웃는 힘없는 민초들의 모습을 대변한다. 잡초와도 같은 생명력으로 비굴한 삶을 택하는 찌든 모습이 나약하기보다는 강인하다. 우리를 있게 한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이기도 하여 이제는 굽은 등허리에 연민어린 시선을 주고 싶다.

촌부에게 있어 '살아간다는 것'은 삶의 목표이기도 하며 삶의 방식이기도 하다. 행도 불행도 모두 끌어안아야 할 삶의 일부이다. 어느 날 문득 찾아오는 삶의 불청객들을 담담하게, 때로는 가슴을 치며, 맞이하는 모습은 퇴색된 얼굴을 하고 낮은 곳으로 구르는 낙엽마냥 허허롭다. 작가가 희화적으로 그려놓은 불청객들이 오히려 진실된 삶의 방식으로 와닿는다. '살아간다는 것'은 그렇게 정처없이 떠밀려 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길에서 여러번 만나는 상실감들은 기쁜 기억들의 조각으로 인해, 촌부의 삶을 '그런 대로 괜찮았다고' 여기게 한다. '사람은 그저 평범하게 사는 게 좋은 거야. 아웅다웅 이리 채이고 저리 부대끼다 보면 누구든 자기 운명만큼 배상받을 수 있게 마련이라네.' 촌부의 이 말은 자신의 험난한 삶과의 손잡기이며 살아가면서 얻는 예기치 못하는 선물과도 같은 것들에 대한 작은 감사이다. 끈질긴 생명력으로 비굴하게 살아온 삶에 대한 자부심이다. 그래서 그의 삶은 주름살 깊이 패인 얼굴에서 느낄 수 있는 성숙함이며 고귀함이다. 이 세상 누구의 삶도 고귀하지 않은 것은 없으리라.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로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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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 문학사상 세계문학 12
J.D.샐린저 지음, 윤용성 옮김 / 문학사상사 / 199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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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적인 악한소설(Picaresque Novel)의 특징들을 고루 가지고 있는 이 현대소설은 주인공 홀든의 어투만큼이나 비뚤어져있는 것들을 보여준다. 대개의 악한소설의 주인공처럼, 홀든은 아주 태평스럽게, 사소하다할 수 있는 잘못을 멈추지 않고 저지른다. 하지만 용케 범죄로 일컬어질 만한 행동의 선은 넘지 않는다.

기성세대에 대한 10대의 신랄한 조롱이 주를 이루는 내용인데, 정작 주인공도 어떤 성품의 고양됨을 성취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의 성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변화됨없이, 빈정대고 냉소적인 말투에 잘 드러난다. 그래도 소위 '문제의 10대'인 홀든 - 사회적 규범으로는 - 이 밉지 않고, 그 건들거리는 어깨를 한번쯤 두드려주고 싶은 마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의 말과 행동이 뒤틀려있고 거칠수록 그 마음에 자리하는 소망은 더 간절하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하다. 그런 소망의 본질을, 홀든은 '탈선'이라는 행위를 통하여 깊이 인식하게 된다.

홀든의, 혹은 작가의 탈선 충동은, 낙제한 '구두표현법' 과목에 대한 변에 잘 나타난다. - '쉴 새 없이 통일시켜라, 간결하게 해라, 그런 말만 한다니까요. 경우에 따라서는 그렇게 할 수 없는 것도 있지 않습니까'. 홀든이 '탈선'을 오히려 즐기는 듯한 인상을 주는 대목이 있다. 역시 앤톨리니 선생님과의 '구두표현법'에 관한 대화이다. - '어떤 학생이 조금이라도 논지에서 벗어나면, 나머지 학생들은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탈선!'하고 외치게 되어 있어요. 도무지 못마땅했죠. 그래서 'F'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요, 저는 남이 '탈선'이라고 소리지르는 걸 들을 때 조금도 싫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쪽이 오히려 재미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러고나서 덧붙이는 말은 그가 삶을 살아가는 방식까지 보여준다. - '요점에서 빗나가지 않기를 바라죠. 하지만 너무 요점에만 얽매이는 건 싫습니다.' '처음과는 다른 이야기에 빠져(그 이야기에 더 흥미를 느꼈기 때문) 흥분하여 지껄이는 놈을 향해 '탈선!'하고 외치는 것'을 홀든은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이는 작가가 이 소설을 풀어가는 방식과도 다르지 않다.

홀든은 48시간의 일탈을 통해 자신의 내면에 간직되어 있는 순백에 대한 열망을 발견하게 된다. 탈선의 체험을 통해 내면의 소리에 귀기울이게 된다. 진정 나 자신이 추구해야 하며,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를. '나'의 소리에 귀를 닫고 선 밖을 나가지 못하고 허우적대는 삶이 꼭 보람된 것일까? 삶이 한번의 여행길이라면 정해진 길만 따라 갈 수 있을까?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마음가는 대로 여정을 바꿀 수 있는 것이 여행의 묘미라고 한다면, 누구에게도 탈선의 묘미를 맛볼 수 있는 기회는 남아있다. 기나긴 여로에서 활력을 줄 수 있는 아름다운 탈선! 몇 번이 될 지, 언제가 될 지, '새로 태어남'의 기회가 될 수 있는 탈선은 그래서 더 매혹적이다.

홀든은 예정이라도 된 것처럼, 자연스럽게 탈선을 감행하고 세상의 더러움을 목격한 후, 자신이 간절히 바라는 것은 순결함으로 대변되는 여동생 피비임을 깨닫는다. 비에 온통 젖음으로써, 그는 재생한다. 비를 피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세례 의식을 홀로 치르며, 이제는 돌아가고픈 곳을 진실로 발견한 것이다. 그러나, 피비가 사는 곳으로 돌아가는 홀든이 이제 다시는 탈선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안심한다면 오산이다. 그는 언제든 마음이 내키면 멋지게 '탈선'을 거듭할 것이다. 또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 말이다.하지만, 훌륭한 결과을 의도하고 저지르는 탈선은 아니다. 미흡하고 연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이, 허물 많은 우리 인간이 아닐까?

그래서 더욱,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겠다고 선언하는 홀든과 비로 온몸이 젖어들도록 앉아있는 홀든의 모습은 성스러운 느낌을 자아낸다. 자신의 이야기를 적나라하게 쏟아 붓고 난 후, 아직도 투덜대고 있지만, 조금은 누그러진 듯한 홀든의 목소리가 정감있다.
'누구에게도 아무 얘기를 하지 않는 편이 좋았어. 얘기를 하고 나면 그때의 친구들이 지금 내 주변에 없다는 게 더욱 아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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