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한국전쟁, 그리고 비무장지대의 탄생

미국과 유엔의 서방국 사이에서 처음 논의되었던 한반도 비무장지대는 ‘정치적인 해법‘으로서 제기된 것이었다. 중국의 한국전쟁 개입 의도를 고려하고, 한반도 밖으로의 확전을 방지하는 방안이었다. 정전 이후 지금까지 한반도 비무장지대는 ‘군사 작전 지대‘로 인식되고 규정되었지만, 사실 비무장지대 구상은 한국전쟁을 정치적으로해결하려는 차원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 P69

미국은 영국, 인도 등과 함께 중국과 정치적으로 정전문제를 협상하려고 했으나, 그 시도는 실패했다. 군사적으로 전황이 유리하던 중국은 정전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때의 정전 시도는 실패했으나, 비무장지대 설정을 통해 정전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미국, 기타 서방국, 중국 사이에 인식이 공유되었다. 이때 논의한 38선 기준의 비무장지대, 정전 감독 기구의 설치 등은 이후 정전회담의 토대가 되었다. -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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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집합체‘ collective라는 말을 사용하여 인간들과 비인간 존재들 간의 연합을 묘사할 것이고, ‘사회‘society라는 말로는 우리의 집합체의 한쪽 부분만을, 즉 사회과학이발명해 낸 분할의 한쪽 편만을 지칭할 것이다. 맥락과 기술적 내용은 매번 재정의되는 것으로 드러난다. - P26

이 글의 가설은 다음과 같은 것인데, ‘근대성‘이라는 말이두 가지의 완전히 다른 실천을 지시하고 있고, 이 두 가지 실천은 그 효과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구분되어야만 하지만 최근에는 이것들이 혼동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실천의 첫 번째 집합은 ‘번역‘translation인데 이는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존 - P41

재들 간의 혼합, 즉 자연과 문화의 하이브리드들을 만들어낸다. 두 번째는 ‘정화‘purification로서, 전적으로 구분되는 존재론적 지대를 창출하는데, 그것은 한편으로는 인간 존재들의 존재론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비인간 존재들의 존재론적 지대이다. 첫 번째 집합이 없다면 정화의 실천은 헛되고 무의미해질 것이다. 두 번째 실천이 없으면 번역의 작업은 느려지고 제한되거나 심지어 불가능해질 것이다. 첫 번째 집합은내가 연결망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응하며, 두 번째는 근대적인 비판적 입장이라고 부르는 것에 상응한다. 전자는 예를들어 고층대기의 화학과 과학적, 산업적 전략, 그리고 국가의정상들의 관심사, 그리고 생태주의자들의 근심 모두를 단일한 연속적인 사슬로 연결시킬 것이다. 후자는 언제나 거기에있어 온 자연세계와, 예측가능하고 안정적인 이익과 이해관계가 있는 사회, 그리고 지시대상과 사회 모두로부터 독립적인 담론들 사이에 분할을 수립할 것이다.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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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이득‘을 준 이상 이는 노동이다. 그러나 그이득이 스스로에게 돌아갔고 그 보상 역시스스로가 얻은 것이므로 ‘무료‘ 노동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이로부터 ‘무료 노동‘이라고 불릴 수있는 유일한 노동은 지불받지도 보상을 얻지도 않은, 다른 이를 위해 행해지는 노동이라는 점을 도출할 수 있다. - P41

가사노동의 특징적인 생산 관계가 가사노동에만 해당하지 않고 혹은 가사노동에만 한정되지 않고 다른 종류의 과업과 노동역시 특정 지으므로, 우리는 가정 내 노동이 - P46

라는 개념으로 가사노동의 개념을 대체하기를 제안한다. 연구 대상은 분명 사회학적이고 광범위한 의미의 집에서 무료로 실시되는 노동이기 때문이다. - P47

토착 이론은 개인의 신장과 그의 신체 기관에 필요한 음식의 양 사이에 상관관계가 성립한다고 전제한다.‘ 그러나 이 전제가 분배의 원칙이 아니라 합리화에 불과하 - P86

다는 것은 이 상관관계에서 드러나는 예외의 수만 봐도 명백해진다. 남편, 사장, 아버지, 장자는 그 자신이 아무리 왜소하더라도자신과 신장이 비슷한 여성이나 노동자, 아이, 동생에게 특권을 양보하지 않는다.
필요 편차 이론은 또한 에너지 소비의 차이라는 세 번째 논거를 포함한다.
이 주장은 실제 개인이 소비하는 에너지 측정값에 근거하지 않으며, 활동과 에너지 소비 사이에 개인과 무관한 관계를 설정한다. 이 관계는 기본적으로 활동을 ‘큰일‘과 ‘작은 일‘로 분류한다. 하지만 이 분류는해당 활동에 필요한 에너지 소비에 따른 것이 아니라 활동의 성격에 기초한다.
이때 기술적인 수행 자체는 분류의실질적 기준이 아니다. - P87

소비는 재화만이 아니라 서비스도 포함하는 문제다.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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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들은 세월호를 "대한민국에서 제일 위험한 배"라고 불렀다. 청해진 해운은 일본에서 18년 이상 운항한 나미노우에호를 구입해 불법으로 증개축했다. 증개축이 반복되면서 '승인이 나지 않은 도면'으로 증개축이 이어졌다. 증개축으로 배의 무게가 239t 늘었고, 배가 기울었을 때 평형상태로 되돌아오려는 복원력은 낮아졌다. 한국선급이 승인한 최대 화물 적재량은 1077t인데, 그날 배에는 화물 2214t이 실려 있었다(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 조사 결과). 이윤을 위한 과적은 상습적이었다. 부실하게 고박한 화물이 쏠리면서 복원성이 상실되었다. 배 한 구역이 침수되더라도 다른 구역은 침수되지 않도록 수밀문, 맨홀을 닫고 운행했어야 하는데 세월호 지하층의 수밀문, 맨홀은 모두 열려 있었다. 선장과 선원들은 이를 방치한 채 배를 떠났다. 시뮬레이션 결과, 닫혀 있었더라면 배는 더 오래 떠 있었을 것으로 나타났다. 해경 지휘부는 현장 출동 책임자에게 사진, 영상 송출을 계속 요구했다. 생사의 순간이 허비되었다. 수많은 부주의와 방관이 쌓였고, 배가 침몰했다. 304명이 세상을 떠났다. 그날의 아픈 기억이다. - P3


세월호 참사는 일상을 안전하게 살아가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아침에 출근했던 가족이 무사히 퇴근하는 것, 여행을 갔던 가족이 무사히 돌아오는 것, 그렇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안전한 사회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했어요. (...) - P15




꼭 10년이 흘렀다. 소중한 가족을 잃은 이들은 어떻게 이 슬픔을 견뎠을까. 나는 지금도 사건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생각하면 무너지곤 하는데 말이다. 




세월호 참사 가족협의회에서 지난 10년 간의 기록을 담은 책을 읽었다. 참사 당일의 현장 상황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역사를 한 눈에 확인할 수 있었다. 가족들의 인터뷰가 실려 있어 과거부터 현재까지 참사의 역사를 복기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참사 초기 정부의 기능이 불능인 상황에서 자진해서 내려간 민간 잠수사들, 유가족을 실어 나르기 위해 봉사하러 간 택시 기사님들을 비롯한 많은 자원 봉사자들이 있었다. 그 분들이 아니었다면 그마저도 굴러갔을지 지금은 그저 그나마 그분들께 감사한 마음이 들 뿐이다. 초기 정부의 막장 대응, 불통과 관련한 가족들의 인터뷰를 듣자니 그 때가 떠올라 분노가 일었다.  


2017년 4월 18일 세월호 선체의 수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5월 13일 세월호 선내 4층에서 단원고 조은화 학생이, 18일에는 허다윤 학생이, 22일에는 이영숙 씨가 수습되었다. (그전인 5월 5일에는 세월호 침몰 해역 수중 수색에서 고창석 단원고 교사의 유해가 수습되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2018년 5월 10일 세월호가 바로 세워졌다. - P69

 

실종자 가족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3년 간을 기다렸다. 3년이라니…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기간이다. 


그 표정을 보면 바로 알 수 있는데 아이를 찾기 전과 찾고 나서의 표정을 보면 하늘과 땅 차이예요. 완전히 달라. 사람이 완전히 달라져요. 얼굴이 새카맣다가 하얘져요, 진짜로. 마치 살아 있는 애를 찾은 것 같은 얼굴이에요. 처음에는 진짜 이해하지 못했어. 완전히 얼굴이 피는데 그걸 어떻게 설명하나? 완전히 다른 사람이 돼요. 얼굴이 빠짝 마르고 시커메지고 표정도 하나도 없던 사람이, 뼛조각이라도 아이를 찾는 순간 살아 있는 자식을 만난 것 같은 얼굴이 돼요. 그러다가 갑자기 슬픈 얼굴이 돼요. 자기 곁에 아직도 못 찾은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기쁜데 미안한 거죠. (이승용) 


그마저도 세월호 선체 수색으로 9명의 실종자 중 4명은 돌아왔지만 5명은 영영 찾지 못했다. 뼛조각이라도 찾겠다는 가족의 마음이 너무나 절절하게 느껴져 울음을 삼키지 않을 수 없었다. 


세월호가 뭍으로 나오고 세워지던 날이 기억난다. 흉물 같던 배는 마치 너덜너덜해진 피부 같아 보였다. 세월의 흔적만큼 배도 그렇게 변해버렸구나 싶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아이를 잃고 황망해진 부모와 형제는 정부의 안일한 대응과 진상 규명을 위해 일어섰고 오래도록 지난한 투쟁을 이어갔다. 그 힘은 분명 아이를 잃은 슬픔과 국민을 보호하지 않는 국가에 대한 분노가 자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국민 개개인의 역량의 강화, 투쟁에 대한 승리의 경험도 다른 결과를 낳았다고 생각한다. 


당시 부모들의 나이는 평균 사오십 대였다. 이들은 대한민국 경제성장과 민주화의 시대를 살아왔으며 다수가 고등학교 이상의 고등교육을 받은 세대다. 정치 활동에 무관심하거나 미온적일지라도, 감금이나 고문 같은 국가폭력이 자행되던 시대의 공포에 시달렸던 세대와는 여러모로 달랐다. 정보통신기술과 네트워크 매체의 발달 역시 이들의 각성과 실천을 자극했다. 가족대책위라는 공동체로 모여 있었던 이들은 다양한 지식과 정보를 빠르게 공유했으며 수많은 시민과 광범위하게 연결되어 교류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배경은 새로운 특징을 지닌 유가족의 출현을 촉진했다. 한계 지어진 틀 안의 존재를 넘어 사유하고 증언하며 주장하고 실천하는 주체의 등장이었다. - P238~239


난관 끝에 탄생한 세월호 특조위는 여당과 정부의 탄압으로 제대로 된 활동을 이어가지 못한 채 종료됐다. 왜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허망하게 갔는지 그 원인을 밝혀달라는 것이 그렇게도 자신들에게 문제가 되는지… 

’세월호특조위에 여당과 야당이 위원을 추천하는데 여당인 새누리당이 진상규명을 방해하는 사람을 추천하면 어떻게 할 거냐“?‘ 그게 가족들의 가장 큰 걱정이었는데 새누리당에 김재원 의원이 ’아, 우리가 그렇게까지 하겠습니까? 여론이 있고, 보는 눈이 있는데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데 ’그렇게까지 하더라고요. 정말 상상이상이었어요. 진상규명을 방해하는 위원을 추천하는 것은 물론이고 진짜 하나하나 다 방해했어요. 공무원 파견을 안 하거나, 아예 뽑지를 않거나 예산을 덜 주거나 제때 안 주고, 자료도 부실하게 주고. 무엇 하나 특조위가 제대로 기능을 할 수가 없었어요. (박주민) - P150


세월호참사와 관련되어 법적 책임을 지고 처벌을 받은 공직자는 123정 김경일 정장 단 한 명뿐이었다. 경찰, 국정원, 검찰의 적폐청산 기구들은 ‘세월호 참사는 사참위에서 다룰 사안’이라며 아예 다루지 않았다. 그러나 세월호특조위와 마찬가지로 사참위 또한 수사권과 기소권을 갖지 못했다. 세월호 5주기인 2019년 4월 16일 세월호 특별수사단 구성을 위한 청와대 국민청원이 20만 명을 돌파했지만 청와대의 답변은 역시나 사참위 조사 결과를 지켜보자는 것이었다. - P167


세월호 선체 수색 종료 이후에도 참사와 관련하여 소식들이 이어졌지만 그동안 제대로 주목하지 못하고 지나쳤던 것 같다. 안산에 합동분향소가 철거되었지만 대신 가족협의회와 안산 시민들이 연대하여 4.16생명안전공원을 통해 기억과 추모의 공간을 추진 중이다. 2021년 2월 마침내 4.16생명안전공원 국제설계공모가 시작되었는데 착공 예정 공사비가 500억 원을 넘으면서 사업 적정성 검토를 추가 진행하며 현재 착공 일정을 가늠하기 어려워진 상태다. 끝까지 공사가 잘 진행될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또한 진도의 팽목항에 있던 임시 시설물들도 철거될 뻔 했으나 희생자 가족 중 한 명이 가족대기실과 희생자 분향소로 쓰이던 낡은 컨테이너에 ‘팽목기억관’을 만들었다. 


가족들은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재단을 운영하고 합창, 공방, 연극, 목공, 꽃누르미 공예, 봉사 등을 하며 몸과 마음을 치유해나가려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사회적 시선에서 그들은 자유롭기 어려웠을 것 같다. 사실 이 분들도 살아나가야 하는데 계속 피해자라는 잣대를 들이댄다는 것이 우습지 않나. 웃으면 웃어서 뭐라고 하고 울면 운다고 뭐라고 하고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추라는 건지. 그래도 가족들이 각자의 방식대로 힘을 내고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임영애 씨는 자신에게 전사(戰士)의 얼굴을 새로 주었다. 슬픔을 지우고 강함을 그려 넣었다. 그것이 순수라는 이름으로 피해자에게 순응을 요구한 사회에 맞서는 길이라 여겼다. 피해자다움은 그만큼이나 강력한 족쇄였다. 세월호참사 피해자들은 그 족쇄를 끊어내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저항의 역사를 만들어왔다. - P388


의혹으로 둘러싸인 사건에 대해 명쾌하고 간결한 단 하나의 진실을 바라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렇게 보면 세월호참사 진상규명의 현주소는 못마땅할 수밖에 없다. 진상규명의 간절함이 크면 클수록 더욱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진실은 때로 울퉁불퉁하고 합리적으로 설명되지 않거나 여러 가지 모양을 갖는다. 왜 세월호가 그렇게 빨리 침몰했는지, 왜 세월호에 갇힌 이들을 국가는 구하려 하지 않았는지, 그 진실의 얼굴은 아직 장막에 가려진 채 남아 있다. 한편 진실을 찾는다는 것이 무너진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라면 사법적 정의 외에도 사회적, 역사적, 그리고 회복적 정의의 실현도 함께 가야 한다. - P173


의혹이 아니라 진실이 알고 싶다. 대체 왜 그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이유라도 알면 여전히 분노하는 내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을까. 결국 진실이 끝까지 밝혀지지 못한다 해도 이 사회적 재난의 대가는 끝까지 우리 사회가 짊어지고 가야 하지 않을까. 






자신은 이제 새들이 모두 날아가고 난 뒤의 빈 나무 같은 사람이 됐다고 생각했지만, 그 기사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한번 시작한 사랑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고, 그러니 어떤 사람도 빈 나무일 수는 없다고, 다만 사람은 잊어버린다고, 다만 잊어버릴 뿐이니 기억해야만 한다고, 거기에 사랑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영원히 사랑할 수 있다고. - P211 (사랑의 단상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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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브리지 중국사 11 - 상 - 청 제국 말 1800~1911, 2부 캠브리지 중국사 11
존 킹 페어뱅크.류광징 책임 편집, 김한식.김종건 외 옮김 / 새물결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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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브리지 중국사 11권 앞 부분은 청나라 말기 경제의 변화, 주변국과의 관계에 따른 중국의 인식의 변화를 다룬다. 


청나라 말 무렵 정치와 이념 체계의 파고로 중국 경제도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근본적인 경제적 변화, 근대적인 경제 성장은 자체적으로 이루지는 못했다. 

농촌은 인구가 증가하여 1인당 경지 면적이 줄었다. 보조 수단인 수공예품 생산도 값싼 면화의 유입으로 경쟁력에 밀리면서 새로운 시장을 향한 재배 작물 유형을 찾아야 했다. 공업은 제도의 미비로 한계가 있었다. 국내 교역 시장은 지방 단위로 소규모의 거래가 이루어진 반면대외 교역은 수치로는 증가하였다. 다만 상품 유통은 독점 구조를 가져 하층 노동자에게 가기 어려운 구조였다. 청 정부는 외국과 조약을 맺으면서도 관세율 조정을 과감히 하지 못해 이를 국내에서 세금 수입을 통해 이루어야 했다. 또 계속되는 내부 반란 진압으로 인한 군사 비용이 커졌고 1895년 청일 전쟁의 결과로 배상금까지 얹어져 삼중고가 되는 상황이 되었다. 


대외 관계는 급속도로 변화하였다. 먼저 1905년까지 제국주의가 첨예화되면서 서구 열강과 일본과의 관계에 있어서 역학 관계가 변하였고 만주족에 대한 통치력이 약화되었다. 미국의 남북 전쟁이 종식되고 일본의 메이지 유신, 이탈리아와 독일이 통일되면서 전 세계의 분위기는 여러 모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1869년 중국 최초 외교 사절단이 해외로 파견되었고 그 결과 올콕 협정이 맺어졌으나 이로 인해 홍콩에 영사관이 설립되고 각종 품목에 대한 세금이 인상되었다. 또 이 때 최혜국 대우가 들어갔으며 내륙에서 외국인들이 임시로 거주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1871년 타이완 원주민들이 난파당한 류큐인들을 살해한 일로 일본이 류큐에 종주권을 주장한 뒤 1879년 일본이 류큐를 합병하게 된다.

투르키스탄 초대 총독인 카우프만이 1871년 쿨자(일리) 지역을 점령한 일로 청은 1875년 좌종당을 흠차 대신으로 임명하고 신장 원정대를 파견해 1877년까지 신장 전 지역을 수복한다. 청은 이후 1884년 신장을 정식성으로 승격시켰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조선은 문호를 강제 개방하고 이후 서양과 연이어 협정을 체결하게 된다. 임오군란, 갑신 정변, 거문고 점령, 동학 농민 전쟁, 청일 전쟁까지. 조선은 오랜 동안 중국과 접경국이었고 사상과 이념, 철학 체계의 영향으로 뗄레야 뗄 수 없는 외교적 관계였으나 청일 전쟁에서 일본에 패배함으로써 아시아의 수장 자리에서 청은 물러나야 했다(조선에 대한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책에서는 청일 전쟁을 아주 짧게 다루지만 전쟁에서 왜 졌는지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일사분란하지 못했던 청의 군대 체계, 이홍장의 외교력 부족, 북양 함대 사령부의 부패-군사력 문제, 정부와 백성의 단합 X).  


러시아가 중국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뤼순, 다롄을 점령하고 남만주 철도 부설권을 획득한 것을 계기로 영국, 일본, 프랑스가 조타지 쟁탈전을 벌이게 된다. 청 국내에는 외국 제품이 증가하면서 농촌은 빈궁해졌고 실업난과 생활난이 더해지면서 이는 외국인에 대한 적대감을 쌓게 하는 계기가 된다. 여기에 자연 재해까지 겹치면서 못살겠다 갈아보자 하며 일어난 것이 의화단 운동이다. 

이 운동은 외국 제국주의에 대한 분노와 반감이 완전히 비이성적인 방식으로 폭발한 것으로, 내재적으로는 애국적인 요소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오늘날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일부 다른 역사가들은 이 운동을 동기는 타당했으나 방법은 부적절했던 일종의 원시적인 애국적 농민봉기로 간주하고 있기도 하다. - P219


일본이 영국과 동맹을 맺고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일본의 제국주의는 본격적인 궤도에 오른다. 

러시아가 승리했다면 거의 틀림없이 만주 그리고 아마 몽골까지 합병했을 것이고, 다른 열강들로 하여금 영토 배상을 요구하도록 부추겼을 것이다. 그러나 패전한 러시아는 발칸반도로 눈을 돌렸고, 이 지역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독일과 충돌해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할 장을 마련하게 된다. 이제 남만주에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된 일본은 궁극적으로는 중국의 독립과 영토 보존까지 위협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1905년 만주에 대한 청의 통치권 회복은 비록 일본과 러시아가 소유한 특권에 의해 제한된 것이기는 했지만 만주가 여전히 중국 땅으로 남을 것임을 보증해주었다. 1907년 4월 20일 조정은 만주족의 발상지라는 만주 지역의 특별한 정치적 지위를 종결시키고 그곳을 정식 성으로 개편하기 위한조치를 취해 쉬스창을 총독 겸 흠차대신으로 임명하고 펑톈, 지린, 헤이룽장 3성에 각각 무관 순무 대신 문관 순무를 파견해 총독을 보필하도록 했다. - P238~239


서구와의 관계에 대한 중국의 관점은 1840~1895년 사이에 계속 변화했는데, 1860년 이후 그러한 변화는 한층 더 가속화되었다. 일반적으로 말해 대외 정책에 대한 견해는 1840년대의 쇄국‘ 정책에서 1860년대에는 유가의 성과 신에 기초한 ‘수신‘ 정책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근대적 외교술, 특히 국제법 사상은 이후 20년 동안 계속 강조되었다. 1880~1890년대에는 권력 정치, 특히 세력 균형론과 강대국과의 동맹론이 한때를 풍미했다. 다른 한편 1860년대 중반에는 민족의식이 등장해 날로 강력해져갔다. 1840~1860년 사이에는 상업을 이용해 오랑캐들을 견제하자는 원칙이 인기를 끌었으나 1860~1870년대에 그것은 ‘상전‘이라는 좀더 역동적인 관념에 자리를 내주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대외 정책에 대한 견해에서 나타난 이러한 변화들은 유교의 이상주의적 태도에서 실용주의적 태도로의 전환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 P327


신장 수복을 계기로 청은 실전에서 서양 무기나 자체적으로 개조한 무기의 사용성을 늘렸다. 이홍장은 직예 총독에 올라 청 최고의 군대였던 회군의 훈련법대로 다른 군대를 훈련시키게 했고 근대적 해군을 창설했다. 또 순양함을 외부에서 구입하여 북양 해군의 함대를 재정비하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1885년 타이완이 성으로 승격되고 유명전이 초대 순무가 되었다. 그러나 이주민과 토착민 사이의 갈등이 발생하여 조정은 유명전을 직위에서 해임시킨다(임무는 그대로 하게 했음). 


19세기 마지막 10년 청은 서구와 일본에게 겪은 충격으로 인해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흐름에 휩싸이게 된다. 여러 지식인들에게서 다양한 주장들이 나왔다. 캉유웨이는 금문학의 해석을 달리 하여 유교 중심적 지향성을 앞세우며 ‘대동’의 세계, 평등주의와 보편론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로 나아가자는 이상향을 앞세운다. 량치차오는 캉유웨이의 주장을 이어받으면서도 민족주의적 이상을 더했다. 옌푸는 상대적으로 온건한 정치 지향을 보였으나 다원주의적 세계관을 주장한 것이 눈에 띈다. 담사동은 중국의 전통적 질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해방시켜야 한다 주장했기에 당시로서는 가장 급진적인 것이 아니었나 싶다. 

대중 청원과 조정에는 상소문이 올라와 위로부터 개혁 요구가 빗발쳤다. 아래에서는 학회나 신문 등이 생겨났다. 


1898년 서태후는 광서제와 긴장 끝에 갈등이 폭발한다. 광서제는 캉유웨이와 량치차오 등의 개혁파의 청원을 받아들였지만 조정은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백일 유신으로 조정은 황제와 소수의 급진 개혁가와 다른 한편으로는 태후와 다수의 기존 관료 간에 판이 갈린다. 서태후는 광서제를 유폐했고 훈정을 선포했으며 제3차 섭정을 개시하고 개혁가들은 숙청되어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근대화는 어떤 의미에서는 서구화를 의미했다. 많은 사대부들이 ‘양무‘ 운동에 찬성했던 것은 그것이 근대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서 중국을 망국의 위기로부터 구해낼 수 있다는 희망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그것이 서구적이라는 이유로 ‘양무‘ 운동에 반대했다. 그것이 유가 학설을 대체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어떻게 하면 중국을 구하는 동시에 중국 고유의 방식을유지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직면한 그들은 모순적인 태도를 가질수밖에 없었다. - P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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