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츠크네히트의 다수가 루터파였다는 사실은 이러한 신성모독행위들값비싼 교회 식기류를 약탈하거나 수녀들을 강간하는 등의도시 약탈 과정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특징이었다에 또 다른 차원의 의미를 부여했다. 성유물함이 박살났고, 전임 교황들의 것을 포함해 무덤들이 파헤쳐졌다. 미사를 풍자한 집회가 열렸고, 란츠크네히트가 ‘교황‘ 선출을 패러디하기도 했다. 바티칸의 프레스코화에 루터 - P336

를 칭찬하는 낙서가 새겨져 있는 것을 지금도 볼 수 있다. 사도 베드로의 도시에서 그러한 신성모독이 행해졌다는 것, 유럽 전역의 순례자들이 방문하는 교회들의 유물과 재단을 더럽혔다는 것이 특히 충격적으로 여겨졌다.
혹자에게는 로마를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어준 예술가와 학자들의 공동체가 해체된 것도 통탄할 만한 사태였다. 이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이탈리아 전역으로 흩어졌다. - P337

카를 5세의 이탈리아 순방 계획은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었다.
이를 반드시 저지하려고 했던 프랑수아 1세는 이탈리아 내 자신의 동맹 세력들과 새로운 군사 원정 계획을 논의해왔는데, 왕이 직접 이탈리아 원정을 지휘하든, 스페인 국경지대로 군대를 보내든 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동맹국들은 둘 다 가능성이 별로 없다는 것을 잘 알고있었다. 프랑수아 1세와 카를 5세 모두 평화협정을 체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카를 5세의 고모이자 플랑드르의 섭정 마르가레테와 프랑수아 1세의 모친 루이즈 드 사보이아 사이에서 원격으로 협상이 진행되었다. 7월에 두 부인이 캉브레에서 회담을 갖기 전에 많은 외교적 기초 작업들이 수행되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진행된 양측의 회담은 어떠한 형식에도 구애받지 않았다. 강인하고 지적인 두 여성은 최선의 협상 조건을 끌어내기 위해 단단히 결심한 상태였다. - P359

분명한 것은 그(카를 5세)가 교황의 대관식 주재를 바랐던 것의 이면에 한 가지 실제적인 고려 사항이 있었다는것이다. 자신의 대관식을 통해 동생이 로마인의 왕(신성로마제국 황제의 후계자)으로 선출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는 이 일이 조속히 진행되지 않을 경우 독일 내 자신의 적대 세력들이 다른 후보자를 선출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실제로 그의동생은 1531년 로마인의 왕으로 선출되었다. - P368

교황과 프랑스 왕은 공의회를 하나만 소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데 입장을 같이하고 그에 관해 의견을 교환했다. 프랑수아1세는 구교, 신교를 가리지 않고 독일의 제후 및 도시들과 긴밀한 접촉을 유지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을 상대로 음모를 꾸몄다. - P387

황제는 결혼 동맹을 통한 지속적인 평화를 위해 밀라노와 저지대 지역 가운데 어느 곳을 희생해야할지 고민했고, 스페인 중신들에게 자문을 구했다. 의견은 둘로 나뉘었다. 한쪽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세습 영토에 속하는 저지대 지역이아니라 전쟁의 원인을 제공함으로써 재원 고갈의 주범이 된 밀라노를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한쪽은 밀라노가 독일과 연결되는 중요한 통로이자 나폴리와 시칠리아 방어의 핵심이며 저지대 지역보다 스페인에 훨씬 더 유용하다는 입장이었다." 카를 5세는 저지대 지역을 지키는 쪽으로 결정했다. - P420

바오로 3세의 마지막 명령은 조반니 마리아 델 몬테, 즉 율리우스(율리오) 3세가 1550년 2월 말 그의 후임으로 선출되자마자 재확인되었다. 기분에 따라 변덕이 심했던 새 교황은 국정과 씨름하기보다는 느긋하게 사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특별히 자신의 가문을 위한 야심 같은 것도 없었고, 자신을 존중해주는 이상 파르네세 가문에 대해서도 적대적이지 않았다. - P434

카를 5세는 1554년 7월 25일 펠리페와 메리 튜더의 결혼에 맞춰 밀라노-이전에 했던 책봉은 무시하고와 나폴리를 펠리페에게양여했다. 펠리페는 나폴리 국왕 책봉에 대해서만 따로 기념식을 가졌다. 밀라노는 이미 자기 것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카를 5세는 펠리페와 상의하지 않고 몇 달 동안 더 이 나라들의 국정에 결정권을 행사했다. - P461

1555년 5월 금욕적인 개혁가이자 종교적 권위를 수호하는 데 매우열성적인 것으로 알려진-특히 스페인의 나폴리 지배와 카를 5세를싫어했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나폴리 추기경 잔 피에트로라파가 교황에 선출되었다. 바오로 4세는 모든 외국 세력이 축출되면 이탈리아가 더 나아질 것이라고 믿었는데, 스페인보다는 프랑스의 존재로 인한 폐해가 덜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프랑스의 두 왕자가이탈리아에서 한 명은 베네치아에서, 다른 한 명은 로마에서 교 - P474

육을 받고 각각 밀라노 공작과 나폴리 왕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옹호할 것이었다. 전임자들과 달리 그는 강대국들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고, 카를 5세와 펠리페에 맞서 기꺼이 프랑스 국왕 편에 설 준비가 되어 있었다. - P476

1530년대가 되면 장창병과 화승총병의 조합으로 유럽 각국의 군 전력에서 보병의 우위가 확고해지고, 스페인, 독일 그리고 이탈리아 화승총병들은1520년대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승리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6세기 초에 이처럼 비교적 갑작스럽게 효과적인 총기류가 등장한 것은 세 가지 요인 때문이었다. 첫째는 1480년대에 화승총 발화장치에서 일어난 기술 발전이었다. 초기 총기류가 그랬던 것처럼화승총도 엉덩이 부근에서 한 손으로 격발했는데, 기술 발전으로 어깨에서 발사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두 번째는 화약 성능이 개선되고가격이 싸졌다. 화약 가격은 15세기에 80%나 떨어졌고, 화약 성능의개선으로 사거리는 크게 증가하고 사격 속도도 훨씬 빨라졌다. 세번째는 독일 남부와 이탈리아 북부에서 대규모 화기 제조업이 발전했다. 이는 지리적으로 보았을 때 스위스 용병의 경쟁 상대로 란츠크네히트가 부상한 것과도 연결되었다 - P513

이탈리아 전쟁에서 교황의 참전은 유럽 전역에서 하나의 제도로서교황과 교황권이 인식되는 방식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교황이 세속적 목적을 위해 기독교 세력들을 상대로 능동적으로 전쟁을 일으켰다는 점, 그리고 때때로 자기 가문을 군주적 지위로 격상시키겠다는 목적을 위해 일으킨 군사 원정에 교회 재산을 유용했다는 점 등은 로마 교황청을 향한 환멸을 더욱 자극하여 신교 확산에 기름을 부었다. - P614

이탈리아는 나폴리와 밀라노가 스페인 왕가와 밀착하고, 프랑스 국왕과 황제가 계속해서 이탈리아 내부 문제와 이해관계로 얽히면서, 불가피한 수준으로 유럽의 국가 체제에 보다 긴밀히 얽혀 들어갔다. 특히 북부 이탈리아는 다시 한 번 유럽 열강의 전장이 될 것이었는데, 롬바르디아를 누가 소유하느냐가 핵심적인 전략적 관건이었다. 향후 수세기 동안 이탈리아 국가들의 운명은 스페인과 프랑스의 - P648

국왕 그리고 황제 사이에 체결되는 외교적이고 왕조적인 합의에 따라 결정될 것이었다. 크고 작은 이탈리아 국가들 사이의 관계망서그토록 중요한 요소였던 ‘보호‘와 ‘복종‘을 낳는 정교하게 맺어진 정치적 후원과 충성의 체제가 근본적으로 재구축되었다. - P649

1495년 3월, 루도비코 스포르차는 피렌체 대사에게 보낸 답신에서 "당신은 내게이탈리아에 대해 말하지만, 나는 그것의 얼굴을 한 번도 본적 없소"라고 말했다.23 1556년 10월, 로마의 영주이자 군인인 카밀로 오르시니는 베네치아 대사에게 "나는 프랑스에는 프랑스 사람이, 스페인에는 스페인 사람이, 그리고 이탈리아에는 이탈리아 사람이 있는것을 보고 싶소"라고 말했다." 사람들에게 이탈리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더욱 의식하게 만든 것은 외국의 지배 경험 그 자체라기보다는수천수만 명씩이나 되는 외국 병사들의 존재였을 것이다. - P656

이탈리아 전쟁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가 알프스 너머로확산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문화야말로 이탈리아인의 우위가 인정된, 그래서 그들이 스스로 위안을 삼을 수 있는 분야였다. - P660

이탈리아 전쟁이 불러온 모든 장기적 결과 가운데 가장 큰 파급효과를 낳은 것은 당연히 이탈리아반도의 많은 부분이 이제 외국 군주-이탈리아에 거주하지 않는ㅡ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 P671

이 새로운 질서에 대한 평가는 스페인 왕이 이탈리아에서 지배적인 세력이 되는 것이 전쟁의 고정된 결론은 아니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이루어져야 한다. 확실히 그 문제는 1529~1530년 카를 5세가 이탈리아를 방문했을 때까지도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였다-그시기 전후로도 그의 군대는 수세에 몰리는 경우도 잦았고, 그의 사령관들은 급료도 제대로 받지 못한 충분치 않은 병력으로 전선을 사수하느라 고군분투했으며, 병사들이 제대로 싸울 것이라 믿을 수 없어야전에 임하지도 못했다. 카토-캉브레지 조약으로 구체화된 전쟁의최종적 결과는 당시 이탈리아인이나 프랑스인, 심지어 스페인인이보기에도 이탈리아 주둔 스페인군이 거둔 확고부동한 승리의 불가피한 결과는 아니었다. 오히려 깜짝 놀랄 만한 이변으로 비쳤다. 이탈리아인들은 스페인 제국의 힘을 압도적이고 불가피한 것으로 여길 필요가 없었다. 이탈리아 내 스페인 세력의 토대는 이탈리아 전쟁 시기에 살았던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그다지 대단하지도, 탄탄해 보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 P6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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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리얄리 2025-06-30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에 댄 존스의 [중세인들] 읽을 때 이탈리아 전쟁을 종교개혁에 붙여놓았던 것을 보고 좀 의아해 했는데... 화가님이 그동안 올려주신 문장들을 다시 읽으면서 정치와 종교를 나눌 수 없었던 그 시기를 새롭게 생각해 보게 되네요. 감사합니다!

거리의화가 2025-06-30 21:49   좋아요 0 | URL
저도 이 책 읽으면서 말씀하셨던 부분을 잘 이해하게 되었거든요. 도움이 되신 것 같아 저도 기쁩니다.
 

아냐델로 전투는 이탈리아 전쟁에서 벌어진 많은 전투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전투 가운데 하나였다. 전투가 이루어진 방식 때문이 아니라 당시 입은 패배로 베네치아가 한 세기 넘게 이탈리아 본토에서 획득한 거의 모든 영토를 상실함으로써 공화국 역사에서 가장결정적인 순간의 도래를 알렸기 때문이다. 전투에 가담하지 않은 베네치아군의 주력이 온전히 남아 있었으나 사기가 크게 저하된 탓에, 베네치아는 주력부대의 보전을 위해 동쪽으로 퇴각을 명령했다. 이들은 시민들의 반대로 테라페르마의 주요 도시로부터 주둔을 거부당하다가 마침내 석호 지대에 있는 메스트레에 베네치아시를 방어하는 진지를 구축했다. 메스트레에 도착하는 동안 부대 병력은 탈영으로 크게 줄어들었다. - P197

그들은 종속 도시들의 방어를위해 병력을 분산 배치하기보다는 본 병력을 그대로 유지한 상태에서 베네치아시 방어에 주력하는 것을 우선했다. 또한 10년 전 밀라노공국의 도시 엘리트층이 그랬던 거처럼 1509년 당시 베네치아 종속도시들의 시민들도 외국 군주가 멀리서 종주권만 행사하고 자신들은사실상 자치를 누리는 특히 중요한 것은 자기들도 주변으로 확장하여 속지를 통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 P199

새 교황은 레오 10세로 불리게 될 조반니 데 메디치였다. 율리우스 2세보다 훨씬 젊었던 레오 10세는 그 정도로 호전적이지 않았으며, 외교 문제에 훨씬 더 미묘하고 가변적이었다. 그를 상대할 사람들은 그의 확고부동한 목표가 메디치 가문을 군주급 왕조로 격상시키는 것임을 곧 알게 되는데-피렌체를 지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 점을 제외하면 그는 의중을 읽기 힘든 인물이었다. 그가 교황의 자리에 앉음으로써 당연히 피렌체에서 메디치 가문의 위상은 강화되었고, 레오 10세는 피렌체의 외교 정책을 실질적으로 좌우했다. - P252

베네토에서는 전쟁의 어느 단계에서든 전투로부터 직접적인영향을 받지 않은 지역이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영토가 이쪽이든 저쪽이든 군대의 주둔을 경험했고, 어떤 곳은 해마다 겪기도 했다. 비첸차의 한 연대기 작가에 따르면, 아냐델로 전투가 벌어진 1509년부터 1517년 사이에 비첸차 정권은 36번이나 교체되었다. … 베네치아인들에게 전쟁은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드는경험이었다. 그들은 전쟁 자금의 압박 때문에 공화정에 자부심을 가 - P282

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혐오스러울 수밖에 없는 방식에 의존해야했다-실제로 그들은 정부 관직과 상원 의원직을 가장 높은 값을 부르는 사람들에게 판매했다. 베네치아인들은 이미 자신들의 해상 제국에 점점 더 큰 위협을 가하는 튀르크 세력과 공존하는 법을 배워야했다. 관건은 그들이 어디로 더 확장할 수 있는지가 아니라 그들이가진 것을 계속 지켜낼 수 있는지의 여부였다. - P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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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한국전쟁 75주년이 되는 날이다. 며칠 전부터 관련 책들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해서 책장을 확인하다 이 책을 발견했다. 당시 책의 제목과 소개글을 보고 이 책은 당장 읽지 못하더라도 사두어야한다 여기고 구입했었다. 이 책은 한국전쟁과 관련하여 일본, 중국, 미국, 그리고 콜롬비아의 입장에서 본 타자의 텍스트들을 다루고 있다.


내부인의 시선과 외부인의 시선은 다를 수밖에 없다. 하나의 사건이라도 누가 보느냐에 따라서 사건의 서술이 달라질 수 있는 지점을 확인하는 일은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 책에 서술된 텍스트들을 통해서 다양한 시선을 만날 수 있다. 특히나 문학에 약한 내게 한국전쟁 관련하여 다양한 문학 텍스트를 얻어가는 것은 매우 도움이 되었다. 


책을 읽으면서 읽고 싶은 책이 여럿 생겼다. 한꺼번에 다 읽으려면 곤란할테니 시간 날때마다 독서 계획에 끼워넣으면서 읽어봐야겠다. 일단 <맘브루>를 도서관에 상호대차해두었고 <스노우 헌터스>(원서도 함께), <전쟁 쓰레기>는 구입했다. <스노우 헌터스>는 이 책이 나왔을 때만 해도 번역서가 없었는데 읽으려니 어떻게 딱 나와주는지 참 절묘한 타이밍이 아닐 수 없다. <스노우 헌터스>, <전쟁 쓰레기>, <광장>(by.최인훈)은 이데올로기적으로 이분법을 강요받던 시기에 어느 한쪽을 선택하지 못하는 상황과 인물의 내면을 그리고 있는데 이를 위한 비교 텍스트로 읽어볼 작정이다. <맘브루>는 한국전쟁 관련하여 콜롬비아 작가의 시각은 접한 적이 없어 읽어보고자 하기 위해 골랐다. 


일종의 길라잡이 역할을 하는 책이라 볼 수 있겠다. 





묵혀 두었던 <역사비평>과 <역사문제연구>도 읽기 시작했다. <역사비평> 2025년 여름호는 진짜 대박이다. 온통 눈에 띄는 내용이 가득하여 눈과 뇌가 함께 즐거울 따름이다. 일단 조선공산당 100주년 특집 내용과 윤석열 탄핵 관련, 최근 <반일종족의 역사내란>이란 책을 또 다시 펴낸 이영훈의 책에 대한 특별 기고가 실려 있다. 브루스커밍스 다시보기 기획도 있다. 

<역사문제연구>는 최근 읽었던 이연식 선생님의 책에 대한 좌담회 내용과 한국 자본주의 개발 시대를 1980년대까지 확장하는 의미에 대한 특집 내용이 눈에 띄었다. 보통 한국 자본주의가 눈에 띄게 발전한 시기를 꼽으라면 박정희 시기를 꼽는 경우가 많아서 1960~70년대 내용은 많이 연구가 되어 있는 반면 1980년대는 그 연구가 빈약하다. 주로 1980년대는 정치, 문화적으로 치우쳐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향후 1980년대 이후의 한국 자본주의의 역사에 대해서도 좀 더 깊이 있는 연구가 이루어졌으면 한다.

(역사문제연구는 서점에서 더는 검색이 되지 않는다ㅠㅠ)



아! 마무리는 다시 한국전쟁 이야기로! 정병준 선생님의 <한국전쟁>도 미루지 말고 읽어봐야겠다. 읽을 책은 많은데 눈은 뻑뻑하고 이거원ㅎㅎㅎ 


군비 증강의 시대다. 한쪽에서 (상대가 쳐들어올지 몰라) 군사력을 늘리면 당연히 상대도 군사력을 늘릴 수밖에 없다. 이런 생각은 결국 평화로운 시대가 요원하게 만드는 것 같다. 끊임없이 상대를 경계하고 대비해야만 하는건지 답답하고 피로하다. 마무리가 이상해져버렸지만 어쨌든 내가 현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읽고 쓰는 것뿐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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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군은 4월 28일 체리뇰라에서 만났다. 먼저 도착한 곤살로는콜론나의 조언에 따라 지친 병사들을 독려하여 경계선을 따라 호를 깊게 판 뒤 퍼올린 흙을 이용해 한쪽 면에 둑을 쌓아올렸다. 그는이 둑 뒤에 군대를 배치했는데, 중앙에 란츠크네히트 부대를 배치하고 화승총arquebuse 으로 무장한 소총수 부대로 엄호하게 했다. 좌익에는 중기병 300명을 배치하고 역시 화승총부대로 엄호했다. 그는 또다른 화승총부대를 포병대와 함께 배치한 뒤 우익에 800명의 경기병부대를 배치했다. 그리고 자신은 후미에 배치한 400명의 중기병과함께 대기했다. 저녁이 시작될 무렵 도착한 프랑스군은 즉시 공격할것인지를 두고 지휘관 사이에서 이견이 발생했다. 달레그르는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스위스 용병부대의 지휘관 상듀 영주도 부하들이싸우고 싶어 안달이 나 있는 상태라고 말했다. 느무르는 숙고 끝에 마지못해 진격을 명령했다. - P145

오르시니 가문은 공히 중기병 500명을 제공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이 계약으로 곤살로가 얻은 가장 중요한 지휘관은 기백이 넘치는 바르톨로메오 달비아노였다. 그는 곤살로에게 스페인군도 부교를 설치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그는 직접 감독하여 프랑스 부교보다몇 마일 상류에 스페인군 부교를 설치했다. 12월 28일, 3,500명의 스페인 보병 선발대와 전마 몇 기를 이끌고 강을 건넌 것도 달비아노였다. 그 뒤를 독일 창보병 2,000명을 이끄는 곤살로와 경기병 200명을지휘하는 프로스페로 콜론나가 따랐다. 후위에서는 중기병 300명과디에고 데 멘도사가 지휘하는 5,000~6,000명 규모의 또 다른 보병부대가 프랑스의 교두보를 봉쇄할 계획이었다. 불의의 기습을 당한 프 - P154

랑스군은 무질서한 상태로 밀렸다. 산산이 흩어지고 사기가 저하된나머지 보병들이 병목 상태의 좁은 다리를 통해 퇴각하는 것을 엄호하던 몇몇 중기병부대의 방어 대열을 제외하면, 프랑스군은 제대로된 역습을 시도조차 못했다. 선박에 적재된 다수의 화포들도 폭풍으로 가라앉았다. 스페인군은 이틀 만에 가에타에 도착했다. - P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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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5-06-25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쟁사, 읽고 싶은데 7백 쪽이 넘는 책이라니... 엄두가 안 납니다.
이렇게 기록하며 읽으시면 방대한 분량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저도 폭염으로 지루할 것 같은 올여름을 잘 지내기 위해 책을 하나 택해 필사를 시작했어요. 전체 필사는 아니고
부분 필사요. 책 제목은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 입니다. 오늘도 조금 읽었는데 재밌어요.
다른 책도 읽으면서 천천히 필사해 나갈 예정입니다. 이 책을 완독하는 날 여름이 물러나서 시원한 바람이 불었으면 좋겠어요.

거리의화가 2025-06-25 13:25   좋아요 0 | URL
두꺼운 책일수록 그때 그때 사진을 찍어두거나 밑줄긋기해두어야(북플 서비스 이럴 땐 참 유용하죠) 리뷰 쓸때도 겨우 쓸 수가 있더라구요. 사실 내용을 정리하면서까지 하면 더욱 좋은데 저도 요새는 매일은 못하고 있습니다.
부분 필사 좋은데요? 저도 필사하고 싶은데 어떤 책을 선정해서 필사를 해야 하나 늘 고민이 되더라구요. 필사하시면서 마음도 돌아보고 그러다 보면 가을이 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건강하게 여름 나시길 기원합니다^^
 

역사가들이 십자군 원정을주도하겠다는 샤를 8세의 생각을 실현 가능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지는, 중세 말에 십자군 원정이라는 생각이 실효적인 지지를 불러일으킬 만큼 지속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한 그들의 평가에 어느정도 달려 있다. 또한 나폴리 왕국이 정말로 강력한 튀르크 정벌군의출발지로 최상의 기지였느냐에 대한 평가에 달려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를 이탈리아로오게 한 것은 나폴리 왕위에 대한 관심이었지 십자군 원정을 떠난다거나 샤를마뉴를 모방하겠다는 환상은 아니었다.
또한 샤를 8세는 자신의 군대와 귀족들을 이끌고 적극적인 군사작전에 나설 기회를 무척이나 열망했다. 그는 군사 문제와 전쟁의 - P40

조직 및 수행에 관해 상당한 정도의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이탈리아 원정이 야기할 문제들을 과소평가했으며, 보고받은 여러 상반된 의견들을 고루 검토했을 리 없을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탈리아 문제에 대한 샤를의 관심을 부추긴 조언자들 대부분은 어떤 식으로든 본인들의 이익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에반해 다수의 대신들은 나폴리 왕국 침공을 위한 어떠한 군사 원정도, - P41

특히 왕이 직접 통솔하는 원정에 대해서는 더더욱 반대했다. 오랜 준비와 논쟁을 거친 후, 최종적으로는 샤를 8세의 결단으로 원정이 단행되었다. - P42

전투는 중기병의 주도로 치러졌고, 이탈리아군은 수적 우위를 이용하지 못했다. 그러나 프란체스코 곤차가는 프랑스군을 거의 패배 직전까지 몰고 갔다. 그의 명성은 적극적인 자기 미화로 점철된 이야기를 통해 크게 강화되었다." 이탈리아인들은 공식적으로는 포르노보전투를 승리-프랑스인들이 보기에는 어처구니없게도로 기념했지만, 사적으로는 많은 이들이 그렇게 확신하지 못했다. -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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