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전쟁 1494~1559 - 근대 유럽의 질서를 바꾼 르네상스 유럽 대전
크리스틴 쇼.마이클 말렛 지음, 안민석 옮김 / 미지북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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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중세(근세까지도)까지의 역사에서 이탈리아의 지분이 크다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중세의 역사에서 십자군 전쟁, 종교 개혁, 르네상스까지 이탈리아는 늘 중심에 있었으니까. 서양사를 잘 알지 못해서 틈날 때마다 공부 중이지만 여전히 어렵다. 그래도 서양 중세의 역사(보다는 미술 쪽인 듯)에서 그나마 가장 흥미를 느끼는 부분은 르네상스의 시기인데 이 당시의 미술가들을 유독 좋아하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화가의 그림에는 신이 아닌 인간이 등장했고 인간의 실제 모습처럼 그려졌다. 이탈리아에 갔을 때 라파엘로의 그림을 보았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가 없다. 화가란 그림의 주체에 생동감을 부여해야 함을 그가 그린 그림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되었달까. 살아 움직이는 그림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던 느낌을 받았다. 


이 책은 15세기(1494년)에서 16세기(1559년)에 걸쳐 이탈리아 반도에서 일어난 60년간의 전쟁을 다루고 있다. 그렇다면 이 시기 이탈리아에서는 왜 전쟁이 일어났는가. 긴 십자군 전쟁이 끝나고 난 뒤 이탈리아 반도에 있었던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는 해상 왕국으로 발돋움하며 세력을 확장중이었다. 이때 이탈리아 왕국에 눈독을 들이며 권리를 주장하는 여러 세력이 있었다. 프랑스 왕과 스페인 왕은 나폴리의 왕위를 두고 계승권을 주장했고 대가 끊긴 밀라노 공국의 왕위를 두고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당시 북부와 중부 이탈리아 영토의 많은 부분이 제국의 봉토였음)이 격돌했다. 당시 이탈리아는 여러 왕국으로 나뉘어 있었다. 대표적으로 나폴리, 밀라노, 피렌체, 베네치아, 그리고 교황령의 큰 도시 국가가 있는가 하면 이 밖에도 시에나, 루카, 제노바, 페라라를 비롯한 수많은 소국이 존재했다. 소국들은 서로 동맹을 맺고 연합하여 대국을 상대하고 방어했다고 한다. 

주요 참전국은 프랑스, 스페인, 밀라노 공국, 나폴리 왕국이었다. 여기에 스위스, 독일, 네덜란드, 발칸반도의 국가의 군인들이 참전하며 전쟁 참전국 범위가 확대되었다. 


전쟁의 흐름을 바꾼 몇 차례의 전투가 있다. 


1503년 벌어진 체리뇰라 전투는 프랑스군의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프랑스 기병과 스위스 창병의 공격에 맞서 스페인은 화승총병으로 맞서며 승리했다. 이 전투는 화승총을 사용하여 승리한 최초의 유럽 전투로 평가되고 스페인의 지휘관이었던 곤살로 데 코르도바였는 위대한 지휘관으로 회자되었다.

1508년부터 1516년까지 이어진 캉브레 동맹 전쟁은 베네치아를 상대로 일어났다. 반베네치아 연합에는 프랑스, 스페인, 신성로마제국, 교황령 등이 동맹에 포함되었다. 전쟁 기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 이 전쟁하는 동안 동맹관계가 자주 바뀌어 전쟁의 흐름이 복잡했다. 캉브레 동맹 전쟁 중 아냐델로 전투는 1509년 벌어졌다. 전투에서 베네치아가 프랑스군에 지면서 이탈리아에 소유하고 있던 상당수의 영토를 토해내야 했다. 

1512년 벌어진 라벤나 전투는 프랑스군 vs 스페인-교황군 간에 이루어졌으며 프랑스군이 승리했다. 스페인은 교황을 끌어들였지만 프랑스군에 승리하며 참패의 쓴맛을 봐야했다. 그러나 프랑스군도 지휘관인 가스통 드 푸아가 전투 중 사망하면서 그 빛을 퇴색시켰다. 

1515년 마리냐노 전투는 캉브레 동맹의 마지막 전투로 프랑스군과 스위스군이 격돌했다. 스위스군은 당시 유럽 최고의 보병으로 평가받았기에 프랑스군은 수세에 몰렸다. 그러나 이때 베네치아군이 프랑스군에 합류하면서 프랑스군이 최종적으로 승리했다. 프랑스의 지휘관은 이제 막 국왕이 된 프랑수아 1세였고 그는 이 전투로 자신의 능력을 만방에 알렸다.

1525년 파비아 전투는 신성로마제국군의 압승으로 끝났다. 프랑스는 군이 거의 전멸했을 뿐 아니라 국왕인 프랑수아 1세가 포로가 되는 수모를 겪었다. 전투의 결과 프랑스는 나폴리와 밀라노, 제노바에 대한 권리를 포기한다는 서명을 해야 했다. 


전쟁에 가담 인물도 많고 여러 국가가 엮여있다 보니 솔직히 많이 복잡하다. 게다가 짧지 않은 기간의 전쟁인 만큼 여러 차례의 전투가 벌어지기 때문에 넋놓고 보면 흐름을 놓치기 십상인데 책에서 전투의 배경과 전개 과정, 결과를 충분히 설명해주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는 없다. 

책의 앞부분에 전쟁의 주요 등장인물인 스페인-합스부르크(막시밀리안 1세, 카를 5세), 프랑스(루이 12세, 프랑수아 1세, 앙리 2세), 교황령(율리우스 3세, 레오10세, 바오로 3세) 뿐 아니라 그 밖의 인물 중 체사레 보르자, 루도비코 마리아 스포르차, 피에로 데 메디치, 샤를 드 부르봉, 루도비코 마리아 스포르차 등 중심 인물들의 사진이 실려 있어 도움이 된다. 

또한 이탈리아 지도를 전체, 북부, 중부, 남부의 부분도로 나누어 놓아 독서 중 관련 지명이 나올 때마다 찾아볼 수 있어 도움이 되었다.


이처럼 이탈리아 전쟁은 서유럽 강대국들이 충돌하며 발생했다. 결국 승리는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가문이 차지했다. 그 결과 이탈리아에서 스페인 황실의 입김이 강해졌다. 전쟁 기술적으로는 보병의 강화, 장창과 화승총의 확산, 대포와 요새의 발전, 직업 군인 제도의 도입 등이 이루어졌다. 또 이탈리아 전쟁에의 교황의 참전은 유럽 전역에서 하나의 제도로서 교황과 교황권이 인식되는 방식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교황이 세속적 목적을 위해 기독교 세력들을 상대로 능동적으로 전쟁을 일으켰다는 점, 그리고 때때로 자기 가문을 군주적 지위로 격상시키겠다는 목적을 위해 일으킨 군사 원정에 교회 재산을 유용했다는 점 등은 로마 교황청을 향한 환멸을 더욱 자극하여 신교 확산에 기름을 부었다(이는 종교 개혁의 빌미가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전쟁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가 알프스 너머로 확산되어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는 데 기여했다. 이는 향후 종교 개혁, 과학 기술의 발전과 맞물리며 서양 근대 문명의 기틀을 확산시켰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띤다고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이 전쟁이 중요한데 왜 이제야 제대로 된 한 권의 책으로 정리되어 나왔는지 의아할 따름이었다. 이탈리아 전쟁의 역사를 읽으니 비로소 십자군 전쟁과 종교 개혁, 르네상스까지 비로소 한 흐름으로 정리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여러 모로 구입하고 읽기를 잘한 책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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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과 타자의 텍스트
이정현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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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적인 역사‘에는 수많은 영웅이 존재하고, 전황 분석과 숫자가 가득하다. 아울러 그것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객관적인 자료도 넘쳐난다. 그러나 기억의 전승은 객관적인 사실들을 그대로 전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 모든 기억의 전승은 ‘이야기‘와 ‘이미지‘를 동반한다. 국가가 관리하는 기억에는 개별적인 인간이 감내해야 했던 고통은 쉽게 잊힌다. 특히 국가의 관리 방향과 다른 기억일수록 빠르게 부정되고 소거된다. - P8
이야기와 이미지는 어떤 방식으로 생성되는가. 문학과 영화 등의 텍스트가 가장 적절한 예시일 것이다. ... 충분히 기억되지 못한 그 결여를 채우려는 노력이 동반되지 않은 채 서술되는 기억은 과거를 단조로운 이미지로 박제할 뿐이다. - P9~10

이 책은 한국전쟁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국가들의 당시 역사적 상황과 이를 기록한 문학, 영화 등의 텍스트를 다룬다.

한국전쟁에 직접 참전하지 않았지만 일본은 2차 세계대전 종전 당시부터 시작된 미소의 갈등으로 전후 세계질서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미국의 입장에서 끌어들여야만 하는 국가였다. 소련이 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참전하며 아시아에 관여하고 미국이 힘을 실었던 국민당이 공산당에게 밀리면서 미국은 소련과의 힘의 싸움에서 다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일본은 아시아를 침략한 제국주의적 과오를 잊고 새 출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도 냉전 초기에는 일본 사회를 비판적으로 응시하며 의견을 내는 지식인들이 있었고 직접 운동에 뛰어든 청년들도 있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동력은 떨어졌고 비판의 목소리는 지속되지 못했다.
오에 겐자부로 초기 작품은 전후 일본 청년의 공허함을 묘사했다면 오구마 에이지, 존 다우어 같은 학자들은 전후 일본 사회의 변화에 주목했다. 일본에 강제로 편입된 오키나와는 태평양전쟁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곳이다. 이후에도 미국의 기지로 전용되면서 상당한 인적, 물적 피해를 입었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일본에 지배당하고 이후에는 미국에 의해 여러 피해를 입었기에 특히나 우리와 비슷한 역사적 시간을 거쳤다. 때문에 관련 텍스트를 읽어보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될 것같다.

중국은 한국전쟁을 항미원조전쟁이라 부르며 매해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당시 중국 국민들에게 전쟁이 미국과의 싸움에서 밀리지 않고 버텨 자긍심을 심어준 계기가 되었다면 오늘날에는 미중 간의 밥그릇 싸움으로 자국민을 끌어모으는 도화선이 되고 있다. 그러나 한국전쟁 포로 협상에서 중국군의 2/3 이상이 타이완행을 선택했다는 사실은 중국 정부를 불편하게 했고 (당연히) 공식적으로 이 진실을 거론하지 않았다. 하진의 <전쟁쓰레기>는 거제수용소에서 친공 포로와 반공 포로로 나뉘어 있던 상황에서 국민당 장교 출신이던 주인공이 선택의 기로에 놓이는 상황에 대해 다루고 있다. 최인훈의 <광장>과 비슷한 구도에서 주인공이 어떤 선택을 하고 상황이 전개될지 궁금하다.
중국의 참전으로 타이완은 미국에 의해 보호받을 수 있었던 측면이 있다. 그러나 그 후에 중국은 타이완을 여러 번 도발함으로써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타이완은 일본의 지배를 받았고 이후에는 미국의 보호를 받으며 냉전기를 거쳤기에 우리와 비슷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한국전쟁을 다룬 타이완 텍스트는 천잉전의 <충효공원>에 대해서만 나와 있는데 그만큼 국내에 번역된 작품이 별로 없다. 다만 최근 타이완 작가들의 작품이 국내에 활발하게 소개되고 있다는 점은 고무적인 것 같다.

2차 대전 후부터 서서히 시작한 미소간 대립은 소련이 원자폭탄을 개발하는데 성공하고 중국 내전에서 마오쩌둥이 승리하면서 미국은 위기 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여기에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미국은 곧바로 전쟁에 개입한다. 소련은 암묵적이지만 적극적으로 한국전쟁에 개입했고 중국은 많은 병사를 실전에 투입하면서 전쟁이 장기화되는데 큰 역할을 했다. 한국전쟁은 무엇보다 미국의 매카시즘 광풍과 엮이면서 반공 정치 투쟁을 심화시켜 정치계 뿐 아니라 문화, 예술업계 등에 몸담고 있던 사람들이 ‘나는 공산당원이 아니에요.‘란 사상 검증을 강요받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렇게나 적극적으로 전쟁에 개입한 미국 작가의 텍스트에 정작 한국전쟁은 갑자기 떠밀려 휘말린 전쟁처럼 부차적으로 다뤄졌다. 필립 로스의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닥터로의 <다니엘서>는 매카시즘의 광풍을 잘 그린 텍스트라고 한다.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한 경험이 있는 제임스 설터스의 <사냥꾼들>은 공중에서 한국전쟁을 겪은 미군의 이야기를 그린다. 토니 모리슨의 <Home>은 전쟁의 상처 뿐 아니라 인종 차별 문제까지 함께 다룬다. 제인 앤 필립스의 <Lark & Termite>은 노근리 학살 사건을 다룬다니 관심이 가는데 둘 다 번역서는 찾아보니 없는 것 같아서(누가 번역 좀) 아쉽다. 폴 윤의 <스노우 헌터스>는 한국전쟁을 직접 겪은 세대가 아닌 이후 세대가 이방인의 시선에서 한국전쟁을 다루고 있는 텍스트다.

이 밖에도 한국전쟁 관련하여 프랑스, 독일, 영국, 콜롬비아의 역사와 문학 텍스트를 다룬다는 것이 흥미롭다. 특히 콜롬비아는 남미에서 유일하게 참전한 국가다. 당시 경제적 상황이 좋지 않았던 콜롬비아는 미국이 마셜플랜으로 유럽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것처럼 자신들에게도 그렇게 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군사적인 요구만 늘어나자 국민들의 반미 감정이 고조되었다고 한다. 이에 미국이 경제 문제 해결을 협력하는 제스쳐를 취한다. 콜롬비아는 한국전쟁에 참전함으로써 미국과의 관계 개선 및 국가 안정에 도움을 받고자 했다. 그러나 전쟁에 참전했던 병사들은 신체적, 정신적 후유증에 시달렸고 정부의 지원도 딱히 없어서 빈곤에 내몰렸다고 한다. 모레노 두란의 <맘브루>가 번역서로 나와 있는데 읽기는 쉽지 않을 것 같지만 도서관에 대출해서 조만간 읽으려고 한다.

몇 작품만 언급했지만 이를 비롯하여 많은 텍스트들을 다루고 있다. 

공식적인 역사에서 언급하지 않은 많은 목소리들이 이처럼 텍스트에 기록되어 있다. 물론 이들의 언급과 기억도 축소, 과장되어 왜곡될 수 있다는 점은 감안해야 할 것이지만 물질적인 숫자로만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한계를 보완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역사라는 점은 분명해보인다. 묵혔던 책을 이제야 끝내서 홀가분한데 읽을 책은 더 많아졌다. 즐거운 비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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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5-06-26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즐거운 비명이 들리는 것 같아요! 저도 궁금해지는 책이 많네요. 전 요즘 책을 거의 안 읽고 있지만…

거리의화가 2025-06-26 21:13   좋아요 1 | URL
수하 님도 관심이 갈만한 책이 많을 것 같아요. 책이야 읽을 수 있는 마음이 들 때 읽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몸과 마음이 준비가 되어야 책도 읽히는 것 같아서요. 축축한 장마 기간인데 건강 잘 챙기시길^^

건수하 2025-06-27 00:21   좋아요 0 | URL
앉아있을 수 있는 시간이 짧다보니 누워서 폰을 보게 되네요 ^^ 화가님 말씀대로 몸과 마음이 다 준비된 때가 오겠지요? :)

희선 2025-06-29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전쟁도 세계사에 들어가기도 하겠습니다 한국전쟁으로 다른 나라는 어땠는지를 볼 수 있는 책도 있군요 가깝든 멀든 세계는 이어져 있기도 하니 영향이 아주 없지는 않겠습니다 그런 걸 생각하면 자기 나라만 생각하지 않아야 할 텐데... 이런 생각해도 하는 건 거의 없네요 거리의화가 님은 관심을 가지고 책을 만나시는군요

유월 하루 남았습니다 2025년 반이 다 가겠습니다 거리의화가 님 여름철 건강 조심하시고 하루 남았지만, 칠월 반갑게 맞이하세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5-06-30 21:46   좋아요 0 | URL
요즘은 한국사라도 주변 국가와의 역사를 다루며 관련성을 짓는 시도를 많이 하는 것 같아요^^ 일국사를 읽는 것만으로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죠.
6월도 이제 몇 시간 남지 않았습니다. 희선 님도 7월 반갑게 맞이하시기를요!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
홍한별 지음 / 위고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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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의 일은 무엇보다도 침묵에 목소리를 부여하는 일이다. 첫째로 나의 언어가 아니라서 들리지 않던 침묵하는 말이 들리게 한다. 번역가는 에코처럼 숲속 깊이 숨어 있어 눈에 보이지 않고 나르키소스가 먼저 입을 열지 않으면 말을 하지 못하지만, 나르키소스의 혼잣말을 멀리,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전한다. 또 번역가는 원저자의 언어만 번역하는 게 아니라 침묵까지 번역한다. 번역은 언어의 빈틈을 다룬다. 단어와 단어 사이에서 발생하는 의미를 읽고, 그 의미를 번역된 글의 여백에 눈에 보이지 않게 다시 침묵으로 담는다.

한 분야에서 꾸준히 자신의 길을 밟아나가는 사람들에게 눈길이 가는 편이다. 작가는 번역가의 길에 들어선 후 20여 년 넘게 꾸준히 그 일을 해왔다. 그 열정과 노력만으로 이미 대단한데 그 일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결코 계속 할 수 없었을 거라고 말하는 작가의 고백이 인상적이었다.

작가가 어떻게 해서 번역가의 일을 하게 되었을지 궁금했다. 물론 자신이 선택한 이유도 있겠지만 역시 주변에 영향을 받을 만한 사람이 있었다. 아버지가 한국전쟁 당시 미군과 부딪쳤을 때 잡혀갈 뻔한 위기에서 자초지종을 영어로 설명하여 자신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을 구했다는 이야기였다. 그 일로 아버지는 오히려 관련 일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니 그야말로 좋은 기회가 된 셈이다. 그 시절 아버지의 안목과 혜안이 탁월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자신에게 필요한 일이 무엇인지 자구적으로 찾아 나가셨던 것이니까. 아무튼 놀라웠다.

번역가는 유독 호평보다는 혹평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번역이 무난하거나 좋을 때는 별 말을 하지 않지만 그 반대라면 비판의 잣대를 들이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번역서에는 번역에 관련된 평이 상당수를 차지하니 번역가들은 다른 번역가나 독자의 의견에 민감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번역가는 늘 직역과 의역 사이에서 고민하며 선택의 기로에 선다. 발터 벤야민 같은 경우는 원문에 대한 직역을 해야 한다는 쪽이었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원문이 어떤 장르에 속하느냐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문학 같은 경우는 메시지 전달에 주력해야 하는 만큼 독자의 이해에 맞춰 의역 쪽에 가깝게 번역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면 문학(특히 시)은 직역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제국주의 시기를 거치면서 근대화를 경험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문화를 수용하는 입장에서 번역의 원문 충실성을 중요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앞서 말한대로 온라인 서점이 성장하면서부터는 독자 리뷰나 블로그 등을 통해 오역 논쟁이 벌어지니 이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AI번역까지 등장했다. 물론 AI 번역에 대해서는 작가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기계 번역은 방대햔 양의 통계 데이터를 바탕으로 무난한 번역은 가능할지 몰라도 특별하고 유일한 번역이 나오기 어렵다는 사실 말이다.

나는 시대에 따라 문화가 변하는 것처럼 언어도 멈춰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번역서도 시대의 요구사항에 따라 맞춰 변화해야 한다고 여긴다. 탈식민주의 이론가들은 지금까지의 번역 연구가 서로 다른 언어 사이의 불평등한 권력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을 중대한 문제로 지적했다. 실제로 식민화 과정에서 번역이 지배자의 세계관이나 통치 체계를 강제하고 식민지의 언어와 문화를 왜곡하거나 삭제하는 등의 역할을 했음에도 번역 연구는 그 점을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
문화의 다양성이 요구되는 시대에 예전처럼 위계에 따른 묘사를 답습한다면 그 번역서는 낡은 것으로 치부될 것이다.
이제는 한국어 책이 외국에 번역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를 번역한 데버라 스미스가 논쟁에 휘말린 것처럼 과거의 이론이나 가부장적인 사고를 담고 있는 책을 번역할 때는 오늘날에 맞춰 변화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언어의 본질은 변화다. 언어는 고정되지 않는다.

번역에 대한 역사(번역의 방법에 대한 차이), 번역가의 입장에 대한 이해 등을 충실히 담고 있다. 번역서를 많이 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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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전선의 사람들 - 후쿠시마 원전 작업자들의 9년간의 재난 복구 기록
가타야마 나쓰코 지음, 이언숙 옮김 / 푸른숲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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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오염수를 저장한 탱크 부지 사진을 보고 놀랐다. 규모가 그리 컸다니.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나고 후쿠시마 제1원전에서 대규모 방사능이 누출된지 어느덧 10년도 훌쩍 지났다. 심지어 일본이 원전 오염수 방류를 한다고 했던 것도 몇 년이 훌쩍 지났지만 제대로 된 대응 및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책은 후쿠시마 제1원전 누출 사고를 규명하기 위해 장장 9년간 잠입 취재를 바탕으로 한 르포르타주다. 작가는 도쿄신문 사회부 기자로 끈질기게 사고를 추적하며 그곳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을 수차례 만났다.
출간되고 얼마 안 되서 이 책을 구입했는데 이제야 이 책을 읽게 되었다니 좀 부끄럽지만 이렇게라도 읽게 되어서 다행이다.

사고 후 현장을 찾은 사람들은 생각 이상으로 참담한 광경에 혀를 내둘렀다. 폐선 등이 엿가락처럼 늘어져 있고 탱크 내부는 녹아내려 폐허와 다름 없었다고.

취재기를 보고 있자니 자꾸만 한숨이 새어나왔다. 한국에서 일어난 각종 재난 사고의 재현을 보는 듯한 기시감이 들었던 것이다. 제대로 된 대응 메뉴얼이 없어 우왕좌왕하는 원청, 그나마도 초반에는 억지일지 모르지만 사과라도 했다면 갈수록 철판을 깔고 자신의 살 길을 찾아가는 도쿄전력과 정부의 행태가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피해를 본 건 결국 삶의 터전을 잃고 유리되어 흩어진 사람들과 도쿄전력 근로자, 하청 근로자들이다. 피해를 그나마도 복구할 수 있었던 것은 발벗고 나선 자원봉사자들과 근로자들의 노력 덕분이었다. 근로자들은 각종 사고에 노출되었고 가족들과도 떨어져 긴 세월을 지냈다. 개인적으로 특히 고향을 등지고 떠나 가족들과도 떨어져 지내야 하는 근로자의 삶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그럼에도 그들이 그 일에 발 벗고 나선 것은 정말이지 큰 용기가 아닐 수 없다. 오래 떨어져 지내다 가족들과도 소원하게 되어 결국 결단을 내려 원전 근로자를 그만둔 경우도 있었다.
작업자들은 여러 모로 시달렸다. 공기가 통하지 않는 방호복에 마스크에 두겹세겹 장갑을 끼고 각종 장비를 했더라도 그들의 체내외에 피폭이 누적되었다. 그들은 누적되는 피폭량에 민감했는데 피폭한계치를 넘어서는 순간 회사에서는 나가라는 소리를 듣게 되기 때문이다. 정작 쓸때는 급하게 쓰면서 버려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피폭에 노출되니 솔로는 결혼도 꺼려질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는 불면증에 우울증, 번아웃, 알코올 중독, 부상, 사고까지 이어졌다.

대규모 방사능이 누출된 상황에서 사고 수습을 위해 발벗은 사람들은 과연 어떤 마음으로 참여한 것일까 궁금했다. 특히 나는 한 인터뷰 참여자의 사연이 가장 공감되었다. ˝전기를 쓰면서도 원전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어요. 그냥 공기 같은 거였죠. 나 자신이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이기도 하달까?˝ 후쿠시마 지역은 수십 년전부터 원전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민들 중 일하는 근로자가 많은 지역이었다. 원전과 함께 살아나간다고 해도 무방한 지역이었기에 그들에게 원전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공간이었을 것이다.
사고 수습을 지휘한 사람 중 ‘요시다 소장‘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그는 2010년 제1원전 소장으로 취임해 사고가 터진 뒤에는 사고 현장을 선두지휘하며 독려했다. 사고 다음 날 원자로 노심 용융(녹아서 섞임)으로 통제 불능의 위기가 닥치자 그는 결단을 내려 냉각수 공급이 끊긴 원전 1호기에 해수 주입을 시작했다고 한다. 윗선의 지시가 내려오기까지 기다렸다가는 더 큰 사고를 맞이할 수도 있었다. 일부 비판도 받았으나 주변 사람들은 요시다 소장이 아니었으면 더 심각한 상황을 맞이했을거라고 입을 모아 말했다. 게다가 그는 현장 작업자들을 하나 하나 다 챙긴 마음 따뜻한 사람이었다.

사고 후 1~2년이 흐르기까지는 그나마도 언론에서 보도가 되고 국제적으로도 관심이 있었지만 2013년 이후가 되면 관련 보도도 줄어든다. 작업자들이 사고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고 자신들도 잊혀져가는 것에 대한 불안감을 토로하는 것에 마음이 아팠다.
정부는 도쿄, 후쿠시마의 일상화를 외치며 작업자들의 보상 규모를 줄여나간다. 작업 중 일어난 작은 사고나 부상은 언론에 보도조차 하지 않고 병원으로 호송되어야만 발표했다. 그나마 헬기 이착륙장이 생겨서 부상자 호송을 원활하게 할 수 있게 된 것은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그전에는 러시아워를 뚫고 다른 지역의 헬기 이착륙장까지 이동해서 병원으로 환자를 이송해야만 했다).
도쿄전력 임원은 업무상 과실치사죄로 기소되었으나 최종 무죄를 선고받는 등 책임자들은 제대로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후쿠시마 제1원전 가동이 중단되고 나서 다른 원전들도 모두 가동을 중단했었으나 이마저도 시간이 지나면 하나 둘 원전이 재가동된다. 후쿠시마 제1원전 폐로까지 30~40년을 잡고 있던데 세부 작업 기한이 하나 둘 늦어지고 있는 마당에 솔직히 현실 가능한 플랜인지 모르겠다.

사고 초반부터 시작해서 2019년에 이르기까지 피해 복구가 어떻게 진행되었고 그곳에 몸담았던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잘 들여다볼 수 있는 책이었다.
그리고 앞부분에 제1원전 부감도와 조감도, 부지 내부 등을 비롯한 각종 사진들이 이 책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현재진행형이라고 했던 누군가의 말이 머리를 울렸다. 나는 원전은 가급하면 운영하지 않아야 한다는 탈원전의 입장이었는데 그곳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을 생각하니 현실적으로 이를 위한 타개책은 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방향은 탈원전으로 가는 게 맞겠지만. 대한민국은 과연 원전의 안전에 대한 대비를 하고 있는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도 이 일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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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천일기 - 세계의 중심, 북경을 가다 서해문집 오래된책방 17
조헌 지음, 동아시아비교문화연구회 옮김 / 서해문집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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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을 간 사신인 조헌의 여정을 담은 기행문이다. 누가 갔는지를 보지 않고 북경에 간 기록물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청이 들어선 이후 양국 간의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졌던 시기라고 여기기 쉽다. 그러니까 북학파 등이 활동했던 시기다. 그러나 주인공은 조헌으로 선조 때 활동했던 관료다. 당시는 명과 조선의 조공-책봉 관계가 철저히 지켜지던 때라는 점이 중요하다. 

조헌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다고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문인 출신의 관료다. 그가 어떤 관료였고 어떤 족적을 남겼는지 지식이 별로 없는 상태에서 이 기행문을 읽는 일이 꽤나 도움이 되었다. 그가 만나는 사람들이나 교류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그의 삶을 간접적으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조헌이란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해보자. 그는 학문적으로는 이이를 계승했으며 정치적으로 자기 주장이 강했던 쪽에 속했던 것 같다. 소위 바른 말을 했다가 눈 밖에 여러 번 났다고. 그의 동료들조차 이러다 무슨 일 나겠다고 걱정을 했을 것 같다. 그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격문을 지어 군사를 모집했고 문인들과 함께 각종 전투에서 왜구를 물리쳤으나 금산 전투에서 전사했다.


'조천일기'는 1574년 명나라로 가는 사절단에 그가 질정관의 역할로 참여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질정관이란 조선 시대 문서의 음운(音韻)이나 제도 따위에 대한 의문점을 중국에 질문하여 알아 오는 일을 하는 임시직이다. 비록 임시직이지만  쓰는 말과 소리 나는 말이 다른 언어를 기반으로 확인하고 질문하는 일은 중요할 수밖에 없다. 자칫 잘못하면 외교 문제로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양에서 5월 11일 출발하여 다시 한양으로 돌아온 것은 11월이니 총 6개월의 시간이 소요된 셈이다. 실질적으로 이동 시간이 길고 북경에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단 1개월 뿐이었다. 북경에서 생각보다 짧은 시간 내에 일정을 소화하려면 쉽지 않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쉬운 것은 9월 14일 이후의 조헌의 기행기는 전하지 않고 있어서 사절사로 동행했던 허봉의 '조천기'를 참고하여 뒷부분이 정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도 중국에서 있었던 일들은 모두 다 그의 눈과 귀를 통해 기록된 것이기에 그나마 다행이다.


조헌이 이용한 사행 경로는 요령을 지나 우가장을 거쳐 산해관으로 들어가 북경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그러나 이후 조선 후기가 되면 요령에서 우가장이 아닌 성경부를 찍고 산해관으로 들어가 북경으로 향하는 코스로 바뀐다고 한다. 아무튼 그는 첫 번째 코스로 이동했다.


가는 길에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다. 비가 많이 와서 지내던 곳의 지붕에서 물이 새 유숙을 하게 될 때가 있었는데 조헌은 그 와중에도 마치 동정호를 감상하는 기분으로 즐겼다는 기록을 보았을 때 놀라웠다. 그는 쉽게 좌절하지 않고 사태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려는 자세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무엇보다 나는 그가 이전에 그림이나 책에서 만났을 중국의 여러 명승 고적지를 직접 보고 감상할 수 있었을 때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다. 당시는 한자가 지식인의 기본 언어였으니 한자 문화권에 가서도 별 무리 없었을텐데, 그는 중국어로 듣고 말하는 일이 가능했다. 외국에 갔을 때 그 나라의 언어를 할 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경험의 폭에서 많은 차이가 난다. 그는 그런 의미에서 짧은 경치를 보더라도 더 깊은 경험을 가질 수 있었던 것 같다.

산해관의 망해정은 하늘과 바다를 구분할 수 없다고 했다.

백이숙제의 묘(현재의 하북성 노용현)를 찾아가 벅찬 감정을 토로하기도 한다. 백이숙제의 묘는 조선 지식인들이 답사를 하게 되면 필수로 찾는 코스였다고.


사행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제각각이었다. 상술처럼 뇌물을 받아먹는 관리, 길을 지나가려면 돈을 내놓거나 합당한 선물을 당당하게 요구하는 사람들, 귀한 집 자식으로 태어나 백성의 고혈을 빨아먹는 공자가 있는가 하면 선정을 행하는 관리들도 있었다.  

특히나 조선과 중국 경계나 변방에 사는 백성들을 대상으로 자기 잇속을 챙기는 관리들을 보면서 그도 배우는 바가 많았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조헌이 귀천을 막론하고 열심히 독서하는 유소년을 보면 가지고 있던 책 등을 선물하고 여러 조언을 하는 장면은 참으로 흐뭇했다. 사실 당시를 생각하면 신분 차별로 그 아이가 성인이 된다고 해도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격려를 아끼지 않았기에 그 아이는 평생 책을 놓지 않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고 어쩌면 더 나은 삶을 살게 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그가 북경에 있었던 기간은 8월 5일부터 9월 5일까지였다. 당시 천자는 12살에 불과했는데 그런 어린 황제를 보고도 감격했다는 그의 감정을 생각하며 뭉클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 열대 과일인 용안과 여지를 맛보았던 일, 최고 교육기관인 국자감을 방문했을 때의 소회, 조선 사실들에 대해서는 특별하게 환송연을 2차례 열어주어 감읍했다는 소회까지 적혀 있다. 

조헌은 명황제인 만력제의 생일 축하를 기념하여 축하 인사를 전하기 위해 간 것이었다. 만력제를 보았고 다양한 중국의 모습을 보면서 소회가 남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귀국길에 벼루와 부채 등을 주고 명의 사신을 통해서 책을 교환한다. 조선에서는 쉽게 구하기 어려웠던 중국의 각종 고전이나 서책을 갖고 싶다는 욕망이 컸을 것이다(나라도 그랬을 것 같다. 벼루나 부채는 어떻게든 구할 수 있지만 책은 쉽지 않으니까). 


조선 시대 역사서를 얼마만에 읽는 것인지 모르겠다. 역사서라고 하기에는 가벼울 수 있지만 어쨌든 조헌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당시 사행사들의 경로를 통해 중국과 조선의 풍속을 경험하는 일은 꽤나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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