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역사 - 상 - 제8판
니콜라스 V.랴자노프스키.마크 D. 스타인버그 지음, 조호연 옮김 / 까치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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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재료는 바로 지속성이다. 비록 모든 역사적 사건이 독특하고, 따라서 모든 일련의 사건들이 유동성과 변화와 다양성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현재에 의미를 부여하고 우리가 역사를 가지도록 해주는 것은 주어진 현재와 과거의 관련성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지속성을 구성하는 세부적인 사항은 주장일 따름이고, 종종 논란거리가 된다. 비록 겉보기에는 별문제 없이 보이는 이 책의 표제도 하나의 주장이다. 왜냐하면 많은 특정 민족들, 문화, 역사를 "러시아"라는 제목 아래에 담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중에는 러시아어가 아닌 언어를 구사하면서 스스로를 러시아와는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민족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중 일부는 나중에 차이점을 인식한 데에서 영감을 얻어 민족국가로서의 독립을 얻어내고, 자신들의 역사가 러시아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하게 된다. - P30~31


오늘날의 러시아가 오기까지 역사는 어떠했을까. 다민족으로 구성된 국가임을 알고는 있지만 지금의 모습이 되기까지 과정이 궁금했다.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이 도무지 끝날줄 모르는 상황을 보며 답답한 마음과 안타까움이 이는 까닭에 분석하고 싶은 이유가 있었다. 또 러시아 관련 문학 작품을 더 잘 읽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앞선 인용문을 통해서도 느끼지만 러시아의 역사는 복잡다단한만큼 사소한 것 하나라도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다 느꼈다.

러시아의 기원은 키예프부터가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키예프국은 동슬라브족을 통일하고 비잔티움과의 전쟁 끝에 강화조약을 체결하면서 부상했다. 전성기(980~1054년)의 키예프는 영토를 확장하고 유럽의 많은 지배가문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으며 같은 시기 유럽의 국가들처럼 기독교를 수용했다(로마가 아닌 비잔티움으로부터). 키예프는 지배 하에 있던 영토에서 모피, 밀랍, 꿀, 노예 등을 공물로 거두고 비잔티움 등과 교역하며 상업을 발전시켰다. 사회는 최상위층이었던 공, 보야르(귀족), 드루지나(가신), 스메르디(농민), 자쿠피(반자유농민), 수공업자, 노동자, 노예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공은 군사 지휘권 뿐 아니라 재판권, 행정권을 지니고 있었다. 보야르, 드루지나가 이에 협력하였으나 전쟁 등을 논의하거나 긴급 법령 등을 결정해야 할 때는 민회가 소집되었다. 

이런 키예프가 몰락하게 된 것은 내부적으로는 교역로가 파괴되고(국제 교역에서 키예프의 가치가 떨어짐) 정치 체제가 실패(합의 없는 무력에 의한 지배, 친족 간의 공동 통치, 형제 간 순환 통치 간의 갈등)하면서 국가 붕괴를 이끈 탓이 크다. 거기에 남동쪽 스텝 지대에서 끊임없는 외부 세력의 공격으로 소모전을 치룬 이유도 더해졌다. 


공의 독립 보유지에 따른 분령지가 급속히 늘어나면서 분열이 시작되었다. 키예프는 대외적으로 끊임없이 공격을 받았는데 특히 1240~1380년까지의 몽골이 핵심 타격이었고 남서부는 리투아니에게, 북부는 노르웨이, 독일, 스웨덴에게 의해서였다. 키예프인들은 언어적, 민족적으로 갈라져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인 세 분류로 나뉘어지게 되었다. 몽골이 남부 러시아 스텝 지대를 차지하면서 러시아인들은 영토를 빼앗기고 권력의 중심이 북동쪽으로 이동하여 유럽과 단절되는 계기가 되었다. 


오늘날 많은 역사학자들은 분령 시기가 위기와 생존의 시기였을 뿐만 아니라, 공국들 사이에서 앞을 향한 경쟁의 시기이기도 했고, 변화의 시기이기도 했다고 본다. 각각의 공국들은 키예프의 과거에서 자신들의 유산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중 모스크바가 경쟁 공국들을 물리치고 승자로 입증되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역사적 시대 구분이라는 언제나 골치 아픈 문제에 대한 관점에서 보면, 역사학자들이 키예프와 분령 시기를 "중세 러시아"로 부르며, 중앙집권화된 모스크바국의 성립기를 "근대 초기의 출발이라고 규정하는 경향은 점차 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러시아 발전의 독자성보다는 폭넓은 유럽적 흐름과의 비교 가능성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 P103


15세기 초 킵차크 한국은 크림, 카잔, 아스트라한으로 분리되고 모스크바는 1480년 몽골로부터 완전히 독립한다. 

모스크바 러시아 시기 이반 3세(1462~1505년)는 흩어져 있던 주변 공국들을 모으며 통합하는 과정을 진행했다. 이반 3세는 비잔티움 공주인 소피아와 결혼하면서 통치자로서의 권위를 높였다. 리투아니아는 모스크바와 결혼 동맹을 맺었으나 이는 중앙 집권적 정치를 진행하던 모스크바가 지방 분권형 정치를 진행하던 리투아니아에 대해 우위에 서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혁명 이전의 대부분의 러시아 역사학자들은 모스크바의 성장이 모스크바 공들과 러시아 민족의 위대하고도 필연적인 업적이라고 찬양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외부의 침략을 받고도 살아남아서, 역사에서 자신들이 맡은 역할을 담당하기 위해서 통합해야 했기 때문이다. 소련시기의 역사학자들도 동일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고, 이 주장은 소련 이후의 공식적인 역사 교과과정에서, 그리고 러시아 지도자들이 민족의 과거에 대해서 언급할 때 소중하게 다루어진다. 반면에, 프레스냐코프 같은 혁명 전의 러시아 역사학자들, 오늘날의 많은 서구 역사학자들, 그리고 당연하게도 폴란드,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 역사학자들 등은 이런 해석-비판자들이 보기에 이것은 "민족주의적 신화이다에 종종 의문을 제기한다. 이런 저술가들은 칭찬의 대상이 되고 있는 "러시아 모으기가 무엇보다도 노브고로드와 프스코프 같은 러시아인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다양한 비러시아 민족들을 대상으로 한 모스크바국 공들의 교묘한 침략이라는 점을 특히 강조했다. 그리하여 모스크바국 공들은 그들에게서 자유를 빼앗았고, 모든 사람들을 모스크바국의 전제정치에 예속시켰다는 것이다. - P169


모스크바 러시아는 이반 뇌제와 표도르 시기 전성기를 맞이한다. 이반 4세(이반 뇌제)는 개혁을 하는 한편 공포정치를 병행하며 근대 국가 및 제국으로의 기틀을 마련했고 볼가 지역과 시베리아로 영토를 확장했다. 표도르는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그루지야국을 속국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 시기 농민 지위가 낮아지며 봉직 귀족과 충돌 및 갈등이 빚어지자 정부는 봉직 귀족의 편을 들면서 농민들이 여기저기에서 들고 일어났다. 또 표도르가 죽을 당시 후계자가 하나도 없는 상태였고 보리스 고두노프처럼 여기저기에서 권력자임을 참칭하며 사회적으로 혼란이 발생했다. 이는 1613년 미하일 로마노프의 즉위로 로마노프 왕조가 시작되면서 일단락되었다. 


미하일 정부는(1613-1645년) 국제 관계를 안정화시키고 재정 확충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뒤이은 알렉세이는(1645-1676년) 1649년 탈주한 농노를 붙잡아 주인에게 돌려보내는 기한이 무기한으로 변경된다는 법을  공포하면서 농노제를 더욱 강화했고 우크라이나까지 모스크바의 관할 영역을 확대했다. 

행정을 뒷받침한 것은 보야르 두마 혹은 협의회(오늘날로 보자면 의회)였고 차르는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중앙집권에 열을 올렸다. 관료의 수가 증가하며 관료제는 확대된 반면 지방행정은 취약해졌다. 이 시기 농업은 여전히 중심 산업으로 위치했으나 교역, 수공업, 제조업도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다. 

알렉세이 시기 종교 인쇄가 가능해지면서 기독교 저술이 활발해졌고 교회 개혁 운동 진행으로 국가와 교회가 통합되었다. 유럽을 통해서 서구의 세속 문학이 확산되자 개인주의 주제가 대두되었으며 궁정 극장이 설립되면서 러시아 희곡이 시작된다. 이전부터 유행하던 성상화는 서구의 영향을 받아 원근법, 해부학 지식이 더해져 달라진 모습을 보였고 초상화 같은 세속적 회화도 등장하였다.


18세기부터 19세기는 제정 러시아의 시기다. 이 시기는 제국 시대라고도 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대이자 이전 러시아 시대라고 불린다. 


18세기의 러시아는 압도적으로 농촌 사회였다. 인구의 대부분은 농민이었다. 그들은 농노와 국가농민이라는 두 부류로 나뉘었는데, 대략 수는 비슷했다. 농노의 처지는 표트르 대제로부터 파벨과 알렉산드르 1세의 통치기를 거치면서 더욱 악화되었고, 1800년 무렵에는 최악의 상황에 다다랐다. 세금 부담의 증가 이외에도 농민들은 점점 더 경제적 착취의 대상이 되었고, 농노들이 시정 요망 사항에 대한 청원권조차 가지지 못하고 주인의 의지에 사실상 완전히 예속됨에 따라서 형편은 더욱 악화되었다. - P407


표트르 대제는 서구화 개혁을 단행하여 군대, 행정, 교육 시스템을 근대화했으며, 대북방 전쟁 승리로 발트해 주도권을 확보하고 폴란드에도 우위를 확보했다. 예카테리나 대제는 영토 확장(폴란드 분할)과 학문과 예술 발전을 이끌며 근대화를 주도했으나 이 시기 농노제는 더욱 확대되었다. 알렉산드르 1세 시기 러시아는 프랑스, 프로이센을 포함한 유럽국가와 스웨덴, 영국, 러시아 연합 간 전쟁 끝에 빈 회의에서의 협약으로 유럽 내 위상이 높아졌으나 내부적으로는 농노제 폐지 실패와 데카브리스트 반란으로 갈등이 일었다. 니콜라이 1세는 관제 국민성을 강조하며 군국주의적 통치를 이어갔다. 페르시아, 투르크와 전쟁을 벌이고 폴란드, 벨라루스, 우크라이나를 러시아화했으나 크림 전쟁에서의 패배로 한계에 부딪힌다.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는 사실상 전례가 없는 놀라운 외교력 및 군사적 성공을 거두었다. 이 국가들은 거대한 유럽 국가를 해체하고 완전히 파멸시켰으며, 과거의 적이자 경쟁자이자 갈등의 근원인 국가를 제거함과 동시에 자신들의 영토, 자원, 인구를 크게 늘렸다. 동유럽은 완전히 이 나라들의 통제하에 들어갔으며, 프랑스는 자신들의 옛 동맹국을 잃어버렸다. 의미심장하게도, 폴란드 분할 이후 오랫동안 동유럽의 이들 세 군주국은 국제무대에서 서로 긴밀히 협력했다. 다른 한편으로 폴란드 분할은 지속적인 결과를 낳은 고통스러운 유산을 남겼다. 특히 러시아 제국 내에서의 "민족 문제"의 출발이 폴란드 분할로부터 유래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 P394


19세기 전반 고등 교육의 확산으로 과학 등 학문이 발전하면서 인텔리겐치아가 대두되는 등 지적인 해방이 이루어진다. 낭만주의, 관념론이 유행하는 한편 슬라브주의, 민족주의 같은 보수주의 기치가 일어서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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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우생학 - 혐오와 차별은 어떻게 ‘과학’이 되었나
N. 오르도버 지음, 김현지 옮김 / 오월의봄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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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생학은 언제나 극히 기민한 이데올로기였다. 우생학은 스스로 힘을 실어주기도 하고 동원되기도 한 운동들, 즉 국가주의, ‘개혁 지향‘ 자유주의, 절대적인 동성애 혐오, 백인우월주의, 여성혐오, 인종주의와 따로 떼어낼 수 없다. 우생학이 오래도록 살아남은 것은 순전히, 어떤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오명을 뒤집어쓰더라도 나머지 사람들은 다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런 운동들과 공모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생학이 모든 유형의 편견에 호소력이 있다는 것은 배제나 유전적 추정이나 외과 수술의 대상으로 지목된 개인들이 대부분 다중적 정체성을 가지며, 어느 하나가 아니라 그 이상의 표적 집단에 속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P56~57

미국의 우생학은 이제는 더는 사라진 학문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더는 자신이 백인 코카서스 인종임을 드러내는 사람은 없지만 여전히 흑인과 이민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는 중이니까. 인종, 계급, 젠더의 위계에 의한 불평등은 우생학을 낳는 기본 토대다. 거기에 정책 입안자, 의사, 법률가, 기업가 등이 서로 간에 양분을 주며 우생학이 오히려 더 강화되었다. 우생학은 가산적 이데올로기다.

20세기 미국 이민의 역사는 우생학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실천 영역 중 하나다. 1875년 페이지법부터 1882년 중국인 배척법, 연방이민금지령, 1917년 재외국인 미국 이민 및 거주 규제법에 이르기까지 인종 및 계층에 따라 입국 불가 범위는 계속 넓어졌다. 특히 1917년 재외국인 이민법이 발표될 당시는 볼셰비키 혁명으로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 사회주의자, 급진주의자에 대한 적대감이 커지면서 보편적인 반이민정서가 횡행할 때다. 이후 1921년 이민자의 범위를 총 인구의 3%로 제한하는 법이 통과되더니 1924년 이민제한법이 발표된다. 이민제한법은 우생학 전문대리인인 로플린이 적극 역할을 했는데 그는 재외국인 국가등록제를 촉구하고 자격 통과한 이민 예정자에게 개발적으로 여권을 발급해야 한다고 권고했던 것이다(정책에 거의 그대로 반영되었다). 이 법은 나중에 히틀러의 나치 독일 단종법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우생학을 지지한 사람들은 몰려드는 이민자들로 인해 인종 혼합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증폭됨에 따라 백색 인종적 순수성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감에 시달렸고 이를 적극적으로 타개하고자 뛰어들었다. 파이어니어 펀드라는 회사는 우생학 출판물을 영어로 번역하고 미국의 우생학회 등 우생학을 선전하는 단체를 지원하며 반이민 기조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동성애의 원인이나 치료법을 찾는 것이 동성애에 일탈이라는 꼬리표를 단다는 점, 동성애에 대한 의학적 또는 정신의학적 병리화가 이성애를 정상화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미 국립보건원은 어쨌든 이성애 유전자를 찾는 일에는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다만, 아마도 의도치 않게 연구를 하는 경우는 있었을지 모르지만 말이다. 그러니 1869년 헝가리 작가 카로이 마리아 케르베니 Károly Mária Kertbeny가 만든 ‘동성애자 homosexual라는 용어가 ‘이성애자 heterosexual‘라는 용어보다 먼저 통용된 것도 놀랍지 않다. - P183

동성애는 유전의 영향인가, 환경의 영향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은 사항이다. 그러나 동성애를 문제시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생물학적으로 애당초 문제가 있었다는 식으로 이끌고 가려 했다. 한쪽에서는 동성애는 유전이 아니지만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성향은 유전이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이는 실패를 선천적인 지적 결함으로 이야기하면 특권층에 유리하기 때문에 먹히는 매커니즘이다. 한편 의학이, 의사의 주장이 사법 제도가 된 사례는 단종법의 통과다. 1909년 캘리포니아의 단종법 통과 이후(1911년 아이오와주, 나중에는 오리건주까지) 상습성범죄자 등에 대한 단종 수술이 징벌적 성격이 아닌 치료 목적으로 둔갑되었다. 이는 명백한 우생학적 이데올로기에 의한 사고다. 동성애자는 이렇게 사회에서 근절되어야 할 악이자 그 대상이 되버렸다.
마찬가지로 젠더가 유전적 요소에 따른다는 편견과 집착이 존재했다. 젠더부적응도 마찬가지다. 젠더 역할에 대한 의학적 판단은 인종, 계급에 기초하여 동성애를 구성하고자 했다. 의사든 비전문가든 레즈비언은 신체적으로 이상하고 기괴하다는 생각이 있었다. 동성애로 짐작되는 아이들 중 자위하는 아이들의 음핵을 제거하고 두개골 크기 및 얼굴 생김새로 범죄 성향을 연결지으려는 시도도 있었다. 레즈비언도 지배적 레즈비언과 소극적 레즈비언으로 구별하여 정량적으로 계산할 수 있다는 논리를 폈다.
동성애에 대한 정신의학 및 생물학 논문이 내놓은 가설은 퀴어에 대한 적대감 및 신체적 위해를 제거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호르몬으로 동성애자를 치료할 수 있다는 가설은 심리학자, 의사, 연구자들을 만족시켰다.

테크노픽스는 점점 더 암호화된 방식으로 활용됐고, 자유주의자들에게 더욱 강력한 호소력을 발휘했다. 자유주의자들은 의식적이든 아니든 보수주의자들과 합세해 인종, 계급, 젠더(청소년 여부 및 장애 유무에 의해 더 강화됨)를 우생학 프로젝트의 주요 결정 요인으로 확립했다. 새로운 테크놀로지는 공공 정책 분야의 ‘혁신‘과 손을 맞잡고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양상을 다시 한번 각인시켰다. 여성 및 여자아이들이 먼저 하나 이상의 특정 인구통계학적 집단의 구성원이라는 이유로 병리화된 다음, 의학적으로 위험하고 헌법에 비춰 의심스러운 ‘치료법‘을 받아들이도록 압박을 당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 P411~412

산아제한은 계급(지위든 경제든)과 연관되어 우생학적 관점에서 해석되었다. 마거릿 생어는 적극적 우생학(‘적자‘는 인종과 국가에 봉사하기 위해서 가족 구성원을 늘려야)은 비난했으나, 소극적 우생학(‘부적자‘ 사이의 생식은 방지되어야)은 가치가 있다고 여겼다. 푸에르토리코의 가난한 여성을 대상으로 경구프로게스테론 실험약이 투여된 것은 미국의 식민주의와도 연결될 수 있는 지점이다. ‘니그로 프로젝트‘는 흑인 사이의 출생률을 감소시키면 남부의 빈곤이 해결될 것이라는 가설에서 시작된 프로젝트다(반대 목소리를 낸 것이 W.E.B.듀보이스). 클래런스 겜블은 강제 단종수술 클리닉을 설립하고 널리 시행했는데 여기에 생어는 적극 동조하고 지원했다. 생어는 빈곤층이 재정 부담을 가져오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인구 과잉은 국가적 재앙을 불러온다며 단종수술이 필요하다 보았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장애나 정신적 부적자에게도 단종수술이 필요함을 설파하는 인간개량재단에도 참여했다.
미국 남부에서는 조직적인 단종수술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1929년에서 1940년 사이 노스캐롤라이나 주 단종 수술 후보자 중 78%가 여성이었고, 그중 21%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었으며, 1964년에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전체 단종 수술의 65%를 차지했다. 수술 대상자로 지목된 사람들에는 인종 및 사회 경제적 지위 뿐 아니라 연령(낮은) 기준이 작용했다. 가장 큰 문제는 단종 수술을 받지 않으면 복지 혜택이 줄어든다고 하는 사실 때문에 수급자에게는 협박으로 작용했다는 현실이다. 이처럼 산아제한의 명목으로 여성의 선택권은 보호받지 못했고 의료계가 선택한 자율성과 편의성에 의해 단종수술이 시행되었는데 이를 제공한 의료 서비스 제공자들의 권리는 철저히 보호되었다. 이는 난관결찰술 및 자궁적출술에 이은 노플란트, 데포-프로베라도 마찬가지다. 국외 빈곤 퇴치 방안으로 행해진 두 시술은 모두 부작용이 제대로 고지되지도 않은 채 미국 외 저개발국가에서 실시되었다. 특히 노플란트는 원상태로 돌릴 수 있다(주로 5년 이후 빼낸다고 하지만 빼내는 사람이 얼마나 있었을지...)는 사실 때문에 더 호혜적으로 느끼게 만들었다. 여성의 몸(의 부작용과 위험적 결과)은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 생각할수록 소름이 끼친다.

이처럼 이 책은 과거 미국의 우생학이 펼쳐진 다양한 국가 정책적 사례를 자세히 보여준다. 그러나 서두에도 이야기했지만 우생학은 결코 죽지 않았고 여전히 드러나지 않았지만 미국 사회 전반에 뿌리내려져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통해 미국의 과거와 현재를 확인하고 진단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미국 우생학의 역사에서 두드러지는 점은 반동주의적 의제와 개혁주의적 의제가 늘 협력한 것은 아니더라도 공통의 목소리를 냈다는 것이다. 논쟁의 여지는 있지만 그럼에도 많은 경우 자유주의는 보수주의, 그리고 심지어 전면적인 파시즘도 이룰 수 없었던 것을 더 밀고 나아갔다. 여성, 가난한 사람, 인종화된 사람, 장애인에 대해서는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 양쪽 모두 온정주의적인 자세를 취했다. 구조적 불평등을 해결하는 데양쪽은 모두 실패했다. 양쪽 모두 미국 국내와 ‘개발도상국‘의 인구 조절 프로젝트를 지원했다. 이런 공동의 대의의 기틀을 만들고 조성한 사람이 바로 자유주의 페미니즘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우상 중 한 명인 마거릿 생어다. 물론 생어 혼자서 한 일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 P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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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너츠 트윈링 노트 200P - 스누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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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어 단어장 용도로 샀다. 한자와 발음, 뜻을 정리하고 한 면을 사등분하여 스스로 단어 퀴즈를 내가며 공부하려고 한다. 아직 두 번밖에 안했지만 계속 열심히 써보기로. 무엇보다 넉넉한 페이지수가 좋다. 트윈링은 역시 공부용도로 최적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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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6-02-23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영어 단어장 용으로 사고싶어지네요 ㅌㅋ

거리의화가 2026-02-23 17:05   좋아요 0 | URL
영어 단어장으로도 좋죠^^
 
인종으로 읽는 미국의 역사 - 식민지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미국을 만들어온 인종이라는 거울
한국미국사학회 지음 / 궁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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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초에 잡지를 보다가 이 책을 ‘또‘ 발견하였다. 진작에 신간 꾸러미에서 발견한 책이었지만 외면하고 있던 책이었다. 다른 책을 소개하면서 이 책을 같이 소개하니 궁금하기도 하고 과연 두 책이 어떤 다른 느낌을 가져다줄까 싶어 주문하여 읽게 되었다. 어쩌다보니 미국사를 다시 훓어보는 계기가 되었다.

이 책은 한국미국사학회에서 그동안 여러 학자들이 만들어낸 성과물을 엮은 것이기 때문에 학술서라고 보아야 한다. 대중교양서처럼 수월하게 읽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어렵지는 않았다. 기존에 미국 인종, 계급, 젠더 관련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충분히 읽어나갈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라고 느껴졌다.
부제에서 알 수 있듯 이 책은 ‘인종‘이라는 키워드를 바탕으로 여러 사회 현상을 고찰하며 미국의 역사를 훓어본다. 정치 분야만이 아니라 경제, 사회, 문화, 예술, 스포츠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어서 읽는 맛이 있었다.

오늘날 ‘인종‘이 왜 문제인지는 해외 뉴스 한 두개만 봐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미국 뿐의 문제는 아니지만 미국은 트럼프 제2집권기에 들어서서 그 심각성이 커지고 있는 양상이다. 다만 인종을 이해하는 시각은 점차 달라져왔다. 과거에는 생물, 유전, 인류학적인 개념으로 이해되었다면 오늘날에는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라는 개념으로 이해된다.

건국기 링컨은 주로 남부 노예해방을 한 인물쯤으로 미화된 측면이 있는 것 아닌가 싶다. 그는 원주민에 대하여 온정주의적 자세를 가지고 있었으나 그들에 대한 이해는 부족했다. 그는 인디언 시스템의 에이전시직을 비전문가이자 인디언을 만나본 적도 없었던 자신과 친분이 있었던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정치적 지지자들에게 보상을 하기 위해서였다. 또 백인들을 서부에 정착시킨다는 명분으로 만들어진 홈스테드법과 대륙횡단철도 사업으로 원주민들의 땅은 강탈당하기에 이른다.
프리메이슨은 중세 유럽 길드에서 기원한 용어로 17세기 유럽에서 비밀결사우애단체로 출발했다. 이들은 개인과 사회를 개선하며 질서와 조화, 안정을 추구하고 신비주의를 고수했는데 18세기 미국에 유입되어 독립을 위해 뛰던 지도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프리메이슨 흑인 활동가들은 아프리카인들의 억압의 역사를 강조하기 보다는 흑인의 인종 평등과 노예제 폐지에 힘을 실었다. 이들은 흑인의 정치적 역량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여겨 교회와 연계하여 흑인의 시민권과 투표권을 획득하고 교육의 기회를 확대하기 위해 노력했다(폭력적 저항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1917년 미국은 문맹테스트 이민법을 만들고 아시아 이민금지 구역을 설정하였으며 이민자 인두세를 인상하는 조치를 시행했다. 테스트 항목을 킹 제임스 성경에서 발췌함으로써 개신교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었고 검열관의 판단에 따라 편의적으로 이민 테스트 통과 여부가 결정된다는 점에서 문제가 많았다. 이 이민법은 1952년 폐지되기까지 계속되었다.
짐크로시대 외면으로는 구별하기 어려운 흑인들이 백인으로 통과하기를 감행했다. 그러나 정체성을 숨기고자 한 흑인들은 자신들의 존재가 발각될까 늘 불안에 떨어야 했다. 그러나 2차 대전 이후 흑인들의 지위가 상승하면서 백인으로 통과하기는 퇴물로 취급받았다. 그러나 정말 사라진 유산일 뿐인가? 여전히 외형적으로 모호한 아프리카계 또는 아시아계 혼혈인은 백인 통과하기를 시도한다. 문제는 이것이 백인 사회를 더 공고히 하는데도 역할을 한다는 현실이다.

20세기 흑인 권리 찾기를 주도한 이로 윌리엄 듀보이스가 있는데 다른 한편에 부커 워싱턴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부커 워싱턴은 워싱턴에서 있었던 애틀랜타 타협으로 흑인은 백인 사회로 점진 통합해야 하며 경제적으로 자립, 현재 상황에 순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등 백인과 흑인의 협력이 필수라 보았다(당연히 백인들은 이에 환호했다). 이는 흑백 분리와 인종 차별을 수용하는 입장으로 보수적인 쪽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윌리엄 듀보이스는 흑인만의 고유성을 강조하며 흑인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정치적 권한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1980년 레이건이 당선되고 미국 사회에 우파적 흐름이 거세지자 과거 부커 워싱턴의 정책들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미국 내 이민이 증가하고 백인 여성이 노동 시장에 진입하자 취업문이 좁아진 흑인들이 위협을 받은데다 1960년대 민권법과 투표권법이 통과되면서 계층간 간격이 커진 탓이었다.
두순자 할린스 총기 사건도 기억에 남는다. 한인 상점주 두순자가 10대 흑인 소녀 할린스를 총기로 쏜 사건이었다. 사건 발발 후 한인들은 이 사건을 인종적으로 다루지 않으려 했으나 사건은 인종 이데올로기의 논리에 따라 할린스를 불량하고 남성적이며 싸움질하는 강도로 몰았고 두순자는 가정적이고 도덕적이며 중산층 계급의 여성의 내러티브가 만들어졌다.

19세기에는 인종 질서가 형성되고 백인의 차별적인 시선이 시작된 시기이다. 미국의 법과 정책은 건국기부터 백인 중심의 인종 질서를 구축했고 19세기 중후반이 되면 서부 확장을 통해 이를 더욱 공고히 했다. 필리핀을 식민지로 만드는 과정에서 그들을 야만인이자 타자로 규정해 백인의 입장으로 이들을 문명화시켜야한다는 논리를 펼쳤다. 20세기 전반이 되어서도 백인 중심의 질서를 재구축하려는 시도는 지속되었다. 산업화로 만들어진 도시공간은 인종주의가 기능하는 장소로 작동하는데 흑인이 백인화되려는 거듭된 시도는 인종의 위계를 무너뜨리고자 함이었지만 오히려 또 다른 분류를 만들어내는 역효과를 낳았을 뿐이었다. 20세기 후반 인종 정치는 인종 위계에서만이 아니라 인종 내부에서도 다양한 과정을 통해 형성되어 전개되었다. 이처럼 미국의 역사는 곧 인종의 역사이므로 인종 연구는 여전히 과정에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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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가을 - 중국과 서양, 그리고 태평천국 전쟁의 역사 걸작 논픽션 33
스티븐 플랫 지음, 임태홍 옮김 / 글항아리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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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제목에 오랜만에 감탄했다. 특히 '천국'은 기독교의 '천국'과 태평천국의 '천국'으로 중의적인 의미를 담은 것 같아서 그렇다. 그치만 가을을 붙인 이유는 잘 모르겠다. 홍수전이 태평천국을 공식적으로 선포한 해는 1851년이지만 사실 운동의 시작은 1850년부터 주요 흐름으로만 따져도 4년여간 이어졌기 때문에 딱히 가을을 붙이기에는 애매함이 있지 않나 싶어서다. 


이 책은 태평천국운동(입장에 따라 운동이라는 글자 대신 다양하게 부르지만 그나마 운동이란 단어가 중립적인 것 같다)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한 논픽션이다. 중국의 역사를 연구하는 외국 학자들이 이젠 제법 많아져서인지 다양한 저서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논픽션은 사건을 그저 서술만 하지 않아 딱딱하지 않게 읽을 수 있고 중요 사건은 좀 더 강조하여 마치 드라마 같은 느낌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장점이라 할 수 있다. 일반 역사서였다면 이 정도 페이지의 분량을 며칠은 걸려서 읽어야할텐데 덕분에 2~3일 투자해서 읽을 수 있었다.


태평천국운동이 있던 시기 청은 대내외적으로 혼란에 빠진 상황이었다. 1842년 영국과 맺은 난징 조약을 시작으로 프랑스, 미국 등과도 관계를 맺으며 세계 경제 체제에 합류하게 되었다. 내부는 곳곳에서 민란이 발생하고 있었다. 


책은 역사적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순서대로 배치하지 않고 인물과 얽힌 이야기를 소개하며 이목을 끌었다가 다음엔 특정 사건(전투)을 설명하는 식으로 나열되어 있다. 목차를 보지 않으면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독자로서는 더 신선하게 읽을 수 있지 않나 싶다.


홍인간은 스웨덴 선교사인 테오도레 함베리에게 세례를 받았고 홍콩에 갔을 때 만난 스코틀랜드 출신 선교사인 제임스 레그 등을 통해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관련 책도 읽어서 서양 문화와 문물에 아주 익숙한 인물이었다. 외국어도 능숙했다니 재주가 있었던 인물임에는 틀림 없는 것 같다. 레그는 홍인간에게 전도와 공부에 집중하라고 권했지만 홍인간은 정치적 욕망이 있었던지 뿌리치고 홍수전을 만나기 위해 떠난다. 

홍수전이 신을 만난 이야기는 마치 무슨 신화나 전설처럼 많은 이야기가 떠도는데 어쨌든 배상제회를 중심으로 모인 신도들은 그를 영적인 지도자로 여겼고 이후 태평천국은 점점 확장되어 나갔다. 1851년 1월 홍수전은 기독교 개종과 만주족 타도를 기치로 태평천국을 수립하며 스스로 천왕이란 자리에 올랐고 홍인간에게는 간왕이라는 직함을 내렸다. 홍인간은 이 무렵 논설을 통해 태평천국이 나아갈 방향이자 뚜렷한 목표로 근대 산업 강국으로 내세우며 비전을 제시했다. 사촌인 홍인간이 상대적으로 한 자리를 얻기 쉬웠다면 충왕인 이수성은 홍수전의 신임을 얻기 위해 바닥부터 무진장 노력하여 마침내 장군 자리에까지 오른 사람이다.  


태평천국운동 초기 영국은 청 정부군과 태평천국군 중 어느 한편에 힘을 실어주지 않고 중립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다만 당시 상하이에 있던 영국 최고위직 프레더릭 브루스는 청 정부군 고위직에 있던 '오후'의 부탁으로 청군을 지원하는 편에 섰다. 물론 상하이에 있던 영국인들을 보호하겠다는 명분도 있었을 것이다. 이에 반해 미국인 지휘관인 프레더릭 타운센드 워드는 중국인 상인 집단의 손을 잡고 외국인 중심의 민병대를 꾸려 태평천국군 편에 서서 청 정부군을 몰아내려 했다. 그리고 청에 들어와 있던 선교사들은 태평천국 편에 섰는데 중국이 기독교로 개종해야 한다는 생각과 서양에 우호적인 방향성이 대체적으로 부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2차 아편전쟁으로 다구포대에서 패배한 영국은 청에 설욕하기를 원했기에 중립 노선을 내려놓고 당시 영국의 식민지인 인도와 프랑스 함대까지 동원해 베이징으로 향했다. 이들에 대항하기 위해 증국번은 청의 상비군을 이용하지 않고 자체 군대를 새롭게 조직하였다. 자체 규율로 충성을 하지 않으면 안되게끔 세뇌를 한데다 구성원이 마을, 가족 단위였기에 서로 서로 감시하는 역할까지 더해져 결속력이 강한 군대가 되었다. 덕분에 태평천국군에 승리하여 황제의 주목을 받았지만 함풍제는 얼마 후 사망하고 너무 어린 황제를 대신해 서태후(와 동태후)가 정치 무대에 메인으로 등장하기에 이른다. 


1861년 미국에 남북전쟁이 시작되자 영국산 면직물 가격이 폭등하여 중국으로 수출하는 물량이 급감하는 등 실물 경제가 요동쳤다. 링컨이 남부연합의 모든 항구를 봉쇄하자 영국은 중국의 조약항들이 자신들을 구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라고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보복이라도 하듯 영국이 미국 남부연합의 교전국 지위를 인정한다고 발표하자 결과적으로 이는 태평천국의 주권도 인정하겠다는 꼴이 되었다. 태평천국군으로서는 호재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이홍장은 증국번의 군대와 비슷한 성격의 민병대를 안후이성에서 조직하기 시작했다(규칙까지 복붙). 서태후와 어린 황제는 증국번에게 정부군 지휘 책임을 맡겼는데 정황상 그럴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1862년이 되면 영국군과 프랑스군, 프레더릭 타운센드 워드가 힘을 합해 태평천국군이 점령한 상하이를 탈환하기 위해 뛰어들며 접전이 벌어진다. 1863년에는 피난민이 몰려들어 상하이에는 콜레라가 창궐했다. 이는 톈진에서 베이징까지 확산되었고 군대도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증국전의 기습 공격을 시작으로 위화타이의 석축 요새를 점령한 이후 청군은 계속 세력을 뻗어나가며 태평천국군이 빠져나갈 출구를 장악해나갔다. 1864년 홍수전은 이미 병으로 사망한 뒤였던 때 좌종당 부대가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항저우를 탈환하고 이수성이 증국번에 의해 잡히고 난 뒤 사실상 전쟁은 종결되었다. 이수성은 태평천국군의 거의 마지막을 지휘한 반면 홍인간은 이때가 되면 초기의 진취적인 기운도 없어졌다는 식으로 묘사가 되어 있다. 


앞서도 설명을 했지만 개인적으로 홍수전의 사촌이자 태평천국에서 간왕 노릇을 한 홍인간과 충왕 이수성에 대한 에피소드를 재미있게 읽었다. 태평천국운동이 진행되는 동안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지만 그동안 사실 홍인간에 대해서는 뚜렷한 인상을 받지 못했었다. 이 책에서는 홍수전은 오히려 약간 뒷배경처럼 배후 같게 그려지고 홍인간이 메인에서 지휘를 이끄는 실세처럼 그려져 있다. 충왕 이수성의 역할도 제법 비중 있게 다뤄진다. 물론 약간의 과장이나 축소를 감안해야겠지만 태평천국운동을 조금 더 상세히 뜯어볼 수 있게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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