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주체는 자기 자신을 의식하고, 스스로에게 자신의목소리를 부여하고, 사회에 자신의 무게를 부과하는 집단이 아니다. (...) 그는 주어진 경험의 지형에서 존재하는 지역, 정체성, 기능, 그리고 능력을 결합하거나 분리하는 행위자다‘
정치적 주체는 언제나 하나의 사건이다. - P328

‘주체‘는 사건에서 나온다. 주체가 사건에서 기계적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주체는 사건에서 나올 수 있는 하나의 결과다. 바디우의 사유에 대한 표준적인 저작을 쓴 피터 홀워드 Peter Hallward는 바디우의 주체를 "사건이 선포하는 진리를 통해 변모한 개인"으로 정의한다. 사건에 노출된 개인은 주체로 변한다. 다시 말해 그는 사건이라는 조건 아래 ‘주체화‘ 과정을 겪는다. 바디우에게 주체화는 (적어도) 두 가지 특성을 포함하는데, 첫 번째는 주체화가 집단적이라는 것이다. - P333

두번째는 주체화가 미리 정립된 어떤 인간 본질도 전제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체화는 사건에서 유래하고 사건에 충실하겠다는 주체의결심을 함축한다. 이것이 바디우가 인간에 대한 정의를 ‘프로그램programme‘으로, 곧 언제나 열려 있고 도래할 것으로 명명하는 까닭이다." - P334

나 자신 바깥에서 나를 되찾는다. 나는 나의 통일성을 나 자신 바깥에, 나를 표상하는 기표 속에 둔다. 자신을 외재화함으로써 주체는대상(상징)을 창조하지만, 이로써 그는 자신을 외재화했기에 더는 자기 자신과 대면하지 않는다. 결국 주체와 대상의 분리는 사라지고 이두 심급은 이제 복잡하게 뒤섞이게 된다. 이는 특히 주체의 자리가 비어 있음을 뜻한다. 그렇기에 매우 다양한 행위자들이 잇따라 또는 동시에 그 자리를 차지하거나 요구할 수 있다." 랑시에르와 마찬가지로지적 역시 주체가 실제로 존재하는 구체적인 집단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주체는 개인이나 구체적인 집단의 형성을 위한 조건이다. 하지만이를 위해 주체의 자리는 반드시 비어 있어야 한다. - P345

해러웨이가 보기에 인공물은 모든 사물에 대한 사유 모델을 제공한다. 그의 인공물주의는 급진적 반본질주의다.
그는 세계 내 어떤 실체도 ‘본질‘을 소유하지 않으며, 따라서 상호작용하는 다른 실체와 무관하게 존재할 수는 없다고 여긴다. 사물은 언제나 혼종적인 것이요, 여러 심급의 혼합이다. 이는 ‘본질‘이란 존재하지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반본질주의는 동시대 비판사상대부분에 공통적이다. - P361

버틀러가 보기에 섹스는 젠더와마찬가지로 문화적 구성물이다. ‘섹스‘와 ‘젠더‘라는 구분 자체가 사회적·역사적으로 정립된 것이니, 그 구분을 이루는 항목들도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다. 문제는 몸Bodies That Matter』이라는 버틀러의 책의 제목이 말해주듯, 신체는 언제나 이미 상징적인 것 속에서 파악된다(원제의matter는 ‘물질‘과 ‘의미하다‘ 또는 ‘중요하다‘를 모두 뜻할 수 있다). 결국 버틀러가 최종적으로 문제 삼는 것은 바로 본성과 문화의 분리다. - P369

서발턴은 말할 수 없으며, 역사가는 역사 속에서 그의 목소리를 찾을 수 없다. 이것이 스피박이 ‘서발턴 연구‘의 지배적 경향과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는 지점이다. ‘서발턴 연구‘는 피지배자들, 즉 공식 역사에서 흔적이 사라진 이들의 행동과 표 - P382

현을 되살리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스피박이 보기에 이 연구 계획은실현 가능성이 없는 소망이다. … 제국주의는 손에 닿는 모든 것을 재작성한다. 그 결과 식민지개척자가 도착 당시 발견한 그 어떤 것도 온전히 남아나질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 스피박은, 특정 영역에 철저히 연결되어 있는 전문 능력의 이름으로만 정치에 개입하는 ‘전문‘ 지식인 개념을 공박한다.
전문 지식인은 피억압자가 스스로 완벽하게 말할수 있으며, 피억압자 자신을 대표할 지식인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본다. 이에 스피박은 세계 주변부 서발턴이 겪은 억압의 규모와결과에 대해 들뢰즈와 푸코가 과소평가했다고 주장한다. - P383

사회계급이 출현하는 데 결정적인 요소는 경험의 형성이다. 이는톰슨의 연구에서 중심이 되는 용어다(이로써 그는 로크John Locke와 홉DavidHume이 창시한 영국 경험론 전통에 연결된다. 여기서 ‘경험‘이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회계급이 소유하는 가치, 표상, 감정으로 이뤄진 전체다.
각각의 계급에는 그 계급에 상응하는 하나의 경험이 있고, 이 경험은시대에 따라 더 동질적이기도 하고 덜 동질적이기도 하며, 시간과 더불어 진화한다. - P391

한 계급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은 공동체-개개인으로 하여금 세계와 똑같이 관계맺고 이를 공유하게 하는 집단적 문화 혹은 정체성ㅡ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더구나 ‘계급 공동체‘는 엄격하게 구상된 계급 경계를 넘어다른 계급을 물들일 수도 있다. 이른바 ‘노동자주의‘는 다른 계급의대표자(예컨대 1970년대 학생들)가 노동자계급 문화(그들이 노동자계급 문화라 믿는 것)를 채택하던 방식을 가리킨다. 이와는 거꾸로 ‘공동체 계급‘
이 존재한다. 이는 공동체가 무작위로 형성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공동체는 계급적 차원을 포함하며, 특히 도시에 설립될 경우 그렇다. 공동체는 우연히 형성되지 않으며, 만일 문화나 계급 정체성의 변화에우연적인 부분이 있다 해도 이 우연적인 것의 범위는 ‘객관적인‘ 사회경제적 요소의 제약을 받는다. 결국 집단적 존재의 이러한 두 측면은함께 고려돼야 할 것이다. - P398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사회계급의 근본적인 메커니즘은 우선 시장이 아니라 생산 영역에서 작동하며, 이 생산 영역에서 상품 유통의 영역으로파급되는 것이다. 라이트는 이렇게 생산 영역에 중심성을 부여함으 - P414

로써 오늘날 주류 사회과학과 정반대의 견해를 취한다. - P415

하트와 네그리에게, 또 파올로 비르노 같은 다른 다중 이론가에게다중 개념은 형이상학적 외양을 지닌다. 가르시아 리네라와 네그리를구별해주는 또 다른 차이점은 네그리의 다중이 ‘포스트모던‘하다는점이다. 자본주의가 다른 모든 것, 곧 조직된 노동자계급, 국민국가, 전근대적 공동체를 파괴했을 때 다중은 출현한다. 가르시아 리네라에게 - P419

신자유주의는 노동자계급을 없앰으로써 그 구성원을 전근대적 사회형태로 퇴보시킨다. 따라서 다중은 전근대성과 탈근대성(포스트모더니티)의 혼합물로 간주해야 한다. - P420

호네트는 인정 이론이 근대 역사에서 억눌린 지적 전통의 일부이지만 지배적 전통에 맞서 복원되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지배적 전통은 마키아벨리와 홉스를 기원으로 하며 모든 종류의 자유주의를 포함한다. 이 전통은 사회가 개인들, 기껏해야 합리적 계산에 몰두하는 개인들로 이뤄졌다고 여긴다. 호네트는 인간 행동이 지닌 도덕적이거나 규범적인 구조를 강조함으로써 이 전통에 상반된 견해를취하고자 한다. 그가 보기에 자신을 있는 그대로 수긍하고 합리적 계산에 몰두하는 개인들의 능력이란 이미 그들이 남들에게 개인으로서인정받았음을 전제로 한다. - P434

엠벰베는 사람들이 통상 ‘아프리카‘라 말하는 것이 오늘날 지구 - P446

곳곳으로 퍼졌음을 확인한다. 아프리카 대륙은 노예무역의 피해자인노예에서부터 오늘날 ‘두뇌 유출 brain drain‘로 빼앗긴 의사나 정보과학자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디아스포라를 낳았다. 반대로 네덜란드계 백인, 유대인, 중국인, 말레이시아인, 인도인같이 흑인이 아닌 수많은 인구가 세대에 걸쳐 아프리카 대륙에 자리 잡았으며, 결국 이들은 전적으로 아프리카인이다. 아프로폴리터니즘은 ‘세계에서 아프리카인이라는 것‘에 내재한 이런 다양성을 인정하고, 이 다양성을 지구의 다른세계에서 나오는 코즈모폴리터니즘과 연결하기를 열망하는 초국가적문화다. - P447

라클라우와 무페에게 계급 관점의 포기는 적대 개념의 중시와상관성이 있다. "노동자계급 정체성이 더는 하부구조의 통일 과정에기초를 두지 않는다면 (..) 노동자계급은 자본가계급과의 쪼개어짐split에 의존한다. 이 쪼개어짐은 자본가계급에 대한 투쟁 속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 (...) 그리하여 ‘전쟁‘은 노동자계급 통일의 조건이 된다."
어떤 ‘본질‘도 사회문제의 기초가 되지 못한다면 그 속에서 살아가는실체들은 필연적으로 관계적일 수밖에 없다. - P452

포스트모더니즘의 피상성에 개인의 새로운 감정적 구조가 조응한다. 제임슨에게서 보이는 흥미로운 한 요소는, 그 자신이 권장하는 완전한 역사주의에 부합하여, 앞서 언급한 역사적 시기 구분과 밀접하게 상호작용하는 감정의 사회사를 구상한다는 것이다. 후기자본주의는 문화를 발생시킬 뿐만 아니라 오늘날 등장한 주체 유형을 조 - P465

건짓는 새로운 종류의 감정 또한 발생시킨다. - P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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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은 ‘기생적인‘ 구조다. 그것은 다중의 창조하고 협업하는 능력을 먹고 산다. "프롤레타리아계급 권력은 자본에 한계를 부과한다. 그 권력은 위기를 결정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변혁의 성격과 근원을 규정한다. 프롤레타리아계급은 자본이 미래에 채택해야만 할 사회 형태와 생산 형태를 바로 지금 고안한다." 제국과 다중의 관계는 애매하다. 한편으로 제국은 다중에서 유래하는 혁신의 요소를 흡수할 필요가 있다." 다 - P173

른 한편으로 제국이 다중에 미치는 영향은, 이미 고정돼 있거나 이미존재하는 형태를 위해 다중의 창의성을 억제하는 경향이 있다. 제국과 다중의 관계를 생각하는 이런 방식은 하트와 네그리에 앞서 이미존재했다. 홉스에게 리바이어던 Leviathan의 구성은 다중을 전제 조건으로, 심지어 존재 이유로 삼는다. 그 맥락에는 다중을 규율하고, 거기내재하는 내전의 위협을 줄이려는 목적이 있다. - P174

그들은 오늘날 지배계급이 초국적 특성을 띤다는 생각에 동의한다. 그렇지만 두 가지 점에서 패니치의 견해는 제국』 저자들과 구별된다. 한편으로 패치는 세계화 때문에 국가의 힘이 약해진다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 그에게세계화는 무엇보다 국가 정책의 산물이다. 다른 한편으로 패치는오늘날 미국 제국이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다고 주장한다. 특히 하트와 네그리가 미국의 제국주의적 힘을 제한하는 것으로 본 국제기구들은, 오히려 미국의 힘이 세계를 지배하는 데 매개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그 힘의 강력한 지지자다. - P186

베니딕트 앤더슨은 민족이 ‘상상된 공동체‘라고 주장한다. 이 말은 곧 민족이 물질적 기원을 지닌 표상들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는 뜻이다. 그 표상들은 제도로 구현되고 사회 현실을변형시킨다. 네언에게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비록 민족주의가 ‘객관적‘
과정(불균등 결합 발전)의 산물일지라도 민족주의의 성공은 민족주의가해당 개인들의 ‘정체성‘을 지배함을, 그들의 ‘감정‘에 호소함을 전제 조건으로 한다. 이 현상에 깃든 감정의 하중이 민족주의의 ‘낭만적‘이고
‘인민적‘인 억양을 설명해준다. 민족주의는 일종의 ‘계급 간‘ 현상으로, 한 영토 내에서 사회계급들끼리 갖는 결연을 상정한다. - P220

표상과 정서affect를 모두 동원한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하나의 ‘정체성‘이다. 그러나 그 내용은 민족 정체성과 구별된다. ‘탈민족적인 정치적 정체성‘은 전통이나 특수한 역사에 근거하지 않고 ‘정치질서와 기본법의 원리‘에 기초를 두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애국심은 문화가 아닌 추상적인 원리, 인권이나 법에 의한 통치 같은 것을 대상으로 한다. 이것이 하버마스가이 새로운 애국심을 ‘입헌적constitutionnel‘이라 규정하는 이유다. 하버마스가 보기에 개인들은 자신들의 민족적 전통 자체에는 더 이상 애착을 갖지 않는다. 그들이 전통의 어떤 측면, 예컨대 요리·스포츠·음악등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기 때문은 아니다. 이는 ‘구체적인 총체‘로서의 민족이 더 이상 서방 국가에서 그런 의미로 기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민족은 19~20세기에 그랬던 만큼의 열정을 더는 일으키지 못한다. 이제 시민들은 ‘함께 살기‘의 원리, 양심과 표현의 자유, 투표권, 거주 이전의 자유, 법 앞의 평등 같은 주제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 P230

유럽에 관한 발리바르의 성찰은 경계 새념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 "유럽은 그 자체로 하나의 경계이거나, 더 정확하게는 경계들의 중첩이고, 결국 세계 역사와 문화의 관계들의 중첩(여하튼 그 관계들의 커다란 한 부분)이 유럽 안에 투영되어 있다." 문화, 언어, 종교, 지적이거나 정치적인 전통이 만나고 충돌하는 장소인 유럽은 엄밀히 말해 경계를 갖지 않는다.
왜냐하면 유럽 자체가 하나의 경계이기 때문이다. 이 특별한 지위는근대 세계에서 유럽 대륙이 차지하던 중심적 자리로부터, 특히 그 제국주의적 과거(그리고 현재)로부터 유래한다. - P233

예외상태는 근대성 내부에 구체제가 지속함을 나타내지 않는다. 예외상태는 ‘민주주의 혁명‘ 전통의 순수한 산물이다. 그 근대적 형태가 프랑스 혁명에서 유래하기 때문이다 이는 명백한 사실이다. 예외상태가 민주주의 법질서의 정지에 있다고 한다면, 민주주의 질서가 존재할 때에만 예외상태는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일단 인정하고 나면, 진짜 문제는 민주주의 체제의 본질과 관련해 어떤 결론을 이끌어내야 하느냐는 것이다. 외상태는 근대의 모든 시기에 민주주의를 그 그림자처럼 뒤따랐고, 이 그림자는 오늘날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아감벤에게 예외상태란 폭력과 법이 필연적으로 맺는 내밀한 관계를 드러내준다. - P260

브레너는 ‘영광의 30년 동안 부가가치의 분배가 임금노동자에게상대적으로 유리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는 신자유주의 시대인 1970년대 말부터 시작된 노동운동 파괴가 이윤율 저하를 막았다는 생각에도 동의한다. 그러므로 결국 임금 관계는 수익성의 등락에 영향을 끼친다. 하지만 그것은 절대로 주요 설명 요소가 될 수 없다. 브레너가 보기에 주된 요소는 생산자들 간 조정되지 않은 국제경쟁에서 찾아야 한다. 브레너가 조절이론을 반박하고자 제시한 논거가운데 하나는, 힘의 관계가 임금노동자에게 유리했던 나라건, 그렇지 않았던 나라건 간에 모든 선진국이 위기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것이다. 조절이론의 가설이 사실이었다면 오직 전자의 나라들만이 타격을 입었어야 했다. 브레너가 봤을 때 여기서 도출될 수 있는 결론은하나다. 바로 위기의 기원을 자본주의의 전반적 동역학에서 찾아야한다는 것이다. - P282

1970년대에 출현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관료화하지 않고 네트워크화한 자본주의다. 볼탕스키와 시아펠로는 그것을 ‘연결주의 connexionniste‘라 부른다. …
이 체제는 결점을 이점으로 바꾸어 경력 이동성을 높이고, 결국 임금노동자를 ‘기획projet‘이 진행되는 일정 기간에만 고용하게 했다.
그러나 경력 불안정성은 임금노동자의 동기 유발을 더욱 어려운 과제로 만들었는데, 이제 임금노동자가 더는 기업에 감정적으로 투자할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 P312

볼탕스키는 2000년대에 우리가 테일러주의와 노동 규율의 공세적 귀환을 목격해왔다고 말한다.‘‘‘ ‘자본주의의 새로운 정신‘이 순전히 환영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 정신은 실제로 존재했다. 그러나 짧은 시간 동안만 존재했고, 더군다나 그 영향력은 가장 ‘선진적인‘ 자본주의 국가에 지리적으로 국한되었다. 전 지구적 차원에서는, 예컨대 중국이나브라질에서는 테일러주의 아래 임금노동자의 고전적 모습이 언제나우세했다. 1970년대 이후, 더욱이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자본주의는장기간 위기에 빠져 있다. 그리고 이 위기가 이전 10년간을 지배했던 ‘자유지상주의적‘ 정신을 누르고야 말았다. - P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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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공의회를 소집하라고 아우성입니다. 그러나 공의회를 소집한들 교회 우두머리들의 현 상태에서 도대체 무엇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공의회를 통해 교회를 개혁한다는 건 인간의 힘으로는 더 이상 안 되는 일이고,
다만 하느님께서 임하사 우리가 모르는 어떤 방법으로 우리를 도우셔야 합니다." 그러나 그 설교자가 꿈도 꿔보지 못한 방식으로 그 도움은 이미 오고 있었다. 그 "새 지식"(New Learning)은 교회를 개혁하게 될 그 거대한 운동을 향해인간들을 더디지만 착실하게 인도하고 있었다.
메디치가가 학문 증진을 위해 쏟은 노력에 힘입어 발굴된 오래 전의 저서들이 모든 인류의 공동재산이 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계시와 같았다. - P210

정세가 이렇게 돌아가게 만든 사건은 프랑스의 샤를 8세가 나폴리 왕국을 치기 위해 이탈리아를 침공한 사건이었다. 만약 위대한 자 로렌초가 여전히이탈리아 정계의 중추에 서 있었다면 틀림없이 이 침공을 막기 위한 묘책을강구했겠지만, 그럴지라도 조만간 비슷한 결과들이 잇달아 발생했을 것이다.
이탈리아 제국의 세력이 기울던 때 공교롭게도 다른 나라들의 세력이 팽창함으로써 이탈리아에 대한 외국의 침공이 언제고 밀어닥치고 말 것이 필지의 사실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로써 이제 우리는 유럽 정계를 이끌고 가던 베네치아, 밀라노, 피렌체, 나폴리, 로마를 제치고 프랑스, 스페인, 독일, 영국이 유럽을 주도함으로써 그런 변화가 일기 시작하던 때로 접어들게 된다. - P256

루터가 한 일은 이미 내연성을 가진 물질들에 불을 붙인 것이었다. 그리고 이 ‘새 지식‘은 주로 메디치가에 의해서 태어나고 양육되고 보호되고 살이 붙었다. - P336

실로 여러 세기가 지나면서 로마 교회의 수장이 이런 식으로 말하거나 이런 정조에 고취된 사례는 다시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부패했던 그 시대에서 이런 유형의 교황은 모든 정파에 혐오의 대상이었다. 자기들의 교리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비판한 루터의 추종자들, 교황이 올바로 지적했듯이 그 문제를 정치 목적에 이용할 수 있을 때만 관심을 가졌던 독일 제후들, 애지중지하던 모든 것을 앗아간 개혁을 증오한 추기경들, 그리고 누구보다도 막대한 자금을 뿌리면서 도덕성 같은 것에 구애받지 않는 타입의 교황을 사랑하던 로마인들에게 하드리아누스 6세는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추기경들과 로마인들은 하드리아누스 6세와 그의 통치 방식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역겨워했다. 이 극단에서 저 극단으로, 편한 것을 추구하고 사치스럽고 관대 - P345

했던 레오에게서 엄격한 개혁자 하드리아누스로 바뀐 것은 너무나 극단적인대조였다. 교회가 개혁이 필요함을 시인하고 개혁을 단행하고 있는 교황이란그들로서는 지지할 수 없는 존재였다. - P346

클레멘스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황제와 분쟁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성하께서는 황제와의 우호 관계가 그토록 두려워하던 공의회를 막아준다고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성하께서는 내키는 대로 자신을 지배하고 끌고가던황제에 대한 사랑이 조금도 없으면서도 황제가 무슨 결정을 하든 그것이 내키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싫어하는 내색 한 번 못한 채 동의했습니다. 이 모든게 다 공의회를 두려워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황제가, 그리고 그보다 한층 더 공의회에 대한 두려움이 그를 꽉 사로잡고 있던 이런 고통스런상황, 사실상 노예 상태라고 할 만한 상황을 자각하고서, 그는 매우 기독교적인왕(프랑수아 1세)에게 더욱 동정을 얻을만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공작딸의 결혼은 그런 이유에서 계획한 것입니다. 성하의 생각은 자기 조카딸을 프랑스 왕의 아들과 결혼시킴으로써 자기 가문과 자기 자신의 문제, 특히그토록 두려워하던 공의회 문제를 뒷받침할 두 개의 기둥을 놓는 데 있었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종교적 분쟁을 어느 정도 가라앉힐 수 있고, 적어도 두려운공의회를 피할 수 있다는 기대가 그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 P386

카테리나가 이해받지 못했다는 것은 물론이다. 그녀가 추진하려고 한 노선은 그 시대의 수준을 몇백 년 앞선 것이었다. 그것은 오늘날의 입헌 군주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고, 2백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유럽의 모든 나라에 도래한 모든 종교에 대한 평등한 관용 정책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카테리나가 화해를 이끌어 내기 위해 방법이란 방법은 다 사용했다. 양 진영을 다 만족시킬만한 조치들을 취했다. 로마 가톨릭 교도들뿐 아니라 프로테스탄트교도들도관리로 기용했다. 기즈의 공작과 콩데의 제후 같은 철천지 원수들에게 서로화해의 악수를 하게 만들었다. 시녀도 로마 가톨릭 교도만 아니라 프로테스탄트 교도들 사이에서도 많이 선택했다. 1555년에는 프랑스에 프로테스탄트교회가 하나뿐이었으나, 6년 뒤에는 그 수가 2천 개로 늘었다. 그러나 프랑스가 그런 상태에 처하게 되자 중도 노선은 인기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 처하게되면 중도 노선을 취하는 사람이 ‘미온적 분자‘라는 평가를 받게 마련이다. - P449

정치에서 자유의 정신이란 자연히 종교 자유 사상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카테리나 측에서 이 정신으로 거둔 한 가지 결실은 대단히 돋보이는 것이었다. 이는 종교재판소의 공포가 얼마나 위력적이었는지를 기억할 때, 종교재판소가 주변의 모든 나라들 - 스페인, 네덜란드, 그리고 그밖의 모든 로마 가톨릭 국가들에서 악명을 떨치고 있던 상황에서 카테리나 데 메디치가 평생 로마 가톨릭 신앙을 프랑스의 국교로 삼기를 과감히 거부했다는 사실만큼 카테리나 데 메디치에게 호감을 갖게 하는 것도 없다. 이 일로 카테리나는 교황과 광적인 스페인의 펠리페 2세에게 증오의 대상이었는데, 비빌 언덕조차 없던 프랑스가 이들의 복수를 떨쳐 버릴 수 있었던 데에는 카테리나가 ‘표리부동‘하다는 숱한 비판을 받아가며 펼친 외교에 힘입은 바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테리나는 이 점에서는 무쇠와 같았고,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참혹한 고문과 죽음에서 보호해 준 유일한 은신처였다. 주변 나라들에서이런 이유로 목숨이 위태로워진 사람들이 카테리나에게 와서 보호를 요청하고 실제로 보호를 받은 경우를 거듭해서 보게 된다. - P502

메디치가가 맞이한 유일한 스페인계 여성인 엘레오노라 디 톨레도가문이 외국에서 맞이한 여성들은 그녀를 빼놓고는 모두 프랑스나 오스트리아계였다는 그 가문의 역사에서 그녀가 실제로 받은 지위보다 훨씬 더 유력한 지위를 차지할 가치가 있다. 1539-1549년에 코시모가 권력의 기반을 다질 때 그녀가 발휘한 역할은 제대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엘레오노라디 톨레도는 그 가문의 제2설립자로 간주돼야 옳다. 코시모가 약관의 나이에재산도 가문도 친구도, 그가 장악한 취약한 권좌를 뒷받침할 영향력도 없을때 그녀가 그에게 제공해 준 지원은 지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녀의지원이 없었다면 그는 얼마 못 가서 권좌를 잃었을 것이고 목숨마저 부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코시모가 과연 어떻게 그처럼 한미한 상태에서 그렇게 빠른 시간 안에 그렇게 확고히 권력 기반을 다졌는지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해왔지만, 그 비결은 엘레오노라 디 톨레도에게 있다. - P603

코시모 1세는 이렇게 그가 맡은 것과 남긴 것을 비교해야만 올바로 평가할수 있다. 그는 능력 면에서 일찍이 피렌체를 당대의 모든 경쟁국들의 우위에서게 하고, 이탈리아의 예술과 학문의 수도로 만든 메디치가 조상들에게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 이러한 능력뿐 아니라 관대하고 숭고하고, 흔쾌히 용서하고 적에게 자비를 베풀고, 품행이 단정하고 백성을 동정하는 품성들을 아울러 겸비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런 품성들과 거리가 멀었고, 그의 통치는 철권을 휘두른 전제군주의 통치였다. - P614

여러 세기에 걸쳐곤팔로니에레를 포함하여 국가의 고위 관직을 차지해 온 피렌체의 유서깊은가문들 중에서 코시모 정권에 비서로나마 한 사람이라도 등용시킨 가문은 없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강렬한 적개심이 일어나리라는 것은 쉽게 예상할 수있는 일이다. 당사자들은 그런 정서를 감히 표출하지는 못했지만 그럴수록안으로 더욱 깊이 새겼다. 차라리 ‘자유‘를 빼앗아가 내전을 겪었더라면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용서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피렌체의 유력한 - P660

가문들이 몇 세대에 걸쳐 지녀온 모든 권력과 중요성을 한순간에 앗아간 일은 용서를 받을 수 없었다. 그것은 치유할 수 없는 상처였다. 메디치가는 다른 가문들과 다를 바 없이 무흠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혹시 천사들이었을지라도 공화정이 군주정으로 바뀌었다는 단순한 사실로 인한 적개심만으로도 그들에게 가해진 모든 비판들이 일어나기에 충분했다.
그러므로 메디치가가 황제들과 교황들의 지원을 받아 왕가가 됨으로써 공공연한 공격이 더 이상 성공할 가능성이 사라지자, 이 다른 가문들은 겉으로는 어쩔 수 없이 복종하면서도 속으로는 이 가문이 성취한 고지에 강한 질투심을 쌓아갔고, 그 질투심을 더 이상 노골적인 공격으로 표출하지 못하고 메디치가의 명예에 먹칠을 하는 범죄 이야기들을 은밀히 유포함으로써 표출했다. - P661

페르디난도 2세의 재위 말기에는 왕자 레오폴드의 제안으로 두동생 조반니 카를로와 레오폴드 이들은 가문의 공통 재산이었던 그림들과무관하게 각각 방대한 분량의 그림들과 그밖의 다수의 예술품들을 소장했다-는 자신의 소장품들을 다 내놓아 피티 미술관과 우피치 미술관을 조성했는데, 조반니 카를로가 소장하고 있던 예술품들은 주로 대공 궁전의 미술 - P710

관(피티 미술관)을 조성했고, 레오폴드가 소장하고 있던 예술품들은 우피치 미술관을 조성했다. 동시에 페르디난도는 동생들이 내놓은 이 예술품들에다 자신이 가문의 수장으로 물려받은 그림들과 아내 비토리아 델라 로베레와 함께우르비노에서 구한 그림들을 덧붙였다. - P711

메디치가는 사라졌으나 그들의 업적은 살아 있다. 그리고 그들이 남긴 모든 것들 중에서 그들의 마지막 행위인 증여를 통해서 온세계가 즐기는 것과, 오래 전 그 가문의 설립자가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나라에 기증하도록 심어 놓은, 심지어 부당과 좌절감 속에서 고통을 당할 때조차 그렇게 하도록 심어 놓은 그 가문의 전통과 원칙들을 능가하는 것은 없다.
오늘날의 어느 이탈리아 저자는 이 행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이 행위로 공주 안나마리아는 그 나라에 가장 중요한 예술품들을 헤아릴수 없이 확보해 줌으로써 이탈리아에게 영원히 쇠하지 않는 칭호를 얻어 주었다. 그것은 실로 그녀의 조상들이 저지른 많은 과오들을 상쇄하고 덮을 가치가 있는 행위였다." - P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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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길로이, 듀 보이스
포스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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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성장의 ‘장기파동‘이 나타남에 따라 프랑스에서는 이놈이 가속화하고, 삶의 질이 높아지고, 여가가 일반화하고, 특히 세르주 말레serge Mallet와 알랭 투렌 AlainTouraine 이 분석한 ‘신노동자계급‘이 등장했다. 고등교육의 대중화는 주관적으로 인식되는 사회적 기회와 실질적인 사회적 기회의 격차를 두드러지게 했다. ‘소외‘라는 감정은 이 격차 속에 존재했다. - P72

‘주요한 전선‘은 자본과 노동의 대립이었다. 그런데 20세기 후반에 ‘부차적 전선‘은 크게 확장됐다. 그중에서도 특히 여성 투쟁(‘제2의 물결‘ 페미니즘), 민족해방운동, 동성애자 운동,
이제 막 태동한 정치생태학écologic politique 이 눈에 띈다. 이런 전선은 경제적 억압의 중심성을 약화하고, ‘착취‘ 개념보다 더 ‘포괄적인‘ 개념의 필요성을 느끼게 했다. 그리하여 ‘소외‘ 개념이 그 역할을 하게 된다. - P74

구조주의 패러다임은 1960~1970년대의 이론적 계기‘moment‘를 떠받치던 지주 가운데 하나였다." 이후 수십 년간 구조주의는 전 세계로 퍼져나갔으며 비판이론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 마르크스주의와 함께 구조주의는 모든 사상 부문에 영향을 끼치고 다른 흐름들과 매우 체계적으로 ‘교배‘된 유일한 흐름이다. 마르크스주의적페미니즘, 생태학, 문학 연구가 존재하는 것처럼 구조주의의 영향을받은 페미니즘, 생태학, 문학 연구가 존재한다. - P87

1960~1970년대 비판사상은 두 가지 주요한 특징이 있다. 하나는 해방 주체의 다양화, 다른 하나는 권력에 대한 ‘탈중심적‘ 접근을 위해 ‘국가중심적‘ 권력개념을 점진적으로 포기한 것이다. 이런 특징은 당시 전통적인 노동자계급의 정치적·노동조합적 기구가 겪은 위기의 결과인 동시에, 특히 - P97

페미니즘·반식민주의·생태학 주변에서 형성된 ‘부차적 전선‘의 증가에서도 유래한다. 그런데 이런 특징은 1990년대 후반에 출현한 오늘날의 비판이론에서도 볼 수 있다. -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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