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러시아 1891~1991
올랜도 파이지스 지음, 조준래 옮김 / 어크로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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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은 혁명을 심화하고 확장했다. ... 볼셰비키는 총칼을 사용해 러시아 혁명을 동유럽으로 수출했다. 이런 측면에서 냉전은 1917년 볼셰비키가 시작한 국제 내전의 연속으로 보아야 한다. ... 레닌의 권력 장악은, 러시아처럼 후진적인 농업 국가에서는 혁명이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없으며 산업화에 필요한 자원을 제공해줄 국가나 더 선진화된 산업 국가에서 혁명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발상에 근거해 있었다. 고르바초프는 제외하더라도 스탈린, 브레즈네프, 안드로포프는 모두 이런 신념을 공유했던 레닌주의자들이었다. ... 이러한 이유로 나는 혁명이 1991년 소련 체제의 붕괴와 함께 끝나는 100년의 단일한 사이클로 다뤄져야 한다고 본다. - P9~10


1905년 1월 9일 '피의 일요일'의 대학살을 규탄하는 파업과 시위가 일어났다. '피의 일요일' 사건은 차르 정부 권위에 대한 대중의 도전으로 갈수록 급진적인 반대 세력으로 비화되었다. 노동자 뿐 아니라 이는 농촌에도 확산되었다. 국민들은 국회를 만들고 입헌군주제를 설립하기를 요구했다. 차르 정부는 흔들렸지만, 무너지지는 않았다.  다양한 반정부 운동이 정치적으로 결집하지 못했고 군대는 정부에 여전히 충성했다. 일본과의 전쟁을 빠르게 중단한 정부는 자유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 사이를 벌어지게 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1906년 러시아는 의회 시대에 들어섰으나 황실은 여전히 정치 권력의 중심으로 남아 있었다. 입법권을 가진 두마는 차르와 귀족이 지배하는 상원의 동의 없이 의회에서 법안을 통과시키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차르는 두마의 요구가 급진적인 것으로 여겨 해산을 명령했다. 여러 정당들은 민중을 모아 이를 규탄하고자 하였으나 민중의 힘은 모이지 않았다. 총리 스톨리핀은 각 농민 가정에 공동경작지를 사유재산으로 전환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려 했다. 황실과 이권을 뺏기기 싫은 귀족 이하 전제군주정 옹호자들은 결집했고 스톨리핀의 개혁 시도를 무효화했다. 이후 그가 암살당하며 개혁의 동력은 꺾이고 말았다.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차르는 선전 포고 후 두마의 자진 해산을 선언했다. 그러나 러시아 내부에 전쟁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와 더불어 개혁을 지지하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차르는 못이기고 두마를 재소집한다. 1916년 무렵 황후와 라스푸틴의 영향력은 상당했던 모양이다. 두 사람에 의해 두마는 다시 폐회되어 정치 개혁의 기회를 잃어버렸다(같은 해 12월에 라스푸틴은 살해되었다). 게다가 황후가 군사 기밀을 독일 측에 전하고 있다는 소식이 퍼지는 바람에 군대 내 사기와 규율은 떨어지고 이는 차르와 군주정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졌다.


1917년 2월 혁명은 이런 배경에서 벌어진 것이다. "차르를 폐위하라! 전쟁을 그만하라!" 총파업과 시위는 이어졌다. 차르는 당연히 무력을 동원하여 군중을 탄압했다. 2월 26일(피의 일요일)에는 유혈 사태가 벌어졌는데 군인들이 차르와 군중 중 군중 편에 서면서 폭동의 규모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두마 지도자들은 긴급히 임시정부를 구성했고 소비에트는 임정을 지지하겠다 발표한다. 이 체제는 10월까지 지속되며 이중 권력 체제를 지탱하게 된다. 황제는 황위를 포기하고 미하일 대공에게 권좌를 내주었으나 군중이 반발하며 그도 권좌에서 하야하며 러시아 마지막 군주정인 로마노프 왕조는 막을 내렸다.

그러나 소비에트와 임시정부 모두 농민과 노동자들의 요구 사항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레닌은 임정에 대한 지지를 그만두고 노동자들에 대한 무장, 소비에트에 모든 권력이 주어져야 한다 선언한다(4월 테제). 


레닌은 소비에트를 비롯한 다른 정당은 모두 반대하며 볼셰비키에게만 권력이 집중되기를 원했으나 대다수 볼셰비키 지도자들은 좀 더 신중한 입장이었다. 그러나 군대 내에서는 소비에트들이 이미 볼셰비키의 수중에 들어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드디어 군사혁명위원회가 페트로그라드의 부대를 장악하고 소비에트를 볼셰비키가 통치하는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케렌스키가 카자크 부대를 규합하여 볼셰비키에 대항했지만 이때 부르주아 세력, 사회주의 우파, 중도파 등은 세력을 잃었다. 


1918년 1차 대전의 강화 조약을 맺으며 전쟁이 이제 끝나는가 했으나 백군과 적군 간에 내전이 곧이어 발발하였다. 전쟁으로 집단징집제가 시작되면서 물자는 부족해지고 탈영은 줄을 이었다. 개인 상업활동은 폐지되고 대부분의 산업이 국유화되었으며 배급제를 통한 사회 통제가 강화되었다. 적군의 물자(사람 포함) 징발로 인해 기아까지 가는 상황이 되자 국민들은 볼셰비키에 등을 돌리게 된다. 농민들은 자치를 회복하기를 원했고 파업은 계속되었다. 


레닌은 1921년부터 두통과 피로에 시달리며 병마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이후 레닌이 자리를 비운 동안 정부는 스탈린, 카메네프, 지노비예프 세 사람으로 이루어진 삼두정치체제를 통해 운영되었다. 레닌은 몸이 회복되었다가 다시 뇌졸증이 찾아왔다. 스탈린은 레닌 사후에도 여전히 집단지도부 하에 있었기 때문에 최고권력자는 아니었다. 1930년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두각을 나타낸다.   

1932년 러시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소비에트의 5개년 계획은 배급량을 삭감하고 노동 규율을 강요하는 등 국민 생활의 질을 떨어뜨렸고 이에 불만에 찬 국민은 소비에트 체제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며 파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집권자인 스탈린은 당을 정화한다는 명목 하에 반대자(로 생각되는 이)는 숙청한 반면 엘리트 노동자는 승진을 시키면서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만들었다. 스탈린 집권부는 그동안 진행한 공산주의로서의 방향을 전환하여 좋은 삶에 대한 이상을 그리며 소비에 대한 욕망을 부추겼다. 스포츠, 오락 등을 강화한 반면 가부장 가족의 서사는 돌아온 것이다. 


스탈린은 1937년부터 1938년까지 또 숙청을 감행한다. 이전에도 반대파로 몰며 숙청을 하기는 했지만 이번의 경우는 그 시기와 규모에서 앞선 시기를 압도했다. 구볼셰비키를 축출하고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부하린 등 자신에게 위협이 될 만한 리더들을 몰아냈다. 숙청 대상자에는 일반 평범한 시민들도 포함되어 있었던 만큼 유혈, 대량 살인이 벌어졌다. 소수 민족들은 삶의 터전을 잃고 대규모 이동을 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이후에 고향에 돌아간 이들이 얼마나 될까). 안타까웠던 것은 숙청자를 찾는 과정에 밀고자나 제보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물질 보상 등의 혜택이 주어지는 등 자발적인 동기도 있었지만 협박 등에 의한 비자발적인 동기도 있었다. 차라리 아예 모르는 사람들이면 모를까 지인에게서 이런 일을 겪는다면 트라우마가 상당할 것 같다. 어디 비단 이 사건 뿐이랴. '네가 죽지 않으면 내가 죽어.' 이런 상황이야말로 아비규환이 아닐런지...


러시아는 장기적으로 코민테른 주도 하에 러시아 혁명 사회주의를 세계에 수출하는 한편 외무인민위원회를 통해서 서방과는 관계를 이어가기를 원했다. 스탈린은 파시스트의 위협에 맞서기 위한 연합 전선을 펴기 위해 히틀러에게 명분을 던져 주었다. 이후 양국은 불가침 조약을 맺었으나 2차 대전이 발발하는 계기를 만들었으니 결과적으로 크나큰 실수였다. 2차 대전 기간 동안 러시아 국민들은 조국애를 주입받으며 희생을 강요당하는 삶을 살았다.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 이후 미소 냉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러시아는 국가 이념 모시기 경쟁에 돌입, 많은 국가를 소비에트 하에 두려했다. 대부분은 이에 동화되었고 반기를 든 경우는 유고슬라비아의 티토가 유일했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한 뒤 한동안 베리아, 말렌코프, 보로실코프를 중심으로 한 집단 체제가 이어졌다. 그러다 1956년 흐루쇼프가 당에 대한 민중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 스탈린의 테러를 폭로하는 연설을 감행하는데 이는 공산주의를 표방하던 많은 국가들(특히 동유럽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반면 서구 문화가 유입되는 계기도 되었다). 

이어서 집권한 브레즈네프는 보수적 입장을 유지하며 최대한 현 체제를 흔들지 않으려 했다. 이는 내부 통제를 강화하고 동유럽, 베트남, 아프가니스탄 등의 사회주의 국가에 내정 간섭을 감행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고르바초프는 책의 표현에 따르자면 '마지막 볼셰비키'다. 고르바초프는 레닌의 혁명이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은 사람이었으니 이상주의자였다라 할 수 있다(레닌이 살던 시기 전후에 둘이 만났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잠시 했다). 그러니까 그의 생각에 지금이야말로 레닌의 혁명을 통해 소련이 부활할 수 있다 믿은 것이겠다. 레닌은 공산주의는 바로 올 수 없고 그 전에 자본주의를 거쳐가야 한다고 보았다. 고르바초프는 경제적으로 이전에 계획경제에 의한 규제를 폐지하고 페레스트로이카에 의한 시장경제체제로의 전환을 감행한다. 그러나 이는 거대한 인플레이션을 초래했다. 그리고 정치, 사회적으로는 민주주의, 다원주의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이는 헝가리 혁명, 체코 시민운동,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불러오는 등 동독 공산주의 정권의 몰락을 불렀다. 레닌의 이상을 따르다 역설적으로 소련을 위시한 공산주의 정권을 붕괴시킨 원인 제공자가 되다니 참 뭐라 해야 할지.

고르바초프가 이렇게 물러나자 이후 집권한 옐친은 폭발한 민족주의 운동에 대응하여 소련공산당을 금지하고 각 공화국 내 소비에트 경선을 도입하는 조치를 취했다. 현 집권자인 푸틴은 재선, 삼선을 거듭하며 소련 역사에 대한 자부심을 회복하고 러시아는 강대국임을 강조하는 중이다. 


1891년부터 1991년까지 러시아 근현대사를 압축하여 정리한 책이다. 얇아서 부담이 확실히 덜하다. 분량상으로 보면 읽는데 오래 걸리지 않는 책인데도 불구하고 읽는데 오래 걸린 것은 처음에는 관련 책을 함께 읽으며 비교해보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러기엔 여러 일들이 겹쳐 완독하기까지 오래 걸릴 것 같은 거다. 이러다간 앞선 내용이 생각나지 않을 것 같기도 해서 마저 읽어버렸다.


책의 두께감에 압박을 느끼는 분들에게 러시아의 근현대사를 한 번에 접할 수 있는 무난한 책이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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쇳돌 - 사라지는 세계, 사라지는 노동, 사라지는 목소리를 채굴하기
이라영 지음 / 동녘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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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이름은 여러 번 접했지만 책을 읽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신간인 이 책이 노동사이자 한국 광업의 역사의 단면을 볼 수 있겠다 싶어 관심은 있었으나 읽은 분들의 후기가 궁금했다. 좋은 책이라는 반응이 많아서 믿고 읽어도 좋겠다 싶어서 구입은 해놓았으나 다른 책들에 밀려 읽지 못하고 있었는데 우연하게도 이 책을 이달 함께 읽는 책읽기 모임에서 읽을 기회가 생겼다. 읽을 순간은 이렇게 더 빨리 찾아왔다.


작가의 아버지는 양양의 광업소에서 30년을 넘게 일을 했다. 작가는 어린 시절 가족들과 함께 양양에 살면서 광부들의 삶과 생활을 보고 들으며 성장했다. 하지만 부모는 가능한 그녀가 광산의 일에 거리를 두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는 일일까.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곁에서 보고 들은 것이 있었으니 그녀는 언제가 될 지는 모르겠지만 광산이 들여다 보아야 할 과제로 마음 속에 남아 있었다. 국내 광산은 공급 감소와 가격 경쟁력에 밀려 상당수가 사장길을 걸었다. 그녀의 아버지도 1994년 일하던 광업소가 폐광하면서 일자리를 잃었다. “이제는 다 죽었어.”라는 그녀의 아버지의 말이 미뤄둔 숙제를 결행해야할 때임을 주지시켰다. 


광부하면 동굴에서 채광을 하는 모습만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광업은 여러 일로 나뉘어져 있다. 크게는 직접 작업장에서 일하는 생산직과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사무직으로 나뉜다. 이 생산직은 다시 갱 안에서 일하는 부서와 갱 밖에서 일하는 부서로 나뉜다. 갱 안에서 직접 광물을 캐는 채광직이 우리가 흔히 보아온 광부의 모습이고 이 채광을 위해 각종 기술을 지원하는 부서, 채광한 광물을 운송하는 부서 등 여러 부서가 있고 갱 밖에서도 전기나 중장비를 다루는 각종 기술직과 운반직, 채광한 광물을 선별하는 업무인 선광과가 있다. 쇳돌을 고르는 ‘선광’은 거의 여자들 몫이었다고 한다. 1950년대 한국 수출품 중 2위가 흑연, 철광석이었다 하니 그 규모를 가늠할 만하다. 


양양 광업소는 국내 최대 자철을 생산하던 곳으로 일제강점기인 1933년 시험 채광을 시작하여 1938년 광산사업소를 짓고 광산 채굴을 시작했다. 1941년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시작한 이후 양양 동굴에서 캐낸 철광석은 일본으로 건너갔다. 1956년 국유화된 후 채굴을 재시작했고 1973년 포항 제철이 생기기 전까지 양양 광업소는 국내에 필요한 수요를 담당하다가 이후에는 생산된 철을 일본으로 수출했다 한다. 

해방 후 양양은 사회적으로 많은 변화를 겪었다. 해방 후 38선이 그어지자 양양은 북한 땅이 되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후 휴전이 되자 남한 땅이 된 것이다. 양양하와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으나 정작 뜻을 찾아볼 생각은 못하고 막연하게 긍정적인 의미로 쓰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알고 보니 차별과 혐오가 들어 있는 말이었다.  

‘양양하와이‘라는 속어를 연구한 이한길은 "양양하와이란 단어의 의미를 역사적 맥락, 군사적 충돌, 당시의 사회적 긴장 속에서 그 의미"를 찾는다. "5년여의 인공생활, 다시 5년여의 전쟁과 점령지로서의 생활, 도합 10여 년의 생활은 이 시대의 양양 사람들의 의식을 완전히 황폐화시키기에 충분했다며 양양하와이의 유래를 더 구체적으로 정리한다. "양양 사람들은 남쪽 사람들과 대화를 할적에는 항상 말 한마디마다 조심을 하였다. 그러니 말이 느릿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에 상대하던 남한 사람들은 양양 사람들을 가리켜 하와이라고 하였다. 마치 외국 사람이 한국말을 하는 것과 같았다고 비유했던 것"이다. 멀리서 보기에는 ‘다 비슷해 보이지만 양양과 강릉은 가까운 지역임에도 미묘하게 말씨가 다르다. 지금도 나는 강원도말을 ‘북한 말씨 같다‘고 하는 사람들을 볼 때 웃기 어렵다. - P180

조심해서 느릿하게 말을 하는 것 뿐인데 이를 하와이라고 표현하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되짚어보면 강원도 사람들의 말이 북한 사람들의 말과 비슷하다고 하여 매체 등에서 너무나 안일하게 코미디 소재 등으로 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고 이를 생각 없이 퍼나르고 배우지 않았나 곱씹게 되었다. 

양양의 이런 이력은 작가의 가족력과도 이어지는 면이 있다. 작가의 할아버지는 1921년생으로 남로당 당원으로서 좌익 활동을 했다. 한국 전쟁 중 할아버지가 실종이 되자 월북을 의심받으면서 가족들은 연좌제에 걸려들었다. 연좌제는 남은 가족들을 정서적으로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을 뿐 아니라 남한 사회 내에서 제도적으로 불이익을 주었다. 원래 작가의 아버지는 군인이 되기를 원했으나 연좌제라는 발목은 그가 온전한 직업을 가질 수 없게 했다. 작가의 어머니는 “네 아버지가 주저앉았잖아. 광산에.”라며 그때 그의 스트레스는 말도 못했다며 삶이 온통 울분에 차 있었다고 표현한다. 주저앉을 수밖에 없다는 말에 함축된 삶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하지 못하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은 엄연히 다르니까. 1978년 여러 노력 끝에 할아버지의 사망신고가 이루어지고 나서야 그녀의 아버지는 광부라는 직업을 비로소 얻을 수 있었다. 그 전에는 늘 빨갱이의 자식이라는 타이틀이 따라다니며 감시 받는 세월을 견뎠을 것이다. 연좌제로 피해를 겪은 그는 광산의 불합리한 환경을 바꾸어보고자 광산 노조를 결심했으나 빨갱이에게는 그마저도 쉽게 허락되지 않았다(여러 번 시도하여 결국 노조위원장까지 갔다고). 게다가 당시 노조는 어용노조로 정부의 구미에 맞는 인사들로 채워져 있었다. 1980년 4월 일어난 사북항쟁은 신군부가 노조를 정화하겠다며 벌이는 과정에서 발생한 갈등과 충돌의 현장이었다. 신군부의 비상계엄령 후 노동법이 개정되어 노조는 산업별 체제에서 기업별 체제로 전환되었고 노조의 힘이 약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1987년 직선제가 시작되면서 노조도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분출했다. 그렇지만 이무렵이 되면 광산은 이미 규모가 축소화되면서 노조의 힘도 발휘되기 힘든 환경이 되었다.

철광산업이 사장길에 접어든 것은 수입산 철광석이 증가하면서 국내 철광 가격이 경쟁력에 밀린 탓이 크다. 석탄산업이 사장길에 접어든 것은 신도시가 건설되면서 아파트가 증가하고 석탄 대신 기름 보일러를 때기 시작하면서 연탄 소비량이 감소되었고 1989년 석탄 산업 합리화 정책에 의해 강제된 측면이 있다. 1995년 정선의 탄광촌은 생존권을 보장해달라며 투쟁한 끝에 합의를 보기도 했다. 이를 비롯해 여러 광산에서 생존권을 위한 투쟁이 벌어졌다. 


광산 투쟁은 다른 산업 노조 투쟁과는 달리 여성들의 참여율이 상당히 높은 것이 특징이(라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광업소와 사택의 거리가 가까워서 자연스레 직장에서 벌어지는 일을 쉽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여성들은 사택촌에서 노동가를 익히기도 하고 서로 정보를 주고 받으며 노조에 힘을 던지기도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작가의 어머니는 작가의 아버지가 노조 위원장으로 집에 몇 달간 자리를 비우는 동안 강릉에서 작가와 함께 있으며 투쟁과는 거리를 두었다. 그런 영향 때문에 작가도 양양 철광산이 폐광 투쟁할 때 여성들의 활약을 몰랐다고 한다. 가정(과 아이)을 생각했던 측면도 있을테고 아버지의 활동이 그녀에게 부담을 준 측면도 있었으리라 보인다.


적지 않은 여성들이 ‘어머니마저‘ 밖에서 투쟁에 참여했을 때 자식들의 위치가 더욱 취약해질 위험이 있다고 생각한다. 여성은 그가치를 지키는 역할을 성실히 수행해야만 정상적인 어머니로 인정받는다. 다른 자원이 없는 여성에게 모범적인 어머니 되기는 중요한 가치다. 1980년 사북항쟁에서도 자식 때문에 참여하지 않은 여성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집단생활이나 다름없는 지역에서 투쟁에 참여하지않는 아내/어머니의 복잡한 입장이 있다. - P272


세상이 변화하고 발전하면서 직업도 사라지고 새로 생겨난다. 어떤 직종은 어차피 ‘없어질 직업이기에 사라지는 수순으로 가는 게자연스럽게 여겨진다. 그러나 직업이 사라진다고 해서 그 일을 하는 사람이 사라지진 않는다. 직업은 사라져도 사람들은 사라지지 않고 어딘가로 꾸준히 이동한다. 그들이 다 죽을 때까지 사회가 그들의 이동경로에 무심할 뿐 사람들 대부분은 사는 동안 꾸준히 일을 바꿔가며 생존한다. 무언가를 이루는 삶이 아니라 ‘견디는‘ 삶은 이름 없이 소멸하고, 이 삶의 경력은 무수한 노동으로 채워진다. - P45~46


일자리를 잃고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공포는 누구나 가지고 있다. 나도 최근 몇 년간 지속해오는 걱정과 불안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AI가 등장하면서 인력이 기계로 대체되는 흐름을 더는 막을 수가 없게 되었다. 대부분의 광업 종사자들은 그 일에만 익숙하던 사람들이라 실직에 많은 이들이 무너지곤 했으리라 짐작한다. 과연 그들이 어떤 식으로 삶을 이어갔을지 궁금했는데 그 이야기도 담겨 있다.


광부들은 공통적으로 경제적 상실을 겪었고 일하던 환경과의 단절 속에서 관계가 분리되었으며 그리움(향수)를 경험했다. 그렇지만 광산 이후의 삶은 천편일률적으로 흘러가지는 않았다. 어떤 이들은 다른 광산을 찾아 떠났고 아예 다른 직종을 찾기도 했다. 아파트가 늘어나던 1990년대 중반에는 아파트 경비원으로 취직하거나 시험을 봐서 주택관리사가 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편 카지노 기계실에서 일하다 이제는 사회복지가이자 서예 강사, 아마추어 연극인이 된 사람도 있다. 그러나 죽어도 여기에서 죽겠다며 그곳을 떠나지 않고 채굴노동자에서 현장 관리 소장이 된 사람도 있다. 광산을 떠나 직업을 찾은 이들은 공부를 해서 시험을 보거나 구직을 위해 적극적으로 뛰어 들고 여러 취미를 가지며 정서를 돌보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면 폐광 후 그 도시는 어떻게 변모했을까. 정동진은 1991년까지 석탄 광산이 있었다가 폐광된 후에는 해돋이 관광지로 성공적으로 변모한 경우다. 광명도 탄광이 있었으나 지금은 테마 산업인 황금 동굴로 알려지게 된 곳이다. 동해는 노천 광산이 있었으나 지금은 거대한 테마파크로 변모했다. 문경도 대표적인 탄광 도시였으나 지금은 사극 촬영지로 더 유명해진 곳이 되었다. 정선 사북은 폐광 후 지역 경제를 진흥시키겠다는 목적으로 들어선 강원랜드로 이미지가 많이 변화한 곳이다. ‘극단 광부댁’은 광산 이야기를 전하는 연극 단체로 구성원들 중 광부 부인들이 있어서 이름이 그렇게 지어졌다. 처음에는 정선 아리랑을 배우는 동아리에서 출발했는데 이제는 도박 중독을 예방하기 위한 시민 연극 단체로 활동 중이라고 한다. 


광업은 이제 한물 간 산업이고 광부도 빛바랜 존재로 느끼는 경우가 많아졌음을 느낄 때 정작 광업 종사자(였)던 사람들과 가족들은 힘을 잃는다(고 한다). 정작 국내 광산은 여전히 300개 정도가 운영 중이고 석회광산은 특히 많이 남아 있다고(정말 몰랐던 사실이다). 


작가는 사라지는 세계, 사라지는 노동, 사라지는 목소리를 채굴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그러나 기억은 온전히 믿기가 어렵고 회고는 증언이 될 수 있는지 여부도 확실하지 않아서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1980년대 이후 자신이 온전히 기억할 수 있는 시기는 해석과 판단이 개입할까봐 거리두는 것이 어려울 것 같아 우려스러웠다고. 


작가는 우려스러웠다지만 나는 이 책이 한 가족의 노동사이자 양양의 광업사로 확장되고 그곳에 살던 사람의 광부로서의 삶과 이후의 세계까지 담아낸 점이 정말 좋았다. 일반 역사책처럼 딱딱하지 않고 쉽게 읽히는데다가 사람들의 이야기에 녹아들다보면 감동과 함께 생각할 점을 많이 얻어갈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 언급하고 싶은 것은 남성 광부의 삶 뿐 아니라 선광부로 일하는 여성의 삶, 그리고 광부 아내로서 사는 여성의 삶과 이야기가 담겨 있다는 점이다. 광부는 결코 혼자 존재할 수 없다. 매일 출근하는 이를 위해 도시락을 싸고 가족을 챙기던 여성들의 삶을 결코 가벼이 여길 수 없는 탓이다. 그들의 지원은 국내 광업이 오랫동안 버틸 수 있었던 힘이 되었다고 믿는다. 


싸우는 사람들이 특별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 일상의 평범한 얼굴 속에 이미 투쟁과 저항의 역사가 흐른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었다. 특별하게 싸우는 사람이 아니라 누구나 싸우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것. 또한 이 싸움은 완벽하지 않고 모순과 뒤엉킨 채 일상을 살아가는 얼굴들이라는 것. 평범한, 싸우는 사람들이 지탱해온 역사의 일부를 기록하고자 했다. 혀가 없다고 취급받은 사람들의 말을 듣고 그목소리를 정리하는 작업이었다. "그저 평범한 삶을 살다가 거대한 사건의 깊은 서사 속으로,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휩쓸려 들어간 작은 사람의 역사"는 여전히 부족하다. - P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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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6-04-12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라영 작가님 책 좋아해서 몇권 읽었는데 이번에 나온 이 책 보면서 작가의 이력을 알게 되었어요. 작가님이 가지고 있는 날카로운 안목이 어쩌면 어렸을 때부터의 환경에 의해 더 많이 벼려졌을거 같다 싶었네요. 저는 이제야 이 책 장바구니 넣어놓았는데 벌써 읽고 쓴 화가님 리뷰 보니 좋네요. ^^

거리의화가 2026-04-13 12:54   좋아요 1 | URL
작가님이 본인의 위치를 거듭 생각하면서 최대한 거리두기를 하려는 모습이 눈에 띄더라구요. 바람돌이 님도 분명 재밌게 읽으실 수 있을 만한 책이라 생각합니다. 최근 읽은 책들 중 가장 영양가 있는 책이 아닌가 싶어요.

희선 2026-04-14 0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광산은 이제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있군요 지금 광산이라 하고 찾아보니 강원도 영월에 있는 상동 광산을 예전에 닫았는데, 다시 열었다는 말이 있네요 그런 게 나오다니... 지구에 있는 건 언젠가 사라질 텐데 하는 생각도 들고,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뭔가를 만들어내지는 못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사람이 지구에 묻힌 광석으로 여러 가지를 만들었을 테니...

사라지는 일, 사람에 따라 세상이 어떻게 바뀌든 적응하기도 하고 적응하지 못하기도 하겠습니다


희선

거리의화가 2026-04-14 09:07   좋아요 1 | URL
광산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을 보고 놀랐어요. 광물 종류에 따라 광산도 다양할텐데 저는 으레 석탄광산만 떠올린 것 같아요^^; 광산에서 광물을 팔 때 처음에는 얕게 파도 나오지만 점점 더 깊숙이 가야 나온다고 하더라구요. 그마저도 더 나오지 않는다면 다른 광산을 찾아가겠죠. 언젠가 지구상에 더는 자원이 나오지 않을 때가 생기겠지요. 사라지는 일과 인간의 노동력에 대해 많은 생각을 갖게 만든 책이었습니다. 어떻게든 인간은 적응할 수 있을까요? 나날이 빠르게 변하는 환경이 때론 무섭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레이스 2026-04-23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980년 사북에 관한 다큐와 탐사보도를 통해 본 진실을 다시 확인할 수 있어 좋았어요. 당시 언론을 통해 각인된 폭도 이미지가 강해서 아직도 그때의 편견을 버리지 못하는 분들이 꽤 계셔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거리의화가 2026-04-23 15:58   좋아요 1 | URL
4월 21일이 사북 기념일이라 올해 MBC에서 다큐를 방영한다고 봤는데 그날 너무 피곤해서 보지는 못했어요. 다시라도 챙겨봐야겠습니다.
지금도 노조에 대한 편견이 있는 것 같아요. 사실 노조라고 다 대기업 노조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노조는 황제 노조에 가까워지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과거 초창기 노조는 절박한 상태에서 투쟁을 위해 만들어진 노조가 대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심지어는 노조가 이념과도 연결되기도 하구요. 색안경은 거두고 다각도로 볼 수 있는 시각을 가지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여자, 생존 전쟁을 치르다 : 행랑어멈과 식모들*우리 시대의 커리어우먼 역사 속 여자, ㅇㅇ하다 4
이아리.권혁은 지음 / 푸른역사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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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은 엄마(또는 할머니)가 먹여 살렸는데˝라는 회고는 한국 사회에서 낯설지 않다. 압축적인 근대화와 산업화를 겪었던 한국 사회는 매우 오랜 기간 여성들의 노동에 의존해 생계를 도모하고 살길을 찾아온 역사였다.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하면서도 여성들은 스스로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혹은 삶의 의미를 찾고 자아실현을 이루기 위해 노동을 했다. - P11~12

의미 있는 내용의 신간이 나왔다. <역사 속 여자 OO하다> 시리즈다. 우선 4권의 책이 나왔는데 덜컥 한꺼번에 사기보다는 한 권을 먼저 읽어보기로 했다. 1권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4권이었다는. 다른 무엇보다 4권의 제목과 내용이 가장 먼저 끌렸다.
이 시리즈가 왜 기획되었는지 독자들 입장에서 대부분 어느 정도 짐작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역사학계에서 일하는 여성학자들은 역사 속 사료를 보고 읽으며 여러 번 한계를 마주한다. 남아 있는 사료와 기록은 대부분이 남성이 쓴 것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료 속에서 아무리 이를 잡고 헤집어봐도 여성들의 목소리를 접하기란 쉽지 않다. 근현대 이후 시기부터 여성들이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그 전에는 그런 경우도 드물었으니 말이다.
이 시리즈는 2024년 여성 사학자들 몇몇이 담소를 나누다 의기 투합하여 기획하게 되었다고 한다.

4권의 내용은 먹고 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다. <여자, 식모 살다>를 통해서 근대 시기 행랑어멈과 식모에 주목을 했다면 <여자, 회사 가다>는 여성이 회사에 취직하고 맞닥뜨린 현실을 다룬다. 여러 사료를 접목하여 사건을 재구성하여 독자가 당시의 현실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행랑은 본래 근대 이전 하인들이 주인이 사는 안채와 분리되어 사는 공간이었다. 그러다 1894년 갑오정권의 개혁 내용으로 신분제가 공식적으로 폐지되면서 노비들이 차차 주인을 떠나자 그들을 대신해서 지방에서 농사를 짓고 살다가 경제적으로 몰락해서 상경하게 된 농민들이 서울 양반집의 행랑채를 채우게 되었다.
식민 지배가 어느 정도 안정되자 단기간만 조선에 머물던 재조일본인들이 가족을 이끌고 상당수 들어오며 서울에 자리하기 시작했다. 확산 중이던 서울의 행랑살이는 주택난이 심화되면서 쇠퇴했다. 게다가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전시 호황을 누린 일본은 젊은 여성 공장노동자들을 고용하는 섬유공업이 크게 발달하였다. 이 때문에 일본 본토에서도 식모 일을 할 만한 젊은 여성이 크게 부족해졌다. 반면 조선의 재조일본인 가정들은 달랐다. 조선인 식모가 일본인 식모에게 주는 급료의 6활 정도만 주어도 기꺼이 일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이들은 조선인 식모를 고용하기 시작했다. 일본인들이 모여사는 진고개에는 치마저고리를 입은 채 발에는 일본식 게다를 신고 딸깍딸깍 소리를 내며 돌아다니는 조선인 여성들이 늘어가기 시작했다 한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는데 식모살이를 하려는 여성들이 어떻게 재조일본인 가정에서 일을 할 수 있었을까. 대부분이 어려운 형편에 돈을 벌기 위해 시골에서 상경한 여성들일테니 서울에 아는 이는 없었을 것이다. 이들은 다름 아닌 직업소개소를 통해서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1920년대부터 주요 도시에 국가적으로 인사상담소가 생기기 시작했는데 1920년대 중후반 무렵에는 인사상담소가 전문 ‘직업소개소‘로 분리되기 시작했다 한다. 직업소개소에서 부르던 공식 명칭은 ‘호내사용인‘으로 여러 직업 중 식모가 전체 중 절반 이상을 차지했을 정도라니 놀랍다.
그러나 당시 식모를 보는 사회적인 시선은 별로 곱지 않았다. 언론도 그렇고 남성들의 편견도 많았다.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먹고 살기 위해 직업을 선택한 경우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허영심 있거나 유혹하는 여성으로 보는 경우가 많았다. 여성들은 범죄에 연루되거나 성폭력 및 인신매매의 희생양이 될 위험성이 많았음에도 사회는 개인에게 책임을 지웠다. 이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 같은 모습인 것 같다.

대학을 간다 했을 때 부모님을 설득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기억이 난다. 하필 나라 경제도 어려웠고 살림이 팍팍했을 때니 말이다. 그래도 여성이 대학을 간다고 해서 이상할 것이 없었던 때였다.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전두환 정부의 정책 때문이다. 전두환 정부는 과외 과열 해소를 명분으로 1981학년도부터 각 대학에 기존 졸업정원의 30퍼센트를 추가 선발하되, 그만큼을 중도에 탈락시키도록 했다.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부에겐 당장 눈에 띄는 치적이 필요했다. 그 일환으로 입시 지옥을 해소하겠다며 과외 금지와 함께 졸업정원제를 내세운 것이었다. 졸업정원제는 대학생 수를 급격히 팽창시켰다. ... 여대생 수 역시 급격하게 늘어났다. 여학생이 점차 고등교육에 진입하기 시작했고, 고등학교만큼은 아니었지만 많은 부모가 딸에게도 대학 교육을 시키기 시작했다. - P102~103
전두환 정부가 과외 금지를 한 것은 알고 있었는데 졸업정원제를 시행했다는 이야기는 자세히 알지 못했다. 아무튼 늘어난 대학생 정원만큼 여학생의 수도 자연스레 늘어난 것이다.

1993년 8월 서울대에 심상치 않은 대자보가 붙었다. A교수의 성폭력을 고발하는 대자보였다. 대자보를 붙인 여성은 조교로 불쾌한 일을 겪었다. 무언가 잘못 되었다를 느꼈는데 전임 조교로부터 자신과 똑같은 일을 겪었다는 사실을 알고 ‘이 사람은 상습범이구나.‘느꼈다. 짐작하겠지만 대자보를 붙인 후 논란과 더불어 거센 후폭풍에 휩싸였다. 그럼에도 그녀가 대자보를 붙일 때 그것을 찢으려는 이들을 막아선 학생들, 대학본부와 학과의 외면 속에서도 먼저 진상조사단을 꾸렸던 학내 단체들, 끝없는 법정투쟁을 함께하며 곁을 지켰던 활동가들, 멀리서 연대의 목소리를 보내 온 시민들, 그들이 있었기에 단 한 장의 대자보가 시대를 움직일 수 있었다.
1999년 2월, ‘남녀고용평등법‘이 개정되며 ‘직장 내 성희롱‘ 개념이 명문화되었다. 또한 사업주가 직장 내 성희롱 예방교육을 의무적으로 실시해야 하고, 성희롱 가해자에 대한 부서 전환과 징계 조치를 취해야 하며, 피해 근로자에게 고용상의 불이익 조치를 취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이 들어갔다. 여성을 채용 공고에서부터 배제하는 일이 법적으로 금지되었고, 이제 직장 안에서의 성희롱이 법적으로 금지되었다.

작고 얇은 책인데 쉬우면서도 알차다. 앞으로도 이 시리즈에 관심을 가지며 읽게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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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1894년 남북접 동학군의 공주 점거투쟁 - 남접·호남 중심 농민전쟁론 넘어서기 와이비 아카이브 2
지수걸 지음 / 역사비평사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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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점거투쟁은 갑오변란과 청일전쟁 등으로 말미암아 크게 달라진 정세와 조건 가운데서 전개된 assembly/occupy(이하 A/O 투쟁으로 줄여 씀)이었다. 이 책의 표제로 ‘모이고 모으자! 점거하고 담판하자!‘라는 슬로건을 특기한 것은 공주 점거투쟁 시기 남북접 지도부가 합의한 공동투쟁의 목표와 방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구호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어떤 과거(의 이야기)이든 후대의 독자는 기존에 누군가가 정리해놓은 역사를 만나는 경험이다. 그리고 이 역사적 정리는 여러 번의 논란과 재고를 거쳐 가장 최근에 정설로 굳어진 것이다. 굳어진 정설을 깨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저자는 감히 그런 도전을 감행했다.

동학농민운동(동학농민전쟁, 동학혁명 등등 다양한 용어가 있지만 이것이 교과서에도 일반적으로 쓰는 것이라 이걸 택하겠다)은 관련 자료와 데이터가 방대히 축적된 만큼 이미 충분히 많은 저서들이 나와 있다.

이 책은 동학군의 2차 봉기로 초점을 맞추었다. 장소는 호남이 아닌 호서, 충청 지역의 공주다. 공주라는 지역 이름만 보면 우금치 전투를 말하려 하는 것이구나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갑오년 항쟁에서 공주를 중심으로 한 호서 지역의 역할이 간과되었기에 이를 복원해야 한다 말한다. 기존에는 지나치게 전봉준 중심의 호남, 남접 집단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동학농민운동의 전개는 기존의 농민 전투(전쟁)이 아니라 임술년 이래 항쟁의 역사에서 어셈블리(도회)라는 말로 상징될 수 있는 비폭력적인 연대와 소통의 모습이라고 말한다. 모두 다 기존의 관점을 뛰어넘는 새로운 내용들이다.

기존 동학농민운동의 서술은 보통 호남 배경으로, 전봉준 중심으로 서술된 측면이 많다. ‘전라도 고부 군수의 학정에 못이긴 농민들이 들고 일어나 봉기를 일으켰고 놀란 정부가 부랴부랴 전주성에서 농민들의 요구를 들어주며 화약을 맺었다. 그러나 새로 파견된 안핵사의 농간에 다시 농민들이 들고 일어나자 조선 정부는 청에 원병을 요청했고 톈진조약의 발효로(구실이겠지만)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했다. 이에 농민들은 반봉건에 반외세 구호를 걸며 들불처럼 일어났다. 그러나 일본군 구식 무기에 밀린 농민군은 우금치에서 많은 사상자를 내며 대패했다.‘ 이렇게 말이다.

동학농민운동에 대해 저자가 말하려고 한 바는 다음과 같다.
첫째, 동학군의 2차 봉기는 남접 집단의 8월 27일 남원 도회나 전봉준의 9월 10일 삼례 재기포령 때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다. 임기준과 이유상 등 공주와 충주 등 호서 지역의 척사유생들이 대원군 밀지나 고종 명의의 「조가밀지」를 받고 동학군과 함께 항일의려를 결성한 때로부터 시작된다고 하였다.
둘째, 기존 연구는 남북접 지도부 사이의 연대가 먼저 이루어진 후 최시형의 9월 18일 기포령이 나왔으며, 이에 의해 북접이 남접 전봉준과 협력하여 연합군을 결성했다고 본다. 공주를 점거하는 투쟁에 남북접 지도부가 합의한 시기는 9월 그믐경이고, 그들이 연대한 이유는 일본군과 관군의 탄압 및 동학 내부의 갈등과 대립을 극복하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셋째, 기존 연구는 11월 8일~11일의 우금치싸움을 포함한 일련의 투쟁을 공주 점거투쟁의 절정으로 이해하였으나 저자는 우금치싸움이 아닌 10월 23일∼25일 공주를 둘러싸고 금강 남북 양안에서 전개된 효포 싸움이 더욱 중요한 사건이라고 주장하였다.
넷째, 남북접 동학군의 사망자 통계 사상자의 숫자가 과장되었으며 기존 연구는 공주 점거투쟁에서 동학군이 대규모로 참여하고 대규모 살상을 당했다고 했다. 그러나 정작 동학군의 대규모 사망은 그들이 정식으로 해산한 11월 중순 이후 집단 학살로 나타났다고 말한다.
다섯째, 저자는 동학 연합군의 공주 점거투쟁은 기존 연구에서 말하는 “병력을 몰아 한성으로 진격하기 위한” 중간 단계가 아니라, 호서와 호남을 연결하는 요충지 공주를 점거한 상태에서 애국적 사민이 참여하는 대규모 집회와 무장 시위(도회와 의거)를 통해 중앙군·감영군, 향리·군교·상인들의 호응을 유도하여 조선 왕조나 일본 정부와 정치 담판을 하려 한 최종 단계라고 했다.
여섯째, 공주 점거투쟁의 성격을 논하면서 저자는 이 투쟁의 주역이 농민군이 아니라 동학군이며 혁명군이 아니라 (무장)시위대/의려이므로, 이들을 전사라고 부르거나 이 사건을 내전이나 혁명, 심지어 전투로 부르는 것도 역사 조작이라고 주장한다.

저자의 주장에 대해서 나는 개인적으로 이렇게 느꼈다.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이후 기존은 동학동민군에 삼례 봉기를 주목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공주, 이인 등지의 충청 지역에서 일어난 봉기의 규모가 훨씬 컸으며 중요했다고 이 책은 말하고 있다. 이렇듯 호남 중심의 배경 중심에서 호서 지역 배경으로 사건의 흐름을 재구성하려한 점이 엿보인다. 또 기존에 동학군이 서울로 진격하기 위한 전제를 뒤엎고 공주 점거를 위한 투쟁이었음을 강조하고 공주점거 투쟁 시기 지방수령이나 척사 유생들이 동학군과 연대하지 않은 것은 일본군의 최신식 무기나 동학군의 무기 열세 때문이라기보다는 서로 연대하고 협동하는 정치적 힘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본 것 등은 충분히 공감이 되었고 새로운 의견 제시이기에 의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과연 반침략 반봉건 민중 항쟁으로 일컬어지는 동학농민운동을 어셈블리(도회 또는 의거)라고만 정의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의거와 전투를 그렇게 무자르듯 구획지을 수 있는지 모르겠어서다. 또 어셈블리라는 용어도 좀 난해한 측면이 있다. 저자는 굳이 어셈블리라는 용어를 쓰면서 기존에 도회라는 단어가 사어가 됐기 때문이라고 했으나 그렇다고 한국에서 어셈블리라는 단어를 쓰기에는 선뜻 와닿지는 않는다.
그리고 정말 호서 지역의 유생들이 고종 명의의 밀지를 받았는가. 저자도 이 부분은 후속 연구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는데다 그런 설이 있다는 것만으로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 전봉준이 우금치 싸움을 결행(및 실패)하면서 정말 교단에 저지른 잘못을 뉘우치며 회개했을까라는 것도 의문이었다. 전봉준은 호남 남접 기반의 대장군이었고 호남 남접은 당시 자료를 마땅히 기록하지 않았다(남아 있는 것이 없다). 해당 자료는 북접 동학교단에서 생산했기 때문에 신빙성에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를 비롯하여 저자가 전개한 논지가 추론에 기대는 경향이 강하다는 인상을 받아서 아쉬웠다.

이렇듯 장점도 있지만 한계도 엿보이는 책이다. 근래 들어 읽은 책 중 가장 도발적인 책이었다. 실제로 이 책이 나온 뒤 여러 건의 서평이 올라와 논쟁이 되었다고 보았다.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역사는 1980년 이후 민중 중심의 역사 담론이 유행하고 2004년‘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1894년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여 봉건제도 개혁과 국권 수호에 기여한 인물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참여자와 유족의 명예를 회복하며 민족정기를 선양하기 위해 위한 법률)이 제정되고 시행된 이후 민족적 측면이 강조되고 혁명화된 부분이 있어 보인다. 이 책이 시간이 흘러 그냥 묻히게 될지 아니면 또 다른 시선의 물꼬를 트는 책이 될지 사뭇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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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역사 - 하 - 제8판
니콜라스 V.랴자노프스키.마크 D. 스타인버그 지음, 조호연 옮김 / 까치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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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역사 전체는 비록 생존과 성취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커다란 어려움, 위기, 갈등의 이야기도 하다. ... 그러나 소련 역사를 환경의 산물이라고 말하면, 이 역사를 그토록 놀랍고도 눈에 띄도록 만드는 핵심적인 사항을 놓치게 된다. 아마도 어떤 다른 근대국가 이상으로, 공산주의자들(그들은 스스로를 이렇게 부르기 시작했다)은 모든 것을 포괄하는 이데올로기, 즉 자신들이 마르크스주의-레닌주의 혹은 변증법적 유물론이라고 부르는 것으로부터 동력을 공급받았다. 그 이데올로기 자체는 진화되고 변화되었으나-모든 상황과 결정을 그것을 통해서 바라보아야 하는 렌즈로 남아 있었다. - P707~708

앞선 상권에 이어 하권은 19세기 중후반부터 푸틴이 집권한 시기까지를 다룬다. 푸틴 집권 시기는 2008년 정도까지만 다루는데 이는 현재 제8개정판이 나온 시기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런 아쉬움은 있지만 전체적으로 이 책은 러시아의 역사를 잘 정리하고 있는 것 같다. 번역본으로 나온 책 중에 러시아의 통사를 훓을 수 있는 책은 그나마 이 책이 거의 유일해보였다.

알렉산드르 2세는 지방정부인 젬스트보를 설치하여 대중 교육과 의료에서 상당 부분 효과를 보았다. 그리고 법원을 행정부에서 분리시켜 독립적인 역할을 하게 하고 배심원 재판과 치안판사 제도를 도입하는 등 사법 제도를 개선하였다. 또 하층 계급만 하던 군 복무를 모든 러시아인들에게 확대하는 대신 복무 기간을 축소하고 군사전문학교를 설립하였으며 군법과 법 절차를 개선하였다. 그리고 재정을 혁신하고 교육 및 검열을 조금 자유롭게 하는 조치를 취하는 등 여러 근대화 개혁을 추진했다.
대외적으로도 많은 변화가 있었던 시기다. 러시아는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와 협상을 맺고 발칸 반도를 놓고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다. 또 캅카스 전역, 중앙 아시아를 정복하고 극동 경계를 넓혔다. 그러나 농민 문제는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
농노 해방은 러시아의 근현대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이전부터 진행된 정부의 정책으로 농노제가 강화되고 공 등을 비롯한 귀족의 이익은 커져가고 있었다. 농민들의 불만은 쌓여갔고 일부는 봉기, 탈주하는 사태가 이어진다. 실상 이 문제는 한 세기 이상 제대로 해결되지 않으면서 주기적으로 농민들의 봉기를 불렀다. 이 무렵 인텔리겐치아들도 농노제가 폐지되어야 한다고 보았던 상황이었다. 정부로서도 더는 미룰 수 없는 과제였다. 이에 농노 해방은 알렉산드르 2세 시기인 1861년 공식 발표되었다. 그러나 농노들에게 제공된 토지는 여전히 불충분했기 때문에 농민들의 불만과 소요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문제는 그가 암살당하는 바람에 재위 기간 동안 진행했던 개혁이 다 부정당하는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알렉산드르 3세는 변화를 최소화하면서 종교 통일(정교회), 전제 정치, 국민성을 강조하였다. 이는 니콜라이 2세 시기에도 이어진다.

20세기 초, 노동자들의 불안과 자유주의 및 마르크스주의 확산으로 1905년 혁명이 발생했다. 두마 통제가 가능해지면서 자체 입법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게 되었고 농업 개혁을 통해 농민은 자유 이동이 가능해졌다. 귀족의 수는 감소하였고 귀족이 가진 보유지의 수도 감소했는데 이는 부의 상당수가 국가에 진 빚을 청산해서 남은 돈이 얼마 없었고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한 이유도 있었다. 귀족들은 많은 경우 이민을 떠났고 그러지 않은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쳐야 했다. 대신 기업가, 사업가, 기술자 같은 중간 계급이 떠올랐다. 정부는 철도를 증설하고 외국 자본을 유치하였으며 중공업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발칸 전쟁과 이어진 1차 세계 대전으로 러시아도 격랑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제정 러시아 시대부터 1917년 혁명에 이르기까지 이르는 동안 많은 문학가들이 탄생했다. 투르게네프가 1840년대를 배경으로 관념론자들, 자유주의자, 허무주의자, 인민주의자들을 다루었다면 1860년 무렵 등장한 도스토옙스키는 반합리주의, 슬라브주의에 입장에 서 있었다. 레프 톨스토이는 종교적으로 세속에 대한 비판과 예언을 다루었다. 이밖에도 잉여인간을 다룬 곤차로프, 교회 및 민중을 다룬 레스코프, 인텔리겐치아/농민/염세주의자를 다룬 우스펜스키, 현실을 풍자한 실티코프, 상인 중하층 계급을 묘사한 오스트롭스키, 평민 영웅을 다룬 고리키, 근대 단편 소설을 창시한 체호프 등이 나왔다(관련 문학을 읽을 때 이 부분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1917년 2월 23일 식량을 달라며 일어난 섬유 노동자들의 시위를 시작으로 혁명의 불길이 치솟았다. 2월 26일 임시 두마 정부는 니콜라이 2세를 퇴위시키면서 로마노프 왕조를 종식시켰다. 이 무렵 소비에트도 조직을 갖추었다. 그러나 임시 정부는 온건한 자유주의 입장을 고수하여 전반적인 개혁을 원하는 민중의 요구를 받아들이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더군다나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기에 사회적으로 혼란스러웠다. 이때 등장한 것이 레닌이다. 레닌은 현 정부가 부르주아적이라면서 소비에트에게 권력을 주고 토지를 국유화하여 농민에게 분배하고 산업을 노동자평의회의 통제하에 두는 등 사회 혁명의 방안을 제안하고 즉각 종전을 요구했다. 볼셰비키가 10월 25일 정부의 통제권을 장악하며 소비에트 러시아가 시작되었다.

1921년까지 볼셰비키는 무력을 동원한 급진 경제 정책을 실시했다. 이로 인해 거의 대부분의 사기업이 사라지고 국유화되었으며 사적인 교역은 억압되었다. 강제 배급이 실시되고 모든 토지가 국유화되었다. 이에 내부 반발로 백군 세력이 등장하였으며 주변국도 적군에 의한 통제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러시아는 국제적으로 고립되는 처지가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러시아는 1928년까지 국가 회복을 위한 후퇴이자 타협으로 자유도를 조금 높이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도시에서 활동하는 소기업인들이 증가하고 농촌에서는 부농의 수가 증가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는 기존 공산주의자들의 불안을 초래하였다.
이런 배경에서 스탈린이 등장한다. 스탈린 시기 러시아는 국가적 산업 계획 정책으로 농업 집단화를 완성하면서 농업 생산량을 다소 증가시켰고 식량 배급제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도급 노동이 일상화되고 임금 격차는 확대되었으며 강제 노동이 시작되었고(반대 세력에 대한 대숙청) 사회주의체제에 대한 강조로 인하여 요식 행위가 늘어나는 부작용을 낳았다.

스탈린 사후 소련 지도자들 사이의 권력 투쟁이 일었다. 스탈린에 대한 흐루쇼프의 비난은 대내외적으로 충격을 주었던 사건이었다. 흐루쇼프는 당제1서기로 올라서면서 권력의 중심에 섰다. 흐루쇼프 시기 러시아는 개인숭배에 기반한 스탈린주의를 벗어나 레닌체제로의 복귀를 선택했다. 경제적으로는 생산, 소비를 자극하면서 산업 경영에 중점을 두었다. 대외적으로는 냉전의 중심에 서 있었고 중국과의 갈등, 쿠바와의 전쟁이 있었다.
이후 들어선 브레즈네프 시대에는 모스크바 중앙에서 정치를 통제하는 방식으로 복귀하면서 정치가 정체되었다. 그러나 국민의 복지 정책이 확대되고 데탕트 정책으로 훈풍이 시작된 시기이기도 하다.
고르바초프는 낮은 성장률로 침체된 경제로 인한 불만과 이전 같은 이데올로기적 강요가 통하지 않는다는 사회적 현실을 직면해야 했다. 그럼에도 그가 레닌주의 사회주의 이상을 강조하며 국민들에게 더 적극적이고 헌신적인 자세로 국가 발전에 이바지함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나아간 것은 한계가 있었다고 보인다.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 정책으로 자율권을 부여하고 통제를 완화하는 등 개혁을 시도했으나 역설적으로 중앙의 통제력이 약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각지에서 민족주의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며 소련은 동유럽을 포기하고 동유럽의 국가도 독립을 자처하면서 결국 1991년 소련은 붕괴의 길을 걸었다.

옐친은 최초로 민주적인 절차에 의한 대통령 선거로 대중적인 지지를 얻으며 최고위 권력자에 선 인물이었다. 그의 재임기 초반에는 급진적인 사유화가 진행되었는데 이로 인해 양극화가 심화되었다. 재임기 중반기에는 대통령의 권한을 높이는 것으로 스스로 권력을 강화하면서 내분이 극대화되었다. 이후 그는 개혁을 후퇴하면서 사회 안정성을 높이려 했으나 급격하게 진행된 사유화는 사회적 혼란을 높이고 부패를 증가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제2차 체첸전쟁이 벌어지자 옐친은 푸틴을 지휘관으로 보냈다. 옐친의 지지율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이는 푸틴의 지지율을 높이고 입지를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
권력자에 올라선 푸틴은 러시아의 발전과 진보를 강조하며 국가주의와 애국주의를 강화하였고 강력한 중앙 통제를 바탕으로 관리형 민주주의 체제를 구축했다. 관리형 민주주의는 비정부기구를 통제하면서 다른 견해가 들어설 공간을 위축시키는 것인데 용어만 좋게 포장한 것일 뿐 과연 좋은 평가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푸틴은 헌법을 고쳐가며 현재도 집권중이니 말이다. 더불어 크림 반도에 이어 우크라이나 돈바스 지역을 노리며 시작한 전쟁은 현재진행형이다.

공산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은 최근에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의 중심이 되어버린 ˝원한의 정치˝에 사실상 편입되었다. 공산주의의 종식이 많은 고통, 소외, 공인된 모욕 등을 초래했다는 것은 냉혹한 사실이다. 특히 푸틴의 러시아에서는 민족주의가 대중문화와 여론에서 주류이며, 공식적인 미사여구가 되었다. - P1002~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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