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철학사 1 - 지중해세계의 철학 세계철학사 1
이정우 지음 / 길(도서출판) / 201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허무의 시대에 탄생한 철학은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사유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좋은 시절에 철학이 탄생하지 않은 것은 일견 이해되는 면이 있다. 불안과 혼돈, 의심과 회의적 시각에서 질문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서양의 지중해 중심의 세계는 그리스 철학에서부터 자연 철학,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 그리스 철학이 이슬람으로 전달되면서 사유가 깊어졌다. 중세의 기독교적 일원론을 바탕으로 한 철학에서 르네상스로, 철학에서 자연 과학이 분리되기까지의 과정을 들여다볼 수 있다. 


철학사는 ‘철학‘사이자 철학사‘이다. 철학사는 철학을 다루지만 어디까지나 역사적 지평에서 다루며, 역사에 속하지만 어디까지나 철학의 역사이다. 때문에 철학사의 서술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역사와 철학을 어떠헤 배치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 P13


문학도 그렇지만 철학도 지리적, 역사적 배경과 무관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폴리스로 구성된 그리스는 해양 세계에 위치하고 있어 다원론이 자연스러웠다. 이후 서로마가 기독교를 수용하고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면서 중세는 '신' 중심의 철학과 사상이 등장하였다. 페스트로 유럽 전역이 황폐되었을 때 살아남은 사람들 사이에는 새로운 사유에 대한 질문의 기회가 주어진 것이 아닐까. 이후 가톨릭 교황과 황제의 대립에서 점차 황제 중심의 왕권 국가주의가 강해지고 자본주의의 발흥, 자연 과학의 등장으로 신 중심의 사유에서 인문주의 철학이 대세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 책의 장점은 특히나 동양 철학(자)과의 비교로 사상의 개념과 이론을 더 쉽게 접근하게 해준다는 점에 있다. 또한 현실의 문제를 철학자의 이론과 연계하여 설명해주는 부분도 개인적으로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최초의 철학은 철학자 본인의 사유의 산물이겠지만 이후에는 그 철학자의 사유를 보고 고민한 끝에 본인의 의견에 그 의견을 부정하거나 반대, 보충하여 결과물을 만들며 계속해서 나아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소크라테스에서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로 흘러가고 근대의 문을 연 데카르트에 이르기까지. 전대의 생각을 아예 뿌리채 뽑아내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그것이 왜 문제가 되었는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개념이 탄생했던 조건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x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이해는 그 개념의 탄생 조건들에 대한 이해를 포함한다. 하나의 탄생은 가름/변별화이다. 거기에는 늘 어떤 대립성이 작동한다. 대립, 갈등, 부정, 모순의 장에서 무엇인가가 탄생한다. ‘philosophia‘의 탄생에도 이런 대립성들이 작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 P841


철학사를 읽으며 그들이 당대의 현실을 보고 고민한 것이 무엇이며, 그 지향점은 무엇이었는지 확인하는 과정은 힘들지만 충분한 가치가 있다. 나도 지금의 현실을 보고 미래를 걱정하는 것처럼 그들도 비슷한 고민을 한 끝에 내놓은 결과물을 엿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자신이 꽂히는 철학자를 발견하는 재미도 덤으로 챙길 수 있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선 2024-03-30 02: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거리의화가 님은 여기에서 마음이 가는 철학자 찾았나요 이 책 모두 네권이군요 네권을 다 보고 찾을지도 모르겠네요 거리의화가 님 주말 편안하게 보내세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4-03-31 18:21   좋아요 1 | URL
아직 딱 마음에 들어 파고 싶은 철학자는 없었던 것 같아요^^; 그래도 소크라테스, 자연 철학자들, 스토아 철학자들에게 주목하는 걸 보면 삶을 중요시 여기는 철학에 마음이 가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관념과 그림자의 거울방을 깨고 나가서 실전으로 공부하는 방식을 묻는 일이다. ‘어떤 틈 속으로 스며든 우연찮은 타자성의 체험’에 자신을 넉넉히 노출시킬 수 있도록 준비하는 일이다. 자기체계의 안정화가 아니라 늘 새로운 변화에 기민하도록 탄력 있는 긴장의 상태로 스스로를 부단히 조율해 가는 일이다.

공부란 실로 돌이킬 수 없는 ‘변화’다. 이에 비하면 영리한 것은 ‘변화’가 아니거나 혹은 기껏 ‘변덕’이다. 아, 우리의 세속은 바잡*거나 반지빠른* 변덕의 세상이다! 물론 변덕은 몸이 아니라 생각이 주체일 경우에 가능한 삶의 태도인 것이다. 그러므로 공부가 변화의 비용이고 그것이 결국은 몸의 주체적 응답의 방식일 수밖에 없다면, 공부란 삶의 양식을 통한 충실성 속에 응결한 슬기와 근기일 수밖에 없다.

하루 종일 방 안에 틀어 박혀 생각만 하느니 다 쓸데없고 책 한 권이라도 제대로 읽는 게 낫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생각하되 배우지 않으면 위험하다(思而不學則殆)’는 말인데, 이 위험이란 곧 자기-생각을 ‘자연화’시키는 것을 가리킨다고 보아도 좋다. 그러나 무릇 인문학의 공부란 자기 자신의 생각들이 자연스럽지 않다는 사실을 사뭇 뼈아프게 깨치는 일련의 사건들이다. 혹은 괴델(K. G?del)을 원용해서 말하자면 그 생각의 일부로써 그 생각의 틀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사실에 부딪쳐서 자빠지는 일이다. 혹은 내 ‘생각’만으로는 영영 너의 ‘사실’에 접근할 수 없다는 사실, 그래서 내 생각의 막(膜)을 찢고 나가는 모종의 실천적 근기가 없이 들먹이는 관념적 상호소통의 이상이 종종 공소하다는 사실을 느리지만 지며리* 깨쳐 가는 과정들이다.

‘나’의 태초에 ‘너’가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인문학(人文學)은 문학(文學)을 그 바탕으로 한다. 그리고 문학은 일종의 문자학일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인문학 역시 그 문자학적 기반 위에서야 그 본령의 의미와 가치를 꽃피운다. 한글로 인문학 공부를 하는 이들이 한글을 익히고 쓰는 일은 모르스 부호나 에스페란토, 혹은 고대 중동의 어느 사어(死語)를 채집하고 배우는 일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 차이가 가리키는 언어적 심연을 정직하게 겪는 일은 인문학으로서의 공부길에서 놓칠 수 없는 알짜다.

우리 사회의 대화문화에 대한 비판은 이미 수위를 넘은 지 오래다. 그중에서도 사회적 약자들의 말에 먹통인 남성 기득권자들의 체계적 반(反)대화성은 우리 사회의 농축·급속·편파의 남성적 근대화나 군사주의와 맞물리는 현상으로 이른바 심층 근대화의 과제에서 우선순위다. 각종의 통계는, 특히 남자들의 비(非)대화성과 이와 관련된 여자들의 불만을 지목한다. 나는 1990년대에 일반 대중을 상대로 인문학운동을 벌이면서 ‘여자의 말을 배우기’라는 화두를 내걸고 생활인문학적 실천의 진장(振張)에 미력을 보탠 적이 있는데, 이것 역시 대화문화의 파행을 속으로부터 고쳐 보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긴 시간의 긴장은 필연적으로 공부의 슬럼프를 가져오게 되는데, 슬럼프의 양식을 살피면 바로 그 양식 속에 자신이 지닌 재능이나 기량의 한계와 조건이 투영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로써 공부라는 활동이 단지 인식론적 재능으로 환원될 수 없고 그것은 우선, 그리고 워낙 ‘사람의 일’이라는 발견(!)이 분명해진다. 그리고 이 발견에 근거해서 위기를 보다 슬금하게 넘어가는 실천적 미립*을 얻는 게 중요하다. 말하자면 우선 공부를 일종의 ‘순수 인식론주의’로 좁히는 태도를 지양하고, ‘공부도 사람의 일’이라는 지극히 평심한 이치를 명심하면서 매우 현실적으로 슬럼프의 출구를 모색하라는 제언이다. 여기에서 순수주의적 태도란, 예컨대 근기가 일천하고 공부의 이력이 짧은 상태에서 지나치게 무리한 정면승부를 고집하지 말라는 뜻과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러나 서방세계가 본격적으로 문화적 도약을 이룬 것은 12~13세기를 거치면서였다. 여기에는 몇 가지의 내적 추동력과 두 가지의 중요한외적 추동력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우선 이 시대에 이르러 새로운 농법(3포제 등), 다양한 건축물들의 구축(처음에는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그후에는 고딕 양식으로), 인구의 증가(1000년이 지나면서 인구가 비약적으로증가해, 1300년 정도가 되면 5000만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여러도시들의 성장과 대학들의 건설, 화폐 사용과 은행 설립, 수공업의 발달과 유통 증가(‘한자 동맹‘ 등) 같은 여러 현상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 P689

중세의 철학은 그리스의 철학이 이슬람으로 전달되면서 그 기초가 마련되었다. 이슬람의 경우 철학과 신학이 매우 분명하게 구분되었는데,
이는 철학을 위해서는 다행이었고 또 과학적 작업들을 위해서도 좋은배경이 되었다. 이븐 시나와 이븐 루쉬드는 이런 과학적-철학적 탐구의절정을 이루었다. 서방세계는 이슬람에서 그리스 철학의 보고(寶庫)를발견함으로써 새로운 사유에 눈을 떴고 특히 12세기 이후 알베르투스마그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둔스 스코투스, 윌리엄 오컴 등을 비롯해 많은 거장들을 낳을 수 있었다. 전반적으로 볼 때 이런 흐름은 플로티노스에서 아리스토텔레스로의 이행을 보여주었으며, 중세라는 시대가 지적으로 점점 정교화해간 궤적을 보여준다. - P750

르네상스 시대 도식적으로 말한다면 15세기(‘콰트로첸토‘), 16세기(‘칭쿠에첸토‘)는 탄생의 시대였다. 이 시대에 오늘날까지도 우리의(지중해세계만이 아니라 다른 지역들까지 포함해) 삶을 주도하고 있는 여러 방식들-국민국가, 자본주의, 인본주의, 과학기술 등이 탄생했다. 이런삶의 양식들은 지중해세계에서 만들어졌지만 점차 전 세계의 주류가 되었고, 때문에 이 양식들을 반추해보는 것은 곧 우리 삶의 중요한 한 실마리를 파악하는 것이다. 이러한 탄생들을 관류하고 있는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아마도 ‘인간적인 것의 (재)발견‘일 것이다. 국민국가의 탄생은 권력의 중심을 신과 교회로부터 왕과 국가로 이전시켰다. 자본주의의 탄생은 인간의 물질적 욕망을 긍정함으로써 새로운 생활을 도래시켰 - P753

다. 인본주의의 탄생과 인간의 자기 탐구의 시작은 이데아와 신으로 대변되는 전통적인 형이상학을 인간중심주의로 바꾸어놓았다. 과학기술의탄생은 인간을 자연의 노예가 아니라 주인으로 바꾸어놓음으로써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오래도록 파급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이 모든 변화들의중심에는 인간적인 것의 (재)발견, 더 정확히 말해 근대적 주체의 탄생이놓여 있다. - P754

기계론이란 세계를 하나의 기계로서-근대 철학자들이 즐겨 든 비유로 하면 하나의 정교한 시계로서 파악하는 것을 뜻한다. 달리 말해, 우리가 기계를 설명하기 위해 동원하는 개념들연장(延長), 무게, 힘, 속도 등 -만을 동원해서 설명하는 것을 뜻한다. 데카르트는 이런 설명을 극단적으로 단순화하기 위해, 즉 세계를 기하학으로 온전히 환원하기 위해, 모든 사물들을 ‘res extensa (extended thing)‘
로 파악했다. 이른바 범기하학화(pangeometrization)의 세계관이다. 질적인 것들은 모두 이 ‘res extensa‘로 환원되어 설명된다. 이렇게 극단적인환원주의로 파악된 세계에서 두 가지만이 전혀 다른 실체들로서 이해되는데, ‘res cogitans (thinking thing)‘와 신(神)이 그 둘이다. 신은 무한실체요 영혼(사유하는 실체)과 물질(연장을 가진 실체)은 유한실체들이다. - P832

신과 영혼을 제외한 모든 사물들은 같은 실체로서 파악된다. 이렇게 데카르트의 세계에서는 세 종류의 실체만이 인정된다. 숱한 종류의 실체들이 존재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와는 판이한 세계이다. 풍성한 질들로 가득 차 있던 아리스토텔레스적 세계는 갑자기 (신과 영혼만을 예외로한다면) 오로지 연장=외연으로만 구성된 기하학적 세계로 바뀌어버렸다. 데카르트의 기계론이야말로 자연에 대한 상(像)을, 더 나아가 세계에대한 철학적 파악 전반을, 아니 서구 문명 (뿐만 아니라 인류 문명) 전체의존립 근거 자체를 송두리째 바꾸어놓은 결정적인 지도리이다. - P833

하나의 개념이 탄생했던 조건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x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이해는 그 개념의 탄생 조건들에 대한 이해를 포함한다. 하나의 탄생은 가름/변별화이다. 거기에는 늘 어떤 대립성이 작동한다. 대립, 갈등, 부정, 모순의 장에서 무엇인가가 탄생한다.
‘philosophia‘의 탄생에도 이런 대립성들이 작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 P841

지중해세계에서 자연에 대한 상이한 이해 그리고 그것과 맞물려 나타
‘난 인간관과 가치관에서의 상이한 정향들은 결국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움직이는 사유의 운동이었다. 어떤 형태가 되었든, 지중해세계에서 등장해 숙성했던 대다수의 철학사상들은 현실과 이상,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움직이면서 초월과 자연, 인간의 운명, 도덕적/윤리적 실천을 사유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흐름에서 이상에의 지향이 때로 강박으로 흘러가곤 했다는 것은 사실이고, 근대 이래의 철학자들은 이 때문에 내재적이고 경험적인 사유의 정향을 취하게 된다. - P84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몸은 사이보그-사이버네틱 유기체가 되었다. 그것은 혼종적기술이자 유기체적 체현과 텍스트성의 구성물이다(해러웨이,
1985). 사이보그는 텍스트, 기계, 몸 그리고 은유다. 이 모든 것들은 커뮤니케이션과 관련하여 이론화되고, 실천에 참여한다. - P384

상황적 목적은 필연적으로 유한하며, 부분성에 근거하고, 동일성과 차이, 유지관리와 분해라는 미묘한 놀이 사이에 있다. 위노그라드와 플로레스의 언어학적 체계는 ‘탈자연화된 것이며, 완전히 구성주의적인 실체다. 이런 점에서 그와 같은 체계는 유기체적·기술적·텍스트적인 것들 사이에 서로 침투 불가능한 경계를설정하지 않는 포스트모던 사이보그이다. 하지만 그들의 언어학적인 커뮤니케이션 체계는 취약성으로부터, 다시 말해 체현으로부터 궁극적인 추상화를 통해 절멸주의적 병리학과 함께하는 ‘정보사회‘의 AI 사이보그와는 분명히 대립적이다. - P388

면역성은 공유된 특수성과 관련하여 인지될 수도 있다. 즉 면여성은 타자(인간과 비인간, 내부적인 것과 외부적인 것)와 관계속으로 반쯤 스며들 수 있는 자기와 관련하여, 언제나 한정된 결과와 관련하여, 개체화와 동일시의 상황적 가능성과 불가능성과관련하여, 부분적 융합과 위험과 관련하여, 인지될 수 있다. 포스트모던한 자기의 문제적인 다수성은 면역학의 멍울진 담론에서는 강력하게 형상화되는 동시에 억압되기도 하기 때문에, 그런 다수성은 건강, 병, 개체성, 인간성, 죽음에 관해 부상 중인 다른 서구적이고 다문화적인 담론 속으로 이동해야만 한다. - P409

사이보그 체현과 상황적 지식이라는 약속과 공포로 가득 찬이런 차이의 장을 벗어나는 출구는 어디에도 없다. 가능한 자기들을 연구하는 인류학자로서 우리는 실현 가능한 미래의 기술자들이다. 과학은 문화이다. - P41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0장

이슬람의 과학은 그리스 과학, 헬레니즘 시대의 과학을 잇는 과학사의세 번째 중요한 단계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성과는 14세기 스콜라철학의 자연철학을 거쳐 17세기 과학 혁명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과학사저작들에서 이슬람 과학은 소략하게 다루어져 있거나 아예 빠지기까지 - P660

한 경우를 볼 수 있다. 그리스 과학으로부터 근대 과학으로 이어지는 중간 단계로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슬람 과학은 좀더 많은 주목을 받을가치가 있다. - P661

서방의 종교사상들과 마찬가지로 이슬람의 종교사상들도 플라톤, 아니 사실상 플로티노스의 그림자 아래에서 전개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플로티노스의 철학은 말 그대로 천년의 세월에 걸쳐 지중해세계를 지배했다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철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그 어떤 사상도플로티노스 자신의 『엔네아데스』를 뛰어넘는 철학적 성취를 이루지는못했다. 철학은 종교/신학을 위한 도구였지 그 자체로서 수준 높게 추구되지는 못했던 것이다. - P665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론을 해석하면서 이븐 루쉬드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이탈해 파격적인 주장을 한다. 이븐 루쉬드가 볼 때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가 보다 일관적이려면 수동적 이성 역시 탈물질적이고 영원해야 한다. 이 주장에 함축되어 있는 바는 수동적 이성이 우발적이고 물질적인 개개인의 신체와 완전히 분리된 실체여야 한다는 점 - P677

이다. 그래서 능동적 이성만이 아니라 수동적 이성도 공히 개개인을 초월한 이데아적인 존재로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26) 이를 이븐 루쉬드의 ‘이성 단일론‘이라 부른다. 만일 그렇다면, 불멸하는 것은 개개인의형상이 아니라 단지 단일한 보편적 이성뿐이다. 능동적 이성은 물론 수동적 이성까지도 압둘라나 마르얌의 이성은 아닌 것이다.
이븐 루쉬드의 이런 해석은 이슬람교의 교리와 정면 충돌하는 것이었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공히 개별자의 영혼의 부활, 나아가 경우따라서는 신체의 부활까지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존재론적 보장이 있어야만 한 개인에게 귀속되는 죄, 업(業), 책임, 의무 등을 인정할 수 있었다. 이런 이유 등으로 해서 이븐 루쉬드는 박해 당했고 그의 책들이 불태워지기까지 했다. - P678

유럽에서와는 달리 이슬람세계에서는 ‘철학‘과 ‘신학‘이 명확히 구분되었다. 물론 유럽에서도 철학과 신학은 구분되었으나, 대체적으로 철학이 신학에 종속되었다. 반면 이슬람의 경우 신학은 어디까지나 이슬람 신학이었고, ‘철학‘은 그리스에서 유래한 학문인 그리스 철학을 뜻했다. 이런 구도는 이슬람에서의 철학자들의 위상을 유럽에서의 그것과는다르게 만들어주었다. - P68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