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인간이 먹는 음식의 운명을 대강 결정하고 원격조정한 것은 오래 전에 일어난 두 혁명이었다.
구석기시대 말기에 "잡식동물인 인간은 큰 동물을 사냥하기 시작했고, 이때 형성된 "대육식주의"의 취향, 즉 "고기와 피에 대한 요구, ‘질소(窒素)에 대한 탐욕‘, 달리 표현하면 동물성 단백질에 대한 탐욕은 사라지지 않았다. 기원전 7000년이나 기원전 6000년에 일어난 두 번째 혁명은 신석기시대의 농업혁명이다. 이때에 곡물재배가 시작되었다. 사냥터나 조방적인 목축지역이 줄고 대신 논밭이 늘어났다. 그후 수 세기가 지나면서 점차 많은 사람들이 식물성 음식만 먹게 되었는데, 그것은 날것이든 조리한 것이든 흔히무미건조했고, 또 발효한 것이든 아니든 단조로움을 면치 못했다. 죽, 수프와 빵이 그것이다. 이제부터 인류의 역사에서는 두 종류의 인간들이 대립하게 되었다. - P140

16세기부터 북유럽의 밀이 국제 곡물 교역에서 점점 더 큰 중요성을 띠었다. 그러나 이것은 흔히 수출국 자신의 소비를 줄인 결과이다. 한 상업 사전(1797)에 나오듯이 폴란드가 매년 많은 양의 곡물을 수출하는 것을 보면, 이 나라가 유럽에서 땅이 가장 기름진 나라들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겠지만, 이 나라와 그 주민들을 잘 아는 사람들은 다르게 평가한다. 왜냐하면 비록이 나라에 땅이 기름지고 또 훌륭한 경작지역이 없지는 않다고 해도, 다른나라에서는 더 기름진 땅이 있고 더 나은 경작을 하면서도 곡물을 수출하지않기 때문이다. - P166

도시의 임금노동자는 비참했고, 현물임금이 거의 같은 리듬으로 변화했던 시골 사람들 역시 비참했다. 그러므로 가난한 사람들은 아주 명료한 규칙을 따랐다. 저급한 곡물에 의존하는 것이다. 즉, "더 싸면서도 충분한 칼로리를 제공하는 생산물에 의존하고, 단백질이 풍부한 음식 대신 전분에 기초한 음식을 먹었다." 프랑스 혁명 전야의 부르고뉴에서는 "중농(le gros laboureur)을 제외한 일반 농민은 밀을 거의 먹지 못했다. 밀과 같은 사치스러운 곡물은 판매하거나 어린 아이들을 위한 것, 또는 드물었던 경사를 위한 것이었다.……………밀은 식탁보다는 돈주머니를 위한 것이었다. 저급한 곡물은 농민들이 먹는 음식의 핵심을 이룬다. 꽤 유복한 집에서는 콩소(conceau)라고 부르던 혼합 밀이나 호밀을, 가장 가난한 사람들은 보리와 귀리를, 브레스와 손 계곡에서는 옥수수를, 모르방 지방에서는 호밀과메밀을 먹었다. 1750년경 피에몬테에서 평균 소비량은 (헥토리터 단위로)다음과 같았다. 밀 0.94, 호밀 0.91, 다른 곡물 0.41, 밤 0.45,122) 도합 1년에2.71헥토리터였다. 이 부족한 듯한 음식량 중에서도 밀이 차지하는 부분은그나마 얼마 되지 않았다. - P179

동아시아에서는 쌀은 많이 소비하고, 고기는 매우 조금 소비하거나 전혀 소비하지 않는다. 이런 여건에서 쌀이 얼마나 예외적으로 강력한독재자 같은지를 알 수 있다. 중국에서 쌀값의 변동은 모든 것을 좌우했으며, 심지어 군인의 일당까지도 마치 변동비율제처럼 쌀값에 따라 오르내렸다. 일본은 그보다 더해서, 17세기에 개혁으로 결정적인 변화가 있기 전에는 쌀이 곧 화폐였다. - P199

오늘날 인디언 구역에서 옥수수를 기르며사는 농민들, 그중에서도 특히 안데스 산맥에서 사는 사람들은 흔히 너무나도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다. 그들이 먹는 음식이란 옥수수를 먹고 또 먹으면서 가끔 말린 감자로 보충하는 정도이다(우리는 감자의 원산지가 페루라는것을 알고 있다). 요리는 노천에 있는 돌로 만든 아궁이에서 바람을 맞으며한다. 오막살이집의 하나밖에 없는 방을 사람과 가축이 함께 쓰며, 언제나변함없는 옷은 초보적인 기술로 라마의 털실을 가지고 짠 것이다. 유일한낙은 코카 나무의 잎을 씹는 것인데, 이것은 배고픔, 갈증, 추위, 피로를 완화시켜준다. 현실을 도피하는 수단으로 옥수수를 (씹어서) 발효시킨 맥주 치차(chicha)가 있는데, 스페인 정복자들은 치차를 앤틸리스 제도에서 보고 나 - P210

서는 적어도 그 이름을 인디오 아메리카 전역에 퍼뜨렸다. 그 외에도 페루에서 나는 강한 맥주 소라(sora)가 있다. 이런 것들은 합리적인 정책을 추진한다는 정부들이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해서 금지시킬 정도였으나 헛일이었다. - P211

"농업혁명"은 기원전 - P236

8000-기원전 7000년의 오리엔트와 같은 몇몇 특권적인 곳에서만 일어난것은 아니다. 그것은 전파되어야 했으며 그 진보는 결코 단 한 번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인간의 경험들은 끝없이 긴 똑같은 여로를 따라가지만, 수세기의 간격을 두고 이루어진다. 오늘날의 세계에서도 괭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일부 원시인들도 그들의 은신처가되는 조건이 척박한 이곳저곳에서 살아가고 있다. - P23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물질문명과 시장경제는 물과 기름처럼 그렇게 확실히 구분되지는 않는다. 어느 사람, 어느 대리인, 우리가 관찰한 어느 활동이 경계의 이쪽 혹은 저쪽에 있다고 단호히 결정하는 일이 늘 가능하지는 않다. 따라서 물질문명(civilisation matérielle)과 공존하기도 하고 이를 교란시키기도 하며, 또 물질문명과 모순됨으로써 오히려 물질문명을 설명해주는 경제문명(civilisation économique, 이렇게 부르는 것이 가능하다면)을 물질문명과동시에 소개해야 한다. 그렇지만 분명 그 둘 사이에는 경계가 존재하며, 그것이 매우 큰 중요성을 띤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경제문명과 물질문명의 두 요소로 구성된 이 복식부진화로부터 비롯되었다. 15-18세기의 물질생활은 거의 파악하기 힘들 정도 - P25

로 대단히 느리게 변화해온 고대 사회와 경제의 연장이다. 그 과정에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면서, 이 오래된 사회와 경제위에 필연적으로 그 무게를 짊어지우는 상부사회(une société supérieure)를조금씩 형성해갔다. 그리고 언제나 상부와 하부는 공존하되 그 각각이 가지는 크기의 비율은 끊임없이 변화해왔다. - P26

수는 세계를 분할하고 조직하며, 각각의 인류집단에 특정한 비중을 부여하는가 하면, 문화 및 능률의 수준, 성장의 생물학적(그리고 경제적) 리듬, 나아가서 그 병리학적 운명을 거의 고착시킨다. 중국, 인도, 유럽의 조밀한 인구는 잠복해 있거나 활동 중인, 또는 곧 퍼져나갈 태세가 되어 있는 질병들의 거대한 저장소이다. - P118

우리는 15세기에서 18세기 사이의 기간 동안 세계의 차별화된운명에 대한 일차적인 인식을 얻기 위해서 수를 사용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세계의 사람들은 커다란 덩어리들로 나뉘어 있었고, 이 각각은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데 서로 다른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한 사회 내부에서 보더라도 여러 집단의 일상생활이 서로 다른 것과 유사하다. - P13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버드 중국사 청 - 중국 최후의 제국 하버드 중국사
윌리엄 T. 로 지음, 기세찬 옮김 / 너머북스 / 201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청 제국 역사의 어떤 시점에서 중국이 고립된 채 다른 세계와 교류하지 않았다고 평가하는 것은 잘못된 관점이다. 청 제국 시대에 거대한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과 서쪽 끝 사이의 관계와 상호 영향이 과거 어느 때보다도 질적으로 활발해졌고, 또한 더 대립적이 되었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러한 관계는 오늘날까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 P12


중국의 마지막 왕조인 청의 역사를 다루는 책으로 사실상 하버드 중국사를 마지막으로 선택했다. 앞서 캠브리지 중국사를 읽으면서 청의 초중반 역사는 가볍게 다루고 후반부를 집중한다고 여겼는데 이는 페어뱅크를 중심으로 하는 서구 충격에 의한 청 제국의 근대화 담론에 의한 것이었다(유럽을 비롯한 서구 중심주의). 


청대 역사학 방법론은 시기에 따라 새로운 담론이 등장하였다. 그렇다면 청대 역사학 관련하여 어떤 방법론이 전개되었는지 살펴보자. 우선 1970~1980년대에는 프랑스 아날학파들의 영향을 받아 사회사적 시각에 입각하여 명청을 왕조로 구분하지 않고 단일한 역사적 시대였다는 의미로 ’제국 후기’로 부르자고 한다. 그러나 이 용어는 ‘근대’를 가기 위한 과도기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어 서양의 역사적 관점을 중국의 역사에 적용하려한다는 비판을 받을 소지가 있었다. 다음으로는 신청사적 관점으로 그 전 왕조까지와는 달리 청은 다민족 정치체로서의 정체성을 지닌 채 이질적인 민족성을 대체로 유지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한족 중심의 민족 국가를 완성하기 위해 신장, 티베트, 만주, 대만 등을 하나로 묶으려 했다는 것에서 비판을 받았을 것이다. 세 번째는 ‘유라시아적 전환’에 관점에 따른 것으로 17세기의 위기에 따라 금은의 유통과 기후 위기에 따른 재난의 변화를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유럽의 도전과 아시아의 대응이라는 이분법에 의한 시각을 따르는 문제점이 있다.


청을 일으켜 세운 만주족을 어떻게 정의하고 분류할 수 있을까. 기존에는 종족과 같은 생물학적 범주의 개념에 따른 것이라 했지만 1980년대 들어오면서 맥락에 따른 역사, 사회, 정치적 협상의 산물로 생겨난 것으로 비중이 옮겨갔다. 개인적으로도 후자의 개념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중국사에서 제국의 규모와 범위에 대해서는 역사가들의 주장이 서로 엇갈린다. 이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두 가지 관점은 본질적으로 완전히 다르다. 즉 명과 청이 완전한 ‘동양적 전제 국가‘였다는 관점과, 그들의 신민들을 전적으로 자활하도록 내버려두고 ‘세금 징수, 치안유지를 맡는 대리인‘이라는 최소한의 역할만을 맡았다는 관점이다.
이 두가지 관점은 모두 어느 정도 오류가 있다. 명과 청은 백성들을 전제적으로 위압하여 통제했지만, 반면에 일상생활에서는 국가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는 많은 기능들을 사적 영역의 개인 및 집단들에게 남겨두었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또한 실질적인 중간 영역, 즉 청이 왕조의 존속과 백성의 복지에 관심을 두어 매우 활동적인 역할을 수행했던특정 정책 분야가 있었다. 이 분야들 중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식량공급, 통화의 규제, 민사소송의 확대와 관리였다. - P100~101


청은 아이신 기오로 씨족 기반으로 형성된 집단에서 시작되었다. 누르하치는 명 조정 하에 있던 부족장 중 한 명이었으나 다른 부족과 여러 관계를 통해 세력을 확장하고 여진어를 만들고 팔기군 체제를 만들면서 통치력을 확대해나갔고 결국 독립된 국가를 만들었다. 

청은 대운하로 화중과 화남의 곡물을 북쪽 지역으로 공급하면서 둔전 체제로 변경의 둔전병과 가족이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게 하면서 유사시 군을 지원할 수 있게 하였다. 또 상인이 가진 곡물량에 따라 소금 독점권을 부여해줌으로써 북쪽 군영 지대에 저렴한 비용에 곡물 조달이 가능하게 했다. 또한 과거의 이데올로기인 유학을 버리지 않고 국가 통치 체제로 이용함으로써 사회를 통제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종족 조직, 향촌 사회, 상인 조합이나 장인 조합 등의 자치 단체들은 지방의 질서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청 시기는 서양의 근대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구조적 변화를 경험한 시기였다. 인구가 급증하고 토지의 대규모 개간이 이루어졌으며 백성의 이주가 장려되었다. 이로 인해 다양한 문화를 가진 사람들 간의 충돌 문제가 생겨났다. 과거를 통한 관료 선출 수는 극히 적어 급제하는 것은 물론이고 고위층에 올라가는 것은 바늘 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웠다. 토지는 늘어났지만 수요가 많았고 특정층에 토지가 집중되면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심화되었다. 그래서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부유층도 상업을 통해 이득을 노렸다. 이는 대운하의 발달, 개인적인 이동이 가능해지고 상업적인 계약과 재산권 보호가 가능해진 덕분이었다. 멕시코, 포토시 광산 등에서 생산된 대량의 은이 중국에 유입되고 지세 납부를 은으로 하게 되면서 실물 경제는 확대되었다. 이는 서양이 들어오기 전 청의 내부 동력이 충분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지방에는 신사층이 생겨났는데 이들은 관혼상제를 고수하는 등 전통적인 입장을 취하면서도 전당업, 고리대금업, 상업, 기부금, 의연금, 건설업 등에 종사하면서 부를 얻고 현직 관료와 친분 관계를 쌓으며 영향력을 발휘했다. 


중국 인구 중에서 농민이 차지하는 비율은 항상 압도적으로 높았고, 서양에서는 중국을 오랫동안 전형적인 농업 사회라고 생각했지만, 중기의 청은 세계에서 가장 상업화된 나라였다. ‘경작과 독서‘라는 이상적인 신사-농부의 삶을 살고 있다고 주장했던 중국의 엘리트 가문은 상업을 통해 돈을 벌었다. 19세기에 중국에 들어와 중국인들에게 교역의 미덕을 전파했다고 자부한 서양의 자칭 ‘상업 개척자들‘의 생각은 단지 착각에 불과했다. 물론 청 제국의 총 무역량은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외국 무역의 증가와 아편 전쟁 이후 중국 본토로 침투한 서양 상인들로 인해 조금 더 상승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업은 청제국의 광대하고 번창했던 국내 무역의 규모에는 전혀 근접할 수 없었다. - P219


그러나 은이 전세계적으로 귀해지면서 품귀 현상이 일어나고 외국과의 무역 수지에서 불균형 현상이 일어나면서 국내 제조업의 생산은 위축되었다. 이에 실업률은 증가하고 세금 부담률이 증가하면서 저항과 민란의 씨앗은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동인도 회사가 1680년 중국 남부에 처음 들어온 후 양국 간 무역이 시작된 뒤로 영국은 차를 늘어나는 차 수입에 대한 수지를 맞추기 위해 면화에서 아편으로 중국 경제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청은 세수의 감소와 무역 수지의 불균형으로 해마다 토지세 수입의 25퍼센트에 상응하는 은이 유출되면서 고통을 겪었다. 사회 기반 시설은 유지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서 방치되기에 이르렀고, 심각한 타격을 입은 공동체를 위한 구제의 노력도 뜸해졌다. 실질적인 소득과 관료들의 사기는 모든 면에서 떨어졌고, 부패가 그 빈자리를 채웠다.
방위 예산이 증발해버리면서 새롭게 나타나는 국내외적 위협에 대처해야 할 가장 중요한 순간에 군사력이 취약해졌다. 이러한 불황은 태평천국 운동이 터지게 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국내외적으로 경제적 불황은 매우 폭넓게 감지되었고, 1840년대 즈음에는 경기 침체가청을 붕괴 직전의 매우 위험한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 P280


광동무역 체제는 옹정제의 계승자인 건륭제가 시행한 세 차례의 결정으로 이루어진 산물이었다. 1757년에 청 조정은 이후로 서양이 청제국과 무역할 수 있는 항구는 오로지 광주뿐이라고 공표했다. 두 번째로 조정은 1745년경에 광주의 지방관료들이 발의하여 시행하고 있던 담보제도를 승인했다. 담보 제도를 통해 입항하는 모든 서양 선박들은 중국상행으로부터 보증과 감독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1760년에 청조정은 1년 중 외국 ‘오랑캐들‘이 중국을 방문할 수 있는 기간, 거주장소, 그리고 무역할 수 있는 대상들을 정한 일련의 상세한 규정들을발표했다. 외국 상인은 아내와 가족들을 동반해 중국에 들어올 수 없었으며, 상인들의 사적 이동은 극도로 제한되었다. - P251


태평 천국 운동은 1840년대부터 반외세와 민족주의를 내세우며 한족 우월주의와 결탁하여 신도를 확보해나갔다. 공자와 만주족 청 관리를 악귀로 지목하고 기독교가 서양에서 수입된 것이 아닌 중국 고유의 전통 종교라는 등의 주장을 펼쳤던 것이다. 그러나 남경에서 많은 주민들을 학살하고 지도층의 내분이 발생하면서 동력을 잃었다. 


1950년대부터 1970년대에 걸쳐 태평천국에 관한 역사서술은 냉전으로 알려진 팽팽한 이념분쟁의 선두에 있었다. 태평천국 반란군이 중국공산당을 대변하는 역할을 하게 됨에 따라 그것은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한 개별 학자들의 태도를 가름하는 시금석이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입장에서 이 반란은 거대한 역사 서술의 초점이 되었다. 왜냐하면 태평천국의 ‘혁명적인 운동‘이 청에 대한 한족의 해방전쟁일 뿐만 아니라, 더 본질적으로는 지주 계층과 그들이 지지한 봉건적 정권에 대항한 ‘농민 기의 의병을 일으킴)‘의 원형으로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태평천국이 토지의 집단화 정책을 공포했다는 사실은중국의 마르크스주의 학자들에게 매우 매력적인 것이었다. 이들은 태평천국운동 특유의 기독교적 믿음을 마르크스, 레닌, 모택동의 탁월한 혁명 이론에 앞서 모든 운동들의 운명을 결정지은 ‘미신‘이었다고설명했다. 냉전 시기에 태평천국을 연구한 서양과 중국 민족주의 진영의 학자들은 공산주의자들의 전유물이 된 태평천국운동을 철저하게 비판해야 할 필요성이 있음을 발견했다. 그들은 집단화 계획을 위선적인 것으로 일축했으며, 심지어 태평천국의 환상은 전체주의적인것이라고 맹렬히 비난하기도 했다. 그리고 태평천국운동은 진정한혁명이 아니라 그저 거의 성공할 뻔했던 반왕조적 반란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 P326


태평 천국 운동을 왜 후대에 소환되는지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동치제 시기 청은 기계 산업 이전의 단계를 실현해나갈 정도로 중흥의 시기였다. 그러나 내부 개혁에 실패하면서 동력을 잃었고 청일 전쟁 이후 삼국 간섭까지 이어지면서 대외적으로도 힘을 상실했다. 


청 제국을 연구하는 역사가들은 적어도 두 가지의 다른 의미에서 ‘제국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중국, 일본, 서양을 통틀어서 정치적좌익에 속하는 사람들은 이 용어를 레닌이 정의한 ‘자본주의의 가장높은 단계‘의 의미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본질적으로 경제적 개념인 자본주의 시대에 발전했던 생산, 개발, 잉여 축적의 가장 효율적인 방식은 자본주의적 생산이 가장 발전했던 영국과 같은 대도시 국가들에게서 중대한 문제로 나타났다. 1920~1930년대의 국민당과 공산당의 혁명에서 제국주의는 이러한 방식으로 이해되었고, 중국 내에서 실현되었던 제국주의의 정도는 굉장한 논란의 대상이자혁명 전략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그러나 레닌주의적 시각에 입각한 제국주의는 또한 매우 광범위한 시간적 틀을 가지고 있었다. 즉 이 시각의 제국주의는 서양 자본주의와 접촉한 직후의 중국 역사에 대한 분석에 적용될 뿐만 아니라, 몇몇 학자들은 이를 현재까지도 적용하고 있다."
반면 비마르크스주의적 역사가들은 ‘제국주의를 이와 완전히 다르게 정의했다. 이러한 정의는 경제적 개념이기보다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고, 서구 열강(최종적으로는 일본의 식민지 확장을위한 세계적인 경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런 개념을 사용하는 학자들은 강대국들 사이에 지속적으로 세력 균형을 모색하는 가운데 인식된 외교적 의사소통의 체제를 제국주의로 간주하고 있다. - P407~408


제국주의에 대해 청은 혁명, 근대적 개혁주의, 대중적 반항의 방식으로 대응했다. 학생 운동, 손문을 비롯한 혁명가들의 운동은 1908년 무렵이 되면 영향력이 떨어지고 개혁주의 엘리트들이 부상한다. 이들은 철도 부설권 회수 운동, 자의국을 중심으로 하는 책임 내각 창설을 요구하는 등 개혁을 이끌었다. 광서제와 서태후가 죽고 나서 반란이 확대되고 드디어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이 선포된다. 


19세기 후반에 새로운 종류의 사회 진화론적 민족주의가 등장하여 민족국가의 올바른 기초는 종족적 또는 민족적 조국이라고 주장하면서, 새로 탄생한 중화민국은 한족만이 독점하는 영역임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청의 신민으로서 그들의 정체성을 받아들인 다양한 비한족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즉각적으로 일부 몽골족들은 자신들이 중화민국의 일부가 아니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1913년에는 동북 지역에 위치한 ‘만주족‘들의 고향에 주권 국가를 설립하려는 노력이 일어났고, 1932년에 일본에 의한 대리국으로서 중국의 ‘마지막 황제‘인 아이신 기오로 부의를 수반으로 하여 설립된 거대한 괴뢰국을포함하는 다양한 ‘만주국들‘이 간헐적으로 선포되었다." 21세기 초반의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여전히 직면하고 있는 티베트, 이슬람교도및 다른 분리주의 운동에서 볼 수 있듯이, 이것은 청의 멸망 이후 20세기 내내 해결되지 않고 있는 청 역사의 유산이다. - P504~50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존의 관점이 본래부터 분별 가능한 만주족이 시간이 지나면서 한족에 동화되거나 소멸된 것으로 보았다면, 신청사 담론은 왕조가 흘러가면서 만주족이 실질적으로 생겨난 것으로 보았다. 건륭제를 비롯한황제들의 노력들은 소멸 위기에 처한 그 민족의 문화를 방어했다기보다는 기원 신화, 민족의 언어와 문학, 일련의 뚜렷한 문화적 특색을규정하여 만주족의 문화를 창조하는 데에 이바지했다. 그리고 그들은이러한 계획을 통해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이러한 가정에 따르면역설적이게도 1644년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만주족이 1911년에는 분명히 존재하게 되는 셈이었다. - P34

중국은 오랫동안 본질적으로 어쩌면 생물학적으로 다른민족들과 다르다는 자체적으로 만들어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청의정복은 그런 내부적인 인종 차별적 사고가 표면화된 계기였다. - P44

계속 확대되던 천자의 제국이 이러한 운명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당·송과 명말청초에 제국의 생산성을 크게 확대시켰던 두 가지 경제적 개혁 덕분이었다. 이를 통해서 청 제국은 백성들을 궁핍하게 하지 않고 세력을 키울 수 있었다. 청 중기에 기하급수로 증가한 인구가이 전략을 더 이상 실현할 수 없게 만들었을 때까지 이러한 상승세는지속되었다. 성장하는 경제적 생산성과 더불어 조직적 병참도 성공을거두어, 청 제국의 예산은 사회 전체의 경제 생산에서 낮은 비율을지할 수 있었다. 그것이 잘 작동했을 때 청의 행정은 저비용으로 유지되었다. - P66

중국사에서 제국의 규모와 범위에 대해서는 역사가들의 주장이 서로 엇갈린다. 이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두 가지 관점은 본질적으로 완전히 다르다. 즉 명과 청이 완전한 ‘동양적 전제 국가‘였다는 관점과,
그들의 신민들을 전적으로 자활하도록 내버려두고 ‘세금 징수, 치안유지를 맡는 대리인‘이라는 최소한의 역할만을 맡았다는 관점이다.
이 두가지 관점은 모두 어느 정도 오류가 있다. 명과 청은 백성들을 전제적으로 위압하여 통제했지만, 반면에 일상생활에서는 국가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는 많은 기능들을 사적 영역의 개인 및 집단들에게 남겨두었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또한 실질적인 중간 영역, 즉 청이 왕조 - P100

의 존속과 백성의 복지에 관심을 두어 매우 활동적인 역할을 수행했던특정 정책 분야가 있었다. 이 분야들 중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식량공급, 통화의 규제, 민사소송의 확대와 관리였다. - P101

청의 관료집단은 종족 조직에 대해 상반된 시각을 갖고 있었다. 종족은 제국의 정당성을 보장하는 유교적 정통론을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종족에게 갈채를 보내야 했다. 실질적으로 지방의 관료들은 관할 구역 주민들의 복지와 생계를 위해 종종 종족의 자선 활동과 심지어 상업적 활동들에 의지했다. 옹정기와 건륭제 초기동안에 일어난 몇몇 경우에서 성급 관료들은 과도한 소송 절차로 인한지현의 부담을 줄여주는 방법으로 심지어 사법 권한까지 종족 수장에게 위임했다. 그러나 종족의 힘은 국가에 득이 될 수도, 해가 될 수도있었다. - P210

중국 인구 중에서 농민이 차지하는 비율은 항상 압도적으로 높았고, 서양에서는 중국을 오랫동안 전형적인 농업 사회라고 생각했지만, 중기의 청은 세계에서 가장 상업화된 나라였다. ‘경작과 독서‘라는 이상적인 신사-농부의 삶을 살고 있다고 주장했던 중국의 엘리트 가문은 상업을 통해 돈을 벌었다. 19세기에 중국에 들어와 중국인들에게 교역의 미덕을 전파했다고 자부한 서양의 자칭 ‘상업 개척자들‘의 생각은 단지 착각에 불과했다. 물론 청 제국의 총무역량은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외국 무역의 증가와 아편 전쟁 이후 중국 본토로 침투한 서양 상인들로 인해 조금 더 상승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업은 청제국의 광대하고 번창했던 국내 무역의 규모에는 전혀 근접할 수 없었다. - P219

광동무역 체제는 옹정제의 계승자인 건륭제가 시행한 세 차례의 결정으로 이루어진 산물이었다. 1757년에 청 조정은 이후로 서양이 청제국과 무역할 수 있는 항구는 오로지 광주뿐이라고 공표했다. 두 번째로 조정은 1745년경에 광주의 지방관료들이 발의하여 시행하고 있던 담보제도를 승인했다. 담보 제도를 통해 입항하는 모든 서양 선박들은 중국상행으로부터 보증과 감독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1760년에청조정은 1년 중 외국 ‘오랑캐들‘이 중국을 방문할 수 있는 기간, 거주장소, 그리고 무역할 수 있는 대상들을 정한 일련의 상세한 규정들을발표했다. 외국 상인은 아내와 가족들을 동반해 중국에 들어올 수 없었으며, 상인들의 사적 이동은 극도로 제한되었다. - P251

청은 세수의 감소와 무역 수지의 불균형으로 해마다 토지세 수입의25퍼센트에 상응하는 은이 유출되면서 고통을 겪었다. 사회 기반 시설은 유지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서 방치되기에 이르렀고, 심각한 타격을 입은 공동체를 위한 구제의 노력도 뜸해졌다. 실질적인 소득과관료들의 사기는 모든 면에서 떨어졌고, 부패가 그 빈자리를 채웠다.
방위 예산이 증발해버리면서 새롭게 나타나는 국내외적 위협에 대처해야 할 가장 중요한 순간에 군사력이 취약해졌다. 이러한 불황은 태•평천국 운동이 터지게 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국내외적으로 경제적 불황은 매우 폭넓게 감지되었고, 1840년대 즈음에는 경기 침체가청을 붕괴 직전의 매우 위험한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 P280

1950년대부터 1970년대에 걸쳐 태평천국에 관한 역사서술은 냉전으로 알려진 팽팽한 이념분쟁의 선두에 있었다. 태평천국 반란군이 중국공산당을 대변하는 역할을 하게 됨에 따라 그것은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한 개별 학자들의 태도를 가름하는 시금석이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입장에서 이 반란은 거대한 역사 서술의 초점이 되었다. 왜냐하면 태평천국의 ‘혁명적인 운동‘이 청에 대한 한족의 해방전쟁일 뿐만 아니라, 더 본질적으로는 지주 계층과 그들이 지지한 봉건적 정권에 대항한 ‘농민 기의 의병을 일으킴)‘의 원형으로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태평천국이 토지의 집단화 정책을 공포했다는 사실은중국의 마르크스주의 학자들에게 매우 매력적인 것이었다. 이들은 태평천국운동 특유의 기독교적 믿음을 마르크스, 레닌, 모택동의 탁월한 혁명 이론에 앞서 모든 운동들의 운명을 결정지은 ‘미신‘이었다고설명했다. 냉전 시기에 태평천국을 연구한 서양과 중국 민족주의 진영의 학자들은 공산주의자들의 전유물이 된 태평천국운동을 철저하게 비판해야 할 필요성이 있음을 발견했다. 그들은 집단화 계획을 위선적인 것으로 일축했으며, 심지어 태평천국의 환상은 전체주의적인것이라고 맹렬히 비난하기도 했다. 그리고 태평천국운동은 진정한혁명이 아니라 그저 거의 성공할 뻔했던 반왕조적 반란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 P326

협조 정책은 두 사건, 즉 1870년에 있었던 영국의 올콕 조약 AlcockConvetion 조인 거부와 천진에서 일어난 대학살로 인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두 사건 모두 공식적인 정책에 의한 결과라기보다는 오랜 기간에 걸쳐 억눌려 있었던 불만과 백성의 고통에 따른 산물로 볼수 있을 것이다. 사실 청과 여러 서구 열강은 1860년의 북경 조약에 뒤이은 협정들을 지속적으로 맺어나가는 데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러나그들의 태도는 많은 지지자들의 요구에 미치지 못했다. - P385

통상적으로 19세기 말의 조선에서 청의 외교는 ‘근대화한 일본의팽창주의적 위협과는 대조적으로 구시대적인 ‘중국적 세계 질서 속에서 불안정한 속국에 대해 자신들의 종주권을 유지하려는 지연 작전으로 평가되었다. 이러한 견해는 조선 사대부 계층 내의 청 지지 세력을유가 보수주의자로, 이에 대항한 친일세력을 진보주의자로 묘사하는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상당 정도 사실의 묘사라기보다일본팽창주의자들의 선전이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었다. 어떤 이는 청이 조선에서 완전히 근대화된 서구식 제국주의를 실현하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19세기 말 조선에서 청이 한 행동들은 오랜 한중관 - P398

계의 역사 속에서도 선례가 없는 것이었고, 오히려 동아시아 지역에서 팽창주의적 서구 열강들이 행했던 수법과 더욱 공통점이 많았다.
또한 이는 청 제국 중흥의 일부로서 1880년대에 시작한 신강, 대만, 만주에서의 변방 지방화정책과 유사했다. - P399

청 제국을 연구하는 역사가들은 적어도 두 가지의 다른 의미에서
‘제국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중국, 일본, 서양을 통틀어서 정치적좌익에 속하는 사람들은 이 용어를 레닌이 정의한 ‘자본주의의 가장높은 단계‘의 의미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본질적으로 경제적 개념인자본주의 시대에 발전했던 생산, 개발, 잉여 축적의 가장 효율적인 방식는 자본주의적 생산이 가장 발전했던 영국과 같은 대도시국가들에게서 중대한 문제로 나타났다. 즉 대도시 국가들은 그들의잉여 자본을 투자하기 위한 출구를 찾고 있었으며, 국내 경제의 침체와 붕괴에 직면해 있었다. 중국 같은 나라들은 잉여자본 투자의 대상이 되었고, 여기에서 산출된 이익들은 대도시 경제로 다시 보내졌다.
이로 인해 투자 대상이 된 국가들의 자본이 유출되었고, 격차 해소를위한 산업화에 자금을 공급할 수 없게 되었다. 1920~1930년대의 국 - P407

민당과 공산당의 혁명에서 제국주의는 이러한 방식으로 이해되었고,
중국 내에서 실현되었던 제국주의의 정도는 굉장한 논란의 대상이자혁명 전략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그러나 레닌주의적 시각에 입각한 제국주의는 또한 매우 광범위한 시간적 틀을 가지고 있었다. 즉 이 시각의 제국주의는 서양 자본주의와 접촉한 직후의 중국 역사에 대한 분석에 적용될 뿐만 아니라, 몇몇 학자들은 이를 현재까지도 적용하고 있다."
반면 비마르크스주의적 역사가들은 ‘제국주의를 이와 완전히 다르게 정의했다. 이러한 정의는 경제적 개념이기보다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고, 서구 열강(최종적으로는 일본의 식민지 확장을위한 세계적인 경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런 개념을 사용하는 학자들은 강대국들 사이에 지속적으로 세력 균형을 모색하는 가운데 인식된 외교적 의사소통의 체제를 제국주의로 간주하고 있다. - P408

대청 제국이 종말을 맞았다고 해서 대부분의 보통 중국인의 삶이 단기간에 변화한 것은 아니었다. 산동성에서 공장 노동자로 일하다가혁명을 경험했던 어느 여성은 훗날 자신에게 실제로 변화된 것은 단지화폐 단위뿐이었다고 회고했다. 혁명 이후 청의 동전보다 은화가 통용되었지만, 그 여성의 임금 가치는 영향을 받지 않고 유지되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 특히 엘리트 남성들에게 혁명은 강력하고 충격적인 의미를 지닌 문화적 사건이었다. 몇몇 학자들은 멸망한 왕조에 대한충절을 보여주는 비현실적인 행위로서 자살을 감행했고, 1920년대까지도 새로운 중국의 일부 남성들은 변발을 자르고 근대적 머리 모양을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했다. 이러한 행동은 청에 대한 복종과 자랑스럽게 변발을 유지했던 선조들에 대한 효심이 결부되어 나타난 것이 - P503

었다. 더욱 광범위하게 청의 멸망은 여성의 전족과 같은 세속적이면서 성적으로 뒤틀려 있는, 이제는 정치적으로 부적절한 낡은 관습의자취에 대한 독특한 향수를 가진 남성성의 위기를 초래했다. - P504

19세기후반에 새로운 종류의 사회 진화론적 민족주의가 등장하여 민족국가의 올바른 기초는 종족적 또는 민족적 조국이라고 주장하면서, 새로탄생한 중화민국은 한족만이 독점하는 영역임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청의 신민으로서 그들의 정체성을 받아들인 다양한 비한족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즉각적으로 일부 몽골족들은 자신들이 중화민국의 일부가 아니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1913년에는 동북 지역에 위치한 ‘만주족‘들의 고향에 주권 국가를 설립하려는 노력이 일어났고, 1932년에 일본에 의한 대리국으로서 중국의 ‘마지막 황 - P504

제‘인 아이신기오로 부의를 수반으로 하여 설립된 거대한 괴뢰국을포함하는 다양한 ‘만주국들‘이 간헐적으로 선포되었다." 21세기 초반의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여전히 직면하고 있는 티베트, 이슬람교도및 다른 분리주의 운동에서 볼 수 있듯이, 이것은 청의 멸망 이후 20세기 내내 해결되지 않고 있는 청 역사의 유산이다. - P50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랜만에 근황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느라 기진맥진한 생활을 이어가는 중이다.

팀장이 나간 뒤로 팀에 큰 공백이 생겼다. 이 때문에 결정을 내가 내려야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아무래도 그것 자체가 부담이 되는 데다가 다른 사람에게 내가 전하는 말이 오해가 되지 않는지 확인하는 과정도 어려움을 갖게 한다.

몇 번이나 그만두어야 하는 것 아닌가 고민할 정도로 최근에는 어려움이 컸다.

최근 들어 두통이 잦았고 도무지 안 되겠어서 오늘 휴가를 내고 쉬고 있다.

하루 쉰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겠지만 밀린 리뷰도 쓰고 가벼운 책을 읽고 그랬다. 참! 달리기도 했다.


걷기와 달리기는 차원이 다른 운동이라는 것을 알아가고 있다. 1분 뛰는 것과 1분 30초를 뛰는 것이 왜 이리 간격이 큰 것인지... 이제 4번째 진행했는데 하다가 막판에 좌절할 뻔했다. 내 체력이 얼마나 저질인지 새삼 느꼈다. 

어쨌든 체력이 되어야 머리도 굴리고 책도 읽고 사람들과도 만날 수 있다 생각하니 힘을 내보기로 했다.


어제 북플에 접속했다가 친구분들의 '인생네권'을 확인하고 나도 부랴부랴 했다.

좀 고민하기는 했지만 더 고민한다고 크게 달라질 목록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곧장 생각나는 책으로 꼽았다. 



<하워드 진, 역사의 힘>은 역사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 머리 두들겨 맞은 듯 강한 인상을 받았던 책이다. 아무래도 내 성정과 잘 맞는 분이라는 생각을 했는데 얼마 후 타계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실제로 만나지 못했음이 그리 안타까울 수가 없었다. 멀리 떨어져 살면서 만날 가능성이 거의 없는데도 나는 언젠가 그 분의 강연을 꼭 한 번 경험하고 싶은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어쨌든 그의 책은 그래도 남아 있으니 계속 읽어봐야지.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 전쟁의 기원>은 한국 전쟁사를 제대로 읽으려면 반드시 거쳐야 할 책이다. 그의 저작 이전과 이후가 나뉘어진다고 할 정도로 국내 학자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이는 내게도 마찬가지다. 그는 한국전쟁의 기원에 특히 인민위원회의 역할과 한계에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이 특징적이었다. 사실 박명림 선생님의 책이나 정병준 선생님 등의 책도 인상 깊게 읽었지만 이 책의 비중을 더 높게 칠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해방 일기> 시리즈는 김기협 선생님의 저작을 본격적으로 파게 된 계기였다. 민족주의적 시각에 경도되어 있던 나는 이 책을 계기로 균형 잡힌 역사 서술과 좌우파를 넘어선 시각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이 책은 재밌고 흡입력이 좋다. 1권을 읽다 보면 2권을 읽고, 이후 10권까지 쭉 달리게 된다. 또 이 책 덕분에 내가 해방 후 3년의 역사에 대한 관심이 커졌기 때문에 인생책으로 꼽을 수밖에 없다.


<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는 어른이 아이에게 이야기 식으로 한국사를 재밌게 들려주는 방식이라 잘 읽히고 친근하다. 이 책을 꼽은 것은 그가 역사학자로서 걸어온 발자취에 대한 존경이 어느 정도 작용했기도 하다. 1980년대 이후 시기 앞선 세대와는 달리 주류적 시각이 아니라 역사에서 숨은 민중의 목소리를 찾아내려는 노력을 꾸준히 하셨고 그랬기 때문인지 민중사가 강세를 이룬 때도 있었다. 지금은 다변화되었지만. 그 중 18권을 고른 것은 그의 동학농민혁명사 연구에 대한 존경의 표시다.



철쭉이 피고 알록달록해진 세상을 보는 것이 그나마 즐거운 요즘이다.


















댓글(16)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공쟝쟝 2024-04-24 1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역덕력 인정합니다!
팀장님의 공백에 찾아오는 두통이라니….ㅠㅠㅠㅠㅠㅠㅠ 회사야, 그 팀장 다시 잡아와라!!!
달릴 때는 바닥을 조심조심! 파인곳이나 느닷없이 등장하는 계단을 특히 조심하시구요 🏃🏽‍♀️🏃🏽‍♀️🏃🏽‍♀️달리세요!!

거리의화가 2024-04-25 06:22   좋아요 1 | URL
팀장 빨리 뽑아달라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새로 뽑는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니ㅠㅠ
안 그래도 달릴 때 계단 있는 곳은 피하고 트랙 있는 운동장이나 평평한 산책로에서 하고 있어요. 원래 발목이 안 좋았어서 무리하지 않고 천천히 달립니다. 쟝님 감사해요^^

새파랑 2024-04-24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화가님은 역사!
역시 역사!!
네권선택을 고민하는 시간도 재미있었습니다~!!

거리의화가 2024-04-25 06:23   좋아요 1 | URL
ㅋㅋ 네. 역시 어쩔 수 없는 역사 덕후인가봅니다^^; 저도 선택을 고민할 때만큼 설레고 즐거울 때가 없었어요. 알라딘 덕분에 다양한 분들의 선택지를 볼 수 있는 것도 즐거움입니다.

잠자냥 2024-04-24 2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리면서 꽃 사진 찍은 거면 인정!! ㅋㅋㅋㅋ (뭘?! ㅋㅋㅋㅋ)
아 진짜 역적 아니고 역덕!!

거리의화가 2024-04-25 06:25   좋아요 0 | URL
ㅋㅋㅋ 체력이 늘어 달리면서 꽃 사진을 찍을 정도가 되면 좋겠네요. 역적 아니고 역덕이라서 다행입니다!ㅎㅎ

다락방 2024-04-24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거리의화가 님 진짜 넘나 멋집니다!! 특히 역사책이 인생 네권 이라니! 😍
달리기 시작하셨다니 정말 좋고요 우리 함께 열심히 달려봅시다. 저는 오늘 열한번째 달리기 했습니다!! 💪💪

거리의화가 2024-04-25 06:27   좋아요 0 | URL
선택할 때 다른 분야의 책은 아무래도 생각이 안 났어요. 떠오른 책을 바로 고른지라!ㅋㅋ 늘 마음 속에 자리한 책을 고르게 되는 것 같아요.
그나저나 다락방 님 11번까지 어떻게 가셨나요ㅠㅠ 저 4번인데 이미 힘듭니다!ㅋㅋ 언어도, 달리기도 화이팅이에요!

은하수 2024-04-24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역덕으로 인정합니다.
하워드 진 저도 꼭 만나고 싶은 분이었는데.. 나중에 천국에서라도요~~^^
꽃 천지 구경하며 달리기라니 멋집니다. 두통이 날아갔을 듯 해요~~

거리의화가 2024-04-25 06:29   좋아요 1 | URL
하워드 진 강연을 실제로 듣고 얼굴을 본 독자들이 있다면 얼마나 행운일까 생각 많이 했었어요. 천국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 뵐 수 있다면 좋겠죠!ㅎㅎ
꽃 천지 구경하며 달리기 정말 할 만합니다. 달릴 때는 숨차서 고통이지만ㅋㅋ 그래도 달리는 순간은 잡 생각 달아나서 좋더라구요. 감사합니다.

희선 2024-04-25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리기도 하시다니, 가끔 달리기도 해야 한다지만 저는 늘 걷기만 할까 합니다 빨리 걸으면 되죠 잘 쉬셨네요 하루라 할지라도 그런 날 있으면 좀 더 낫겠지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4-04-25 06:30   좋아요 1 | URL
저도 늘 걷기만 하던 사람이었어요^^ 근데 요새 스트레스가 많았는데 달리면서 생각이 그 순간은 달아나서 좋더군요. 바람을 느끼며 달리는 맛이 꽤나 좋습니다. 하루 쉬니 좀 낫네요. 오늘은 어떤 일이 기다릴지^^; 희선님 건강 잘 챙기시고 즐거운 나날들 되시기 바랍니다.

자목련 2024-04-25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든 역사서는 화가 님으로 통한다!
그나저나 업무로 힘드셔서 걱정이네요.
달리기, 산책, 그리고 책과 꽃들이 화가 님께 평안을 찾아주기를 바라요.
꽃 사진과 하늘 넘 예쁩니다!

거리의화가 2024-04-28 18:22   좋아요 0 | URL
요 근래 들어서는 일요일 오전만 되면 이미 한숨이 나기 시작합니다^^; 그래도 어쩌겠어요. 시간이 약이기를 바랄 뿐입니다.
날이 포근해져서 철쭉이 절정을 지난 것 같더군요. 오늘은 덥기는 했는데 미세먼지도 없고 날 좋아서 걷기 참 좋았습니다. 자목련님 남은 4월 행복하게 보내세요^^

그레이스 2024-04-25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래쪽 두권은 저도 읽었습니다 ㅎㅎ
그래도 인생책 4권에 포함시키는 화가님 포스는 못따라가겠네요 ㅎㅎ

거리의화가 2024-04-28 18:23   좋아요 1 | URL
역시 그레이스님 2권 읽으셨군요. 멋지십니다!!
저는 다양한 분야의 책을 선정하는데 어려움이 있는 것이 독서력이 짧아서일 것 같아요. 편중된 독서를 하다보니 어쩔 수 없죠.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