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섭이 가라사대
손홍규 지음 / 창비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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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을 들고 한참이나 표지를 바라보았다. 이것은 유전자 변이를 일으킨 소인가, 인간인가. 점점 더 빠른 속도로 확산되고 있는 AI 로 인해 많은 닭과 오리, 가금류들은 살처분되고 있으며 오늘도 미국 쇠고기 수입 반대의 촛불 시위는 계속되고 있다. 우리의 머리속에는 쓰러져가던 끔찍한 소의 모습이 아직도 남아있다. 혹 광우병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게 아닐까? 이런 가상의 시나리오를 쓰게 하는 이 책( 봉섭이 가라사대, 창비출판),  내게 어떤 말을 걸어올까. 

 우선 표제작인 '봉섭이 가사라대' 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봉섭의 아버지, 응삼은 소를 키우면 살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의 한 모습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그가 소와의 인연이 각별하다는 것이다. 아들, 봉섭이가 소를 팔아 가출을 했을 때도 담담하게 새로운 우사를 지어 소를 기르고 그러다 소 싸움꾼이 되었다. 자신의 품을 떠난 자식들, 그리고 아내. 그의 곁에 남은 것은 말썽꾼 아들과 우직한 눈을 가진 소뿐이었다. [털빛도
여느 황소보다 짙은 암갈색을 띠고 있으며 골격부터가 남달랐다. 134쪽]  
 
 이처럼 자신을 알아주는 소, 점점 응삼은 소를 닮아간다. 소처럼 되새김질을 하는 응삼, 사람들을 대신해 농민회 집회에서 활보하던 소. 이제 소와 응삼은 하나나 마찬가지다. 광우병과 수입쇠고기로 인해 소 값은 더 폭락한다. 소를 도축업자에게 넘기자는 봉섭의 제안에 마지못해 수락한 것은 자신 스스로의 죽음과도 같은 것이다.  어디 소와 닮은 사람뿐이겠는가. 생명줄처럼 여기는 닭과 오리를 살처분하는 사람들의 모습 또한 그네들과 함께 평생을 살았으니 그네들을 닮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소를 잃은 사람들, 닭을 묻은 사람들, 그들이 머물 곳은 어디인가.  

 또한 상처나 슬픔을 모두 자신만의 푸른 괄호속에 넣어 버린 한 촌부(村婦)의 이야기를 그린 '푸른 괄호'는 어떠한가. 살기 위해 자식을 키우기 위해 농작물에 농약을 치고 그 농약에 병들어버린 삶은 누가 보상해 줄 것인가. [엄마 몸 속에 농약이 쌓여 있으면 얼마쯤은 내 몸에도 흘러들어왔겠지.  하긴 내 몸에 농약이 쌓여 있다면 그게 엄마 탓이겠어. 이십칠년 동안 내가 먹은 것들 떄문이겠지.207쪽] 그들에게 질책의 손가락을 겨눌 이는 아무도 없다.

 이 두 단편만으로도 소설가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알게 된다. 우리 시대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그들은 명확하게 짚어낸다.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하고 틀리다라고 말하는 편견과 오류에 대해 작가 손홍규 '이무기 사냥꾼', '뱀이 눈을 뜬다' 는 소설을 통해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우리의 태도, 고용이라는 이름으로 비정규직, 계약직, 임시직으로 이어지는 내몰림을 방관하는 정부를 고발한다. [우리 할아버지, 죽은 척해서 살아났어요. 인도군 들어올 때도, 사람 많이, 죽었어요. 우리 아버지, 죽은 척해서 살아났어요. 신의 뜻으로, 살아났어요. 내 동생 호랑이, 죽을 때, 나도 아버지 옆에서, 죽은 척했어요. 죽는 거, 부끄럽지 않아요.  언젠가, 모두, 죽어요. 죽으면, 고통에서 풀려나요, 그래서 살아남아요. 죽고, 살고, 다 하나예요.99~100쪽] 살아남기 위해 죽은 척하는 모습, 일해야 하기에 수치심과 모욕감을 삼켜야 하는 많은 이들의 현실을 세상에 드러낸다.
 
 이제는 역사의 한 페이지로 점점 잊혀지는 80년 광주 사태에 대한 이야기를 최후의 테러리스트 최초의 테러리스트 테러리스트들 이라는 연작소설은 광주 사태를 직접 겪은 이들로 이어진 2세대, 3세대의 내재된 슬픔을 엿보게 한다. 소설의 시작을 보면 1980년의 5월 18일 광주와는 상관없는 위싱턴주의 쎼인트헬렌스 화산의 폭발은 성층권까지 올라간 화산재는 아직도 세계를 떠다니고 있다. 251쪽 이처럼 생뚱맞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라는 믿음을 준다. 광주가 남 상흔은 고엽제나  원자폭탄보다 더 깊게 뿌리 박혀있음을 강조하고 싶은 표현이다.

 손홍규소설집 '봉섭이 가라사대'는 의미있는 소설집이다. 80년대를 겪지 않았어도 그 시대는 우리가 정확하게 알아야 하는 역사이고, 미국과의 FTA재협상을 외치는 촛불을 든 지금의 고등학생들은  또 하나의 역사가 될 것이다.  손홍규는 시대를 바로 보는 눈, 그리고 직언할 수 있는 손을 가졌다.

"소설이 무엇인지 누가 확신 할 수 있을까. 소설의 정의는 지금이 순간에도 수정되고 있는데. 언젠가 세월이 흐르면 그때의 소설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소설과는 전혀 다른 그 무엇이 되겠지. 그리하여 결국 소설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삶이란 무엇인가, 행복이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처럼 신비로워지겠지."  68쪽 이 소설집을 대표하는 이 한 문장이 우리에게 또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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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자줏빛 소파
조경란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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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경란의 ''를 읽으려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도 이 책을 만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혀'에 대한 뜨거운 소문에 휩싸여 '혀'를 만나기 위해 '국자 이야기'를 읽었고 뒤이어 혀를 만났다. 그리고 이제 앞서 만난 책을 이어 '자줏빛 소파'를 손에 들었다. 2007년의 '혀'와 2000년의 자줏빛 소파는 두 소설 사이의 긴 시간에서 느껴지듯이 그 느낌이 많이 달랐다. 그녀의 초기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자줏빛 소파를 비롯한 9편의 단편에서도 그녀만의 그려낼 수 있는 사물에 대한 감각적인 묘사는 여전했지만 이 소설집에서는 빛이 사라진 어두운 그림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나의 자줏빛 소파 : 편지 쓰기의 형식을 빌어 누군가에게 자신의 내면을 쏟아내는 소설이다. 말로 할 수 없는 세세한 감정 하나 하나를 드러내고 있는 것은 혼잣말을 하는 것과 같아 그것은 그녀가 외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방법으로 보여진다. 자신의 소소한 일상을 담담하게 써내려가는 그녀를 상상한다. 홀로 앉아 뜨개질을 하는 그녀를. [잎이 지고 나면 꽃이 피고, 꽃이 지고 나면 잎이 지고 마는 식물이 있습니다. 잎과 꽃들은 서로를 그리워하지만 결코 만날 수 없습니다. 34족 나의 자줏빛 소파] 닿은 듯 하면서 닿지 않는 꽃과 꽃잎처럼 그녀는 편지를 수신 할 그 누군가와 닿고 싶은 소망이 있는지도 모른다. 이 소설을 읽고 나니 나의 이야기를 들어줄 이름 모르는 누군가에게 긴 장문의 편지를 쓰고 싶은 생각이 몰려온다.

 망원경 : 세상 사람들의 소식을 연결해주는 곳인 우체국에 근무하는 주인공. 그러나 정작 그는 세상과의 소통이 두려운 사람이다. 매일 매일 할머니의 편지를 기다리며 우체국에 오는 계집아이도 그와 다르지 않다. 목에 건 망원경으로 세상을 보려는 그. 아름다운 세상을 바로 보지 못하고 망원경으로만 바라보려 하는 그. 그가 진정으로 보고 싶어하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유리 동물원 : 가장 기억에 남는 소설이었다. 오피스텔 관리인의 자격으로 열쇠를 가진 주인공은 남몰래 그네들의 집에 들어가 청소를 하기도 하고 남잠을 자기고 하며, 돈이나 귀금속을 몰래 훔쳐나오기도 한다. 유리 동물원으로 그려진 오피스텔, 인간의 훔쳐보기 심리, 집 밖과 집 안에서 그려지는 사람들의 이중적인 모습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소설. 그러나 과연 유리 동물원이라는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가난한 친정,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남편, 그리고 오피스텔이라는 똑같은 구조 속에 살고 있는 다른 형태의 사람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도 어렵지만 자신의 행동조차 스스로에게 납득시킨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새삼스럽게 깨달아지는 기분이었다. 164쪽 유리 동물원] 자기 자신 조차 자신을 이해 할 수 없는 주인공의 삶은 무기력하기만 하다.  무거운 열쇠 꾸러미를 내던져버리는 그녀는 무기력한 자신의 삶을 잠가두었던 열쇠도 같이 버린 것일까? 자꾸만 그녀가 생각난다.

녹색 광선 : 같은 날 같은 시각, 자신을 둘러싼 공간의 사람들에게 모두 단수가 된다. 그러나 나를 제외한 모든 이는 그것을 대비하고 있고 나만 고립된 느낌이다. 애인과의 이별, 세상과의 단절. 헤어진 그녀의 목소리를 찾아 매일 전화를 건다. 그러나 그녀를 찾을 수 없다. 단수가 되어도 식당은 여전하게 장사를 하고 주인집은 커다란 물탱크에 그에게 없는 물이 가득하다. 지저분한 집, 악취가 나는 집, 그녀가 없는 집, 그에게 필요한 것은 어디에도 없다. 

 피아노 조율을 하며 한 마리의 강아지와 살고 있는 여자의 상처를 들려주고 있는 아주 뜨거운 차 한 잔  이승과 저승의 중간 공간에 헤매는 망자가 화자가 되어 사랑하는 남자를 주시하고 그의 행동을 묘사하고 있는 잔의 밑바닥에 남아 있는 커피 찌꺼기의 무늬  아버지의 죽음, 동생의 이민, 그리고 남겨진 주인공와 늙은 노모. 무미건조한 일상속에 날아든 낯선 소녀의 죽음으로 인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되는 식물들.  내게는 난이한 소설로 기억되는 오늘의 요리, 물고기 아파트.

[가슴 밑바닥에 묻어둔 지옥 하나 없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냐고, 그런 말들을 그렇게 쉽게 해서는 안된다. 224쪽 아주 뜨거운 차 한 잔] 누군가를 알아가고 그와 소통하기 위해서 우리는 매일 말을 하게 된다. 그러나 열지 말아야 할 깊은 문은 두드리지 말아야 한다. 시간이 흐른 뒤 진정한 소통이 이뤄지는 순간, 그 문은 자연스레 열리게 될 것이다. 세상과의 소통, 그것이 이 소설이 내게 건네는 말이 아닌가 싶다. 간절하게 필요한 소통. 더이상 혼자가 아닌 삶.

조경란의 소설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불안정하고 위태로와 보인다. 누군가와 이별하고 누군가를 잊지 못하고 누군가와 소통하기를 간절하게 바란다.  고립된 공간에 홀로 있는 그들, 몸부림치는 그들의 모습이 눈물겹다. 끊임없이 누군가를 찾아다니고 부르며 그리워하는 이들. 그들에게 빛이 필요하다. 조경란, 아마도 이 소설집을 쓸 당시 그녀에게도 빛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자줏빛 소파'에서의 짙은 그림자는 '국자 이야기'를 통해 조금 옅어지고 있었다. 조경란이 '혀'를 통해 보여준 사랑에 대한 욕망과 열정의 뒤를 이을 소설에는 어떤 빛이 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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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딜 수 없네 (양장본) - 황금이삭 1
정현종 지음 / 큰나(시와시학사)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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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집을 사둔지 몇 달이 지났다. 정현종님의 시를 특별히 좋아하는 이유도 있었지만 이 시집을 구매한 것은 '견딜 수 없네' 라는 제목이 자꾸만 나를 흔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대학 1학년 생일에 정현종님의 '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라는 시집을 선물받았다. 그 때까지 정현종이라는 시인을 알지 못했다. 스물에 만났던 시들은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었다. 그러나 사회에 나오고 사람에게 치이고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아파하면서 다시 시를 만났을 때 그 느낌은 무척 달랐다. 물론 여전하게 어렵지만 그래도 자꾸만 읽게된다. 그렇게 정현종님의 시는 내게 위안으로 남는다.

 우리는 무엇을 견딜 수 없기에 절망하고 아파하는 것일까? 이별, 죽음, 고통, 때로는 극도로 짧은 순간이 될지도 모른다. 인간에게 신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은 주지 않는다고 한다. 지나고 보면 모든 것은 다 지나가게 마련이다. 삶의 짧은 한 단면을 시라는 거대한 우주로 풀어놓는 정현종님의 시를 읽고 있으면 광활한 우주 공간에 작은 행성이 불과한 지구에 살고 있는 나란 존재는 미세한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확인하는 듯하다. 세상을 아우르는 힘, 세상을 다 끌어안는 힘, 그 것이 시가 아닌가 싶다.

 말하지 않은 슬픔이......

 말하기 않은 슬픔이 얼마나 많으냐

 말하지 않은 분노는 얼마나 많으냐

 들리지 않는 한숨은 또 얼마나 많으냐

 그런 걸 자세히 헤아릴 수 있다면

 지껄이는 모든 말들

 지껄이는 입들은

 한결 견딜 만하리.

 물론, 나는 시를 잘 모른다. 시인의 말하고자 하는 웅숭깊은 속내를 알지 못한다. 그저 그 시를 읽으며 마음을 다스리고 깊은 호흡을 할 뿐이다. 내가 삼키고 있는 말들을 시인은 알고 있는 것 처럼 말하고 있다. 그것은 시인이 내가 살아온 삶의 곱절을 살았기 때문일까? 세상을 보는 그 깊은 혜안을 가진 이, 그를 우리는 시인이라 부르는가. 내가 지금껏 살아온 날들을 다시 살아내고 노년이 되었을 때 시인이 가진 눈으로 세상을 볼 수는 없겠지만  이 시를 기억하여 지금의 나같은 누군가에게  이 시를 이야기해 줄 수 있다면 참으로 행복할 것 같다.

 모든 건 꽃핀다

 수선화가 활짝 피었다.

 두 색 한 송이.

 (괴로울 때 몽오리를 보았다)

 괴로움이 혹은 꽃피듯이

 꽃은 만개하였다.

 너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내가 꽃피었다면?

 나의 괴로움에도 불구하고

 네가 꽃피었다면?

 아, 자연의 길은 그렇다.

 바라건대 우리가 바라는 바이다.

 모든 건 꽃핀다.

 바보도 꽃피고

 괴로움도 꽃핀다.

 이나 닦야겠다.

 너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 내가 꽃피었다면? / 나의 괴로움에도 불구하고 / 네가 꽃피었다면?  우리는 종종 나의 고통만 보고 산다. 나의 고통이 제일 크기 때문에 다른 이의 고통은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세상사는 홀로 사는게 아님에도 그저 나만을 생각한다. 바보도 꽃피고 괴로움도 꽃핀다. 지금도 어느 곳에서는 수만가지의 행복한 꽃, 괴로움의 꽃이 피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꽃들은 피어나고 질 것이다. 나는 어떤 몽오리를 품고 있는지가만 생각한다. 설령 고통의 몽오리라도 꽃은 피었다 질 것이니 모든 건 꽃핀다는 시인의 말은 내게 모든 건 지나간다는 말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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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란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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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먹고 달콤한 아이스크림이나 가벼운 커피 한 잔을  마시는 일은 생각만으로도 행복하다. 같이 밥을 먹는다는 것은 관계의 시작이고 그것은 관계의 발전으로 이끄는 계기가 된다. 그러다 그 밥을 직접 해주고 싶은 욕망을 갖게 되기도 한다. 내 손으로 쌀을 씻고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하는 시간은 그 사람과 마주 앉을 황홀한 순간을 기대하게 된다.  그러나 그 사랑이 정체되어 있는 시간에는 그를 위해 밥을 하기도  싫고 그와 함께 밥을 먹는 것도 끔찍한 순간으로 기억된다. 음식의 맛을 느끼는 혀, 달콤한 키스를 꿈꾸게 하는 혀. 당돌한 느낌의 제목이다. 
 
 이 소설은 단순하게 정리하면 사랑하다 헤어지고 상대를 그리워하면서도 증오하는 한 여자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 여자의 직업이 오감을 가장 많이 필요로하는 요리사인 것이다. 음식을 먹을 때 입술은 피가 몰리면서 붉어지고 부풀기 시작한다. 사랑을 나눌 때의 성기들처럼. 입술과 성기는 혀와 함께 특별한 성감대에 속한다. 모두 점막 피부로 되어 있고 신경이 밀집돼 있기 때문이다. 29쪽 요리는 즐거운 일이지만 어려운 일이다. 사랑도 즐거우면서 어려운 것이다. 주인공은 자신의 이름을 건 키친에서 요리강습을 하는 잘 나가는 요리사다. 그의 연인 역시 유명한 건축가다. 자신의 전부라 할 수 있는 키친에서 자신의 연인이 다른 여자와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목격한 주인공은 아마 원하지 않는 이별을 맞이 할 꺼라 예상했을 것이다. 헤어짐과 동시에 그녀는 입맛을 잃는다. 우리는 왜 좌절하고 절망하면 식욕을 잃는 걸까? 

 사랑, 이별, 그리고 수많은 감정들을 그녀는 음식의 맛으로 표현한다.고독이라든가 슬픔 혹은 기쁨 같은 것은 요리 재료로 표현 할 수 있다면, 고독은 바질이다. 기쁨은 사프란이다. 슬픔은 먼 데까지 향이 처지는 까슬까슬한 오이다. 31쪽 한쪽은 원하고 다른 한쪽은 원하지 않는 일. 나는 그게 슬픔일 거라고 생각한다. 더 나은 말은 알지 못하고 아직은 어떤 음식으로도 표현해낼수 없다. 슬픔에 대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은 그 게 매우 개인적인 감정이라는 점이다. 84쪽 무척 신선한 느낌이다. 보지도 듣지도 먹어보지도 못한 음식의 레시피를 따라 읽어가며 머리속으로 상상하는 즐거움을 준다. 식욕과 성욕, 그 세밀한 표현은 입에 침을 고이게 하고 욕망을 불러온다.
 
 우리 몸에 시각을 제어하는 유전자는 네 개뿐이지만 후각, 미각에 관여하는 유전자는 천 개도 넘는다. 그러나 그 천 개는 네 개보다 빠른 속도로 사라질 수도 있다. 16쪽 혀에 닿는 순간 사라지는 맛, 그 맛을 기억해내려는 노력. 사랑과 요리에 대한 신비한 비유와 비교는 마치 사랑은 요리다라고 사전에 국한되어진 느낌까지 받게 한다. 요리사인 그녀는 마지막으로 떠나간 그에게 마지막 성찬을 준비한다. 끔찍하지만 그것은 그녀의 증오와 욕망의 절정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녀의 새로운 사랑을 찾으려는 노력인지 모른다. 

 부엌에서 중요한 건 거기 머무는 시간이 얼마나 즐거운가인것처럼 요리를 할 때 중요한 건 그 음식을 먹을 대상에 대한 생각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사람의 미각, 원하는 것, 좋아하는 것, 만족시켜줄 수 있는 것, 감동시킬 수 잇는 것, 그리고 다시 그것을 찾게 만드는 것. 88쪽 매일 매일 음식을 만드는 많은 사람들 중에 이런 생각을 하는 이가 얼마나 될까? 사랑이 완성되어지는 곳이라 감히 말하고 싶은 곳. 조경란은 '혀'라는 제목을 썼지만 이 책을 읽는 나에게 이 책은  커다란 부엌을 떠올리게 한다. 슬픔의 맛은 정말 오이같은 것일까? 혀끝에 닿자 마자 달콤하고 황홀함이 몰려오는 그런 맛을 가진 사랑을 하고 싶어진다. 그리고 맛난 밥을 지어 나란하게 식탁에 앉아 밥 먹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 일어날 수 없는 상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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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를 기르다
윤대녕 지음 / 창비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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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남으로 떠난 제비가 돌아오는 봄, 내 안에도 박씨를 심어줄 제비가 들어왔다. 윤대녕, 그의 소설은 마치 길고 긴 한 편의 시와 같다. 단 편 하나 하나가 각각 연이 되어 때로는 매혹적이고 때로는 무덤덤하게 독자에게  말을 건다. 글 속의 화자는 어느새 글을 읽고 있는 독자로 이입된다. 가물거리는 꿈속 같은 추억을 이야기하고 갈망하는 욕망을 터드리기도 한다. 그러나 조용한 목소리로 내뱉는다. 윤대녕의 소설은 일상에서의 일탈을 도모하게 한다. '피아노와 백합의 사막'에서 온통 사막을 그리워하게 만든 그는 이 소설집에서 삶을 여행하는 여행자, 추억을 더듬어 방황하는 중년이후의 그리움을 탐익하게 한다. 잔잔했던 내면속으로 파고들어 점점 더 커지는 파동을 만들어낸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인생의 뒤안길

지난 가을 떠난 나만의 제비가 돌아오길 기다리지만 정작 돌아온 제비는 그때의 제비가 아님을 알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나를 잊지 않고 돌아온 나만의 제비로 기억하고 싶어한다. 인생의 공허함과 외로움을 달랠길 없던 어머니의 기나 긴 방황은 그녀의 부재를 대신한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 그것은 또다른 방황으로 이어지고 소설속 화자가 그리워한 문희로 대변된다. 그저 외로웠기에 그저 나를 달래기 위한 방편. 어머니가 기다리던 제비는 결국 나에게도 같은 의미의 제비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 그것이 인생인지 모른다. 단편 '제비를 기르다'에서 아버지와 화자가 기다린 제비는 어머니였을 것이고, 어머니가 기다린 제비는 자기 자신이었을 것이다. '어디서 어느 틈에 새들어온 빛일까. 노파의 등 뒤에 연잎 같은 커다란 보랏빛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그 빛은 차츰 사람의 형상으로 변해 노파를 뒤에서껴안은 듯한 그림자가 되어갔다.'제비를 기르다' 중에서 .이 단편은 어린 아들을 버리고 평생을 살다가 죽음을 앞두고 아들에게 돌아 온 아버지와의 암묵적인 갈등와 증오를 편백나무 숲이라는 거대한 숲으로 표현하고 있는 '편백나무쪽으로' 라는 소설과 그 맥락을 함께 한다. 깜깜한 어둠으로 그려지는 편백나무숲, 정작 그 숲 안에서는 평온이숨겨져있고 알려지지 않았던 아버지의 삶이 드리워져 있다. 그 안에서 비로소 화해할 수 있는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을 그리게 한다.

 소리내어 말했으나 들리지 않는 소리

 우리는 매일 매일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이야기를 듣는다. 심지어 자동으로 녹음된 기계화된 음성을 듣기도 한다. 아니, 기계화된 음성에 점점 더 익숙해져 있다. 감정을 배제한 음성이기에 때로는 그 안에 담겨진 진짜 소리를 듣지 못하기도 한다. 반대로 어느 누구도 알아주지 않던 자신의 소리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자신에게 가지는 의미는 특별하다. 가족 모두에게 외면당하고 살아온 늙은 고모가 죽음을 앞두고 바다 건너 제주도까지 자신의 말을 들어주고 자신을 위로해주던 조카를 만나고 떠난 이야기, '탱자'는 지친 삶의 농밀한 슬픔을 그대로 보여준다. 자신의 제외한 모든 가족은 귤이었고 늙은 고모는 작고 보잘 것 없는 탱자였다는 은유적 표현으로 읽힌다. 

  홀연하게 나타나 자신의 삶을 뒤흔드는 듯한 누군가와의 만남과 이별을 통해 삶과 죽음, 인연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낙타 주머니', 인생에서 결혼이라는 인연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만나지는 상처를 그린 '못구멍'이라는 단편은 윤대녕만이 쓸 수 있는 글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했다.  물론 나는 아직 그의 작품을 많이 만나지는 못했다. 하고 싶은 말을 입 속에서 소리로 만들어내지 못하고 맴돌다가 한 참 후에 세상에 토해내는 느낌, 하나의 사물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듯한 그의 시선을 만난다. 

 '문학의 종언'을 둘러싼 논란이 문단에서 가열한 이때, 또 한 권을 책을 보태는 일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삶이 계속되는 한 그리움은 계속되고 또한 누군가 조용히 숨어 글을 바라고 쓰는 일도 계속될 것이다. 라는 작가의 말은 '인생이란 헐벗은 나뭇가지들 사이로 틈틈이 지나가는 햇살을 바라보는 것. 따뜻한 강물처럼 나를 안아줘. 더이상 맨발로 추운 벌판을 걷고 싶지 않아. 당신의 입속에서 스며나오는 치약냄새를 나는 사랑했던 거야. 우리 무지갯빛 피라미들처럼 함께 춤을 춰. 그래도 인생은 살 만한 거라고 내기 애기해줘. 단편 '못구멍'에서 만난 이 문장을 메모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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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icare 2008-04-23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같은 독자가 있어서
윤대녕씨는 좋겠습니다.

자목련 2008-04-23 19:14   좋아요 0 | URL
hanicare님, 그럴까요? 저는 hanicare님이 덧글 달아주시니 기분이 좋은데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