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고 싶은 이는 많지만 실천하는 이는 적다.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과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쓴다는 것, 그 행위가 어려운 게 아니라 집중이 힘들고 무엇을 어떻게 진행시켜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영감이 떠오르지 않아 쓸 수 없다고 누군가는 쓰다가 막혀서 진행이 안되다고 절규할지도 모른다. 쓴다는 건 무엇이기에, 우리는 이토록 쓰고자 애쓰는 것일까.


대니 샤피로를 알지 못한다. 『계속 쓰기 : 나의 단어로』를 선택한 건 오롯이 제목 때문이다. 어떤 글쓰기 노하우를 기대하지 않았다. ‘나의 단어’를 생각하고 꼽아볼 수 있기를 바랐다. 책을 읽어가면서 대니 샤피로의 일상을 그리며 글쓰기를 갈망하는 사람의 모습을 그 위에 덧칠한다. 글이 잘 써지는 공간과 최적의 시간을 찾는 일, 『소설엔 마진이 얼마나 남을까』에서 만났던 작가들의 글이 떠오르기도 했다. 누군가 카페를 찾고, 누군가 서재에서, 일정한 작업 시간을 지키려는 노력. 대니 샤피로로 다르지 않았다. 전화, 집안일, 인터넷 검색, 잡다한 생각으로부터 벗어나 글에 집중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역력하다.


이 책은 80개의 이야기 조각으로 엮은 책이다. 80개의 단어, 제목이 있다. 자신의 유년 시절과 성장과정에 영향을 끼진 부모, 이웃, 학교, 가족, 아이에 대한 것들과 학생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는 일, 자신이 소설을 어떻게 썼는지 읽을 수 있다. 그렇다고 단문을 쓰고, 부사를 쓰지 말라는 조언을 강하게 주장하는 건 아니다. 한 단어, 한 문장, 소설의 중반에서 다시 엎고 몇 년 동안 인물을 묘사하는 방법은 자신이 글을 쓰면서 느끼고 경험하면서 것들을 안내하는 정도다. 그가 알고 있는 위대한 작가들의 말을 인용하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기존 작가들을 위한 글처럼 여겨 기지도 한다. 소설을 쓰고, 마감이 있고, 편집자가 있는 이들이 공감하고 수긍할 글 말이다. 그게 나쁘진 않다. 뭔가를 쓰고자 하는 이들에게 목표를 만들고 시도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으니까. 그녀의 말처럼 글쓰기를 그만두고 싶다면 그만두면 된다.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고 시작하면 된다고.


나는 무엇을 쓰고 싶은 걸까. 나만의 단어를 나열하다가, 나의 일기장이나 비밀글에만 적용되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에 주춤한다. 그러다 그래도 상관없다는 답에 이른다. 쓴다는 것, 그것으로 인해 내가 얻는 위로와 위안이 있으니까. 한 명의 독자를 염두에 두고 쓰라는 글에, 그 한 명은 누구일까 골몰하기를 그만둔다. 어떤 공간이든 비공개가 아닌 이상 독자는 존재하고 그에 따른 다양한 피드백(댓글을 통한 조언, 비평)이 따라온다는 걸 알기에.


한 권의 책에서 얻을 수 있는 무엇일까. 누군가 우연한 동기, 혹은 강렬한 계기를 얻을 수 있다. 누군가 책장에 참고도서로 남겨둘지도 모른다. 나는 이런 문장을 꼽는다. 대단하고 거창한 글쓰기가 아닌 나를 쓰는 일, 나만의 작은 목표를 설정하고 실패를 마주하는 일, 그래도 쓰는 마음은 쉬이 시들지 않기에 낫게 실패한다는 말이 주는 감동을 오래 간직하려 한다.


리는 더 낫게 실패한다. 우리는 자세를 바로잡고, 자기 자신을 추스르고, 다시 시작한다. (15쪽)

언어를 찾는 것, 우리가 바라는 건 바로 그것이다. (46쪽)

몰두는 필멸, 우울, 수치, 불운, 무기력을 불러일으키는 슬픔에 대한 대비책이다. (197쪽)


글을 쓰려는 마음은 쌓아두지 말고 실천을 해야만 자랄 수 있다. 모든 일이 그렇겠지만, 아무리 좋은 계획과 목표라 해도 실천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니까. 지금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필요한 게 글이구나 싶다. 삶이 계속되는 것처럼 쓰기도 계속되어야 한다. 나만의 언어를 찾을 때까지, 언어가 살아 움직일 때까지 계속 쓰고 써야 한다.


대체 무엇이 글쓰기를 숨쉬기처럼 필수적이게 할까? 우리가 노력하고, 실패하고, 앉아 있고, 생각하고, 저항하고, 꿈꾸고, 복잡하게 하고, 풀어내는, 우리를 깊이 연루시키고, 기민하고 하고, 살아 있게 하는 수많은 나날이다. 시간이 미끄러지듯 지나간다. 몸이 무관해진다. 우리는 언젠가 그렇게 될 것처럼 의식에 가까워져 있다. (129쪽)


이 책이 어떤 마음을 다잡고 정리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 대학에서 국문학과 글쓰기 강의를 하고 있는 정희모 교수의 『문장의 비결』은 실전을 위한 교과서라 할 수 있다. 중요한 점은 문장 쓰기에 집중한다는 점이다. 가장 중요하다는 첫 문장, 그 문장 쓰기에 대해 배우고 수정하다 보면 좋은 글이 완성된다고 안내한다.


쓰는 일에 급급해서 고치는 연습을 한 적이 있던가. 우선은 쓰고 보자는 마음에 수정은 나중으로 미루고 결국엔 글을 완성하다. 수정은 오타나, 맞춤법이 나닌 맥락, 문장의 오류를 발견하는 일이다. 글 쓰는 이가 모두 소설가가 되거나 작가가 되려는 건 아니다. 그러나 문장의 의미가 읽는 이(독자)에게 그대로 전달되도록 해야 좋은 글이다.


생각과 의도를 전달하게 위해 글을 쓴다. 한 문장으로 전달은 불가능하다. 문장이 연결되면서 전체 주제를 형성한다. 세부 내용들이 하나씩 모여 전체 주제가 만들어진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문장의 의미 연결을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문장 화제와 초점을 따라가며 글을 쓰는 것이라고 말한다. 역시 수정이 최고인가.


한 편의 글은 일관된 스토리로 지속되어 적절한 메시지를 형성해야 한다. 문장이 일관된 화제로 지속되지 못하고 단절되는 현상은 문장의 연결 흐름을 따르지 않고 필자의 생각을 앞세우기 때문이다. 문장의 흐름이 단절될 때는 문장을 수정하고 이를 고쳐야 한다. (258쪽, 「문장의 연결 1」)


좋은 문장은 무엇일까. 저자의 말처럼 죽은 문장이 아닌 생동감 넘치는 문장이다. 그런 문장을 쓰는 건 요원하다. 그러나 글을 쓸 때마다 한 문장을 쓸 때마다 기억하고 있다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수업을 받는 마음으로 집중해서 공부하고 실천하다면 나만의 살아 있는 문장을 쓸 수 있을 것이다.


한 문장이 다른 문장과 연관을 맺고 때로는 숨을 죽이다가 때로는 폭발하고, 때로는 늦게 가다가 때로는 빨리 가기도 한다. 우리가 문장을 쓸 때 앞뒤 문장과의 관계를 보고, 단락 내의 위치도 보며, 전체 주제와의 관계를 따져봐야 하는 것도 문장이 생명체처럼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문장 학습의 책이지만 엄밀히 보면 텍스트 내의 문장의 흐름, 즉 유기체처럼 움직이는 글의 흐름을 살피는 책이기도 하다. (저자의 말 중에서, 5쪽)


결국 우리가 글쓰기에 대한 글을 찾고, 책을 읽고 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건 나를 쓰고자 하는 욕망 때문이다. 어떤 형태가 됐든 나를 쓰는 일은 나를 아는 방법 중 가장 멋진 일이라 생각한다. 여전히 두렵고 쓰는 건 어렵더라도 그것을 향해 나가는 일. 그것이야말로 낫게 실패하는 일이다. 실패를 반복하며 더 괜찮은 글을 마주하고 싶다. 아름다운 글, 살아 있는 글을 쓰고 싶은 마음만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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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3-05-04 20:1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글쓰기는 정말이지 왜 이리 어려운지요.
많은 책을 읽고 글을 써내시는 자목련님이 대단하시다고 매번 생각하고 있어요.
글을 쓰는게 어려우니 글을 쓰는 것에만 목적을 두는 경우가 많아요.
쓰는 일에 급급해 고치는 연습을 게을리하는 저를 때리는군요^^

자목련 2023-05-07 15:43   좋아요 2 | URL
잘 쓰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그런 것 같아요. 그냥 쓰는것에 집중하면 될 텐데 말이에요.
이 책이 제목처럼 계속 쓰기가 정말 중요한 게 아닐까 싶어요^^

독서괭 2023-05-04 21: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더 낫게 실패한다”라는 말이 좋네요^^ 생소하게 느껴지면서도 좋아요.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보다요!

자목련 2023-05-07 15:42   좋아요 1 | URL
이 책에 좋은 말이 참 많았는데요, 가장 와 닿고 기억하고 싶은 말이 더 낫게 실패한다는 말이었어요. 실패가 얼마나 좋은 경험이고 좋은 일인가 생각해보기도 했고요!

얄라알라 2023-05-07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쓰는 일에 급급해서 고치는 연습을 한 적이 있던가.˝
저는, 종일 놀다가 밤에 자정이 가까워질 무렵 자판 두드릴 때가 자주 있는데 졸려서 일단 저장하고 보자 심정으로 마무리를 안 할 때가 많아요. (뜨끔뜨끔.... 고치는 연습을 한 적이 없습니다^^;;;;;)

자목련님 글은 잡다한 양념 걷어내고 담백한 재료 그대로의 맛을 주는 음식같다는 생각 가끔 하는데‘오늘 글의 메시지도 결국, 비슷한 것 같습니다. 도움 크게 얻고 갑니다^^ 감사드립니다.

자목련 2023-05-08 12:27   좋아요 1 | URL
오타를 발견했을 때, 정말 숨어버리고 싶은데 수정을 해야지 하면서 잊어버리곤 해요. 그냥 그게 글의 운명인가 싶고요. ㅎ 담백한 재료의 맛이 주는 음식 같다는 칭찬, 오래 기억하겠습니다. 맛난 점심 드시고요!
 
아쿠아리움이 문을 닫으면
셸비 반 펠트 지음, 신솔잎 옮김 / 미디어창비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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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식물에게 말을 건다. 오랜만에 본 화분 속 식물에게 말이다. “안녕, 잘 지냈어?” 그럼 잎사귀가 나를 빤히 바라보는 것만 같다. 사실 혼자만의 생각이다. 그러고 나면 기분이 좋아지니까. 물을 주고 잎사귀를 매만지는 하나의 의식 같은 것이다. 셸비 반 펠트의 장편소설 『아쿠아리움이 문을 닫으면』을 읽으면서 그 식물들이 생각났다. 식물이 등장하는 소설이냐고? 전혀 아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수족관이 등장한다. 다양한 바다 생물, 그중에서도 똑똑한 문어가 화자로 등장하는 소설이다. 문어, 당신이 떠올리는 축구와 문어, 그 문어 말이다.


문어의 시선으로 바라본 사람과 세상, 그리고 상실과 상처에 대한 이야기. 뭔가 재미와 감동이 기대된다면 맞다. 이 소설은 그런 소설이다. 처음부터 대놓고 이렇게 말하면 스포일러겠지만 뭐 당신이 읽지 않는 한 이 감동을 느낄 수 없으니 괜찮다. 그냥 이 소설에 대해서는 이렇게 시작하고 싶다. 소웰베이 아쿠아리움의 수조에 갇힌 문어 ‘마셀러스’, 그와 우정을 나누는 아쿠아리움의 70세 청소부 할머니 ‘토바’. 인간과 문어의 우정은 가능한 것일까. 가능하다고 본다. 식물과의 우정도. 참고로 나와 식물 사이의 우정은 조금 더 깊어져야 한다.


토바는 마셀러스가 수조를 탈출하는 걸 알면서 관장에게 말하지 않는다. 대신 다시 수조로 들어가게 도와준다. 마셀러스가 수족 밖으로 나오는 이유는 간단하다. 심심하고 답답하고, 호기심이 많아서다. 8개의 팔로 흥미로운 것들을 몰래 가져오는 재미도 빠질 수 없다. 마셀러스는 수조 안에서 아쿠아리움을 방문하는 많은 사람들을 관찰하지만 그가 관심을 갖는 이는 오직 토바뿐이다.


바다가 깊숙이 간직한 비밀이란 이런 것들이다. 내가 다시는 탐험할 수 없는 것들. 그때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스니커즈 밑창과 끈, 단추, 복제 열쇠를 모두 챙길 것이다. 전부 다 그녀에게 전해줄 것이다. 그녀의 상실에 위로를 전한다. 이 열쇠를 돌려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이다. (155쪽)


토바는 혼자다. 어린 시절 스웨덴에서 미국으로 이주 후 아버지가 지은 집에서 살고 있다. 결혼도 했고 아이도 낳았다. 남편은 암에 걸려 죽었고 그보다 먼저 아들 에릭이 세상을 떠났다. 30년 전, 십 대의 아들 에릭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다. 토바에게는 그랬다. 현재 토바의 삶에는 아무런 희망도 즐거움도 없다. 그저 살아갈 뿐이다. 동네 친구들이 그녀를 바라보는 마음, 호의와 배려가 조금은 불편하다. 마트를 운영하며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이선도 마찬가지다. 아쿠아리움에서 청소를 하는 일, 어린 아들이 올라탔던 동상을 닦는 일, 바다 생물에게 인사를 건네는 반복된 일상을 살아낼 뿐이다.


그러니 하나뿐인 오빠의 죽음에도 충격을 받지 않는다. 오래전 교류가 끊겼고 물건을 챙기러 요양원에 방문할 뿐이다. 그런데 입소 신청서를 쓰고 집을 팔기로 결정한다. 아버지, 남편, 아들의 흔적이 가득한 집을 말이다. 청소를 하다가 팔을 다친 후 집 정리를 하고 시간을 보내면서 결정한 일이다. 토마에게 더 이상 소웰베이엔 남은 게 없었기 때문에.


그런데 토바의 인생에 캐머런이 등장하곤 달라졌다. 캘리포니아에서 생부를 찾아 소웰베이로 온 캐머런. 약물중독의 엄마 대신 이모가 캐머런을 키웠다. 엄마의 돌봄을 기대하기는커녕 연락도 되지 않았다. 서른이 되었지만 일자리도 살 곳도 없다. 여자 친구의 집에서 쫓겨났기 때문이다. 대책이라곤 이모에게 받은 엄마의 물건에서 발견한 패물과 졸업 반지와 사진으로 생부를 찾는 것이다. 그 모든 단서가 소웰베이로 오게 만들었다. 캐머런이 생부라 여기는 남자는 부동산 재벌이었다. 만나기만 하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 믿었지만 소웰베이에서 그를 기다리는 건 외부인에 대한 모든 걸 공유하는 이들이었다.


간신히 얻은 아쿠아리움의 일자리는 힘들고 사정을 알고 도움을 준다는 마트 사장 이선은 간섭이 심하고 선배 청소부 할머니는 잔소리가 많다. 패들 숍을 운영하는 에이버리의 친절은 이상하다. 그 모든 게 자신을 향한 애정이라는 걸 캐머런은 알지 못한다. 이모 외에는 어떤 이에게도 그런 마음을 받아본 적이 없으니까. 아쿠아리움의 문어 때문에 토바 할머니와 자주 만나면서 조금씩 알게 된다. 문어를 대하는 토바 할머니의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태도.


대체로 나는 구멍을 좋아한다. 내 수조 위에 있는 구멍이 내게 자유를 준다. 하지만 그녀의 심장에 생긴 구멍은 싫다. 심장이 세 개인 나와 달리 그녀의 심장은 하나뿐이다. 토바의 심장. 그 구멍이 메워지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할 생각이다. (368쪽)


마셀러스는 캐머런과 토바의 관계를 제일 먼저 알아차린다. 그 둘 사이를 자신이 연결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쯤 되면 모두가 짐작했을 것이다. 소설이 아니더라도 우리네 인생은 신비롭고 비밀스러운 일들이 많다. 그 비밀을 하나씩 알게 되는 순간 삶은 충만해지는 게 아닐까. 너무 늦게 알아 힘든 시간을 견뎌야 할 때도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비밀에 다가가는 일에는 적지 않은 용기가 필요하다. 실패와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 절망과 좌절에서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용기.


『아쿠아리움이 문을 닫으면』 은 그런 용기를 북돋아 주는 따뜻한 소설이다. 명민한 화자는 따뜻함에 신선함과 재미를 더한다. 상실과 상처로 얼룩진 우리네 삶이 어떻게 치유되는지, 그 치유의 중심에 사람이 있다는 걸 알려준다. 우리의 대단한 화자 마셀러스는 이미 알고 있는 그것 말이다.


비밀은 어디에나 있다. 어떤 인간들은 비밀 가득 차 있다. 그런데도 어떻게 폭발하지 않을 수 있을까? 최악의 의사소통 능력, 그것이 인간이란 종의 특징인 듯하다. 다른 종이라고 훨씬 나은 건 아니지만, 청어조차 자신이 속한 무리가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알며 그에 따라 헤엄쳐 나간다. 그런데 왜 인간은 무엇을 원하는지 서로에게 속 시원히 말하기 위해 자신들이 가진 수백만 개의 단어를 사용할 수 없는 걸까? (80쪽)


문어를 생각하고 상상하게 만드는 최초의 소설이 아닐까 싶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어디서든 문어를 보게 된다면 나도 모르게 인사를 전하게 될 것 같다. 그러니 한동안은 문어숙회의 맛은 잊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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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나쓰메 소세키 지음, 김정숙 옮김 / 비채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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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과 구원은 어디에서 오는가? 거창한 질문인가. 생각해 보면 삶의 궁극적인 목표가 향하는 쪽의 끝에는 행복과 구원이 있다. 오롯이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하며 사는 이에게 세상과 다른 사람의 삶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적 동물이다. 가족, 이웃, 사회와 적당히 어울리며 살아야 한다. 사는 건 이렇게 어렵다. 나쓰메 소세키의 『문』에 등장하는 소스케와 오요네 부부가 바라는 삶도 그게 다르지 않았다.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않지만 일요일에 늦잠을 자고 목욕탕에 다녀오고 동네를 산책하는 일만으로 충분했다. 바느질하는 아내와 한가롭게 누워 잡지를 읽는 남편의 모습. 비 오는 출근길엔 남편 소스케의 구멍 난 구두를 보며 하나 장만해야 한다고 거드는 아내. 모든 게 평화로워 보인다.


소스케의 일상은 단조롭다. 출근과 퇴근 후 오요네와 저녁 식사와 짧은 대화. 부족한 게 없는 듯 보이지만 허전함이 느껴진다. 주인집에서 들리는 아이들의 소리에 허전함의 원인이 바로 아이였다는 걸 알았다. 소설 초반에 아이에 대한 계획이나 언급이 없어 혼자 이상하다 생각했다. 그리고 복선처럼 깔리는 작은 집과의 문제.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는 소스케의 태도는 『산시로』와 『태풍』 속 등장인물과 비슷하다. 어떤 다급함이나 간절함은 찾기가 어렵다. 그런 마음으로 살아간다고 해도 다르게 흘러가는 게 삶이라는 걸 아는 것처럼.


고요한 풍경 같았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부부에겐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소스케의 남동생 고로쿠의 거처였다. 고로쿠는 아버지의 죽음 후 숙부 집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집과 유산을 숙부가 관리했고 소스케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숙부가 죽었고 숙모는 더 이상 고로쿠의 학비를 지원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고로쿠는 형이 적극적으로 개입해 주기를 바랐지만 소스케는 차일피일 작은집 방문을 미루고 있었다. 고로쿠가 자신처럼 대학을 그만두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딱히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오요네도 다르지 않았다. 소스케를 채근하는 대신 남편의 의견에 동조할 뿐이다.


고로쿠는 오요네가 화장대를 놓고 쓰는 방으로 옮겼고 당분간 숙모가 학비를 지원하기로 했다. 자신의 공간이 사라졌지만 오요네는 불만을 말할 수 없다. 고로쿠는 마음을 잡지 못하고 결석을 하거나 술을 마시고 귀가하는 일이 잦다. 그런 고로쿠에게 형과 형수는 잔소리를 하지 않는 모습은 뭐랄까 선을 긋는 것처럼 보인다. 지루하다 정도는 아니지만 평탄하게 흐르는 일상에 작은 변화가 찾아온다. 주인집에 든 도둑이 소스케의 집 뒤꼍에 서류함을 버리고 간 것이다. 물건을 돌려주는 일을 계기로 주인인 사카이와 교류가 잦아진다.


사카이의 풍족한 삶,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한 모습과 소스케와 오요네의 단출함을 비교하면서 그들 부부의 과거를 들려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부유한 대학생이었던 소스케, 친구의 누이로 만난 오요네. 둘은 점차 친밀해지고 친구가 병을 얻어 요양을 떠난 곳까지 소스케는 찾아간다. 그 이후 소스케는 친구를 배신하고 학교에서 퇴출당하고 부모를 버렸다. 짐작했겠지만 오요네는 누이가 아닌 아내였다. 그들은 그렇게 세상과 거리를 두고 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어진 유산과 아기의 죽음. 오요네는 그것이 자신의 죄 때문이라 믿었다.


그들의 생활은 폭이 좁아질수록 더 깊어져갔다. 그들은 육 년 동안 세상과 산만한 교섭을 하지 않은 대신 육 년의 세월에 걸쳐서 서로의 가슴을 파냈다. 그들의 생명은 어느새 서로의 밑바닥에까지 파고들었다. 두 사람은 세상에서 본다면 여전히 두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두 사람이 볼 적에는 도의상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하나의 유기체였다. (172쪽)


육 년이라는 시간을 둘만을 바라보며 하나로 살아온 그들에게 고로쿠의 미래와 사카이와의 교류는 뿌리를 흔들 정도의 어려움은 아니었다. 사카이의 입에서 몽골에서 온 동생과 동생의 친구 이름을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 친구는 바로 오요네의 전 남편이자 소스케의 친구였다. 그들을 소개해 준다는 사카이에게 모든 걸 털어놓을 수 없었던 소스케는 전전긍긍한다. 관청 일도 집중할 수 없고 오요네에게 말할 수도 없다. 소스케는 병가를 내고 산사로 도망친다. 소스케의 행동은 비겁하다. 소세키의 의도를 잘 모르겠다. 어쩌면 삶의 위기는 가능하다면 모면하는 게 좋다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산사에서 지내는 동안 소스케가 얻은 건 무엇이고 깨달은 건 무엇일까.


제목인 『문』이 의미하는 건 내면의 ‘문’이었다. 저마다 하나씩 간직한 자신만의 문. 그 문을 열 용기와 힘은 결국 스스로에게서 나온다. 누군가 문을 열고 지나갈 것이고 누군가 문을 외면할 수도 있다. 소스케처럼 처량하게 그 옆을 지킬 수도 있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문을 마주하고 살아간다.


나는 문을 열어달라고 왔다. 그렇지만 문지기는 문 안쪽에 있어서 아무리 두드려도 끝내는 얼굴조차 내밀지 않았다. 단지 “두드려도 소용없다. 혼자 힘으로 열고 들어오너라”라는 목소리만 들려왔을 뿐이었다. (264쪽)


그는 그 문을 통과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문을 통과하지 않고 끝날 사람도 아니었다. 결국 그는 그 문 아래에 꼼짝달짝 못하고 서서 날이 저물기를 기다려야 하는 불행한 사람이었다. (265쪽)


『산시로』와 『태풍』보다는 좋았던 소설이다. 담담하고 슴슴한 매력을 지닌 소설이다. 가을의 풍경으로 시작하는 『문』은 가을에 읽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가을을 지나 겨울에 접어들어 새해를 맞이하고 봄을 기다리는 일의 반복이 인생이라는 걸 알려준다고 할까.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정말로 기뻐요. 이제 봄이 되어서” 오요네의 말에 “응, 그렇지만 또 겨울이 올 거야”라고 대답하는 소스케의 말은 묘한 여운을 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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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3-04-28 06: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을에 읽으면 좋을 소설!
기록해 둡니다^^

자목련 2023-04-28 09:05   좋아요 2 | URL
네, 지금도 나쁘지 않지만 가을의 정취를 느끼며 읽어도 좋을 것같아요!
 

커피와 시는 제법 잘 어울리는 조합이다. 시는 어렵고, 커피는 쓰다. 둘 다 뭔가 첨가하면 달콤해진다. 시에는 무얼 첨가해야 달콤해질까. 커피에 대해 모르지만 로스팅의 단계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고 한다. 시는 어떤 단계를 거쳐야 조금 더 친근하고 조금 더 쉽게 만날 수 있을까.


알라딘 택배비 인상으로 책을 구매할 때, 그러니까 한 권의 책을 사고 싶을 때 주문을 고민하고 신중하게 생각한다. 박소란의 시집을 고르면서(고른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커피 쿠폰이 있다는 게 떠올랐다. 알라딘에서 지급하는 커피 쿠폰과 영화 쿠폰. 둘 중 하나를 선택해 사용할 수 있다는걸. 코로나 이후로 영화관에 갈 용기를 내지 않으므로 커피를 주문하기로 했다. 현대문학 PIN 시리즈 시집과 드립 백 커피를 말이다.





커피는 아직 마시기 전이고 시집은 조금 읽었다. 슬픔, 그림자, 어두움, 우울이 있다. 시집의 제목인 있다는 그런 의미인 것 같다. 시의 제목마다 아는 있다를 붙여 읽었다. 어렵지만 내 마음을 더하면 시는 조금 더 친절해지지 않을까 싶다. 어제 비가 온 탓으로 이런 시를 골라본다.


움푹 팬 곳에 생긴 웅덩이,

거기 사는 누군가 나를 부르는 것 같아


그럴 리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벽을 만든다

벽 뒤편 얼기설기 이어진 골목으로 유유히 사라진다


벽돌 하나가 쫓아온다 어깨를 툭툭 치더니

금세 앞질러 가버린다 보란 듯 멀리 날아가버린다


이상하다 생각할 틈도 없이


풀이 말을 건다


풀과 말을 한다

요즘은 좀 어때? 물으면 그냥 그렇지 뭐, 적당히 얼버무린다


얼버무린 게 나인지 풀인지

풀은 자란다 별일 아니라는 듯


다음 날이면 벌써 바싹 시들어 있다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가는 것들, 거기 사는 누군가


문 앞에 서 있다

새까만 먼지를 뒤집어쓴 채

수건을 들고 달려갈 나를 기디라고 있다


기다리지 마

심통 부리듯 나는 괜히 동네 마트나 기웃거리고

늦게

되도록 늦게


문을 연다


눈을 감고 조용히 불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들

그러나 아무것도 불타지 않고

사라지지 않고


어느 날부턴가

불이 말을 건다 (「비 온 뒤」, 전문)


비 온 뒤, 당신의 아침은 어떤가 궁금하다. 봄이라고 꽃들은 지고 연두가 가득한데 날씨는 심란하다. 춥다고 쌀쌀하다고 말하는 이들.이상한 게 어디 날씨뿐일까. 그래도 봄이니 봄비가 내렸으니 뭐든 그 비를 맞고 더 쑥쑥 자라겠지. 나도 끝을 알 수 없는 곳까지 자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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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울지 않는 밤
김이설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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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바닥이라고 이제 일어서면 된다고 나를 안심시키며 살았다. 한 번에 온전하게 설 수 없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조금씩 천천히 일어서다 넘어져도 괜찮다고. 툭툭 손을 털고 기지개를 켜면 될 거라고 나를 위로했다. 그런 날들이었다. 울지 않으려고 절망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런 시간이 나를 성장시켰고 단단하게 만들었다고 믿었다. 그런데 이제 도무지 모르겠다. 바닥이라 여겼던 시간은 바닥이 아니었고 곡선의 마음은 어디론가 튕겨나가기 일쑤다. 삶이 쉽지 않다는 건 오래전에 알았지만 사는 게 버거워 모든 걸 놓아버리고 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둘러보면 나의 삶은 오히려 평온한다는 게 어디론가 숨고 싶게 만든다.


김이설의 단편집 『누구도 울지 않는 밤』를 읽으면서도 그랬다. 나는 아직은 괜찮다고 그러니 푸념이나 절망은 잠시 넣어두라고 말이다. 물론 고통과 절망은 개인적이어서 평균을 찾을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김이설의 소설 속 인물은 저마다 시련을 안고 살아아간다. 누구나 그런 것처럼이라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공감하고 연대할 수 있어야 한다. 고통과 시련의 시작이 가족이라면 말이다. 내 의지로 선택할 수 없는 원가족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사느라 바빠 자녀를 돌보기 어려운 경우, 주변의 도움을 받는다. 가까운 형제나 돌봄이 필요한 자녀 중 첫째. 이모나, 언니 누나가 그 대상이 된다. 「모면」의 ‘소영’도 엄마보다는 이모와 친했다. 이모가 된 지금 형부의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육아에 지친 언니를 도와준다. 그런데 어느 순간 돌봄의 주체가 돼버렸다. 부모인 언니와 형부 대신 퇴근 후 조카를 돌보며 이모와 엄마의 관계를 생각한다. 아버지에게 몹쓸 짓을 당한 이모, 그 모습은 고스란히 자신에게 투영된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비밀을 공유한 사이라는 이유를 대며 모면하는 건 아닌지.


가족은 쉽게 끊어낼 수 없기에 더욱 힘들다. 그런 이유로 가족이 되기를 바라는지도 모른다. 영원한 결속을 바라며 이별을 원하지 않기에 서로가 서로에게 가족이 되어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막상 가족의 형태를 갖추고 살아가지만 그것이 완전한 해답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다. 「내일의 징후」 속 동성 연인 ‘소혜’와 ‘성은’은 마주한 현실과 「가족의 일생」에서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진 ‘은주’와 가족이 된 ‘정균’이 짊어진 가장의 무게는 너무 힘들었다. 이유 없이 가출을 하는 은주를 기다리는 정균 곁에는 딸 예령만이 남았다. 회피한 대화의 부족일까, 아니면 무엇이 가족을 해체하게 만들었을까.


처음엔 그랬다. 같이 살게 되면 같은 걸 꿈꿀 줄 알았다. 같이 있으면 같은 열망을 품을 줄 알았다. 같이 사는 것이 완결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내일의 징후」, 53쪽)





가족이라는 이유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까지 받아들여야 할까. 그게 가능한 사람인 얼마나 될까. 어린 시절 가정을 버리고 떠나 늙고 약해진 모습으로 돌아온 아버지를 받아들이는 「환기의 계절」 속 엄마를 자매는 납득할 수 없다. 당연하지 않은가. 그런 엄마를 보면서 큰 딸인 ‘나’는 자신의 상황을 돌아본다. 외도를 당당하게 밝히고 이혼을 요구하는 남편, 자신과 같은 처지로 딸을 키우고 싶지 않기에 부정하고 외면한다. 아버지의 정체성과 오랜 시간 친구로 지냈다는 엄마의 사정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가족은 무엇일까. 부모와 자녀로 구성된 형태만이 가족일까. 다양한 가족의 형태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것을 인정하는 일은 쉽지 않다. 자신의 성장의 결핍이 큰 잘못도 아닌데 말이다. ‘나’에게 닥친 시련은 쉽게 치유되지 않겠지만 ‘나’는 조금 더 유연해질 것이다. 계절은 순환하고 삶은 멈추지 않으므로.


이제는 예전의 일상을 되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다음 계절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것이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환기의 계절」, 154쪽)


이처럼 가족은 다양한 이유로 해체될 수 있다. 해체가 잘못도 부족도 아니다. 그 자리를 채울 누군가가 있기 마련이다. 삶이란 참 신기하다. 앞서 언급한 「모면」에서 엄마의 자리를 채워준 이모나, 「가족의 일생」과 「환기의 계절」에서는 자녀가 있다. 온전하게 영원할 수 없지만 내 곁을 지키기 위해 살아가는 일이 삶이기도 하다. 자녀에게만 기대서는 안 되겠지만 말이다.


원가족과 분리를 원하는 자녀를 바라보는 안타까움은 살아온 시간이 가져다준 경험 때문이다. 「긴 하루」에서 ‘유순’은 딸 ‘혜서’가 연극을 하는 남자를 사귀는 일이 그러했다. 집을 나간 혜서가 맞닥뜨릴 고단한 삶이 훤히 보인다. 자꾸만 어긋나는 딸과의 관계는 독립했던 딸이 자신의 모든 걸 정리하고 부모가 있는 곳으로 돌아오는 「계절이 바뀌는 곳」에서도 마찬가지다.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으로 버섯농장을 하는 엄마 곁으로 돌아온 ‘유경’은 적응이 어렵다. 경찰이 된 동창생 ‘민수’가 도와주고 있지만 버섯을 키우는 일도 헤어진 연인에 대한 마음도 힘들다. 농장을 넘기라는 민수의 부모와 그러면서도 민수와의 결혼을 반대하는 민수의 어머니.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지만 ‘유경’은 포기하지 않는다.


여기는 끝이 아니었다. 나는 어떻게든 방법을 찾을 것이었다. 아직은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었다. 그 사실을 나는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계절이 바뀌는 곳」, 219쪽)


『누구도 울지 않는 밤』 속 인물을 통해 김이설이 전하고 싶은 바람이 그렇다. 포기하지 않는 마음, 절망의 순간도 지나갈 거라는 믿음을 심어준다고 할까. 「「반 뗀 라 지?」속 자신을 버리고 떠난 엄마를 기다리며 고모의 학대와 친족에게 성폭력을 당하고 임신까지 한 열여덟 ‘두연’이 다른 삶을 찾아 오토바이를 타고 떠나는 마지막 장면이 그렇듯, 「치유정원에서」에서 ‘나’는 아무런 설명 없이 스스로 생을 마감한 동생과 그로 인해 정신을 놓아버린 엄마와 위로가 되었고 사랑했던 연인마저 떠나고 직장을 그만두어야 하지만 삶이 끝났지 않았다는 걸 안다.


나쁜 일을 잊을 수 있다면, 어둔 기억을 지워버릴 수 있다면, 차라리 그럴 수만 있다면, 하지만 살아 있다는 것은 언제든 나쁜 기억과 마주하는 일이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어두운 상처를 피하지 않는 일이었다. 살아 있다는 것은 끝에 대해서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엄마가 온전치 않다고, 석우는 떠났다고, 나는 아직 연약하다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었다. (「치유정원에서」, 177쪽)


모든 걸 삭제하고 리셋할 수 없는 게 삶이다. 빠른 속도로 회복되거나 치유되지 않더라도 천천히 시간이 지나고 계절이 바뀌는 동안 천천히 나아지려 노력하며 살아갈 뿐이다. 김이설은 가족 안에서의 여성의 위치, 돌봄, 희생, 폭력에 대해 말하지만 날카롭고 불편한 묘사를 통해 혹독하게 각인시키는 것이 아닌 고달픈 삶을 어루만지는 연대의 손길과 마음을 들려준다. 실패, 좌절, 시련, 고통은 여전하더라도 말이다. 아직은 괜찮다는 다짐과 그게 무엇이든 할 수 있이 있다는 걸 받아들여도 된다고. 그러면 조금 괜찮아지고 나아진다고. 누구도 울지 않는 밤이 찾아 올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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