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은 대답하지 않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지음, 송태욱 옮김 / 체크포인트 찰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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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이름만으로 책을 선택하는 경우가 있다. 기존에 만났던 느낌이 좋아서,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그렇다. 다수의 팬을 지닌 영화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란 이름이 주는 영향력, 아마도 이 책을 선택한 다른 이들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에세이를 읽은 기억이 나를 이 책을 이끌었다. 구름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도 한 몫 거들었다. 그러나 이 책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에세이가 아닌 취재기라고 해야 맞다.


『구름은 대답하지 않았다』는 1991년 3월 12일 심야에 후지 텔레비전에서 방송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기초로, 방송 이후 다시 취재를 거듭하여 쓴 것이다. 그 방송은 그가 스스로 기획한 첫 다큐멘터리이고 처음으로 이십 대에 쓴 책이라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그가 기획한 다큐멘터리가 무엇일까. 그것은 한 고위 관료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다. 당시 일본 사회에서 관료의 죽음은 큰 파장을 일으켰다. 환경청 소속 관료 ‘야마노우치 도요노리’로 이 책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53세의 야마노우치는 당시 일본 사회를 뒤흔든 ‘미나마타’병의 국가 측 책임자였다. 오래 이어진 정부와 피해 환자 간 소설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


야마노우치의 일생과 미나마타병의 시작과 보상 문제 진행과정에 대한 상세한 취재가 이 책의 중심이다. 잠시 쉬겠다는 말을 남긴 채 2층 자신의 방에서 가족과 직장 동료에게 짧은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연 최초 발견자는 아내 ‘도모코’였다. 그 황망함을 어찌 말할 수 있을까. 2층에 빨리 갔더라면, 조금이라도 남편을 귀찮게 했더라면, 일에 대해 물어봤더라면 죽음을 막을 수 있을 거라 자책한다. 아내의 인터뷰가 이 책의 시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편의 죽음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 그리고 애도하는 마음 말이다.


야마노우치의 아버지는 전쟁중에 죽었고 어머니는 그전에 자신을 떠났다. 불운한 가정환경에서 그는 글쓰기를 좋아했는데 소설가가 되고자 하는 마음도 품고 있었다. 그가 지는 시, 편지, 메모를 통해서도 그가 어떤 감성의 소유자인지 잘 알 수 있다. 어쩌면 그런 성향이었기에 관료 사회에서 공무원으로 지내는 일이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집에 와서는 아내나 아이들에게 한 번도 일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일뿐 아니라 다른 이야기도 많이 하지는 않았다. 그러다 미나마타병(화학공장에서 방류한 수은으로 인한 중독)을 맡은 후로는 귀가도 늦었고 집에 들어오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책임감이 뛰어난 그였고 정부와 피해 환자 사이에서 정신적으로 힘든 상태로 보인다. 수은중독이라는 걸 밝히는 과정부터 패해 보상까지 길고 지루한 싸움이었다. 국가를 대변하고 있지만 그 역할은 그에게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과 같았던 건 아닐까. 야마노우치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그가 남긴 글과 그가 한 말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인간은요,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인간이 아니에요. 이건 복지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행정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의 기본은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상대의 마음을 읽어내 대처하려고 해야 합니다. 자신의 입장만으로 판단하면 복지 업무는 안 됩니다.” (116쪽)


그는 미나마타병의 발병지로 가는 출장을 다른 사람에게 인계하고 집으로 귀가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목숨을 끊었다. 얼마나 괴로웠을까. 한 인간의 내면을 알아가는 일은 불가능하기에 아내 도모코조차 그 죽음을 이해할 수 없다. 남편의 죽음 이후 괴로운 그녀를 주변 이들이 떠받쳐주었고 그런 시간이 지나면서 아내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을 조금 바꾼다.


사람은 고독하다. 철저하게 혼자다. 그러나 그것을 확실히 인식하고 거기에서 출발해야만 사람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 고독하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으면 사람은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 (259쪽)


일본에서 일어난 사건을 바탕으로 한 기록이지만 어떤 사회에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사회문제와 복지제도의 허점은 바로 우리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국가와 개인 간의 분쟁, 화해와 보상 문제로 갈등하는 모습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당사자가 아니라고 함부로 말하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일이라는 걸 기억해야 한다.


쓸쓸함이 감도는 책에서 유난히 눈에 밟히는 건 바로 소개로 만난 아내에게 쓴 편지의 내용이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차분하게 써 내려간 편지에 좋아하는 것 가운데 “바라보는 것 - 구름”이라는 부분이다. 그가 편안하게 구름을 바라보는 모습을 상상해 보지만 외로움과 슬픔이 떠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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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빨리 죽었으면 좋겠어 - 관계에 지친 당신을 위한 심리 코칭
황은정 지음 / 포르체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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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빨리 죽었으면 좋겠어』에서 당신은 누구일까? 지정한 1명일 수도 있고 복수의 누군가 일 수도 있다. 이 책이 궁금했던 건 제목 때문이었다. 책에 대한 소개가 아닌 오직 제목이 나를 이끌었다. 누군가 죽기를 바랄 정도의 증오는 어디서 발현되었는지 정말 그 사람이 죽기를 바라는지 궁금했다. 이토록 폭력적인 제목은 불편한 내용이라는 걸 예고한다.


저자는 귀걸이를 훔치다 들킨 일화로 들려주며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충동적으로 일어난 일이 아닌 부모에 대한 반항이었다. 저자와 부모 사이에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버지의 무자비한 폭력에 무감각해진 엄마, 상처받은 아이를 돌보는 이는 없었다. 그렇다.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사람은 아버지였다. 어른이 되어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저절로 낫는 상처는 없었다. 공무원이 되었지만 민원인의 폭력에 노출된 저자를 보호하는 이는 없었다. 결국 아이를 낳고 퇴사를 했다. 아이를 키우며 아이를 향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남편과의 관계도 좋지 않았다.


어렸을 때 부모가 우리를 돌보던 방식은 우리가 성인이 되어 스스로를 돌보는 방식이 된다. (35쪽)


심각한 위기가 닥쳐왔고 저자는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상처와 마주한다. 자신 안에 여전히 웅크리고 있는 내면의 아이와 만나는 일은 상담이나 심리 치료에서 접하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상처받고 분노에 어쩔 줄 모르는 아이, 저자는 글쓰기 수업을 통해 위로받는다. 그러나 긴 시간 쌓여 온 상처가 글쓰기 수업 하나로 온전하게 치유되는 건 아니다. 저자는 남편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자신을 돌아본다. 다양한 방법으로 마음을 다스리고 아이와 남편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 노력한다. 부부 상담으로 남편과 자신이 다르다는 것, 이를테면 시간을 보내는 방식이 다르고 대화의 주제가 다르다는 걸 알았다. 남편은 가볍고 사소한 대화를 원했고 저자는 깊이 있고 무거운 주제를 다루기를 원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해도 서로가 다르다는 걸 인정하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다면 계속 연습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수도 없이 많은 실수와 실패가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어렵지만 나를 용서하고 사랑해 주는 것. 그게 다정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68쪽)


내가 상처받은 내면 아이의 고통을 알아보고 인정하자 처음으로 나만큼 고통스러운 타인의 아픔도 느낄 수 있었다. 이제는 나만의 고통 속에서 빠져나올 수 시간이었다. (79쪽)


저자는 치유 전문가에게 개인 상담을 받으면서 과거의 트라우마를 직시한다. 그때 그 시절 저자가 원한 게 무엇이었는지 말이다. 내면 아이의 상처, 그것은 어린 시절 부모에게 받아야 했던 것들의 결핍이라고 말한다. 그때의 그 아이를 이제라도 돌보고 보살피는 일이 필요하다고. 누군가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맞다. 하지만 현재는 과거에서 시작되었고 과거를 잘 정리해야 현재를 잘 살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안에 가득 차 있는 분노를 건강하게 밖으로 흘려보내 마음을 비워야 한다. 그래야 분노가 나간 자리에 사랑을 채울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무엇’에 분노해야 하는지, 그 분노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명확하게 아는 것이 중요하다. 당신이 미치도록 화가 나는 이유가 정말 눈앞의 그 사람 때문일까? 질문에 대한 답은 당신 안에 있다. (130쪽)


『당신이 빨리 죽었으면 좋겠어』에서 말하는 것도 관계와 심리에 대해 다루는 기존의 책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저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상처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나아지는 과정이 같은 상황에서 힘든 시간을 보낸 이들에게 현실적으로 와닿을 것이다.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내면 아이를 돌보고 치유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내면 아이를 안아주고 볼보는 일의 중요함과 그로 인해 어려웠던 관계가 나아진다는 걸 깨닫게 된다. 가장 중요한 건 나를 이해하고 자기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다.


‘침묵으로 듣기’를 실천해 보라. 하루에 단 한 번이라도 상대방의 눈을 바라보고,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와 표정, 몸짓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때까지 찬찬히 바라보자. 내가 입을 닫으면 상대방은 마음의 문을 활짝 연다. (194쪽)


나도 모르는 분노로 가득하다면, 가장 가까운 가족과 묵힌 감정으로 힘들다면, 관계를 회복하고 싶은 누군가가 있다면 이 책이 그 마음을 알아주고 어루만져 준다. 누군가 죽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면 옅어지고 허물어질 수 있게 도와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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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집 2023-07-03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 읽으니 두둥실 천국같은, 에세이 생각나네요. 작가도 엄마에게 어린 시절 폭력학대를 당했는데 엄마한테 맞으면 학교 일기장에 엄마한테 맞었다라는 말을 쓸 수 없어서 맞었다는 말 대신에 이런저런 글을 일기장에 쓰면서 글솜씨가 늘은 것 같다고.. 아마 작가에게는 그게 치유 아니였을까 싶네요!!

자목련 2023-07-04 09:23   좋아요 0 | URL
어떤 형태든 쓰는 일은 좋은 것 같아요. < 두둥실 천국같은>은 검색해보니 표지가 참 예쁘네요.
기억의 집 님, 비가 온다고 하지만 산뜻한 하루 이어가세요^^
 

장마가 시작되었다. 여름의 중심에 선 것이다. 이 여름을 어떻게 지내야 할까. 여름과 친해지기란 생각보다 어렵다. 장맛비의 피해가 없이 지나가는 여름은 없는 것 같다. 이제 막 시작된 장마로 피해 소식이 들린다. 모두에게 똑같은 여름은 없다는 걸 이 여름은 또 상기시킨다.


날씨를 검색하는 시간이 잦아진다. 시간대별로 날씨를 살핀다. 언제부터 날씨가 우리 일상을 이렇게 지배했던가. 준이 없이 소나기를 맞던 날은 기억에만 존재한다. 예보와 조금이라도 다르면 불만이 쏟아져 나온다. 자연의 일을 인간이 조정할 수 있다고 믿는 걸까. AI 시대에는 당연한 걸까.


여름엔 수국, 여름엔 장마, 여름엔 더위, 여름엔 휴가, 여름엔 이런 책들. 바로 김연수의 단편집 『너무나 많은 여름이』를 말하고 싶은 거다. 작년 가을에 나온 단편집 『이토록 평범한 미래』에 이어 반가운 소식이다. 어쩌면 여름을 위한 기획일지도 모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그 기획을 칭찬한다. 표지는 또 얼마나 황홀하게 빛나는가.











한 권은 아쉬우니 한 권 더. 책장에 있는 나쓰메 소세키 읽기를 하고 있지만 하나같이 말하길 『마음』이 좋다고 하니 책장에 없으니 마지막으로 구매. 아름답지 않은 변명이다. 어쨌든 너무나 많은 여름이 마음을 움직인다. 7월엔 마음을 읽게 될까.






이번엔 수국 사진도 한 번 더! 분홍 수국은 분홍 수국만의 자태가 있다. 사실, 나는 분홍 수국보다는 청보라 수국에 마음이 기우는데 막상 분홍 수국을 마주하고 나니 내년 수국 주문을 걱정한다. 내년엔 분홍이랑 청보라 두 송이를 주문하게 될지도 모른다. 내년엔 내년의 수국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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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3-06-30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에 새로 나온 김연수 작가님 책이군요! 표지를 어쩜 이리 잘 뽑아냈는지요^^ 수국 사진까지 참 아름답습니다.
남부는 피해가 있는 모양이더군요ㅠㅠ 모쪼록 앞으로 남은 여름 큰 피해 없이 지나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자목련 2023-06-30 10:48   좋아요 0 | URL
출판사 마케팅의 승리입니다. 피해 소식을 들을 때마다 한반도가 참 넓구나 싶어요. 주말엔 폭염이라는데, 얼마나 더울까 싶고요. 모두가 건강한 여름이면 좋겠어요.

blanca 2023-06-30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연수 작가가 깜짝 책을 내주어 얼마나 기뻤는지요. 기대만큼 역시나 좋았답니다. 수국 참 이쁘네요!

자목련 2023-07-03 09:56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요! 너무 좋았어요^^

은오 2023-06-30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은 왠지 여름 좋아하실 것 같았는데 안친하시다니.... 어떤 계절 좋아하세요?! 전 여름보단 겨울이 좋긴 합니다 ㅋㅋㅋ
책 표지랑 꽃 너무 예뻐요!! 저렇게 생긴게 수국이구나... 이제 저렇게 생긴 꽃 보면 저도 수국이다! 할 수 있겠어요!

자목련 2023-07-03 09:55   좋아요 1 | URL
더위에 약해서 여름은 힘들어요. 땀으로 삐질삐질~~
은오 님의 수국과 반갑고 즐겁게 인사하길 바라요!

망고 2023-06-30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국이랑 책표지 너무 예뻐요! 근데 김연수 작가님 이번책도 단편집이네요 장편을 바랬는데😂 그래도 책이 예뻐서 탐나긴 해요ㅎㅎㅎㅎ

자목련 2023-07-03 09:45   좋아요 0 | URL
망고 님의 바람처럼 장편은 열심히(?)쓰고 계시지 않을까요? ㅎ
예뻐서 탐나는 마음, 제 마음이었습니다 ㅋ

서니데이 2023-06-30 2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국이 참 예쁘네요. 이번에 나온 김연수 작가의 책 표지도 다지인이 좋은 것 같아요.
자목련님 더운 날씨 건강 조심하시고, 좋은 일들 가득한 7월 되세요.^^

자목련 2023-07-03 09:44   좋아요 1 | URL
김연수 작가의 책은 선물 같아요 ㅎ
오늘도 많이 더울 것 같아요. 시원한 하루 보내세요^^

희선 2023-07-02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국을 보며 책을 보실 듯하네요 여름에 저 책이 딱 나와서 반갑겠습니다


희선

자목련 2023-07-03 09:43   좋아요 1 | URL
맞아요, 딱 나와서 좋았어요^^
 
풀베개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3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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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출판사의 소개 문구나 먼저 읽은 이의 리뷰를 읽어도 내가 읽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나쓰메 소세키의 『풀베개』 는 봄에 읽으면 더 좋을 소설이라는 걸 나는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그러니 나는 봄이 되면 이 소설이 생각날지도 모른다. 『풀베개』는 봄꿈처럼 아련하고 잡으려 애써도 잡히지 않는 꽃잎으로 남은 소설이다.


나쓰메 소세키의 『풀베개』는 이전에 읽었던 다른 소설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였다. 뭐랄까, 소설이 아닌 산문 같다고 할까. 소설 곳곳에 나쓰메 소세키의 ‘하이쿠’가 많이 등장한 탓도 있겠지만 소설 속 화자의 생각이 나쓰메 소세키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 전반에 흐르는 예술에 대한 생각 말이다. 첫 문장부터 언급되는 예술에 대한 정의와 이해가 그렇다.


살기 힘든 세상에서 살기 힘들게 하는 근심을 없애고, 살기 힘든 세상 세계를 눈앞에 묘사하는 것이 시고 그림이다. 또는 음악이고 조각이다. 자세히 말하자면 묘사하지 않아도 좋다. 그저 직접 보기만 하면 거기에서 시도 생기고 노래도 솟아난다. 착상을 종이에 옮겨놓지 않아도 옥이나 금속이 스치는 소리는 가슴속에서 일어난다. 이젤을 향해 색을 칠하지 않아도 오색의 찬란함은 스스로 심안(心眼)에 비친다. 그저 자신이 사는 세상을 이렇게 깨달을 수 있고 혼탁한 속세를 마음의 카메라에 맑고 밝게 받아들일 수 있으면 된다. (16쪽)


화자인 ‘나’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길을 나섰다. 자연에 더 가까이 다가가 그림을 완성하고자 하는 목표가 있었다. 그러나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소설은 ‘나’가 만난 길에서 만난 이들과 나누는 이야기, 그 안에서 발견하는 모든 것들은 하이쿠로 채워진다. 봄날의 풍경, 몽환적인 여인 ‘나미’, 스님, 러일전쟁 참전을 위해 떠나는 ‘나미’의 사촌의 느낌들. 어쩌면 하이쿠도 한 편의 그림이라고 하면 맞을 수도 있다.


‘나’와 ‘나미’ 사이에 특별한 일이 일어나는 게 아닐까 기대했지만 그보다는 둘이 나누는 하이쿠 대화가 아름답다. 연애나 사랑, 현실의 고민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 진정한 삶은 따로 있다는 듯한 ‘나미’의 말투가 인상적이다. 온천장 주인의 딸로 이혼하고 친정으로 돌아온 ‘나미’, 미친 여자라는 소리를 듣지만 정작 미친 건 러일전쟁이 일어난 세상이 아닐까 싶다.


그런 나쓰메 소세키의 위트와 유머가 곳곳에 녹아있으면서도 아스라이 사라지는 봄날의 모습을 명확하고 선명하게 그려낸다. 붉은 동백에서 아름다움이 아닌 독기를 발견하는 부분은 지독하게 아리다. 서른의 청춘 ‘나’가 바라보는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이 그러한 것처럼. 짧은 분량임에도 여전히 수월하지 않은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이지만 사랑받는지 알 것도 같다.


확 피었다가 툭 지고, 툭 졌다가 확 피고, 수백 년의 성상(星霜)을 사람들 눈에 띄지 않은 산그늘에서 태연자약하게 살고 있다. 단 한 번 보기만 하면 그걸로 끝! 본 사람은 그녀의 마력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그 빛깔은 단순한 빨강이 아니다. 도륙된 죄수의 피가 저절로 사람의 눈을 끌어 스스로 사람의 마음을 불쾌하게 하는 듯한, 일종의 이상한 빨강이다. 보고 있으니 빨간 것이 물 위로 뚝 떨어졌다. 고요한 봄에 움직인 것은 그저 이 한 송이뿐이다. 잠시 후 다시 뚝 떨어졌다. 저 꽃은 결고 지지 않는다. 무너진다기보다는 단단히 뭉친 채 가지를 떠난다. 가지를 떠날 때는 한 번에 떠나기 때문에 미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떨어져도 뭉쳐 있는 것은 어쩐지 독살스럽다. (137쪽)


‘나’는 계획했던 그림은 나쓰메 소세키의 문장으로 그려진다. ‘나’의 그림의 완성도는 모르지만 『풀베개』란 그림은 자꾸 보고 싶은 한 편의 수채화이자 읽고 싶은 담백한 산문이다. 벚꽃이 만개한 봄날에 읽으면 더 황홀하겠지만 장마와 열기로 뜨거운 여름에 봄을 그리며 읽어도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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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유산
미즈무라 미나에 지음, 송태욱 옮김 / 복복서가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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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죽기를 바라는 자매가 있다. 투정 비슷한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어머니가 죽기를 바란다. 제발 모든 걸 끝내고 떠나주었으면 한다. 그게 어머니를 위해서도 자매를 위해서도 가장 좋은 일이라고. 설마 그런 딸들이 있을까 싶지만 오랜 시간 자식들 집을 오가며 지냈던 할머니를 떠올리면 고모의 마음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다. 미즈무라 미나에 장편소설 『어머니의 유산』 속 ‘나쓰코’와 ‘미쓰키’도 그랬다. 자신밖에 모르는 여든이 넘은 어머니를 대하는 일이 너무 힘들었다.


자매의 어머니는 보통의 어머니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자녀를 위해 희생하거나 인내하는 어머니가 아닌 모든 일의 우선이 자신이었다. 허영과 사치가 가득했고 자신이 원했던 삶의 욕망을 딸들에게 투영시켰다. 그럴 수 있다. 그 덕분에 자매는 피아노를 배우고 파리로 유학도 다녀왔다. 언니 나쓰코는 좋은 집안의 남자와 결혼해 부유하게 살고 미쓰키도 교수인 남편을 두고 자신도 대학에서 강의를 한다.


늙은 어머니를 챙기고 다치면 병원에 모시고 간병을 하는 일, 당연한 자식의 도리 같지만 미쓰키 혼자서 감당하는 일은 벅찼다. 어려서부터 언니만 예뻐하고 차별했던 어머니를 어쩌다 자신의 몫이 되었을까? 어머니를 ‘그 사람’이라 칭하는 언니 나쓰고. 둘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어머니가 소개한 남자와 결혼한 나쓰코는 아이까지 낳았지만 다른 남자가 생겼다. 어머니는 딸을 이해하지 않았고 나무랐다. 그 이후로 둘 사이는 거리가 생겼고 대신 미쓰키가 어머니를 더 챙기게 되었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시작하는 소설은 어머니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과 곁에서 어머니를 돌보며 자식에게 닥친 남편의 외도로 고민하는 오십 대 미쓰키의 복잡한 내면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막대한 유산을 남긴 어머니, 어머니의 유품을 챙기며 자매는 어머니를 회상하기도 한다. 하지만 애틋함이나 그리움 따위는 없다.


그러나 어머니의 어머니, 외할머니의 인생을 떠올리면 같은 운명으로 이어진 것 같다. 게이샤였던 외할머니, 사생아로 태어난 어머니를 위해 하녀처럼 살았던 외할머니와 그런 엄마에게 원하는 걸 얻기 위해 영악했던 어머니. 첫 결혼에서 낳은 딸을 버리고 아버지를 선택한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를 버린 어머니. 노년에도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사고로 지팡이를 짚고 다녀도 모든 걸 포기하지 않았던 어머니.


인생에는 계절이라는 것이 있다. 인생의 봄에서 한여름까지는 뭔가를 요구하는 어머니의 강한 욕망이 어머니에게 미래를 주고 있었다. 그것은 딸들에게도 미래를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단풍이 짙어지고 나서는 어머니의 강한 욕망이 겉돌기 시작했다. 엄동설한이 되어도 계속해서 허덕이는 어머니는 어쩐지 섬뜩했다. (197쪽)


미쓰키는 어머니가 죽기를 바라면서도 비유를 맞추고 음식과 필요한 물건을 사 나르고 실의에 빠진 어머니를 위한다. 강의와 의뢰받은 번역도 쉬지만 미쓰키는 그런 어머니를 통해 인생의 의미를 돌아보고 앞으로 살아가야 할 시간을 생각한다. 어머니가 죽고 어머니와 같이 왔던 호텔에 시간을 보내면서 미쓰키는 남편과의 관계를 정리한다. 프랑스 유학에서 만난 시간, 다락방에서의 프러포즈, 몇 번의 외도와 현재의 외도까지. 다행스럽게도 어머니가 남긴 거대한 유산이 있어 남편과 이혼을 해도 괜찮다. 지금처럼 좋은 맨션에서 살 수 없고 강의도 해야 하고 번역을 하면 살아야 하지만 충분하다고 여긴다.


젊은 때는 추상적으로밖에 알지 못했던 ‘늙음’이 두뇌와 전신을 덮칠 뿌만 아니라 후각, 시각, 청각, 미각, 촉각 모두를 덮치는 것이 또렷하게 보인다. 그것을 향해 살아갈 뿐인 인생인 것인가. (491쪽)


인간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사는 것은 아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는 걸 배우는 과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납득하지 못하고 포기한 기억은 응어리처럼 남는다. (533쪽)


『어머니의 유산』은 처음에는 어머니와 딸의 지지부진한 관계가 식상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점차 읽을수록 여성의 삶과 인생이란 무엇이며 노년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진진하게 질문을 던진다. 어머니의 죽음과 모녀 삼대의 이야기를 『이방인』과 『마담 보바리』를 자연스럽게 연결시켜 녹아낸 점도 인상적이다. 노년을 향하는 삶, 노년을 경험하기 전까지 이해하지 못하는 다양한 감정이 이 소설에 있다. 그런 점에서 『어머니의 유산』이란 제목은 복합적인 의미를 지닌다. 읽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의미, 절대 단순할 수 없는 특별한 제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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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06-27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실한 리뷰를 느낄 수 있네요.

자목련 2023-06-28 12:28   좋아요 0 | URL
호시우행 님, 그리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페넬로페 2023-06-27 13: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으면 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겠어요. 부모가 자식을 위해 희생한다지만 그러지 않는 부모도 많으니까요^^

자목련 2023-06-28 12:29   좋아요 2 | URL
딸은 엄마의 마음을, 엄마는 딸의 마음을 조금 더 알게 되겠지 싶어요. 부모와 자식, 가까우면서도 어려운 관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