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211 | 21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피에로들의 집
윤대녕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미지는 실체가 아니다. 존재를 확인할 수 없다는 말로 대신할 수도 있겠다. 좋아하는 작가 윤대녕에 대한 이미지는 사막, 안개, 푸른빛. 그의 소설에서 내가 발견한 건 서툰 관계와 삶에 대한 회의를 지탱할 수 있는 존재에 대한 탐구라고 해도 좋을까. 그러니 오랜만에 만난 장편소설 『피에로들의 집』에서 내가 기대한 것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여전히 문장은 매끄럽고 아름다웠다. 상처를 가진 인물이 등장했고 그들을 위로하고 어루만지는 존재도 있었다. 생에 대한 애착을 버린 사람들,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불러 모은 ‘아몬드나무 하우스’의 ‘마마’가 있었으니까. 그러나 설명할 수 없는 허전함을 숨길 수는 없다.

 

 어쩌면 마마를 중심으로 아몬드 하우스에 모인 사람들은 우리는 알 수 없는 우주의 인연으로 맺어진 관계인지도 모른다.  재기를 꿈꾸는 극작가 김명우, 생부의 존재를 몰라 자신의 존재에 대해 믿음을 갖지 못하는 마마의 조카 김현주, 소비되는 내가 아닌 자유로운 삶으로 전진하는 사진작가 박윤정, 연인의 잔혹한 죽음 후 관계의 단절로 생을 이어가는 윤태, 홀로서기를 해야만 하는 고등학생 정민. 마마가 정해놓은 규칙을 지키며 서로가 서로에게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며 살아간다. 온갖 역경을 헤치고 현재의 삶을 유지하는 마마는 그들이 서로의 절망과 상처를 위로할 수 있는 존재라 믿은 것이다.

 

 화자 김명우를 통해 들려주는 그들의 지나온 삶은 고단함 그 이상의 고역의 연속이다. 자신의 상처를 바라보느라 타인에 대해 마음을 열지 못하는 사람들. 해체된 가족, 회복될 수 없는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네 모습이다. 윤대녕은 혼자서는 풀 수 없는 생의 무게를 누군가와 나눌 수 있다면 남겨진 생이 훨씬 가볍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던 건 아닐까. 먼저 경험한 생의 일부가 누군가에게 조언이 될 수 있으니까. 각기 다른 세대는 서로가 통하지 않는다고 쉽게 말하지만 같은 세대가 아니기에 객관적으로 공감할 수 있고 위로할 수 있다. 그것이야말로 진짜 감정을 나누고 소통하는 방법은 아닐까.

 

 ‘나는 유대감에 대해 말했다. 상대에 대한 깊은 연민과 이해에서 얻어지는 친밀감을 통해 힘들 때 서로 의지할 수 있는 관계를 원했던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누구라는 걸 알기 위해서라도 늘 타인의 존재가 필요한 법이었다.’ (165쪽)

 

 선뜻 서로에게 손을 내밀지 못하고 떠도는 아몬드나무 하우스 사람들이 정해진 날에 한 식탁에서 밥을 먹는 장면은 묘한 감정을 불러온다. 드러내어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들 자신은 얼마나 외로운 존재였던가. 혼자서도 모든 걸 해결하고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어리석은 현대인에게 타인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지 생각하게 만든다. 집이라는 공간, 함께 할 수 있다는 공간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된다.

 

 돌이켜보면 위로는 아주 작은 것에서 시작된다. 그저 들어주는 것, 지켜봐 주는 것, 그리고 눈빛으로 응원을 보내는 것. 같은 자리에서 같은 모습으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든든하다. 서로가 서로에게 말이다. 내가 알았던 것을 당신에게 전해주는 일. 마찬가지로 당신이 알고 있는 걸 내게 전해주는 일. 그것은 소설 속 윤정과 명우가 나누는 대화 속 순환이다. 순환이 쌓이고 쌓이면 걷잡을 수 없는 강력한 힘이 될 것이다. 아름답고 아름다운 힘. 그것은 소설을 통해 삶의 아름다움을 끌어내고자 하는 윤대녕의 힘이다.

 

 “일정한 주기의 반복이 가져다주는 삶의 에너지라는 게 존재하는군요.”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순환이라고 봐야겠죠. 모든 존재는 순환하면서 나이를 먹고 성장을 거듭하니까요.” (92쪽)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장소] 2016-05-18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단순한 걸 알아도 고장난 부품처럼 잘 안되는거거나 못하는 것...일테지 싶기도...하네요..모두 한마음 같지 않으니까. 타인들여서 지켜진 것들같다는 생각도 들고요.
가족이었다면 오히려 안되지않았을까...싶어요.
멋진리뷰 잘읽고 갑니다.^^

자목련 2016-05-19 15:13   좋아요 1 | URL
때로는 단순해서 더 쉽게 잊고 지나치는 것 같아요.
여름처럼 더워요, 아니 입하가 지났으니 여름인가요. ㅎ

[그장소] 2016-05-19 15:20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요.. ^^ 곁에 있는 사람 특히나 가족에 대한 건 ..늘 그래왔는데 ..타인들 구성으로 이루어진 관계로 역광을 비추니 외려 잘 보이는 ,
겉으로 봐서는 사연이 풍선글처럼 떠있지 않는한 모를...일들이네요..^^
 
봄의 정원 - 제151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오늘의 일본문학 17
시바사키 도모카 지음, 권영주 옮김 / 은행나무 / 2016년 4월
평점 :
품절


 하나의 공간에 대한 기억은 다양하다. 학교는 친구와 선생님이라는 그리운 존재와 함께 시험과 성적이라는 스트레스가 따라온다. 하여 공간의 기억은 때로 잔혹하다. 누군가에게 소중한 집은 다른 누군가에게는 지겨운 공간이 되기도 하다. 같은 공간에서 생활한 가족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럼 공간에 대한 애정은 어떻게 생성되는 것일까. 아니, 공간에 대한 그리움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전혀 상관없는 공간에 대한 동경은 내가 한 번도 그곳에 머물지 않았기에 가능한지도 모른다. 현재는 아파트에 살고 있어 이 공간이 주는 편리함에 익숙해졌지만 어린 시절 아파트는 거대한 성 같았다. 예쁘고 반듯하게 정리된 비싼 장난감처럼 함부로 소유할 수 없는 공간으로 존재했다. 소유하지 못했던 것들을 향한 욕망이 자라듯 특정한 공간에 머물고 싶은 욕망도 멈추지 않는다.

 

 ‘물빛 집은 확실히 눈에 띈다. 서양식 저택 같은 건물이다. 가로 방향으로 댄 벽널은 밝은 물빛으로 칠했다. 적갈색 기와지붕은 납작한 피라미드 같은 각뿔형이고, 꼭대기에 창끝 모양의 장식이 달렸다. 빙 두른 흰 담장에는 미장이의 흙손 자국이 비늘 모양을 그리고 있다. 골목에서는 2층만 보인다. 왼쪽에 베란다, 오른쪽에는 세로로 열리는 작은 창문이 둘. 둘 다 지붕과 똑같은 적갈색으로 창틀을 칠했다.’ (18쪽)

 

 문장만으로도 한 번 들어가고 싶은 집이다. 아니, 그 집에는 누가 살며 어떤 이야기가 있을까 궁금하다. 시바사키 도모카의 『봄의 정원』에 나오는 물빛 집이다. 물빛 집이라니. 쪽빛이나 청록색을 상상하다 고개를 젓는다. 나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빛깔이다. 철거가 예정된 연립주택에 살고 있는 ‘다로’와 ‘니시’에게 물빛 집은 서로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이혼해서 혼자 살고 있는 다로는 그 집을 기웃거리는 여자 니시를 통해 그 집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과거 젊은 광고 감독인 남편과 여배우 아내가 이 집에 거주하며 촬영한 「봄의 정원」이라는 사진집을 냈다는 것이다. 니시는 그 사진집을 무척 좋아했고 우연히 물빛 집을 발견하고 근처로 이사까지 왔다. 사진에서 만났던 집안 곳곳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는 갈망 때문이다. 다로는 니시를 이해할 수 없지만 물빛 집이 점점 궁금해진다.

 

 ‘빈집이었을 때는 정지되어 있던 시간이 움직이고 있었다. 건물 자체는 집 안에 아무도 없었던 일주일 전과 똑같은데, 그곳의 기척이며 색조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 그곳에서 생활하는 사람이 있는 데 그치지 않고 집 자체가 별안간 생명을 되찾은 듯했다. 사진과 마찬가지로 언제까지고 바라볼 수 있을 줄 알았던 집이 자기 의사를 가지고 움직이기 시작한 것 같았다.’ (57쪽)

 

 니시의 행동으로 나는 물빛 집에 대단한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게 아닐까, 다로와 니시가 연인으로 발전하는 건 아닐까 기대했다. 그러나 소설은 아주 평화롭고 조용하며 단조롭다. 연립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는 이웃들과 남겨진 사람들의 반복된 일상, 큰 변화 없이 흘러가는 다로의 직장생활과 동료와의 관계, 사진집과 물빛 집을 비교하는 니시의 이야기가 전부다. 그러나 이상하게 지루하지 않다. 계절마다 변하는 물빛 집에 대한 풍경과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이 친근하고 따뜻했기 때문이다. 다로가 매일 출근을 위해 걷는 길, 물빛 집 아이들과 친해져 초대를 받은 니시가 마주한 봄의 정원도 그랬다.

 

 일상을 벗어나야 일상은 소중한 그리움이 된다. 이제 다로와 니시에게 연립과 물빛 집은 추억이고 그리움이다. 사라져 버릴 연립, 다시 찾아올 수 없는 물빛 집이었다. 영원히 머무를 수 없는 공간이기에 평범하게 다가오지 않았고 특별한 존재가 된 것이다. 계절이 변하듯 삶도 변한다. 시간은 모든 것을 조금씩 천천히 마모시킨다. 당연한 사실을 알면서도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살아간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고 믿으며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조금만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면 전혀 다른 존재로 다가온다는 걸 모른 척 말이다. 다로가 물빛 집에서 바라본 연립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듯 고요한 것처럼 우리는 그런 시간을 원하고 살아가는 건 아닐까.

 

 ‘베란다와 창문이 질서 정연하게 늘어서 있었다. 형태가 똑같은 창으로 햇빛이 비쳐 들었다. 2층 집은 벽에, 1층 집은 바닥에도, 볕이 드는 곳과 그늘의 경계가 보였다. 변화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소리를 내는 것도 없었다. 해시계처럼 양달과 응달의 경계가 이동할 뿐이었다.’ (153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락
필립 로스 지음, 박범수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절망이 시작되는 순간을 포착할 수 있다면 절망을 제거할 수 있을까? 거기 절망이 보이므로 그것을 피해하거나 그것을 빨리 지나친다면 절망과 마주하는 순간은 아주 짧을지도 모른다. 괴변 아닌 괴변이라는 걸 알면서도 똑바로 절망을 지켜본다면 피할 수 있을 것만 같다. 필립 로스의 『전락』을 읽으면서 늙음과 두려움의 정체가 문득 궁금해진다. 과연 늙음이란 기준은 어디에 있을까? 100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예순다섯 살은 늙음이라 불려도 좋을 나이일까? 인생은 60부터라고 말하는 시대에서 과연 그것을 판단하는 이는 누구란 말인가.

 

 무대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을 경험하는 배우 액슬러에게 찾아온 예순다섯 살의 시련은 극복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연기에 대한 열정은 사라진 게 아니었는데 어느 순간 연기를 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어쩌면 은퇴를 해야 하는 나이였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는 여전히 연기를 꿈꾸는 배우였다.

 

 ‘도저히 연기를 할 수 없었다. 무대에 오르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운 일이 되었다. 그는 자신이 연기를 훌륭하게 해내리라 확신하는 대신 실패하리라는 걸 알았다. 내리 세 번이나 그런 일이 일어났다. 마지막에는 아무도 그의 연기에 관심을 갖지 않았고, 아무도 보러 오지 않았다. 그는 관객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었다. 재능이 죽어버린 것이다.’ (9쪽)

 

 내가 아닌 타인과 호흡하며 그들의 인정으로 인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배우라는 직업의 특성 때문이라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액슬러는 스스로를 갉아먹는 시간을 견디지 못했다. 결국 아내는 떠났고 혼자 남았다. 돈과 명예가 있었지만 자살 충동을 막을 수는 없었다. 무엇이 그를 죽고 싶게 만들었을까. 아니, 이런 심경을 보면 그는 죽고 싶었던 게 아니다. 그저 모든 게 연기의 일부라고 여겼던 건 아닐까. 그리하여 스스로 정신병원에 입원하여 상담을 받고 이십육 일 동안 지낼 수 있었던 것이다.

 

 ‘아침마다 그는 몇 시간씩 침대에 숨어 있곤 했는데, 그런 역할에서 숨는다기보다는 단순히 그 역할을 연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침대에서 일어났을 때 그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이라곤 자살에 대한 게 전부였지만, 그것을 흉내 내지는 않았다. 죽고 싶어하는 남자를 연기하는 살고 싶은 남자였으니까.’ (15쪽)

 

 그곳에서 머무는 동안 액슬러는 시블 밴 뷰런이란 두 아이의 엄마를 만난다. 남편이 딸을 성추행하는 모습을 보고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을 경멸하고 저주하는 여자. 언젠가 남편을 죽이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에 찬 여자. 액슬러에게 연극은 무엇일까. 무대에 다시 서야 한다고 말하며 찾아온 지인에게 액슬러는 그럴 수 없다며 돌려보낸다. 그런 그에게 찾아온 마흔 살의 페긴은 새로운 활력을 불러온다. 친구의 딸이자 동성애자인 그녀는 근처의 대학에서 강의를 한다. 페긴과 지내면서 액슬러는 현재의 행복이 곧 깨질 거라는 걸 예감한다. 그건 예순 다섯이란 나이만이 알 수 있는 직감인지도 모른다. 친구이자 폐긴의 부모들은 그들의 관계를 인정하는 것처럼 굴면서도 진심으로는 딸이 액슬러와 헤어지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들의 바람대로 페긴은 액슬러를 떠났다. 그런 과정에 액슬러는 시블 밴 뷰런이 남편을 총으로 쏴 죽인 기사를 읽는다.

 

 ‘그녀가 할 수 있었다면, 나도 할 수 있다, 그녀가 할 수 있었다면…… 마침내 연극에서 자살을 하는 것인 척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떠오를 때까지. 체호프의 희곡을 연기하는 것처럼. 이보다 더 딱 들어맞을 수 있을까? 이것으로 다시 연기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다.’ (149~150쪽)

 

 어쩌면 전락이라는 제목에서 액슬러의 죽음을 예견된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사라지고 있다는 걸 견딜 수 없었으므로. 페긴이 떠나지 않았다면 그는 살고 싶은 남자를 연기할 수 있었을까. 그만큼 액슬러는 자신을 사랑했던 것일까. 젊지 않은 한 남자의 이야기라는 점과 죽음이라는 결말 때문에 『에브리맨』과 겹쳐진다. 병으로 인해 죽은 『에브리맨』과 다르다면 혼자 남겨진 삶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했다고 봐야 할까. 죽음이야 말로 액슬러에게 가장 완벽한 연기였다. 누구도 그의 삶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한민국 독서혁명 - 나로부터 비롯되는 변화
강규형 지음 / 다연 / 201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로부터 비롯되는 독서가 나와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230쪽)

 

 많은 이들의 추천을 하는 이유는 그만큼 좋다는 말이다. 그러나 모두에게 좋다고 해서 반드시 내게도 좋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릴 수는 없다. 적어도 내가 직접 경험하고 느껴야만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있다. 독서와 운동도 그러하다. 아무리 사람들이 권해도 내가 싫으면 어쩔 수 없다. 내가 필요로 할 때 진짜 좋은 것이 된다. 책 읽기의 경우, 좋아하는 분야가 아닌 다른 분야의 책 읽기도 그렇다. 변화를 위해서는 작든 크든 용기를 내야 한다. 그리고 긍정적인 효과로 이어지려면 시작이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자기계발서를 잘 읽지 않는 나에게 『대한민국 독서혁명』에 대한 첫인상이 나쁘지 않았다. 제목이 알려주듯 독서에 관한 이야기로 혼자 읽는 책 읽기가 아닌 독서 토론 모임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때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을 몰라 헤매곤 한다. 그럴 때 누군가 이렇게 한 번 해보면 어떨까?라고 조언해준다면 큰 힘이 된다. 저자는 책이 그런 힘을 지닌 존재라는 것을 알았고 그것을 다른 이들과 공유하기를 원했다. 책에는 다양한 이들의 사연이 등장한다. 적자만 내는 카페 운영을 고집하며 친구에게 사기까지 당한 나진국, 아무 목적과 계획 없이 그냥 시간을 보내는 대학생 여의주, 직장에서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직장인 강한나, 아르바이트로 겨우 백수를 면한 청년 도전해, 이혼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는 최중사, 삶의 무료함을 바꾸고 싶은 중년 황금란. 

 

 그들은 모두 우리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이들이다. 이전까지 독서에 관심이 없었고, 독서를 통해 변화할 수 있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독서 토론 모임 ‘나비’가 누군가의 삶을 바꿔놓을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경험을 통해 나오는 진솔한 사례라서 책을 좋아하는 이가 아니더라도 한 번쯤 ‘나비’에 나가고 싶을 것이다. 토요일 아침 6시 40분에 자발적으로 모일 수 있는 힘. 그것은 단순히 함께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한 권의 책을 자신의 관점에서 보고 나의 입장에서 깨달은 것과 환경에 적용할 것이라는 독서법(이른바 ‘본깨적 독서법’)이 인생을 변화시켰다는 증거다. 특히 책과는 무관했던 가족들이 도전해의 변화하는 모습을 통해 가족 독서 토론 모임을 시작하고 가족 간의 이해를 돕고 배려하며 화합하는 이야기는 큰 울림을 준다. 독서라는 취미 활동에서 벗어나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아 함께 성장하는 ‘나비’. 정말 멋진 모임이 아닐 수 없다.

 

 한 권의 책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결정적 계기가 되기도 한다. 아마도 『대한민국 독서혁명』이 누군가에게 그런 책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읽는 것으로 그치는 책 읽기가 아닌 행동이 되는 책 읽기. 혼자 읽는 책과 함께 읽는 책은 분명 다를 것이다. 독서 모임에 참여한 적이 없어 그 흥분과 떨림을 상상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분명 삶을 기쁘게 할 것이라는 믿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5월이 되었다. 아파트 화단에 자귀나무가 초록의 잎사귀로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겨울 동안 앙상했던 가지는 사라졌고 곧 꽃을 피울 초록이 가득하다. 자귀나무는 앞 동에만 있어서 창문에 기대어 그 꽃을 볼 수 있다. 예배를 드리러 가는 길에 만나는 5월의 보리는 4월의 보리가 아니다. 어느새 어린아이 키만큼 자란 보리는 싱그러운 기운을 뿜어내고 있다. 5월은 진짜 푸르고 빛나는 달이다.

 

 가정의 달인 5월은 추도예배로 시작되었다. 지난주에는 할머니 추도예배를 드렸고 다음 주에는 아버지의 추도예배가 있다. 모이는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대신 조용히 예배를 드리고 맛있는 저녁식사를 했다. 직접 기른 상추와 갓 뽑아낸 마늘종과 두릅으로 차려진 밥상은 곧 여름이 온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이제 마늘을 캘 것이고 자두가 조금씩 자랄 것이다. 5월이 되면 나는 작약을 검색한다. H 님의 서재에 올라온 작약을 보면서 행복했다. 올해는 잊지 않고 작약을 보러 갈 것이다. 다음 주쯤 수목원에 가려고 한다.

 

 봄이 가고 여름이 오는 날들. 『봄의 정원』이라는 예쁜 소설을 읽었다. 계획 없이 충동적으로 구매한 책이었고, 올리버 색스의 『온 무브』도 그러하다. 아직 읽지는 않았다. 5월의 소설로는 윤성희의 단편집 『베개를 베다』, 시집으로는 정영호의 『계속 열리는 믿음』을 읽으려고 한다. 아, 침대에 놓인 책도 읽어야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211 | 21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