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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로들의 집
윤대녕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2월
평점 :
이미지는 실체가 아니다. 존재를 확인할 수 없다는 말로 대신할 수도 있겠다. 좋아하는 작가 윤대녕에 대한 이미지는 사막, 안개, 푸른빛. 그의 소설에서 내가 발견한 건 서툰 관계와 삶에 대한 회의를 지탱할 수 있는 존재에 대한 탐구라고 해도 좋을까. 그러니 오랜만에 만난 장편소설 『피에로들의 집』에서 내가 기대한 것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여전히 문장은 매끄럽고 아름다웠다. 상처를 가진 인물이 등장했고 그들을 위로하고 어루만지는 존재도 있었다. 생에 대한 애착을 버린 사람들,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불러 모은 ‘아몬드나무 하우스’의 ‘마마’가 있었으니까. 그러나 설명할 수 없는 허전함을 숨길 수는 없다.
어쩌면 마마를 중심으로 아몬드 하우스에 모인 사람들은 우리는 알 수 없는 우주의 인연으로 맺어진 관계인지도 모른다. 재기를 꿈꾸는 극작가 김명우, 생부의 존재를 몰라 자신의 존재에 대해 믿음을 갖지 못하는 마마의 조카 김현주, 소비되는 내가 아닌 자유로운 삶으로 전진하는 사진작가 박윤정, 연인의 잔혹한 죽음 후 관계의 단절로 생을 이어가는 윤태, 홀로서기를 해야만 하는 고등학생 정민. 마마가 정해놓은 규칙을 지키며 서로가 서로에게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며 살아간다. 온갖 역경을 헤치고 현재의 삶을 유지하는 마마는 그들이 서로의 절망과 상처를 위로할 수 있는 존재라 믿은 것이다.
화자 김명우를 통해 들려주는 그들의 지나온 삶은 고단함 그 이상의 고역의 연속이다. 자신의 상처를 바라보느라 타인에 대해 마음을 열지 못하는 사람들. 해체된 가족, 회복될 수 없는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네 모습이다. 윤대녕은 혼자서는 풀 수 없는 생의 무게를 누군가와 나눌 수 있다면 남겨진 생이 훨씬 가볍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던 건 아닐까. 먼저 경험한 생의 일부가 누군가에게 조언이 될 수 있으니까. 각기 다른 세대는 서로가 통하지 않는다고 쉽게 말하지만 같은 세대가 아니기에 객관적으로 공감할 수 있고 위로할 수 있다. 그것이야말로 진짜 감정을 나누고 소통하는 방법은 아닐까.
‘나는 유대감에 대해 말했다. 상대에 대한 깊은 연민과 이해에서 얻어지는 친밀감을 통해 힘들 때 서로 의지할 수 있는 관계를 원했던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누구라는 걸 알기 위해서라도 늘 타인의 존재가 필요한 법이었다.’ (165쪽)
선뜻 서로에게 손을 내밀지 못하고 떠도는 아몬드나무 하우스 사람들이 정해진 날에 한 식탁에서 밥을 먹는 장면은 묘한 감정을 불러온다. 드러내어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들 자신은 얼마나 외로운 존재였던가. 혼자서도 모든 걸 해결하고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어리석은 현대인에게 타인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지 생각하게 만든다. 집이라는 공간, 함께 할 수 있다는 공간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된다.
돌이켜보면 위로는 아주 작은 것에서 시작된다. 그저 들어주는 것, 지켜봐 주는 것, 그리고 눈빛으로 응원을 보내는 것. 같은 자리에서 같은 모습으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든든하다. 서로가 서로에게 말이다. 내가 알았던 것을 당신에게 전해주는 일. 마찬가지로 당신이 알고 있는 걸 내게 전해주는 일. 그것은 소설 속 윤정과 명우가 나누는 대화 속 순환이다. 순환이 쌓이고 쌓이면 걷잡을 수 없는 강력한 힘이 될 것이다. 아름답고 아름다운 힘. 그것은 소설을 통해 삶의 아름다움을 끌어내고자 하는 윤대녕의 힘이다.
“일정한 주기의 반복이 가져다주는 삶의 에너지라는 게 존재하는군요.”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순환이라고 봐야겠죠. 모든 존재는 순환하면서 나이를 먹고 성장을 거듭하니까요.” (9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