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겁게 살자, 고민하지 말고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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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누야마 집안에는 가훈이 있다. 사람은 언젠가는 죽는다, 그러나 그 때를 모르니 전전긍긍하지 말고 마음껏 즐겁게 살자. 그 가훈을 자매는 각각의 방식으로 신조 삼았다. (11쪽)

 

 고민이 없는 사람은 없다. 누군가는 잠들기 전 아침에 출근할 때 무슨 옷을 입을까 고민하느라 잠들지 못하고 누군가는 짝사랑하는 상대에게 어떻게 고백할까 고민하느라 다른 일에 전념할 수 없다. 타인의 시선에 나의 고민은 보잘 것 없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고민의 당사자에게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일이다. 어디 고민뿐일까, 모든 일이 그러하다. 에쿠니 가오리의 『즐겁게 살자, 고민하지 말고』속 세 자매에게도 저마다의 고민이 있고 나름의 규칙이 있다.

 

 고백하자면 제목에 의지해 나름대로 밝고 명랑한 소설이기를 기대하면서 읽었다. 복잡한 이야기가 아닌 산뜻한 구조로 들려주는 맑은 소설을 말이다. 따지고 보면 전혀 복잡하지 않다. 아빠의 외도로 이혼을 한 부모님을 존중하며 아사코, 하루코, 이쿠코 세 자매가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예상했겠지만 보편적인 그것은 아니다. 소설은 세 자매의 일상을 교차로 들려준다. 그들의 일, 사랑, 그리고 내면을 섬세하게 담아낸다.

 

 첫째 아사코는 평범한 주부처럼 보인다. 남편을 내조하며 평온하게 방금 다림질이 끝난 것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일상을 살고 있다. 그러나 아사코의 결혼생활은 불안의 온실이었다. 결혼 2년에 접어들며 시작된 남편의 폭력에 익숙해졌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사코의 삶엔 생기가 없었고 낮은 자존감으로 그녀의 밑바닥엔 우울과 불안만이 존재했다.

 

 기억은 냉동된 식품 같은 것이라고 아사코는 생각한다. 오래되기는 했지만, 시간이 흘러도 그냥 거기에 있다. 썩는 일도 성장하는 일도 없다.’ (49쪽)

 

 둘째 하루코는 유학을 다녀와 자신의 분야에서 멋지게 성장하는 커리우먼이다. 사랑하는 남자친구와 동거 중이다. 하루코는 결혼이 아닌 사랑을 원한다. 남자친구의 청혼을 아무렇지 않게 거절하면서 현재의 상태에 만족한다. 그러나 육체에 대한 갈망으로 과거 연인을 만나기도 한다. 하루코는 종종 동생 이쿠코와 만나 술을 마신다. 동생의 연애에 대해 조언하기도 하고 이혼한 부모님과 큰언니의 소식을 듣는다.

 

 막내인 이쿠코는 운전면허학원에서 일한다. 가족에 대한 애정이 커서 엄마에게 매일 안부 전화를 하고 아빠를 정기적으로 찾아간다. 큰언니의 결혼생활에 문제가 있음을 가장 먼저 접한 것도 이쿠코다. 그러나 남자관계에서 있어서는 세 자매 중 가장 독특한 인물이다. 친구의 애인과 사랑을 나누고 다양한 연령의 남자들을 만나기도 한다. 가족조차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다. 이쿠노는 그저 마음이 가는 대로 할 뿐이라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사람을 만나고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걸 가장 어려워한다.

 

 세 자매는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간다. 사랑에 대한 가치도 삶을 추구하는 방식도 다르다. 세 자매는 서로의 삶을 존중하지만 서로에게 조언을 멈출 수 없다. 어느 누가 언니의 불행을 방관할 수 있으며, 어느 누가 동생의 안정을 원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결국 선택은 각자의 못이다. 에피소드로 끝난 가출 뒤에 진정으로 자신의 삶을 찾기로 결정한 아사코, 과거 연인의 메일로 남자친구와 다툰 후 이별을 선언한 하루코,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남자친구와의 만남으로 결혼까지 생각하는 이쿠코.

 

 우리는 타인의 삶을 살아가는 게 아니라 나의 삶을 산다. 그러니 어떤 상황에 닥쳤을 때 그것과 손을 잡든 싸우든 내가 해야만 한다. 에쿠니 가오리는 세 자매의 삶을 통해 그것을 잘 보여준다. 캐릭터에 맞는 배경 설정과 담백하면서도 치밀한 심리 묘사가 탁월하다. 기대했던 산뜻한 내용은 아니었지만 내 삶을 산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즐겁게 살고 싶다는 마음으로 이어진다. 때로는 하루코의 말처럼 진지함보다는 그냥이 더 필요할 때도 있으니까.

 

 “인생은 진지하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그냥 사는 거야.” (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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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이 되었다. 곧 첫눈이 내릴 것이다. 어제는 새벽 예배를 드리기 위해 일찍 일어나 옷을 챙겨 입었다. 한 달에 한 번, 내게는 의식처럼 행해지는 일이다. 차가운 바람이 자꾸만 내게로 달려들었다. 적군을 향한 맹렬함이 느껴졌다. 겨울이구나, 생각했다. 하나의 기도를 계속 드린 것 같다. 아니, 다른 기도도 있었다. 무언가를 위해 기도하는 시간만큼은 이전과는 다른 순수한 인간처럼 여겨진다. 예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마주한 하늘은 밝은 잿빛이었다.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를 하늘이라는 생각이 밀려왔다. 사진을 찍어두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따뜻한 무언가를 찾는 계절이다. 장갑, 워머, 덧신. 몸을 감추는 계절이다. 마음을 감추는 계절은 아니었으면. 11월은 분주하면서도 여유가 있다. 아직은 두 달이라는 시간이 남았다는 안도감이랄까. 그 시간에 무언가를 다 채울 수도 없고 무언가를 찾을 수도 없으면서 말이다. 곁에 둔 김상혁의 시집 『다만 이야기가 남았네』에는 십일월에 대한 두 편 시가 수록되었다. 같은 듯 다른 십일월을 상상하게 된다.

 

 십일월에 내리는 눈에는 비가 섞여 있어 잠을 자고 나면 꿈의 차디찬 들판을 달리던 가슴에 식은땀이 흐른다네 오늘 우산도 없이 현관문을 두드리던 사람이 내일도 꼼짝없이 눈 속에 서서 떨어야 하는 식이지 누구나 화가 앞에서 발가벗을 용기를 가진 건 아니라네. (「십일월」 ​중에서)

 

 십일월은 내년을 기대하기에도 한 해를 돌아보기에도 좀 이르다. 자동차 정비를 핑계로 부모에게 꾼 돈으로 아이를 지우거나 그런 일을 겪고 내가 개종을 해도 지인들은, 십일월은 참 조용한 달이야, 하고 낮게 중얼거리고는 차를 따뜻하게 끓이기 시작할 만큼 날씨가 제법 쌀쌀해지는 것이다. 할아버지가 죽었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 나는 애인과 모텔 전기장판 위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아버지를 잃게 된 어머니의 나이를 생각하면서. 십일월 우기에 태어났다는 신에 대해 생각하면서. ​(「십일월」전문)

 

 11월의 빛을 생각하며 호퍼의 그림을 보기도 한다. 그림 속 여인에게 말을 걸기도 한다.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무엇을 바라보고 있느냐고 그곳에서 누구를 기다리는냐고. 이런 놀이 아닌 놀이는 11월과 호퍼의 그림이 있기에 가능하다.  

 

 어제를 보냈고 곧 오늘도 보내겠지. 11월의 날들에 나란하게 걷을 수 있는 이가 있기를 바란다. 손을 맞잡고 발을 맞추며 걷는 다정한 사람이길 바란다. 귀여운 강아지 혹은 도도한 고양이여도 좋겠다.​ 곧게 뻗은 은행나무라도 괜찮다. 밤이 되면 전부를 불태워 빛이 되는 가로등이어도 나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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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왕국의 성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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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상이 즐거운 건 현실을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힘든 상황을 피해 다른 곳으로 마음을 보내 잠시나마 편안해질 수 있는 일. 가상공간으로의 초대인 게임에 빠져드는 이유도 같다. 이곳이 아닌 그곳에서 다른 나로 살 수 있다는 착각. 그런데 정말 그런 세계가 있다면 단 번에 거부할 수 있을까? 우연히 마주한 한 장의 그림이 다른 세계의 통로가 된다면 어떨까?

 

 고교 입시의 부담에서 벗어난 신은 심부름으로 은행에 갔다가 그림 하나를 주워 집으로 가져오고 만다. 돌려줄 기회를 놓친 신은 그림 속 아름답고 신비로운 고성에 빠져들고 이상한 점을 발견한다. 손으로 그림을 만지니 그림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림 속 고성에 한 소녀가 갇혀 있다고 확신한다. 자신의 분신을 그려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안 신은 정확하게 그림을 그려줄 사람을 찾는다. 그림을 잘 그리는 동급생 시로타에게 그림을 보여주고 자신이 경험한 일들을 설명한다.

 

 완벽하게 그림을 그린 시로타 덕분에 둘은 함께 그림 속으로 들어가고 그곳에서 낯선 남자를 만난다. 그러니까 그림의 존재를 아는 다른 누군가가 있었던 것이다. 그림 밖으로 나온 신과 시로타는 그 남자가 만화를 그리는 파쿠 아저씨와 소녀에 대해 의견을 교환한다. 과연 그림 속 성에 사는 소녀는 누구일까? 그림을 통해 시간의 이동이 가능하다고 판단한 세 사람은 소녀의 단서를 추적하기 시작하고 10년 전 사라진 소녀였다는 걸 확인한다. 현실에서 사라진 소녀는 방임된 상태였다. 미혼모 엄마와 새아빠 사이에서 제대로  된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소녀에 대한 조사를 하면서 세 사람은 소녀가 스스로 그림 속 성으로 들어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에 의해 갇힌 게 아니라 소녀의 선택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소설은 좀 혼란스럽다. 현실이 아닌 가상의 세계로 통하는 그림, 그곳에는 현실보다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다는 설정, 그리고 그 세계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좀 난해하다고 할까. 보통의 평범한 삶을 사는 신은 그림 속 세계가 아닌 현재를 선택하지만 아버지의 재혼으로 힘든 생활을 하는 시로타는 그림 속 세계를 원한다. 돌아가신 어머님께 성공한 만화가가 되지 못했기에 불효자라 여기는 파쿠 아저씨도 마찬가지다. 현재를 바꿀 수 있는 과거의 세계로 말이다. 그러니까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는 세계가 존재한다면 과감히 다른 세계로 떠날 수 있다는 말이다.

 

 “세계는 많이 있어. 수많은 세계가, 수많은 사상의 선택지 앞에 동시에 존재하고 있지. 다만 우리는 그 전부를 인식할 수 없어. 기본적으로 자신이 있는 세계에 대해서 밖에 알지 못해.” (322쪽)

 

 단순한 재미를 주는 판타지가 아닌 과거의 선택이 현재의 삶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걸 말하는 소설이라 할 수도 있겠다. 소설에 등장하는 신과 시토라는 고교 입시를 선택했고 파쿠 아저씨는 앞으로 자신의 만화를 그릴지 선택해야 한다. 지나간 과거를 바꿀 수 없으니 현재의 삶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진부한 메시지를 전한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묘한 분위기 설정과 그림을 통한 순간 이동은 대단한 흡입력이라 인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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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말에는 독감 예방주사를 맞았다. 작년보다 가격이 오른 백신과 가격이 내린 백신이 있다고 의사는 말했고,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간호사는 주사를 놓은 자리에 귀여운 캐릭터 밴드를 붙여주었다. 동그란 밴드를 보니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예방주사를 맞는 일은 돌아와서 할 일 중 하나였다. 잠시 여기가 아닌 거기에서 생활했고 돌아왔다. 여기를 떠나는 일은 쉬운 일임에도 결정을 내리는 일은 요원하다. 긴 잠에서 깨지 않았고, 짧은 잠에 빠져들었다. 수술 후 처음으로 맥주를 마셨다. 충동적이었으나 신나는 일이었다. 텔레비전의 빛을 의지해 혼자 맥주를 마시며 살짝 취기를 즐기는 일, 맥주 한 캔의 시간, 그것은 호쾌한 웃음을 불러오기도 했다.

 

 거기에서 나는 누군가를 기다렸다. 거기에 내가 있다는 이유로 나를 만나러 달려온 친구¹과 친구². 우리는 만났고, 이야기를 나눴다. 먹을거리를 잔뜩 사들고 도착한 친구였다. 친구¹과 좋아하는 책에 대해 말했고, 어느 공간에 대해 상상했고, 누군가를 떠올리기도 했다. ​어느 시절을 함께 보냈다는 건 나의 일부를 안다는 일이다. 그 일부는 우리를 지탱하는 자양분이고 격려하는 시작점이다. 우리가 말한 책은 이렇다.

 

 

 

 

 

 

 

 

 

 

 

 친구¹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고 며칠이 지나고 친구²가 왔다. 두 딸의 엄마가 아닌 내 친구로만 존재하는 순간, 긴 시간을 나눌 수 없기에 우리는 서로에게 더욱 집중해야 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 속상했던 일을 나누었다. 고민과 걱정거리가 해결될 수 없더라도 조금 가벼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서로에게 전해졌다. 언제라도 나를 보여줄 수 있는 친구들이 있어 참 고맙다.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 친구들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충만해진다.

 

 소설과 시를 좋아하고 그것에 조금 더 가까이 닿기를 바라는 독자인 내게 SNS와 언론을 통해 보도된 일들은 너무도 큰 충격이었다. 내가 읽고 간직한 문장들을 바라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의 시집을 정리했다. 누군가는 시는 시일뿐이라 말하겠지만 나는 용납할 수 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소설을 읽고, 시를 읽는다. 이런 문장을 흠모한다. 친한 동생이 선물한 소설(읽지 않았다)을 넘기다 발견한 문장일 뿐이다.

 

 

 그는 이렇게 두 뺨이 달아오른 채 잠에서 깨어났다. 관자놀이에서 피가 뛰고 몸에서 열이 났다. 서늘해진 바람이 세차게 불기 시작하자 목련나무 가지들이 마구 흔들리며 진줏빛 꽃들이 솜뭉치처럼 마당에 길게 떨어져 흩어졌다. 하늘에도 땅에도 이제 달은 없었다. 하늘과 땅에 똑같이 새하얀 흔적들만 남아 있었다. 은하수에서, 부드럽게 빛나는 팔 한복판에서, 참혹한 고통을 겪으며 별들이 태어났다. 꽃들이 떨어져 흩어지면서 그 화사함이 빛을 잃고 향기가 사그라졌다. 마르소는 울고 싶었다. 가차없는 비애가 그를 송두리째 사로잡았다. (『분노의 날들』, 204쪽)

 

 

 우리는 모두 분노의 날들을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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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통 - 제5회 문학동네 대학소설상 수상작
이희주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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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축복이다. 그것이 크나큰 고통을 동반하더라도 말이다. 때로 사랑은 일상을 굴복시킨다. 사랑하는 그 대상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을 무작정 좋아하고 사랑할 수 있는 일은 가능한 것일까. 이것은 부질없는 질문인지도 모른다. 형태와 행위가 다를 뿐 맹목적인 사랑, 내 전부를 줄 수 있는 사랑을 경험한 적이 있으니까. 때문에 아이돌 그룹의 멤버를 사랑하는 팬의 이야기라 할 수 있는 이희주의 『환상통』을 가볍게 볼 수 없다. 그들에게 사랑은 숭고하고 위대한 일이다. 청소년 시절의 통과의례처럼 지독한 열병으로 기록되더라도 말이다. 섣불리 이해할 수 없지만 함부로 말할 수도 없다.

 

 ‘사람들은 소중한 것일수록 기록을 통해 남기려고 하죠. 그러나 어떤 기록도 순간의 모방일 수밖에 없다면 도대체 사랑은 어떤 방식으로 남겨져야 합니까?’ (23~24쪽)

 

 소설의 주인공은 십 대의 소녀팬이 아니다. 아이돌 멤버를 좋아하는 이십 대의 m과 만옥, 그리고 만옥을 짝사랑한 한 남자가 서로의 시선에 비친 그들의 사랑을 들려준다. 같은 멤버 민규를 좋아한다는 것과 이십 대란 공통분모로 m과 만옥은 금세 친해진다. 아이돌의 스케줄을 공유하며 함께 공개방송을 기다린다. 기약 없는 시간을 길 위에서 보내서 잠깐 팬들에게 모습을 보이는 아이돌의 일거수일투족이 그들에게는 삶의 전부가 된다. 일상의 축은 아이돌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아이돌 멤버와 팬의 로맨스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한 대상을 향한 무한대의 사랑이지만 그것이 너무도 절망스럽다는 것, 전부를 소유하길 간절히 원하지만 모두와 나눠야 한다는 고통까지 감수하며 사랑한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하게 만드는 묘한 소설이다. 그래서 m과 만옥과 한 남자가 차례로 들려주는 사랑은 처절하면서도 철학적이다.

 

 ‘나는 기다림이 좋았다. 사랑한다는 것은 곧 기다림이었으므로 그것은 언제나 달콤했다. 아니, 그렇게 말하는 것은 거짓이다. 나는 그들을 알게 된 이후 매 순간이 기다림이었던 것을 기억한다. 문장을 쓰며 그 순간을 간신히 버티던 것을 기억한다. 그렇다면 나는 고통 때문에 사랑하는 것을 포기했던 걸까? 그러나 그렇게 말할 수도 없었다. 나는 고통이 좋았고, 어떤 면에서는 그것을 자발적으로 원한 사람이었다. 불확실한 고통이 아무것도 아닌 시간보다 낫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70쪽)

 

 사랑하는 이가 무엇을 하는지 궁금한 건 당연하다. 무엇을 먹고 어떤 걸 먹고 무슨 생각을 하고 누구와 친한지, 알고 싶고 기억하고 싶은 것이다. m과 만옥이 아이돌 멤버 민규를 향한 마음도 그러하다. 세상은 그들을 ‘빠순이’라 부르며 정신 나간 집단으로 치부한다. 공개방송과 콘서트에 가기 위해 제대로 된 직장을 가질 수도 없고 친구나 부모에게 싫은 소리를 듣는 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민규가 존재하기에 m과 만옥도 존재하는 것이다.

 

 소설에서 그려진 아이돌과 팬의 모습은 작가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라 매우 사실적이다. 현장을 생생하게 스케치 한 느낌이랄까. 스타의 이동에 따라 움직이는 팬의 하루, 어느 위치에 서야 좋아하는 멤버를 잘 볼 수 있는지, 팬미팅 당첨을 위해 몇 장의 앨범을 구매해야 하는지도 자세하게 알 수 있다. 그러니까 그들은 단순한 팬이 아닌 것이다. 민규를 향한 사랑은 신을 향한 그것과 같다. 그를 위해서라면 지옥이라도 갈 수 있는 사랑이다.

 

 ‘네가 유리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혀끝에 맴도는 이름이라면 나는 그것만으로도 족했다. 내겐 아직 쓸 만한 눈과 너를 담을 마음의 공간이 있었다. 네 앞에서 꿇을 무릎, 녹아 사라지기를 바라는 다리가 있었다. 네 앞에서 몇 번이고 터질 심장과 그걸 꿰맬 손이 있었다. 무엇보다 내가 아직 기다리길 원했다. 네가 너를 기다렸으니까.’ (128쪽)

 

 이 무섭고도 모진 사랑을 이해하기에 나의 이성과 감성은 부족하다. m이 다른 민규를 사랑하게 된 이유와 만옥이 갑자기 죽은 이유를 찾을 수 없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만옥의 죽음 후 m과 만나 그녀가 사랑한 민규에 대해 알아가는 것으로 여전히 만옥을 사랑하는 남자의 마음은 조금 알 것 같다. m을 통해 만옥을 듣고 만옥을 만나는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 그 의미에 대해 생각이 많아진다. 사랑하는 것은 축복이라 생각하지만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는 것보다 행복한 것일까, 여전히 어렵다.

 

 ‘기록은 다른 사람과 나눴을 때 더 의미가 있으니까요. 그것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떠나서.’ (1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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