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 계단을 보라
윤대녕 지음 / 세계사 / 200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그저 이름으로만 기억하는 작가,윤대녕. 최근작인 [제비를 기르다]에 호평을 들은지라 내심 그 책을 만나봐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나 언제나 그렇듯이 읽고 싶은 책은 계속 쏟아져 나오고 그 순간 무엇인가를 선택하기란 너무 어려운 일이다. 우연히도 최근작이 아닌 그의 작품을 덜컥 사게 된 것은 8편의 소설 중에 피아노와 백합의 사막 이라는 단 하나의 단편 때문이었다. 목마름을 시험하려는 듯 목차도 맨 끝에 수록되어 있었다. 피아노와 백합의 사막...
그 사막까지 가는 도중 나는 또 다른 많은 사막들을 건너고 있음을 알았다. 윤대녕의 이 소설 집에는 끝없는 사막과 알 수 없는 공허감과 잡히지 않는 형체를 알 수없는 것들로 가득하다.

보이지 않는 내면의 모습과 갈등하고 존재하지 않는 영혼을 찾으려 헤메이는잃은 사람들이 가득하다. 배암에 물린 자국 산책길에 아무런 준비없이 만난 뱀은 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강한 독을 가지고 있다. 자신이 찾고 있는 것이 뱀이 아님을 알면서도 왜 그렇게 뱀에 집착하는지 알 수 없다. 겨울 동면에 들어갔을 것이 분명한데 주인공은 아직도 그 뱀을 찾아다닌다. 이 소설 속에서 남겨진 것은 분명 자국일 것이다. 그것은 나 스스로 만든 자국임을 언젠가는 주인공도 알게 되리라. 어떤 것이든 지나가면 잊어버려야 함을 알지만 그 상흔 속에서 자꾸만 스스로를 힘들게 하는 우리는 과연 무엇을 기억하기에 그런 것일까? 주인공이 찾는 단순한 뱀일까? 아니라면 그것은 무엇일까? 이러한 맥락의 소설은 표제작인 남쪽 계단을 보라 에서도 보여진다. 어느 순간 나의 시간이 나를 제외한 타인의 시간이 다르게 흘러가는 것만 같은 느낌. 그들과 동떨어진 세상에 살고 있는 느낌을 경험했다면 조금은 쉬운 소설이 되리라.  

무척 재미있게 만나지는 소설은 신라의 푸른 길 자나가는 자의 초상이라고 할 수 있다.물론 이  두 소설 속에도 발화하지 못하고 스스로 꺼져버리는 내면의 소리가 있다. 우연하게 경주를 향하는 버스에 동승한 남녀의 대화는 헌화가를 논하다가 어느 한 지점에 서로가 헌화가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음을 직감하게 된다. 더 이어나가고 싶은 마음속 욕망을 자제하는 글의 묘미가 탁월하다. 그에 반해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가는 과정에서 도저히 빠져 나오지 못하는 자나 가는 자의 초상 속의 인물들은 무척이다 답답하게만 보이지만 삶이란 아무리 낮게 엎드려 있어도 때로 조사관처럼 어떤 응답을 요구해 오게 마련인가 보다. 99쪽  이 문장 하나로 그 답이 될 듯하다. 

가족사진첩과 새무덤 또한 부재자의 강한 존재를 느낄 수가 있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기억하는 아들과 어머니,이제 그 자리에 아내가 함께하면서 다시 살아나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회한, 또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대한 것도 두 소설에서는 아버지의 부재와 존재에 상관없이 그들과 화해하려는 모습을 보게 된다. 사랑도 삶처럼 하나의 신성한 노동이란 걸 알게 되는 날 우리는 비로소 자신들과 화해하게 되겠지.109쪽 기억 속에 있는 기존의 아버지가 아닌 새로이 맞이하는 가족과 아버지에 대한 강한 유대감을 원했음이 분명하다.

이제 그 길로 가는 마지막 길목에 다다랐다. 사막의 거리 바다의 거리 라는 소설엔 메마른 도시가 있다. 그 안에 사막도 있다. 매일 매일 만나는 이 곳이 사막의 거리가 된다는 느낌이다. 미로같은 골목길을 지나 만나는 세상,그것이 사막일 것이다.그러나 그 안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하는 것은 사막을 만나는 누구에게나 오는 것은 아니리라. 안개속을 걸어가는 듯한 모호함으로 그 길을 헤치니 이제 그 끝에 도착했다.

피아노와 백합의 사막을 만난 것이다. 사막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던 것인가? 자문하지만 그건 아니다. 사막의 선인장이 아닌 백합을 결합시킨 것이 궁금할 뿐이었다. 그 황량한 사막에 피아노를 접목시킨 것이 나의 목마름의 가장 큰 원인이리라. 사막을 향해 가는 주인공은 어릴 적 사막을 꿈꾸던 친구를 기억한다. 시인이 되어 죽음을 앞 둔 그와 함께 사막을 만나고 싶었던 것이다. 그 보이지 않는 끝에서 그가 치던 피아노 연주를 울리게 하고 싶었던 걸까? 잃어버린 그 시절을 돌아보고 싶었던 건가?

심연에서 올라오는 감정의 옷을 한 겹 한 겹 조심스레 벗겨내는 숨막히는  작가의 시선이 있다. 그의 글속에 서성임이 느껴진다. 그 서성임을 과연 무엇일까? 너에게 가고 싶은 서성임이었을까? 사막으로 가로막힌 너에게로 향하고 싶은 소망이었을까?
사막은 가령 이런 식으로 [발생]한다. 너와 나 사이에 팽행하게 지속되어 있던 긴장의 끈이 한수간에 끊어지고 그리하여 아득한 거리로 서로 밀려나면서 그 사이에 황량한 모래벌판이 가로놓이게 된다. 256쪽 
작가가 발생이라고 표현한 사막,나와의 많은 관계 속에서 어쩜 지금 어느 누군가와 사이에는 사막이 발생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몰려온다. 그러나 사막을 건너온 백합이 깊게 뿌리를 내려 새로이 꽃을 피울꺼 라는 소망을 갖게 하기도 한다. 무척이라 길게 그리고 어렵게 다다른 피아노와 백합의 사막을 만나고 나니 사막의 모래바람을 지나 오아시스처럼 자리잡은 나만의 백합을 만나고 싶은 바람을 하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박사가 사랑한 수식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 이레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갈 즈음 세상은 온통 전자공학과 이공계의 꽃을 피우고 있었다. 인문학이나 문과 계열은 사장의 시간으로 접어들고 있었고 이과를 지원해야만 앞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 시간부터 취직이라는 커다란 관문이 나를 숨막히게 한 것은 엄마의 고집을 뒤로 하고 외지로 학교를 나왔기때문이다. 고교 2학년이 되어서 적성이 크게 반영되었는지는 기억할 수 없지만 나는 주저없이 이과를 택했다. 그것은 어쩜 불행의 시작이었는지도 모른다는 핑계를 그 후로 가끔 늘어놓게 된다. 나는 수학을 잘 못했다. 본격적인 수학을 배울때 수학의 정석을 껴안고 잠을 자고 있었지만 수업시간에는 졸기를 밥 먹듯이 했다. 그러다 보니 점차 수학에는 흥미를 잃어가고 있었음에도 나의 성적으로 갈 수 있는 학과는 수학과 뗄레야 뗄수 없는 학과가 되어버렸다. 그 부터 사람들은 나를 수학으로 연결하여 기억하기도 한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은 무엇이었을까? 먼저 그런 질문을 하게 된다. 내가 사랑한 수식은 거창한 공식이 아닌 인수분해이다. 중학교 3학년에 배운 인수분해,수학선생님은 인수분해를 설명하시며 비오는 날 우산을 같이 쓰고 가는거라 했었다. 그 시간에 배운 수식은 무척 재미있었고 그 시간도 즐거운 시간으로 남아있다. 그 후로 비오는 날은 우산을 보면 인수분해가 생각난다. 그렇게 수는 우리 가까이에 있음을 이 기회에 다시 확인하게 된다.

수라는 소재를 드러내기 위해서인지는 모르나 책 속에는 유려한 문장들이 가득한다. 그러기에 이 책이 더 빛을 내는지 모르겠다. 일부러 꾸미지 않았으나 문장 하나 하나의 매끄러운 곡선들이 하나의 춤으로 태어나고 그림으로 그려진다.더불어 투명하고 맑기까지한 감동을 전해주어서 책을 읽고 손에서 놓고나서도 책을 꼬옥 껴안아 주고 싶은 아니 주변의 누구라도 꼭 껴안아줘야만 할 것만 같다. 사고로 인해 1975년이라는 과거의 시간에 살고 있는 이와는 어떤 대화를 할 수  있을까? '내 기억은 80분밖에 지속되지 않는다'는 메모를 가장 중요시여기는 박사. 80분이라는 시간이 지나면 주변 사람에게 다시 누구냐고 처음의 질문을 던지기도 하는 박사를 아무런 편견없이 마음을 나누는 친구를 삼을 수 있는 사람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일꺼 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물론 책을 읽었기에 그 사람이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버렸지만 그래도 나는 그들의 특별한 사람들이라는 믿음을 갖는다.

박사와 그 집에서 일하게 되는 파출부와 그의 아들은 안정적인 삼각형의 구도를 이루면서 그들만의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간다. 아들에게 모든 수를 안전하게 해준다는 의미로 수학 기호 루트라는 이름을 지어주게 된다. 반복되어지는 일상 속에서 박사가 안내하는 수의 세계는 황홀함 그 자체로 그녀와 아들에게 다가온다. [광활한 수의 세계에서 고생고생 끝에 만나 서로를 꼭 껴안고 우애를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32쪽]이처럼 수를 소재로 하고 박사가 말하는 수를 통해서 작가는 우리의 삶을 말하고 있는데 많은 사람들 속에서 인연이 되어 만나는 사람들은 우애수 처럼 서로에게 꼭 필요한 끈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수학이라는 개념을 벗어나 박사에게서 배우는 수는 루트에게는 애정이었고 사랑이었으며 성장하는 아이에게 꼭 필요한 영양분이었다. 세상에 속하지 못하고 수의 세계 속에서 존재하고만 있던 박사에게도 그녀와 아들은 처음 떠오르는 별이었고 달빛이었으며 아침 햇살이었다. 세상은 박사와 그녀와 아들에게 이상한 노인이라는 것과 미혼모와 그의 아들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은 서로를 있는 그대로 그렇게 인정하고 신뢰하고 우정을 쌓아갔다.

특별하지 않다.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주면 된 것이다. 가장 기본적인 신뢰의 방법이리라. 박사가 기억하는 1975년식의 야구를 기억해주고 루트가 좋아하는 글러브를 선물하고 함께 추억을 만들면 그뿐이다. [수학의 진리는 길 없는 길 끝에,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숨어 있는 법이지.51쪽 ] 이 멋진 말처럼 우리가 갈구하는 삶의 진리는 요란하게 소리내지 않아도 어느 한 순간에 발견하게 되는 것인지 모른다.
잘 보이는 곳에 보물을 숨겨두어 모두 즐거워하는 보물찾기처럼 우리의 삶의 진리도 그러하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의 피투성이 연인
정미경 지음 / 민음사 / 200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그녀의 책을 읽었다. 책에서 분홍빛 봄내가 났다. 가을이 깊어지고 있어 점점 추워지고 있는데 그녀의 책에서는 봄이 보였다. 겨울이 꾸는 꿈이라는 봄, 무언가 새로운 희망이 보이는 듯한 봄말이다.깨지고 쓰러지고 화내고 울고 있는 소설 속 주인공들에서 나를 보았다. 사랑이라는 것에 울고 살아가는 도중에 쓰러지고 내동댕이 쳤었던 나의 영혼을 보게 되었다.지나간 일들이라고 생각했던 감정의 조각 조각들이 그 곳에 함께 있었다. 정미경이라는 작가는 어떻게 이런 글을 쓸 수 있을까? 둔탁하지 않은 목소리로 조근 조근한 어투로 말하는 그녀는 어떻게 감춰진 삶의 단면들을 속속들이 다 알고 있을까? 그러기에 그녀의 글을 읽는 것이 나는 너무 행복하다. 6편의 단편 모두 하나의 그림의 퍼즐 조각들이다. 그 그림의 제목은 무엇일까? 나와 당신과 우리일까? 살아 숨쉬고 있는 우리의 속내들이 하나씩 하나씩 담겨져 있다.

[나릿빛 사진의 추억] 헤어진 애인의 흔적을 발견하며 행복했던 날들의 회상을 지나 단 한 번의 통화로 현재의 현실은 크나큰 지진을 겪어내기도 한다. 사진작가였던 성민이 찍었던 옛 애인의 사진은 지진의 근원지가 된다. 그로 인해 다시 찾은 일상은 평탄치 않은 길을 걸어가게 된다.(존재의 의미를 재는 내 속의 저울 눈금을 조정하고 나자 찾아온 것은 마음의 평화였다.11쪽) 나를 버리고 나를 낮추고 그저 세상에 속하려 하는데 세상은 때로 강한 바람으로 저버리려 한다. 우리도 그러했던가? 지나간 과거를 돌아보기도 하고 찢어버리고 싶은 필름을 발견하게 되면 그저 아름답다 라고 지나갈 수 있는 지점에 살고 있는지 생각이 많아진다.

[호텔 유로,1203] 한때 잘 나가게 쇼핑을 즐기던 쇼핑중독자인 나는 이혼을 하고 수 많은 결제 고지서만이 날아오는 한 가운데 남았는데도 아직 이 현실을 직시하기 싫어한다. 자신이 작성한 원고를 읽어대는 젊고 예쁜 탤런트에게 말할 수 없는 묘한 질투에 느끼며 내적 치장은 어디론가 사라진 채 껍데기일 수 있는 명품에 눈을 맞춘다. 과거의 나는 잘 나갔는데, 그 때의 사랑은 참으로 빛나기까지 했었는데.(사랑 속에는 사람들이 흔희 기대하는 따스함,열정,몰입,기쁨,까닭 없이 터뜨리는 웃음소리 같은 것만 있는 건 아니다. 그 눈부심 속으로 들어가 보면 마치 빙산의 아랫 부분처럼 거짓과 권태와 배신과 차가움과 환멸조차 사랑의 일부분이란 걸 사람들은 모르고 있거나 잊어버리거나 한다. 55쪽 ) 사랑이라고 느끼고 사랑에 속한 감정들을 정의하는 듯한 이 글을 보면서 그 많은 단어들로 나열된 감정중에 내가 느끼는 사랑의 감정은 어느 것일까? 내게 사랑으로 남겨진 것들은 무엇일까? 어떤 것도 정답이라는 단어 아래로 떠오르지 않는다. 때때로 우리는 과거만을 보기도 한다. 과거에 내가 꿈꾸던 오늘은 이런 날들이 아니었기에 그럴까?

[나의 피투성이 연인]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소설은 주기만 하는 사랑.맹목적인 믿음에 대한 배신이랄까? 작가인 남편이 죽고 나서 그의 유작을 출판하자는 제의에 아내는 남편의 컴퓨터를 켜게 된다. 그 안에서 발견하는 남편의 짧은 글에는 또 다른 사랑이 있는 듯한 암시를 주는 문구가 있다. 남편의 죽음으로 인한 상처도 사라지기 전에 이런 글을 접한 아내는 말하지 못하는 또 다른 상처를 스스로 만들게 되고 그 안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그것이 차마 나만의 일기라 하더라도 우연하게 읽게 되는 이는 얼마나 절망스럽겠는가. (삶은 이렇게 차갑고 날카롭게,파도처럼 끊임없이 맨 살에 부딪쳐 올  모양이다. 84쪽)  아픔이 예상되는 곳에 겹겹이 두꺼운 천으로 싸맨다해도 파고드는 상처는 엉뚱하게도 맨살이 드러난 곳에서 낭자하게 피를 토하고 있기 마련이다.우리가 만나는 상처들은 거의 다 그렇게 오는거 같다.(지나고 보니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는 게 인생이고 어떤 일도 견뎌내는 게  인간이더라.136쪽) 돌아가는 룰렛 게임에서 내가 원하고자 하는 곳을 맞힐 수 있는게 얼마나 될까?
견뎌내게끔 그렇게 신은 인간을 만들어 놓은 걸까?

[성스러운 봄] 정말로 봄이라는 어감만으로도 세상을 깨울꺼 같은 성스러운 봄이 오기 전에 아이는 세상을 떠나고 남겨진 부부는 빚과 스스로의 질책으로 하루 하루를 열게 된다. 이 성스러운 봄이라는 소설에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인생이라는 것을 병원에서 생과 사의 갈림길에 있던 아이의 모습을 통한 비유로 쓰여지고 있는데 특히나 이 문장 (질문이란,비록 불완전하더라도 어딘가에서 대답을 찾을 수 있는 걸 말하겠지요.153쪽)은 정말 깊은 공감을 이끌어낸다. 아이의 생명연장의 결정을 묻는 의사가 하는 이 말처럼 우리는 우리의 생에서 답을 알 수 없는 질문들과 수 없이 만나왔음을 경험해왔다.그러다가 또 답이 없을 것 같은 질문의 답을 찾기도 할 것이다. 사막에 숨겨진 오아시스처럼 단내음을 가진 답들을 만나기라도 한다면 그 얼마나 황홀할 것인지 상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말해질 수 있는 건 고통이 아니야. 아픔을 표현할 수 있는 건 참을 수 있다는 거야.165 쪽) 나는 길지 않은 병동생활에서 이런한 문장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웃을 수 밖에 없음을.. 나를 보고 안타까워하는 그 마음을 미리 알아버렸기에 내 고통은 아프다고 말할 수  없게 된 것을. 나 역시도 정말 고통스러운 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비소 여인] 이 소설 중에서 굳이 낮은 점수를 주고자 한다면 이 소설이다. 윤도 나도 최군도 모두 혼자이다. 세상에서 버려진 듯한 느낌을 가진 세 사람. 없어서는 안 될 물,밥, 공기 속에 스며드는 비소라는 독은 일정기간이 지나면 사람을 죽게 만드는데 세상을 죽이고 싶었던 윤은 그렇게 주변 사람들을 시작으로 세상에 대한 복수를 한다. 버려진 느낌을 내게 소중한 이들을 버림으로 보상받으려 했을까?

[달은 스스로 빛나지 않는다] 자신은 분명 속할 수 없는 세계라고 단정지으면 바라보는 세상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편견과 독단일 뿐이다. 사람이 사는 곳은 어디에나 향기가 나기 때문이다. 번잡스럽고 항상 시끄러운 곳에 잠시 발을 담갔다가 빼면 된다고 했지만 정작 마음의 발을 빼지 못하는 주인공처럼 마음에 그어놓은 선은 자꾸만 나를 보여주고 사랑을 주는 누군가에 의해 어느새 지워지고 만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외면하면서 살기도 한다. 그들의 웃음소리.그들의 말투.그들의 삶이 나를 비춰주는 삶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은 나 역시도 그들을 비추고 있기 때문일까? (존재란 스스로는 빛날 수 없는 것.누군가의 시선 속에서,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만월도 되고 때론 그믐도 되고,그런거 같아요. 243쪽) 우리는 때때로 부정하고 싶은 많은 관계를 맺으며 살고 있다. 어떤 때는 그 관계를 끊지 못하는 내가 싫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것이 사는 것이다. 언제 빛을 내고 사라졌는지 기억할 수 없는 별의 반짝임을 보고 즐거워하는 내 모습은 그 언젠가 내게 베픈 친절한 사람의 손길을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그리워하는 것과 같을까?

상현달에서 보름이 되고 다시 기울어져 하현달이 되어 달은 사라진 듯 보인다. 태양이 빛나는 지금도 달은 우리를 비추고 있다.나를 둘러싼 수 많은 타인들이 나를 지켜주고 있듯이. 그들이 내게 보내는 관심으로 내가 살듯이.
이 단편들을 읽는 중간 중간 나는 숨이 멎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또 울고 싶어지기도 했다. 너무 힘들다고 떼를 쓰고 싶기도 했다. 모든 것은 지나가고 모든 것을 감싸주는 두 팔을 가진 이 책을 어루만지면서 나는 그 안에서 보이지 않는 두 팔이 나를 안아주는 걸 느끼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달의 바다 - 제12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수상작 이라는 이름을 꼬리표로 달고 나온 소설은 언제나 큰 기대를 가지게 한다.  물론 많은 수장작가들은 그 뒤로 많은 좋은 작품들을 써냈고 몇 몇 작가들에 대해서는 그네들의 작품을 손꼽아 기다리게 하기도 한다.
달의 바다를 쓴 정한아 라는 작가를 검색하면서 주저하고 있는 나를 보았다. 왜냐하면 그녀는 내게는 너무 낯선 신세대라는 점이었다. 호평이 쏟아지는  이 책의 선택은 다른 수상작에 비해 그렇게 먼 시간을 돌아서 내손에 들어왔다.

(꿈꿔왔던 것에 가까이 가본 적 있어요? 그건 사실 끔찍하리만치 실망스러운 일이에요. 7쪽)
(사는게 선택의 문제라면 저는 제 손에 있는 것만 바라보고 싶거든요. 11쪽)
책을 펼침과 동시에 눈에 박히는 이 첫 문장을 읽는 순간,내가 가진 기우는 금세 사라지고 말았다. 이런 느낌을 안다는 것은 꾸며 지은 글이라는 소설 속 문장이라 하기에는 너무 소름 돋는 일이기 때문이다.

주인공 은미의 고모가 할머니에게 보내온 우주비행사의 일상과 달에 대한 아름다운 이야기를 담은 편지 부분과 할머니의 부탁으로 고모를 만나러 미국에 다녀 온 은미의 이야기로 쓰여져있다.정말 고모는 우주비행사일까? 미혼모를 시작으로 불행이 함께 한 짧은 결혼생활의 끝에 그녀는 정말 할머니가 꿈꿨던 그 달을 왕래하는 일을 하며 행복해하고 있을까? 몇 년째 떨어지는 취업의 낙방을 뒤로하고 15년전 연락이 끊긴 고모를 만나러 가는 은미의 눈에 펼쳐진 고모의 모습은 편지의 내용과는 극과 극의 상황이었다. 탄탄대로가 펼쳐질꺼라 여겼던 고모와 은미의 성장과정은 우리가 흔히 예상하는 하이웨이가 아니었다. 그러한 모습을 통해서 은미는 죽음을 준비하던 자신을 보게 된다. 언제 죽음을 맞이할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매일 매일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고모의 일상을 뒤로하고 은미는 월석이라며 미국에서 가지고 온 돌을 할머니,할아버지에게 선물한다.

현실을 신으로 여기는 할아버지,꿈을 사랑하는 할머니, 대를 이어온 갈비집과 이제 더 이상 신문기자를 꿈꾸지 않는 은미,또 다른 나로 살기를 희망하는 친구 민, 이제 엄마를 꿈꾸는 찬이를 통해 이 소설속에는 현실을 자각함과 동시에 그 안에서 꿈꾸는 희망을 보게 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이라는 것을 작가 정한아는 너무 일찍 알아버렸다고 해야할까? 아니, 너무 많이 알아버린 것이리라. 그럼에도 소설속에서 묘사되는 달에 대한 환상은 어릴 적 내가 꿈꾸던 계수나무 아래 방아를 찧는 토끼의 모습이다.
(언제든지 명령이 떨어지면 저는 이곳에서 완전히 정작할 준비를 시작해야 해요. 그 때가 되면 더이상 편지는 쓰지 못할 거예요. 다이아몬드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달의 바닷가에 제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161쪽)고모가 보낸 마지막 편지처럼 우리는 보이지 않는 빛을 보이는 별을 믿고 달을 믿는다.

힘든 현실속에서도 아름다운 달을 선물한 고모의 눈물겨운 웃음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우리는 어느 누군가에게는 때로 진실이 아닌 거짓으로 행복을 주기도 한다. 또한 대를 이어온 갈비집에서 갈비를 자르는 은미의 웃음이 누군가에겐 거짓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은미에게는 진심인 행복인 걸 모르는 경우도 있다.
우리가 믿고 다가가고 있는 소망의 끝은 어쩜 허상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과정이 우리의 삶이고 그 안에 행복이 있다는 것을 아는 일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산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신비로운 것이라는 막연함으로 책을 읽은 많은 호평속에서의 눈물대신 나는 담담한 표정으로 그 밑에 덧글을 단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레이야 2007-10-26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있는데 아직 안 읽었어요.
리뷰 당선 또 축하드려요~~~ ^^

자목련 2007-10-27 1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경님,감사합니다. 혜경님은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지네요.
 
내 시대의 초상
이윤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끔씩 화장을 하려고 거울 앞에 앉아있는 경우가 있다. 외출이 적은 내가 집안에서 한 번씩 화장을 하는 것은 적나라한 내 모습을 바로 보기가 두려운 것인지 모른다. 애써 외면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이 책의 제목처럼 내 시대의 초상을 나는 제대로 보고 있는걸까? 묵직한 지난번의 책과는 달리 손안에 착 안기는 듯한 두께의 이 책은 네 편의 단편이 이어진 연작 장편 소설이다. 
21세기를 살고 있으면서도 현재를 부인하면서 과거속에 속하려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수 많은 시간을 함께했다고 하지만 일부분만을 기억하며 전부를 다 안다고 말하는 우리들의 현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샘이 깊은 물][뿌리 너무 깊은 나무]두 단편은 과거가 주가 되어 이야기 되고 있다.
구전동화처럼 전해지는 샘에 대한 이야기로 임금님의 말한마디로 인해 샘을 지키는 할머니의 전설같은 이야기가 나오는데  나라를 잃은 임금님이 꼭 지키라고 했던 샘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이었을까? 쓸데없는 미신처럼 여겼지만 목숨을 다해  정갈하고 고고한 샘을 지키려 했던 할머니에게서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할까? 그것은 신의 일까? 충이었을까? 지금이라면 물론 샘은 찾아보기도 힘들거니와 우리의 대통령은 여론을 의식해 그러말을 내뱉지도 않을 것이다. 분명 시대가 지남에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샘뿐이 아닌지 모르겠다. 너무 강하여 결국 부러지고 말 것같은 성품을 지닌 친척이 전통을 고집하며 높은 눈을 고수하다가 세상과 소통하지 못해 결국은 외국인 며느리를 보게 된다는 씁쓸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뿌리 너무 깊은 나무]에는 참으로 안타가움이 가득하다. 세상이 변함을 알고 그 변함에 전통을 접목할 줄 모르는 우리네 어르신들을 종종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제목을 통해 그 강조함을 더하고팠던 작가의 의중은 나는 헤아린 것인지는 모르겠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와 [호모 비아토르]는 현재의 모습과 그리고 다가올 미래를 예시하고있다고 할까? 벌써 이 책이 나온지 4년이 지났으니 후자의 소설에서 말하는 시대의 모습은 흔한 광경이 아닌가 싶다. 승승장구 세상에 부러울꺼 없이 살아온 것으로 보여지는 50대 남자가 명예퇴직후 어느날 갑자기 사라진 일을 통해 세상과의 소통,혹은 세상과의  단절이 얼마나 무선운 결과를 (우리 안에 내재해 있는 폭력의 욕구에는 안전판이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폭력 욕구의 내압이 한계에 달하면 안전판이 열린다.이것이 물리적, 정신적 폭력이다. 129쪽) 보여주는지 말하고 있다.
성공이라는 것에 즐거움이 있어야 진정한 성공인 것을, 세상과의 소통이라 여겨지는 많은 것이 실은 내적으로는 깊은 단절을  의미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아마도 모른채 살고 있을 것이다. 말이 많을때 실은 외로운 것을 홀로 있을때 누군가 다가와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을 살면서 그런 면까지 신경쓸 수 없다고 말하는 이도 있으리라. 그렇치만 한 순간을 지나치는 반복에 어느날 전부를 잃어버리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한다.
마지막의 [호모 비아토르]는마치 We are the world를 듣고 있는 듯 한 느낌이 많다. 세상은 점차 벽이 사라진다고 한다. 중성의 개념이 강해지고 복잡한 일들을 한꺼번에 처리하고 싶은욕구는 점점 편리성이 가득한 개발품들을 쏟아내고 있다. 소설속 주인공 박한우는 일찍 세상의 변모에 눈을 뜬 사람으로 점점 박한우는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임금님을 시작으로 끝에는 세상이 하나로 이어지는 인터넷이 등장한다.

이윤기 작가는 과거를 지나 현재로 오는 이 소설을 통해 전통을 고수하자는 말도 미래에 발빠르게 대처하다는 말도 직접적으로 하려한 것은 아니리라.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접속사 같은 그것,소통을 이야기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이렇게 급속도로 변모한다. 화상통화가 멀게 느껴졌던 그 언제가를 기억할 수 없다. 원하면 뭐든지 손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세상이 우리의 현재 모습인지 모르지만 나는 아직도 가끔씩 확인하지 않으면 모르는 음성메세지를 간직했던 호출기가 그립고 보여지는 모습을 위해 잔꾀를 일삼는 광고를 만들어내는 신기종 핸드폰이 불편하게 느껴진다. 점점 구세대 집단에 속하는지 모르겠다. 우리 시대의 초상은 하나만이 아니기에 나의 모습도 이 시대의 진정한 초상이라는 다소 아날로그적인 생각을 놓지 못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