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피는 고래
김형경 지음 / 창비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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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피는 고래>라는 제목에서 파스텔빛 아름다움과 알 수 없는 슬픔이 전해진다.  그것은 아마도 작가 김형경이라는 이름이 함께라 그러하리라.  그녀의 소설에서는 항상 슬픔이 묻어났다. 선연한 빛깔의 슬픔보다는 보일듯 말듯 조금 혼란스러운 슬픔이었다. 가슴속 깊은 곳에 내재된 트라우마를 간직한 이들이 세상과 소통하고자 애쓰는 모습이 가득했고 끈임없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헤메는 이들이 존재했다. 오랜만에 선보인 소설, 책을 여니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그녀가 보인다.

 열 일곱, 니은은 이제 막 주민등록증 사진을 찍은 소녀다. 환하게 웃는 모습은 이제 사진속에서만 존재한다. 갑작스레 닥쳐온 슬픔, 준비할 시간도 준비하고 싶지도 않았다. 교통사고로 한꺼번에 부모를 잃은 마음을 안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그것도 열 일곱, 소리 내어 말해도 핑크빛이 물드는 나이다. 세상 어디에서도 니은은 아무런 의미를 찾지 못한다. 하루 하루 꿈속에서 엄마, 아빠가 들려준 이야기 속 바다를 본다. 

 아빠의 고향 처용포에서 니은은 오랜시간 고래를 잡으며 살았던 장포수 할아버지와 식당을 운영하며 한글을 배우는 왕고래 할머니의 도움을 받으며 지내게 된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거운 시간을 보낸다. 학교도 친구도 친척도 니은을 달래줄 수 없고 니은을 이해할 수 없다. 송곳처럼 날카로운 마음, 세상을 향한 분노를 장포수 할아버지와 왕고래 할머니는 너그러이 받아주고 니은의 마음을 위로하며 쓰다듬어 준다. 장포수 할아버지와 왕고래 할머니에게도 위로 받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고래를 향한 할아버지의 애정, 죽은 남편에 애절한 할머니의 사랑을 니은에게 꺼내놓는다. 

 17살 소녀가 겪기에는 너무도 큰 슬픔을 작가 김형경은 고래잡이가 유명했던 시골 어촌 처용포의 자연을 담아 치유하고자 한다. 곳곳에 자연이 남겨준 처용과 황혹에 관한 이야기, 존재가 확실히 않은 바다생물, 그 안에서 평생 살아온 사람들의 삶을 통해 니은이 조금씩 조금씩 성장하도록 하고 있다. 니은의 너울 같던 마음이 잔잔하게 바뀔 때 니은은 어른이라는 문을 만날 것이다.

 할머니, 할아버지에게도 17살이 있었을까, 그 때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궁금해하는 니은의 마음은 내가 나의 주변 사람들에게 내 나이에 무얼했나고 묻는 것과 같다. "여든살이 돼도 맘속에는 모든 나이가 다 있다. 열살 때 생각을 하면 열살이 되고 마흔 살 때 생각을 하면 마흔살이 되지. 열살처럼 세상을 보다가, 마흔살처럼 세상을 보다가 한다." 257 장포수 할아버지의 말처럼  책 속의 니은은 17살 소녀이지만 니은을 통해 내 모습을 보기도 한다.  한 치 앞도 모르는 내일, 그 두려움을 이겨내고자 지금 이 나이에 남들은 무슨 생각으로 살았을까 궁금한 우리네 모습과 닮았다.

 "기억하는 일은 왜 중요해요?"
 "그것을 잘 떠나보내기 위해서지. 잘 떠나보낸 뒤 마음속에 살게 하기 위해서다." 236쪽

모든 것을 마음에 담고 살수는 없다. 그것은 이별일 수도 있고 사랑일 수도 있고 상처일 수도 있다. 니은이 부모님을 기억하고 떠나보내야 하는 것 처럼 우리의 삶은 떠남의 연속일지 모른다. 떠나보냄과 동시에 새롭게 살게 하는 것들.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삶이라는 것을 니은도 알게 될 것이다. 

 니은에게
매일 희망을 보낸 영호 언니의 문자는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내라고 말하듯 내게 전화기를 만지작 거리게 한다. 누구도 치유할 수 없을 것 같은 크나큰 상실과 슬픔도 때로는 작은 메모, 지속적인 작은 관심이 치유의 약이 되어 슬픔을 무너뜨릴 것이다.  내가 보낸 문자도 누군가에게 즐거움과 격려가 되어 희망의 존재로 남을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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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할 권리
김연수 지음 / 창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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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낯선 곳에서 낯선 이들과의 만남은 계획하지 않았던 일상을 만들기도 한다. 그것은 때로는 불쾌감이나 당혹감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묘한 설렘과 기대감을 불러오기도 한다. 전자를 기대하는 이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자신을 모르는 곳에서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고자 떠나는 여행은 새로운 곳에서 삶을 정착하게 만들기도 하고 자신이 돌아와야 할 곳이 있음을 감사하게 만들기도 한다. 여행, 예전에는 알지 못했던 많은 뜻을 담고 있는 의미심장한 단어로 들린다. 소설가 김연수가 쓴 산문집 <여행할 권리>를 읽는 내내 이상은이 노래하는 <삶은 여행>이라는 말이 자꾸만 떠오르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소설가가 쓴 산문은 여타의 산문집보다 우선적으로 주목을 받는다.  작가의 기존 작품을 만나고 특히나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책을 만남으로 작가와의 즐거운 대화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김연수를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아직 그렇다 라는 답을 할 수 없는 독자는 이 책에 대해 한 권의 여행기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은 여행기가 맞다. 그러나 보편적인 여행기와는 차별적인 여행기라 할 수 있다. 주제가 있는 여행기이며 지극히 김연수적인 주관적인 글이라는 점이다. 물론 모든 글이 그러하겠지만 여행할 권리는 특히나 그러하다

 김연수가 생각하는 문학에 대해  어슴푸레 알 것 같다고 하면 이 책이 쉽게 만나질까? 그가 지향하는 국경, 안과 밖을 구분하는 그곳에는 문학이 있었다. 그가 쓰고 싶은 문학, 그가 갈망하는 문학,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게 하는 그것은 문학이었다. 그가 떠나는 여행은 문학 여행은 그의 잠재된 의식을 깨움과 동시에 확신을 심어주는게 아닐까 싶다. 일본의 도쿄에서 죽은 이상을 찾아 떠난 그는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1936~37년을 헤메고 있는 조선 청년과 같았고, 25살 청춘인 독일 청년 푸르미를 만난 그곳에서 그는 25살 청춘을 떠올린다.

 스웨덴으로 입양되어 작가가 된 아스트리드를 만난 서울에서 같은 피가 흐르지만 한민족이라고 강하게 말 할 수 없는 현실을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은 문학이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작가 김사량의 중국 망명의 여정을 따라 여행하면서 그가 꿈꾸는 것은 김사량이 그러했듯이 김연수가 경계를 넘어선 문학을 소망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낯선 작가들을 검색하며 지명을 검색하며 어렵게 김연수의 문학 여행기를 따라가고 있었다. 적지 않은 볼멘 소리가 목에 걸려있다. 단순한 여행기는 아니지만  지역적 특색, 적어도 방문했던 도시의 위치에 대한 정보에 대해 인색하지 않았다면 이 책은 더 많은 점수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김연수가 그러했듯이 이 책을 읽고 누군가는 이 책을 통해 만난 독일 밤베르크에서 프랑크푸르트, 미국 캘리포니아 주 버클리, 중국 화뻬이셩 후쟈좡 마을을 향해 떠날 결심을 하고 있을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같은 곳을 또 다른 시대에 같거나 전혀 다른 시선으로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런 것이 여행의 의미는 아닐까?

 혹시 한국에서 자꾸만 문학이 죽었다고 말하는 까닭은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쓰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문학이란 말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만 쓸 수 있을 때 죽어가는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하면 우리가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써야만 하는 하지 않을까? 본문 201쪽
 
 김연수가 쓴 글의 느낌을 그대로 만나게 된다면 그 황홀감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김연수는 문학을 하는 사람이다. 그는 어디를 가든 문학을 통해 자신을 찾고 자신을 만들어 낸다. 그러기에 이 글에서 김연수라는 글을 탄생시킨다. 그러한 이유로 이 책은 양분된 독자를 만들어 낼 것이다. 그를 열망하거나 조금 실망하거나. 갑작스레 여권 사진을 찍고 싶은 욕망이 인다. 아니, 그곳이 아니더라도 어디론가 새로운 나를 발견할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내게도 여행할 권리가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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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하는 식물 - 세상을 보는 식물의 시선
마이클 폴란 지음, 이경식 옮김 / 황소자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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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달 전 저자 마이클 폴란의 <잡식 동물의 딜레마>를 읽고 이 책을 꼭 읽어보고 싶었다. 그 책에서 받은 강한 인상 때문이기도 하지만 전작에서 그가 말하고 있는 내용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또한 욕망하는 식물이라는 제목과 더불어 세상의 보는 식물의 시선이라는 부제가 더 호기심을 자극했다. 한 해 한 해 나이를 들면서 작은 텃밭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직접 기른 상추나 고추, 오이를 씹는 상상만으로도 입 안에 침이 고인다. 연두색 고운 빛을 띈 상추, 까슬까슬한 오이는 과연 어떤 욕망을 가지고 있단 말일까? 

 저자는 사과와 튤립, 대마초, 감자 네 가지의 식물을 통해 인간과 식물이 함께 살아온 역사를 추적하고 앞으로 식물이 인간의 삶에 미칠 영향을 고민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네 가지의 식물의 이름을 들었을 때 딱히 욕망을 가진 식물이라고 여겨지는 것은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식물로 대두되는 대마초 하나뿐이었다. 민간 요법으로 약이 되는 몇 가지 식물들이 욕망을 꿈꾸는 식물이라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나의 무지와 선입견이 아닐까 싶다.

 사과를 떠올리면 에덴 동산이 자동으로 그려진다. 아담과 이브는 선악과라는 열매를 먹게 됨으로써 고통을 부과 받았다. 물론 선악과가 사과라고 성경에는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우리는 대체로 그렇게 알고 있다. 그 정도로 사과는 최초의 과일처럼 그렇게 풍성한 과일이었음을 추측하게 된다. '조니 애플시드'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존 채프먼에 의해 사과는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게 된다. 사과도 감처럼 접붙이기를 통해 새로운 종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걸 사실 알지 못했다. 그냥 사과씨에서 맛난 열매를 맺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맛있는 사과였겠는가 의문이 들기도 한다. 벌과 바람을 통한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도 했겠지만 사과의 욕망은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들을 사랑하게 된 인간으로 인해 사과는 더 많은 번식을 꿈꾸었고 발전을 꾀하게 된다. 다양한 색깔과 못생긴 열매도 있었으리라. 지금의 사과의 맛은 많은 돌연변이에 의해 생겨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인간은 달콤한 맛의 사과를 선택한다. 그 중심에 자연 그래도 씨를 심어 재배를 하고 사과를 세상에 널리 퍼뜨린 존 채프먼이 있다. 

 맛있는 과즙으로의 유혹인 사과는 그 욕망이 있다고 치면 수줍은 듯 단아한 튤립은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을까? 한낱 꽃에 불과한 식물이 한 나라의 역사를 뒤흔들었다면 믿을 수 있을 것인가? 단색의 꽃을 피우던 무리들중에 엉뚱하게도 바이러스에 의해 생긴 복잡한 깃털무늬와 불꽃무늬는 17세기의 당시에는 아마도 신비의 기적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런 변종 튤립의 알뿌리의 가격상승으로 인해 암흑적 뒷거래와 경매가 판을 치고 그 안에서 사람들은 튤립이라는 식물에 조종되고 있었던 것이다. 한 없이 올랐던 튤립은 언젠가는 내려가기 마련인데, 인간의 소유욕과 욕망이 참으로 어리석지 않은가 생각한다. 그런 인간의 욕심에 의해 지금 이 세상에는 튤립의 아름다움이 가득하다.

 [ 꽃은 본성적으로 은유적인 의미의 거래를 한다. 그래서 야생화가 무성하게 피어 있는 초원은 인간이 부여하지 않은 의미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정원에서는 이런 의미들이 더욱더 많이 넘쳐난다. 정원에 피는 꽃들은 벌이나 박쥐 혹은 나비뿐만 아니라 인간이 가지고 있는 좋음 혹은 아름다움에 대한 온갖 인식들을 겨냥해서 자기 의도를 관철하기 떼문이다. 아주 오래전에 꽃과 인간이 거래를 텄고 이 결합의 결과, 즉 서로의 욕망이 경이롭게 공생함으로써 나타난 것이 바로 정원에 피는 꽃이다. 135쪽]

 튤립에 이은 대마초가 이 책에서 가장 궁금한 식물이었다. 독을 갖게 된 식물은 아마도 동물과 또 다른 식물에게 있어 자신을 지키기 위한 작은 방어책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쓴 맛이 있는 식물, 먹으면 두드러기가 나는 것들을 마구 먹지는 않으니 말이다.  대마초가 무엇 이길래 금기의 식물임에도 불구하고 현재를 사는 많은 이들은 그들의 유혹의 손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지, 대마초를 구성하는 어떤 물질이 인간에게 기억의 감소와 흥분을 주는지 알고 싶었다. 마이클 폴란이 한 때 대마초를 피웠었다는 이야기는 새삼 놀라웠고 그가 법적으로 금지된 대마초를 심었다가 경찰에 발각될까 전전근긍하는 이야기는 웃음을 자아냈다. 법적 금지인 식물을 키우고자 하는 강력한 욕망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많은 마약류의 식물들 중에 유독 대마초가 심한 탄압 아닌 탄압을 받게 된데는 어떤 배경이 있었을까. 그것은 튤립의 알뿌리로 인한 혼란과 같은 것이리라. 식물이 가진 힘은 참으로 강하고도 두려운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고대 철학자들이 철학적 개념을 정립할 당시 취했던, 중세 마녀와 마술사들의 사용했던, 그리고 현재의 예술가들이 흡입하는 그 식물들의 가진 힘에 의해 이뤄지지 않았나 조심스레 추론을 하는 사람들의 글과 자의 글에 그 가능성에 고개를 끄덕인다. 현재는 이 마약성 식물이 가진 성분을 통해 질병의 고통을 줄이는 약으로 쓰이고 있다. 

 앞 선 3가지 식물에 비해 감자는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먹거리다. 식탁에도 자주 오르고 패스트 푸드점에서는 단연 인기가 많다. 가장 인간적인 식물이 아닐까, 생각한다. 또한 식물을 지배할 수 있다는 인간의 욕망을 쉽게 만나게 되는 부분이었다. 땅속에서 자라는 열매, 흉년으로 기근이 심할때도 언제나 먹을 수 있는 고마운 식물이 아니던가. 저자는 스스로 살충 성분을 생성하도록 조작된 감자씨(뉴 리프)를 직접 심으면서 '뉴 리프' 를 대량으로 재배하는 농장과 유기농으로 감자 농사를 짓는 농부를 만나게 된다.

 유전자 조작으로 이뤄진 '뉴 리프'는 단연 최고의 발명품이라는 것을 인정하지만 자연이라는 곳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자연은 또 다른 살충 성분을 필요로 하는 또 다른 벌레, 또 다른 바이러스, 전염병을 몰고 올 것이다. 그것은 과학 기술이 발전해도 막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생물학적 다양성을 유지하며 여러 감자씨를  심어 자연이 부릴 수 있는 모든 변덕에 대비하는 것이 자연을 통해 배우는 사실이다. 결국 자신이 키우고 수확한 '뉴 리프' 를 자신과 주변 사람들이게 대접할 요리에 쓰지 못한다는 것은 저자 뿐 아니라 누구도 당연한 것이다. 

 이 책은 <잡식 동물의 딜레마>에 비하면 조금은 지루했다. 내가 식물에 대한 관심이 적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식물을 먹고 사는 동물을 취하고 있는 인간에게 식물은 가장 기본적인 것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저가가 선택한 4가지의 식물을 통해서도 놀라운 사실들을 알게 되었는데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식물의 세계에는 얼마나 경이로운 것이 숨어있을까?

 식물들은 스스로 더 많은 후손을 퍼뜨리지 못하기에 때로는 독을 품게 되기도 하고 벌과 나비를 유혹하기도 하고 가장 똑똑한 동반자인 인간을 이용하기도 한다. 인간 또한 식물들을 이용해 자신들에게 필요한 맛과 향을 취하게 되고 그들을 지배할 수 있다는 욕망으로  인간에게 유리한 유전자로 조작된 많은 식물들을 개발하고 있다. 그러나 그 조작된 식물들이 인간 모르게 자연의 힘으로 서로 합쳐 새로운 돌연변이를 만들 수도 있고 그것이 인간에게 위험을 몰고 온다는 것을 막을 수 없음을 안다. 그러기에 '존 채프먼'이 사과가 자기에게 무언가를 베푸는 것처럼 자기 역시 사과를 위해서 일을 한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이해한 것처럼 인간은 수많은 식물들과 서로 공진화하면서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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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섭이 가라사대
손홍규 지음 / 창비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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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들고 한참이나 표지를 바라보았다. 이것은 유전자 변이를 일으킨 소인가, 인간인가. 점점 더 빠른 속도로 확산되고 있는 AI 로 인해 많은 닭과 오리, 가금류들은 살처분되고 있으며 오늘도 미국 쇠고기 수입 반대의 촛불 시위는 계속되고 있다. 우리의 머리속에는 쓰러져가던 끔찍한 소의 모습이 아직도 남아있다. 혹 광우병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게 아닐까? 이런 가상의 시나리오를 쓰게 하는 이 책( 봉섭이 가라사대, 창비출판),  내게 어떤 말을 걸어올까. 

 우선 표제작인 '봉섭이 가사라대' 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봉섭의 아버지, 응삼은 소를 키우면 살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의 한 모습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그가 소와의 인연이 각별하다는 것이다. 아들, 봉섭이가 소를 팔아 가출을 했을 때도 담담하게 새로운 우사를 지어 소를 기르고 그러다 소 싸움꾼이 되었다. 자신의 품을 떠난 자식들, 그리고 아내. 그의 곁에 남은 것은 말썽꾼 아들과 우직한 눈을 가진 소뿐이었다. [털빛도
여느 황소보다 짙은 암갈색을 띠고 있으며 골격부터가 남달랐다. 134쪽]  
 
 이처럼 자신을 알아주는 소, 점점 응삼은 소를 닮아간다. 소처럼 되새김질을 하는 응삼, 사람들을 대신해 농민회 집회에서 활보하던 소. 이제 소와 응삼은 하나나 마찬가지다. 광우병과 수입쇠고기로 인해 소 값은 더 폭락한다. 소를 도축업자에게 넘기자는 봉섭의 제안에 마지못해 수락한 것은 자신 스스로의 죽음과도 같은 것이다.  어디 소와 닮은 사람뿐이겠는가. 생명줄처럼 여기는 닭과 오리를 살처분하는 사람들의 모습 또한 그네들과 함께 평생을 살았으니 그네들을 닮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소를 잃은 사람들, 닭을 묻은 사람들, 그들이 머물 곳은 어디인가.  

 또한 상처나 슬픔을 모두 자신만의 푸른 괄호속에 넣어 버린 한 촌부(村婦)의 이야기를 그린 '푸른 괄호'는 어떠한가. 살기 위해 자식을 키우기 위해 농작물에 농약을 치고 그 농약에 병들어버린 삶은 누가 보상해 줄 것인가. [엄마 몸 속에 농약이 쌓여 있으면 얼마쯤은 내 몸에도 흘러들어왔겠지.  하긴 내 몸에 농약이 쌓여 있다면 그게 엄마 탓이겠어. 이십칠년 동안 내가 먹은 것들 떄문이겠지.207쪽] 그들에게 질책의 손가락을 겨눌 이는 아무도 없다.

 이 두 단편만으로도 소설가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알게 된다. 우리 시대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그들은 명확하게 짚어낸다.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하고 틀리다라고 말하는 편견과 오류에 대해 작가 손홍규 '이무기 사냥꾼', '뱀이 눈을 뜬다' 는 소설을 통해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우리의 태도, 고용이라는 이름으로 비정규직, 계약직, 임시직으로 이어지는 내몰림을 방관하는 정부를 고발한다. [우리 할아버지, 죽은 척해서 살아났어요. 인도군 들어올 때도, 사람 많이, 죽었어요. 우리 아버지, 죽은 척해서 살아났어요. 신의 뜻으로, 살아났어요. 내 동생 호랑이, 죽을 때, 나도 아버지 옆에서, 죽은 척했어요. 죽는 거, 부끄럽지 않아요.  언젠가, 모두, 죽어요. 죽으면, 고통에서 풀려나요, 그래서 살아남아요. 죽고, 살고, 다 하나예요.99~100쪽] 살아남기 위해 죽은 척하는 모습, 일해야 하기에 수치심과 모욕감을 삼켜야 하는 많은 이들의 현실을 세상에 드러낸다.
 
 이제는 역사의 한 페이지로 점점 잊혀지는 80년 광주 사태에 대한 이야기를 최후의 테러리스트 최초의 테러리스트 테러리스트들 이라는 연작소설은 광주 사태를 직접 겪은 이들로 이어진 2세대, 3세대의 내재된 슬픔을 엿보게 한다. 소설의 시작을 보면 1980년의 5월 18일 광주와는 상관없는 위싱턴주의 쎼인트헬렌스 화산의 폭발은 성층권까지 올라간 화산재는 아직도 세계를 떠다니고 있다. 251쪽 이처럼 생뚱맞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라는 믿음을 준다. 광주가 남 상흔은 고엽제나  원자폭탄보다 더 깊게 뿌리 박혀있음을 강조하고 싶은 표현이다.

 손홍규소설집 '봉섭이 가라사대'는 의미있는 소설집이다. 80년대를 겪지 않았어도 그 시대는 우리가 정확하게 알아야 하는 역사이고, 미국과의 FTA재협상을 외치는 촛불을 든 지금의 고등학생들은  또 하나의 역사가 될 것이다.  손홍규는 시대를 바로 보는 눈, 그리고 직언할 수 있는 손을 가졌다.

"소설이 무엇인지 누가 확신 할 수 있을까. 소설의 정의는 지금이 순간에도 수정되고 있는데. 언젠가 세월이 흐르면 그때의 소설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소설과는 전혀 다른 그 무엇이 되겠지. 그리하여 결국 소설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삶이란 무엇인가, 행복이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처럼 신비로워지겠지."  68쪽 이 소설집을 대표하는 이 한 문장이 우리에게 또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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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자줏빛 소파
조경란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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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경란의 ''를 읽으려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도 이 책을 만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혀'에 대한 뜨거운 소문에 휩싸여 '혀'를 만나기 위해 '국자 이야기'를 읽었고 뒤이어 혀를 만났다. 그리고 이제 앞서 만난 책을 이어 '자줏빛 소파'를 손에 들었다. 2007년의 '혀'와 2000년의 자줏빛 소파는 두 소설 사이의 긴 시간에서 느껴지듯이 그 느낌이 많이 달랐다. 그녀의 초기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자줏빛 소파를 비롯한 9편의 단편에서도 그녀만의 그려낼 수 있는 사물에 대한 감각적인 묘사는 여전했지만 이 소설집에서는 빛이 사라진 어두운 그림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나의 자줏빛 소파 : 편지 쓰기의 형식을 빌어 누군가에게 자신의 내면을 쏟아내는 소설이다. 말로 할 수 없는 세세한 감정 하나 하나를 드러내고 있는 것은 혼잣말을 하는 것과 같아 그것은 그녀가 외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방법으로 보여진다. 자신의 소소한 일상을 담담하게 써내려가는 그녀를 상상한다. 홀로 앉아 뜨개질을 하는 그녀를. [잎이 지고 나면 꽃이 피고, 꽃이 지고 나면 잎이 지고 마는 식물이 있습니다. 잎과 꽃들은 서로를 그리워하지만 결코 만날 수 없습니다. 34족 나의 자줏빛 소파] 닿은 듯 하면서 닿지 않는 꽃과 꽃잎처럼 그녀는 편지를 수신 할 그 누군가와 닿고 싶은 소망이 있는지도 모른다. 이 소설을 읽고 나니 나의 이야기를 들어줄 이름 모르는 누군가에게 긴 장문의 편지를 쓰고 싶은 생각이 몰려온다.

 망원경 : 세상 사람들의 소식을 연결해주는 곳인 우체국에 근무하는 주인공. 그러나 정작 그는 세상과의 소통이 두려운 사람이다. 매일 매일 할머니의 편지를 기다리며 우체국에 오는 계집아이도 그와 다르지 않다. 목에 건 망원경으로 세상을 보려는 그. 아름다운 세상을 바로 보지 못하고 망원경으로만 바라보려 하는 그. 그가 진정으로 보고 싶어하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유리 동물원 : 가장 기억에 남는 소설이었다. 오피스텔 관리인의 자격으로 열쇠를 가진 주인공은 남몰래 그네들의 집에 들어가 청소를 하기도 하고 남잠을 자기고 하며, 돈이나 귀금속을 몰래 훔쳐나오기도 한다. 유리 동물원으로 그려진 오피스텔, 인간의 훔쳐보기 심리, 집 밖과 집 안에서 그려지는 사람들의 이중적인 모습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소설. 그러나 과연 유리 동물원이라는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가난한 친정,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남편, 그리고 오피스텔이라는 똑같은 구조 속에 살고 있는 다른 형태의 사람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도 어렵지만 자신의 행동조차 스스로에게 납득시킨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새삼스럽게 깨달아지는 기분이었다. 164쪽 유리 동물원] 자기 자신 조차 자신을 이해 할 수 없는 주인공의 삶은 무기력하기만 하다.  무거운 열쇠 꾸러미를 내던져버리는 그녀는 무기력한 자신의 삶을 잠가두었던 열쇠도 같이 버린 것일까? 자꾸만 그녀가 생각난다.

녹색 광선 : 같은 날 같은 시각, 자신을 둘러싼 공간의 사람들에게 모두 단수가 된다. 그러나 나를 제외한 모든 이는 그것을 대비하고 있고 나만 고립된 느낌이다. 애인과의 이별, 세상과의 단절. 헤어진 그녀의 목소리를 찾아 매일 전화를 건다. 그러나 그녀를 찾을 수 없다. 단수가 되어도 식당은 여전하게 장사를 하고 주인집은 커다란 물탱크에 그에게 없는 물이 가득하다. 지저분한 집, 악취가 나는 집, 그녀가 없는 집, 그에게 필요한 것은 어디에도 없다. 

 피아노 조율을 하며 한 마리의 강아지와 살고 있는 여자의 상처를 들려주고 있는 아주 뜨거운 차 한 잔  이승과 저승의 중간 공간에 헤매는 망자가 화자가 되어 사랑하는 남자를 주시하고 그의 행동을 묘사하고 있는 잔의 밑바닥에 남아 있는 커피 찌꺼기의 무늬  아버지의 죽음, 동생의 이민, 그리고 남겨진 주인공와 늙은 노모. 무미건조한 일상속에 날아든 낯선 소녀의 죽음으로 인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되는 식물들.  내게는 난이한 소설로 기억되는 오늘의 요리, 물고기 아파트.

[가슴 밑바닥에 묻어둔 지옥 하나 없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냐고, 그런 말들을 그렇게 쉽게 해서는 안된다. 224쪽 아주 뜨거운 차 한 잔] 누군가를 알아가고 그와 소통하기 위해서 우리는 매일 말을 하게 된다. 그러나 열지 말아야 할 깊은 문은 두드리지 말아야 한다. 시간이 흐른 뒤 진정한 소통이 이뤄지는 순간, 그 문은 자연스레 열리게 될 것이다. 세상과의 소통, 그것이 이 소설이 내게 건네는 말이 아닌가 싶다. 간절하게 필요한 소통. 더이상 혼자가 아닌 삶.

조경란의 소설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불안정하고 위태로와 보인다. 누군가와 이별하고 누군가를 잊지 못하고 누군가와 소통하기를 간절하게 바란다.  고립된 공간에 홀로 있는 그들, 몸부림치는 그들의 모습이 눈물겹다. 끊임없이 누군가를 찾아다니고 부르며 그리워하는 이들. 그들에게 빛이 필요하다. 조경란, 아마도 이 소설집을 쓸 당시 그녀에게도 빛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자줏빛 소파'에서의 짙은 그림자는 '국자 이야기'를 통해 조금 옅어지고 있었다. 조경란이 '혀'를 통해 보여준 사랑에 대한 욕망과 열정의 뒤를 이을 소설에는 어떤 빛이 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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