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겁다. 너무 무겁다. 너무 무거워서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 볼 수 없구나.

오전에 길을 걷고 있었는데, 문자가 왔다.

문자를 보고 멍해있다 이 노래가 생각났다. 왜 이 노래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 세상이 그 시절 미싱만큼이나 미친듯이 돌고 있어서 그런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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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블로그에 들어와 자판을 두드려본다. 사실은 가끔 들어와 두들겨보기도 하는데 곧 그러다 만다. 블로그의 맛을 잃었다고나 할까. 완결지을 수 없다는 생각속으로 나 자신이 함몰되어간다. 그럴 필요도 없는데도 말이다. 그러니까 완결 지을 필요말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지금 자판을 두드리는 이유는 나귀님의 번역과 번역론에 대한 글 때문이다.

RSS 구독을 통해 글들을 즐겨보고 있는 알라딘 블로거들 중 콸리어(qualier)님과 나귀님이 <번역의 탄생>이라는 책을 놓고 의견 대립(아닌 대립)이 생겼다. 콸리어님의 글과 나귀님의 글을 따로 따로 읽으면 두 분의 각자 생각에 상당 부분 공감이 가는데, 같이 엮어서 읽으면 뭔가 걸리적거린다. 두 분의 생각이 직접 부딪히는 것도 아니고 뭔가 살짝 어긋나있다고나 할까.

나귀님의 첫 글 : 부실한 미녀와 부정한 미녀
콸리어님의 답글 : 부실한 "미녀"는 커녕 부실한 "추녀"만도 못한 - 나귀 님 비판에 답한다
나귀님의 두번째 글 : "번역"과 "번역론" 사이...


사실, 두 분이 놓고 이야기하는 대상은 <번역의 탄생>이라는 책이 아니라, 이 책의 저자인 '전문 번역가' 이희재씨다. 나귀님은 이희재씨에 대한 기대감이 서서히 줄어들고 있다고 했고, 콸리어님은 책도 읽어보질 않고 무슨 소리인가 라고 반응을 보인 상태다. 그런데 사실상 콸리어님이 말씀하신 나귀님의 어처구니 없는 리뷰는 리뷰가 아닌 그냥 단상쯤으로 보이는데, 콸리어님은 책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나귀님이 보인 이런 단상 조차도 용납할 수 없으신 모양이다. (실제로 이 글들은 리뷰 항목이 아닌, 마이 페이퍼 항목에 들어가 있다. )

그러니까 어제 나귀님이 새로 올리신 응답 비스무리한 글과 그 전의 콸리어님의 글, 그리고 그 이전, 두 분의 거리감이 느껴지는(그러니까 어긋나서 완정탄성충돌이 아닌 각도가 삐끗하니 틀어져 버린) 논쟁의 시초가 된 나귀님의 글, 이 세 개의 글을 읽고 종합해보면 (물론 내 생각이다), 사실 각 글들이 관련지어져 있는 글은 아니다. 나귀님의 처음 글은 <번역의 탄생>이라는 신간을 보고 떠오른 번역가 이희재씨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들이 들어가있고, 콸리어님의 글에는 <번역의 탄생>이라는 책이 나와 기대감에 차 있는 상황에서 나귀님의 글을 읽고 왠지 찬물로 끼얹짐을 당한 모양새가 느껴진다. 이 상황에 나귀님은 어제 새로이 장문의 글을 올리셨는데, 번역과 번역론에 대한 나귀님의 생각을 다시 짚어본 글로 보인다. 이 글속에는 번역가 이희재씨에 대한 이야기도, 그의 새책 <번역의 탄생>의 직접적 언급도 없다.

개인적으로 나는 두 분의 글에 추천을 눌렀다. 콸리어님은 "벌써 이런 엉터리 글을 여덟(8) 명씩이나 추천하지 않았는가! "라 고 본인의 글 속에서 나귀님의 글을 8명의 사람들이 추천한 것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셨는데, 예전 진짠지 가짠지 모를 하나의 설화가 떠오른다. 황희 정승이 싸우고 있는 머슴들의 말을 듣고, "듣고보니 니 말도 옳고 또 너의 말도 옳구나." 라고 대답했다던 그 설화말이다.

사실, 나귀님의 글은 번역론 이전에 번역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또 하나 이야기가 떠오른다. 바로 '이지 맨(easy man)'일화다. 이것도 많은 사람들도 알고 있겠지만, 예전 부시 전 미국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이 만났을 때, 부시 대통령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건냈던 단어들이다.

얼마나 쉬운 단어인가. 그럼에도 정계와 미디어에서는 좀 시끌시끌했었다. 이게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상황이 전혀 다름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편안한 사람'과 '만만한 사람'의 차이는 실로 높은 산봉우리와 깊은 골짜기의 차이만큼이다.

이것을 생각한다면, 아무리 번역론에 대한 규칙이 세세히 정해져있다 하더라도 사람 마음을 알 수 없기에 완벽한 번역을 지향할 수는 없다. 다만, 이때에는 번역가는 두 가지 상황, 정치적 상황과 개인적인 친근함 정도의 차이에 대한 상황 설명을 독자에게 해 줘야 할 것이다. 심지어, 한국의 그 전 대통령이었던 김대중 대통령을 가리키며 부시가 말한 'this man'이라는 단어까지도 곁들여 설명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을 상대하고 있는 부시 대통령의 개인적, 국가적 감상까지도 번역가는 설명하는 것이 최선일 듯 싶다. 'easy man'이라는 두 단어에 얼마나 많은 주석을 달아야 하는지 생각만 해도 부담스럽다.

이런 것을 번역론이라는 단순히 단어 고유의 의미론과 통사론적인 면만을 놓고 번역에 대해 이야기해놓고 있는 책의 목차를 본다면,  책을 읽지 않고서도 성실성으로 어느정도 뭉그러뜨려 불만을 보일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나는 나귀님의 글에 추천마크를 누른 것이었고.

(물론 이 일화를 번역이라는 창조적 활동과 연계한다는 것은 약간은 무리가 있다. 이 일화를 이끌어 가는 것은 당사자(대통령)들의 말이고, 번역은 작가의 글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말과 글, 그 바탕에는 문맥이라든지 그 순간의 정황이 공통적으로 존재하고 있기에 소개한 것이다. 나귀님은 문맥의 이해라든지 정황에 대한 소개가 곧 번역가의 성실성으로 표현한 것이겠고...작가의 성실성에 따라 결국은 문맥 혹은 정황을 선택하는 독자의 몫은 작아질듯 하다.) 

하지만 콸리어님의 글에 또 동조를 할 수 있는 것이, 이런 것들 또한 번역의 또 하나의 자세일 것이고, 또 무슨 무슨 론에 들어갈 수 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런 자세 혹은 성실성이 <번역의 탄생>이라는 책 속에 언급이 되어있다면, 나귀님의 글 속에서 이희재씨를 언급한 것이 잘못임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니 앞 뒤가 안 맞을 수 밖에. (<번역의 탄생> 미리보기를 보니 저자인 이희재씨는 직역과 의역에 대한 고민도 보이고, 직역을 선호한다라는 글도 있었다.) 더 군다나 나귀님의 글을 리뷰로 보았다면 더욱 콸리어님도 불만을 가질 수 있다. 번역가라면 누구나 가지려 하고, 또 갖는다고 성에 차지도 않는 애매모호한 '성실성'에 대한 설명 부족을 이희재씨의 실력 부족으로 뒤집어 놓은 것으로 볼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나귀님의 글속에 숨겨져 있는 가시에 대한 불편함으로 콸리어님께 추천표를 눌렀다.

그리고 나귀님의 글을 기다렸다. 읽지도 않은 <번역의 탄생>이나 이희재씨에 대한 감상을 기대한 것이 아니라, 나귀님이 좀 더 보충설명을 해야할 필요가 있는 번역과 성실성에 대한 글을 말이다. 그리고 새로이 올라왔고, 읽고나서 또 추천을 눌렀다.

번역은 기술이기 이전에 번역가 스스로의 이해를 수반해야한다는 간단하면서도 또 쉽지 않을 그 말에 동조하면서 말이다. 물론 콸리어님과 나귀님의 실력에 비해 나의 영어실력은 아마 초등생 수준이겠지만, 영어를 접하면서 드는 생각은 전문가든, 비전문가든 크게 차이나지는 않을 것이다.

다른 블로거들도 종종 번역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한글 위주로 할 것인가, 영어 위주로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말이다. 한글 위주로 한다면, 독자들이 글에 대한 이해를 쉬이 접할 수는 있어도, 작가의 고유 언어의 참맛이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고, 영어 위주로 한다면 독자들이 애매모호한 읽기 상황에서 스스로 문맥 선택의 폭만을 넓히는 꼴이 될 것이다. 하지만 우선은 이해이고, 그 다음이 작가가 선택한 단어의 이유를 스스로 알아보는 것이 그나마 이상적이지 않을까 한다. 시간이야 많다면...

PS.

1. 두 분 글속의 가시는 아마 '일본식 한자를 대하는
번역가의 자세'쯤이지 않을까 한다. 여기에서 좀 삐끗한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책으로 나왔지만, 예전에 한겨레 칼럼에서 읽은 '공지영'작가의 <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의 한 토막을 보면, 음식점에서 단무지가 아닌 다쿠앙(다꽝)을 더 줄 수 있냐는 요구에 음식점 아주머니께서 질색하시며, 다쿠앙이 아니라 단무지라고 언급하신 에피소드를 읽고 뭐랄까 스스로 우리 언어의 한글 고유성을 위해 개인의 자유로운 언어 선택권에 제한이 가해지고 있지는 않은가라는 생각을 한적이 있었다. 물론 깊게도 생각도 하지 않았고, 당연히 이에 대한 답은 모른다. 그냥 그렇다는 것. 다른 외래어는 아무렇지도 않게 쓰면서 말이다.

(물론 모른다라고 언급은 했지만, 언어 순화는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나 또한 그렇게 쓰려고 노력도 하지만 잘 되지는 않는다. 이외에도, 외국인들이 우리나라 고유어(특히, 의성어와 의태어쪽...)를 굉장히 아름답게 보는 듯 하다...뭉클뭉클, 초롱초롱, 방방, 암튼, 유성음과 결합된 단어들이 귀엽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2.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은 한국식 한자와 일본어식 한자를 구분하는 능력을 우리는 정규 교육과정속에서 배우고 있냐는거다. 나의 경우엔 배워본적이 없다. 이공계라 그런지, 아니면 배움이 짧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배우질 못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종종 일본어식 어투의 사용에 대해 불만을 보인다. 그러니까 완벽히 일본어식이든 중국식이든 국어식이든, 한자 사용 용례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질 않다는 생각이다. 더불어 문장투도 그렇다. 요즘은 영어로 된 글들을 많이 보니까, 미국식 문장투(수동태라든지, 뭐 그런거..)도 많이 보인다. 글을 쓴다는 것은 그러니까 이 대목에서 모두 피고인일뿐.

2. 두 분의 블로그에 대해 잠깐 얘기해보자면, 콸리어님은 기대를 하며 기다리고, 나귀님은 기대를 하지 않으며 기다리는 정도이다. 무슨 의미냐면, 콸리어님은 과학쪽으로 여러 책들을 소개하고 있기에 기대된다는 의미이고, 나귀님은 그냥 읽는다는 뜻이다. 얘기치않은 글을 기다리며...

3. 이 글은 두 분께 트랙백을 보내진 않을 것이다. 이 글은 단지 서로를 향해 너무 가시를 들어대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또, 그냥 생각난 것들을 지나치자니 아쉬운 점도 있고 해서 적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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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해프닝』을 안보신 분은 이 글을 피해주세요. 이 글속엔 영화 전반적인 이야기들이 들어있을 뿐만 아니라, 나름대로 해석한 저의 생각이 들어있어서 향후 영화를 보실 때 재미를 깎을 수도 있습니다.

'엠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영화인 『해프닝』에 대한 포스팅이다.

심각하게 보다가 심심하게 끝나버린 영화.

영 화를 보며 무슨 의미를 찾거나 할 필요는 없겠지만, 기대한 영화를 재미없게 본 사람 중 일부는 분명 '기대심리'의 반발로 여전한 '기대심리'를 가질 것이다. 가령, '(재미는 없었을지 몰라도) 매우 어려운 영화였어. 의외로 어딘가에 중요한 메세지가 있을거야.'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래서 나 나름대로 해프닝에 대한 풀이를 해봤다. 순전 내맘이다.

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어떤 학생이 복도를 뛰어간다. 한 교수가 뛰어가는 학생을 붙들고 이야기를 건낸다.

교수 : "자네 뭐가 바쁘다고 뛰어가는가?"
학생 : "수업에 늦을 것 같아 뛰어갑니다."
교수 : "수업이 끝나면 뭐하려 하는가?"
학생 : "밥 먹어야죠.?"
교수 : "그리고는."
학생 : "나머지 수업 듣고 집에 가야죠."
교수 : "내일은?"
학생 : "똑같이 수업듣기위해 학교에 나와야죠."
교수 : "수업은 왜 듣나?"
학생 : "취직해서 좋은 직장에 가려구요?"
교수 : "그 후에는?"
학생 : "결혼해서 애 낳고 돈 벌면서 잘 살아야죠."
교수 : "그 후에는?"
학생 : "뭐..그렇게 살다가 죽겠죠."
교수 : "음...그러니까 자네는 죽으러 가기 위해 뛰어가고 있는 중이었구만."

이 영화에서 내가 살펴본 감독의 메시지는 의외로 단순했다. 말 그대로 '해프닝'이다. 그냥 벌어지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벌어진 일들간에 어떠한 순차성을 부여하고 영화적 소재로 써먹기 위해 일종의 (그리 중요하지 않는) 논리를 집어넣은 것이다.

예를들어 작년에 사고로 안타깝게 죽었던 사람들을 생각해보자. 그 많은 죽음들은 1년이라는 시간동안 불규칙한 시간 간격에 놓여져 있을 것이다. 이젠 죽음이 차지하는 시간과 공간을 압축시켜보자. 그러니까 지난 1년동안에 있었던 죽음을 하루로 몰아서 발생시킨다고 생각해보자. (불경스럽지만...) 정말 대단하지 않겠는가.

영화속에선 사람들이 자살을 한다. 모두 동일한 메시지를 받은 듯이 그 자리에서 죽을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하며 죽는다. 이게 포인트다. 냉정한 관찰자 입장에서 본다면 죽는 사람은 어이는 없지만 자연스럽게 죽는 것이다. 높은 곳에 있으면 떨어져 죽고, 가까이에 총과 같은 무기나 무기 될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을 사용하여 죽고, 자동차를 타고 있다면 장애물과 충돌하여 죽고 등등...

이 죽음들은 영화속에서 보여준 죽음이다. 사람들은 의외로 단순하게 죽는다는 것. 무슨 일이 일어나고 다음은 죽음이 찾아온다. 죽음은 해프닝의 결과이다.

:: 일상의 죽음

영화속에서 공사장이 등장한다. 그 공사장은 신축 빌딩인데, 건물 위에서 작업하고 있는 사람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무슨 메시지를 들은 것 처럼 아래로 뛰어내려 자살한다. 의미없는 다수의 죽음이다. 하지만 관객에겐 무의미한 다수의 죽음은 공포로 보여진다. 어이없이 그리고 의미없이 죽는 것. 그것은 정말 공포인 것이다.

이때 시간간격을 벌려보자. 영화속에서처럼 하룻동안 일어나는 순간적인 동시 다발적인 죽음을 1년으로 늘인다면, 영화속에서 보여주는 공사장 건물 위에서 떨어져 죽는 사람들의 숫자보다 더 많은 그리고 똑같은 방식의 죽음이 1년 내내 일어나고 있음을 우리는 미디어에서 주변에서 발견할 것이다. 매년 산업재해로 얼마의 사람이 죽는다든지 하며 떠들지 않는가. 1년 중 어떤 사람은 재수없게도 주위 물건에 의해 죽고, 또 어떤 사람은 동물원에서 사자에게 물려 죽는다.

일상의 죽음. 이것이야 말로 내 나름대로 해석한 샤말란 감독의 메시지다. 영화에서는 불규칙한 시간대의 수많은 죽음을 특정 시간대로 몰아버린다. 한마디로 죽음의 빅뱅(폭발)이다.

그렇다면 일상의 죽음을 짧은 시간안에 보여주려면 어떤 원인 혹은 자연법칙을 등장시켜야 하는가. 수많은 영화들은 재난을 등장시키기도 하며, 전쟁, 전염병과 같은 질병, 혹은 외계로부터의 공격등으로 수많은 죽음을 그린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그런거 없다. 다 자연스럽게 죽는 것이다(그러니까 일상에서 보는 흔한 죽음). 사고나서 죽는것, 나무에 목을 매어 자살하는 것, 빌딩에서 떨어져 죽는 것, 자동차 사고로 죽는 것, 이 모든 죽음들은 그냥 특별한 설명이 필요 없는 것이다. 한마디로 영화의 장치는 시간을 빨리 돌린 것이다. 그리고 어느 한 순간에 그런 죽음이 어느 한 순간에 일어나게끔 영화적 논리만 보여줄 뿐이다.

위에 교수와 학생간의 대화는 예전에 어디선가 읽었던 것과 유사하게 기억나는 대로 적은 것이다. 이 대화에서 교수가 하고자 하는 말은 싱겁다. 누군가는 언젠가 죽는다. 언젠가도 블로그 다른 포스팅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엔트로피의 작용의 결과다. 생물체에게 엔트로피가 높아지면 죽음이 찾아온다. 비가역적인 시간의 흐름은 우리에게 죽음으로 인도하는 안내자이다. 대화에서 학생은 순진하게도 늙어서 죽는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맞는 얘기다. 어이없는 해프닝만 일어나지 않는다면 말이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밝히지만, 나의 해석은 이렇다. 식물의 알수 없는 공격들. 그것은 자연이 가지고 있는 우주가 내포하고 있는 엔트로피가 증가한 결과물이다. 영화 해프닝은 수많은 죽음들을 짧은 시간안에 다룬다. 그만큼 그 시간대의 엔트로피는 상당히 높아져야한다. 엔트로피는 한마디로 무질서도를 나타낸다. 많이 모일수록 무질서해지며 이는 엔트로피가 상당히 높다는 의미이다. 이 엔트로피는 에너지의 효율(efficiency)과도 관계깊다. 엔트로피는 물리적으로 열량을 온도로 나눈 값이다. 이는 열역학 2법칙에 해당된다. 한마디로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이다. 나는 이 영화를 환경이나 가족을 테마로 한 영화로 볼 마음은 없지만, 어쨌든 이 영화에는 이것들이 포함되어진다. 다만 이것들은 주제가 아니라 소재이다.

영화에 너무 과학 이야기를 하는듯 싶겠지만, 이 영화가 과학자체를 이야기한다. 주인공인 마크 윌버그는 바로 과학 선생님이다. 그래서 조금 더 이야기해보겠다.

사건이 일어나는 미국 북동부 일부 지역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바로 고립계를 의미한다. 열린계였다면 엔트로피의 증가의 의미가 희석이 된다. 이 고립계에서 엔트로피가 증가하여 계의 무질서도가 증가하며, 에너지의 과도한 사용(영화에서는 핵발전소와 같은 이야기가 있다)으 로 엔트로피는 더욱 크게 증가한다. 에너지가 변화될때 엔트로피는 발생하며 계속 증가해간다는 의미이다. 환경 오염은 엔트로피의 증가의 한 예이다. 물론 환경 오염이 되지 않더라도 전체적으로 엔트로피는 증가해간다. 하지만 자연적인 증가는 자연의 균형을 이룬다. 이 역시 초반에 관련된 이야기가 나온다. 주인공이 수업중에 나오는 이야기들이다. 코는 계속 자라지만 얼굴의 평형을 이루며 자란다고. 왜 벌이 사라졌을까? 여기에서 질문은 원인을 물어보는 듯 하지만 결과를 물어보는 것이다. 답은 자연의 평형(밸런스)가 깨져서이다. 한마디로 이 질문으로 대처할 수 있다. 왜 지구는 혹은 자연은 밸런스가 깨져가고 있는가?

따라서 영화와 굳이 끼어맞춘자면, 소그룹일수록 살 확률이 크다. 이는 역시 엔트로피가 비교적 낮다는 의미이며, 아직 죽을때가 안되었다는 의미이다. 영화속에서 엔트로피의 흐름은 바람으로 표현된다. 바람이 지나가면 사람들은 마치 건전지가 빠진 로봇처럼 멈추어선다. 무질서한 에너지 그룹은 지나가는 엔트로피 대열에 합류된다.

:: 초점은 죽은자

감독은 어이없는 죽음을 감정을 제거한 자살로 묘사하고 있다. 초점은 죽은자이다. 이 영화에서 쓰인 논리가 바로 이것이다. 예를들어 어떤이가 누구에게 살해되었다면 오직 피살된 피해자에게로만 초점을 맞춘다. 가해자인 살인자는 살아있다면 이야기에서 지워진다. 감독은 오직 죽은자만 말한다(그리고 죽은자는 말이 없다. 그 이유를 따질수도 없고 캐묻지도 못한다).

한 학생이 아침에 학교가다 교통사고를 당해 죽었다고 가정하자. 그가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과거의 수렴점은 사고 당일 이 아침에 모여진다. 이 학생은 인생을 오직 이날을 위해 살아온 것이다. 이날 그 시간 '해프닝'이 일어난다.

요즘 안타까운 사건이 일어났다. 금강산 관광객이 북한 병사에게 피격되어 사망하였다. 가해자를 지우고 오직 피해자만 생각해보자. 이 관광객은 이 날 말 그대로 '해프닝'이 발생하였다.

얼마나 무서운 관점인가. 인생의 덧없음을 무채색으로 표현한 관점이.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영화의 초점을 어디에 두는가이다. 주인공인 '마크 윌버그'를 위시한 부인과 친구 딸은 오히려 소품이다. 이 영화의 본질적인 주인공은 무수히 자살한 이름없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이어야 말로 이 영화의 주인공인 것이다. 영화속의 자살은 사실 자살보다는 가해자가 지워진 죽은자들이다. 현실에 대입한다면 실제로 자살자도 있을 것이고, 살해당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사고로 죽은 이들도 있을 것이다. 감독은 매우 안타깝지만 냉정한 시각을 보여준다. 가해자를 지운 죽음들, 이들은 결국 자살로 표현한 것이다.

영화속에서 나에겐 주인공의 행복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왜냐하면 엄밀히 말해 주인공은 곧 조연들이고, 수많은 죽음이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사연없는 무의미한 죽음이 현실에서도 사연이 없지는 않다. 영화를 보며 죽음속에 숨겨진 수많은 사연들 때문에 의외로 숙연해졌다. 어떻게 해서 떨어져 죽게 되었는가. 어떻게 해서 자동차 사고로 죽게 되었는가. 뭐..이런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정작 영화에서는 죽음이 그리 많이 등장하지 않는다. 몇몇 자극적인 죽음만 보여주고, 다수는 죽기전에 해프닝만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것 처럼 좀비처럼 멍하니 서있다. 죽음을 기다리는 시간, 죽기 위해 행동하기 전의 그 고요함이 주는 적막이 인상에 깊었다.

<덧붙임>

1. 나름대로 해석한 것이라 진짜 샤말란 감독이 의중한 것과는 차이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나의 시각을 통해 본 죽음은 사실 무의미한 죽음이 아니라 엄청난 슬픔과 안타까움을 동반한 죽음이다.

누구는 살고, 누구는 죽는 이러한 잣대를 논리와 과학으로 풀어낼 수는 없다. 다만 어떠한 해프닝은 정말 말도 안되게 일어나고 죽음은 상당히 무거워진다. 사실 죽음은 무겁지만, 전쟁영화나 재난영화와 같은 곳에서 보여주는 죽음들은 얼마나 가벼운 것들인가. 이 영화는 가벼운 죽음을 다룬 영화와는 달리 수많은 죽음들을 짧은 시간안에 압축시켜 동시다발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엄청난 죽음의 무게에 공포감을 들게 한다는데 그 의미가 있지 않는가 싶다.

2. 사실 이 영화의 포인트는 정확히 뭐라 말할 수 없을 듯 하다. 수많은 죽음을 이야기 하기 위해 엔트로피 개념을 활용하였는지 아니면 과도한 엔트로피 증가를 이야기하기 위해 수많은 죽음을 소재로 썼는지 이게 좀 헷갈린다.

3. 영화 끝부분은 의외로 해석이 잘 안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아니면 반대로 해석이 너무 쉽든지. 장소만을 옮겨 영화 초반부의 상황과 똑같은 시작을 반복함으로써 자연의 원리가 변치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인간은 죽음의 운명에 벗어날 수 없음을 암시하는 것으로도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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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다윈주의가 우리의 생활을 강타하고 있다. 이것은 정보의 진화이다. 정보의 진화는 생활 패턴마저도 바꾸어 놓았다. 또한 시간이 흐르고 과학이 급속도로 발전할수록 정보의 의존도가 갈수록 커져만 간다. 정보는 분명 많은 욕구(니즈)들의 원천이며, 바램이며, 표현이다.

'정보'를 이야기 하기 위해 책 하나를 끄집어 낸다. 책 이름은 『과학의 새로운 언어, 정보』(2007, 승산)이다.

제목에도 직접적으로 표현이 되어 있지만, 책에 서술된 정보는 과학이라는 틀안에 놓여져 있다. 정보 자체는 장르가 없지만, 이 책에서의 정보는 (과학이라는) 장르를 갖는다. 과학안에서의 정보는 우리들이 보편적으로 알고 싶은 일상적(통념적, 관념적) 정보가 아닌, 실제적 정보이다.

일상적 정보는 일종의 처리된 정보이다. '정보처리기'라는 블랙박스안에 내장되어 있는 필터를 통과한 정제된 정보이다. 즉, 일기예보라든지, 주식시세, 컴퓨터의 OS 설치하는 법, 빨래의 때를 더욱 잘 빼는 법등등 이런 일상정보는 날것의 형태를 가진 것이 아니라, 이미 누군가의 손을 거쳐 처리된 것들이다. 이런것들은 정보와 관련되었다기 보다는 정보처리와 관련이 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일상에서는 정보처리와 정보 자체의 구분이 거의 없다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과학이라는 장르안에서 보여지는, 처리되기 이전의 그 무엇(정보)은 도대체 뭘까? 이 역시 제목에 나와있다. 정보는 곧 '언어'라고 말이다. '언어'는 표현을 위한 도구쯤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정보는 무엇을 표현하려하는가? 바로 이것이 이 책에서 진지하게 고민하고자 하는 주제이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과학이라는 장르를 지닌 정보는 우리와 우리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실재성)의 표현이며, 또 그 물질이 놓여져 있는 공간(차원)의 표현이다.

저자(한스 크리스천 폰 베이어)는 책에서 정보(information)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 (중략) 그러므로 정보(information)는 형상이 없는 존재에 형상을 주입(infusion) 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de-, con-, trans-, re- formation은 각각 형상을 해소하기, 한데 모으기, 변화시키기, 새롭게 하기를 의미한다. (중략)...- p. 42


이렇게 무엇인가를 구체화시키고, 형상을 만들어 실체(혹은 실재)를 느끼게 하는 것을 정보라고 간단히 책에서는 설명해 놓았는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형상이고, 실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후 책에서는 과학적 체계안에서의 원천이 되는 실체를 풀어놓는다. 곧 원자론부터 시작하는 개괄적인 물질사와 과학사의 설명이다. 

왜 원자가 중요할까? 이것도 책 제목에 나와있다. 제목에서는 '새로운 언어'라는 표현이 있는데, 여기서 '새로운'은 고전물리 이후의 현대물리뿐만 아니라, 현대물리에서 더 나아간(진보한) '양자물리'의 영역까지를 지칭한다. 결국은 앞서 말한 '정보는 무엇을 표현하려하는가'의 답이다. 바로 '양자물리'를 말하고자 함이며, 현대물리와 양자물리를 잇는 고리의 역할을 원자 그리고 그보다 작은 미시세계의 입자들이 맡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한마디로 우리와 우리 세상(우주까지 영역으로 확대하여)의 비트들을 설명하기 위한 포석이다. 그러니 제목만 이해한다면(물론 책을 봐야 이해할 수 있다.) 이 책의 핵심을 들여다봤다고 말할 수 있겠다.

전반적인 책의 내용은 뭐라 쉽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개괄적인 물질사와 과학사(특히 아인슈타인 이후의 역사)를 여기에 옮겨 적을 수 없다는 것이 주된 이유이다.

고대에도 연금술사가 있었고, 중세에도 연금술사가 있었다. 이들은 '연금술'이라는 계량화(혹은 정량화)되지 않고, 과학화 되지 않은 오로지 호기심과 가정만으로 금을 쉽게 얻을 수 있을거라는 생각을 한 선구자(?)들이다. 그들이 벌린 수많은 시도들은 결론을 보지 못한채 '연금술'이라는 명칭을 부여 받긴 하였지만, 어쨌든 부자가 되진 못했다.

수많은 연금술사가 욕망의 노란 덩어리를 원했음에도 그리고 다양한 시도를 했음에도 왜 실패를 하였을까? 사실 엄밀히 말해서는 그들은 금을 만들기 위한 비교적 과학적이고 정확한 공정을 거쳤다. 그들이 썼던 도구들이 구닥다리라 결과를 보지 못했을 뿐이다. 물론 이 공정은 현대에 와서도 실패할 수 밖에 없다. 여전히 우리가 쓰는 도구들도 구닥다리이기 때문이다.(물론 다른 공정이 있을 수는 있다.그 예로 방사선으로 원자의 핵을 변형시켜 다른 원자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한다.)

지금 인터넷에선 KSTAR라는 핵융합이라는 공정을 거치는 인공 태양이 웹상에 오르내리고 있다. 정치적인 이유에서 오르내리고 있긴 하지만,인공태양을 연금술에 대입해보면 쉽게 그 결과가 나온다. 우리는 최첨단 과학기술을 사용하여 태양에도 훨씬 못 미치는 인공태양이라는 것을 만들었지만, 태양계를 이끌고 있는 실제 태양도 금을 만들 수 있는 용기가 아니다. 자격을 부여할 수도 부여받을 수도 없다. 태양은 대부분 수소와 헬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주기율표를 보면 수소(원소기호 H)는 1번이고 헬륨(원소기호 He)은 2번이다. 이는 우리가 발견한 우주의 원소중 첫번째와 두번째로 가볍다는 의미이다. 그 엄청난 핵융합반응은 기껐해야 헬륨뿐이 만들어 내지 못한다. 그런데 그 어느 누가 도가니 속에서 금을 만들겠는가. 참고로 백금(원소기호 Pt)은 78번이고, 금(원소기호 Au)은 79번이다. 백금이나 금을 자연상태에서 만들어내려면 엄청난 에너지원과 그 에너지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 필요하다. 산소원소까지는 별의 일생중에 만들어지지만, 그 이후의 원소는 별의 종말 이후(적색거성 이후)에 만들어진다. 별이 폭발하면서 더욱 많은 에너지를 내놓게 되고 그 여파로 기존의 원소들이 융합되면서 더 무거운 원소를 만들어내게 되는 것이다. 50억도까지 오르면 철(Fe)이 생겨나고, 그 이후에 더욱 높은 온도에서 더 무거운 원소가 생성된다. 이렇게 생성된 원소는 우주의 먼지와 가스가 되어 우주 전역으로 퍼지게 된다.

이 예에서만 보더라도 원자라는 정보는 더욱 진보된 패러다임을 불러온다. 여기에서의 진보란 계단을 통해 밟아올라가는 등정이 아니라, 조금더 깊숙히 들여다보고자 하는 탐구이다. 우주를 구성하는 원초적 힘을 갖는 실체에 대한 이해이다.실제성에서 정보는 바로 원자를 위시로 한 여러 입자(원자를 구성하고 있는 소립자들...)를 가리키며,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속성조차 새로운 컴퓨팅의 역사를 쓰기 위한 재료이다. 이 속성은 바로 '스핀'이라는 것인데 한마디로 입자의 회전성이라 보면된다. 이 회전에서 동시성과 병렬성을 함축하고 있는 양자계산이라는 우주적 컴퓨팅(거대한 확률기계)을 이끌어내려하고 있다. 

얼마 안있으면, CERN의 LHC(대형 강입자 충돌기 Large Hardron Collider)가 가동될 것이다. 모든 물질이 원자들로 이루어졌다지만, 이 원자들만으로는 상호간에 영향을 주는 힘(Force or field)을 기술하진 못한다. 원자는 하나의 핵과 그 주위를 돌고 있는 전자들로 이루어져있다. 하지만 핵의 크기와 비교하여 전자들은 꽤 넓은 공간을 점유한다. 원자의 핵이 축구공만한 크기라면 핵에서 가장 가까이에서 돌고있는 전자는 무려 800m정도 떨어져있는 것과 같다. 핵과 전자 사이의 거리는 텅비어있다. 이런 원자들로 이루어진 우리의 실체는 텅빈 공간과도 같다. 그럼에도 왜 우리는 벽을 통과하지 못할까?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기적으로 대전된 척력이 바로 그것인데, 이런 힘들을 이해하려면 원자의 내부를 들여다보지 않으면 안된다.

결국 원자는 '쿼크 Quark'와 '렙톤 Lepton'이라는 물질 구성 입자들로 이루어져있는데, 이것들은 또  힘에 대응되는 매개 입자의 영향을 받는다. 그런데 이런 '힘 매개 입자'들 중 '힉스 Higgs'라는 입자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위에서 예를 든것과 마찬가지로 금원소를 만들려면 탄소나 산소를 만들 수 있는 에너지를 훨씬 뛰어넘는 더욱 큰 에너지를 가져야 하는 이유와 유사하다. 우리는 더 큰 현미경이 필요한 것이다. 이 거대한 충돌기는 테라스케일의 에너지 영역(Tev, 테라 일렉트론볼트)을 다룬다. 물론 힉스 입자가 발견될지 아닐지는 알 수 없다.                                


     

  - what really goes on at the Large Hardron collider -


우리도 핵융합로를 가지고 있다. 정확하게는 '초전도핵융합실험로'이다. 물론 시뮬레이션용이다. 발전용은 아니다. 앞서 말한 태양을 모방한 작은 그릇이다. 이 그릇은 차후에 우리가 엄청난 에너지(그것도 청정한)를  얻을 수 있을 거란 기대를 갖게 한다. 최소한 기술력은 쌓고 있다. 갈수록 고갈되어가는 화석 에너지를 대체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친환경적인 것은 태양 에너지다. 미국은 엄청난 땅 덩어리위에 태양 에너지 네트워크를 준비하고 있다. 우리는 그만한 땅 덩어리가 없다. 그래서 KSTAR는 우리를 고무시킨다. 이 그릇은 '토카막(Tokamak)'이라 부르는데 내부가 자석으로 이루어져있다. 자석도 그냥 자석이 아니다. 초전도체이다. 이 원리는 가장 원초적 정보를 이용한 것이다. 원자를 이루는 전자는 궤도를 돌다가 원자의 핵으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원리이다. 초전도체를 쓰는 이유는 고온의 플라즈마가 용기의 벽에 닿지 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태양을 어떤 그릇에 담을 수 있을까. 이 플라즈마는 2억도나 나간다. 2억도는 앞서 말한 태양의 중심부에서 수소원자 4개가 핵융합하여 헬륨을 내놓는 온도이다. 그래서 공중에 띄어놓는다.

** 링크 : 한국산 인공태양이 조만간 뜬다<주간한국에서..> 바로 위의 그림 출처가 있는 사이트
** 링크 : 미국이 준비하고 있는 태양 에너지 네트워크 계획 <A Solar Grand Plan>

공간에 띄어놓는 물질이 또 하나 있다. 그런데 물질이 아니다. 이 이유 때문에 진공상태에 띄어놓는데, 그것은 '반물질 anti-matter'이라서 그렇다. 반물질은 물질과 만나면 에너지를 쏟아내며 붕괴한다. 그래서 이것도 초전도체로 둘러쌓인 용기에 들어있다. '반물질'은 '스타트렉'의 추진원료이기도 하다.


:: 끝마치며 ::

양자역학이라는 영역은 존재라는 철학적 명제를 지닌 물리학의 최전선(edge)이다. 볼츠만은 보이지 않는 존재(원자)를 주장하다 당시 종교계와 학계에서 신학적 태도를 버렸다는 신랄한 비판을 받고 상실감에 빠져 좌절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책에서 내내 주장하는 것은 사실 명확한 실재가 아니라 모호한 실재이다. 이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실성의 원리'를 지칭한다. 분명 존재는 하는데 명확히 집어낼 수 없는 것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의 법칙이다. 전자는 가장 좋은 예이다. 전자는 그 하나하나를 집어낼 순 없다. 그냥 구름으로 표시한다. 왜냐하면 확률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모호한 실재에 대해 정량화 시키는 방법으로 각각의 실재에 대한 정의를 하지 않고, 그 '정보의 양'을 측정하는 방법이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정보용량을 결정하는 '섀논'의 <정보이론>이 있다. 이 이론의 뼈대는 '엔트로피'와 '확률'이다. 엔트로피는 자연의 경향을 설명한다. 시간의 비가역성과 열에너지의 흐름으로 이해하면 된다. 확률은 무작위성을 의미한다. Higgs도 좋은 예이다. Higgs를 꺼내려면 추론이긴 하지만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다. 이런 보이지 않는 존재를 위해 사람들은 테크놀러지를 이용한다. 그리고 이러한 테크놀러지는 의외로 판타지적 상상을 수반하고 있다.

'세헤라자데'라는 한 여인은 자신의 남편이자 나라의 국왕인 '야르왕'에게 날이세면 죽임을 당할 것 같아  매일밤 한편씩 이야기를 왕에게 들려준다. 그중에 <알라딘과 요술램프>라는 이야기가 있다. 요술램프속 '지니'는 '알라딘'이 가지고 싶어하는 것들을 줌으로써 소원을 들어준다. 작은 공간의 램프속에서 '지니'는 별의별것을 꺼내준다. 비록 설화이고 판타지 문학이긴 하지만 이 속에서 양자역학을 끄집어 낼 수 있다. 이 램프는 양자역학으로 만들어진 자판기이다. 원하는 것을 몇가지 원자들의 조합으로 뚝딱 만들어낸다. '뚝딱'이라하니 도깨비 방망이도 생각이 난다. 또 '스타트렉'의 '엔터프라이즈호'안에서도 요리사 대신, 이런 양자 자판기가 승무원들에게 음식을 내놓는다.

'지니'는 도대체 어디서 그런것들을 가져올까. 만들어 내는 것일까? 이는 '양자역학'영역의 정보통신이라 할 수 있는 '공간이동 Teleportation'과 관계가 있다. 공간이동이라는 키워드는 사실 '전송'에 무게가 쏠려있기보다는 '복제'에 중점을 둔다. 내가 양자적 공간이동을 수행했다면, 목적지에는 또 다른 내가 있는 것이다. 물론 전송지에도 내가 있다. 전송지에서는 원본인 '나'를 지워야한다. SF적 상상이지만, 판타지적 상상과도 맞물리고, 이를 현실화시킬 테크놀러지도 연구중에 있다.

이러니 '정보'를 단순히 '정보'로만 볼 일도 아니다.

<덧붙임>

1. 이 책 『과학의 새로운 언어, 정보』의 리뷰는 본문보다는 포스팅 말미의 '끝마치며'라는 부분이 오히려 리뷰의 관점과 맞겠다. 이 책은 작년에 읽은 것을 이제서야 두서없이 리뷰한다.

2. 위에 언급한 '반물질'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을 소재로 한 책이 '댄 브라운'이 쓴 『천사와 악마』라는 책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로버트 랭던'박사가 반물질로 테러를 하려는 조직을 잡는다는 얘기이다.

3. 또 위에 언급한 '토카막'이라는 핵융합로가 있는데, 이것을 소재로 한 책이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가 쓴『돌의 집회』이다. 여기서의 '돌'이 토카막이다. 읽을만하다. 개인에 따라 갈수록 안습의 상황이 나올 수도 있다.

4. 양자역학과 관련한 책을 몇 번 더 읽었다. 기회되면 리뷰나 포스팅을 하겠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어느정도나 이해했느냐일 것이다.

5. 좋은 다큐들이 많이 있다. 오히려 다큐가 이해하기엔 좀 더 쉽고, 명확하다. 다큐를 보고 책을 읽으면 금상첨화이다.

6. 이 책 이외에 또 다른 양자역학에 관련된 책 몇 권을 소개한다. 

              

 

 

 

 

『양자 컴퓨터』와 『불가능한 도약, 공간이동』, 『프로그래밍 유니버스』는 모두 읽은 책이다. 『아인슈타인의 베일』은 읽다 좀 지친감이 있어서 기회되면 다시 볼 책이고, 『양자 세계 여행자를 위한 안내서』는 최근 나온 서적인데 기회되면 읽어봐야겠다. 혹시 양자와 관련되어 무슨 책을 읽을까 고민하시는 분은 『과학의 새로운 언어, 정보』나 『아인슈타인의 베일』먼저 읽고 다른 책들을 보는게 제일 나을 듯 싶다. 물론 개인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프로그래밍 유니버스』는 나중에 읽으시라고 권하고 싶다. 양자 관련 책들을 읽어보면 '세스 로이드(프로그래밍 유니버스의 저자)'는 많이 나오긴 하는데, 다른 책들과 비교하여 쉽게 읽히는 글은 아니다. 『양자 컴퓨터』와 『불가능한 도약, 공간이동』은 의외로 쉽게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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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SF 소설속, 그리고 이와 같은 장르의 영화속에는  보통 인간과는 다른 어느 특정화된 능력을 지닌 인간이 등장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이러한 능력은 일상에서 지배받고 있는 거시적인 물리 법칙과 동떨어져 있을수록 우리의 말초를 거세게 흔든다. 이런 SF속 단골 인간들을 '메타휴먼(meta-human)'이라 부른다. 이와는 반대로 판타지 소설인 해리포터에 등장하는 재밌는 단어가 있는데, 어떠한 마법도 부릴지 모르는 보통의 인간들을 '머글(muggle)'이라 부른다. 그러니까 '머글'들에게 있어서 '메타휴먼'은(머글과 메타휴먼이 부드럽게 조화되지는 않겠지만...) 말그대로 신에 가까운 초인간인것이다. (예전에 이런 초인간과는 조금 다른, 새로운 진화적 형태로 발현한 인간들을 내 블로그를 통해 인간2.0 이라는 버전으로 붙여본 적이 있었다. 알맹이 있는 글은 아니다.)

:: 상상과 현실. 그 경계를 가르는 메타포어 ::

얼마전에 가볍게 읽을 요량으로, <스티븐 굴드>의『점퍼 1』(까멜레옹, 2008) 을 손에 들었었다. 좀 작은 크기였지만, 분량은 상당한 책이었다. 이 책에서도 앞서 언급한 '메타휴먼'이 등장한다. 그리고 주인공이다. 주인공은 '데이비드 라이스'라는 소년인데 이 소년이 가진 능력은 '순간이동'이다. 우리들에게 '순간이동'이라는 단어는 보통 '가장 가보고 싶은 곳은?'이라는 질문과 매우 잘 어울린다. '순간이동'은 이런 앞 질문에 내재된 인간의 욕구를 표현한 용어이다.  특히 '순간이동'은 별다른 시간 낭비 없이, 그리고 돈 낭비없이 공간을 넘어선다는 원초적 욕망을 넘어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같은 메타포어(은유)적인 상황을 물리적 실재성으로 바꿈으로써 카타르시스를 분출하는 SF에서 자주 등장하는 초현실적 창조 개념으로 생각할 수 있을 듯 싶다.

이 책에서 '순간이동'은 초이론적인 것을 바탕으로 한 물리적, 과학적 개념이 아니다. 그러니까 어떠한 물리적 과정의 시작과 끝을 담당하는 원인과 결과를 동반하지 않는다. 그냥 단순히 작가가 부여한 능력일 뿐이다. 주인공 '데이비드 라이스'의 방황하는 청소년기를 조금 색다르게 묘사한 것이다. 또한 이 책의 장르가 SF보다는 단순한 문학소설로 읽혔다는 의미이다. 문학소설에서도 '성장소설'에 가깝다. 작가가 '순간이동'에 어떠한 의미를 두고 싶어했는지는 알 수 없다. 책에서는 어느 순간 이 능력을 알게 되었고, 그리고 사용하는 것으로 진행한다. 하지만 가정 폭력에 시달리는 불안한 정서를 지닌 주인공 소년과 '순간이동'은 공통적인 개념을 가지는데, 그것은 '일탈'이다. 평범한 일상(routine)을 벗어나는 행위. 시간에 속박당하고 있는 공간을 벗어나는 행위. 이 둘을 하나는 인물에게 그리고 하나는 그 인물의 능력에게 부여한 것이다.

:: 메타휴먼에 대한 적대성과 머글의 순수성 ::

내 개인적으로는 극한의 SF 소설을 읽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 컸지만, 기대에 부응하는 책읽기는 아니었다. 오히려 이 책을 읽고 싶어했던 이유는 얼마전에 상영했던 영화속 이야기를 책으로 먼저 접해보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화속 이야기와 다른 듯 싶다. 영화소개 페이지에서 설명한 내용 전개가 책과는 사뭇 다르다. 좀 찾아보니 영화는『점퍼 1』과 『점퍼 2』의  이야기를 섞어놓은 듯 하다. 이 두 책에 나오는 주인공은 서로 다르다. 다른 이야기가 진행된다.  

메타휴먼에 대해 좀 더 이야기 하겠다.

만화책(미국에서는 코믹스)에서 등장하는 이러한 메타휴먼은 인류에 대한 사명감을 지니고 있다. 특이한 능력을 좀 더 크게 사용하는 것이다. 인류는 메타휴먼의 보은을 받지만, 사실 만화적 혹은 영화적 스토리와는 별개로 메타휴먼이 보통의 인간들과 섞이고 싶은 하나의 표현으로 생각되어진다. 그래서 비록 어설프나마 짧은 철학도 보인다. 하지만 메타휴먼에 적대성을 보이는 인간들도 등장한다. 그들과 메타휴먼들과의 충돌이 영화속 갈등으로 표현되는데, 사실 두개의 욕망이 오버랩된 것으로 볼 수 있을 듯 싶다. 한쪽은 비록 특이한 능력을 지녔지만, 평범하게 살고 싶어하는 욕망과, 다른 하나는 반대로 특이한 신체적 능력은 가지고 있진 않지만 과학 기술의 도움으로 특이한 존재가 되고 싶어하는 욕망이다. <슈퍼맨>이 그렇다. 비록 인간은 아니지만.

다양한 이야기는 다양한 전개를 수반으로 한다. 이제는 메타휴먼들이 대량으로 나오는 추세이며, 메타휴먼들속에서도 서로에게 적대감을 품는다. 하지만 순수성을 보장 받고 싶은 마음은 여전하다. 미국 드라마 <뮤턴트 X>가 그렇고, 영화인 <X맨>이 그렇다. 또 다른 드라마 <히어로즈>가 그렇다.

머글들의 세상은 또다른 세상이다. 그들은 영화속에서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지만, 그 일상은 깨져서는 안되는 순수함을 갖는다. 그래서 물리 법칙을 무시하면서 살아가는 메타휴먼들이지만 머글들의 평온함과 순수함을 위해  세상 법도는 무시하지 않는다. 범죄는 저질러서는 안될 그들의 물리 법칙이다. 물론 다양한 머글에 적대적인 메타휴먼들은 가끔 이러한 것들을 깨부수려 하기도 한다. 머글은 순수성은 보장 받되 그들의 세상을 유지시키는 물리 법칙을 이기는 것들에게는 자연히 눈을 감는다. 보려 하지도 않고, 봐서도 안된다. 한마디로 무지하고, 단순하고, 순박한 엑스트라들이다. (물론, 국가정보기관이라든지, 세계 정복을 꿈꾸는 은둔형외톨이 박사나 갑부들은 제외...)

:: 공간을 넘어서다 ::

앞서 순간이동은 『점퍼 1』의 중요한 소재이다. 책에서는 어떠한 물리적 설명이 언급되어지지 않지만, 그래도 한번 생각해보자.

순간이동은 오로지 공간만을 점유한다. 한마디로 공간이동이다. 시간이동은 포함되어있지 않다. 공간이동을 소재로 한 대표적인 영화로는 SF인 <스타트랙>이 있다. 스타트랙에서의 공간이동은 두가지이다. 하나는 엔터프라이즈호의 공간이동이고, 다른 하나는 구성원들의 공간이동이다. 엔터프라이즈호의 공간이동은 시간의 영역과도 중첩된다. 이는 '워프'이다. 자세한 것은 모르겠지만, 우주의 여러 시간축들 사이의 여행이다. 과거와 현재 미래는 의미없다. 물론 구성원들은 계속 시간이 흐르지만, 우주선이 도달하는 그 공간의 상태는 과거도 미래도 아니다. 그냥 현재인 것이다. '워프'의 공간이동은 양자 에너지의 활용으로 이루어진다.

승무원의 공간이동은 좀 더 현실적이다.  물리적 과정이 있다는 말인데, 인간의 몸 자체의 전송보다는 그것들을 이루고 있는 원자들의 전송으로 보면 된다. 그러니까 적절한 분해와 조합으로 이루어진다. 현실에서도 입자의 전송은 실험실 수준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고 바로 실현 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런 원자적 전송에는 두가지의 전송이 뒤따른다. 실재적인것과 그렇지 않은것 즉, 비실재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실재적인 것은 원자 혹은 입자 그 자체이며, 실재적이지 않은 것은 정보를 가리킨다. 정보는 전송 전과 전송 후의 원자들의 위치와 조합 형태를 품고 있다. 빔을 쏴서 전송하는 그 자체는 정보를 위한 스캐닝과 같으며, 그와 동시에 물체가 먼지와 같이 분해되어 입자의 전송이 이루어진다. 

현대에서 전송은 입자가 아니다. 우리가 통신하는 것도 빛에 실리어 날라지는 비트이다. 그러니까 결국 원자가 전송되어지는가 비트가 전송되어지는 가는 현재의 통신과 미래의 통신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닐 것이다. 현재의 통신은 실재적인 전송이 아니라, 비트라는 관념화된 덩어리들의 전송이다. 이것을 우리들의 터미널(집에 있는 PC와 같이...)에서 나름의 프로토콜로 해석되어 모니터에 보여지는 것이다. 양자 컴퓨터에서는 비트와는 다른 '큐비트(qubit, Quntum bit)'를 전송한다. 큐비트는 기존의 비트보다 좀 더 많은 정보를 담을 수 있는데, 이것의 장점은 전자의 스핀의 상태에 대한 정보를 품는다. 이는 언제가 될 지 모르겠지만, 다음에 좀 더 공부해서 포스팅을 할 것이다.

별 다른 것은 없지만, 이것만 알아두면 좋을 듯 하다. 스타트랙에서 보여지는 것과 같은 전송은 비실재적인 정보의 전송도 포함되어진다는 것. 원자들의 전송은 빛으로 전송되어질 것인데 지금 우리는 이 빛에 원자가 아닌 비트를 보낸다는 것. 이것은 앞서 말한 정보의 전송이라는 것. 빛은 입자성과 파동성 두가지 성질이 있는데, 지금은 입자성 보다는 파동성이 강하다는 것. 이는 주파수를 이용하는 우리의 통신이라는 것. 그리고 빛의 나머지 하나인 입자성을 연구하면 원자의 전송도 이루어지지 않을까라는 것. 대충 이렇게 될 듯 싶다. 물론 아닐 수도 있다.

슈퍼맨이 '크립토나이트'라는 녹색 운석에 약점을 보인다면, '순간이동'을 하는『점퍼 1』의 주인공은 무엇이 약점일까. 이것은 좀 더 물리적인 내용이다. 우리가 편지를 보내면 주소가 있고, 컴퓨터로 통신을 하면 IP(Internet Protocol)가 있듯이 순간이동에도 주소가 있어야한다. 이 주소는 곧 공간의 좌표이다. 공간의 좌표 없이는 전송할 수도 없다. 정착하지 못하고, 공간에서 떠돈다면 귀신으로 봐도 무방하다.

그래서 주인공 소년은 항상 가본것이거나 눈에 보여야 하는 곳으로만 이동할 수 있다. 사실 약점이라기 보다는 정말 귀찮은 부분이다. 그래도 나름 판타지성을 조금은 피하려면 이 논리를 채택할 수 밖에 없다. 아마 내 기억이 맞다면, <X맨 2>에서 공간이동을 할 줄 아는 돌연변이도 그 나름의 좌표를 알아야 했을 것이다. <스타트랙>에서는 직접적으로 좌표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그 전에 미리 목적지를 스캐닝을 통해 알아놓는다. 이 목적지를 스캐닝 하는 작업의 목적은 목적지 주변 입자들에 대한 정보의 저장이다. 바람이 불고 평평하지만, 모래와 돌들로 뒤덮인 거친 땅과 같은 묘사적 정보를 모으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거시적인 환경에 대한 정보로는 원자 혹은 압자를 전송할 수 없다. 전송되는 것이 입자라면, 전송되어지는 목적지 장소 또한 입자적 환경으로 봐야한다. 그래서 결국 이러한 전송은 전자기적 통신과 같은 전송이 아니라, 양자적 전송으로 표현할 수 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는 약간 다르다. 실제몸은 현실에 있고, 정신은 가상에 있다. 전송되어지는 곳은 비트로 이루어진 세상이다. 그러니까 매트릭스 세상은 곧 전자기적 정보(정확히는 코딩된 세계)로 이루어져있는 세상이다. 말 그대로 누군가의 프로그램속이다. 이는 지금 우리의 패러다임(전자기적 정보로 통신하는 현재) 그 자체가 양자적으로 바뀌지 않고 유지된 환경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네오의 정신은 가상의 몸에 전송된다. 그러니까 이 세상은 또 다른 세상이다. 비트로 이루어져있지만, 정신을 전송하여 비트에 생명을 불어넣는 세상인 것이다. 비트는 살아있지만, 사실 살아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매트릭스>는 좀 더 철학적이다. 가상의 세계에서 정신이 죽으면, 현실의 육신이 죽는다. 가상 세계에서의 정신과 현실 세계의 육신의 링크가 깨져버리는 것이다. '유체이탈'의 좀 더 색다른 버전이다. 그래서 <매트릭스>속 공중전화가 울리고 이를 받으면, 정신은 현실의 육신과의 재접속을 하기 위한 자각을 하게 된다. 그러니까 매트릭스에서 중요한 것은 '자각'이다.

:: 환상속의 그대::

문학이든, 영화든, 그 무엇이든 비슷비슷한 정보를 다양한 해석으로 보여주는 것이 흥미롭다. 요즘 웹 2.0에서 말하는 플랫폼의 클래식 버전인지도 모르겠다. 암튼, 위에 말한 것은 사실 환상을 품은 메타포어(은유)이다. 물리 법칙이 어떻고, 전송이 어떻고 하는 것들은 사실 어떤식으로 전개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여러 작품들 속에서 이런 원초적인 욕망들을 메타포어로써 표현하고 이를 실재적으로 포장함으로써 좀 더 그럴듯한 세계를 이끄는 것 같다.

예전부터 이런 말들 하지 않는가. 상상이 곧 현실이 된다는.

:: 이 글 제목과 관련하여 ::

이 글의 제목인 <Beam me up.. NO!!! Gone with the wind..>는 과학과  기술로써 이 책을 읽은 것이 아니라, 은유적인 상상으로써 이 책을 읽었다는 나의 이야기와 어울릴 듯 하여 그렇게 지어보았다.

"Beam me up, Scotty (스카티 나 좀 (우주선으로) 전송해줘..)" 는 영화 <터미네이터>의 "I'll be back"과 같이 <스타트랙>속 유명한 대사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이와 비슷한 여러 표현으로 쓰였을 뿐이라 한다.

"Gone with the wind"는 그 유명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영화 원제목이다. 이 제목이 『점퍼 1』을 잘 표현한 듯 해 포함시켰다. 순간이동이라는 SF 소재를 다룬 책 보다는 좀 더 문학적인 책과 닮아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 책은 SF보다는 '성장소설'에 가깝다.


원래 앞에서 언급했던 것들, 정보니, 원자니, 빛이니 하는 것들은 '정보'와 관련된 포스팅에서 쓰려 했는데, 『점퍼 1』을 이야기하다보니, 이렇게 까지 주절주절 하게 됐다. 다음에는 좀 더 다듬어 '정보'에 대해서 글을 써보고 싶다.


<덧붙임>

1. SF보다는 문학소설(이것도 성장소설)과 비슷한 소설

<로버트 A. 하인라인>의『프라이데이』(시공사, 2005)  : 나의 리뷰 바로가기...







2. 앞서 '순간이동'에 대해 조금 언급했는데... 좀 더 물리적으로 본 책이 있다. 이 책은 예전에 봤었는데, 기회되면 다시 한번 읽고 싶다. 

<로렌스 M. 크라우스>의『스타트랙의 물리학』(영림카디널, 1996)
이외에... 같은 저자의 책... 『스타트랙을 넘어서』(영림카디널, 1998)라는 책은 여러 SF영화속에 쓰인 물리법칙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두 책이 다 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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