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 단토의 이름은 미국 내 미술사가, 미학자, 비평가들의 글에서만 언급되는 것이 아니라 유럽에서도 폭넓게 인용되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도 여러 차례 단토의 '예술의 종말'론이 학회에서 발표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직간접적으로 그의 이론의 중요성을 언급해왔다.
그의 이론이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이유는 '예술의 종말'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포스트모던이라는 용어로 현대미술을 규정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면서 동시대contemporary라는 용어로 현대 예술의 방향을 설정하고 있고, 이것은 세계적 조류가 되었다. 이렇듯 그의 저서가 갖는 의미가 큼에도 불구하고 여태까지 번역서가 나오지 못한 것은 복잡하고 난해한 그의 문장구조와 고대에서 현대를 아우르는 방대한 규모의 내용, 라틴어, 독일어 등을 원어로 사용하는 등의 이유로 번역하기가 매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 책은 3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미학과 철학을 각각 전공한 역자들을 통해 번역에 노력을 기울였으며, 서두에는 단토가 손수 우리 나라 독자를 위해 써준 서문이 실려 있다. 우리 나라 도예에 특히 관심이 많은 그는 서문에서 다원주의에 따른 우리 나라 미술의 노력과 가능성을 인정하고 시사하고 있다.<브릴로 상자>가 예술의 종말을 고했다.
단토는 1960년대 중반 앤디 워홀의 작품 <브릴로 상자>를 예로 들어 이는 양식의 문제가 아니라 예술 개념 자체의 종식을 의미하는 작품이라고 주장한다. 서양의 예술 개념은 플라톤의 『국가』과 그 밖의 저서에서 언급된 ‘모방’이었다. 그리스 예술의 대부분 특히 조각과 드라마가 모방적mimetic이었으므로 플라톤이 예술을 모방으로 본 것은 당연했다. 시각 예술을 모방으로 보는 시각은 르네상스를 거쳐 1960년대까지 아무런 회의도 없이 고정 관념화되었다. 20세기 모던 아트는 이 고정 관념의 현대식 해석으로 등장했다. 이것은 각기 자체의 용어로 미술을 정의하고자 시도, 경합한 동향들 중 견줄 나위 없이 두드러진 모습이었다. 모더니즘 최고 성과물 가운데 하나는 선언문이다.
단토는 선언문을 미적 이데올로기가 새로운 사회적, 정치적 요구 안에서 작용하는 미술의 역할을 규정하는 것처럼 미술의 미래에 대한 방향을 설정하는 예술적 문서나 다름없다 고 보고, 모더니즘 시기에 선언문의 규정에 맞지 않는 것은 미술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향이 농후했음을 지적한다. 이렇게 고정화된 미술 개념의 붕괴는 곧 미술사의 붕괴를 의미했다.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발발했을 당시는 그 의미를 알지 못하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에야 역사의 반성에서 그 의미를 발견하고 확립하게 되듯 1964년 워홀의 <브릴로 상자>에 어떤 가치가 있는지를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단토는 1980년대 중반 자신이 20여 년 전 화랑에서 본 워홀의 <브릴로 상자>를 떠올리고 그 작품이 의미하는바가 미술사의 붕괴임을 깨닫게 된 후 '예술의 종말'이란 논문을 발표했다.
예술의 종말 이후는 새로운 예술의 개념으로 출발이 약속된 시대이다.
예술의 종말은 서양 예술의 종말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해서 동양 예술과는 관련이 없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는 종말의 의미가 시사하는 바가 크고 종말 이후 동시대의 성격에는 다원화에 따른 동양 예술의 위상이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제 예술계는 서양과 동양으로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고 지구화의 시대를 맞아 하나의 예술계를 형성하게 되었으므로 서양 예술의 종말과 새로운 개념에 의한 새 출발은 동양 예술의 각성과 더불어 다원적 예술에 대한 공통의 의미를 함께 고민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예술적, 철학적 논제가 된다.
단토는 유럽의 특정한 지역 내에서의 예술만을 예술로 인식하고 유럽 밖에서 행해지는 그 밖의 예술을 예술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데 대해 반성을 요구한다. 19세기 말 고갱을 비롯한 유럽의 미술가들은 아프리카, 아시아, 5대양의 예술을 접하면서 모방이 더 이상 예술적 이상이 아니라는 것에 대해 놀라워했다. 이러한 사실은 '시각 예술이란 과연 무엇인가?','궁극적으로 미술 자체란 무엇인가?'하는 집요한 의문을 발생시켰다. 미술가들은 곧 미술이 어떤 사물에 대해 시각적으로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이 남아 있지 않은, 다시 말하면 어떤 것에 대한 모방이 없는 가운데 완전 추상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그들은 마르셀 뒤샹이 미술가가 만들지 않더라도 미술품이 될 수 있음을 발견한 것 같이 미술품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지녀야 하는 특정한 방식이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하나의 단순한 도구도 미술품이 될 수 있으며 상품을 담은 상자도 작품이 될 수 있듯이 변용을 통해 평범한 것도 미술품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한 그는 다원주의를 예고하는 유럽 중심의 역사의 울타리의 붕괴가 시작되었으며 이는 모든 양식이 동등하게 취급되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미술사를 양식의 역사로 보고 미술품의 질적 차이를 양식의 차이로 논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단토의 예술의 종말 혹은 미술사의 종말이란 한편으로는 미술 운동들의 종말 또는 선언문들의 종말을 의미한다. 모든 양식이 우열 없이 동등해야 하는 다원주의에 대한 인식을 뜻한다.
단토는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용어의 사용을 반대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말을 널리 퍼뜨린 찰스 젱크스는 『포스트모던 건축의 언어』(1975)와 유사한 여러 저서에서 국제 현대 양식에 대한 반동으로 등장한 경솔한 절충주의를 설명하기 위해 이 용어를 사용했다. 포스트모던 건축가들은 지역적이고, 전통적인 원천으로 되돌아갔으며 종종 ?익살스러운? 방법으로 색채와 장식을 도입했다. 건축 외의 분야에서 어떤 작품을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분류하는 것은 더욱 어렵지만 공통점이 없는 양식들을 비슷하게 혼합하거나 역설적 방법으로 의식적인 문화적 참조들을 나타내는 회화와 조각이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분류된다. 로버트 벤투리는 『건축에서의 복잡성과 모순』(1966)에서 가치 있는 공식이 있다면 ??순수한? 것보다는 혼성된 것,?단정한?것보다는 절충된 것,?명료한?것보다는?모호한?요소들이?흥미로운?만큼 외고집스럽다?고 기술했는데, 이 공식을 적용하면 로버트 라우센버그의 작품, 줄리앙 슈나벨과 데이비드 살레의 그림, 그리고 프랭크 게리의 건축물이 포스트모던이라고 할 수 있지만 제니 홀쩌나 로버트 맨골드의 작품에는 이 공식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단토는 포스트모더니즘을 하나의 양식으로 보고, 모더니즘의 계승인 동시에 초월이라는 식으로 그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잘못임을 지적한다. 그는 현대의 예술계를 예술의 종말 이후 혹은 동시대란 용어로 지시하는 것이 적합함을 주장한다.
그렇다면 새로운 예술의 정의란 무엇인가?
단토는 미술이 모든 종류의 미술, 온갖 질서의 미술과 양립 가능하기 위해서는 미술에 대한 정의가 최소한으로 약화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는 최소한의 정의에서 미술품으로 인정받으려면 반드시 어떤 의미를 지녀야 하고 그 의미가 작품에서 물질적으로 구성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이는 오브제가 해석을 통해 작품으로 변용되어야 하며 그 오브제에 읽을거리가 있어야 함을 뜻한다. 요컨대 이는 미술품으로 존재하려면 관람자가 이해할 수 있는 비평이 따라야 한다는 것이며 비평가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도 커졌음을 의미한다.
비평은 작품에 대한 판단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성립에도 작용한다. 과거에는 작품을 성립하는 판단 기준이 작품이 제작되기 전에 미리 존재했지만 동시대에는 작품을 규정하는 기준을 미술가가 스스로 제시해야 한다. 그만큼 동시대 미술이 전문적이고 자기 지시적이기 때문이다. 동시대 미술이 철학과 상보적 관계를 이룰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작품의 구성은 눈으로 파악되지만 그 의미는 눈으로 읽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 그의 최근작 중에는 도메니코 페티의 사라진 제단화를 대신하여 매릴랜드 주 볼티모어 시 소재 월터스 갤러리 오브 아트를 위해 제작된...
청소년들이 부담없이 읽으면서 수학의 본 모습과 가치를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한 수학사 교양서이다. 최초의 수학자 탈레스에서 플라톤, 피타고라스, 유클리드에 이르는 서양 고대 수학의 탄생과 발전의 역사를 인류 문화사의 바탕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학교에서 배우는 수학이 어떤 역사와 문화적인 배경에서 발전해왔는지를 알고 수학은 진짜 무엇이고, 인간의 삶과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알려준다. 기호와 공식은 등장하지 않지만 수학을 창조하고 발전시켜 온 사람들의 생생한 이야기와 그것을 낳은 사회의 철학과 문화 예술에 대한 깊고 풍부한 사색과 해설이 담겨 있어 새로운 시각으로 수학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수학적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해준다.
대학에서 '수리 논술'이라는 새로운 유형의 평가가 도입되고 수학과 7차 교육과정에서 수학사를 비중있게 다루고 있는 현재, 수학 불안증 또는 공포증에 떠는 학생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 수학적 개념과 공식 못지않게 중요해진 수학적 탐구 방식과 문제해결 방식을 이 책을 통해 배워보자.1. 사람의 얼굴을 한 수학 : 수학사
문제 풀이의 열기만 가득했던 수학 교육계에서 요즘 새삼스럽게 ‘수학사’가 화두가 되고 있다. 수많은 공식과 예제를 외고 대입하는 반복 훈련에 중점을 두는 현재의 수학 교육으로는 학생들이 수학적 사고의 매력을 느끼고, 제대로 된 수학을 소화할 수 있는 지적 능력과 창의성을 키울 수 없다는 공감이 교육 관련자들 사이에 폭넓게 퍼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수학과 7차 교육과정에서 수학사를 비중 있게 다루자는 지침이 나왔고, 대학들도 입시에서 ‘수리 논술’이라는 새로운 유형의 평가 방식을 도입한 것이다. 현행 수학 교육에 문제의식의 핵심은 수학 시간에 “수학을 가르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수학 비슷한 것만 가르치고 있다”는 데에 있다. 다음의 이야기를 보자.
이야기 하나.
18세기의 어느 날,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여왕은 프랑스의 철학자이며 무신론자인 디드로를 상트페테르부르크 궁정에 초대하였다. 그리고는 마침 그곳에서 연구 활동을 하고 있던 독일의 수학자 오일러에게 장황하게 무신론을 떠벌이는 디드로의 입을 막아 줄 것을 부탁하였다.
신하들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궁전에서 오일러는 디드로에게 성큼성큼 다가가서 ‘신의 존재에 대한 수학적 증명’이라며 다음과 같이 그럴듯하게 치고 들어갔다.
“선생님, 입니다. 그러므로 신은 존재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자, 말씀해 보십시오!”
그때까지 신의 존재를 열렬하게 반박하고 있던 디드로는 결국 오일러의 제물이 되고 말았다. 오일러가 제시한 수학식의 의미를 해석할 수 없었던 디드로는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야기 둘.
10여 년 전 어느 날, '농무(農舞)'의 신경림 시인이 경상북도의 한 중학교를 찾아갔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교사들이 시인에게 재미있는 제안을 했다. 참고서에 나오는 국어 문제를 한번 풀어 보라는 것이다. 바로 시인 자신의 작품인 '가난한 사랑 노래'에 관한 문제들이었다. 결과는 30점. 10문제 가운데 3문제밖에 맞히지 못한 것이다.
두 가지 일화에서 우리는 바로 ‘죽어 있는 교육’의 모습을 연상할 수 있다. 학생 시절 ‘수학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고 외치며 수학 불안증 또는 수학 공포증에 시달리다가 대학 입학과 동시에 수학에서 손을 떼는 우리의 모습이 디드로의 당황스러운 표정과 겹쳐진다. 우리들 대부분은 디드로처럼 인간사의 여러 분야와 관련되어 있는 다양하고 독특한 수학의 방식을 두루 고찰하는 능력을 박탈당했다. 그것은 우리가 수학 교육을 통해 창의적인 문제 해결력, 수학과 연관된 삶과 세상 이야기를 배우지 못한 탓이다. 인류 문화가 농축된 진정한 수학의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이, 삶과 단절된 수학만 접해 온 우리는 디드로와 같은 수학 바보가 되어 버린 것이다.
수학 교육이 나라의 장래를 좌우한다고 할 만큼 수학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는 시대에 이러한 수학 교육에 머물러 있는 것은 국가적으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독일의 수학자 가우스가 수학을 ‘모든 학문의 여왕’이라고 불렀듯이, 수학은 자연 과학은 물론 인문 사회 과학의 토대가 된다. 더욱이 지식 정보화 사회가 펼쳐짐에 따라 수학은 금융, 정보 통신, 국방 등 미치지 않는 분야가 없는 ‘모든 산업의 여왕’으로도 떠올랐다. 예를 들어 그래프 이론과 조합론은 컴퓨터 과학의 필수적인 도구이고, 금융 산업의 핵심 기술은 편미분방정식과 확률론을 기초로 하고 있다. 선진국들은 수학을 21세기 국가 경쟁력의 핵심으로 보고 수학 연구와 교육에 지속적으로 투자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육성된 수학자들은 대학 강단과 연구실만이 아니라 금융 회사, 컴퓨터 회사, 통신 회사 등에서 최첨단 기술을 개발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다음 세기에 그들의 ‘기술 식민지’나 ‘하청 국가’로 전락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수학 교육의 현실을 근본적으로 뒤바꾸는 일에 하루빨리 나서야 할 것이다.
수학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적어도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수학은 어떻게, 왜 만들어졌는가? 수학은 어디에, 어떻게 이용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사람, 문화, 역사가 보이는 수학 교실에서만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의 수학 교육은 문제 풀이 중심의 기능적 수학에서 인문학적 소양으로서의 수학으로 심화, 확장되어야 한다. 그 실마리는 수학의 역사를 읽고 이해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수학 교육계가 수학사에 주목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지식의 축적보다 다양한 활용을 요청하는 사회의 흐름이 우리에게 산업 사회의 학습 개념을 넘어설 것을 주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수학적 개념과 공식을 축적하는 것 못지않게 수학적 탐구 방식과 문제 해결 방식, 그리고 수학이라는 학문의 특성을 체험하는 것이 중요한 교육 내용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2. 청소년도 읽을 수 있는 첫 교양 수학사
교양서 출판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전문 지식의 대중적 소통이다. 지난 시절, 일반인의 삶과 유리된 채 전문가들 사이의 암호처럼 소통되었던 철학, 역사, 과학 등의 영역은 이미 활발한 교양서 출판을 통해 ‘대중화’의 길을 열어 왔다. 하지만 기초 학문 가운데서 여전히 삶과 단절된 암호로, 때로는 공포스러운 야수의 얼굴로 남아 있는 것이 수학이다.
사실 수학사 책은 적지 않게 출간되어 있다. 대표적인 책으로 모리스 클라인의 <<수학, 문명을 지배하다>>(경문사), 페트르 베크만의 <<파이의 역사>>(경문사)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전문가나 마니아가 아닌 청소년, 비전공자들이 교양으로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기호와 공식이 없는 수학카페>>는 국내 저자가 청소년들을 상대로 수학이란 무엇인지, 잃어버린 수학의 본모습과 가치를 깊이 있고 흥미 있게 보여주는 첫 수학사 교양서라는 데서 출간의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는 수학 하면 떠오르는 삭막한 모습, 수많은 기호와 공식에 의해 극도로 추상화된 수학의 모습은 없다. 대신에 수학을 창조하고 발전시켜 온 사람들의 생생한 이야기와 그것을 낳은 사회의 철학과 문화 예술에 대한 깊고 풍부한 사색과 해설이 담겨 있다. 책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인문적 독서를 통해 수학 시간에 접한 수식과 도형들의 살아 있는 의미를 비로소 이해하는 새로운 지적 체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 17세기 화가 도메니코 페티가 상상하여 그린 아르키메데스의 초상화 그는 자신의 비석에 원기둥에 내접하는 구를 새겨놓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