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 넘쳐나는 논픽션 드라마의 힘!
너무나 사실적인 전기영화 이면서, 음악이 넘쳐나는 음악영화의 걸작!
<레이>는 미국 조지아주 시골의 소년인 ‘레이 찰스 로빈슨’이 20세기 미국 소울 음악의 전설인 ‘레이 찰스’로 거듭 태어나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플래시 백으로 중간중간 삽입되는 유년 시절을 제외 하면, 음악 인생 초기인 1950년대 초부터 마약 복용으로 수감되는 1960년대 중반 까지를 집중적으로 보여준다. 그 결과의 산물이 바로 레이 찰스의 주옥 같은 명곡들이다. <레이>에서는 이런 명곡들이 40여곡이나 녹아 있다. 립싱크라고는 믿어 지지 않는 제이미 폭스의 신들린 연기는 또 하나의 레이 찰스라는 호평을 받는다. 그런 그에게 골든 글로브와 아카데미는 남우주연상을 선사했다. 뿐만 아니라, 실제 레이 찰스가 녹음하고 공연했던 현장의 모습이 영화 속에 삽입 되어, 그 사실감을 더욱 고조 시킨다.
시각 장애를 극복한 뮤지션 레이의 삶과 선율!
2005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음향상,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 수상작! 국내 뮤지션 및 방송인들의 5분간의 기립박수, 음악계의 전설 ‘레이’의 감동 실화!
제이미 폭스! 레이 찰스를 완벽한 모습으로 표현한 또 하나의 레이 찰스! 영혼을 울리는 음악의 힘! 레이 찰스!
어린 ‘레이’에게 그의 엄마 ‘아레사’가 늘 강조하던 말이다. 레이는 7세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흑인 이다. 그가 살아왔던 남부에서는 건강한 흑인도 살기가 힘든 곳이다. 하지만 레이의 타고난 음악적 재능, 음악에 대한 사랑과 노력으로 이를 극복하고 가수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냇킹 콜’의 모창에서 가스펠과 블루스를 접목 시키고, 컨트리 음악까지…그가 하는 음악은 곧 그 시대의 음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수로서의 엄청난 성공.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 생활까지 그는 완벽하게 그의 장애를 극복한 듯 하다. 하지만 그에게도 아픔은 있다. 여섯살 어린 나이 목전에서 동생의 죽음을 지켜본 후의 죄책감, 장님이 되어서 십수년이 흘러도 무섭기만 한 암흑의 세계, 철저히 혼자라는 지독한 고독감은 그를 마약과 방탕한 생활로 이끌고 만다.

 미국 형사 영화의 붐으로 탄생한 대표적인 영화로 샌프란시스코 시경 강력계 형사 해리 켈러헌(Harry Callahan)을 주인공으로 한 형사물. 물불 안가리고 범인들을 상대하는 크린트 이스트우드의 연기가 돋보인다. 필리핀의 경찰청은 이 영화를 훈련용 영화로 사용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는 일화가 있다.
 한 발로 황소의 머리도 부순다는 위력을 가진 대형 매그넘(Magnum) 44 권총을 애용하고 핫도그를 좋아하는 그는 범인의 머리에 총구를 대고 독백하듯 이렇게 말한다. "Go Ahead Make My Day!(오늘 하루를 화끈하게 장식하게 해 줘)". 이 말은 한때 미국 사회에 애, 어른 할 것 없이 유행시킨 유명한 유행어가 되기도 하였다. '더티 해리'는 해리 켈러헌의 별명이다. 수사에 따른 집념과 탈선도 불사하는 오버 액션 때문에 사람들이 그에게 붙여진 이름이다.
 그는 악인들에게는 인정사정없는 대응으로 공포의 대상이지만, 불의에 대한 분노 못지않게 사실은 따뜻한 인간미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또한 절대로 불의나 편법과는 타협하지 않는, 철저한 원칙 주의자이기도 하다.
 모두 5편의 시리즈가 지금까지 만들어졌는데, 주인공은 변함없이 크린트 이스트우드가 맡았다. 60년대 마카로니 웨스턴의 주인공 이미지를 말끔하게 벗어버리고, 매그넘 권총을 들고 대도시의 거리를 누비는 한마리 늑대와 같은 현대의 영웅으로 탄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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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에 빠진 영혼의 아름다움
"사랑은 뜨겁고 밤은차다"라는 클레멘스 브렌타노의 시구처럼, 가슴속의 사랑은 불처럼 타오르는데 사랑하는 이가 곁에 없어 빈자리가 시린 외로운 밤에 우리는 사랑의 편지를 쓰게 된다. 우리들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하고 따뜻하게 하는, 사랑한다는 말. 이 말을 연인에게 어떻게 전할까 하는 문제는 사랑에 빠진 모든 이들의 고민일 것이다. 말을 부리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작가들 역시 사랑과 이별, 그리움을 똑같이 겪는 인간이다. 그리고 그러한 작가가 쓴 편지 속에서 사랑을 하는 인간으로서 모두가 겪는 공통적 감정들은 고스란히 그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
프랑스와 독일의 위대한 작가들이 쓴 연애편지들을 읽으면서, 작가들도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얼마나 쩔쩔 매는지, 그 글 잘 Tm는 작가들이 사랑의 고백을 위해서는 얼마나 큰 언어적 빈곤을 경험하는지를 보고 우리는 약간의 희열과 위안을 느끼게 될 것이다. 사랑 앞에 나약해진 이들은 침착함을 잃고 종종 답장이 없는 연인에게 우체국의 업무 지연을 핑계대지 말라며 화내고 애원하면서 좀더 많은 애정과 관심을 요구한다. 이 편지들은 사랑에 빠진 영혼의 소박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연애편지의 고전
몰래 자신을 만나러 와달라며 남자 복장을 보내는 등 첩보 작전을 방불케 하는 볼테르의 편지, 만나 주지 않는 상대를 설득하고자 애쓰는 발자크의 편지, 매일 받는 편지 때문에 마음을 잡기 힘들다며 일주일에 한 번만 편지를 보내라는 카프카의 편지,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 모양으로 글자를 배열하여 그 아름다움을 찬사한 아폴리네르의 상형 편지 등에서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갖가지 방법을 볼 수 있다. 이렇듯 모든 연애에는 사연이 있고, 사랑의 밀어가 담긴 편지들이 그 연애의 증거물로 남기도 한다. 그래서 촉망받는 젊은 불문학자와 독문학자가 대문호들과 연인들이 주고받은 사랑의 글들을 모아 우리말로 옮기고 그 작가들의 사연을 실었다. - 사랑만이 인생을 달콤하게 해주니까요 -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가 빌헬미네 폰 젱에에게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인물들은 시기적으로는 근대이후의 유명한 자살자들이다. 자살자들이 자의식과 시대정신과의 고투 속에서 자살에 이르게 된 과정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저자가 역사적 관점에서 인간 주체성의 자각이 태동되었던 근대이후의 인물들의 전기를 통해 정신사를 다시 쓰게 된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저자는 각각의 인물들이 삶을 부정한 논리를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하고 있다. 각 장에서 고흐, 츠바이크, 헤밍웨이, 클라이스트, 히틀러, 롬멜, 루돌프 황태자 등 7인의 자살자들이 삶의 목표와 세계관이 달랐던 만큼 죽음에 이르게 된 과정과 양상도 각기 달랐으므로 독립된 주제의식을 가지고 고찰하고 있다.빈센트 반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우리들은 현실을 거역할 수도 없고, 또 거기에 복종할 수도 없다. 병이 드는 것은 그것 때문이므로 병은 낫지도 않으며 확실한 치료법은 있지도 않다."고 쓰고 있다. 그리고 죽음이 삶보다 위대하고 오래 계속된다고 느껴버린 불운한 천재는 자살이라는 최후의 선택으로 자신의 삶을 마감했다. 과연 인간은 무엇 때문에 자살을 하는 것인가. 그리고 무엇이 그들을 자살에 이르게 하는가. 자살을 둘러싼 견해는 다양한 방식으로 논의되고 있지만 자살자들의 그 은밀하고 복잡한 세계를 밝혀내기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 전통적으로 죽음을 다스리는 것은 종교의 영역이었고, 기성의 종교는 자살에 대해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비윤리적 행위로 금지했다. 다른 한편 근대이후 자살의 문제를 인간의 주체적 자율성의 영역으로 이해하는 의식들이 생겨났다.
이 책은 근대이후 시대의 격랑 속에서 죽음을 선택했던 7인의 작가, 예술가, 정치인들의 삶과 자살에 이르는 도정을 역사 · 전기적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는 책이다. 자기결단을 요구하는 수많은 난관에 직면하여 혼란과 불안, 욕망 그리고 때로는 죽음의 유혹에 시달리기도 하는 인간의 실존은 자살이라는 문제에 대해서 끊임없는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더구나 한 시대를 풍미했던 대가들의 죽음에 의미의 덧칠을 하여 자살을 미화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책은 그들이 왜 자살했는가 하는 문제를 자의식의 예술적 승화로 미화한다던가 아니면 병적 상태에서의 광증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또한 역사학자인 저자는 자살의 문제를 사회 병리적 현상이나 윤리적 문제로 접근하기보다는 냉정하고도 객관적 시각으로 역사·전기적인 관점에서 새롭게 바라봄으로써 세기의 자살자들을 통해 또 하나의 정신사를 쓰고 있는 것이다. 역사는 언제나 승자의 편에 서왔다. 그리고 세기의 자살자들은 그 시대의 패배자로 혹은 이단아로 인식되어진다. 그러나 헤밍웨이의 말처럼 역사가 영원히 승자들의 것은 아니다. "죽음이 언제나 인간을 이기고 승리하며, 승자도 최후에는 빈손으로 나간다."
이 책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세기의 자살자들의 정신세계는 시대를 넘어서 다시 부활한다. 그리고 그들 자신의 삶과 죽음을 재평가하도록 끊임없이 요구한다. 저자는 그들이 속한 사회와 시대 의식은 그들에게 어떻게 내면화되었으며 시대적 상황 속에서 자살의 주요한 동기를 추적한다. 그리하여 세기의 자살자들이 겪은 삶의 비극과 시대의 우울이 일체화되어 이루어진 자살자들의 죽음은 승자의 기록인 역사를 그 이면의 정신사를 통해 다시 한번 성찰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고흐, 츠바이크, 헤밍웨이, 클라이스트, 히틀러, 롬멜, 루돌프 황태자 등. 이 책에서 고찰하고 있는 세기의 자살자들은 그들의 면면만큼이나 서로 다른 삶의 방식과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자살을 선택한 그들 모두 삶에 대한 부정의 논리도 명백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이 책에서 그들이 죽음을 통해서 말하고자 했던 무언의 항의도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책은 자살이 단지 사회병리 현상이나 인간존엄성을 훼손하는 행위이며 금단의 땅이라는 관념으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주체적 행위이며, 그들이 삶을 통해 이룬 것만큼 그들의 죽음에도 다양한 각도에서 진지한 성찰과 함께 실존적 의미를 박탈하지 말아야 할 것임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
4.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 후세를 바라보며 택한 자살

 사랑으로 자란 사람만이 이후에도 자신을 사랑으로 보존할 수 있는 법이다. 자신을 사랑하려면 먼저 사랑을 받아본 적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 또한 사랑할 수 있는 사람만이 그 자신도 사랑을 받을 수 있고 그리하여 생명의 대열에 함께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랑을 세계의 중심에 설정하려 했던, 사랑을 자기보존과 세계보존의 힘으로 해석하려 했던 기독교는 잘못된 것이 아니다. '사랑받는 것이 삶의 조건'이라는 것이 바로 기독교의 본체니까. 현대인들은 기껏해야 이러한 원리를 인간의 유년기에나 적용시킬 것이다. 지금은 부모의 사랑만 있어도 어느 정도 만족할 수 있기 때문에 구태여 '신'을 고안해 낼 필요가 없는 것이다. -
클라이스트 - 낙원에서의 추방 / 마지막 작품

 세계사의 가장 결정적인 장면에서 충돌하는 천재들의 대결과 그 이면의 역사!
이들은 왜 공존하지 못하고 충돌해야만 했는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치, 종교, 군사, 예술, 문학, 철학 등의 분야에서 라이벌들의 명승부는 항상 화제가 되어 왔다.
本書《세계사의 명장면-그 이면의 역사》는 세계사의 결정적인 장면에서 만나 격렬한 투쟁을 벌이며 새로운 가치를 창조한 천재들의 대결을 그린 것이다. 이러한 장면의 이면에는 우리가 간과하거나 알지 못했던 흥분을 불러일으킬 만한 사건과 문제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이들이 왜 공존하지 못하고 충돌할 수 밖에 없었는가를 저자 골트슈미트 옌트너는 아주 새롭고 독특한 방식으로 풀어낸다.
영혼의 우정을 나눌 수 있었으나 지상에서는 화해할 수 없는 적이었던 카이사르와 브루투스, 바그너와 니체. 처음부터 화해할 수 없는 적이었던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혹은 '스스로 역사를 움직일 수 없다면, 다른 사람이 움직인 역사를 조종하기라도 해야 한다.'는 메테르니히의 말처럼 역사의 결정적인 사건에 참여함으로써 위대성을 획득한 경우도 있다. 저자는 마지막으로 예수와 유다를 등장시킨다. 이들은 인물 자체가 가지는 중량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대결의 결과가 인류에게 가장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기에 세계사의 가장 결정적인 장면으로 설정한다.
브루투스는 왜 카이사스를 죽여야만 했는가? 지금까지 우리들이 갖고 있던 등장인물들에 대한 지식은 이 책으로 상당 부분 수정될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지상의 길에서 스스로에게 부과한 사명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어떠한 희생과 투쟁을 벌여야만 했는지 공감하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카이사르나 나폴레옹, 괴테 등의 전기는 많이 번역되어 나와 있지만, 브루투스나 메테르니히, 클라이스트 등의 전기는 거의 없다. 이런 점에서 본서는 기존 전기의 결함을 메우고, 이로써 좀 더 객관적으로 그들의 삶에 대하여 판단을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며 좀 더 진실에 가까운 그들의 삶을 엿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카이사르와 브루투스 - 독재자와 자유주의자의 대결
“최상의 죽음은 불의의 죽음이다.” -카이사르-

정치적 낭만주의자들은 카이사르에 대해 자유와 로마 민족의 내적 독립성을 파괴한 사람이라고 비난해 왔다. 또한 브루투스는 보통 역사책에서 배우는 것처럼 단지 교활한 암살자가 아니라 훨씬 더 중요한 인물이다. 혁명을 오용하여 혼란에 빠져버린 프랑스의 자유를 나폴레옹이 종식시켰던 것처럼, 카이사르도 국가와 민족을 몰락으로 치닫게 하였던 방종한 개인주의적 자유를 종결시켜야 했다. 그리고 자유 파괴자로서의 카이사르는 새로운 국가 질서의 창조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자유주의자였던 브루투스와의 엄청난 충돌을 몰고 왔다.

나폴레옹과 메테르니히 - 군사적 천재와 천재적 외교가의 대결
“스스로 역사를 움직일 수 없다면, 다른 사람이 움직인 역사를 조종하기라도 해야 한다.”
-메테르니히-

세계사의 무대에서 나폴레옹에 대한 대립자로 등장한 당시의 정치가들 중 메테르니히만큼 당시의 정치에 책임을 지고 있던 사람은 없었다.
서로가 세력 균형을 이루는 유럽을 꿈꾸던 외교적 천재 메테르니히는, 자신의 독재적 권력이 지배하는 서양 전체의 통합을 추구한 군사적 천재 나폴레옹과 숙명적인 대결을 펼쳐야 했다.
유럽의 반 나폴레옹 진영의 인물들은 좀처럼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분열되어 있을 때, 이들을 한 손에 움켜쥐고 나폴레옹과 결전을 벌인 외교의 천재 메테르니히.
나폴레옹과 숙명적인 대결을 펼쳤던 메테르니히도 나폴레옹을 '세상에 나타났던 가장 놀라운 사람'이라고 인정한다. 그리고 후에 “그것은 범용하다. 나폴레옹 이후의 시간은 스스로에게 맡겨져서 멈출 수 없기에 그저 흐를 뿐, 그 누구에 의해서도 이끌어지지 않고 있다." 라고 아쉬워한다.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
“범용한 사람들과 싸워서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미켈란젤로-

너무 많은 천재들이 한 시대에 활동하고 있어서, 이 사람이야말로 그 시대가 배출한 최고의 위인이며 그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꼽는 것이 불가능한 역사상의 한 시기가 있다. 리멘슈나이더, 뒤러, 홀바인,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티치아노, 라파엘로가 함께 활약했던 르네상스 시대에서 한 사람만을 꼽아 이 사람이야말로 그 시대를 대표한다고 그 누가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여러 명이 천재들이 동시대를 같이 살아가며 활약하는 모습을 보면, 사람들은 그들을 서로 견주어보며 순위를 매기려고 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순위 논쟁은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의 대결을 직접 지켜보았던 당시의 사람들은 물론이고 현대에 이르러서도 계속되고 있다.
넘쳐나는 천재성을 다방면에서 표출한 레오나르도 다빈치, 영혼의 인간 미켈란젤로, 선배들의 작품에서 장점만을 골라 자신의 스타일을 완성한 라파엘로. 이들은 자신의 예술관을 관철시키기 위해 양보할 수 없는 경쟁을 펼쳤다.

예수와 유다 대결자이자 협력자?
“유다는 가장 신앙심이 깊었던 사람이다.” -헤벨-

지구상에 출현했던 모든 현상들 중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온 예수의 희생은 영혼의 역사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을 동반하였다. 그것은 바로 유다의 배반이다.
왜 유다는 예수를 배반했는가? 유다가 누설한 것은 무엇인가? 이러한 배반은 필연적인 것인가? 유다는 범죄자인가, 희생자인가, 아니면 신적 사명의 완성자인가? 지난 2천 년 동안 신자와 비신자들은 유다가 예수에게 범했던 그 배반의 이유와 의미에 대한 물음을 계속해 왔다. 그리고 사람들은 더 이상 성서의 전승에 만족할 수 없게 되었다. 복음서의 역사 기술에 대한 이러한 불만족은 복음서나 교회가 전하는 것보다 더 깊은 근본적 이유들이 유다를 배신으로 몰고 갔을 것이라는 예감에서 출발하였다.
유다가 누설한 것은 대체 무엇인가?
이제까지 우리는 이 의문에 대하여 '예수가 있는 그 장소를 누설했다' 는 성서의 설명에 만족했다. 그러나 예수가 어디에 있는지 그 장소를 '누설'하고 이로써 단순히 예수를 당국에 '인도'한 것뿐이라면, 그리스도교 세계관이 유다에게 부여한 그 엄청나고 소름끼치는 지위는 인정되기 어렵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더욱 '유다가 누설한 것은 대체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추적자들과 제사장들이 예수를 감시하고 그를 체포할 수 있는 장소를 알아내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유다가 누설한 것은 예수가 있는 장소가 아니라 좀 더 본질적인 것, 역사적 행동으로서의 결정적인 것을 포함해야 한다. 그것은 무엇인가? - 5. 마지막에 배신하는 것보다는 처음부터 거부하는 편이 낫다 - 괴테와 클라이스트

 프랑스 저널리스트 마르탱 모네스티에의 자살에 관한 백과사전이라 할 만큼 인류에게 일어났던 모든 자살의 기록을 꼼꼼하게 정리했다. 그간의 자살에 대한 책들이 대부분 과학이나 철학, 종교적 관점에서 접근했다면 이 책에서는 단순하고 일상적인 현실에서 출발하고 있으며, 자살에 관련한 일화, 즉 신문 사회면의 기사 같은 것을 그 수준 그대로 모아서 자살의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다.
자살에 관해 다양한 물음을 던지면서 언제, 어떻게, 누가, 왜 자살을 기도했는가를 수많은 사진과 함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자살’이라는 말이 불러일으킬 만한 어둡고 불길한 분위기가 전혀 느껴지지는 않는다. 책 곳곳에서 자살과 관련된 유머러스하고 재치 있는 일화들을 만나볼 수도 있다. 크고 작은 인간 역사와 일화, 사회기사들을 통해 자살에 대햐 수없이 많은 질문들을 던져가면서 각자의 해답을 찾아가는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영화배우 장국영이 홍콩의 한 호텔에서 투신 자살했다. 동성애에 따른 갈등과 우울증이 원인이었다는 게 지금까지 알려진 이유다. 수많은 사람들의 찬사를 받았던 그는 이제 살아 있는 사람들의 곁을 떠났고 추억만이 남았다. 그 이유가 더 드러난다 해도 떠난 자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삶과 죽음, 그만큼 자살은 인류의 역사만큼 오래된 삶의 기록이다.
한 일간지의 보도에 따르면, 지난 2000년 우리나라에서 자살로 숨진 이들의 통계치는 하루 평균 17.7명, 연간 6,460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와 함께 10대~20대 젊은층의 자살이 늘어나는 것도 새로운 문제점으로 거론되고 있다. 이런 현상의 주요 원인으로는 경제위기에 따른 경제적 박탈감과 가족해체의 심화가 지적되고 있다. 이처럼 자살이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닌 집단적, 사회적 문제의 핵심원인으로 떠오르면서 자살에 대한 관심사가 크게 확산되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프랑스의 한 저널리스트가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자살에 관한 수많은 자료를 검토해가면서 저술한 책 <자살>이 출판되었고, 초판이 소화된 뒤 절판 후 다시 1년이 지난 지금 미진했던 부분을 보완하고 하드커버로 장정을 바꾸어 새로운 개정판이 나왔다.
프랑스 저널리스트 마르탱 모네스티에가 쓴 이 책은 자살에 관한 백과사전이라 할 만큼 인류에게 일어났던 모든 자살의 기록을 꼼꼼하게 정리했다. 그간의 자살에 대한 책들이 대부분 과학이나 철학, 종교적 관점에서 접근했다면 이 책은 단순하고 일상적인 현실에서 출발하고 있으며, 자살에 관련된 일화, 즉 신문 사회면의 기사 같은 것을 그 수준 그대로 모아서 자살의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다고 저자는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이 책의 부제는 ‘자살의 역사와 기술, 기이한 자살 이야기’. 부제가 암시하듯 이 책은 자살에 관해 다양한 물음을 던지면서 언제, 어떻게, 누가, 왜 자살을 기도했는가를 수많은 사진과 함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자살’이라는 말이 불러일으킬 만한 어둡고 불길한 분위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책 곳곳에서 자살과 관련된 유머러스하고 재치 있는 일화들을 만나볼 수도 있다. 저자는 말한다.
흔히 통틀어 ‘사회면 기사’라고 폄하하는 ‘사소한 얘깃거리’, ‘일화’, ‘비화’ 들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여러 시대에 걸친 자살의 역사를 기술하려고 한다면, 물론 과학적 엄밀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작은 이야기들이 사실은 사람들의 진정한 관심거리를 더 정확히 반영해주는 거울과 같은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이 책 한 권을 준비한 지도 20년이나 되었다.
“우리가 이 책 한 권을 준비한 지도 20년이나 되었다”라는 말에서 드러나듯, 그 어떤 자살 유형도 저자의 엄밀하고 열정적인 사실조사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감정적 자살로부터 가미가제의 자살까지, 희생자살에서 저항자살까지, 모방자살에서 집단자살까지, 문학에서의 자살에서부터 종교적인 자살권고에 이르기까지.
왜 스물다섯도 안 되는 젊은 청년들의 자살률이 가장 높은가? 왜 이상한 자살기구를 발명하여 자살하려 하는가? 왜 지역과 계절에 따라 자살률이 변하는가? 자살하는 방법과 인간의 상상력은 어디에까지 미치고 있을까? 동물들은 왜 자살하는 것일까? 문학에서 자살이 그토록 빈번하게 다루어진 이유는 무엇인가? 이 책의 독자들은 크고 작은 인간 역사와 일화, 사회기사들을 통해 수없이 많은 질문들을 던져가면서 각자의 해답을 찾아가는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
앙리에트 보젤은 남편에게 3장의 긴 편지를 썼고, 유언의 조언자에게도 편지를 썼다."우리,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와 나는 스틴밍이라는 여관에서 조금은 유감스러운 상태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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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혹은 문학작품 속 주인공의 그늘에 가려 있거나 비련의 여주인공이었던 여성들을 등장시켜 페미니즘적인 시각으로 재구성한 책이다. 그녀들의 옆에는 모두 ‘위대한 남자’가 있었으나 남성 중심적인 사회 통념에 갇혀 모두 제 할말을 하지 못한 여성들이다. 하녀였지만 후에 괴테의 부인이 된 실존인물 크리스티아네, 세익스피어의 4대 비극중 하나인 <오셀로>의 여주인공 데스데모나 등이 등장한다.
표제작 <데스데모나, 당신이 말을 했더라면!>은 남편 오셀로의 오해로 억울하게 죽은 데스데모나의 이야기이다. 이 글에서 데스데모나는 사랑하는 남편의 손에 죽어가는 절박한 순간, 마지막으로 남편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애쓴다.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두사람의 사랑이 파멸에 이르지 않게 하기 위해서 오셀로의 이성에 호소하는 것이다. - 6. 네가 주문을 알아맞히기만 한다면 귀머거리 개 롤로와 산책을 하던 에피 브리스트의 혼잣말

 17세기 초 유럽을 열광시킨 세계 최초의 베스트셀러 『돈 키호테』. 수 많은 젊은이들이 죽음까지 모방하게 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어른들의 마음까지 사로잡은 아동문학의 고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만화보다 더 재미있고 영화보다 더 극적인 『보물섬』과 『정글북』등 누구나 꼭 한 번 읽고 싶었던, 그리고 반드시 읽어야 할 고전소설 50편을 골라 그 속에서 펼쳐졌던 인간들의 다채로운 운명을 요약해 놓고 있다. 영화로 다시 태어난 소설 속 명장면(화보 300컷)들은 독자들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을 것이다.해냄 클라시커 50 시리즈의 열두 번째 책인 『고전소설』은 세계 문학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16~19세기 명작 소설 50편의 내용과 창작 배경을 담은 책으로, 이미 소개된 바 있는 『클라시커 50―현대소설』에 이은 것이다. 인쇄술의 발달과 문맹률의 감소에 힘입어 세계 최초의 베스트셀러가 된 이 작품들은 소설의 모범을 보여주었으며, 당시의 독자들을 사로잡은 데 그치지 않고 50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만인에게 사랑받고 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들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남녀노소 모두에게 열렬히 애독되고 기억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정답은 이 소설들이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감정들을 담고 있다는 데 있다.
새뮤얼 존슨이 ‘소설은 주로 사랑에 대해서 다루는 수수한 이야기’라고 말한 것과 같이, 이 작품들은 언제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는 평범한 일이지만 무엇보다 흥미롭고 극적이며 누구에게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우리의 인생사를 다룬 재미있는 이야기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고전소설’에 대해 갖고 있는 선입견은 어떤 것인가? ‘고전’이라고 하면 왠지 지루하고 재미없고 어려운 옛날 소설로만 생각하며 멀리하다가 우연한 계기로 고전을 한 편 읽고 ‘고전소설이 이렇게 재미있을 수 있다니!’하고 놀란 경험이 누구나 한 번씩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19세기 사람들은 지금 우리가 따분하기만 할 거라고 생각하는 이 소설들을 읽기 위해 하루 종일 선착장에서 원고를 실은 배를 기다렸다는 사실을 안다면?
『클라시커 50―고전소설』은 우리가 고전소설에 대해 갖고 있는 선입견, 경외감을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책이다.
영화로 다시 태어난 소설 속 명장면(화보 300컷)들은 독자들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고, 작품의 줄거리는 물론 대중들의 반향, 혹평까지 담은 친절한 설명은 고전에 대한 관심을 북돋는다. 특히 세르반테스와 볼테르, 톨스토이 같은 대가들이 세기를 뛰어넘는 명작 소설들을 짓게 된 창작 배경과 그들의 삶은 그들이 창조한 소설만큼 흥미진진하다.
『몽테 크리스토 백작』이 70명의 직원이 매년 2~30편씩 소설을 찍어내는 ‘소설 공장’에서 만들어진 작품임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가난과 간질, 도박벽에 시달리던 도스토예프스키가 짧은 시간 안에 소설을 지어내지 못하면 글쓰는 노예가 될 위기에 처해 쓴 작품이 『죄와 벌』이라는 사실은 얼마나 경이로운가! 어린 앨리스를 향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탄생시킨 원동력이었다는 사실은 또 어찌나 아름다운지.
명작소설 50편에 대한 흥미진진한 이야기들과 충실한 정보, 명쾌한 문학 지식을 두루 담은 『클라시커 50―고전소설』은 고전의 세계가 얼마나 흥미롭고 매혹적인지를 알려주는 훌륭한 교양서이다. 또한 이 책을 통해 아직 국내에 번역되지 않은 14편의 명작소설을 만날 수 있다. - 에피 브리스트- 테오도르 폰타네

  문화적 책읽기의 즐거움
문화의 중심에는 책이 있다. 책은 지식과 문화의 창출과 전수의 핵심 영역을 담당했으며, 시대를 읽는 눈이 되어왔다. 철학자와 시인, 학자와 예술가는 자신들이 깨달은 바를 책으로 독자들에게 전해온 것이다. 이렇듯 인류 문명을 지탱해왔던 인간의 지적활동은 대부분 문자와 책을 통해 이뤄졌다. 하지만 20세기 들어서면서 점점 강력하게 부상해온 다양한 매체들 틈바구니에서 문자와 책은 과거의 화려한 독점적 지위를 상실하고 있다. 혹자들은 책의 종말을 논하기도 했고, 과거의 지위를 인터넷이나 텔레비전 등이 대신할 것이라 공언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성급한 판단이었음이 증명되고 있다. 인터넷은 1초에도 수백만 개의 정보를 영토의 구분 없이 쏟아내고 있지만 정작 이를 수용하는 우리들은 과도한 정보 홍수 속에서 질식할 지경이라 호소하는 실정이다. 정보와 지식은 무엇보다도 체계적인 관리와 인간의 폭넓은 인식능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아주 간명하게 보여주는 책이 바로 취른트가 쓴 <책>이다. 이 책은 <교양BILDUNG>으로 널리 알려진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시리즈의 두 번째 권이다. <교양>이 역사, 철학, 문학, 예술 등 교양인을 만드는 요소들을 소개한 책이라면, <책>은 이러한 교양과 지식을 만드는 데 필요한 도구인 책에 대한 책인 셈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단순히 여러 책의 내용에 대해 짤막하게 소개하는 책 정도로 여길 수도 있다. 아니면 기껏해야 책의 내용을 이른바 다이제스트 형식으로 가공하여 만든 인스턴트 지식 정도로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은 단순히 책 속에 담긴 지식의 전달에만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책 속의 지식을 지식으로 만드는 요인과 책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지식의 의미에 대해 소개한다. 여기에 취른트는 학문적이고 현학적인 표현을 걷어내고, 읽기 난해한 고전들을 오늘날의 시각에서 알기 쉽게 일반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아울러 현대사회의 실정을 고려하여 고대와 중세의 고전뿐 아니라 현대소설과 사이버픽션, 아동도서까지 포함시켜 교양 정전正典의 현재성을 두루 갖추고 있다. <책>을 읽은 독자들은 고전작품들을 살펴보고 무엇을 읽어야 할지 결정할 수 있다. 이제 그들은 문화와 시대정신을 정확히 짚어낼 수 있는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교양>을 잇는, 사람이 읽어야 할 모든 것을 담은 <책>
지난 2001년 가을, 국내에 번역 출간된 슈바니츠의 <교양>(부제: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은 ‘교양’ 열풍을 일으키며, 현재까지도 인문학 출판의 스테디셀러로 자리잡고 있다. 768쪽이라는 적지 않은 분량의 이 책이 많은 독자들에게 읽히게 된 이유는 교양인을 만드는 기본요소들을 현학적인 접근 대신, 쉽고 간결한 문체로 다루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교양>에 따르면, 교양인에게 필요한 기본요소는 역사와 철학, 문화과 예술에 대한 이해이며, 사회를 자기의 내면에 비추어봄으로써 사회를 결속시키는 도덕적 구속력을 생성해내는 유연하고 자성적인 정신을 뜻한다. 슈바니츠는 이러한 교양의 기초가 없는 전문가는 한 뼘도 안 되는 전문영역에 갇혀 평생을 살아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그 울타리를 벗어나는 순간 그들은 길을 잃고 헤매게 된다고 말한다. 이번에 출간된 <책>은 ‘사람이 읽어야 할 모든 것’이라는 부제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교양>과 같은 시리즈물이다. <책>은 <교양>과 마찬가지로 전문지식의 한계를 지적하고, 문화 전반에 대한 지식 습득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 방법의 하나로 문명의 발명품인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을 것을 제안한다.
<교양>과 <책>이 한 짝을 이루는 것은 사실 당연한 일일 것이다. 우리는 활자와 책을 통해 역사를 알게 되고, 자신의 정체성과 시대를 읽는 눈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오디세이아>로 고대 그리스인의 세계관을, <햄릿>으로 지식인의 문제를, <돈 키호테>로 세계 개선자의 운명을, <파우스트>로 지식의 무절제함을, <자본론>으로 자본주의의 모순을 이해하게 된다. 요즘 들어 다양한 매체들이 과거의 책의 역할을 함께 병행하기도 하지만 수용자(독자)들이 행간을 읽으면서 얻는 사고력과 집중력은 그 어떤 매체도 책을 따라오기 힘들다. 그리고 교양이란 단순한 정보의 나열이 아니라 정보를 체계적인 지식으로 만드는 능력이라는 점에서 책은 교양에 이르는 데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될 것이다.
지식의 바다를 밝히는 항해용 나침반
그렇다면 책 중에서도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현대사회처럼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말이다. <교양>의 저자인 슈바니츠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 책은 고전을 소개함과 동시에 우리시대가 요구하는 지식의 새로운 가능성를 모색한다. 고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 문화적 시각, 읽는다는 행위에 대한 설명 등 쉽지 않은 테마들을 자연스럽게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이를 통해 과거의 고전들이 우리시대에도 새로운 시각을 전해주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사이버픽션이나 아동도서들이 의미 있는 새로운 범주의 고전으로 인식될 수 있다. 아울러 정치, 경제, 사회학 같은 사회과학 서적들도 추상적이고 도식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일상 속에서 그 의미가 분명하고 쉽게 드러나게 한다. 이 모든 것은 문화적인 책읽기가 독자들에게 주는 효과다. 비록 이 책이 서양 고전만을 다룬다는 한계를 갖고 있지만 여전히 한국 독자들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은 이 책이 일관되게 추구하는 문화적인 책읽기의 모습 때문이다.
연대기가 아닌 주제에 따른 분류
이 책은 성서에서 <리바이어선>을 거쳐 <해리 포터>까지 다루고 있다. 그리고 호메로스에서 셰익스피어, 마르크스를 거쳐 헤르만 헤세까지 사상가, 철학자, 시인 등 다양한 분야의 거인들을 소개한다. 이렇듯 이 책은 고대에서 현대까지 3천 년이 넘는 장구한 역사 속의 고전들을 다루고 있지만 단순히 연대기로 짜맞추고 있지는 않는다. 또한 고정된 틀로 책들을 엮어 절대화시키는 것도 아니다. 이 책은 사회문화를 구성하는 주제에 따라 고전들을 분류하여 일상의 문제로까지 접근시킨다.
이 책의 차례를 보면 저자가 책들을 분류해놓은 범주들을 훑어볼 수 있다. 그 범주들은 문명을 지탱하는 여러 요소들을 담고 있다. 정치사상을 다루는 고전들 외에도 ‘학교 고전’, ‘셰익스피어’, ‘아동도서’, ‘성’, ‘경제’, ‘유토피아 : 사이버 세계’ 등으로 구성된다. 이렇듯 이 책은 방대한 범주들을 다루고 있지만 결코 모든 전문 분야의 고전들을 총망라하고자 욕심 내지는 않는다. 저자가 선택한 기준은 다름 아니라, 오늘날 ‘고전’으로 여겨지는 책들과 각 분야에서 이미 인정받은 책들이다. - <에피 브리스트> 테오도르 폰타네

 사랑과 고통, 유혹과 간통이라는 전통적인 주제는 지난 수세기 동안 동서양을 막론하고 위대한 문학 작품을 통해 끊임없이 표현되어 왔다. 저자 디터 벨러스호프는 이 책을 통해 근대 계몽주의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백년 간의 문학사를 통틀어 각기 다른 시대적 배경과 사회계급, 환경 속에서 인간의 원초적 욕망인 '리비도(Libido)'가 어떻게 발현되고 또 억압받는지를 심도있게 서술하고 있다.인간 존재의 영원한 화두, '에로스', 왜 에로스를 말하는가?
아침에 눈 뜰 때부터 저녁 잠자리에 들 때까지 현대인은 에로티시즘의 변형된 여러 형태들 속에서 생활한다. TV를 켜면 광고 속에 교묘히 자리를 틀고 앉아 있는 것도 에로티시즘의 하나요, 영화나 문학은 말할 것도 없고, 사진, 패션, 음악 그리고 각종 제품의 디자인도 에로티시즘을 저변에 깔고 있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가 없다. 철학자들 또한 시대의 흐름에 따라 에로스를 여러 가지 말로 정의 내리고 있다.
칸트(1724~1939)는 에로스를 '이성의 힘으로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는 당위의 문제'라고 일축했으며, 마르크스(1818~1883)는 '경제적으로 한정되고 인간에 의한 착취와 피착취의 문제만 해결되면 에로스는 저절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라고 규정했다. 20세기에 들어서야 프로이트(1856~1939)의 '무의식' 개념이 사회에서 인정받으면서 인간에게 '리비도(Libido)', 즉 성본능이 존재함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인류 역사의 흐름 속에서 때로는 무시되고 금기시되었으며 때로는 그 존재를 인정받기도 했던 '에로스'가 예술의 제1 형식인 '문학' 속에서 어떻게 발현되고 변천되어 왔는지를 깊이 있게 통찰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학 속의 에로스≫는 빛나는 가치를 갖고 있다.
세기의 걸작 속에 흐르는 에로티시즘의 내밀한 유혹
이 책에는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세계 문학의 거장들이 중심축으로 자리잡고 있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부터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 미셸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D. H. 로렌스의 ≪아들과 연인≫, 에밀 졸라의 ≪나나≫, 우엘벡의 ≪소립자≫ 등의 작품 속에서 그 시대의 배경과 사회적 분위기에 둘러싸인 한 개인의 욕망이 어떻게 좌절되고 있는지 통렬하게 분석하고 있다. 또한 작가의 개인사와 시대적 배경과의 관련성 또한 배제하지 않고 꼼꼼하게 들여다 보고 있다.
사회적으로 보잘 것 없는 여자하고만 성교가 가능했다는 괴테, 귀족 집안 유부녀들의 도움을 받아 사회적 출세를 꿈꾸는 발자크나 스탕달, 동성애 성향이 만들어내는 사회적 문제, 기묘한 변덕으로 죽을 때까지 아내에 대한 증오심을 버리지 못한 톨스토이 그리고 돈처럼 성도 시장의 법칙에 따르게 된 세상에서 일부 남자들이 모든 여자들을 차지해 버렸다면서 집안으로만 숨어 버리는 우엘벡. 이 위대한 작가들의 개인사 안에 있었던 성적인 문제들을 들여다 보면서 우리는 관음증과 호기심을 충족시키면서 우리의 일상사 또한 되돌아 보게 된다.
한 작품을 예로 들자면 괴테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쓰기까지는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담과 대학 시절 그의 학우였던 카를 빌헬름 예루살렘의 자살이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하고 있다. 괴테는 1772년 몇 달 동안 부프 집에 드나들면서 이 집안의 둘째 딸인 샤를로테를 사모하게 된다. 처음에는 그녀가 이미 약혼한 상태라는 사실에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지만 점점 내면의 갈등으로 고민하던 그는 도덕과 현실의 원칙에 따라 그녀가 요한 크리스티안 케스트너와 결혼하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는 그의 소설에서 베르테르가 약혼자가 있는 로테란 여인을 사랑하면서부터 느끼는 고뇌와 일치한다. 게다가 그의 학우였던 카를 빌헬름 예루살렘이 상관의 부인에게 접근했다가 거절당한 후 마음의 상처를 받고 자살하는 사건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쓰는 직접적인 자극제가 되었다.
그리고 이 작품의 배경인 18세기의 상황 또한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이때는 경제적으로 부유해진 시민 계층이 성직자와 귀족 계층에 이어 완전히 세 번째 신분으로 올라서면서 점점 사회적 영향력이 커져가는 시기였다. 또한 이 시기에 처음으로 연애 결혼이라는 새로운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지만, 아직까지 시민 문화는 성을 '도덕과 사랑'이라는 관념 속에 포장하는 때였다. 그리고 이런 시대적 문화의 틀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읽을수록 재미가 느껴지는 에세이 형식의 글, 살아 숨쉬는 예문
이미 몇 편의 소설을 통해 하인리히 뵐 문학상, 프리드리히 횔덜린 문학상, 요제프 브라이트바흐 문학상 등 화려한 수상 경력을 갖고 있는 디터 벨러스호프는 마치 주인공의 심리를 꿰뚫어 보면서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관능적 코드를 조율하고 있다. 근대 계몽주의 이후 수백 년 간의 소설사를 관통하는 그의 분석은 독자들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켜 줄 뿐 아니라, 에세이 형식의 글로써 읽을수록 재미가 느껴지는 힘이 있다. 인간의 자의식에 대한 이해는 헤아릴 수 없는 깊이가 있고, 맛볼수록 단맛이 느껴지는 기이한 음식처럼 읽는 재미 또한 적절히 어우러져 책장을 넘기는 즐거움이 쏠쏠하다. 또한 작품별로, 테마별로 매우 흥미로운 예문을 발췌한 점은 이 책의 손꼽히는 장점이다. 예를 들어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중 다음과 같은 구절을 뽑아 놓았다.
"내가 전에 알베르틴에게 말하던 것과 똑같았다. 그녀가 나를 사랑하도록 만들기 위해 '난 너를 사랑하지 않아'라고 말하고, 그녀가 나를 좀더 자주 찾아오도록 '사람들을 보지 않으면 난 그들을 잊어버려'라고 말하고, 이별의 생각에서 그녀를 앞지르기 위해서 '난 너와 헤어지기로 결심했어'라고 말했다. 그렇듯이 지금 나는 그녀가 일주일 안에 돌아오기를 간절히 원하기 때문에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영원히 안녕.' 그녀를 다시 보기를 원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다. '너를 한 번 더 만나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해.' 그녀와 헤어져서 사는 것이 내게는 죽음보다 더 끔찍하게 여겨지기에 나는 이렇게 썼다. '우리가 함께 하면 불행할 거라던 네 말이 맞았어.'"
위의 장면은 자신의 동기를 감추고 거리 두기로 일관하는 사랑싸움의 묘사를 통해 사도마조히즘의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형태를 적절히 보여 주고 있다. 저자는 '그림자놀이'라고 부르는 이러한 행위를 일종의 섬세한 권력 놀이의 하나라고 평가하고 있다. 또 스탕달의 ≪에고티즘(자아주의) 회상록≫에서는 작가 자신의 회고록 성격의 예문을 보여주고 있는데 매우 흥미롭다.
"얘야, 넌 머리가 좋지, 수학 과목에서 그렇게 우수한 성적을 받았으니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구나. 하지만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다. 세상은 오직 여자들을 통해서만 위로 올라갈 수 있단다. 넌 못생겼지만 사람들이 네가 못생겼다고 비난하지는 않을 게다. 개성을 갖고 있으니까. 앞으로 네 애인들이 너를 버리고 떠날 텐데 지금 하는 내 얘기를 잘 기억해 두었다가 그대로 실천하렴. 버림을 받은 순간에는 누구나 자신을 우습게 여기기가 아주 쉽다. 그런 일이 한 번 일어나면 남자는 다른 여자들 눈에 아주 형편없는 존재로 보인다. 그러니까 버림을 받거든 24시간이 지나기 전에 얼른 다른 여자에게 사랑을 고백해라, 더 나은 사람이 없을 경우에는 하다못해 하녀에게라도 괜찮다." 나이든 삼촌이 17살의 스탕달에게 충고하는 이 대목은 작가가 가진 삶에 대한 태도, 즉 신분상승을 위해서 권력을 가진 이들의 부인들을 유혹하여 결국 목적을 이뤄내는 속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도발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도판
이 책에는 에로티시즘을 주제로 하는 다양한 작가들의 도판이 함께 실려 있다. 책의 완성도를 높이고자 원서에는 없는 도판을 새롭게 선정하고 편집한 것이다. 백화점식 나열이 아닌 각 장의 주제에 부합하는 도판을 찾기 위해 애썼다. 이 부분은 ≪팜므파탈≫, ≪사비나의 에로틱 갤러리≫ 등의 저서로 잘 알려진 이명옥 관장(사비나 미술관)의 적극적인 자문을 받았음을 밝힌다. 클림트를 비롯해서 르느와르, 고갱, 에곤 쉴레, 뭉크, 샤갈, 르네 마그리트 등 관능적인 아름다움을 강조한 작품을 통해 책의 온기가 더욱더 살아나게 되고 보는 이로 하여금 도발적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 5. 간통한 여인들 폰타네 <에피 브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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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세기 철학은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참혹한 전쟁경험,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의 급속한 발달로 인한 인간소외의 문제 등 이전 시기와는 또다른 ‘인간의 문제’에 대해 사유했다. 그 가운데 우리에게 “비판이론”을 통해 잘 알려진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철학적 사유는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선구적 역할과 발터 벤야민 등 주변 지식인들의 끊임없는 지적 교류를 통해 그 영향력을 행사해왔으며, 21세기 들어서도 그 지적 전통은 하버마스와 그 제자(대표적으로 악셀 호네트)들을 통해 계승되고 있다. 이들의 사상적 맹아를 찾는다면 그것은 바로 제1세대를 대표하는 호르크하아머와 아도르노의 공저인 『계몽의 변증법』에서 처음 발표된 개념 “도구적 이성”에 잘 나타나 있다. 즉 인간의 삶이 자신의 주체적 사유나 실천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거대한 사회 전체 속에서 독자적 실체도 지니지 않은, 물질적 생산과정의 부속물이 되어버린 소외된 존재로서의 인간이 바로 현대산업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자화상이라는 것이다.

아도르노에 대한 탁월한 입문서 - 아도르노의 체취가 그대로 드러나
그러나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사유세계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더군다나 아도르노의 글쓰기는 책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독해에 이르는 길이 결코 쉽지 않음을 곳곳에서 보여준다.
하지만 그는 우리들에게 의사소통의 지름길을 하나 남겨두고 갔다. 그것이 바로 『미니마 모랄리아』이다.
이 책은 그가 나치 집권의 박해에서 벗어나 미국 체류기간에 쓴 에세이 형식의 글로 153개의 단상(斷想)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제2차 세계대전의 참화와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라는 참혹한 인간실존의 위태로움을 직접 목도하면서 쓴, 이 책의 부제가 말해주듯이 “상처받은 삶에서 나온 성찰”이 아무런 꾸밈없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아울러 이 책은 아도르노 자신이 헌사에서 밝히고 있듯이 『계몽의 변증법』의 후속편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두 책은 밀접한 연관 속에 있다. 다만 아도르노 스스로 누누이 밝히고 있듯이 『미니마 모랄리아』는 난삽하고 지루한 이론적 천착보다는 자신의 내밀한 속내를 아무런 꾸밈장치 없이 자유분방하게 써내려간 책으로 우리에게 난해한 사상가로만 알려진 아도르노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뒤틀린 현대자본주의 산업사회 속에서의 인간의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
이 책에서 아도르노는 인간의 “삶”에 대해 직접적으로 이야기한다. 개인이든 인류 전체든 “삶” 때문에 벌어지는 다양한 인간관계 속에서 발버둥치고 처절하게 살아가지만, “삶”에 대해 솔직하고 진지하게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터부시된 세상에서 아도르노는 “삶” 자체를 진지한 철학적 성찰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는 우리의 “삶”이란 예전의 철학자들이 말한 바와 같은 자율성과 독자적 실체로서의 삶은 이미 사라져버리고 물질적 생산과정(즉 현대자본주의 체제)의 부속물이 됨으로써 사적(私的) 영역이나 단순한 소비의 영역으로 변해버린 “뒤틀린 양상”으로 파악한다.
153개의 단상으로 이루어진 이 책의 목차만 보더라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자본주의 사회의 삶의 본질에 대해 그가 얼마나 많이 직접적으로 발언하고 있는가를 잘 살펴볼 수 있다. 즉 『계몽의 변증법』이 이론화 작업을 통해 현대자본주의 사회를 도구적 이성이 지배하는 사회로 파악하였다면, 『미니마 모랄리아』는 바로 그러한 현실이 우리 “삶” 속에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가를 아도르노 개인의 체험을 바탕으로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곧 자신과 외부세계와의 견실한 관계설정 속에서 세상이라는 망망대해를 헤치며 삶을 일구어나가는 “주체”였던 예전의 개인이 현대산업사회에 들어서 무력화되고 불구화된 모습 그 자체이다.
『미니아 모랄리아』에서 이러한 점은 철저히 “개인”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체계”의 그물망(속물화된 자본주의 체제를 의미함)이 더욱 촘촘히 인간 개개인을 옥죄어가는 양상을 드러내는데 확실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그러한 현실을 넘어설 수 없는 현대인의 고민이 바로 이 지점에서 포착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곧 “자율적 주체”를 갈구하지만, 이미 도구적 이성으로 변해버린 현실의 “인간”들이 꽉 들어찬 세계임을 자각하는 순간, 그 탈주를 꿈꾸기가 얼마나 힘든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우리 시대의 자화상에 대한 성찰 요구
아도르노는 실증주의적 사고방식과 조야한 낙관주의, 근시안적 비판, 사유보다는 이미지에 길들여지고, 실상을 파고들기보다는 소통에 중점을 두는 문화상품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고통스럽지만 진지한 내적 “성찰”을 요구한다. 아도르노의 “아우슈비츠 이후 여전히 시(詩)를 쓸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비록 그가 나치 집권 아래의 유대인 학살에 대한 성찰적 아포리즘으로 남긴 말이지만, 아직도 우리에게는 유효한 말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바로 세계화의 진행속도와 맞물려 더욱 거세지는 신자유주의의 파고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 책의 결론 부분에서 보이듯이 세상의 틈과 균열을 폭로하고 왜곡된 실상을 파헤친 다음 그러한 세상에 대해 비판적 거리를 유지한 채 슬픈 눈으로 세상을 관조하기에는, 그래서 새로운 구원을 희구하기에는 어쩌면 21세기는 너무 엄혹한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듭 강조하지만 이 책의 부제가 말해주듯이 “상처받은 삶에서 나온” 아도르노의 성찰을 통해 우리 시대를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음은 하나의 위안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프리즘―문화비평과 사회』는 섬세하고 날카로우며 비판적인 깊이를 지닌 20세기 최고의 지성으로서 비판이론의 정초를 마련한 테오도어 W. 아도르노의 문화비평 에세이집이다. 1930년대 말에서 1950년대 초반까지 저술, 발표해온 열두 편의 에세이를 모은 이 책에는 체계를 거부하고 동시적, 불연속적, 전방위적으로 펼쳐지는 그의 언어와 철저한 변증법적 사유가 생생하게 녹아들어 있다. 아도르노는 사회연구의 입장에서 문화비평, 유토피아에 관한 사유, 음악에 관련된 현상들, 동시대의 철학과 문학을 비판하고 있다.
철저한 변증법적 시각으로 문화 전반을 분석하는 탁월한 에세이들
이 책의 간판 에세이라고 할 수 있는 「문화비평과 사회」에서 아도르노는 문화와 문화비평이 비판적 의미를 상실하고 현실 개입을 포기하며 소비재가 되어 단순한 이데올로기로 타락해온 현상에 주목한다. "문화비평 전반은 정작 문화를 이루고 있는 인간과는 무관하게 되어버린 총체적인 야만상태"이며, "문화비평가는 삶 자체의 사물화가 과도한 계몽보다는 계몽의 부족에 근거한다는 점, 현재의 편협한 합리성에 의해 인류가 당하는 훼손들은 총체적 비합리성의 상흔이라는 점을 통찰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아도르노는 현대 사회 전체가 옥외감옥으로 변해 그 속에서 무엇이 무엇에 종속되느냐가 전혀 문제시되지 않을 만큼 모든 것이 한 덩어리가 되는 경향을 지적한다. 아울러 문화비평의 여러 방향을 분석, 검토한 후 이에 맞서는 것으로 변증법적 문화비평(가)을 내세우고 있다.
"문화가 일단 전체로서 받아들여질 경우, 이미 문화 자체의 진리 요소, 곧 부정은 소멸한다"는 것은, 아도르노의 핵심 명제인 "전체는 비진리다"와도 상통한다. 기존 지배질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여러 형태의 사고방식에 대한 아도르노의 단호한 거부태세 또한 이러한 맥락에 닿아 있다.
각각 만하임, 슈펭글러, 베블런을 다루고 있는 「지식사회학의 의식」 「몰락 이후의 슈펭글러」 「문화에 대한 베블런의 공격」은 바로 아도르노의 이러한 입장을 드러내고 있는 에세이다. 여기에서는 "아무 탈출구도 찾지 못하는 자유주의자가 독재적인 사회조직에 자신은 반대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것의 대변자가 되는" 사례로서의 만하임, 언론의 위력, 대중의 노예화, 독재정치 등과 관련해 뛰어난 예견력을 보이면서도 "현상으로 나타나는 모든 것을 '모든 것은 이미 존재한 것이다'라는 공식만으로 추상해버리는" 폭력을 가하는 "환멸의 역사철학자"로서의 슈펭글러에 비판의 초점이 맞춰진다. 또 "상품 소비는 약탈의 원칙을 특징으로 하는 역사의 초기 단계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진정한 욕구 충족이나 베블런이 즐겨 삶의 풍요라고 칭하는 것에 복무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특권, 지위에 복무한다"면서 베블런의 과시소비설을 비판한다. 「올더스 헉슬리와 유토피아」에서는 지배체제에 의해 욕구가 만들어지고 조작되는 메커니즘을 인상적으로 그려낸 올더스 헉슬리에 대한 아도르노의 관심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물질문명을 야유하며 정신적 가치를 회복하려는 헉슬리의 입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한편 아도르노는 철학자, 사회학자로서의 재능도 뛰어났지만 쇤베르크의 현대음악에 영향을 받은 음악가요 작곡가이기도 했다. 또한 음악비평가로서 고전음악과 대중음악을 가리지 않고 음악의 모든 면에 대해 광범위하게 글을 써왔다. 이 책에도 세 편의 음악비평 에세이가 실려 있다.
아도르노의 문화산업론의 핵심이 담겨 있는 「초시대적 유행」에서는 재즈를, "사실상 현재의 전체 이데올로기와 모든 문화산업에 귀속되는 메커니즘들이 두드러지게 표면화되어 있"는 것으로 본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재즈는 유행과 마찬가지로 "사태 자체가 아니라 내보이는 것이 중요"하며 변형 속에서도 규격화되어 있는 컨베이어벨트 방식, 규범화된 즉흥성, 일탈의 제거, 사이비 개성 등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실내에 어울리게 깨끗이 잘 세척되어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제도로서의 재즈, 그 안에 담겨 있는 지배질서에 대한 순응의 계기를 비판하고 있다.
「바흐 애호가들에 맞선 바흐 옹호」는 종교적으로 채색함으로써 바흐를 "중립화된 문화재" "잘 보존된 바로크 식 도시를 위한 오르간 축제극의 작곡자"로 만든 바흐 애호가들에게 이 또한 한 토막의 이데올로기일 뿐이라는 신랄한 일격을 가한다. 아도르노는 그의 음악을 교회의 영역에 묶어놓는 데 반대하며 당시 매뉴팩처를 통해 진행되던 물질적 생산의 합리화 과정과 유사하게 합리적으로 구성된 작품의 이념을 최초로 구체화했다는 데서 바흐의 음악사적 의의를 평가한다.
「아르놀트 쇤베르크」는 현대음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12음기법의 창시자이자, 아도르노가 지배질서에 대한 순응의 자세를 방해하는 진정한 현대예술의 전범으로 꼽는 아르놀트 쇤베르크에 관한 논의이다. 쇤베르크의 음악은 듣는 사람의 적극적이고 집중적인 동참을 요구한다. "다수의 동시적인 것에 예민하게 주목하고, 무엇이 나올지 항상 이미 알고 있는 관습적 청취지침을 포기하며, 일회적이고 고유한 것을 긴장하며 지각하는 자세"를 요구한다. 쇤베르크의 음악은 수용자에게 일종의 실천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며, 이로써 음악은 즐거움을 준다는 식의 상투적 관념을 일거에 무너뜨린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쇤베르크의 음악 못지않게 카프카의 작품 또한 독자의 관조를 방해한다. 「카프카 소묘」에서 아도르노는 『성』 『심판』 「변신」 등의 작품들을 치밀하게 분석하면서 감상자의 관조적 거리감을 깨면서 끝없이 재해석을 요구하며, 자신과 동일하지 않은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극히 미미한 일탈조차 허용하지 않는 체계(이를테면 자본주의)를 "음화상태로 그만큼 더 정확하게 규정하는" 데서 카프카 문학의 본질을 찾고 있다.
그밖에도 호프만슈탈과 게오르게의 상징주의가 소재신앙과 지나친 알레고리에 빠져 있음을 비판하면서도 그들의 유미주의에서 반사회적 저항의 의미를 찾고 있는 「게오르게와 호프만슈탈」, 박물관 혹은 예술의 생명력에 대한 발레리와 프루스트의 상이한 입장을 대비시키고 있는 「발레리 프루스트 박물관」이 실려 있다. 말미에 실린 「발터 벤야민 초상」은 '비동일자' '짜임관계' 등 아도르노 이론의 핵심이 되는 개념을 제시하며 그의 사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발터 벤야민에 관한 에세이다. 이 에세이에서 아도르노는 최소한의 객체 혹은 초라한 객체들에 대한 벤야민의 편애("영원한 것은 어떤 이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옷에 달린 한 조각의 레이스이다")에 공감을 표하면서도 벤야민이 풍기는 유대교 신비주의와 권력 지향성에 대해서는 거리를 두고 있다.
수동적인 독자들에게는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견고한 사상체계,
그 안에 담긴 폭발적인 비판의 에너지!
기존의 지배질서에 순응하는 여러 가지 사고에 대한 비판, 그 순응에 거부하는 진정한 현대예술에 대한 치밀한 논의를 담고 있는 이 책은 풍부한 지적 자극을 제공한다. 하지만 아도르노를 읽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아도르노 독일어'라는 말이 생겨날 만큼 특별한 그의 언어는 한순간도 긴장이 해소되지 않는 철저한 반성적 사유를 담고 있어 그야말로 현기증이 날 정도이다. "각각의 문장은 '나를 해석하라'고 말하는 듯하지만 어느 문장도 해석을 허락하지 않으려"는 그의 저술은 그러나, 수동적인 독자가 노력 없이 받아들이는 일을 방해하도록 의도적으로 고안된 것이다. 감상자의 관조뿐 아니라 실천을 요구하는 쇤베르크의 음악처럼.

 생전에 작곡가보다는 지휘자로 인정받았고(37세 때 말러는 빈 궁정 오페라단의 예술 감독이 된다), 타계 후에는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나치에 의해 그 음악이 ‘불온한 음악’으로 금지되었으며, 음악사에서는 후기 낭만주의자로 평가받았던 말러(1860~1911)가 20세기 신음악의 선구자이자 우리 시대의 대표적 작곡가로 자리 매김된 것은 불과 50여 년 전이다.
1960년 말러 탄생 100주년에 출간된 아도르노의《말러―음악적 인상학》은 말러 음악을 재조명하고, 말러 음악의 연주사와 연구사의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는 데 기초가 되었다. 철학자로 활동하기 이전에 음악 비평가로 인정받았으며 또한《신음악의 철학》을 집필하기도 한 아도르노는 말러에 대해 히틀러 정권이 내린 판결과 그의 사후 50년 동안의 음악사가 내린 평가에 이의를 제기하며, 말러의 음악을 통해 신음악의 진정한 의의를 밝히고 있다.
한 음악가와 한 철학자, 예술과 사유의 만남이 이뤄낸 결실인《말러―음악적 인상학》은 새로운 음악의 길을 연 작곡가에게 바치는 헌사이면서, 말러라는 작곡가의 작품에 대한 기술적인 논의와 임의적인 분석의 대립을 넘어선 총체적인 상을 드러내준다.
이 책의 부제 ‘음악적 인상학’은 19세기 들어 의학, 생물학과 접목되어 유사 과학으로 크게 유행했던 인상학에서 역사적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나치가 인종적 편견을 고착시키기 위해 인상학을 이용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아도르노는 음악적 인상학을 통해 말러에게 드리워진 유태인이라는 인종적 편견을 걷어버리고 말러의 음악 자체를 통해 말러의 ‘얼굴’을 새로이 그리고자 했다.
일체의 편견 없이 오직 음악을 통해서 말러의 음악을 설명하고자 하는 아도르노의 의지가 함축된 음악적 인상학은, 사전에 정해지고 주어진 특정한 입장 혹은 관점에서 말러의 음악을 재단하는 게 아니라, 아무런 전제 없이 있는 그대로를 관찰하고 따라가며 그 인상과 특징을 그대로 서술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방식은 형식주의에 반대하고 어떠한 직선적인 역사적 경로를 따르지 않았으며, 고전주의 시대의 통일된 세계관의 ‘파현’을 보여주었던 말러 음악의 특징이기도 하다. 아도르노는 음악적 인상학이라는 방식을 통해 그러한 분열과 파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자 한다.
후기 시민 사회, 그 공허한 세계 운행의 파현
아도르노가 파악하는 말러 음악의 의의는 ‘파현(破顯, Durchbruch)’이라는 낱말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말러 음악의 형식적 이념의 핵심을 파현이라는 말로 지칭하면서 아도르노는, 말러의 음악은 공허하고 거대한 세상에 대한, 인간이 기계 부속처럼 맞물려 들어가 있는 후기 시민 사회의 맹목적 세계 운행에 대한 대응 방식이라고 말하고 있다. 파현은 기존의 억압적이고 기계적인 세계 운행을 뚫고 나오면서 완전히 새로운 차원이 열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파현은 제3장 첫머리에서 아도르노가 언급하고 있듯이, ‘계류Suspension’, ‘충전Erfullung’이라는 다른 형식적 이념들과의 관계 속에서 함께 이해되어야 한다. 말러의 음악은 후기 시민 사회의 기계적인 세계 운행을 ‘파현’을 통해 뚫고 나와서는 ‘계류’를 통해 잠시 중단시키기도 하며, 파현에 의해 뻥 뚫린 자리를 ‘충전’을 통해 전혀 다른 것으로 채워 넣기도 한다. 아도르노는 말러의 이러한 음악 세계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말러의 교향악은 세계 운행에 대한 반대 변론을 펼친다······그 곡들은 어떤 경우에도 주체와 객체가 단절된 자리를 때워서 가리지 않으며, 화해에 도달했다고 속이느니 차라리 자폭하고 만다.”
옮긴이가 ‘파현’으로 옮기고 있는 독일어 Durchbruch는 기존 음악학계에서 ‘개파(改破)’라는 어색한 조어로 번역ㆍ소개돼왔다. 그러나 옮긴이는 기계적인 세계 운행을 뚫고 전적으로 새로운 차원의 개시라는, 아도르노가 사용한 본래의 함의를 살려 ‘파현’이라는 번역어를 제안한다.

 대표적인 프랑크푸르트학파 철학가 중 한 사람인 테오도르 아도르노의 저서로 호르크하이머와 공동집필한 '계몽의 변증법'과 함께 20세기의 고전으로 꼽히는 저작이다. 아도르노는 <부정변증법>에서 나치즘이나 마르크스주의와 같이 개인을 전체의 도구로 전락시키는 이념과 체제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고 부정한다. 또한 그는 '헤겔의 주장처럼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 될 수 없다'며 '한번 부정된 것은 사라질 때까지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는 '부정변증법'을 주창했다.

 

 "예술에 관한 한 이제는 아무 것도 자명하지 않다는 사실이 자명해졌다"라는 진술로 시작되는 이 책은 아도르노 최후의 저작이자 아도르노 이론의 총결산으로서, 철학과 사회학 그리고 예술 이론에 걸치는 다양한 주제들에 대한 심오한 변증법적 탐구로 이루어져 있다.
이 책에 의하면, 현대의 산업 사회는 고도의 합리적 수단을 이용한 비합리적 지배 관계를 그 본질적 속성으로 하는 '관리되는 사회'로서, 부자유가 영속화된 사회, 가속적으로 비인간화되고 야만화되는 세계, 따라서 근본적으로 변해야 하는 세계이다.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문화 산업의 산물들은 그 방향성의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지배의 도구라는 점에서, 즉 '관리되는 사회'의 현실에 순응한다는 점에서 동일할 뿐이며, 이와는 달리 진정한 예술은 이 '관리되는 사회'에 대해 총체적 부정의 자리에 선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는가? 난해하면서도 현대 사회에 있어서의 예술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천착하는 이 책은 미, 추, 예술의 자율성 등 미학의 중심적 카테고리들을 사회적 기반 위에서 변증법적으로 규명함으로써 이러한 쟁점적인 물음들에 답하고 있다.

 이 책은 제2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두 망명 지식인이 "왜 인류는 진정한 인간적 상태에 들어서기보다 새로운 종류의 야만 상태에 빠졌는가"를 밝히기 위해 총체적이고 역사적인 해석을 시도한 저서이다. 적어도 사회적 차원에서는-심미적 차원이 아닌-그러한 야만 상태를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의 불빛을 찾을 수 없다는 절망이 책의 밑바닥에 깔려 있다.
그런 절망은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총체적 파국뿐만 아니라, '문화 산업'에 관한 논의를 통해 미국적 상황 또한 구세계의 파시즘적 상황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명제를 통해 더욱 강화된다. 하버마스의 말처럼 이 책은 '세계에서 가장 어두운 책 중의 하나'일 것이다. 기술진보가 절정에 달한 시대에 가공할 야만상태를 빚어낸 현대는 어떤 시대이며 인류는 어떻게 이런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는가를 해명하는 하나의 '이론'을 이 책은 세우고 있다. 오늘날 학문과 사상은 기술적, 실증주의적 정신에 지배되어 끝없는 핵분열을 계속하고 있거나 '역사와 의미'에 대한 '잊어버리기와 벗어나기'에만 몰두하고 있다. 그런 물화나 죽음에 떨어지지 않으려는 '사유의 저항'이 이 책의 가장 커다란 특징 중의 하나이다. 우리는 변증법적 매개를 통해 삶과 사회와 역사와 문화에 대한 총체적 인식을 추구하는 이 책의 곳곳에서 삶과 세상에 대한 진실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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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 2006-03-09 0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님의 진지한 모습을 보는듯한 느낌이 드네요. 추천드려요 ^^

물만두 2006-03-09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르헤스님 저 안진지해요^^;;;
 

 서양철학은 플라톤에 대한 각주이다
“나는 유럽의 철학적 전통을 플라톤에 대한 일련의 각주라고 하는 것이 그것을 가장 적절하게 특징짓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철학자 화이트헤드가 한 이 유명한 말은 서양철학사에서 플라톤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웅변적으로 잘 드러내준다. 플라톤! 철학에는 관심도 없거나 철학을 모르는 사람들도 ‘플라톤’ 하면, ‘이데아’, ‘동굴의 비유’ 등등 그에 관한 ‘상식’을 쉽사리 떠올린다. 그러나 플라톤은 우리에게 여전히 낯설다. 그건 바로 우리가 그의 이름만 알 뿐 그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플라톤의 이름은 잘 알려져 있지만 정작 플라톤이 누구인지, 그의 사상이 어떤 것인지를 제대로 알려주는 책은 흔치 않다. 우리가 서양정신사라는 거대한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면 반드시 만나는 서양철학의 원류가 플라톤이다. 플라톤은 우리 인간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물음들을 2500년 전에 다 물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학문을 하든 하지 않든 한번쯤은 플라톤을 짚고 가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를 쉽게 만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전문 철학도를 제외하고 인접 학문을 하는 사람들이나 일반 독자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입문서를 찾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의 손에 쏙 들어오는 이 책 '철학자 플라톤'은 우리에게 그런 가능성을 열어준다. 플라톤에 대한 수많은 입문서가 있는 독일에서 40대 초반의 젊은 플라톤 학도가 최근에 ‘새롭게 써서 호평을 받고 있는’ 이 책은 우리를 곧장 플라톤에게로 안내한다.
이 책과 함께 플라톤이라는 높고 가파른 고개를 가뿐하게 넘는다
이 책은 먼저 플라톤이 자신의 철학을 구축하게 한 배경을 간략히 다루고, 그의 철학이 특정한 맥락에서만 타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환기시킨다. 그 다음에는 플라톤의 초기, 중기, 후기 대화편들의 특징을 개괄하고, 이어 그가 왜 ‘대화편’이라는 형식을 취하게 되었는지를 해명한다. 그러고는 곧바로 플라톤 철학의 세계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주요 대화편들의 핵심 물음들과 함께 좋음, 육체와 영혼, 이데아론, 선험적인 앎과 상기, 앎의 개념 등 플라톤의 중요 사상들이 설명된다. 특히 그 유명한 태양의 비유, 선분의 비유, 동굴의 비유 등을 자세히 소개하면서 그의 사상의 핵심으로 독자들을 이끈다. 이 책은 플라톤의 사유가 무엇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를 중점적으로 묻고 있다. 즉 자신의 역사적, 문화적 맥락을 뛰어넘어 보편적으로 타당하고 참된 것을 찾고자 의식적으로 노력했던 플라톤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이 책은 수세기 동안 지속되어온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대한 교조적인 이해 방식을 벗어나 플라톤이 진정으로 말하고자 했던 것, 즉 인간적인 삶의 최종 목표는 무엇이며, 그 이전에 인간의 본질은 원래 무엇이냐 하는 오늘날까지도 논의되는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지은이 보르트는 플라톤 철학을 관통하는 물음과 플라톤 이후의 철학자들을 사로잡았던 물음의 본질이 무엇이었는지를 알기 쉽게 논함으로써 우리가 플라톤이라는 철학의 높고 가파른 고개를 한결 가뿐하게 넘어가게 해준다.
한 손에 쏙 잡히는 플라톤
누군가를, 누군가의 사상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그의 저작을 독파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누군가나 무엇인가의 도움이 없이는 거의 불가능하다. 사실이 그런데도 플라톤과 그의 철학에 대한 ‘제대로 된’ 입문서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플라톤에 관한 책들이야 많지만, 어떤 것들은 전문 연구자들만을 위한 것이어서 초심자에게는 과도한 부담감만 안기고, 또 다른 것들은 너무 소략해서 철학적인 ‘영양가’가 부실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 책 '철학자 플라톤'은 ‘보편성’과 ‘전문성’이라는 두 가지 서로 다른 목표에 성공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일반 독자들에게는 플라톤에 대한 정보를 체계적으로 제공하여 플라톤 철학의 전반을 꿰뚫게 하고, 철학을 전문으로 하는 이들에게는 플라톤에 대해 쟁점이 되고 있는 문제와 그에 대한 연구 상황을 알려주어 신선한 자극제 역할을 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젊은 연구자가 새롭게 쓴 ‘제대로 된’ 플라톤 입문서이다. 또한 이 책은 독자의 손에 쏙 잡히는 판형과 읽기 쉬운 편집으로 되어 있어 언제든지 간편하게 가지고 다니면서 읽을 수 있다. 우리 곁에 편안하게 함께 있어 언제나 우리와 ‘대화’를 할 수 있게 된 플라톤― <철학자 플라톤>과 함께하는 아름다운 시간. - 실천으로서의 철학(<파이드로스>)

 서양 사상의 뿌리인 헬라스 사상에 대한 심층적 이해를 돕기 위한 책이다. 헬라스인들의 무속적 '신들림' 현상의 극복과 구원 사상의 전개에 대한 정신사적 고찰, 그들의 면면히 이어진 중용 사상, 기능의 관점에서 본 사상사, 존재론적, 인식론적 탐구와 삶의 이론의 접합, 헬라스 비극이 말하고 있는 것 등을 다루고, 플라톤의 형상 이론의 체계적 조망과 좋음(善)의 원리, 적도 및 균형의 사상, 창조적이고 역동적인 존재론, 자연법 사상, 글과 직관의 문제에 대한 그의 생각을 다룬다. 또한 서양 철학사를 통해 2,300년이 넘도록 영향력을 미쳐 온 아리스토텔레스의 플라톤 철학에 대한 주요 비판 내용들을 장장 100쪽에 걸쳐 철저하게 분석하고 비판해 나간다. - 제7장 대화편<파이드로스>의 특이성

 1. 국내 학자에 의해 히포크라테스의 생애와 사상이 복원되다
고대 의학 연구의 불모지인 한국에서 오랫동안 고독하게 히포크라테스 연구에 전념해온 학자 반덕진 선생! ‘오직 저술로만 말한다’는 신념을 갖고 홀로 20여 년 동안 히포크라테스와 나눈 우정의 기록인 《히포크라테스의 발견》이 발간되었다. 이 책은 연재물이나 논문 모음집이 아니라 오랜 구상과 집필 계획에 의해 나온 것으로 그의 깊이 있고 집요한 히포크라테스 연구의 첫 성과로 기록될 것이다. 그의 작품으로 인해 ‘미지의 세계’인 히포크라테스의 생애와 사상이 복원되었으며, 이제 우리도 히포크라테스 정본을 갖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약 2500년 동안 서양 지성사와 과학사의 한 축을 담당해온 히포크라테스 사상은 21세기에도 여전히 담론의 대상이 되고 있다. 현대에 오면서 과학적 의학의 무기 앞에 히포크라테스가 가진 의학적 왕홀(王笏)은 부러졌지만 결코 의심받은 적 없는 그의 ‘인문주의적 정신’과 ‘통합적 사유방식’은 21세기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하는 이들에게 신선한 영감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2. 그리스의 학문과 예술을 아우르는 종합교양서
《히포크라테스의 발견》은 그리스 문화와 예술을 아우르는 종합교양서라고 할 수 있다.《히포크라테스 전집》과 철학서, 역사서, 서사시, 비극 등 그리스의 다양한 사료를 재구성하여 신비한 인물로 비치던 히포크라테스를 책 속에 살아 있는 실존 인물로 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재현하려면 대상을 보여주어야 하고, 보여진 대상을 잘 묘사해야만 한다. 저자는 20여 년 동안 모아온 그림들과 여러 문헌들을 살피면서 알게 된 지적 체험들을 상세하게 주석으로 묘사했다. 인문학자들과 그리스 문화 애호가들(Hellenists)들을 위해 전거주석을 충실히 달라보니, 약 1천개의 주석이 붙은 책이 되었다.
이 책은 《히포크라테스 전집》과 《전기》, 철학서, 역사서, 서사시, 비극 등 그리스의 방대한 사료와 로마의 고전을 바탕으로 의학 혁명가로서의 히포크라테스 상과 고전기 그리스의 문화를 생생하게 재현시킨다. 특히 히포크라테스 사유의 혁명성, 즉 서양적 사유의 히포크라테스적 기원이라 할 수 있는 합리주의, 자연주의, 인본주의를 재검토하면서 그 현재적 의미를 살피고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 히포크라테스 사유의 혁명성
① 인문주의 정신: 히포크라테스는 철학자, 역사가, 비극 작가들에 앞서 ‘인간’을 학문의 대상으로 설정하여 ‘인간학’의 탄생을 촉진시켰다.
② 합리주의 정신:질병의 원인을 신벌설이 아닌 자연적 현상으로 이해한다.
③ 자연주의 정신:투약, 절개, 소작과 같은 치료의학보다 음식과 운동이라는 섭생을 통한 자연치유력 증진에 관심. 자연을 진정한 의사로 보고 의사는 자연을 돕는 보조자로 자리매김한다.
④ 인도주의 정신:의사는 의료 자본가가가 아닌 의료 전문가로서 명예를 생각하는 윤리적 이상을 추구한다.
3. 왜 그를 새롭게 발견해야 하는가?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서 히포크라테스는 ‘선서’가 아니고서는 연상키 어려운 인물이었다. 하지만 선서만으로 그의 아우라(aura)에 취하기에 그의 향기는 감미롭기만 하다. 히포크라테스를 ‘마음씨 좋은 의사’로만 알게 되면서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이제 우리는 ‘선서’에 가려 있는 그의 실체적 진실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히포크라테스와 그의 전집에 관심을 갖고 그의 정신을 창조적으로 발견할 필요가 있다. 히포크라테스는 고전기 그리스를 이해하는 새로운 열쇠가 될 수 있으며, 우리의 인문학이 접속해야 할 문화 코드의 하나가 되었다. 우리는 일정 부분 서양적 사유의 발원이 된 히포크라테스 사상의 현재적 의미를 탐색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왜 그를 새롭게 발견해야 하는가? 비록 히포크라테스의 의술은 오래 전에 퇴색했어도 그의 사유가 의심받은 적은 없다. 히포크라테스 사유의 매력은 ‘휴머니즘’ 정신이 ‘통합적’ 인식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 있다. 그가 의학자로 기억되고 있는 것은 그의 인문학적 사유가 주로 의학 분야에 적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전집에는 인문주의자(humanist)로서의 히포크라테스가 도처에 향기를 발하고 있다. 그는 병을 앓는 환자는 물론 그를 둘러싼 자연 환경과 인문 환경과의 상호작용까지 고려하면서 이것들을 동시에 고려하지 않고서는 인간 존재의 참모습을 파악할 수 없다고 본 인문의학자였다. 그는 풍토학, 지리학, 천문학과 같은 자연학에서부터 민족학, 인류학, 수사학, 철학과 같은 인문학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스펙트럼 속에서 인간을 파악하고자 했다. 즉 당시에는 환자의 상태를 판단할 때 현재보다 훨씬 많은 요소들을 고려했으며, 이 각각의 요소들을 유기적인 시각에서 총체적으로 파악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4. 우리 곁에 다가온 히포크라테스
저자는 현전하는 고대 문헌들을 재구성하여 우리에게 신비스런 존재로만 인식되던 히포크라테스를 방대한 시간차를 훌쩍 넘어 책 속에서 생생하게 걸어 나오는 실존 인물로 그려내고 있다.
상세한 주석과 도판으로 고전기 그리스 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일반 교양인들이 이 책을 완독할 수 있도록 해설주석을 풍부하게 달았고, 아직 국내 연구가 미흡한 점을 감안하여 인문학자들과 그리스 문화 애호가들을 위해 전거 주석을 충실하게 달았다. 히포크라테스의 고향인 코스 섬의 풍광에서부터 히포크라테스 문제에 대해 극단적 회의주의를 주창한 20세기 에델스타인의 사진까지. 이 책의 상징적 장면들은 물론 본문 내용을 보완해줄 수 있는 도판들을 풍부하게 실었다. 또한 다양한 부록을 첨부하여 히포크라테스와 그리스 문화에 대한 시공간의 지도를 그려냈다.
① 히포크라테스 연표:히포크라테스에 관한 외국의 어떤 자료에도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히포크라테스 관련 연표를 세밀하게 작성했다.
② 히포크라테스 전집 목록:그리스어, 영어, 한국어 표기를 병기하여 그간 국내에서 동일한 제목에 대해 다양하게 사용되던 표현들을 바로 잡고자 했다. 그리고 전집의 대표적 판본들인 리트레 판과 러브 판에 해당 논문이 수록된 권수를 표시했다.
③ 히포크라테스 4대 전기 번역:히포크라테스의 생애가 기록된 전기들 중에서도 가장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4대 전기를 우리말로 번역했고, 이 자료들은 영어권에서도 1992년에야 번역된 것이다.
④ 사전식 찾아보기:그리스 문화 전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독자들이 이 책을 완독할 수 있도록 표제어마다 간략한 설명을 붙였다. - ≪고르기아스 (Gorgias)≫와 ≪파이드로스(Phaedrus)≫에서 수사학에 대한 반론을 본격적으로 펼치고 있다.에서 히포크라테스를 다시 언급하고 있는데,

 소크라테스와 아테네, 즉 철학과 정치를 객관적으로 살펴보면서 배심원의 자세로 소크라테스 재판을 분석하는 책이다. 기원전 399년, 아테네는 전쟁 패배 이후 쇠락해가는 국가 안보를 다잡아야 했고, 안으로는 팽배해진 국민들의 불안감을 해소시켜 안정과 번영을 추구해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근본적인 가치관과 신념을 공격하는 소크라테스는 눈엣가시처럼 보였을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관점에서 독배를 받은 소크라테스를 단순히 전제적 국가에게 짓밟힌 무고한 개인으로 보는 것은 맞지 않다고 주장하며,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면 아테네인들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고 강조한다.
독자들을 위해 소크라테스 재판 전후의 시대적.정치적.사회적 상황을 소개하면서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명』과 『크리톤』을 중심으로 수많은 자료를 광범위하게 분석하고 있다. 이를 통해 저자는 소크라테스의 재판 속에 담겨진 민주주의의 본질, 국가의 이상, 시민 불복종, 정치 참여 거부 등을 다각도로 살피고 있다.『소크라테스의 재판 Scorates against Athens』은 기원전 399년에 열린 철학과 정치 사이의 비극적 대결이었던 ‘소크라테스의 재판’을 면밀히 재현하면서, 이 재판의 의의와 더불어 재판이 제기한 국가와 개인, 민주주의와 법치, 법정의正義와 법사상의 정당성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들을 마디마디 짚어나간 책이다.
아테네와 한 개인 철학자의 가치관 충돌이었던 소크라테스 재판은 세계사의 유명한 재판들 가운데 가장 극적이고도 정치적으로 중대한 의의와 극명한 이슈를 던져주는 재판이었다. 저자 제임스 A. 콜라이아코는 소크라테스와 아테네 사이의 대결을 정치철학의 근본 문제인 개인의 도덕적 자율성과 국가권위의 조화라는 시점에서 조명하면서 개인의 양심과 표현의 자유, 신에 대한 의무가 국가에 복종해야 할 의무보다 우선이라고 주장한 철학자 소크라테스와, 그를 체제에 따르지 않고 전통적인 공동체의 가치관을 무너뜨리는 반국가적 개인으로 규정하여 엄중히 벌한 국가를 공평한 시각으로 꿰뚫어보고 있다.
한나 아렌트는 이 재판을 일컬어 “철학자에 대한 국가의 재판”이라 하였으며, 재판 이후 ‘철학과 정치가 양립할 수 있는가’의 문제를 두고 인류는 팽팽한 논란을 계속해왔다. 진정한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국민은 법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가, 법은 언제나 정의로운가, 또 양심에 어긋나는 법과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가, 정치적 의무의 근거는 무엇이며 어디까지 그 의무를 지켜야 하는가, 소크라테스의 재판이 불러온 논란의 불씨는 아직도 꺼지지 않고 있다.
국가의 잘못된 체제와 사회관습을 끊임없이 비판했던 소크라테스는 죽는 순간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철학적 사명과 신념을 굽히지 않음으로써 인류사에 ‘시민 불복종’의 철학적 근거를 마련하며 그 첫 씨앗을 뿌렸다. 17세기의 존 밀턴에서 19세기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 20세기의 마하트마 간디와 마틴 루서 킹 2세에 이르기까지 도덕적인 자연법에 거스르는 국가의 법에 맞서 대항한 이들은 소크라테스의 또 다른 모습들이다.
권력과 이익을 위해 정의를 희생하는 국가와 양심적 개인 사이의 갈등을 심층적으로 고찰해낸 이 책은 오늘날의 시민 불복종을 둘러싼 논란에 큰 활력을 불어넣을 것이다.
철학과 정치 그리고 민주주의의 초상
기원전 399년, 그리스 세계의 지도국가 아테네는 밖으로는 전쟁 패배 이후 쇠락해가는 국가 안보를 다잡아야 하고, 안으로는 팽배해진 국민들의 불안감을 해소시켜 안정과 번영을 추구해야 했다. 그런 흔들리는 분위기 속에서 반국가적이고 반정치적 활동으로 국가를 위험에 빠트렸다는 혐의를 받은 한 철학자가 국가 권력자들에 의해 기소돼 재판정에 선다. 그리고 이 고희를 넘긴 노쇠한 철학자는 국가보다 우선하는 신의 도덕적 법칙을 버리느니 차라리 국가에 불복하겠다고 단호하게 선언함으로써 죽음을 맞는다.
이 책은 지금으로부터 2400여 년 전, 민주주의의 효시라 불리는 아테네라는 도시국가에서 벌어진 소크라테스에 대한 재판과 그것이 일으킨 정치사회적 파장을 심층적으로 추적하고 있다. 저자는 소크라테스 재판 전후의 시대적?정치적?사회적 상황을 앞서 소개하면서 플라톤의 두 책 『소크라테스의 변명』과 『크리톤』을 중심으로 수많은 논문과 저서, 정통 학자들의 연구 사례를 광범위하게 분석하여, 이 세계사의 유례없는 극적 재판에서 불거진 민주주의의 본질, 국가의 이상, 시민 불복종, 정치 참여 거부 등을 다각도로 펼쳐 보여준다.
저자는 아테네라는 국가가 소크라테스를 처형함으로써 표현의 자유라는 민주적 가치를 어겼을 뿐만 아니라, 역사 속에서 자율적인 개인을 전제적으로 억압한 상징이 되었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권력과 부에 집착하는 자에게 명확한 사고와 올바른 행동으로 영혼을 향상시키는 삶을, 맹목적으로 전통을 추종하는 자에게 기존의 가치를 비판적으로 다시 생각할 것을, 국가의 권위에 무조건 복종하는 자에게 자율적 양심에 따라 국가의 명령을 거부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소신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도망치라는 권유도, 철학을 포기하라는 법정의 조건부 타협도 모두 거부하고 자신의 원칙대로 권력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자신을 신이 보낸 쇠파리에 비유하며 배심원들을 도발하는 등 자신에게 씌워진 혐의를 9시간 30분 동안 하나하나 반박하면서 결국 죽음을 자초한다. 저자는 모든 사회, 특히 민주사회에는 다양한 견해가 존재하기 때문에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질서유지를 위해서는 타협이 빼놓을 수 없는 항목이라고 설명하면서 바로 이 지점이 대의를 중시하는 민주주의가 지닌 약점이자, 악법 논란과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시민 불복종의 원인이 되었다고 말한다.
이 책은 소크라테스와 아테네, 즉 철학과 정치, 양측을 객관적으로 조망하면서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객관적 잣대를 가진 배심원의 자세로 소크라테스 재판을 분석한다. 저자는 독배를 받은 소크라테스를 단순히 전제적 국가에게 짓밟힌 무고한 개인으로 보는 것은 맞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역사적?문화적 맥락을 이해하면 당시 아테네인들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고 거듭 강조한다. 즉 현대 자유주의 관점에서는 소크라테스의 도덕적 우월성이 한층 더 크게 보일 테지만, 아테네처럼 사회 전체가 위기에 직면했을 때 근본적인 가치관과 신념을 공격하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현대인들 중에도 소크라테스가 유죄라는 데 표를 던질 사람이 많았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도덕적 양심의 철학으로 국가의 권위에 맞선 한 시민의 죽음이라는 점에서 민주주의에 대해 직격탄과도 같은 근원적인 질문들을 퍼붓는다고 말한다. 즉, 진정한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민주주의가 시민에게 세례한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 양심의 자유를 국가가 침해할 수 있는지, 도덕적 자연법에 거스르는 국가의 법에 무조건 복종하는 것이 정치적 의무인지 묻는다. - 『크리톤』의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식으로 작성된 연설을 하는데, 이는 『파이드로스』에 나오는 그의 연설과 상당히 흡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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