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가을에 북매거진 <텍스트>의 청탁으로 쓴 글로 인문 번역서의 오역 실태를 점검해본 것입니다. 절반 정도는 이미 쓴 글들에서 따온 것인데, 분량(원고지 50매) 제한 때문에(청탁받은 분량은 40매) <천개의 고원> 등 몇몇 책이 다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기회는 또 있겠지요...

  

  

  



얼마전 <한겨레>에 “다시 불붙은 화두 ‘번역은 반역이다’”란 제하의 기사가 실렸다. 기사의 내용은 불문학 전문번역가 이세욱씨의 <나는 그녀를 사랑했네>(문학세계사)에 대해서 동료 번역가인 백선희씨가 이의를 제기했다는 것인데, 쟁점은 과연 번역가는 원작에 얼마만큼 개입할 수 있는가로 읽혔다. 예컨대, “나는 면이 알맞게 익었는지 씹어 보다가 혀를 데었다.”라고 한 이씨의 번역에 대해서 백씨는 “면이 알맞게 익었는지 씹어보다가”는 원작에 없는 내용이며 역자가 불필요하게 첨언함으로써 단문 중심의 원작을 훼손했다고 주장한다. 번역가의 역할에 대해 두 사람은 상반된 의견을 갖고 있는 셈인데, 최근에 나온 인문서들의 오역문제를 다루는 자리에서 소설 번역 얘기를 먼저 꺼낸 건, 그나마 그 정도의 쟁점이라면 ‘사치’에 가깝다는 얘기를 하고 싶어서이다.

원작을 읽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짐작에 이세욱씨가 역자로서 지나친 친절을 베푼 것이 아닌가 싶은데, 사실 그러한 친절이 아쉬운 쪽은 소설이 아니라 인문서 번역이다. ‘번역은 반역이다’란 말이 결코 비유가 아닌, 그리고 절대로 과장이 아닌 배신, 배반형 번역서들이 넘쳐나는 마당에 사실 그러한 (과잉)친절은 오히려 과분하다. 고전이라 일컬어지는 문학작품들의 번역이 기대에 못미친다는 일전의 (놀랄 것도 없는) 조사결과가 보여주듯이, 우리의 일반적인 번역환경과 수준은 아주 열악하며 한참 뒤떨어져 있다. 하지만, 정확하기 이전에 최소한 ‘말이 되는’ ‘논리가 닿는’ 정보만 전달해도 나쁘지 않은 번역이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인문서 번역에서 제대로 된 번역을 가물에 콩나듯이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소극이다(여기에 비극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리고 실제로 ‘웃기는’ 번역들이 너무 많다.

 


 

  

 

인문서 번역의 경우 우리말이 어색하거나/이상하거나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경우는 거의 대부분 오역이라고 보면 된다. 소설의 경우라면, 도대체 면이 알맞게 익었는지 말았는지 하는 내용이 오역인가 아닌가는 원작을 대조해 보아야만 확인할 수 있다. 때문에 소설 등 문학작품의 오역은 웬만큼 눈썰미가 좋지 않고서는 찾아내기 어렵다. 예외적인 경우라면, 논리에 맞지 않는 내용이 나올 때인데, 가령 시중에 나온 번역본 중에 가장 많이 팔린 걸로 돼 있는 <걸리버 여행기>(문학수첩)의 첫쪽에는 걸리버가 긴 항해를 준비하기 위해 2년 7개월 동안 ‘물리학’을 공부한 걸로 나온다. 물리학이라니? 뭔가 이상해서 원작을 대조해봤는데, 물리학이라고 옮긴 단어는 'Physick', 즉 ‘의학’이었다(다른 번역본에서는 ‘의학’이라고 제대로 옮겼다). 역자는 그걸 ‘물리학Physics'으로 착각한 것인데, 아쉬운 것은 그렇게 옮기면서 뭔가 이상하다는 낌새를 느끼지 못했다는 점. 걸리버가 항해중에 의사 노릇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오역을 눈치채지 못한 역자의 무신경을 탓할 수밖에 없다. 이럴 경우 번역이 아무리 경쾌하고 유려해 보여도 역자에 대한 신뢰는 팍팍 떨어진다.

또 다른 사례로는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민음사)의 맨마지막쪽을 들 수 있다. “이렇게 슈호프는 그의 형기가 시작되어 끝나는 날까지 무려 십년을, 그러니까 날수로 계산하면 삼천육백십삼 일을 보냈다. 사흘을 더 수용소에서 보낸 것은 그 사이에 윤년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거의 행복한’ 하루를 뒤따라온 독자의 머리를 한대 치는 결말인데, 안타깝지만 여기에도 오역이 있다. 10년이면 날수로 삼천육백십삼일이 아니라 삼천육백오십삼일이어야지 맞다. 어쩌다가 십단위의 ‘오’가 빠졌는지 모르겠지만(교정중의 실수일 수 있다), 덕분에 독자는 감동을 받기 이전에 날짜수를 계산하도록 요구받는다. 문제는 사례로 든 두 작품의 경우 계속 판을 찍으면서도 오역이 교정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제부터 검토해 볼 인문 번역서들은 이 정도의 오역들을 오역으로서 정말 무색하게 만든다. 예컨대, 현대 사상의 원조로 꼽히는 언어학자 소쉬르의 <일반언어학 강의>(민음사)부터가 전혀 미덥지 못한 번역이다. 다음을 보라. "언어적 물체는 쓰여진 낱말과 발음된 낱말의 결합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후자 하나만으로써도 이 물체를 구성한다."(35-6쪽) 언젠가 이차문헌의 내용을 확인해 보기 위해 이 대목을 읽다가 경악을 한 기억이 있다. '언어학의 대상'을 정말 황당하게도 '언어적 물체'라고 번역해놓고 있는 것이다!(이게 물리학책인가?) 절판된 옛날 번역본을 인용하자면, 이 대목은 적어도 “언어학의 대상은 쓰여진 낱말과 말해진 낱말의 결합인 것으로는 정의되지 않는다. 말해진 낱말만이 그것의 대상이다."(형설출판사, 41쪽) 쯤으로 옮겨져야 한다. 사실 확인해보지 않은 다른 대목들의 번역은 훌륭할 수도 있지만, 이 한 대목에서 일단 번역에 대한 기대는 접어두게 된다.

 

 

 

 

이런 사정은 소쉬르 언어학에 근거를 둔 <구조주의의 역사2>(동문선)에 가서도 반복된다. ""하나의 모음이 움직일 때 그것은 전체 체계를 끌고간다는 의미에서 구조주의적인 보어"임을 알게 해주었다."(14쪽)라는 문장이 나오는데, 여기서 구조주의적인 '보어'라는 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 역자는 무슨 말인지 알고 번역했을까? 물론 아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그 부분의 영역은 이렇다(불어본과 대조해보면 더 확실하겠지만). "completely structualist insofar as when each vowel moves, the whole system moves with it."(물론 앞에 좀 길게 나오는 부분이 있지만, 생략했다.) 역자가 보어라고 번역한 건 무엇일까? 바로 영어로는 ‘completely’이다. 짐작에 불어로 '꽁쁠리뜨망completement'이란 단어를 '꽁쁠리망complement'(보어)으로 착각한 듯싶다. 비슷한 단어이기 때문에 혼동할 수 있다고 해도 ‘완전히 구조주의적’이란 뜻을 ‘구조주의적인 보어’라고 옮기고 태연하게 넘어갈 수 있었던 역자의 배포가 놀라울 따름이다(말이 안되면 다시 봐야 할 것 아닌가?).

소쉬르 이후 현대철학의 수난이라고 할 만한 번역에는 <현대유럽철학의 흐름>(한울)도 빼놓을 수 없다. 92년에 초판이 나온 이후에 제법 많이 팔려나가고 있는데다가 대학 교재로도 자주 쓰이는 책이지만(강사의 양식이 의심스럽다), (좀 자세하게 뜯어본) ‘구조주의’ 장의 번역은 오역의 연속이다. 가장 원초적인 문제는 역자가 기표/기의 혹은 능기/소기라는 기본적인 개념쌍부터 혼동하고 있다는 사실. “새로운 언어학을 형성시키는 과정에서, 소쉬르는... 소기(le signifie; signifier)와 능기(le significant; signified)... 등의 일련의 차이를 제시한다.”(274쪽)를 보자. 우선 역자는 리처드 커니의 원저에도 없는 불어를 병기하는 (과잉)친절을 베풀었는데(시니피앙le signifiant은 철자도 틀렸다), 그것이 도리어 사단이 됐다. 불어의 시니피에(le signifié)와 발음상/형태상 유사한 영어의 signifier를 같은 뜻으로 착각하고 ‘소기’라 옮긴 것이다. 이 문장은 일단 “소쉬르는 기표(signifier)와 기의(signified) 등의 일련의 구별(distinction)을 제시한다.”로 옮겨져야 한다. 예상할 수 있는 바이지만, 역자는 이후에 능기/소기(기표/기의)를 뒤죽박죽으로 옮겼다(그나마 오역에 일관성이라도 있으면 나으련만).

전혀 엉뚱하게 번역한 한 대목만 더 보도록 하자. “랑그에 대한 연구는 구조적 기호체계를 위한 지향적 전언내용을 일괄적으로 다룸으로써 언어학의 확실한 과학적 정초를 다지게 하는 것이다.”(276쪽) 원문은 이렇다. “In short, by bracketing the intentional message for the sake of the structural code, Saussure resolves to set linguistics on a firmly scientific footing.” 문제가 되는 건 “전언내용을 일괄적으로 다룸으로써”란 말인데, 그것은 “전언의 내용을 괄호침으로써”로 고쳐져야 한다. 요점만 말하면, 소쉬르는 코드(code)를 위해서 메시지(message)에는 괄호를 쳤다는 것이고, 이것이 소쉬르 계보 구조주의의 핵심이다. 일괄적으로 다룬다는 게 그런 뜻인가? 그나마 소쉬르가 이 정도이다. 하물며 라캉에 대해선 무얼 더 기대하랴. 신기한 것은 이런 책이 아무런 교정 없이도 판을 거듭하고 있다는 사실이
다.

 

 

 

 

 

구조주의 사회학자로 분류되는 부르디외도 불운하긴 마찬가지이다. 그의 책들 중에서 가장 얇은 <강의에 대한 강의>(동문선)를 보자. 얇지만, 오역은 충만하다. '강의에 대한 강의'란 제목이 뜻하는 건 자신의 사회학 강의에 대해 사회학적으로 검토해보겠다는 것이다. 시작부분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사회학에 대해 말하는 부분: "사회학이 표명하는 모든 명제들은 과학의 주제에 적용될 수 있고, 또 그래야 합니다."(10쪽) 하지만, 이 문장을 어느 누가 "사회학이 표명하는 모든 명제들은 이 학문[사회학]을 실행하는 주체[사회학자]에 적용될 수 있고, 적용되어야 합니다."는 뜻으로 읽겠는가? 우리말 번역만 가지고는 부르디외가 과학사회학 강의를 한 것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이렇듯 핵심이 빗나갔으니 나머지 대목들이 끼워맞추기식 번역일 거라는 건 안봐도 뻔한 얘기이다. 제대로 읽히는 대목이 손으로 꼽을 정도에 불과하지만, 가장 문제가 되는 건 긍정문/부정문을 바꿔치기하는 것이다. "전혀 자연스럽지 않은 행위가 왜 일어나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45쪽)는 문맥상 전혀 자연스럽지 않다. 그것은 "결코 자명하지 않은 어떤 행위가 왜 존재하는가에 대해서 우리는 물으려고 하지 않는다."쯤으로 옮겨야 한다. 여기서 부르디외가 말하는 행위는 사회적 행위이고, 그것은 결코 자연스럽거나 자명한 행위가 아니다. 하지만, 사회적 관계[게임]속에 행위자는 그것을 자연스럽고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욱 가관인 사례. "사실상 뒤르켐이 말한 바, '사회는 신이다'까지 인용할 필요 없이, 저는 "신은 전혀 사회가 아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신에게 기대하는 것은 사회에서 전혀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회로부터 유일하게 인정하는 힘, 인위성 우연성 부조리를 제거하는 힘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50쪽) 이 또한 역자가 사회학자가 맞는지 의심케 하는 오역이다. 첫문장까지는 괜찮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신에게 기대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오직 사회를 통해서만 얻을 수가 있습니다. 오직 사회만이 여러분을[여러분의 존재를] 정당화시켜주며 사실성, 우연성, 부조리성으로부터 해방시켜 줍니다." 쯤으로 옮겨야 한다. 그나마 양심적인 건 역자의 말이다. "번역 수준에 대해 역자 자신은 아직도 불만족스럽다. 이 번역판을 읽는 데에 독자의 각별한 인내심과 양해를 구한다."(65쪽) 사실 더 양심적이었다면, 책을 내지 말았어야 했다.

부르디외의 책 중에서 가장 대중적인, 그런 만큼 가장 많이 팔린 <텔레비전에 대하여>(동문선)도 오역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서문에서 저자가 매스미디어들의 부추김 때문에 일전을 불사할 뻔했던 터기와 그리스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부분. “그리스 병사의 섬 상륙, 함대의 이동, 그리고 전쟁은 정의를 피했을 뿐이었습니다.”(12쪽) 여기서 “전쟁은 정의를 피했을 뿐”이라는 게 무슨 말인가? 영역본이 “war was only just avoided."(전쟁을 가까스로 피할 수 있었다)인 걸로 봐서 역자는 불어의 justesse(혹은 justice)가 들어가는 숙어(‘가까스로’)를 잘못 옮긴 것이다. 문제는 왜 그런 오역/실수를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또 역자는 그렇다 쳐도(역자의 실력이 그렇다면) 교정자는 왜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일까?

그런 단순한 오역을 놓친다면, 다음과 같은 대목은 어떻게 읽고 이해할 수 있을는지? “저는 말하자면 과거의 온정주의 교육적 텔레비전을 바라는 향수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런 향수가 대중의 취향과 대규모 방송 수단의 민주적인 이용을 위한, 대중의 자발적 혁명과 선동 정치적 복종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48족) 읽으면 읽을수록 머리가 아파오는데, 이유는 말이 안되기 때문이다(역자는 아무런 고통없이 번역했을까?). 두번째 문장을 다시 번역하면 이렇다. “과거의 가족주의적-교육적 텔레비전이야말로 제가 보기엔 (로자 룩셈부르크식의) 대중적 자발주의나 대중적 취향에 대한 선동적인 투항 못지않게 대중매체의 진정한 민주(주의)적 사용에 대립됩니다.” 즉 부르디외는 매중매체에 대한 순응이나 전면적인 부정이 아닌, 민주적인/비판적인 활용에 방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문제의 번역문을 그런 뜻으로 읽을 수 있는 것인지? 



 

 

  


이렇듯 넘쳐나는 오역의 사례들에서 유턴하기 전에 반드시 확인하고 지나가야 할 지점은 최근에 마구 뜨고 있는 슬라보예 지젝이다. 지젝의 자리에서는 또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올가을에 방한할 예정이기도 한 지젝으로서 불행한 것은 그 번역서들이 대부분 오역의 진창이라는 사실이다. 비교적 읽을 만한 그의 ‘영화책’들을 제외하고 그나마 가장 상태가 좋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인간사랑)을 먼저 보자. “모든 이데올로기적인 보편성은, 그 통일성을 깨트리며 그 허위성을 드러내는 어떤 특별한 경우를 필연적으로 포함하고 있는 이상(理想) 또는 ‘허구’이다.”(49쪽)

축약하면, “모든 이데올로기는 이상 또는 허구이다”라는 것인데, 너무도 자연스러운 이 오역은 사실 역자의 것이라기보다는 교정자의 것이다(역자가 이런 정신나간 짓을 했을 리는 만무하다). 이상(ideal)으로 번역돼 있는 것은 사실 영어의 ‘so far as’(-인 한에서)이다. 짐작에, “모든 이데올로기는 ...포함하고 있는 이상, ‘허구’이다”라는 번역문에 교정자의 (과잉)친절욕이 개칠을 한 것이다. 바로 다음 문단에 ‘시장의 이상(理想)’(이때는 ideal을 번역한 ‘이상’이다)이란 말이 나오는 것도 이런 심증을 굳게 한다. 이 정도의 오역은 사실 어처구니없기는 해도 분통을 터뜨리게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개역판까지 나온 <향락의 전이>(인간사랑)는 사정이 다르다.

역자 자신이 개역판의 서문에서 시인하고 있듯이 초판은 '몇 군데 오역'을 포함하고 있었다. 역자가 말하는 '몇 군데'라는 건 주로 대중문화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영화감독과 제목명의 오역인데(거의 맞는 게 없었다), 개역판에서는 이를 상당 부분 바로 잡았고, 그 점에 대해서는 (비록 기본이라 하더라도) 역자의 노고를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게 거의 전부이다. 영화명과 주인공에 대해서도 '시라노'를 여전히 '키라노'로, 그의 여인 '록산느'는 '로잔느'라고 옮기고 있다. 그래도 이건 영어가 병기돼 있어서 눈치껏 읽으면 된다. 하지만, 멀쩡한 유고의 영화감독 '쿠스투리차'는 왜 '쿤스투리카'로 개명해놓고, 거기에 'Kunsturica'(406쪽)라고 병기까지 해놓는가? 그런데, 정작 문제는 이런 것들이 아니다. 역자는 본문의 내용에 대해서는 거의 의미있는 교정을 하지 않았다.

예컨대, 1장 시작부터 '부모의 성적 착취'(parental sexual abuse)를 역자는 '아버지의 성적 남용'(28쪽)으로 옮겼다. 그리고 '욕동이론과... 해석의 이중성'을 '욕동이론의 이중성'(29쪽)으로 옮기고, 정신분석에서의 '수정주의'를 줄곧 '개량주의'(30쪽 이하)로 옮겼다. '제2의 본성'(second nature)은 '이차적 자연'(33쪽)으로 옮기고, '억압의 모든 장벽을 제거하려는 요구'는 계속 '억압의 모든 장벽을 벗기려는 요구'로 옮겼다. '한순간이라도 멈춰서 생각해본다면'을 '한순간이라도 생각하기를 멈춘다면'(44쪽)으로 옮기고, '반계몽주의'는 '계몽주의'(170쪽)으로 옮겼다. 물론 이러한 지적은 부분적이다. 왜 그런가 하면, 이러한 부분들이 역자에게는 '몇 군데 오역'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에 대해서 한 일간지 서평자는 “지젝은 라캉 정신분석학 이론에 충실하면서도 독창적이고 ‘재미있게’ 글을 쓰는 사람으로 이미 국내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 독자들은 지젝의 이 책을 통해 인간의 비밀인 향유의 세계를 탐험하는 모험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무책임한 소리를 늘어놓은 바 있다(서평자들이 한심하게도 자주 잊어먹는 일은 서평의 대상이 원저가 아니라 번역본이라는 사실이다). 이 책을 읽는 일은 분명 모험이긴 하지만(그것도 굉장히 고된), 그 모험은 오역의 진창에서 허우적거리기이다. 물론 이 허우적거리기에서 일반 독자가 뭔가 '교양'을 얻어낼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말 그대로 당신들의 향락인 셈이다.



 

 

  


믿지 못하겠지만, 그보다 더한 ‘향락’을 선보이는 책이 지젝의 신간 <믿음에 대하여>(동문선)이다. 책은 정말 믿을 수 없는 오역으로 가득 차 있다. '모세의 형상'을 '모자이크한 모습'으로 옮기기 시작하더니 '인도'를 전부 '인디언'으로 탈바꿈시키고, 하이데거의 '현존재'는 난데없이 '실존성'으로, '뉴에이지'는 '신시대'로 옮겼다(뉴에이지는 신시대가 아니다!). '진리의 정치'를 전부 '진실의 정치'로 옮기고, '대상 a'는 ‘대상’ ‘물질’ ‘사물’ 등 갈피를 못잡고 옮긴 걸로 봐서 역자는 라캉/지젝을 전혀 이해하고 있지 않으며 읽어본 적도 없어 보인다(무슨 사명감으로 번역에 나선 것인지?). 정말 경악스러운 대목. “라캉의 관심은 지배자에 관한 강좌로부터 당시 사회에서 주도적 논의 대상이었던 우주에 대한 강좌로의 이전에 있었다. 논점이 우주로 바뀐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38쪽)

전후좌우가 다 오역으로 도배돼 있지만, 이 대목은 정말 하이라이트이다. 믿기지 않을까봐 원서를 인용한다. “Lacan's interest is focused on the passage from the discourse of the Master to the discourse of University as the hegemonic discourse in contemporary society. No wonder that the revolt was located in the universities.”(30쪽) 중학생도 해독할 수 있는 단순한 구문이다. 라캉의 네 가지 (강의가 아니라) 담론(discourse)에 대한 약간의 배경지식만 갖고 있다면 말이다(라캉 입문서가 부족한 것도 아닌데).

해서 다시 옮기면, “라캉의 관심은 주인의 담론에서 현대 사회의 지배적 담론인 대학의 담론으로의 이동에 초점이 맞춰진다. 그 반란이 대학에서 일어났던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여기서 ‘반란’은 아마도 68혁명을 가리키는 듯하다.) 역자는 무슨 생각에서인지(대문자라서?) ‘대학(University)’을 ‘우주’로 옮긴다. 라캉이 천문학자였단 말인가? ‘대학’이 ‘우주’로 바뀐 것이 역자에게는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닐지 몰라도 우리로선 놀라 자빠질 일이다. 게다가 이 놀라운 번역서에서 역자는 엄청난 누락도 서슴지 않는다. 번역서 52쪽(원서 45쪽) 밑에서 6행 ‘그러나’ 앞에는 2/3쪽(20행)이 누락돼 있다. 정말 집어던지고 싶은 책이다!

이런 식의 오역뒤지기는 아마도 한동안(어쩌면 끝없이) 계속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에서 끝내기로 하자(내게 주어진 분량을 이미 훨씬 넘어섰다). 좋은 번역서가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좋은 번역자/번역가가 사회적으로 대우받는 시대가 온다면, 물론 사정은 지금보다 훨씬 좋아질 것이다. 부르디외가 매번 강조하듯이 오역의 문제도 어쩌면 사회구조적인 문제일는지 모른다. 그 구조는 아마 금방 바뀌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지/무책임하고 불성실한 오역들을 양산해내는 현재의 번역/출판관행에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결론적인 제안은 이렇다. 자기가 이해한 것을 이해한 만큼 번역할 것. 자기가 이해할 수 없는 번역에 대해서는 두눈 부릅뜨고 따져볼 것. 오역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지적할/수정할 것. 이런 행위자들의 노력에 대해서 구조도 언젠가는 감복할 날이 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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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산 2004-03-12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ㅜㅜ 인문서 보기가 겁나요...

로쟈 2004-03-12 18: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값은 더 겁납니다!..

lastmarx 2004-04-02 0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좋은 일을 하시고 계시는군요. 번역하시는 분들이 이런 지적을 받고 고쳐나가면 좋겠습니다. 서평쓰기도 그러하지만 결국 번역도 전체 내용을 파악해야지만 오역을 피할 수 있겠군요.

로쟈 2004-04-02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Thanks for your comment, and I'm sorry for my English. I can't use hangul until now, here in Moscow...
 

지난 설연휴 끝에 쓴 글을 여기에 옮겨둔다... 연휴가 끝나고 연 사흘째 이삿짐을 싸고 있다. 모레부터 3주 동안 지난 1년간 몸담았던 연구소의 천정과 바닥 공사가 시작되기 때문에, 연구소 비품도 챙겨야 하고 그동안 쌓아두었던 책들을 몽땅 정리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저것 해서 30박스쯤 정리하는 일이니까 일이야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짐을 챙기는 손은 더디고 마음은 심란하다. 2월에 해야 할 일들이 빽빽한 터에, 벌써(!) '이삿짐'이나 챙기고 있다니!..

 

 

 

 


잠시 기분풀이로 올해에 나올 책들과 영화들을 꼽아본다. 영화잡지들을 그다지 챙겨보지 않기 때문에, 현재 제작중인 영화들이 어떤 것들인지 잘 알지 못하지만, 올해 어떤 영화들이 개봉된다 하더라도 내가 보고싶은 영화로 첫손가락에 꼽을 건 이미 정해져 있다. 그건 홍상수의 다섯번째 영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이다. 지난주 <씨네21>에 실린 촬영장 취재기를 보면, 벌써 지난 10일에 모든 촬영이 마무리되고, 편집 등의 후반부 작업에 들어간 것으로 돼 있다(5월초 개봉예정). 그의 모든 영화를 개봉관이나 시사회장에서 보았었는데(<강원도의 힘>은 시사회장에서 허진호 감독 바로 앞자리에서 보았다), 아쉽게도 이번만은 그러지 못할 거 같다. 예정대로 개봉될 때쯤이면 나는 다른 나라에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이 생각을 하니까 외국에 나가는 일이 싫어진다!).(*그로부터 1년도 더 지났다. 나는 얼마전에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비디오를 '떨이'매장에서 2,000원 주고 샀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의 말을 빌면, 나는 매번 홍상수의 영화가 '뒈지게' 기다려진다. 사실 데뷔작이었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부터가 문제적이었는데, 나는 그 영화가 개봉되기 일주일 전에 (잘못알고) 개봉관에 가서 왜 영화를 하지 않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홍상수는 '한국영화의 발견'이다(나는 개봉관에서 연거푸 그의 데뷔작을 보았다). 한국을 대표하는 감독으로 아직은 임권택을 꼽지만, 그건 노장에 대한 예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대학에 들어와서 나중에야 그의 전환점이 된 <만다라>나 <길소뜸>을 봤지만(나는 전자보다는 후자가 맘에 든다), 아무런 유보없이 '임권택 만세!'를 부르기엔 나는 너무 젊었다.

 

 

 

 

아마도 내가 극장에서 최초로 본 임권택 영화는 <씨받이>였던 거 같다. 그 전에 그해 아카데미작품상 수상작인 <아웃 오브 아프리카>란 영화를 볼 때 <씨받이>의 예고편이 나왔고 관객들이 다 웃음을 터뜨린 기억이 있다. 비록 강수연이 베니스에서 여우주연상을 타고선 그 영화에 대한 평가가 다소 달라졌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모습이 한국영화에 대한 당시 관객들의 일반적인 시선이었다. 80년대 중반의 한국영화는 주윤발의 홍콩 느와르보다도 못한 평가를 받았고, 한국영화를 (공개적으로) 보러 가는 대학생은 아주 드물었다.

가히 한국영화의 몰락이라고 할 만한데, 그러한 몰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감독이 이장호이다. 그의 80년대 필모그라피는 <바람불어 좋은 날>(그의 가장 좋은 영화)에서 <바보선언>(그나마 객기가 문제의식처럼 보인 영화)을 거쳐서 <어우동>으로 빠진다(혹은 <무릎과 무릎 사이>에서 익사한다). 그나마 퇴행적으로라도 80년대의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있는 영화가 이장호의 조감독 출신인 배창호 감독의 <고래사냥> 시리즈이다(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답답한 청춘들!) 하지만, 이 배창호도 흥행몰이에 우쭐하여 장미희에 대한 오마주로 <황진이>를 만들면서 하향안정세로 접어든다.


 

 

 


 

그리고, 80년대 후반 조금 숨통이 트이는 것이 당시 히트 연극을 영화화한 박광수의 <칠수와 만수>(1988)부터이다. 장선우의 <성공시대>나 이명세의 <개그맨> 등이 비슷한 시기에 개봉되면서 이른바 한국영화의 새로운 젊은 감독 3인방 시대가 열리게 된다. 이후 박광수는 <그들도 우리처럼>에서 좀 일찍 정점을 보여주더니(그 이상을 기대했지만, 지나고 나니까 그게 정점이었다) <베를린 리포트>부터 곧바로 삼천포로 빠지기 시작해서 아직 돌아온다는 소식이 없고(복고풍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로 잠시 재기하는 듯했지만 <이재수의 난>으로 완전히 찍혀 버렸다), 장선우는 세속세계(그가 잘 만드는 쪽이다)와 화엄 세계(그가 죽을 쑤는 쪽이다)를 왔다리갔다리하면서 들쭉날쭉 영화를 만들다가(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우묵배미의 사랑>이다) <성냥팔이소녀의 재림> 이후에 잠적중이고(이번에 재기한다는 소문도 있다. 시집 한권 내고서), 그나마 엘리트의식 없이 이장호-배창호 사단의 적자로서 꾸준히 진화하고 있는 감독이 이명세인데(<인정사정 볼것없다>로 드디어 대중적인 인정을 받았다), 현재는 도미중이다.


 

 

 

 


한국영화에서 이들 3총사를 잇는 차세대의 대표적인 감독이 1996년에 데뷔한 홍상수이다. 시작은 아주 미미했지만, 요즘들어 서서히 대가급으로 인정받는 박찬욱 감독과 나이는 박광수, 장선우 세대이지만 (박광수 조감독 출신의) 한국영화감독이 맞나 싶게, 영화를 잘 만드는 이창동 감독(겸 장관)이 같은 세대이고(새로운 3인방이라고나 할까?), <살인의 추억>의 봉준호나 <지구를 지켜라>의 장준환 감독이 한국영화의 미래이다(물론 확실한 자기 스타일을 먼저 보여준 건 장준환이고, 봉준호는 감독 자신의 고백대로 아직은 암중모색단계이다).

거기에, 아직은 홍상수의 그늘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허준호나 박찬옥 감독까지 곁들이면, 강우석-김상진 계보나 강제규 감독 등과 대비되는, 한국영화에서의 작가주의 진영이 대략 갖춰진다(여기서, 작가주의라는 건, 관객의 코드보다는 감독 자신이나 영화에 대한 고려가 우선적인 영화만들기를 통칭한다). 참, 가장 과대평가된 '속죄양' 혹은 영화판의 '장정일' 김기덕이 빠졌다. 지젝이 잘 쓰는 표현에 따르면, 김기덕은 홍상수식 작가주의 영화의 외설적인 이면처럼 보인다.

하고 싶었던 얘기는 이게 아닌데, 뜬금없이 한국영화사 얘기가 돼 버렸다. 어쨌든 한국영화라는 장 속에서 홍상수의 자리가 어디인가를 간단히 짚어보고 싶었을 뿐이고, 가까운 장래에(한 10년쯤 후에) 한국을 대표하는 감독으로 (임권택 대신에) 우리는 그의 이름을 꼽을 수 있을 거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을 뿐이다. 사실 이러한 평가는 국외에서나 평단에선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데, 아직은 대중적인 인지도가 그에 못미칠 따름이다. 잠시 이번 신작의 촬영장을 훔쳐본 기자에 의하면, 이번 영화는 이전보다 더 많은 유머들로 넘쳐난다고 하고, 또 성현아가 주연을 맡았기 때문에 그의 영화들 중 역대 관객동원 기록을 갱신할 가능성이 높다. 그 관객에 내가 빠지더라도.

하니, 바라건대, "우물에 빠진 돼지가 강원도에서 수정을 만나서 발견한 것이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는 우스개도 있는 만큼 가급적이면 그의 영화들을 두루 섭렵하신 다음에 올봄에 개봉박두인 영화를 기대해 보심이 어떠실지? 이 정도면 나도 홍상수에 대한 애정을 충분히 표시한 셈인가? 나는 받은 만큼 갚는다(이게 비평의 기본 자세이다). 그렇다면, 제목의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는 무슨 뜻인가? 제목 풀이는 <씨네21>의 기사를 참조하시길(그래야 감독의 육성을 직접 읽을 수 있다)...

참, 올해에 나올 책 얘기를 빠뜨릴 뻔했다. 올해 나올 책으로 내가 가장 기대하는 건 데리다의 <법의 힘>이다. 역자는 진태원씨이고(그는 <마르크스의 유령들>도 다시 번역중이라고 한다. 국내에도 데리다 전문 번역자가 탄생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현재 교정중이라고 하니까, 올봄엔 책이 나올 거 같다. 비로소 데리다가 한국어로 번역되는 '사건'과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어쩌면 올해 그의 부고를 들을지도 모르고). 유감스럽게도, 이 책 역시 내가 뜨끈한 책을 읽어보긴 힘들 거 같군. 그리고 아마도 지젝의 주저 두 권이 올해 안에 나올 것이다. 두 권 모두 기대반 우려반이다. 데리다보다도 수준이 떨어지는 지젝 번역서라면?

라캉의 <에크리>는 판권을 갖고 있는 새물결이 연말에 나온 사진집으로 떼돈을 벌었다고 해도 올해를 넘길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돈이 아니라 번역의 질이기 때문이다. 올해 안에 나온다면, 2% 정도 기대해 봄직하다(98%는 아마도 우리말이 아닐 확률이다). 나는 그의 문장들이 어떻게 우리말로 변환될 수 있는지, 그 번역의 연금술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지만, 연금술은 '연금술'에 그칠 거라는 것이 이성적인 판단이다. 해서, 라캉과의 조우라는 사건은 아직은 미래형이다. 적임자가 곧 도래하기를 바란다.

또, 무슨 책들이 나올 것인가? 간혹 나이 먹는 일이 덜 유감스러운 것은 순전히 이러한 기대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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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inda 2009-08-24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워낙 소심해서 읽으면서 조마조마 했습니다/ㅎ/참 삼천포라는 단어도 포함해서/요즘 명예도 없는 사람들이 그것을 훼손했다고 야단법석이라서...../하지만 여기에 거론되지 않은 가독은 서운해 할지 모르겠습니다/한 시대를 순간 읽어내리면서 동의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한국사람은 세계 1등 좋아하는데/세월이 지난 지금도 김기덕과 홍상수는 알아주지 않습니다/세계에서 알아주는데 말입니다/저는 외국에서 유명하다고 그래서 더 좋아할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음.......데리다/이 번에도 데리다가 발목을 잡네요/지금쯤 다른 항목에 그에 대한 이야기가 있겠지요/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의 2장 2절 ‘세계의 밤’부터이다. 102쪽. 진도를 좀 빨리 나가기로 하겠다. 이제까지처럼 일부 오역들을 지적하면서, 중요한 내용에 대해서는 정리하는 방식이다.

(21) 둘째 문단, “실증주의적 에고 심리학의 상승과 함께”(with the ascent of positivist ego psychology)는 “득세와 함께”가 더 낫겠다. 이러한 (미국식) 에고 심리학의 득세 때문에, 정신분석학의 고유한 혁신성과 전복성이 거세되는데, 이에 대한 비판으로 러셀 자코비(제이코비)의 <사회적 건망증>(원탑문화사, 1992)이 있다(이 책에 대해서는 <향락의 전이> 초반부에도 언급이 되고 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이해하는 정신의학으로서의 정신분석학은 모두 에고 심리학에 근거하고 있다. 이것의 가장 큰 특징은 심적 장치가 얼마만큼 현실(현실원칙)에 잘 적응하는가를 기준으로 하여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을 가름하는 것이다. 그것은 달리 ‘적응’심리학이라고 불릴 만하다(이 적응심리학은 ‘승화’를 대단히 중요하게 다룬다. 승화란 자칫 ‘병리적일 수 있는’ 리비도 에너지를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방식으로 방출하는 걸 말한다). 라캉-지젝의 정신분석학은 물론 그러한 현실원칙과 기준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며, 그런 의미에서 그들의 이론적 기획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문명비판과 상통한다.

(22) 103쪽. “그러나 이러한 비판의 시야는 그것이 비록 도래할 소외되지 않은 사회에서...”에서 ‘그것’은 앞에서도 지적한 바 있지만, 뒤엣말을 받는 지시대명사이며, 우리말 문법에 맞지 않는 번역투이다. 우리말에서라면, ‘그것’은 ‘시야’(나 혹은 ‘비판’)을 받지만, 원문에서는 (심적 장치와 현실과의) ‘일치’를 받는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이론적 출발점은 이 심적 장치의 논리와 현실의 요구 사이의 본래적인, 환원불가능한, 말하자면 구성적인 불일치이다. 프로이트가 말하는바, “‘문명의 불만’이 인간적 조건을 정의하는 것은 이 불일치 때문이다.” 여기서도 ‘인간적 조건(condition humaine)’은 ‘인간의 조건’이라고 고치고 싶다. ‘인간적’은 ‘비인간적’과 쌍으로 쓰이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 단락의 마지막 문장: “현실에 대한 우리의 가장 ‘자연적인’ 열려 있음은 심적 장치의 본래적인 논리에 압력을 행사하는 금지들이 성공적으로 그 본래적 논리를 붕괴시키고 우리의 ‘제2의 자연’이 되었다는 것을 함축한다.” 이에 대한 원문은 “Our most 'natural' openness to reality implies that the prohibitions which exert pressure upon the inherent logic of the psychic apparatus have successfully broken it down and become our 'second nature'.”이다. 여기서 ‘제2의 자연’은 ‘이차적 본성’이라고 하는 게 옳다. 요지는, 우리가 현실(원칙)에 자연스럽게 적응하는 것은 사회적 금지들이 (심적 장치의 내적 논리를 무너뜨리고) 내면화되어 이차적 본성이 되었다는 걸 암시한다는 것이다.

(23) 104쪽. 중간에 “외적 현실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정신계의 매우 내재적인 기능화에는 완전한 만족에 저항적인 어떤 것이 있다.”(there is something in the very immanent functioning of the psyche, notwithstanding the pressure of 'external reality,' which resists full satisfaction.) 여기서 notwithstanding은 ‘-에도 불구하고’란 뜻이긴 하지만, 문맥상 맞지 않는다. “외적 현실이 압력이 아니더라도” 완전한 만족에 저항하는 어떤 내재적인 기능이 있다는 게 요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완전한 만족을 방해하는 건 외적 현실만이 아니라는 것. ‘매우 내재적인 기능화’는 엉뚱한 번역이다. 매우 내재적인? the very는 ‘바로 그’라고 옮기는 게 낫겠다.

(24) 각주29)에서, noism을 ‘부정주의’로 NON-ideology를 ‘비이데올로기’로 옮긴 것도 다소 무신경하다. 이 대중적인 이데올로기는 문맥상, ‘금지주의’나 ‘금지의 이데올로기’라고 옮겨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톨스토이의 명제’는 물론 ‘도스토예프스키의 명제’이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저자를 뜬금없이 ‘톨스토이’라고 오역한 것은 무슨 선입견의 작용인 것인지? 무지이거나, 착각이거나.

(25) 106쪽부터 entity의 쇼가 시작되는데, 역자는 ‘실체’라고 번역하기를 꺼려하는 바람에, ‘실존체’니, ‘실재하는 단위체’(110쪽)니 하는 말들로 옮겼다. entity는 실제로 있는 것을 뜻하는데(하이데거의 ‘존재자’를 entity로 번역하기도 한다), ‘존재’나 ‘것’ 혹은 ‘실체’ 등으로 번역된다. ‘실존체’라니? 그렇게 강한/대단한 뜻을 갖고 있지 않다. 문제가 된 문장은 “대상a는 공간 속에 존재하는 실정적인 실존체가 아니다”인데, 실존체는 그냥 ‘실체’라고 하면 될 거 같다. substance와 구별해 주기 위해서 ‘실존체’라고 옮긴 것 같지만. 앞의 (23)에서 얘기됐던 ‘내재적인 기능’이 바로 이 ‘대상a’이다. 해서, 106-7쪽에서는 대상a에 대해서만 잘 이해하고 넘어가면 된다.

(26) 108쪽부터 나오는 내용은 지젝의 책에 단골로 등장하는 대목이기에(그만큼 초기 지젝에게서 핵심적이다) 중요하다. 그가 독일 관념론을 라캉 정신분석학으로 어떻게 재독해하는지 그 단초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고. ‘세계의 밤(night of the world)’에 대한 헤겔의 언명을 지젝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추상적 부정성’의 경험, 자아 속으로의 주체의 ‘정신병적’ 퇴각(세계의 밤)은 변증법적 운동의 최종적인 결과, 구체적 내용의 긍정적 접합 속에 지양되는 지나가는 계기가 아니다. 차라리 그 요점은 긍정적인 정신적 내용의 이 매우 구체적인 접합은 근본적 부정성(세계의 밤)의 일정한 존재를 취하는 형식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걸 아이디어로 해서 지젝은 <부정성과 함께 머물기Tarrying with the Negative>란 책 한권을 썼을 정도이다.

두번째 문장의 원문: “the point is rather that this very concrete articulation of the positive spiritual content is nothing but a form in which the radical negativity (the 'night of the world') assumes determinate being.” 그러니까 기존의 해석에서 이 ‘근본적인 부정성’으로서의 ‘세계의 밤’이라는 건 변증법적 지양의 한 계기였을 뿐이지만, 지젝에 따르면 이 지양이라는 것, ‘긍정적인 정신적 내용의’ 구체적인 절합/분절이야말로 ‘근본적 부정성’이 취하는 한 가지 형태일 뿐이다. 이 ‘세계의 밤’의 정신분석학적 이름이 ‘죽음충동’이며 ‘대상a’이다.

positive는 ‘긍정적’ ‘실정적’으로 번역되는데, 어떻게 구별해서 써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사실 이론서 번역에서 까다로운 부분은 한 개념어에 대응하는 우리말이 둘 이상 있을 경우이다. 가령, 여기서의 articulation은 ‘분절’도 되고, ‘절합’도 된다(‘접합’은 좀 이상하다). substance는 ‘실체’도 되고 ‘실질’도 된다. body는 ‘신체’도 되고 ‘물체’도 된다(이정우는 <의미의 논리>에서 body를 ‘신체’로 번역되어야 하는 부분까지도 전부 ‘물체’로 옮겼고, 김재인은 <천개의 고원>에서 전부 ‘몸체’로 옮겼다). 번역에서 까다로운 건 이런 단순한 개념어들이다.

(27) 이하 114쪽까지의 내용들은 앞의 진술을 부연설명하는 부분들이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112쪽 중간 부분: “라캉적 정신분석학의 교훈들 가운데 하나는 - 그리고 동시에 라캉이 헤겔과 재접합하는 지점은 - ‘삶’의 유기적인 직접성과 상징적 우주 간의 근본적인 불연속성이다.” ‘라캉적 정신분석학’은 ‘라캉 정신분석학’이라고 해야 한다. ‘재접합’은 ‘재결합(rejoin)’으로, ‘상징적 우주’는 ‘상징적 세계’로 옮기고 싶다. 라캉에게서 ‘상징적 세계’란 물론 ‘언어의 세계’이며, 헤겔 또한 이 언어의 힘(지배력)을 강조한다. 그것은 유기적 ‘삶’에 대한 ‘죽음’(=로고스/언어)의 지배/통치이기도 하다.

(28) 115쪽. “그러므로 우리가 ‘문화’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의 존재론적 지위 바로 그것에 있어서는 삶에 대한 죽음의 통치, 즉 ‘죽음충동’이 실정적인 존재치를 획득하는 형식이다.” 원문은 “What we call 'culture' is therefore, in its very ontological status, the reign of the dead over life, i.e., the form in which the 'death drive' assumes positive existence.” 오역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중요한 대목이어서 옮겨보았다. 한참을 우회했는데, 115쪽에서 지젝은 이러한 사전정지 작업을 배경으로 하여 로셀리니 영화의 ‘헤겔적인’ 교훈과 매력을 말한다. “그것들은 항상 어떤 ‘진정한’ 실체적인 삶의 그림을 포함하고 있으며, 마치 여주인공의 구원은 이 실체적인 ‘진정성’(substantial authenticity)으로 뛰어드는 그녀의 능력에 달려 있는 듯 보인다.”

(29) 117쪽부터 얘기되는 것은 ‘희생의 매혹’이다. 이 ‘희생’은 앞에서 얘기된 ‘행위’와 구별되어야 한다. 이 희생은 “큰 타자에 대한 ‘화해의 선물’”인데, 이것은 큰 타자의 욕망의 심연을 은폐한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희생의 논리는 케보이(당신은 무엇을 원하는가?)의 논리와 단절된다(역자는 Che vuoi? 음역/번역하지 않거나 이중으로 번역했다). 이러한 단절/저항의 주체로서 지젝이 르네 지라르(<희생양>)를 따라서 꼽는 인물이 바로 욥이다. 지젝은 욥의 희생에 논리에 대항하는 욥의 물음을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윤리적 혁명”으로 묘사한다. 이하 122쪽 사랑의 논리로까지 이어지는 부분은 순조롭게 읽히며 재미있다.

(30) 123쪽. “즉 주체는 그의 상상적 자기 경험 속에서 효과적으로 ‘주도권을 쥐고 운영하는’ 의미화 메커니즘을 오인하다는 표적인 구조주의적 테제가 라캉에게 얼마나 낯선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여기서 “효과적으로 주도권을 쥐고 운영하는”은 “effectively ‘runs the show’”의 번역이다. 구조주의의 테제란 주체의 ‘상상적 자기 경험’을 실질적인 ‘의미화 메커니즘으로서’의 구조라는 ‘큰 타자’와 대비시키는 것인데, 라캉이 보기에 그러한 ‘큰 타자’는 없다. 그것은 주체의 가정/전제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이것이 라캉의 큰 타자와 알튀세르의 큰 타자 간의 차이점이기도 하다.(<라캉의 재탄생>에 실린 ‘라캉과 알튀세르’를 다시 읽어봐야겠다.)

(31) 그래서 라캉이 더 강조하는 것은 ‘해방’이 아니라, ‘퇴각(=물러남)’이다: “큰 타자로부터의 주체의 이 ‘퇴각’이 라캉이 ‘주체적 궁핍’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것은 희생의 행위가 아니라 바로 그 희생을 희생시키는 포기의 행위이다. 이렇게 해서 획득되는 자유가 우리의 이웃으로서의 타자가 없을 뿐만 아니라 큰 타자 자체 속의 지지대 또한 없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 지점이다.”(124쪽) 그리고 이 자유는 해방의 정반대물이다(해방은 항상 주인으로서의 큰 타자를 상정한다). 결론적으로 로셀리니의 영화들은 이러한 자유에 관한 영화들이며, “어떤 외상적 만남의 실재와 타협하려 하지만, 궁극적으로 실패한 시도”들이다. 그리고 그의 영화들에서 이 모든 행위(act), 즉 연기는 잉그리드 버그만의 것이었다.(왜 여자는 남자의 징후인지 이젠 아셨는지?)

 

 

 

 

(32) 이 절에 대해선 이상으로 대충 마치기로 한다. 집에 갈 시간이 다 됐다. 이 절을 마감하는 각주47)에는 로셀리니 영화의 알레고리적 성격과 관련하여, 제임슨의 ‘히치콕을 알레고리화하기’란 글을 참조하라고 돼 있다. 그래서 나는 정말 그 글을 참조해 보고자 했다! 그 글은 얼마전에 번역된 <보이는 것의 날인>(한나래)에 실려 있다. 그런데, 한번 언급한바 있듯이 번역이 좀 미덥지가 못하다. 제임슨도 악문이지만, 번역문은 한술 더 뜨기에. 비근한 예로 ‘히치콕을 알레고리화하기’의 212쪽에 “라캉의 표현으로는 ‘신성하지 않은 시침들 upholstery tacks’로서 기능하는 특별한 기표들”이란 말이 나온다. 신성하지 않은 시침들? 이게 라캉의 용어라고?

라캉을 좀 읽은 독자라면, ‘upholstery’란 단어에서 대충 때려잡을 수 있는바, 이건 흔히 ‘quilting point’로 더 많이 번역되는 ‘누빔점’ 혹은 ‘고정점’이란 뜻의 어구이다. 그걸, upholstery tacks라고 낯설게 옮겨놓은 제임슨도 짓궂지만(이런 게 변증법과 무슨 관계가 있나?) 그걸 눈치없이 ‘신성하지 않은 시침들’이라고 번역해놓은 역자의 무식 또한 상당한 수준이다(요컨대, 라캉을 별로 읽어본 바 없다는 얘기다). 사정이 이렇게 되면, 이해가 안되는 부분은 역자가 다 뒤집어쓰는 수밖에 없다. 부록으로 책 한권 더 준다고 해서 덥석 25,000원이나 하는 비싼 책을 사버렸는데, 이걸 어디에다 하소연해야 할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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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가 시작되기 전에 일단 이 장은 끝내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후에도 밀린 일들 때문에,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될지는 아직 미지수이지만. 라캉닷컴에 가면 이라크전쟁과 관련한 지젝의 강연문 내지는 원고를 여러 편 읽어볼 수 있다. 이번에 Verso출판사와 b출판사에서 나올 책에 포함되지 않을까 짐작해 보는데, 아침엔 프린트한 원고 한편을 좀 읽다가 버스에서 내내 졸았다. 어젯밤에는 인간사랑에서 근간 예정인 의 번역 원고를 교정보다가 잠이 들고(번역본의 상태는 커트라인은 거뜬히 통과할 만한 수준이지만, 책으로 나오기에는 아직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많다. 소위 후반부 작업(교정)이 세밀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요즘 다른 할일들이 너무 많아서 잠시 아예 손을 놓고 있는 편인데, 사정을 모르는 사람은 맨날 지젝만 붙들고 있는 줄로 알 거 같다. 하지만, 사실 이달에 주로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은 양대 해석학자인 가다머와 리쾨르여서, 그간에 안 갖고 있던 이들의 책과 연구서를 10여권 이상 복사했다(해서, 두 사람의 책을 모두 합하면 30권쯤은 되는 거 같다. 이젠 읽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어느새?). 어제부터는 리쾨르의 <악의 상징>(문학과지성사)을 영역본과 대조해서 읽기 시작했다(‘문학과 악’ 혹은 ‘문학 속에 나타난 악’이란 주제에 관심을 갖게 되어서이다).

94년에 초판이 나온 이 책은 리쾨르의 책으론 비교적 많이 팔리고 있나 본데(문지의 ‘우리시대의 고전’ 시리즈에 들어가기도 하고), 사실 번역은 별로 맘에 들지 않는다. 출간당시 프랑스에 유학중이던 한 선배가 번역이 엉망이라고 핀잔을 준 적이 있는데, 그 얘기를 듣고 내가 책을 안 샀는지, 아니면 책을 산 뒤에 그 얘기를 들어서 낭패감이 들었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아서, 책을 (어쩌면 다시) 사면서도 찜찜하기는 했는데, 역시나 책을 읽으면서 영 개운하지가 않다(이런 걸 ‘투덜대며 겨자 먹기’라고 한다).

본문 시작부터 오역이 나오는 거야 예사로운 일이지만(영어로는 guilt로 옮겨진 것을 우리말로 ‘허물’로 옮긴 것에도 동의하기 어렵다), 역자는 리쾨르의 모든 문장을 단문으로 쪼개서 번역하고 있다. 역자인 양명수 교수는 권택영 교수 뺨치는 스타카토 문체를 구사하는데(문장의 짧음은 혹 생각의 짧음을 반영하는 건 아닌지), 그거야 자기 스타일이라고 쳐도 리쾨르의 문체마저 완전히 자기 스타일로 바꾸어놓은 것은 좀 납득하기가 어렵다. 해서, 책의 저자는 리쾨르라기보다는 차라리 그에게서 영감(리쾨르의 표현을 응용하자면, false-inspiration)을 받은 양명수라고 해야 더 타당할 거 같다(주여, 오역은 흠입니까, 죄입니까, 허물입니까?). 혹 이 책을 읽었거나 읽을 계획을 갖고 계신 분들은 이 점을 고려하시기 바란다.

 

 

 

 

(15) 각설하고,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로 돌아오자. 계속해서 96쪽이다. 지난번에 카린의 상징적 자살 ‘행위’까지 했는데, 거기서 act와 action의 구별에 유의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덧붙여서 act와 구별해야 하는 것이 ‘행위로의 이행’ 혹은 ‘행위로의 이동’이라고 번역되는 passage a l'acte(a에 붙은 강세 부호는 생략했다)이다. 이건 영어로 passage to the act인데, 지젝은 보통 불어 그대로(이탤릭체로) 쓴다. 정신의학에서는 정신병적인 충동적 행동을 그렇게 부르는 거 같은데, 라캉-지젝은 외연을 좀 확대해서 사용한다(D. 에반스의 <라캉정신분석사전> 참조).

여기까지는 그래도 괜찮지만, 사정은 조금더 복잡하다. 에반스에 따르면, 라캉은 프로이트의 Agieren(행동화)의 번역어로 사용되던 passage a l'acte에 조금 다른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둘을 구별한다. 즉 영어로 하자면, 라캉은 acting out과 passage to the act를 구별한다. 전자는 대타자에게 보내는 상징적 메시지이고, 후자는 대타자로부터 실재의 차원으로 도주하는 것이다. “따라서 행위로의 이행은 상징적 그물망으로부터의 탈출이고, 사회적 연대의 해체이다.”(이것이 지젝이 ‘자유’라고 부르는 것 아닌가?) 여기서 내가 좀 헷갈리는 것은 지젝과 라캉의 용어 사용이 일치하지 않는 거 같기 때문이다. 즉 라캉의 acting out과 passage to the act의 구별에 대응하는 것이 지젝에게는 passage to the act와 act의 구별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내가 무심코 읽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지젝에게서 ‘acting out’이란 말은 주목하지 못했다).

적어도 에반스의 설명에 기댈 때 그러한데, 가령 96쪽에서 지젝은 “현실에서의 자살은 상징적 소통의 그물망 속에 붙잡혀 있다. 스스로를 죽임으로써 주체는 큰 타자에게 메시지를 보내려 시도한다. 즉 그것은 죄의식의 승인, 정신을 맑게 하는 경고, 감상적인 호소로서 기능하는 행위인 반면, 상징적 자살은 주체를 주체들 간의 회로로부터 배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하여 ‘현실에서의 자살’(영어 표현은 모르겠다. ‘suicide in reality’일까?)과 ‘상징적 자살(symbolic suicide)’을 구별하고 있는데, (라캉식 구별에 따르면) 전자가 acting out이고, 후자가 passage a l'acte 아닌가? 그런데 지젝은 이 후자(상징적 자살)를 act라고 부른다(여기까지가 나의 추론인데, 내용을 자세히 아시는 분은 알려주시길). 해서, 요컨대 지젝을 읽을 때, act(행위)와 action(행동), 그리고 passage a l'acte(행위로의 이행)이 조금씩 다른 의미를 갖는다는 데 유의해야겠다.

(16) 앞의 인용문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면, ‘정신을 맑게 하는 경고’는 ‘a sobering warning’의 번역인데, 좀 무심한 번역이다. 이 경고는 자살에 의해서 촉발되는 것인데, 자살이 우리의 정신을 맑게 하는가? 나로선 동의하기가 어렵다. ‘정신이 바짝 들게 하는 경고’이라거나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경고’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17) 이어지는 문장, “그러므로 <스트롬볼리>가 깔아놓은 함정은 스스로를 ‘명백한’ 것으로서 제공하는 그것의 종결부를 읽는 것에 있다.”는 좀 어색하다. 원문은 이렇다: “The trap laid by consists therefore in the reading of its end that offers itself as 'obvious'.” 다시 옮기면, “<스트롬볼리>의 함정은 이 영화의 결말이 그 자체로 너무도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는 걸로 보는/읽어내는 데 있다.” 그러니까, 함정은 너무도 명백하고 당연한 결말이 아닐까라고 보는 데 있다. 반면에, 지젝은 이 영화의 결말이 모호하며 확정적이지 않다고 본다. 왜냐하면, “영화는 카린이 새로운 상징적 정체성에서 그녀의 장소를 발견하기 전에, 새로운 수행문, ‘새로운 창립사’ 앞에서 끝”나기 때문이다. 여기서, ‘장소(place)’는 ‘자리’라고 옮기는 게 더 적절해 보이고, ‘새로운 창립사(founding word)’는 따옴표가 잘못 쳐져 있는데, 나라면, “새로운 ‘자기정립의 말’”이라고 옮기겠다.

(18) “그렇지만, 라캉이 강조하는 바는, 그러한 상징적 자살이라는 ‘영점’의 통과는 이런 이름을 받을 가치가 있는 모든 행위 속에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에서 ‘이런 이름’은 무얼 받는 말일까? 우리말 문법에 따르자면, 이런 이름이 가리키는 건 앞에 나오는 ‘영점’이나 ‘상징적 자살’이다. 하지만, 원문에서 그것이 가리키는 건 ‘행위’이다. 직역을 하다보면, 이러한 번역투의 오역이 자주 나온다. 다시 옮기면, “... 상징적 자살이라는 ‘영점’의 통과는 ‘행위’라는 이름에 값하는 모든 행위 속에 작동하고 있다...”

(19) 98쪽에서, ‘잠정적인 엄폐(temporary eclipse)’는 ‘일시적인 소멸’로 옮기고 싶고, ‘행위는 덜 수 없는 위험에 의해 정의된다’에서, ‘덜 수 없는 위험(irreducible risk)’은 거의 ‘환원불가능한 위험’이라고 자동번역되지만, 문맥상 ‘제거할 수 없는 위험’이라고 옮기고 싶다. 이 대목은 행위의 정의와 관련하여 음미해볼 만하다. 지젝에 의하면, 행위의 최종결과는 궁극적으로 무의미하며, 엄밀히 말해서, 순수행위로서의 절대적인 거부(NO!)와 관련하여 부차적이다(strictly secondary in relation to the NO! of the pure act).

그리고 그에 따른 각주 26)도 중요하다. <햄릿>의 대사이기도 한, ‘out of joint’(탈구되어 있는 <시간>)는 데리다에게서도, 들뢰즈에게서도 아주 중요한 문구이므로, 이에 대한 설명은 주의해서 읽어둘 필요가 있다. 99쪽 연속되는 각주에서 “사물이 항상 ‘자기 자리를 원하는(wanting (at) its place)’ 우주”는 “사물이 항상 ‘자신의 장소에 자리하기를 원하는’ 우주”라고 하면 더 이해가 쉬울 거 같다. 즉 사물들이 제자리에 놓여 있지 않기 때문에, 자기 자리로 돌아가려고 하는 우주이다. 마찬가지로, 피투적 존재로서의 현존재(Dasein)란 자신이 있어야 할 장소에 있지 않다고 지각하는 존재, 즉 out of joint되어 있는 존재이다. 모처럼 하이데거 전공자로서의 지젝이 한마디 하고 있는 대목이다.

(20) 100-102쪽까지 이어지는 대목은 전부 ‘행위’의 구체적인 사례들이다. 흥미로운 것은 101쪽에서 행위의 범례적 사례들이 ‘여성적’이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안티고네를 유력한 예로 제시하는 부분이다. 지난번 방한 강연회 때, 이 책의 역자 주은우가 지젝에게 질문했던 내용이기도 한데(당신은 안티고네의 행위를 행위의 모범적인 모델로 간주하는가?), 이에 대해서 지젝은 안티고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은 다소간 부정적인 쪽으로 바뀌었다고 답변한 바 있다. 어쨌든 이러한 ‘여성적’ 제스처는 프랑스의 레지스탕스이자 가톨릭 신비주의자 신비주의자 시몬느 베이유에게까지 이어진다.

그런데 이 베이유가 런던에서 ‘자살적인 굶주림’에 의하여 삶을 마쳤다고 돼 있는데, 못 먹어서 죽은 게 아니라 안 먹어서 죽은 것이므로, ‘자살적인 음식거부’라고 해야 온당할 거 같다. 그 다음, 102쪽의 마지막 문장에서 ‘절망적인 시도(desperate attempt)’는 ‘필사적인 시도’라고 고치고 싶다. 아무튼 요 몇 페이지는 ‘행위’란 개념을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하면서도 유익하기 때문에(더불어 재미있고 쉽게 이해된다) 반드시 참조할 필요가 있다...

(2절 ‘세계의 밤’은 또 언제 다루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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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이래저래 바쁜데다가 심난한 일들이 쌓여가고 있지만, 벌여놓은 일이어서 마저 매듭을 짓기로 한다.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 85쪽이다. 각주13) 중간쯤, “외부의 우연한 사건에 의해 연결되는 커플은 처음에 사랑에 빠진 듯이 보이게 하며, 그 후 한 단계씩 외면적인 연결이 진정한 사랑으로 자란다.” 이건 앞에서 얘기된 ‘상징적 동일시의 변증법’을 다시 요약/반복하고 있는 대목인데, “사랑에 빠진 듯이 보이게 하며(first pretends to be in love)”는 좀 이상한 번역이다(pretend를 왜 ‘가장하다’라고 번역하지 않았을까?). “처음에는 사랑에 빠진 것처럼 서로 가장하지만”이란 뜻이다. 즉 가장(흉내)으로 시작했지만, 그것이 진정한 사랑으로 발전해간다는 것.

(10) 이제 다루어지는 영화 <유럽 ’51>의 주인공은 로마의 부유한 가정주부 이레네이다. 그녀는 사교생활에만 관심을 쏟는데, 그녀의 무관심에 대해 보복이라도 하듯이 어린 아들이 자살한다. 죄의식에 사로잡힌 그녀는 과거의 모든 생활을 청산하고, 공장에서 저임금으로 일하면서 빈민(역자는 ‘빈자’라고 옮겼다)들을 돕는다. 하지만, 온전한 위안을 얻지는 못한다. 좀도둑을 신고하지 않고 자수를 권하다가 그녀는 법정에 서게 되고, 보호감호 처분을 받은 후에 정신병원에 수감된다. 감방에 갇혀 있는 그녀의 주위로 그녀의 도움을 받았던 빈민들이 모여들면서 그녀를 새로운 성녀라고 부르고 영화는 끝난다.

이 영화에 대한 ‘명백한’ 독해, 즉 ‘즉자적인’ 이해는 이레네가 죄의식의 압력 때문에 무너져 내렸다는 것이다(Irene breaks down because of the unbearable pressure of guilt). 물론 지젝은 죄의식의 진정성을 물으면서 이러한 독해를 뒤집는다. 지젝의 요지는 87쪽에 상술돼 있는데, 그에 따르면(또 정신분석에 따르면), 우리는 큰 타자(the Other)에 편집증적으로 죄의식을 투사함으로써 우리가 맡아야할 책임을 제거하기도 하지만, 거꾸로 보다 ‘근본적인 외상’(radical traumatism; 역자는 ‘진정한 외상성’이라고 옮겼다)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서(역자는 ‘탈출’로 계속 옮겼는데, 부정적인 뜻이므로 ‘도피’가 더 타당하다) 죄의식을 뒤집어쓰기도 한다. 즉 우리는 죄의식‘으로부터’ 도피하기도 하지만, 죄의식 ‘속으로’ 도피하기도 하다(이에 대한 원문이 내 책엔 누락돼 있다).

(11) 뒤로 넘어가기 전에, 86쪽의 각주14)는 문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오역이다. “우리로 하여금 <독일 영년>에서 에드문트의 자살에 대한 로셀리니의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없는 듯한, 심지어 냉소적이기까지 한 논평을 ‘진정한
희망의 빛’으로 위치지을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이레네의 행위의 부산물로서 출현한 이 새로운 신자 공동체이다.” 좀 길지만 이에 대한 원문은 이렇다: “It is this new community of believers emerging as a by-product of Irene's act that enables us to locate properly Rossellini's seemingly unintelligible, even cynical comment on Edmund's suicide in as 'a true light of hope'” 그리고 인용문이 이어지는데, 이 문장은 어려운 구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It-that 강조구문이다), ‘이해할 수 없는’ 문장으로 번역돼 있다.

번역의 요지는 “로셀리니의 논평을 ‘진정한 희망의 빛’으로 위치지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이레네의 행위의 부산물로서의) 새로운 신자 공동체이다”인데, 'a true light of hope(진정한 희망의 빛)'이 받는 것은 ‘comment(논평)’이 아니라 ‘Edmund's suicide(에드문트의 자살)’이다. 해서 다시 옮기면, “<독일 영년>에서의 에드문트의 자살을 ‘진정한 희망의 빛’이라고 한, 로셀리니의 언뜻 이해할 수 없는, 심지어 냉소적이기까지 한 논평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바로 이레네의 행위의 부산물로서 출현한 이 새로운 신자 공동체이다.”

(12) 같은 각주에서, 중간의 ‘희망의 강세(accent of hope)’는 좀 어색하다. ‘희망에 대한 강조’가 어떨까 싶다. 그리고, ‘자살적인 근본적 움츠러듦의 행위(the suicidal act of radical withdrawal)’에서 ‘withdrawal’은 이후에 여러 차례 나오는 단어인데, 역자는 ‘물러남’ 등으로 매번 다르게 옮기고 있다. 가급적이면 통일시켜줄 필요가 있고, 나는 ‘물러남’이나 ‘철회’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뒤로 나앉는 행위를 말하는바, 이것이 자살적인 행위, 혹은 상징적 자살 행위이다(이 절의 제목은 “왜 자살은 유일한 성공적인 행위인가?”이다).

(13) 이후 88-89쪽에서 설명되는 것은 이데올로기적인 ‘큰 타자’의 기능이다. 그것은 ‘숨은 작인(hidden agency)’이면서 동시에 ‘순수한 외관의 작인(the agency of pure semblance, of an appearance)’이다. 그리고 90-92쪽에서 이 순수한 외관에 대한 강박적인 논리의 끝장을 보여주는 사례로 들고 있는 것이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셰스쿠의 몰락이다. 대중(mass: 역자는 ‘군중’이라고 옮겼는데, 이건 선택의 문제이지 싶다)이 그를 ‘큰 타자’로 간주하는 게임을 더 이상 계속하려고 하지 않게 되자 그는 무력하게 몰락했다(그는 원래 무력했다). 원죄의 메커니즘도 마찬가지인데, 신은 항상 이미 죽어 있지만(‘항상 이미’라는 건 데리다도 아주 즐겨 쓰는 문구이다), 인간이 원죄의식을 떠맡음으로써 그는 ‘비존재’의 경험에서 면제된다.

다시 <유럽 ’51>로 와서, 93쪽. 결론적으로 “그녀(이레네)의 시도는 실재계를 죄의식의 상징적 세계로 통합함으로써, 그것을 이데올로기적 장 내에 위치시키고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실재계의 외상적인 조우(그녀의 아들의 자살 행위)를 되찾으려는 절망적인 시도일 뿐이다.” 원문은 "Her attempt ... is to recover the traumatic encounter of the Real (her son's suicidal act) ..."로 나가는데, 나는 ‘recover’가 (물론 ‘되찾다’ ‘회복하다’란 뜻도 있지만) 여기선 ‘보상하다’란 뜻으로 옮겨져야 한다고 본다(외상적인 조우를 되찾고자 한다는 건 논리적으로 좀 이상하다).

‘절망적인(desperate)’은 ‘필사적인’으로 옮기고 싶고. 즉, 이레네는 (아들의 자살이라는) 실재와의 외상적인 조우를 상징계 속에 통합함으로써(간단히 말하면, 어떤 ‘의미’를 부여/할당함으로써) 그것을 보상하고자 시도한다. 조금 내려가서 ‘목적격적인 잔여-배설물(objectival remainder-excrement)’이란 표현이 나오는데, 언어학을 전공한 친구에게도 확인해 본 결과 objectival이란 단어는 ‘목적격(objective)’의 형용사로 쓰이지 않는다. 그냥 ‘대상적’이란 뜻이지 않을까 한다.

(14) 이제 세번째 영화 <스트롬볼리>. 에스토니안 망명객 카린의 이야기인데, 그녀는 2차대전시 이탈리아의 피난민 수용소에서 탈출하기 위해 스트롬볼리라는 화산섬에서 온 가난한 어부와 결혼한다. 그런데 섬에서의 가부장적인 폐쇄적인 생활에도 숨이 막힌 카린은 분화구가 있는 산길을 따라가다가, 분화구에서 올라온 증기에 질식되어 사라진다(“오 신이시여!”란 소리와 함께). 그녀가 떠나는 것인지 마을로 되돌아가는 것인지 이탈리아판에서는 열린 결말로 남겨놓는다. 이러한 결말에서 보면, 카린은 어떠한 행동(action)도 완수하지 못했지만, 그녀의 행위(act)는 완수되었다(action과 act는 그렇게 구별된다).

지젝이 계속 반복해서 얘기하는바, 이 행위란 상징적 자살(=zero point) 행위이다. 96쪽에서 행위에 대해 재정의하고 있는 대목: “라캉적 의미에서의 행위란 상실 속에는 상실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됨으로써 우리가 포기 자체를 포기할 수 있게 되는 이 물러남일 뿐이다.”(And the in the Lacanian sense is nothing but this withdrawal by means of which we renounce renunciation itself, becoming aware of the fact that we have nothing to lose in a loss.) 오역이랄 건 없는데, 조금 풀어서 다시 번역하면, “라캉적 의미에서의 ‘행위’란 바로 이러한 물러남(철회)일 뿐인바, 어떤 상실 속에서 우리가 상실할 것이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우리는 이 물러남을 통해서 포기라는 것 자체를 포기한다.”(포기할 게 없기 때문에.) 어느 쪽이든 자신이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면 그만이다.

이래가지고야 도대체 언제 끝날는지 알 수 없지만, 오늘은 여기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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