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늦게 출근해서 점심을 먹고 나서야 인터넷을 둘러보는데(*이 글은 2003년말에 씌어졌다), 미디어다음의 메인 뉴스가 “여배우 매염방 암으로 사망”이다. 그녀가 암투병중이라는 얘기는 오래전에 흘깃 지나가면서 들은 거 같은데, 그럼에도 2003년을 불과 이틀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다고 하니까 갑작스럽다. 지난번 장국영의 자살에 이은 매염방(Anita Mui)의 죽음으로 이들 홍콩의 가수이자 배우들을 좋아했던 이들에게 올해는 ‘최악의 해’로 기억될 모양이다.

 

 

 

 

장국영이나 매염방의 열혈팬은 아니지만, 나는 그들의 음악, 특히 영화주제가들을 좋아한다. 자신이 주연도 맡았던 영화의 주제가로 장국영이 부른 <천녀유혼>과 <영웅본색3>의 주제가로 매염방이 부른 <석양의 노래(夕陽之歌)>가 그것들이다(나는 그 노래들을 들으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함께 주연으로 출연했던 관금붕의 <인지구>를 빼놓을 수 없다(이 영화로 매염방은 대만의 금마장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이후에 장국영이 <아비정전> <동사서독> <해피 투게더> 등 왕가위 감독의 영화 여러 편에서 최고의 연기를 선보인데 반해, 매염방은 몇몇 무협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지만(그녀는 연기력에 비해서 좋은 영화를 만나지 못했다), 재주 많은 두 사람이 홍콩 연예계의 한 시대뿐만 아니라, 우리 세대(흔히 386이라고 부르는)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있다.



나에게 매염방은 개인적으로 한 친구에 대한 기억과 연결돼 있다. 그 친구는 사실상 나에게 매염방이란 배우의 존재 자체를 각인시켜준바, 언젠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여배우가 (나로선 이외였지만) 매염방이라고 했다(그때 나는 아마도 임청하를 좋아하는 배우로 들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입 밖에 내진 않았는지도). 그러면서 그 친구가 내세운 이유는 그녀의 도톰한 입술이었다(나는 턱이 야무진 배우를 좋아한다. 임청하나 애슐리 주드처럼).

내가 갖고 있는 유일한 매염방 음반(테입)은 1989년에 나온 <브라질>이고, 커버에는 예의 게슴츠레한 눈빛과 도톰한 입술의 그녀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지금은 음반을 사는 일이 아주 드물지만, 그때만 해도 한번 산 테입은 거의 닳을 정도로 들었고, 매염방의 것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음반은 A면(The Bright Side)과 B면(The Blues Side)이 각기 다른 주제로 돼 있는데, A면의 첫곡이 <여름날의 사랑(夏日戀人/ Summer Lover)>이고, B면의 첫곡이 바로 <석양의 노래(Sunset Melody)>이다. 매염방과 더불어, 어느덧 우리 인생의 여름날들은 다 저물어 간 듯하다. 하지만, 그녀가 부르는 <석양의 노래>는 얼마나 박력 있고 장쾌한가! 나는 그녀가 암과의 사투 속에서도 그러한 의연함을 지켜갔으리라고 믿고 싶다.

매염방을 좋아했던 친구는 이후에 입술이 도톰하지는 않아도 매염방만큼 훤칠한 미인을 만나서 결혼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렸다.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감쪽같이 숨겨왔던 자신의 배우자감을 처음 내게 소개하면서 의기양양해 하던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런, 그가 지난봄 끄트머리에 세상을 버렸다. 모든 일에 자신감을 잃고, 우울해 하던 그를, 한동안 자주 보지 못하던 나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내가 그를 다시 찾았을 때, 그는 더 이상 같은 하늘 아래 있지 않았다. 그가 마지막 고통스런 시간들을 보내고 있을 때, (나를 포함하여) 세상 그 무엇도/누구도 그의 의지가 되어줄 수 없었다는 것이 슬프고 안타깝고 아쉽다. 그는 의연했던 것일까, 어리석었던 것일까?..

 

 

 

 

지난주말에 산 정현종의 산문집 <날아라 버스야>에 실린 ‘숨막히는 진정성의 시: 바예호 읽기’를 읽으며, 오래 잊고 있었던 이 페루의 시인 세사르 바예호(1892-1938)를 다시 떠올렸다. 그의 시선집 <희망에 대해 말씀드리지요>(문학과지성사)가 바로 5년 전인 1998년 12월에 나왔었고, 나는 그해 겨울을 레바나스를 읽으며, 바예호를 읊조리며 보냈다(나는 스페인어권 시인들 가운데 미겔 에르난데스와 바예호를 좋아한다). 평생을 경제적 고통과 병마로 시달리다가 죽은 시인 바예호는 자신의 고통을 외면하거나 미화하지 않고 거리낌 없이 털어놓는다. “인간은 슬퍼하고 기침하는 존재”라고 정의하는 그의 시들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적은 없다...”이다. “호이 메 구스타 라 비다 무초 메노스(Hoy me gusta la vida mucho menos)...” 그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적은 없다.
항상 산다는 것이 좋았었는데, 늘 그렇게 말해왔는데.
내 전신을 이리저리 만지면서, 내 말 뒤에 숨어 있는
혀에 한 방을 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리고 이렇게 끝난다.

엎어져서라도 어쨌든 산다는 것은 늘 기분 좋은 일일 거야.
“그리도 많이 살았건만 결코 살지 않았다니! 그리도 많은
세월이었건만 늘, 언제나, 항상, 항시 세월이 기다린다니!”
이렇게 나는 늘 말해왔고 지금도 말하니 말이다.

Hoy me gusta la vida mucho menos,
pero siempre me gusta vivir: ya lo decía.
Casi toqué la parte de mi todo y me contuve
con un tiro en la lengua detrás de mi palabra.

Hoy me palpo el mentón en retirada
y en estos momentáneos pantalones yo me digo:
¡Tánta vida y jamás!
¡Tántos años y siempre mis semanas!...
Mis padres enterrados con su piedra
y su triste estirón que no ha acabado;
de cuerpo entero hermanos, mis hermanos,
y, en fin, mi ser parado y en chaleco.

Me gusta la vida enormemente
pero, desde luego,
con mi muerte querida y mi café
y viendo los castaños frondosos de París
y diciendo:
Es un ojo éste, aquél; una frente ésta, aquélla... Y repitiendo:
¡Tánta vida y jamás me falla la tonada!
¡Tántos años y siempre, siempre, siempre!

Dije chaleco, dije
todo, parte, ansia, dije casi, por no llorar.
Que es verdad que sufrí en aquel hospital que queda al lado
y está bien y está mal haber mirado
de abajo para arriba mi organismo.

Me gustará vivir siempre, así fuese de barriga,
porque, como iba diciendo y lo repito,
¡tánta vida y jamás! ¡Y tántos años,
y siempre, mucho siempre, siempre, siempre!



한때 인생이 아주 싫었던 날들에 나는 이 시를 읽으며 버텼다. 에밀 시오랑의 말대로, 자살에 대한 관념은 자살을 유예시킨다.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적은 없다!”고 투덜거리면, 어느새 삶은 그럭저럭 살 만한 것이 된다. 그래서 말하게 된다. “엎어져서라도 어쨌든 산다는 것은 늘 기분 좋은 일일 거야.” 내가 지난봄에 그 친구에게 바예호를 읽어주었더라면, 사정은 달라질 수 있었을까?

한해가 가고 있다. 하지만, 늘, 언제나 항상, 항시 또 다른 한해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건 산 자들의 몫이다. 저무는 해에 삶을 놓음으로써 자유를 얻은 모든 이들의 명복을 빈다. 내 친구의 명복을 빌고, 매염방의 명복을 빈다(이 도톰한 여가수 덕분에 그 친구가 좀 덜 심심할까?).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죽은 어린 남매의 명복을 빈다. 전철에 몸을 던져 우리가 한국인임을 부끄럽게 한, 한 외국인 노동자의 명복을 빈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명복을 빈다. 그리고, 지진으로 숨진 수만의 이란 사람들...

바예호의 사후에 발표된 시들 가운데 한편을 여기에 옮겨놓는다.

전투가 끝나고,
한 사람이 죽은 전사에게 다가왔습니다.
“죽지 말아!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러나, 죽은 이는 그냥 죽어갑니다.

두 사람이 와서 말했습니다.
“우리를 두고 가지마! 힘을 내! 다시 살아나!”
그러나, 죽은 이는 그냥 죽어갑니다.

스물, 백, 천, 오십만의 사람들이 와서 절규합니다.
“이렇게도 많은 사랑도 죽음 앞에서는 힘이 없구나!”
그러나, 죽은 이는 그냥 죽어갑니다.

수백만 명이 모였습니다. 그리고 애원했습니다.
“형제여, 여기 있어줘!”
그러나, 죽은 이는 그냥 죽어갑니다.

그러자, 전세계 만민이 몰려와 그를 에워쌌습니다.
슬픈 시신은 감동이 되어 그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일어나
맨 처음에 온 사람을 껴안았습니다. 그리고 걸어갔습니다.

- <스페인이여! 나에게서 이 잔을 멀리해다오.12>

2003. 1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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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7장이다. 내가 보기에, 지젝의 소프트 버전처럼 보이는 이 책에서 살레클의 변별성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5장과 7장이다. 그녀는 포스트모던 전위예술에 대해 넓은 안목과 이해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7장에서는 여성의 음핵절제와 피터 그리너웨이의 <필로우북>과 함께 ‘바디 래디컬’ 그룹의 작업 등이 분석되고 있다(음핵절제를 지칭하는 말은 ‘여성 할례’이지만,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의 경우에도 이상할 만큼 ‘할례’라는 용어가 번역에서는 기피되고 있다).

먼저 226쪽. ‘신체 채색’은 물론 ‘바디 페인팅body painting’의 번역인데, ‘신체 채색’이란 말이 오히려 생소하다. 외국어에 대한 혐오에서가 아니라면(그럴리는 없어 보이는데), 굳이 더 생소한 번역어를 선택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거기에 무슨 ‘향략’(역자의 ‘향유’)이 있는 것인지?

-233쪽. ‘여성적 수줍음female shyness’은 ‘여성의 수줍음’이라고 하는 게 더 나을 듯하다. ‘-적’이란 말은 다른 말로 대체가능할 경우, 풀어주는 것이 읽기에 더 편하다. 또 ‘여성적 수줍음’이란 표현은 ‘남성적 수줍음’을 연상시키는데, 프로이트가 얘기하는 것은 여성의 고유한 특징으로서의 수줍음이므로, ‘여성의 수줍음’이라고 해주고 싶다.

-234쪽의 둘째줄. ‘남근 기관의 부재’에서 ‘부재’는 ‘lack’의 역어이다. 오역이라는 건 아니지만, 다른 곳에서는 (그리고 일반적으로) ‘결여’라고 번역되는 단어가 유독 여기서만 ‘부재’로 번역되었다. 바로 앞뒤로도 ‘결여’라고 번역돼 있으므로, 일관성을 희생시킬 만한 이유는 없어 보인다.

-242쪽 맨아래. “출판업자는 매우 무례했으며, 아버지에게 몸을 내맡길 것을 요구했다.” 영화 <필로우북>의 내용에 관한 것인데, 원문은 “The publisher was extremely rude and demanded sexual favors from the father.” 번역문은 sexual favor란 원뜻이 잘 드러나지 않는, 점잖은 번역이다. 그런 상황에서 쓰는 말은 ‘몸을 내맡기다’가 아니라, ‘몸을 대주다’이다.

-245쪽. 밥 플래니건이란 ‘공연 예술가’ 얘기인데, ‘공연 예술가’는 ‘퍼포먼스 예술가’로 바뀌어야 한다. 우리말의 ‘공연예술’은 연극이나 연주회를 다 포괄하는 말이며, 더 제한적인 의미로 사용할 때는 ‘퍼포먼스’라고 해야 한다(255쪽의 올란의 ‘공연’도 마찬가지이다). 바로 다음, “그의 외음부는 절단된다”에서도, 남자의 경우는 보통 ‘생식기’라고 하는 것인데, ‘외음부’란 역어는 상당히 낯설다(남성의 경우에도 ‘음부’란 말을 쓰는가? 여성의 ‘외음부’에 해당하는 것은 남성의 ‘음경’, 곧 ‘생식기’이다).

-252쪽. 바디 래디컬 그룹에 대한 얘기인데, 7행 “거기서 발생하는 것은 말 그대로의 것이다.”도 정확한 번역이라고 할 수 없다. 원문은 “What is happening is literal.”이며, 이에 대한 번역은 “거기서 일어나는 일은 말 그대로 해프닝이다” 정도이어야 한다. 'literal'이 ‘happening’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performance'를 ‘공연’이라고 하는 것까지야, 말릴 수 없다고 하더라도, ‘happening’을 ‘발생하는 것’으로 옮기는 것은 좀 심하다 싶다(‘해프닝’은 현대미술의 어엿한 한 장르이다).

-254쪽. ‘자본의 세계화(the globalization of capital)’를 역자는 ‘자본의 범역화’라고 옮기는데(271쪽에서도), 이미 통용되고 있는 말이 어디가 문제라는 것인지? ‘범역화’란 용어가 사회과학에서 통용되는 말인가? 내가 인터넷에서 찾아본 ‘범역화’의 유일한 용례는 다음과 같다: “문학에 대한 기존의 인식이 붕괴되고 새로운 패러다임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문학에도 ‘퓨전전의 시대’가 당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추세를 확인할 수 있는 현상은 장르 사이의 전통적인 관념이 빛을 잃고, 문학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범역화 되어가고 있는 점이다.” 역자의 고집이 기이하다고 할밖에.

-256쪽 중간 부분. “재생산은 재설계되고, 성관계는 주체와 기계 사이의 인터페이스로 대체된다.”(지나는 김에, ‘인터페이스’는 되는데, ‘퍼포먼스’나 ‘해프닝’은 왜 안되는가?) 첫번째 절에서(Reproduction is redesigned), 재생산은 재설계의 목적어가 아니므로(번역문은 그렇게 읽힌다), “재생산(=생식)은 재설계가 되고” 혹은 “재생산은 재설계로 바뀌고” 등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257족. ‘무제약적 자유의 가능성(unlimited possibilities of freedom)’은 ‘자유의 무한한 가능성(들)’로 바뀌어야 한다. 이어서 “자기-부과된 절제의 신체 예술(a body art of self-imposed cuts)”은 나라면, “바디 아트로서의 자해(적인 절단)”라고 하겠다.

-258쪽. 각주4) ‘이스람교’는 ‘이슬람교’의 오타이다.

-<페이스 오프>와 <가타카> 등의 영화를 소재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는 결론의 경우에 새로운 건 없다. 굳이 한번더, 지적하자면, 279쪽에서 “그 순간 ‘쓰여지지 않기를 멈추지 않는다’로서 조음되는 성적 관계의 불가능성은...”에서 ‘조음되는’은 ‘말해지는’이라고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리고, 찾아보기. 번역본의 찾아보기는 가령, (ㄱ)에서 <강간살인>Lustmord이라는 작품명 다음에 괄호안에 넣은 작가명 홀저를 병기해주고, (ㅎ)에 가서, 다시 작가명, 홀저 제니(Hilzer, Jenny)와 작품명 <강간살인>을 써주고 있다. 이렇게 이중적으로 해줄 필요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한다면, 작가명 ‘O. 헨리’가 찾아보기에 빠져 있다. 참고로, 오. 헨리는 이번에 두툼한 작품선집이 새로 나왔는데, 살레클이 분석하고 있는 <기념물(Memento)>도 번역되었는지 모르겠다(목차에서 같은 제목의 작품은 눈에 띄지 않는다).

자, 이 정도면 이 다양한 사례(판본)들에 대한 풍성한 향연을 충분히 즐긴 것이라고 말하고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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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을 한일이니까 끝을 보기로 한다. 시인 황인숙의 표현을 빌면, '빚을 까자'! 근데, 내가 누구한테 빚을 지고 있는 것인지?...

-5장부터이다. 170쪽. 러시아의 행위예술가 쿨릭에 대한 장인데, 그가 전시장에서 개-쿨릭 노릇을 하던 중 관람객을 무는 바람에 경찰에 잡혀갔다. 하지만 풀려났다. "무엇 때문에 고발을 당한 것인지가 불분명했기 때문에 말이다." 해당 원문은 "Kulik was released, since it was unclear what he could be accused of."(104쪽) 역자는 이 수동문의 의미상 주어를 '관람객'(혹은 '전시회 조직위원')으로 봤는데, 나는 앞문장의 '경찰관(policemen)'이라고 본다. 즉 그를 무엇으로, 어떤 죄목으로 기소해야 할지가 불분명했기 때문에 그는 풀려난 것. 사람을 물었으니까 고발당한 이유는 분명하다. 하지만, 문제는 문 것이 인간-쿨릭이 아니라 개-쿨릭이었기 때문에, 형사상의 책임을 물을 수 있을지가 불분명한 것이다. 오역이랄 것도 없지만, 의미를 좀더 분명히 하자면 그렇다.

-171쪽. "어떤 이상적인 민주적 우주를 창조하는 하버마스적인 이상적 담화상황..." '이상적인 민주적 우주'란 'ideal democratic universe'이다. 역자는 하버마스의 소통이론을 우주적인 차원으로 격상시키는 데, 좀 과장이다. '이상적인 민주적 세계'라고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대개 'universe'의 일차적 의미는 '우주'가 아니라 '세계'이지만, 역자는 모든 경우에 일률적으로/자동적으로 '우주'라고 옮긴다. '상징적 우주' 정도까지는 비유적으로라도 말이 되지만, 하버마스와는 좀 안 맞는다는 게 내 생각이다. '미스 유니버스'를 '미스 우주'라고 부르는 게 어색한 것처럼.

-아래쪽에 "어떤 예술가들이 폭력과 파괴를 소통의 양태로서 사용할 때..."에서 소통의 양태는 'a mode of communication'이다. '양태'가 틀렸다는 건 아니지만, '소통의 방식'이 더 편안하지 않을까 한다. 'mode'는 무조적 '양태'라는 건, 'universe'는 무조건 '우주'라는 것만큼 뻑뻑하다.

-173쪽. 쿨릭의 협력자 '밀라 브레디키나Mila Bredikhina'는 러시아여자인 모양인데, '브레디히나'라고 읽어야 한다. 그리고, 아래의 'noosphere'는 흔히 '정신권', '정신계'라고 옮기는데('생물계biosphere' '기호계semiosphere'와 짝개념이다), 여기선 역자가 고른 '인지권'이란 역어도 적절해 보인다. 'nous'가 냄새맡는 능력에서 파생된 단어라고 하니까. 그렇다면, 개는 얼마나 탁월한 '정신적인' 동물인 것인가!

-174쪽. '생윤리학'은 'bioethics'의 역어인데, '생명윤리학'이라고 옮기는 게 낫다. '생윤리'에서의 '생'은 '생명'보다는 '인생'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179쪽. 중간에 '언어 속으로 입장할 때'에서 '입장'은 'entrance'의 역어인데, 나는 그것이 오역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진입'이라고 옮기는 건 어떨까라고 제안한다. 그리고 라캉네 개 이름 '저스틴Justine'은 프랑스 개니까 '쥐스틴'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드 후작의 소설 제목이기도 한 것. '쥐스틴, 혹은 미덕의 불운'.

-180쪽. "라캉의 테제는 파블로프가 실제로 문자 이전에avant la lettre 구조주의자로 행동했다는 것이다."에서 불어 'avant la lettre'는 문자 그대로 '문자 이전에before the letter'란 뜻이 아니다. 숙어로 어떤 이름(명칭)으로 불리기 이전에란 뜻이다(웬만한 불어사전엔 다 나오는데). 따라서 본문은 "라캉의 테제는 파블로프가 구조주의자란 말이 생기기도 전에 이미 구조주의자로 행동했다는 것이다."로 옮겨져야 한다.

-그리고 6장. 192쪽에서 'corpus'를 '집성체'로 번역하고 원어를 병기함으로써 마치 중요한 단어처럼 과장됐다. 웬만한 개념어들에는 한자도 병기해주지 않는 역자로선 '파격적'인데, 그건 단지 corpus에 적당한 쉬운 말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성체'는 너무 낯선/어려운 말이다. 같은 의미라면, '모음집'(혹은 그냥 '모음')이라고 하는 것이 이해하기 쉽다. 영어의 'corpus'는 생각보다는 자주 쓰이는 단어이다.

-198쪽. 가운데에서 '이 적(適) 타자는..."할 때의 '적'은 당연히 'enemy'를 옮긴 말인데, 한자가 잘못 적혀 있다(골호안의 한자는 '적당하다'고 할 때 '맞을 적'자이다). 이건 생각할 여지없이 '적(敵)'으로 교정될 것으로 믿는다. 재미있는 실수이다.

-201쪽. 역자는 "saying is of the order of not-all"을 "말하는 것은 비-전체의 심급이다"라고 옮겼다. 'order'를 '심급'이라고 옮긴 것인데, 그렇게도 옮겨지는 것인지 궁금하다.

-203쪽. "언어는 세계를 대신할 뿐만 아니라 세계 속에서 작용한다."("Language not only represents the world, but acts in it.") 내 경우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아니지만, '대신하다'는 건, 물론 '표상하다' '재현하다'란 의미도 함축한다. 거기에 반대하진 않는다. 다만, '작용한다'는 '행동한다'와 좀더 경쟁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화행(speech act)이란 말도 있기 때문에, '언어가 행동한다'고 하더라도 이상한 번역은 아니다. '작용한다'란 뜻은 좀 약한 거 같다.

-같은 쪽에서. "그 대신 우리는, 잔여 속에서 바로 이 역사, 이 사회 상징적 투쟁의 적대가 기입되는 것이라고 이야기해야 한다."의 원문은 "Instead we must say that in the remainder it is the antagonism of this very history, the social symbolic struggle, that is inscribed.") 번역문은 '이 역사=이 사회 상징적 투쟁의적대'라고 오독하기 쉽다(나도 그렇게 읽었다). 우리말에서는 한 단어가 두 단어에 동시에 걸리는 경우, 반복해 주어야 깔끔하다. "이 역사의 적대, 이 사회 상징적 투쟁의 적대..."라는 식으로. 그리고 원문은 강조구문이므로, 의미를 좀더 살리자면, "그 잔여 속에 기입되는 것이 바로 이 역사..."라는 식으로 번역하는 게 나을 듯싶다.

-211쪽. "남자들이 이족 결혼 관계를 시장할 때..."에서 이족은 '異族'이란 뜻이다(그런 정도는 골호안에 넣어줄 수도 있을 텐데). 그리고 의미상 '이족간 결혼 관계'라고 하는 것이 좀더 이해하기 쉽지 않을까.

-213쪽 인용문. "평등의 급무는 '우리' 역사의, 우리가 속한 역사의 이 구역의 창조물이다."(The exigency of equality is a creation of our history, this segment of history to which we belong.") 번역문은 전형적인 번역투/직역투이다. 역자도 이런 번역문을 만나면 좀 찜짐할 것이다. '평등의 급무'라는 건, 평등을 중요하고 긴급한 지상과제로 설정한다는 것이다. 약간 의역하면, "평등에 대한 (과도한) 강조는 '우리의' 역사, 곧 역사의 한 마디로서 우리 시대가 창조해낸 산물이다."

-216쪽. "왜냐하면 우리가 실재를, 즉 사회가 그 둘레로 스스로 조직화하는 그 상징화불가능한 중핵을 이해하고자 할 때,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것은 사회의 바로 그 중핵이기 때문이다." 첫번째 '중핵'은 'kernel'을 두번째 '중핵'은 'core'를 번역한 것이다. 둘은 구별해주지 않아도 되는 동의어인 것인지?

-217쪽. 헤겔의 'Sittlichkeit(인륜성)'을 원어 그대로 노출시키고 있는데, 불친절한 일이다. '인륜성'이라고 옮기고 괄호안에 원어를 넣어주든가, 아니면 '지틀리히카이트'(맞나?)라고 음역해서 써줘야 한다.

-218쪽. "국가를 형성하는 국적들이 혼합되어 있는, 최근에 도가니melting pot 혹은 샐러드 접시salad bowl라고 불리는 미국은..."에서 '최근에'는 '샐러드 접시'에만 걸린다. 미국이란 나라가 '인종의 도가니'라고 불린 건 오래전부터의 일이고, 최근에 와서 '샐러드 접시'라고 불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가니로서의 미국, 혹은 최근에 불려지는 바대로 '샐러드 접시'로서의 미국은..."

-221쪽. 각주21) '이중적 속박'은 'double bind'의 역어인데, 그렇게 옮길 수도 있지만, 'doble bind'는 베이트슨의 용어로서 '이중구속'이라 번역되고(그의 '이중구속론', <마음의 생태학>), 이미 그렇게 굳어진 말이다.

-224쪽. 각주40) 인용문에서 "자신들이 정부와..."는 "자신들의 정부와..."의 오타이다('그들의 정부'라고 해야 더 자연스럽고)...

조금 쉬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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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이어지는 내용이다. 어쨌든 독자로선 더 좋은 책을 읽을 권리가 있고, 나는 그런 권리를 포기하지 않겠다. 이런 식의 참견의 말을 거두지 않는 것은 그런 이유도 겸하고 있다.

-143쪽. “라캉에게 있어서 일차적으로 기억은 외상을, 즉 주체의 바로 그 존재가 집중되는 지점인 실재를 기억하지 않은 것과 관련이 있다.”는 “For Lacan, memory primarily has to do with not remembering the trauma, the real on which the subject centers his or her very being.”(86쪽)을 옮긴 것인데, 일단 ‘지점’은 오해의 소지가 있는 불필요한 말이다. 그리고 타동사 ‘center’도 ‘집중되는’이란 뜻보다는 ‘근거짓다’란 뜻으로 보인다. ‘기억하지 않은’이라고 과거형으로 옮긴 건 현재형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래서 다시 옮기면, “라캉에게서 기억이란, 일차적으로 외상, 즉 주체가 자신의 존재 자체를 근거지우고 있는 실재를 기억하지 않는 것과 관계가 있다.” 약간 의역하면, “라캉에게서 기억이란 일차적으로 외상, 즉 실재를 기억하지 않는 것과 관계가 있는바, 이 실재는 주체가 자기 존재 자체를 근거지우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어지는 문장. “우리가 우리 이야기를 할 때 그것은 우리가 실재를 건드리는 지점이다. 거기서 우리의 말은 실패하지만, 결국 언제나 다시 외상으로 되돌아오고 만다. 그것을 조음할 수 없는 채로 말이다.” 원문은 이렇다: “When we tell our stories, it is the point at which we touch the real that our words fail, but fail so as to always come back to the trauma without being able to articulate it.”

여기서 ‘그것은’이라고 옮긴, ‘it’은 (내가 보기에) 강조구문의 가주어이기 때문에, 번역할 필요가 없다. 강조되는 것은 “the point at which we touch the real”이다. 즉 우리의 말이 실패하는 지점이 우리가 실재를 건드리는 지점이다. 말이 실패하는 지점이란 말로 표현되지 않는 어떤 지점이다. 역자는 강조구문의 접속사 ‘that’을 관계사로 보고 번역한 듯하다(그래서 'that'을 ‘거기서’라고 옮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이상하다. 'that'이 'where'의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다시 번역하면, “우리가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말로 잘 표현하지 못하는 지점이 바로 우리가 실재를 건드리는 지점이다. 하지만, 그렇게 실패함으로써 말로 표현하지 못한 채로 우리의 말은 언제나 그 외상으로 되돌아온다.”

-또 같은 쪽의 인용문에서. “다만 나중에 모든 것 속에서 다시금 그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의 원문은 “...if only to find itself again later in everything”인데, 역자는 'to find'란 부정사를 목적을 나타내는 용법의 것으로 봤는데, 이건 당연히 결과를 나타내는 용법의 To-부정사이다. ‘if ony’는 그냥 ‘only’의 뜻인바, 이 문장 전체는 ‘적합한 사유’(‘적절한/적당한 사고’라고 옮기고 싶다)가 “언제나 동일한 것을 회피”하지만, 결국엔 나중에 모든 것에서 그 자체와 대면하게 될 뿐이다, 란 뜻으로 나는 이해한다.

-역시 143쪽 맨마지막 문장에서. “이따금 무죄를 주장하는 죄수들은 그것에 대한 기억을 묻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에서 ‘이따금(occasionally)’이란 부사가 수식하는 것은 ‘주장하는’이 아니라, ‘묻고 있는’이다. 전체 원문은 이렇다: “Thus one can imagine that prisoners who do not talk about their crime and insist on their innocence occasionally bury their memory of it.”(87쪽) 사소하긴 한데, 내 생각에 ‘occasionally’가 ‘insist on’을 수식하려면, 뒤에 콤마(,)가 와야 하지 않을까 한다.

-145쪽. “따라서 그 주체에게 있어서(For the subject)”는 앞에서 ‘그 주체’를 적합하게 받을 만한 말이 없다. 나는 그것이 한정적인 주체가 아닌 일반적인 주체에 관한 거라고 생각한다. 그냥 “따라서, 주체에게 있어서”라고 옮겨져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같은 문장에서 “상징적 질서의 실존(the existence of the symbolic order)” 같은 경우, ‘existence’가 ‘실존’으로 번역되는 것은 오히려 제한적인(즉, 실존철학적인) 문맥에서인바, 그냥 ‘존재’라고 옮겨지는 것이 낫다. 역자는 한두 군데를 빼고서는 ‘existence’를 모두 ‘실존’이라고 옮겼는데(가령, 162쪽에서도), 사르트르식으로 말하면, ‘실존’은 의식을 가진 존재로서의 ‘대자적 존재’를, 하이데거식으로 말하면, ‘현존재’를 가리키는 말이므로(그는 ‘탈존’이란 용어도 쓰지만) 용례를 좀더 제한할 필요가 있다(사물들은 실존이 될 수 없다).

-147쪽. 차우셰스쿠의 공화국의 집이 오늘날 ‘민중의 집(People's House)’이라고 불린다는 내용인데, 이게 오역이란 얘기는 아니다. 문제는, 다른 곳에서 ‘People's House’는 ‘인민의 집’(153쪽)으로, ‘people’은 대개 ‘인민’으로 번역되고 있다는 점이다. 통일성을 위해서라면, ‘인민의 집’으로 바뀌어야 한다. 고유명사의 혼동된 표기는 흔히 공동번역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인데, 이 책 또한 그런 것인지?

-150쪽. ‘기표사슬’은 ‘signifying chain’의 번역인데, 어디에선가 한번 'chain of signifier'(기표의 사슬)란 표현이 나오는바, 그 둘이 같은 말인지 궁금하다. 대개 'signification'이 ‘의미작용’이라고 번역되므로, 그에 따라, ‘의미(화) 사슬’이나 ‘의미작용 사슬’ 정도로 옮겨져야 하지 않을까라는 게 내 생각이다(‘chain’은 흔히 ‘연쇄’라고도 옮겨진다.). <천개의 고원>의 역자처럼, 'signification'을 ‘기표작용’이라고 옮기지 않는다면.

-같은 문단에서. “그 사슬 너머인 ‘무로부터’ex nihilo라는 어떤 곳(기표 사슬은 바로 그곳에 정초하고 있으며 그곳에서 바로 그것 자체로서 절합된다)이 있다...” 원문은 “there is somewhere which is the beyond of that chain, the ex nihilo on which it is founded and is articulated as such.” 전체 문장이 길기 때문에 역자가 괄호안에 넣어 처리한 대목에서, as such를 역자는 ‘그것 자체로서’라고 옮겼는데, ‘그것 자체’는 흔히 명사 뒤에 'as such'가 나올 때 적합한 번역이고, 여기서는 보어로 쓰였기 때문에 ‘그러한 것으로서’, 즉 ‘기표 사슬로서’ 분절된다, 라고 해야 맞을 듯하다. 'articulate'의 번역은 ‘분절/절합하다’ 모두 가능하다. 단지 방향이 반대일 뿐인데, 어떤 연속체의 마디를 나누는 것이 ‘분절’이고, 나누어진 마디를 결합하는 것이 ‘절합’인바, 영어의 ‘articulation’은 이 두 가지 뜻을 동시에 표시한다.

-그런데, 몇 줄 아래에서는 ‘is articulated’가 다르게 번역되었다. “그것은 기표 사슬의 기능으로서만 정의될 수 있는 층위에서 조음된다.”라고 했는데, 여기서 ‘그것’은 ‘죽음충동’을 받는 말이므로, “죽음충동은... 조음된다”란 내용이다. ‘조음’이란 말은 음성학의 용어인데, 유의미한 소리를 (만들어)낸다는 뜻이다(그러니까 아주 제한적인 의미역을 갖는 단어이다). 그러한 뜻이라면, 그냥 ‘말해진다’가 낫고, 보다 포괄적인 뜻이라면, ‘분절된다’로 옮겨지는 것이 더 무난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153쪽 1행에서. ‘후-근대적 효과’는 ‘포스트모던적 효과(post-modern effect)’에 대한 억지스런 번역이다. 개그담에서도 현학적인 어휘로 자주 등장하던 ‘포스트-모던적’이란 말이 ‘후-근대적’이라고 옮겨지면, 그 말의 효과가 반감될 수밖에 없다. 예술/건축 쪽 분야 어떤 책에서도 포스트-모던을 ‘후-근대적’이라고 옮기지 않으며, 하나의 예술사조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을 ‘후근대주의’라고 번역하지 않는다. ‘하이패션’이란 말도 그냥 옮겨 쓰는 역자가 왜 이런 단어들에서만 결벽증을 발휘하는 것인지? 몇 줄 아래, ‘저속한 것’라고 옮긴 것도 그냥 ‘키치(kitsch)’라고 옮기든가 괄호 안에 병기해주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것도 어느 정도 친숙한 전문용어이기 때문이다. 키치미학을 ‘저속한 것의 미학’이라고 옮기지 않지 않는가?

-154쪽. ‘루마니아의 몰’ 절에서. “장소가 부착되어 있지 않은 도시”(a city without a place attached to it)란 말은 어색하다. ‘부착되어’란 말 때문이다. 같은 의미역에서 찾자면, ‘부속되어’ 정도로 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이어지는 ‘도시 없는 궁전’은 ‘a city without a place’(장소 없는 도시)의 오역들이다. ‘place’를 자주 나오는 ‘palace’로 잘못 본 것이다.

-159쪽의 ‘차우셰스쿠의 땅(Ceausesculand)’은 ‘차우셰스쿠랜드’라고 옮기는 것이 낫다. ‘디즈니랜드’와 운을 맞춰서. 그리고 아랫줄의 ‘루마니아 마을 박물관Musium of Romanian Village’은 ‘루마니아 민속촌’혹은 '루마니아 민속박물관'이라고 하는 게 낫지 않을까?

-160쪽. “이와 유사하게 디즈니에게 있어서 큰 타자는 영화에서보다 완벽하게 실현되는 기술 세계였다.”에서 ‘기술 세계’도 역자의 결벽이 발휘된 예인데, ‘테크놀로지의 세계’(the world of technology)라 하는 게 더 자연스럽다. ‘테크노피아’도 ‘기술-유토피아’라고 번역해야 되는 게 아니라면.

-162쪽. 저자 살레클이 4장의 내용을 친절하게도 한 문장으로 요약하고 있는 대목: “루마니아 이야기의 비극은, 차우셰스쿠가 큰 타자는 한낱 상징적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으며, 동시에 사람들은 허구가 그들이 상상한 것보다 더 큰 힘을 그들에게 발휘한다는 것은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다.” 대구로 이루어진 문장인데, 역자는 차우셰스쿠와 대조되는 'the people'을 하필 여기서만 ‘인민들’이라고 하지 않고, ‘사람들’이라고 옮겼다(독재자의 짝은 ‘사람들’이 아니라 ‘인민들’이다). 아무래도 이 장은 복수의 역자가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덧붙여, ‘동시에(while at the same time)’는 의미상 ‘반면에’가 더 적합하다.



-165쪽의 각주22)에서 ‘모스크바의 대학교 로모노소프’라고 한 것은 부정확한 표현이다. 우리말에서 ‘OO대학’이라고 하지 ‘대학OO’라고는 하지 않기 때문이다. 로모노소프는 1755년에 모스크바대학을 설립한 러시아 18세기 최대의 학자이다. 여기서 살레클이 비교하고 있는 것은 모스크바대학 본관건물인데(사진으로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다), 이 (학부)건물의 풀네임에 로모노소프란 이름이 들어간다. 차우셰스쿠 궁전과 외형을 비교해 보시길.

-167쪽. 각주34)에서. “우리의 사회주의 사회가 문명의 우월한 수준에 도달할 때”는 “우리의 사회주의 사회가 보다 높은 수준[단계]의 문명에 도달할 때”로 옮기고 싶고, “인간의 인격은 다면적으로 번창할 것이다”는 “다면적으로 풍성해질 것이다”가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인격이 번창한다?).

5장부터는 따로 시간을 내야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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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까지 한 두어 주 동안 살레클(*살레츨)을 읽었다. 다른 일들로 바빠서, 전철에서만 찔끔찔끔 읽는 바람에 시간이 오래 걸린 것인데, 무난한 번역이었기 때문에 읽는 일이 전혀 고역은 아니었다. 독후감은 바쁜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정리해볼 생각이지만, 그러기 전에, 번역과 관련하여 생각이 다른 부분이나 오역/실수에 해당하는 부분에 대해서 ‘마저’ 지적을 한다. 혹 개정판을 낸다면, 의견이 반영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라는 혼자만의 기대에 편승해서.

2장에서 7장까지, 그리고 결론까지 읽으면서 매끄럽지 못하거나 오역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은 1장에서만큼 두드러지진 않았다. 아마도 역자의 번역이 어느 정도에 궤도에 오른 때문이리라(실제로 2장 같은 경우는 원서를 거의 참조하지 않고서도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 이제부터의 지적은 애독자의 투정 같은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참고로, 요즘 하는 일이 학술지 편집 같은 것이기 때문에, 교정되어야 할 부분을 그냥 못 지나치는 것은 일종의 나의 ‘직업병’이기도 하다.

-81쪽 8행. ‘그는’은 ‘그/녀는’이다. “he or she”를 옮길 경우, 역자는 ‘그/녀’라고 표기해 왔는데, 여기서는 빠졌다.

-85쪽. 중간부분. “욕망이 끝없이 질문을 한다면, 충동은 질문이 멈추는 곳에서 관성을 내놓는다.” 원문은 “If desire constantly questions, drive presents an inertia where questioning stops.”(50쪽)이다. 매끄럽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건 두번째 절이다. 관계사 where가 받는 것이 inertia이며, 따라서 ‘질문이 멈추는 곳=관성’이다. “충동은 질문이 중단되는 관성을 내놓는다.” 정도로 옮겨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102쪽. “사이렌의 노래는 사이렌의 출현에 관한 노래가 출현하기 위해서는 멈춰야 한다”는 인용문에서 ‘출현’이 중복 번역되었다.

-103쪽. 5행의 ‘상징적인 것’은 흔히 ‘상징계’로 번역되는 ‘the symbolic’인데(물론 ‘상징적인 것’으로 번역하는 이도 있다), 역자가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인지 모르겠다. 거의 관례화된 용어인데... 그리고 하단의 ‘가희’는 'singer'를 번역한 것인데, ‘singer’는 일반적으로 뮤즈의 시종으로서의 ‘시인’을 지칭하는 말인데, 여성명사(‘가희’)로만 번역돼 있는 것이 조금 아쉽다.

-105쪽 인용문에서. “예술이 인식으로 간주되기를 포기하고..”는 “So long as past declines to pass as recognition...”을 옮긴 것인데, 'past'가 어떻게 ‘예술’이란 뜻을 가질 수 있는지 모르겠다. 실수가 아닐까 싶은데, 바로 다음 줄에서도 확고하게, “예술은 쾌락과 마찬가지로...”라고 옮긴다(여기선 대명사 ‘it’인데). 의역한 것인지?...

-112쪽 1행. “타자가 그녀를 접근불가능한 욕망의 대상으로서뿐만 아니라 향유의 대상으로 취급할 때”는 “when the Other takes her as object of jouissance and not simply as the inaccessible object of desire.”(67쪽)를 옮긴 것인데, 내가 보기엔, ‘대상으로서뿐만 아니라’가 아니라, 그냥 ‘(단순히) 접근불가능한 욕망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이다. 그리고, 오 헨리의 단편 이야기에서 브로드웨이의 ‘dancer’를 ‘무희’로 옮기는 것은 너무 점잖은 번역이다. 그냥 ‘댄서’가 낫다. 내용상 그녀가 추는 춤은 스트립쇼이거나 그와 비슷한 춤이기 때문이다. 이때의 ‘댄서’는 ‘댄서의 순정’이라고 할 때의 그 ‘댄서’이다(‘무희의 순정’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무희’는 발레리나 정도에 어울리는 말이다).

-117쪽. “(라캉은) 여성적 향유는 여자에게만 하나의 잠재성인 것임을 지적한다.”는 “Lacan points out that feminine jouissance is only a potentiality for woman...”(71쪽)을 옮긴 것인데, ‘only’가 수식하는 것은 ‘woman’이 아니라 ‘potentiality’이므로, 번역도 그에 맞게 수정되어야 한다.(라캉의 지적에 따르면, 여성적 향락은 여성에게서 단지 하나의 잠재성일 뿐이다.)

-124쪽. “나의 요점은 카프카가 오디세우스와 사이렌의 조우에 대한 표준적 판본에 근대주의적 비틀림을 제공한다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에서 ‘근대주의적 비틀림’은 ‘a modernist twist’를 옮긴 것인데, 여기서 ‘modernist’는 전근대주의의 짝개념으로서의 근대주의가 아니라 리얼리즘의 짝개념으로서의 모더니즘을 말한다. 즉 루카치가 토마스 만(=리얼리즘)이냐, 카프카(=모더니즘)냐, 라고 할 때의 그 모더니즘이다. 그 모더니즘을 ‘근대주의’라고 옮기는 것은 특이한 경우이다. 여기서는 그냥 ‘모더니스트적 비틀기’나 ‘모더니즘적 비틀기’라고 해야 할 듯하다. 그리고, 몇 줄 아래에서 “(사이렌의) 선주체화된”은 'presubjectivised'를 옮긴 것인데, 그것은 ‘주체화 이전’을 뜻하기 때문에 ‘선주체화’란 말은 맞지 않는다. 역자가 즐겨쓰는 ‘전(前)’이란 말 대신에, 왜 여기선 ‘선(先)’이란 말이 들어갔는지 모르겠다(‘선주체화된’은 ‘먼저 주체화된’이란 뜻이지 않은가?)

-126쪽. 각주12)에서 'subjects'는 ‘신하들’로 옮겨졌는데, ‘신민(臣民)들’이란 뜻이니까 신하들과 백성들을 포괄하는 말이다. ‘백성들’이란 번역이 더 낫지 않을까 싶다.

-132쪽 이하에서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가 전부 ‘부카레스트 Bucharest’로 옮겨졌다. ‘부카레스트’는 영어권에서의 명칭일 뿐이며, 이미 ‘부쿠레슈티’(루마니아식 원음에 가깝다)가 통용되고 있는데, 그걸 ‘부카레스트’로 옮긴 이유를 모르겠다. 역자가 ‘영어중독자’가 아닌 이상, 이해하기 힘든 일이고, 독자의 한 사람으로선 불쾌한 일이다. 이건 ‘파리’를 ‘패리스Paris’라고 옮기고(영어를 병기해서), ‘모스크바’를 ‘모스코Moscow’이라고 옮기는 식인데, 가뜩이나 미국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갖고 있는 나로서는 아주 못마땅하다. 철자대로 옮겼다면, 살레클이 ‘Romania’로 표기하고 있는 루마니아는 왜 ‘로마니아’로 옮기지 않았을까?...

혼자서 괜히 흥분한 것인가? 잠시 다른 업무에 매진한 다음에, 마저 지적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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