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라 여기저기서 정산하고 결산하느라 분주하다. 오늘자 한겨레(28면)엔 여성관객들이 뽑은 최고의 영화, 최악의 영화 순위가 소개돼 있는데, 예상할 수 있듯이 최악의 영화 1위는 김기덕의 <나쁜 남자>이다.

 

 

 


이번주 씨네21에 각 평론가들이 뽑은 올해의 영화 목록을 보면, <나쁜 남자>를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은 이들도 적지는 않다(25%정도). 김기덕에 대한 평단의 시각은 엇갈리지만, 나는 그를 신뢰하지 않는 쪽이어서(<나쁜 남자>엔 적의만 있지 리얼리티가 없다) <나쁜 남자>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그리고 2위는 <가문의 영광> 3위는 <취화선> 4위는 <중독>이다. <최화선>은 언제 시간나면 볼 예정이지만, 나머지 영화들에는 아직 관심이 없기 때문에, 뭐라 말할 수는 없다. 아마 임권택의 영화로는 <노는 계집 창>도 그해의 최악의 영화에 뽑혔던 듯하다(그리고 물론 그럴 만하다). 임권택식 휴머니즘은 대개 남성중심적이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5,6위 영화들이다. 대다수 평론가들에 의해 올해의 영화로 지목된 홍상수의 <생활의 발견>과 이창동의 <오아시스>가 각각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만 묘사", "장애여성이 성폭행하려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비상식적 설정"이라는 이유로 최악의 영화 리스트에 오른 것. 물론 이 목록은 일반 여성관객들(+여성문화예술인)의 평가를 근거로 작성된 것이니만큼 어느 정도 '대중주의'적 편견이 작용하고 있으리라. 그렇지만, 이 영화들이 여성관객들을 불편하게 한 최악의 영화들인지는 의심스럽다. 즉 나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요즘 영화를 많이 보지 못하게 됐지만, 올해 내가 본 한국영화들 가운데, 두 편은 가장 재미있는 영화들이었고, 가장 동의할 만한 영화들이었다.

나의 동의의 근거는 리얼리즘에 있다(나는 영화에서의 리얼리즘을 지지한다. 순수한 환타지를 나는 그다지 즐기는 편이 아니다). 물론 시야를 넓히면, 마술적, 환상적 리얼리즘의 걸작들을 꼽을 수도 있지만, 한국영화에서 그런 계열의 걸작이 나올 가능성은 아직은 희박하다. 때문에 한국영화에는 제대론 된 영화('리얼리즘 영화'와 '쟝르 영화'가 주종이다)와 덜 떨어진 영화(여기에도 두 부류가 있다. '돈번 영화'와 '돈날린 영화')가 있을 뿐이다.

물론 홍상수의 영화는 지극히 모던적이며, 모더니즘 영화로 분류될 수 있지만, 내가 그의 영화에서 즐기는 것은 디테일(리얼리티)이다. <생활의 발견>과 <오아시스>는 리얼리티에 근거한 유머와 환타지로 올해의 '발견'에 값하는 영화들이다. 그 영화들에서의 여성 이미지는 내가 보기에 '현실'의, 아주 '현실적인' 이미지들이다. 그런 이유로 그 영화들이 최악이라면, 공권력의 무자비한 유혈진압으로 아수라장이 된 시위현장을 담은 영화도 지나치게 '폭력적'이란 이유로 최악의 영화가 될 만하고, 여성들의 성적착취 현장을 담은 영화도 지나치게 '차별적'이란 이유로 최악의 영화가 될 만하다.

 

 

 

 

한편 최고의 영화로 꼽힌 두 작품은 변영주의 <밀애>와 유하의 <결혼은, 미친 짓이다>이다. <밀애>는 보지못해서(보려고 했었지만, 시간이 맞지 않았다) 뭐라 말할 수 없고, <미친짓>의 경우는 사회적 메시지를 예쁘게 포장한 얄팍한 상업영화이다. 물론 감독도, 관객도 그 영화가 상업영화란 걸 알며 6000원 어치의 감동을 팔고사는 거에 불과하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 "여성의 욕구를 솔직히 표현"했다는 이유로 이 영화가 여성영화라니?

<나쁜 남자>의 경우가 전형적인 남성 환타지이며, 그래서 최악의 영화라면, <미친짓>은 여성 환타지이기 때문에 여성영화란 말일까? 그 영화에서 여성의 솔직한 욕구란 건, (열정적인) 사랑과 (안정적인) 결혼을 한꺼번에 얻고 싶다는 욕구이다. 즉, 의사남편과 결혼하고 잘생긴 대학강사를 정부로 두며 '영리하게' 살고 싶다는 욕구. 그것이 현실에서는 대개 대립하기 때문에, 영화속 현실은 관객의 환타지가 되며, 대리만족을 준다. 결혼 제도에 대한 비아냥이 대화의 양념으로 등장하지만, 그렇다고 영화 속 엄정화가 그렇듯이 이 영화의 관객들도 결혼 제도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거나 저항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여성적이고, 여성영화란 말일까? 여성들의 솔직한 욕구가 판단의 기준이라면, <죽어도 좋아>는 왜 빠졌을까?

나는 일반적으로 좋은 영화와 여성관객에게 좋은 영화가 구별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여성에게 혐오스러운 영화는 남성에게도 혐오스러운 것이어야 맞다. 물론 그 차이나 간극이 완전히 제거되지는 않을 테지만, 서로가 판단을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 그리고 좋은 영화는 그런 부분을 포착하고 확장시켜 가는 데 기여한다. 내가 보기에 <생활의 발견>이나 <오아시스>는 그런 영화들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미친짓>(<밀애>는 보지 못했으므로)보다 훨씬 많은 걸 보고 알게 한다. 나는 이런 생각이 나 자신의 '남성'으로서의 편견이 아니기를 바란다.

<오아시스>에 대한 영화평론가 정성일의 비판이 잠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나는 그의 글을 모아 읽고, 재비판하고 싶었지만, 일상적인 일들에 치이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밀린 빨래를 한꺼번에 할 때처럼 몰아서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싶다. 정성일은 내가 비교적 신뢰하는 평론가이지만(그는 한국에서 가장 많은 영화를 보고 동시에 가장 많은 영화책을 읽는다, 내가 아는 한.) 간혹 그의 취향은 튀어 보인다. 그의 <오아시스> 비판은 공정하지가 못했는데(그래서 나를 설득하지 못했는데), 그 비판의 근거 중의 하나가 바로 "장애 여성이 성폭행하려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비상식적 설정"이다(이런 이유로 한 장애 여성도 <오아시스>를 비판한 적이 있다).

간단히 핵심만 말하면, 영화에서 종두는 그런 식으로밖에는 자신의 감정이나 관심을 표출할 수 없는 인간이다. 종두가 '철이 들어서' <프리티 우먼>의 리처드 기어식으로 구애하는 것이 현실적이고, 여성적인 설정일까? 공주에게서 문제가 된 건, '폭력'이 아니라 '관심'이다. 그리고 둘이 가까워지는 건 '폭력'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관심' 때문이다. 나는 그러한 설정에 리얼리티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물론 영화의 맨마지막 장면에서 종구가 나무에 올라가 공주를 위해서, 공주의 환타지(오아시스)를 방해하는 나뭇가지들을 베어내고, 공주가 한껏 라디오 음악의 볼륨을 높이는 대목은 압권이다(이미 알고 있는 영화의 줄거리를 따라가다가 나는 이 대목에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즉, <오아시스>에서 인물의 대립축은 공주:종두가 아니라, 그들:우리이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더 폭력적으로 등장하는 인물들은 종두가 아니라 공주와 종두의 주변 사람들, 즉 우리들이다. 성폭행의 가해자와 피해자간의 사랑이라는 구도로 이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야말로, 내가 보기엔 이 영화의 가해자들이다.

올해의 영화 5편에 정성일은 <취화선>을 1위로 꼽고(그의 임권택 숭배에도 나는 동의할 수 없다), <오아시스> 대신에 <나쁜 남자>를 집어넣었는데, 취향은 저마다 자유인 것이지만, 나는 그 선택에 동의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나쁜 선택이다...


2002.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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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inda 2009-08-24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나서 반갑습니다/저 모습이 로쟈님인가요?/많은 항목중에 영화를 깊이있게 보지는 못하지만 좋아해서 여기에 처음으로 꼬릿글을 달게 되었습니다/전행영화와 깡패영화가 제작된 영화의 절반을 넘을거라는 저의 통계입니다/모성본능이라면 생산된 자식의 죽음을 바라지 않을것이며 무서운 폭력과 여성을 무시하는 그런영화들이 널려 있는데.....글쓴지 7년이 지났으니 올 년말쯤에는 조금나쁜 영화보다 많이 나쁜 영화를 골랐다는 기사를 접하길 기대합니다.
 

이정하가 엮은 에이젠슈테인의 <몽타쥬 이론>(영화언어, 1990)에서 1부를 읽다. 주로 자전적인 내용으로서 러시아 영화와 주변 인물들에 관한 얘기가 덧붙여져 있다. 120쪽 정도의 분량을 훑어봤는데, "나는 왜 영화연출가가 되었는가?"(1944)란 자기 분석, 일종의 정신분석적인 글이 그나마 인상적이다. 보통의 착한 아이들도 어릴 때는 무얼 부수고, 분해하고, 못살게 구는 '나쁜 짓들'을 하는데, 제 때에 그런 짓들을 해보지 못한 '얌전한' '나쁜 아이'는 뒤늦게서야 그런 파괴적인 본능에 눈을 뜨게 되는바, 영화감독의 길이란 바로 그런 나쁜 아이의 길이라는 것이 에이젠슈테인의 자기분석적인 주장이다.

그의 말을 인용해 본다. "파리나 잠자리나 개구리에 적용되지 않았던 잔학성은, 연출가로서의 나의 작품의 주제, 방법, 이데올로기의 선택에 격렬한 특징을 부여하게 되었다. 사실 나의 영화에는, 군중에게 포화를 퍼붓거나, 가난한 농민들을 밧줄로 묶어 머리까지 땅 속에 파묻고 그 위를 말발굽이 짓밟거나(<멕시고 만세!>), 오뎃사의 계단에서 아이들을 짓뭉개거나(<전함 포템킨>), 또는 지붕에서 떨어뜨리거나(<파업>), 부모에게 아이를 죽이게 하거나(<베진 초원>), 타는 장작불 속에 던져 넣거나(<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스크린에 소의 생피를 흘리거나(<파업>), 배우의 피를 흘리게 하는(<전함 포템킨>) 등의 잔인한 장면들이 가득찼다. 또한 소를 독살하기도 하고(<총노선- 낡은 것과 새 것>), 황후에게 독이 퍼지게 하고(<폭군 이반>), 총에 맞는 말을 열린 도개교에 늘어뜨리기도 했다(<시월>). 그리고 포위된 카잔 성의 성벽을 따라 늘어선 사람들한테 비오듯 화살을 퍼붓기도 했다. 게다가 오랜 세월, 내 마음을 사로잡아 왔던 주인공이 다름 아닌 폭군 이반이라는 사실도 우연이 아닌 것이다. 실로 기분 나쁜 작가! 그럴 수도 있다. <폭군 이반>의 시나리오 속에 바로 그러한 작가의 자기 변호가 감추어져 있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37쪽)

에이젠슈타인의 영화론과 관련해서 전양준 편역, <이미지의 모험>(열린책들, 1990)이 유익하다. 이런 류의 감독론으로는 거의 최초의 책임에도 구성이나 내용 면에서 잘 짜여져 있고 풍족하다. 문제는 이미 옛날에 구입했던 이 책이 나에겐 실종도서라는 사실이다. 이것과 함께 사라진 영화책으로는 <세계영화사>(이론과실천)가 있다. 에이젠슈테인과 관련한 일화 중에서 서로 라이벌이었던 푸도프킨과의 관계를 극명하게 말해주는 것. "겉으로는 유대를 가장 하면서도 한번 고집이 나오면 이 두 비범한 예술가는 <골목대장>의 지위를 잃지 않으려고 싸우는 어린아이처럼 서로를 경계했던 것이다. 결국에는 두 사람 다 개를 사서 이 불쌍한 동물에게 상대방의 이름을 붙였다. 푸도프킨은 자신의 개 '에이젠슈테인'에게 앞발을 들고 서 있게 하는 훈련을 시켰고, 한편으로 에이젠슈테인은 개 '푸도프킨'에게 명령을 들으라고 고함을 쳤던 것이다."(16쪽)

에이젠슈테인의 장편영화 7편 중에서 구해볼 수 있는 건 4편뿐이었다. 이 20세기의 다빈치이며, 예술계의 다윈이자, 마르크스에 대해서 더 많은 걸 뽑아낼 수 있을까? 김석만 편역의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 감독노트>(예하, 1991)도 읽을 만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에이젠슈테인의 <영화연출강의>(예건사)의 많은 부분은 <죄와 벌>의 장면화에 관한 것이다. <몽타주 이론>(영화언어)의 2부는 <이미지의 모험>(열린책들)과 내용이 겹친다. 다시 한번 <이미지의 모험>이 어디에 처박혀 있는지 궁금하다...

덧붙임: 이 글은 몇 년전에 쓴 것인데, 실종된 영화관련 서적 몇 권은 아마도 현재 조감독을 하고 있는 동생의 친구가 가져가지 않았을까 추측하고 있다. <이미지의 모험>을 나는 작년인가 다시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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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20 13: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12-20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다시 한번'이라니요? 귀국하시면 더 바쁘고 중요한 일들이 많으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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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이 있을까요?" 알렉스가 안나에게 묻는다. 안나는 등을 돌린 채 세차게 머리를 젓는다. 레오(스) 카락스의 사랑의 3부작 중 두 번째 영화 <나쁜 피> 한 장면이다. 내가 좋아하는 장면은 이 문답의 바로 이전 장면, 즉 문밖에서 담배를 물고 서성이던 알렉스가 라디오에서 데이비드 보위의 <모던 러브>가 나오자 거리를 질주하는 장면이다. 처음엔 비틀거리며 걷다가 몇 개의 블록을 마치 미친 듯이 춤을 추며 질주하던 그는, 음악이 멈추자 그대로 정지하고 다시 안나에게로 되돌아온다. 그리고는 묻는다. "안나,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이 있을까요?"

2
(한)순간에 완성되(면서 영원히 지속되)는 사랑이란 어떤 사랑일까? 그것은 반시간적 사랑이 아닐까? 순간이나 영원이란 것은 시간적인 계기이지만 동시에 반시간적 계기이다. 그것이 반시간적인 것은 시간의 고유한 운동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순간은 영원의 무한수축이고 영원은 순간의 무한팽창이지만 이 수축/팽창의 운동은 자연적 시간을 매개로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때의 운동은 운동이 아니라 동형론적 형질전환이다.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이 이렇듯 반시간적이라면 그것은 더 이상 감성적 사랑이라는 개념적-정념적 테두리 안에서 다 파악될 수 없다. 즉 그것은 감성적 사랑을 초과한다.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이라는 이 초감성적 사랑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 형이상학적이다. 그것을 정념의 형이상학이라 부를 수 있을까? 이 정념의 형이상학은 형이상학의 이념이 그러하듯이 현실이 아닌 오직 가상(이미지) 속에서만 자신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3
감성적 사랑, 즉 미적 가상이 아닌 현실 속의 사랑이란 어떤 것인가? 진화사적으로 볼 때, 그것은 만족할 만한(agreeable) 상태, 즉 행복을 위한 것이다. 행복이란 "정상적으로 생겨 먹은 생물체의 경우 ①자기보존의 본능과 ②종족보존의 본능, 이 두 가지의 충족을 의미한다. 본능 ①의 충족은 개인적인 생존을 뜻하므로 음식과 주거의 문제이다. ②의 충족은 종(족)의 유지와 번영을 뜻하므로 성적 욕구의 문제이다." 여기서 대개의 경우 자기보존의 본능(생존의 욕구)이 종족보존의 본능(생식의 욕구)보다 먼저 고려된다. 즉 생식의 욕구라는 생물학적 기제의 정신적(정서적) 대응(수반)으로서의 감성적 사랑은 생존의 욕구에 의해 제어되는 사랑이다(사랑을 팔고 사는 것은 이 때문에 가능하다). 그렇다면, 초감성적 사랑이란 바로 이러한 생존의 욕구에 의해 제어되지 않는 사랑이겠다(사랑에 죽고 못사는 것은 이 때문에 가능하다). 그것은 (한)순간에 자신이 완성되기를 열망한다. 그런데 그것은 현실에서 가능하지 않다. 그래서 도망간다(혹은 죽고 만다). 하지만 사랑을 잊지 못하고 다시 돌아온다(귀신이 되어 되돌아온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가? 나쁜 피, 우리의 생-본능을 관장하는 '나쁜 피' 때문이 아닐까?

4
애초에 사랑이 가능한 것은 우리가 육체를 가진 존재이어서이다. 즉 육체(나쁜 피)는 사랑의 가능조건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 육체는 사랑의 걸림돌이 되고 초감성적 사랑의 불가능조건이 된다. 이 육체는 우리를 정념의 공간 속으로 내던져 놓고는 뭔가 이루어질 만하면 다시 잡아당기는 것. 그래서 우리는 어디론가 무한질주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곧 걸음을 되돌려야만 한다. 그래서 이 질주에 대해 "끝없이 몸부림치지만 나아갈 수 없는 삶의 불가해성과 무력함 그리고 이것 자체에 대한 분노 등"을 나타낸다고 한 것은 옳은 지적이다. 다만 여기서 '나아갈 수 없는 삶'이란 걸 나는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으로 바꿔 읽고 싶다.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은 감성적 사랑, 아름다운 사랑의 끝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숭고하다(죽음을 무릅쓰는 사랑!). 이 숭고한 사랑은 (감성적) 사랑의 이해관계(목적)에 구속받지 않으며 한정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해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숭고한 사랑의 맹목적인 운동 앞에서 망연자실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된다(간혹 우리가 그러한 사랑에 걸려들기 때문에!). 알렉스의 물음에 대해 안나가 세차게 머리를 젓는 것은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시이면서 동시에 그것에 대한 두려움의 표현은 아니었을까?

 

그렇다,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은 아름다운 사랑이 아니라 두려운 사랑이다. 그것이 두려운 것은 우리의 생-본능을 초과하기 때문이다. 영화 <나쁜 피>의 한 장면을 내가 좋아하는 것은 그것이 나에게 그런 두려움을 드리우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내가 다 이해할 수 없고, 다가갈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다. 그래서 그것은 두렵다(불쾌하다). 그렇지만, 그 두려움은 우리의 생-본능이라는 인간조건을 일시적으로나마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놓기 때문에 우리를 (한)순간 개방한다(우리의 죽음이 그렇지 않을까?). 그래서 결국 우리를 일시적으로나마 자유롭게 한다(머리가 잘린 통닭모양). 숭고한 사랑, 숭고한 예술은 그렇게 우리 앞에 있다. 아니다, 그건 더 이상 사랑도 예술도 아닌 어떤 것이다. 하여간에 무엇인가가 그렇게 우리 앞에 있다.

5
프로이트의 이분법을 사용하자면, 아름다움은 생-본능과 연관되어 있고 숭고(함)은 죽음-본능과 연관되어 있다. 생-본능은 사는 것, 잘사는 것, 보다 더 잘사는 것을 지향한다. 이성의 기능이란 것은 이러한 생-본능을 바람직하게 보좌하는 것이다(화이트헤드). 이에 대하여 죽음-본능은 절대적으로 잘사는 것을 지향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생-본능에서 발원하지만 곧 그것을 초과하고 만다(그래서 이성-이념의 한계를 표시한다). 절대적으로 잘사는 것이란 결코 삶의 안쪽에서는 성취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은 끊임없이 무에 유혹되고 죽음에 도취된다. 마치 바타이유의 에로티즘('죽음까지 파고드는 삶')처럼(에로티즘 또한 생식의 욕구에서 발원하지만 그것을 초과한다).

죽음이 우리에게 불가해하듯이 숭고한 사랑, 숭고한 예술은 우리에게 불가해하다. 이것들은 모두 절대적인 타자이다. 우리의 이성, 즉 개념적 사태 이해는 이들 안에 정립되어 있는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의 뒤치다꺼리에나 바쁠 따름이다. 간혹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이 우리를 유혹하는가? 그럼 어쩔 텐가? 우리는 안나와 마찬가지로 세차게 머리를 내저으며 알렉스와 마찬가지로 이 또 다른 '나쁜 피'로부터 도망가는 수밖에. 그러다 발병이 나고 덜미를 붙잡히는 수밖에!

6
칸트가 주장하는 취미(아름다움) 판단의 무관심성(무사심성)은 숭고에 대해서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그것을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에 대한 안나의 부정과 나란히 놓을 수 있을까? 아름다운 대상에 대해 평정한 태도, 무관심한 태도를 갖는다는 것은 안락의자에 주저앉는 일로 충분히 가능할 수 있겠지만, 숭고한 대상에 대해서, 가령 어떤 예술작품 속에 정립되어 있는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에 대해서도 그것이 가능할까? 어딘가 불편하지 않을까? 만약 아름다움에 대한 무관심이 적극적인 관심의 결과라면 숭고에 대한 무관심은 필사적인 관심이어야 하지 않을까? 다시 한 번 알렉스의 질주를 떠올려 보자. 우리의 생-본능은 숭고(죽음)로부터,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으로부터 필사적으로 도주(질주)할 때에만 자기 앞가림을 할 수 있는 것. 그런 필사적인 도주를 우리는 '무관심'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아름다움에 대한 무관심 만큼이나 숭고에 대한 무관심 또한 아이러니적이다. 너무 말이 없어서 '떠벌이'란 별명이 붙은 알렉스처럼.

7
"현대의 영화가 보여주는 이 모든 특징이 철학에 대해 갖는 관련성은 바로 사유의 무능력에 직면시키는 것이다. 새로운 영화의 이미지는 우리로 하여금 사유의 무능력을 사유케 하고 무의 형상을 사유하게 하며 사유될 수 있는 전체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사유하게 한다. 영화의 이미지가 운동의 교란을 나타내는 순간 그것은 세계를 일정하게 유보시키는 것이며 가시적인 세계를 교란시키는 것이다. 이로써 사유는 자신의 한계에 직면하여 자신의 한계를 사유하게 된다. 이것이 영화가 철학에 대해 갖는 의미이다."(들뢰즈) 이러한 주장은 비단 현대 영화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리라. 예술이라는 이름에 값하는 모든 것은 철학이라는 개념적 사유에 대해 그러한 의미를 갖는다고 우리는 정당하게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예술이라는 이름에 값하는 모든 것은 우리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우리의 무능력을 절감하게 한다. 이것은 마치 데리다가 반 고호의 그림에서 구두끈이 반쯤 풀려/조여 있는 걸 두고 이중의 구속(double bind)을 말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 우리의 잘난 예술은 우리를 (껴)안아주지도 않으면서 공연히 놓아주지도 않는다. 우리는 담배나 (꼬나)물고 그것의 주변만을 서성거릴 뿐이다, 문밖에서. 그러다가 문득 자각한다, 우리 자신의 숭고함을!

8
자신의 사랑에 대해 중언부언하는 것은 품위 없는 짓이지만,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에 대해 몇 마디만 더 하겠다. 사실, 이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에 대한 물음, 즉 정념론적 과제는 나에게 있어서 칸트 이후에 제기된 인식론적 과제와 결코 다르게 읽히지 않는다: "인간의 이성은 어떤 종류의 인식에 있어서는 특수한 운명을 지니고 있다. 즉 이성은 자신이 거부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대답할 수도 없는 문제로 괴로워하는 운명이다. 거부할 수 없음은 이성 자체의 본성에 의해서 이성에 부과되어 있기 때문이요, 대답할 수 없음은 그 문제가 인간 이성의 모든 능력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순수이성비판>)라고 말할 때, 이성에 의해 제기되지만 이성의 능력 바깥에 있는 물음들이란 바로 숭고한 물음들이며, 예술적인 물음들이다(가령 "우주는 유한한가, 무한한가?"라든가, "우주는 팽창하는데 왜 우리는 팽창하지 않는가?"라는 식의 물음들).

 

데리다식으로 말해서 반쯤 풀려 있고 반쯤 조여 있는 이 물음들을 이성의 잉여효과, 혹은 과민반응이라 부를 수 있을까? 미친 듯한 질주가 어찌 과민반응이 아닐 수 있을까? 진화사적으로 볼 때도 형이상학적 물음들이 우리의 자기보존 본능이나 종족보존 본능에 유리하게 작용할 만한 근거는 찾을 수 없다(형이상학적 사유에 필요한 기회비용을 다른 데 투자한다고 생각해 보라). 그런 의미에서도 인식의 형이상학이나 정념의 형이상학 모두 본래의 프로그램을 초과하고 있다. 그것들은 프로그램의 돌연변이이며 아나그램이다.



9
뒤샹의 경우. 1917년 마르셀 뒤샹은 뉴욕에서 리처드 무트(R. Mutt)라는 가명으로 레디메이드 작품 <샘>(변기)을 전시회에 출품하나 거절당한다. 이 미술사의 한 스캔들은 단순한 스캔들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데, 그것은 그가 예술작품의 개념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오브제를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이 경우에는 화장실에서 미술관으로) 옮겨놓았을 때 그것이 예술작품이 된다는 걸 발견(주장)한 것이다. 이것이 암시하는 바는 예술작품의 근원이 더 이상 예술작품이나 예술가 자신의 창조성에 놓여 있지 않다는 것이다. 아니 적어도 일부 작품의 경우에, 그것을 예술작품으로 만드는 것은 자리옮김이라는 일종의 새로운 명명행위이다.



뒤샹의 대표적인 레디메이드 중의 하나인 <자전거 바퀴>(1913)은 자전거 바퀴와 의자를 접붙임한 것이다. 이 바퀴와 의자는 모두 주변에서 흔하게 구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전혀 예술작품이 아니다. 하지만 이 두 오브제가 동시적으로 제시됨으로써 거기에 어떤 미감적 효과(뒤샹 효과)가 유발되는 것이다(그래서 자신이 예술작품임을 주장하게 되는 것). 이 새로운 예술, 혹은 '미적 사기'에서 중요한 것은 새로운 병치(명명)이고, 자리의 이동이다. 이점은 <샘>의 경우에 보다 극적으로 드러난다.

 

전시회에 예술작품으로 놓인, 그리고 '샘'이라고 새롭게 명명된 이 변기에서 우리는 이미 도구 존재로서의 도구다움을 경험할 수 없다. 이 변기의 "둘레에는 그것이 귀속될 만한 거라곤 아무 것도 없이, 다만 무규정적인 공간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변기는 안전하고 편리한 배뇨를 위한 기구라는 도구의 도구 존재, 즉 신뢰성을 자신 가운데로 모아놓고 있다. 이를테면 변기라는 존재자가 자신의 존재, 곧 숨어 있지 않음(탈은폐) 가운데로 나타난 것이다. 이렇듯 존재자의 진리의-작품-속으로의-자기-정립이 이 변기를 예술작품으로 만들어준다? 이런 식의 하이데거적인 사유는 그림이 아닌 실제 오브제의 경우에도 여전히 유효할 수 있을까? 이미지로서의 고호의 구두 그림이 실제의 구두에로 관심을 정향시킨다면, 실제로서의 이 뒤샹의 변기는 오히려 완강하게 자신의 도구로서의 흔적을 지우며 이미지화되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하여 이 변기는 도구적 존재자로서의 자신의 신뢰성을 철저히 부인하고 망각한 이후에야 예술작품으로서, '샘'으로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닐까? 과연 예술은 무엇이었으며, 무엇이고, 무엇일 것인가?

10
과학사에서 1997년이 의미있는 해로 기록된다면 그건 단연 복제양 돌리 사건 때문이다. 유전자 복제(내지는 치료)라는 것은 생물체의 고유한 유전자 염기배열을 기술적으로 조작할 수 있음에 근거한다. 유전자 염기배열이란 A, C, T, G 네 개의 문자로 표시되는 DNA 염기의 조합('책')이다. 이제까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체는 자신이 타고난 유전자 프로그램에 종속되어 있었지만, 이제는 거기에 작지만 의미있는 변화를 가할 수 있게 된 것. 그런 의미에서 유전자 조작은 일종의 아나그램(철자변환)이다. 그것은 이미 주어진 재료(레디메이드)의 배열을 바꾸는 것이고, 자리를 이동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기술이면서 예술이다.

아나그램으로서의 예술의 시대로 진입하면서 우리는 기술과 예술의 비분리를 다시금 경험하게 될 것인지(이에 대한 사유는 조금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미래에, 이성의 도움없이도 자기복제를 통한 종족보존이 가능해질 경우(그것이 허용될 경우), (숭고한)사랑은 무엇일 것인지? 레디메이드 이후에 (숭고한)예술은 무엇일 것인지? 그런 물음들 앞에서 사랑과 예술은 자신들의 유사한 운명을 놓고 어떤 표정을 지을 것인가?

11
모든 이야기를 정리해서 할 만한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있지 않다(모든 단락은 보완을 강요하고 있다). "결국 우리가 사랑하는 것에 대하여 말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은 가볍게 말하는 것이다."(카뮈)라는 권고를 제법 따르려고 했지만, 결과에 대해서는 내가 말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칸트와 하이데거와 데리다를 좋아하는 만큼 더 읽게 되면, 조금은 무겁게 말할 수 있을는지(여전히 사랑하면서)? 끝으로, 이 몇 가지 생각의 꼬투리가 되어준 카락스/알렉스에게 고마움을 전해야겠다. 알렉스 오스카(Alex Oscar)는 레오(스) 카락스(Leos Carax)의 아나그램이다. 예술은 분신들을 통해 자신의 삶을 소진시키는 것이라는 것을 젊은 카락스/알렉스는 내게 말했다. 다른 건 중요하지 않다.

12
하여간에 "중요한 것은 구애를 한다는 것이며, 이 구애는 어떤 방법으로든지 계속될 것이다."

97. 12. 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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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나무 2008-03-24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의 서재질은 수혜자로서의 것입니다. 비를 가둔채 흐린 하늘 아래서 갈증을 느끼면서 나를 완전히 묶을 수 있는 유일한 곳입니다. 오래 전 '오아시스'에 대한 의견은 전적으로 동감하는 부분이네요. 종두는 쉽게 이해 받기 힘든 극소수자의 입장입니다. 이 페이퍼는 내가 빠진 무력감을 위로하기도 합니다.

boinda 2009-08-24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렵지만 인내하면서 정독했습니다/이 글을 건너 진도를 나가고 싶은데.../여기 오는날 마다 한 단락씩 읽어 보렵니다
 

 
..

문학은 사랑과 가난과 죽음과 언어, 이 네 개의 원소로 이루어져 있다.

∴ ∴ ∴

무의미를 견뎌내는 일이 삶에서 중요하다면, 시에서 중요한 것은 의미를 견뎌내는 일이다.

∴ ∴ ∴

시는 우리 삶의 소중함과 비참함을 동시에 말할 수 있는 몇 안되는 기술이다.

∴ ∴ ∴

중력이란 무엇인가? 중력은 잡아당기는 힘이다. 이것을 조금 현대적인 의미로 이해하면, 프로그램 pro-gram이다. 즉 우리의 글자들(gram) 앞에 있는(pro) 어떤 것이고, 이 글자들에 무게를 주는 어떤 것이다. 존재 Sein가 존재자를 존재자이게끔 하는 개방성이라면, 중력은 모든 글자들을 글자들이게끔 하는, 모든 형태들을 그런 형태들이게끔 하는 개방성이다. 모든 생명체의 DNA 글자들, 유전형 genotype과 표현형 phenotype은 그래서, 중력의 장 속에 놓인다. 그리고 모든 어련하다 싶은 우리의 행동양태나 행동거지들은 중력의 입김 속에 놓인다.

∴ ∴ ∴

시는 포스트그램 post-gram이다. 시는 글자들을 보내는 기획이면서, 동시에 중력 이후의 삶을 묻는 기술이다. 우리의 바탕이 이러이러하고 그래서 우리가 이 모양이란 걸 알게 된 이후의 삶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묻는다는 점에서 시는 특권적이다. 시는 삶의 윤리학이 아니라 존재의 윤리학이다.

∴ ∴ ∴

아주 어렸을 때 일로, 나는 기억에 없지만 어머니가 증언하는 바에 따르면, 밖에 나가서 동생이 다른 아이와 싸움이 붙어도 나는 멀거니 옆에서 구경만 했다고 한다. 다 끝나고 나서야 둘이 손을 붙잡고 울면서 돌아왔다고. 이제 와서 사실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럴 만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지금이라고 해서 내가 달리 처신할 수 있을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 ∴ ∴

이 무관심한 태도 dis-interestedness가 나에게서 삶에 대한 무능력을 낳고 무성의를 낳는지도 모르겠다. 사람들로부터 멀리 있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책이나 영화 속의 멀리 있는 사람들이나 좋아하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단지 너무 소심하고 겁이 많은 건지도 모르겠다. 어떤 경우든지, 그런 태도가 전제하고 또 확보하는 거리 dis-tance가 나의 의미론적 생존의 조건이 된다. 나를 생각하게 하고 글을 쓰게 한다. 문학이라거나 철학이라거나 하는 등속의 구분은 여기서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문체일 따름이다. 문체란 언어의 한 묶음의 변주 variation이고, 어떤 변조 modulation이며, 자신의 바깥을 향한 언어적 긴장이다.(들뢰즈) 문체는 언제나 이질적인 heterogenous 언어 속에다 전위차를 일으켜 그 사이로 무엇인가가 지나가게, 생겨나게 하는 것이다.([S]tyle carves differences of potential between which things can pass, come to pass...)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바로 그러한 작업이다. 자주 다른 이들의 이런 글들을 읽으며 감전되었던 경험을 다시 되돌려주고 싶은 것이다.

∴ ∴ ∴

나는 울고 싶은데 神은 내게 계속 쓰라고 명령한다. 그는 내가 빈들거리는 걸 원하지 않는다. 내 처는 줄곧 울고 있다. 나 역시 운다. 나는 의사가 와서 내가 쓰고 있는 동안 아내가 울고 있다고 말할까봐 불안하다. 나는 그녀에게 가지 않겠다. 내게 책임이 있는 건 아니니까. 내 어린것은 온갖 것을 보고 듣는다. 그 애가 나를 이해해 주었으면 좋으련만. 나는 키라를 사랑한다. 내 어린 키라는 자기에 대한 나의 사랑을 느낀다. 그러나 그 애 역시 내가 앓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그에게 그렇게 말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 애는 내게 내가 잘 잤는지의 여부를 묻는다. 그러면 나는 내가 언제나 잘 잔다고 말해준다. 나는 무얼 써야 할지를 모르겠는데 神은 내게 쓰기를 바라는 것이다.[...] 나는 결함을 지녔다. 나는 인간이다. 神이 아니다. 나는 神이 되고자 한다. 그러므로 나는 나 자신을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나는 춤을 추고 싶고 그림을 그리고 피아노를 치고 시를 쓰고 싶다.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 이것이야말로 내 생의 목표이다.(니진스키, <고백>)

∴ ∴ ∴

드디어 관에 뚜껑이 덮였다. 못이 꽝꽝 박히고 짐마차에 실렸다. 마차는 삐걱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거리가 끝나는 데까지밖엔 전송하지 않았다. 마부가 채찍을 휘둘렀다. 말은 속보로 달리기 시작했다. 노인은 그 뒤를 쫓아가면서 어이어이 소리를 내어 울었다. 뛰어서 쫓아가느라고 그 울음소리는 몹시 떨렸고 가끔 끊어지기도 했다. 가엾은 노인은 모자를 떨어뜨렸지만 그것을 집으려고 멈추어서지도 않았다. 비가 그의 맨머리를 적셨다.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노인은 그런 것쯤은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소리를 내어 울며 마차의 이쪽저쪽을 겅중겅중 뛰어서 왔다갔다했다. 낡아빠진 프록코트의 옷자락은 날개처럼 바람에 나부꼈다. 호주머니란 호주머니에서는 책들이 비죽이 기어나오고 무슨 책인지 커다란 것이 한 권 소중하게 쥐어져 있었다. 길가는 사람들은 모자를 벗고 성호를 그었다. 어떤 사람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놀란 얼굴로 이 가련한 노인을 지켜보고 있었다. 책들은 쉴새없이 호주머니에서 진창으로 굴러떨어졌다. 사람들이 그를 불러 세워 물건을 떨어뜨렸다고 가르쳐주었다. 노인은 그것을 집어들고는 다시 마차 뒤를 쫓아갔다. 길모퉁이에서 어떤 거지 노파가 그에게 손을 내밀며 들러붙더니 함께 관 뒤를 따라갔다. 드디어 마차는 모퉁이를 돌아 내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도스토예프스키, <가난한 사람들>)

∴ ∴ ∴

능글맞기도 하지만 괜히 잘 우는 사람들이란 고정관념을 나는 러시아인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이 두 러시아인 댄서/작가에게 힘입은 것이라는 걸 부인하지 않겠다. 사실 러시아 문학을 좋아하게 된 것은 그런 그들의 정서가 나에게 맞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다지 잘 우는 편은 아니지만, 자신의 연약함과 무능력에 대한 고백으로서의 울음이 우리 생의 첫 발성(언어)이었다는 사실에 언제나 감동받는다. 외롭고 힘들어 지칠 때마다, 우리가 이 근원의 장소를 찾아가고 이 원초적 정념에 호소한다는 사실에 언제나 고무받는다. 예컨대, <파리, 텍사스>에서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가정이 파탄나자 트래비스는 자신이 잉태되었던 바로 그 근원의 장소로서 '파리'(프랑스 파리가 아니다)를 찾아 사진 한 장을 들고 황량한 텍사스 사막을 헤맨다. 그의 그런 행위에 의해 물리적으로 동질적인 어떤 공간이 파리 Paris/텍사스 Texas로 분절된다. 이 분절은 성(聖)/속(俗)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의미론적이고 구제론적인 것이다. 이 고질적인 의미론/구제론은 아주 인간적이고 너무도 인간적이다. 우리는 그리 돼먹은 듯하다.

∴ ∴ ∴

"나는 한번도 울어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나의 눈물들은 생각들로 변했기 때문이다. 이 생각들은 눈물과 마찬가지로 쓰라리지 않을까?" 이것은 루마니아의 작가 에밀 시오랑(E. M. Cioran, 1911-1995)의 말이다. 철학을 공부하다가 그만둔 그는 1937년 파리로 건너가서 이후 죽을 때까지 인근의 창녀들이 야밤에도 소란을 피우는 싸구려 호텔 다락방에 은둔하며 살았다. 그가 철학을 그만둔 데에는 한 가지 일화가 있다.

칸트와 피히테, 쇼펜하우어, 베르그송을 읽으면서 철학을 제외하곤 시에도 무관심했던 그는 남들처럼 논문을 쓰기로 결정하고 어떤 주제를 고를까 고심했다. 그리고는 진부하면서 뭔가 독특한 주제를 찾았다고 생각해서 지도교수에게 달려갔다. "'눈물의 일반이론'이 어떻겠습니까? 그건 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가능이야 하겠지. 하지만 참고문헌을 찾는 게 어렵지 않겠나." 이에 "그건 문제가 없습니다. 인류의 역사 전체가 논문의 근거가 되니까요." 그는 자신에 차서 말했다. 그러자 지도교수는 경멸에 찬 시선을 보냈고, 그는 그 순간 철학에 대한 모든 기대를 포기한다.

그의 말: "나는 철학이 어려움에 처한 인간에게 아무런 말도 할 게 없다는 걸 깨달았다. 철학은 인간에게 문제를 제기하는 법을 가르치지만 결국은 인간을 각자의 운명속으로 내팽개치고 마는 것이다."

∴ ∴ ∴

나는 언젠가 나 자신이 그런 작업을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시오랑이 포기한 '눈물의 일반이론'이란 것. 현재 이러고저러고 하는 것의 대부분은 이 눈물의 일반이론을 위한 연습이고 밑그림이라는 생각도 한다. 거꾸로 철학에 대한 나의 관심은 이에 근거한다. 어려움에 처한 인간에게 아무런 말도 할 게 없는 철학의 무능력 자체는 바로 우리의 무능력을 닮은 것이다. 우리는 거기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무엇을? 내던져지고 내팽개쳐진 각자의 운명(시오랑은 해체de-composition라고 부른다. 이 해체가 그의 글쓰기 양식을 규정한다.) 속에서, 각자의 눈물 속에서 의미있는 일반이론, 즉 연대 solidarity를 끌어내는 일 말이다. 개인의 울음을 집단의 통곡으로 바꿔놓는 일 말이다. 언젠가는.

∴ ∴ ∴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사랑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 것이다

-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 ∴

이 시의 1연은 나(화자)의 사랑-이야기의 전조이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하는 건 현실에서는 잘 이루어지기 힘든 사랑이다. 이때 푹푹 나리는 눈은 이 사랑의 축복과 고난을 동시에 표시한다.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하는 나는 눈이 푹푹 나리는 날 밤주막에서 소주를 마시며 그녀를 기다린다. 이런 나의 현실을 이 시에서 가장 객관적으로 토로하고 있는 부분은 2연의 전반부이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여기서 '사랑하고' 대신에 쓰인 '사랑은 하고'란 표현은 은근하게 나의 사랑을 특수화, 주제화하고 있다. '은'이라는 조사에 의해서 한정되어 있는, 나의 사랑은 혼자만의 사랑이고 외로된 사랑이다. 즉 나는 그녀, 나타샤가 오지 않을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다. 오지 않을 그녀는 눈 나리는 밤에 내가 불러낸 일종의 미적 가상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것은 오직 상상 속에서만 현실화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님'이란 말 대신에 이 시에 이색적으로 쓰인, 러시아 여성의 이름 '나타샤'도 나와 그녀와의 거리를 더욱 분명하게 표시하며, '푹푹'(한숨소리!) 날리는 눈발 또한 혼자 소주를 마시는 그의 쓸쓸한 정조를 부추긴다.

그렇지만 이런 그의 정조는 곧 반전된다. 후반부의 내용은 어느 정도 술이 오른 나의 소망사항이다. 나는 이렇듯 눈이 푹푹 나리고 쌓이는 밤에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타고 깊은 산골 마가리(오막살이)에 가서 살고 싶다. 그것이 나의 소망이고 꿈이다. 여기서 아마도 도회(혹은 읍내)와 대립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산골은 현재의 현실과 대립되어 있는 소망스런 미래의 공간이다. 나는 (현재의)도회/(미래의)산골, (현재의)현실/(미래의)소망이라는 구도를 떠올리면서 전자에서 후자로의 이행을 자신에게 독려한다. 나의 환유로서의 흰 당나귀는 이 이행의 매개자이며 보조자가 될 것이다.

3연은 소주 기운과 자신의 소망에 더욱 고조된 나의 자신감을 보여준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2연)와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사랑하고"(3연)의 도치된 문형은 그런 정조의 차이를 확연하게 드러낸다. 그의 자신감은 사랑의 주체로서의 나를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는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후로 나에게서 푹푹 나리는 눈은 나와 나타샤의 사랑에 대한 따뜻하고 여유로운 축복의 뜻을 강하게 갖는다. 이윽고 마지막 5연에서 나의 기쁜 마음은 절정에 이른다. 이제 아름다운 나타샤는 (다른 사람도 아닌)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 것"이라는 표현은 나타샤와의 사랑을 통한 나의 신생(新生)을 말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 ∴ ∴

 

 

 

 


시에 대한 감상을 대강 적어보았다. <나와 나타샤와 당나귀>(1938)는 60년 전의 시이다. 그렇지만 응앙응앙 하는 신생의 울음소리는 아직도 생생함을 잃지 않고 있다. 나는 그런 것이 시로 변한 눈물들, 생각으로 변한 눈물들, 빈들거리지 않는 눈물들의 힘이라고 생각한다(당신은 소주의 힘이라고 말하려는가?). 사실 우리가 "더러워 버리는 것"이기는 해도, 우리는 매번 세상한테 (넘어)진다. 그래서 넘어가는 사람 Uber-mensch이 되기 위한 바쁜 이행 Uber-gang의 와중에도 넘어지는 사람 Unter-mensch으로서 우리는 매번 몰락 Unter-gang하기를 잊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것이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세상이 본래 그리 돼먹은 거라면. 우리가, 가난한 우리가 참는 수밖에. 우리가 이 운명을 사랑하는 수밖에. 이러한 운명이 너무 좋아서 응앙응앙 오늘도 우는 수밖에!

∴ ∴ ∴

간혹 돈가방이라도 들고 어디론가 튀고 싶다!..


98. 8.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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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데리다 문헌 목록입니다. 3년전에 작성된 것이라 업그레이드돼야 하지만(그간에도 수십 종의 문헌이 추가됐기에) 다음으로 미루고, 데리다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에게 도움이 될까 하여 올립니다. 제가 읽을 수 없기 때문에, 불어 원전은 생략했습니다.(제가 갖고 있거나 국내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문헌들로 국한했고, 자세한 출판서지는 생략했습니다.)

1차문헌
- Edmund Husserl's Origin of Geometry: An Introduction(1962/1989)
- Of grammatology(1967/1976); {그라마톨로지}(민음사, 1996)
- Speech and Phenomena(1967/1973)
- Writing and Difference(1967/1978); {글쓰기와 차이}(동문선, 2000)
- Margins of Philosophy(1972/1982)
- Dissemination(1972/1981)
- Positions(1972/1981); {입장들}(솔, 1992)
- Glas(1974/1986)
- Spurs: Nietzsche's Styles(1978/French-English1979): {에쁘롱}(동문선, 1998)
- The Truth in Painting(1978/1987)
- The Post Card(1980/1987)
- Raising the tone of philosophy(1983/1993)
- Memories for Paul de Man(1986)
- Of spirit(1987/1989)
- Sineponge(1988); {시네퐁주}(민음사, 1998)
- Limited Inc(1988)
- L'Autre cap(1991); {다른 곶}(동문선, 1997)
- The Gift of Death(1992/1995)
- Points...: Interviews, 1974-1994(1992/1995)
- Aporias(1993/1993)
- Spectre of Marx(1993/1994): {마르크스의 유령들}(한뜻, 1996)
- Politics of Friendship(1994/1997)
- Archive Fever: a Freudian impression(1995/1996)
- Resistances: of psychoanalysis(1996/1998)
- Monologism of the other(1996/1998)
- Peggy Kamuf 편, A Derrida Reader(1991)
- Derek Attridge 편, Acts of Literature(1992)
- Gil Anidjar 편, Acts of Religion(2002)
- with Geoffry Benninton, Jacques Derrida(1993)
- with Gianni Vattimo, Religion(1996/1998)
- {에코그라피}(민음사, 2002)

- The time of a thesis: punctuations, in Philosophy in France today(1983)
- My Chances/Mes Chances: A Rendezvous with Some Epicurean Stereophonies, in Taking Chances: Derrida, Psychoanalysis, and Literature(1984)
- Des Tours de Babel, in Difference in Translation(1985)
- Introduction: Desistance, in Typography by Lacoue-Labarthe(1989)
- R. Palmer 편, Dialogue and Deconstruction: The Gadamer-Derrida Encounter(1989)
- Force of Law: the "Mystical Foundation of Authority", in Deconstruction and the Possibility of Justice(1992)
- 대담, in Criticism in society by Immre Salusinszky(1987)
- 대담, in States of Mind: Dialoues with contemporary thinkers on the European mind by Richard Kearney(1995); {현대 사상가들과의 대화}(한나래, 1998)
- 춤;대담, in {세계사상}(제4호, 1998); N. Holland 편, Feminist Interpretation of Jacques Derrida(1997)
- Chantal Moouffe 편, Deconstruction and Pragmatism(1996)
- Faxitexure팩시텍스처, in {공간의 논리}(현대건축사, 1998)

- 이정우 편역, {구조주의를 넘어서}(인간사, 1990)([인간의 죽음] 번역)
- {현대비평과 이론}(1992, 봄호) 데리다 번역논문 특집
* 루소의 언어학과 제네바 언어학파({철학의 여백})
* 문체의 문제점({에쁘롱})
* 잔혹극과 재현의 폐쇄성(잔혹성)({글쓰기와 차이})
* 일본인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프시케})
- 이진우 편역,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적 이해}(서광사, 1993)([인간의 종말] 번역)
- {현대문학비평론}(한신문화사, 1994)
* [인간 과학 중심의 담론에 있어서의 구조와 기호와 놀이] 번역({글쓰기와 차이})
(* 김성곤 편, {탈구조주의의 이해})
- 김보현 편역, {해체}(문예출판사, 1996)
* 언어학과 문자학({그라마톨로지})
* 차연({철학의 여백})
* 백색신화({철학의 여백})
* 후설의 현상학적 환원: 의미와 표상({목소리와 현상})
* 하이데거의 정신이란 무엇인가({정신에 관하여})
* 프로이트와 심리의 전경화({글쓰기와 차이})
* 라캉의 음성중심 형이상학({우편엽서})
* 파레르곤({회화 안의 진리})
* 조이스의(에게 하고 싶은) 두 마디 말
- ['프로이트에게 공정하기': 정신분석학 시대의 광기의 역사], {광기의 역사 30년 후}(시각과언어, 1997)

2차 문헌
- 김보현, [형이상학의 해체와 해체주의], 김욱동 편,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구조주의}(현암사, 1991)
- 김상환, {해체론 시대의 철학}(문학과지성사, 1996)
- 김상환, [해체론과 철학적 건축술의 역사], {창작과 비평}(1997, 여름호)
- 김상환, [허무주의 시대의 초월], {문학과 사회}(1998,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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