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설연휴 끝에 쓴 글을 여기에 옮겨둔다... 연휴가 끝나고 연 사흘째 이삿짐을 싸고 있다. 모레부터 3주 동안 지난 1년간 몸담았던 연구소의 천정과 바닥 공사가 시작되기 때문에, 연구소 비품도 챙겨야 하고 그동안 쌓아두었던 책들을 몽땅 정리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저것 해서 30박스쯤 정리하는 일이니까 일이야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짐을 챙기는 손은 더디고 마음은 심란하다. 2월에 해야 할 일들이 빽빽한 터에, 벌써(!) '이삿짐'이나 챙기고 있다니!..

 

 

 

 


잠시 기분풀이로 올해에 나올 책들과 영화들을 꼽아본다. 영화잡지들을 그다지 챙겨보지 않기 때문에, 현재 제작중인 영화들이 어떤 것들인지 잘 알지 못하지만, 올해 어떤 영화들이 개봉된다 하더라도 내가 보고싶은 영화로 첫손가락에 꼽을 건 이미 정해져 있다. 그건 홍상수의 다섯번째 영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이다. 지난주 <씨네21>에 실린 촬영장 취재기를 보면, 벌써 지난 10일에 모든 촬영이 마무리되고, 편집 등의 후반부 작업에 들어간 것으로 돼 있다(5월초 개봉예정). 그의 모든 영화를 개봉관이나 시사회장에서 보았었는데(<강원도의 힘>은 시사회장에서 허진호 감독 바로 앞자리에서 보았다), 아쉽게도 이번만은 그러지 못할 거 같다. 예정대로 개봉될 때쯤이면 나는 다른 나라에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이 생각을 하니까 외국에 나가는 일이 싫어진다!).(*그로부터 1년도 더 지났다. 나는 얼마전에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비디오를 '떨이'매장에서 2,000원 주고 샀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의 말을 빌면, 나는 매번 홍상수의 영화가 '뒈지게' 기다려진다. 사실 데뷔작이었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부터가 문제적이었는데, 나는 그 영화가 개봉되기 일주일 전에 (잘못알고) 개봉관에 가서 왜 영화를 하지 않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홍상수는 '한국영화의 발견'이다(나는 개봉관에서 연거푸 그의 데뷔작을 보았다). 한국을 대표하는 감독으로 아직은 임권택을 꼽지만, 그건 노장에 대한 예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대학에 들어와서 나중에야 그의 전환점이 된 <만다라>나 <길소뜸>을 봤지만(나는 전자보다는 후자가 맘에 든다), 아무런 유보없이 '임권택 만세!'를 부르기엔 나는 너무 젊었다.

 

 

 

 

아마도 내가 극장에서 최초로 본 임권택 영화는 <씨받이>였던 거 같다. 그 전에 그해 아카데미작품상 수상작인 <아웃 오브 아프리카>란 영화를 볼 때 <씨받이>의 예고편이 나왔고 관객들이 다 웃음을 터뜨린 기억이 있다. 비록 강수연이 베니스에서 여우주연상을 타고선 그 영화에 대한 평가가 다소 달라졌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모습이 한국영화에 대한 당시 관객들의 일반적인 시선이었다. 80년대 중반의 한국영화는 주윤발의 홍콩 느와르보다도 못한 평가를 받았고, 한국영화를 (공개적으로) 보러 가는 대학생은 아주 드물었다.

가히 한국영화의 몰락이라고 할 만한데, 그러한 몰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감독이 이장호이다. 그의 80년대 필모그라피는 <바람불어 좋은 날>(그의 가장 좋은 영화)에서 <바보선언>(그나마 객기가 문제의식처럼 보인 영화)을 거쳐서 <어우동>으로 빠진다(혹은 <무릎과 무릎 사이>에서 익사한다). 그나마 퇴행적으로라도 80년대의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있는 영화가 이장호의 조감독 출신인 배창호 감독의 <고래사냥> 시리즈이다(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답답한 청춘들!) 하지만, 이 배창호도 흥행몰이에 우쭐하여 장미희에 대한 오마주로 <황진이>를 만들면서 하향안정세로 접어든다.


 

 

 


 

그리고, 80년대 후반 조금 숨통이 트이는 것이 당시 히트 연극을 영화화한 박광수의 <칠수와 만수>(1988)부터이다. 장선우의 <성공시대>나 이명세의 <개그맨> 등이 비슷한 시기에 개봉되면서 이른바 한국영화의 새로운 젊은 감독 3인방 시대가 열리게 된다. 이후 박광수는 <그들도 우리처럼>에서 좀 일찍 정점을 보여주더니(그 이상을 기대했지만, 지나고 나니까 그게 정점이었다) <베를린 리포트>부터 곧바로 삼천포로 빠지기 시작해서 아직 돌아온다는 소식이 없고(복고풍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로 잠시 재기하는 듯했지만 <이재수의 난>으로 완전히 찍혀 버렸다), 장선우는 세속세계(그가 잘 만드는 쪽이다)와 화엄 세계(그가 죽을 쑤는 쪽이다)를 왔다리갔다리하면서 들쭉날쭉 영화를 만들다가(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우묵배미의 사랑>이다) <성냥팔이소녀의 재림> 이후에 잠적중이고(이번에 재기한다는 소문도 있다. 시집 한권 내고서), 그나마 엘리트의식 없이 이장호-배창호 사단의 적자로서 꾸준히 진화하고 있는 감독이 이명세인데(<인정사정 볼것없다>로 드디어 대중적인 인정을 받았다), 현재는 도미중이다.


 

 

 

 


한국영화에서 이들 3총사를 잇는 차세대의 대표적인 감독이 1996년에 데뷔한 홍상수이다. 시작은 아주 미미했지만, 요즘들어 서서히 대가급으로 인정받는 박찬욱 감독과 나이는 박광수, 장선우 세대이지만 (박광수 조감독 출신의) 한국영화감독이 맞나 싶게, 영화를 잘 만드는 이창동 감독(겸 장관)이 같은 세대이고(새로운 3인방이라고나 할까?), <살인의 추억>의 봉준호나 <지구를 지켜라>의 장준환 감독이 한국영화의 미래이다(물론 확실한 자기 스타일을 먼저 보여준 건 장준환이고, 봉준호는 감독 자신의 고백대로 아직은 암중모색단계이다).

거기에, 아직은 홍상수의 그늘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허준호나 박찬옥 감독까지 곁들이면, 강우석-김상진 계보나 강제규 감독 등과 대비되는, 한국영화에서의 작가주의 진영이 대략 갖춰진다(여기서, 작가주의라는 건, 관객의 코드보다는 감독 자신이나 영화에 대한 고려가 우선적인 영화만들기를 통칭한다). 참, 가장 과대평가된 '속죄양' 혹은 영화판의 '장정일' 김기덕이 빠졌다. 지젝이 잘 쓰는 표현에 따르면, 김기덕은 홍상수식 작가주의 영화의 외설적인 이면처럼 보인다.

하고 싶었던 얘기는 이게 아닌데, 뜬금없이 한국영화사 얘기가 돼 버렸다. 어쨌든 한국영화라는 장 속에서 홍상수의 자리가 어디인가를 간단히 짚어보고 싶었을 뿐이고, 가까운 장래에(한 10년쯤 후에) 한국을 대표하는 감독으로 (임권택 대신에) 우리는 그의 이름을 꼽을 수 있을 거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을 뿐이다. 사실 이러한 평가는 국외에서나 평단에선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데, 아직은 대중적인 인지도가 그에 못미칠 따름이다. 잠시 이번 신작의 촬영장을 훔쳐본 기자에 의하면, 이번 영화는 이전보다 더 많은 유머들로 넘쳐난다고 하고, 또 성현아가 주연을 맡았기 때문에 그의 영화들 중 역대 관객동원 기록을 갱신할 가능성이 높다. 그 관객에 내가 빠지더라도.

하니, 바라건대, "우물에 빠진 돼지가 강원도에서 수정을 만나서 발견한 것이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는 우스개도 있는 만큼 가급적이면 그의 영화들을 두루 섭렵하신 다음에 올봄에 개봉박두인 영화를 기대해 보심이 어떠실지? 이 정도면 나도 홍상수에 대한 애정을 충분히 표시한 셈인가? 나는 받은 만큼 갚는다(이게 비평의 기본 자세이다). 그렇다면, 제목의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는 무슨 뜻인가? 제목 풀이는 <씨네21>의 기사를 참조하시길(그래야 감독의 육성을 직접 읽을 수 있다)...

참, 올해에 나올 책 얘기를 빠뜨릴 뻔했다. 올해 나올 책으로 내가 가장 기대하는 건 데리다의 <법의 힘>이다. 역자는 진태원씨이고(그는 <마르크스의 유령들>도 다시 번역중이라고 한다. 국내에도 데리다 전문 번역자가 탄생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현재 교정중이라고 하니까, 올봄엔 책이 나올 거 같다. 비로소 데리다가 한국어로 번역되는 '사건'과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어쩌면 올해 그의 부고를 들을지도 모르고). 유감스럽게도, 이 책 역시 내가 뜨끈한 책을 읽어보긴 힘들 거 같군. 그리고 아마도 지젝의 주저 두 권이 올해 안에 나올 것이다. 두 권 모두 기대반 우려반이다. 데리다보다도 수준이 떨어지는 지젝 번역서라면?

라캉의 <에크리>는 판권을 갖고 있는 새물결이 연말에 나온 사진집으로 떼돈을 벌었다고 해도 올해를 넘길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돈이 아니라 번역의 질이기 때문이다. 올해 안에 나온다면, 2% 정도 기대해 봄직하다(98%는 아마도 우리말이 아닐 확률이다). 나는 그의 문장들이 어떻게 우리말로 변환될 수 있는지, 그 번역의 연금술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지만, 연금술은 '연금술'에 그칠 거라는 것이 이성적인 판단이다. 해서, 라캉과의 조우라는 사건은 아직은 미래형이다. 적임자가 곧 도래하기를 바란다.

또, 무슨 책들이 나올 것인가? 간혹 나이 먹는 일이 덜 유감스러운 것은 순전히 이러한 기대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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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inda 2009-08-24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워낙 소심해서 읽으면서 조마조마 했습니다/ㅎ/참 삼천포라는 단어도 포함해서/요즘 명예도 없는 사람들이 그것을 훼손했다고 야단법석이라서...../하지만 여기에 거론되지 않은 가독은 서운해 할지 모르겠습니다/한 시대를 순간 읽어내리면서 동의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한국사람은 세계 1등 좋아하는데/세월이 지난 지금도 김기덕과 홍상수는 알아주지 않습니다/세계에서 알아주는데 말입니다/저는 외국에서 유명하다고 그래서 더 좋아할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음.......데리다/이 번에도 데리다가 발목을 잡네요/지금쯤 다른 항목에 그에 대한 이야기가 있겠지요/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의 2장 2절 ‘세계의 밤’부터이다. 102쪽. 진도를 좀 빨리 나가기로 하겠다. 이제까지처럼 일부 오역들을 지적하면서, 중요한 내용에 대해서는 정리하는 방식이다.

(21) 둘째 문단, “실증주의적 에고 심리학의 상승과 함께”(with the ascent of positivist ego psychology)는 “득세와 함께”가 더 낫겠다. 이러한 (미국식) 에고 심리학의 득세 때문에, 정신분석학의 고유한 혁신성과 전복성이 거세되는데, 이에 대한 비판으로 러셀 자코비(제이코비)의 <사회적 건망증>(원탑문화사, 1992)이 있다(이 책에 대해서는 <향락의 전이> 초반부에도 언급이 되고 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이해하는 정신의학으로서의 정신분석학은 모두 에고 심리학에 근거하고 있다. 이것의 가장 큰 특징은 심적 장치가 얼마만큼 현실(현실원칙)에 잘 적응하는가를 기준으로 하여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을 가름하는 것이다. 그것은 달리 ‘적응’심리학이라고 불릴 만하다(이 적응심리학은 ‘승화’를 대단히 중요하게 다룬다. 승화란 자칫 ‘병리적일 수 있는’ 리비도 에너지를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방식으로 방출하는 걸 말한다). 라캉-지젝의 정신분석학은 물론 그러한 현실원칙과 기준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며, 그런 의미에서 그들의 이론적 기획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문명비판과 상통한다.

(22) 103쪽. “그러나 이러한 비판의 시야는 그것이 비록 도래할 소외되지 않은 사회에서...”에서 ‘그것’은 앞에서도 지적한 바 있지만, 뒤엣말을 받는 지시대명사이며, 우리말 문법에 맞지 않는 번역투이다. 우리말에서라면, ‘그것’은 ‘시야’(나 혹은 ‘비판’)을 받지만, 원문에서는 (심적 장치와 현실과의) ‘일치’를 받는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이론적 출발점은 이 심적 장치의 논리와 현실의 요구 사이의 본래적인, 환원불가능한, 말하자면 구성적인 불일치이다. 프로이트가 말하는바, “‘문명의 불만’이 인간적 조건을 정의하는 것은 이 불일치 때문이다.” 여기서도 ‘인간적 조건(condition humaine)’은 ‘인간의 조건’이라고 고치고 싶다. ‘인간적’은 ‘비인간적’과 쌍으로 쓰이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 단락의 마지막 문장: “현실에 대한 우리의 가장 ‘자연적인’ 열려 있음은 심적 장치의 본래적인 논리에 압력을 행사하는 금지들이 성공적으로 그 본래적 논리를 붕괴시키고 우리의 ‘제2의 자연’이 되었다는 것을 함축한다.” 이에 대한 원문은 “Our most 'natural' openness to reality implies that the prohibitions which exert pressure upon the inherent logic of the psychic apparatus have successfully broken it down and become our 'second nature'.”이다. 여기서 ‘제2의 자연’은 ‘이차적 본성’이라고 하는 게 옳다. 요지는, 우리가 현실(원칙)에 자연스럽게 적응하는 것은 사회적 금지들이 (심적 장치의 내적 논리를 무너뜨리고) 내면화되어 이차적 본성이 되었다는 걸 암시한다는 것이다.

(23) 104쪽. 중간에 “외적 현실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정신계의 매우 내재적인 기능화에는 완전한 만족에 저항적인 어떤 것이 있다.”(there is something in the very immanent functioning of the psyche, notwithstanding the pressure of 'external reality,' which resists full satisfaction.) 여기서 notwithstanding은 ‘-에도 불구하고’란 뜻이긴 하지만, 문맥상 맞지 않는다. “외적 현실이 압력이 아니더라도” 완전한 만족에 저항하는 어떤 내재적인 기능이 있다는 게 요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완전한 만족을 방해하는 건 외적 현실만이 아니라는 것. ‘매우 내재적인 기능화’는 엉뚱한 번역이다. 매우 내재적인? the very는 ‘바로 그’라고 옮기는 게 낫겠다.

(24) 각주29)에서, noism을 ‘부정주의’로 NON-ideology를 ‘비이데올로기’로 옮긴 것도 다소 무신경하다. 이 대중적인 이데올로기는 문맥상, ‘금지주의’나 ‘금지의 이데올로기’라고 옮겨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톨스토이의 명제’는 물론 ‘도스토예프스키의 명제’이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저자를 뜬금없이 ‘톨스토이’라고 오역한 것은 무슨 선입견의 작용인 것인지? 무지이거나, 착각이거나.

(25) 106쪽부터 entity의 쇼가 시작되는데, 역자는 ‘실체’라고 번역하기를 꺼려하는 바람에, ‘실존체’니, ‘실재하는 단위체’(110쪽)니 하는 말들로 옮겼다. entity는 실제로 있는 것을 뜻하는데(하이데거의 ‘존재자’를 entity로 번역하기도 한다), ‘존재’나 ‘것’ 혹은 ‘실체’ 등으로 번역된다. ‘실존체’라니? 그렇게 강한/대단한 뜻을 갖고 있지 않다. 문제가 된 문장은 “대상a는 공간 속에 존재하는 실정적인 실존체가 아니다”인데, 실존체는 그냥 ‘실체’라고 하면 될 거 같다. substance와 구별해 주기 위해서 ‘실존체’라고 옮긴 것 같지만. 앞의 (23)에서 얘기됐던 ‘내재적인 기능’이 바로 이 ‘대상a’이다. 해서, 106-7쪽에서는 대상a에 대해서만 잘 이해하고 넘어가면 된다.

(26) 108쪽부터 나오는 내용은 지젝의 책에 단골로 등장하는 대목이기에(그만큼 초기 지젝에게서 핵심적이다) 중요하다. 그가 독일 관념론을 라캉 정신분석학으로 어떻게 재독해하는지 그 단초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고. ‘세계의 밤(night of the world)’에 대한 헤겔의 언명을 지젝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추상적 부정성’의 경험, 자아 속으로의 주체의 ‘정신병적’ 퇴각(세계의 밤)은 변증법적 운동의 최종적인 결과, 구체적 내용의 긍정적 접합 속에 지양되는 지나가는 계기가 아니다. 차라리 그 요점은 긍정적인 정신적 내용의 이 매우 구체적인 접합은 근본적 부정성(세계의 밤)의 일정한 존재를 취하는 형식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걸 아이디어로 해서 지젝은 <부정성과 함께 머물기Tarrying with the Negative>란 책 한권을 썼을 정도이다.

두번째 문장의 원문: “the point is rather that this very concrete articulation of the positive spiritual content is nothing but a form in which the radical negativity (the 'night of the world') assumes determinate being.” 그러니까 기존의 해석에서 이 ‘근본적인 부정성’으로서의 ‘세계의 밤’이라는 건 변증법적 지양의 한 계기였을 뿐이지만, 지젝에 따르면 이 지양이라는 것, ‘긍정적인 정신적 내용의’ 구체적인 절합/분절이야말로 ‘근본적 부정성’이 취하는 한 가지 형태일 뿐이다. 이 ‘세계의 밤’의 정신분석학적 이름이 ‘죽음충동’이며 ‘대상a’이다.

positive는 ‘긍정적’ ‘실정적’으로 번역되는데, 어떻게 구별해서 써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사실 이론서 번역에서 까다로운 부분은 한 개념어에 대응하는 우리말이 둘 이상 있을 경우이다. 가령, 여기서의 articulation은 ‘분절’도 되고, ‘절합’도 된다(‘접합’은 좀 이상하다). substance는 ‘실체’도 되고 ‘실질’도 된다. body는 ‘신체’도 되고 ‘물체’도 된다(이정우는 <의미의 논리>에서 body를 ‘신체’로 번역되어야 하는 부분까지도 전부 ‘물체’로 옮겼고, 김재인은 <천개의 고원>에서 전부 ‘몸체’로 옮겼다). 번역에서 까다로운 건 이런 단순한 개념어들이다.

(27) 이하 114쪽까지의 내용들은 앞의 진술을 부연설명하는 부분들이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112쪽 중간 부분: “라캉적 정신분석학의 교훈들 가운데 하나는 - 그리고 동시에 라캉이 헤겔과 재접합하는 지점은 - ‘삶’의 유기적인 직접성과 상징적 우주 간의 근본적인 불연속성이다.” ‘라캉적 정신분석학’은 ‘라캉 정신분석학’이라고 해야 한다. ‘재접합’은 ‘재결합(rejoin)’으로, ‘상징적 우주’는 ‘상징적 세계’로 옮기고 싶다. 라캉에게서 ‘상징적 세계’란 물론 ‘언어의 세계’이며, 헤겔 또한 이 언어의 힘(지배력)을 강조한다. 그것은 유기적 ‘삶’에 대한 ‘죽음’(=로고스/언어)의 지배/통치이기도 하다.

(28) 115쪽. “그러므로 우리가 ‘문화’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의 존재론적 지위 바로 그것에 있어서는 삶에 대한 죽음의 통치, 즉 ‘죽음충동’이 실정적인 존재치를 획득하는 형식이다.” 원문은 “What we call 'culture' is therefore, in its very ontological status, the reign of the dead over life, i.e., the form in which the 'death drive' assumes positive existence.” 오역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중요한 대목이어서 옮겨보았다. 한참을 우회했는데, 115쪽에서 지젝은 이러한 사전정지 작업을 배경으로 하여 로셀리니 영화의 ‘헤겔적인’ 교훈과 매력을 말한다. “그것들은 항상 어떤 ‘진정한’ 실체적인 삶의 그림을 포함하고 있으며, 마치 여주인공의 구원은 이 실체적인 ‘진정성’(substantial authenticity)으로 뛰어드는 그녀의 능력에 달려 있는 듯 보인다.”

(29) 117쪽부터 얘기되는 것은 ‘희생의 매혹’이다. 이 ‘희생’은 앞에서 얘기된 ‘행위’와 구별되어야 한다. 이 희생은 “큰 타자에 대한 ‘화해의 선물’”인데, 이것은 큰 타자의 욕망의 심연을 은폐한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희생의 논리는 케보이(당신은 무엇을 원하는가?)의 논리와 단절된다(역자는 Che vuoi? 음역/번역하지 않거나 이중으로 번역했다). 이러한 단절/저항의 주체로서 지젝이 르네 지라르(<희생양>)를 따라서 꼽는 인물이 바로 욥이다. 지젝은 욥의 희생에 논리에 대항하는 욥의 물음을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윤리적 혁명”으로 묘사한다. 이하 122쪽 사랑의 논리로까지 이어지는 부분은 순조롭게 읽히며 재미있다.

(30) 123쪽. “즉 주체는 그의 상상적 자기 경험 속에서 효과적으로 ‘주도권을 쥐고 운영하는’ 의미화 메커니즘을 오인하다는 표적인 구조주의적 테제가 라캉에게 얼마나 낯선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여기서 “효과적으로 주도권을 쥐고 운영하는”은 “effectively ‘runs the show’”의 번역이다. 구조주의의 테제란 주체의 ‘상상적 자기 경험’을 실질적인 ‘의미화 메커니즘으로서’의 구조라는 ‘큰 타자’와 대비시키는 것인데, 라캉이 보기에 그러한 ‘큰 타자’는 없다. 그것은 주체의 가정/전제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이것이 라캉의 큰 타자와 알튀세르의 큰 타자 간의 차이점이기도 하다.(<라캉의 재탄생>에 실린 ‘라캉과 알튀세르’를 다시 읽어봐야겠다.)

(31) 그래서 라캉이 더 강조하는 것은 ‘해방’이 아니라, ‘퇴각(=물러남)’이다: “큰 타자로부터의 주체의 이 ‘퇴각’이 라캉이 ‘주체적 궁핍’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것은 희생의 행위가 아니라 바로 그 희생을 희생시키는 포기의 행위이다. 이렇게 해서 획득되는 자유가 우리의 이웃으로서의 타자가 없을 뿐만 아니라 큰 타자 자체 속의 지지대 또한 없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 지점이다.”(124쪽) 그리고 이 자유는 해방의 정반대물이다(해방은 항상 주인으로서의 큰 타자를 상정한다). 결론적으로 로셀리니의 영화들은 이러한 자유에 관한 영화들이며, “어떤 외상적 만남의 실재와 타협하려 하지만, 궁극적으로 실패한 시도”들이다. 그리고 그의 영화들에서 이 모든 행위(act), 즉 연기는 잉그리드 버그만의 것이었다.(왜 여자는 남자의 징후인지 이젠 아셨는지?)

 

 

 

 

(32) 이 절에 대해선 이상으로 대충 마치기로 한다. 집에 갈 시간이 다 됐다. 이 절을 마감하는 각주47)에는 로셀리니 영화의 알레고리적 성격과 관련하여, 제임슨의 ‘히치콕을 알레고리화하기’란 글을 참조하라고 돼 있다. 그래서 나는 정말 그 글을 참조해 보고자 했다! 그 글은 얼마전에 번역된 <보이는 것의 날인>(한나래)에 실려 있다. 그런데, 한번 언급한바 있듯이 번역이 좀 미덥지가 못하다. 제임슨도 악문이지만, 번역문은 한술 더 뜨기에. 비근한 예로 ‘히치콕을 알레고리화하기’의 212쪽에 “라캉의 표현으로는 ‘신성하지 않은 시침들 upholstery tacks’로서 기능하는 특별한 기표들”이란 말이 나온다. 신성하지 않은 시침들? 이게 라캉의 용어라고?

라캉을 좀 읽은 독자라면, ‘upholstery’란 단어에서 대충 때려잡을 수 있는바, 이건 흔히 ‘quilting point’로 더 많이 번역되는 ‘누빔점’ 혹은 ‘고정점’이란 뜻의 어구이다. 그걸, upholstery tacks라고 낯설게 옮겨놓은 제임슨도 짓궂지만(이런 게 변증법과 무슨 관계가 있나?) 그걸 눈치없이 ‘신성하지 않은 시침들’이라고 번역해놓은 역자의 무식 또한 상당한 수준이다(요컨대, 라캉을 별로 읽어본 바 없다는 얘기다). 사정이 이렇게 되면, 이해가 안되는 부분은 역자가 다 뒤집어쓰는 수밖에 없다. 부록으로 책 한권 더 준다고 해서 덥석 25,000원이나 하는 비싼 책을 사버렸는데, 이걸 어디에다 하소연해야 할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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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가 시작되기 전에 일단 이 장은 끝내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후에도 밀린 일들 때문에,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될지는 아직 미지수이지만. 라캉닷컴에 가면 이라크전쟁과 관련한 지젝의 강연문 내지는 원고를 여러 편 읽어볼 수 있다. 이번에 Verso출판사와 b출판사에서 나올 책에 포함되지 않을까 짐작해 보는데, 아침엔 프린트한 원고 한편을 좀 읽다가 버스에서 내내 졸았다. 어젯밤에는 인간사랑에서 근간 예정인 의 번역 원고를 교정보다가 잠이 들고(번역본의 상태는 커트라인은 거뜬히 통과할 만한 수준이지만, 책으로 나오기에는 아직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많다. 소위 후반부 작업(교정)이 세밀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요즘 다른 할일들이 너무 많아서 잠시 아예 손을 놓고 있는 편인데, 사정을 모르는 사람은 맨날 지젝만 붙들고 있는 줄로 알 거 같다. 하지만, 사실 이달에 주로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은 양대 해석학자인 가다머와 리쾨르여서, 그간에 안 갖고 있던 이들의 책과 연구서를 10여권 이상 복사했다(해서, 두 사람의 책을 모두 합하면 30권쯤은 되는 거 같다. 이젠 읽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어느새?). 어제부터는 리쾨르의 <악의 상징>(문학과지성사)을 영역본과 대조해서 읽기 시작했다(‘문학과 악’ 혹은 ‘문학 속에 나타난 악’이란 주제에 관심을 갖게 되어서이다).

94년에 초판이 나온 이 책은 리쾨르의 책으론 비교적 많이 팔리고 있나 본데(문지의 ‘우리시대의 고전’ 시리즈에 들어가기도 하고), 사실 번역은 별로 맘에 들지 않는다. 출간당시 프랑스에 유학중이던 한 선배가 번역이 엉망이라고 핀잔을 준 적이 있는데, 그 얘기를 듣고 내가 책을 안 샀는지, 아니면 책을 산 뒤에 그 얘기를 들어서 낭패감이 들었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아서, 책을 (어쩌면 다시) 사면서도 찜찜하기는 했는데, 역시나 책을 읽으면서 영 개운하지가 않다(이런 걸 ‘투덜대며 겨자 먹기’라고 한다).

본문 시작부터 오역이 나오는 거야 예사로운 일이지만(영어로는 guilt로 옮겨진 것을 우리말로 ‘허물’로 옮긴 것에도 동의하기 어렵다), 역자는 리쾨르의 모든 문장을 단문으로 쪼개서 번역하고 있다. 역자인 양명수 교수는 권택영 교수 뺨치는 스타카토 문체를 구사하는데(문장의 짧음은 혹 생각의 짧음을 반영하는 건 아닌지), 그거야 자기 스타일이라고 쳐도 리쾨르의 문체마저 완전히 자기 스타일로 바꾸어놓은 것은 좀 납득하기가 어렵다. 해서, 책의 저자는 리쾨르라기보다는 차라리 그에게서 영감(리쾨르의 표현을 응용하자면, false-inspiration)을 받은 양명수라고 해야 더 타당할 거 같다(주여, 오역은 흠입니까, 죄입니까, 허물입니까?). 혹 이 책을 읽었거나 읽을 계획을 갖고 계신 분들은 이 점을 고려하시기 바란다.

 

 

 

 

(15) 각설하고,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로 돌아오자. 계속해서 96쪽이다. 지난번에 카린의 상징적 자살 ‘행위’까지 했는데, 거기서 act와 action의 구별에 유의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덧붙여서 act와 구별해야 하는 것이 ‘행위로의 이행’ 혹은 ‘행위로의 이동’이라고 번역되는 passage a l'acte(a에 붙은 강세 부호는 생략했다)이다. 이건 영어로 passage to the act인데, 지젝은 보통 불어 그대로(이탤릭체로) 쓴다. 정신의학에서는 정신병적인 충동적 행동을 그렇게 부르는 거 같은데, 라캉-지젝은 외연을 좀 확대해서 사용한다(D. 에반스의 <라캉정신분석사전> 참조).

여기까지는 그래도 괜찮지만, 사정은 조금더 복잡하다. 에반스에 따르면, 라캉은 프로이트의 Agieren(행동화)의 번역어로 사용되던 passage a l'acte에 조금 다른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둘을 구별한다. 즉 영어로 하자면, 라캉은 acting out과 passage to the act를 구별한다. 전자는 대타자에게 보내는 상징적 메시지이고, 후자는 대타자로부터 실재의 차원으로 도주하는 것이다. “따라서 행위로의 이행은 상징적 그물망으로부터의 탈출이고, 사회적 연대의 해체이다.”(이것이 지젝이 ‘자유’라고 부르는 것 아닌가?) 여기서 내가 좀 헷갈리는 것은 지젝과 라캉의 용어 사용이 일치하지 않는 거 같기 때문이다. 즉 라캉의 acting out과 passage to the act의 구별에 대응하는 것이 지젝에게는 passage to the act와 act의 구별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내가 무심코 읽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지젝에게서 ‘acting out’이란 말은 주목하지 못했다).

적어도 에반스의 설명에 기댈 때 그러한데, 가령 96쪽에서 지젝은 “현실에서의 자살은 상징적 소통의 그물망 속에 붙잡혀 있다. 스스로를 죽임으로써 주체는 큰 타자에게 메시지를 보내려 시도한다. 즉 그것은 죄의식의 승인, 정신을 맑게 하는 경고, 감상적인 호소로서 기능하는 행위인 반면, 상징적 자살은 주체를 주체들 간의 회로로부터 배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하여 ‘현실에서의 자살’(영어 표현은 모르겠다. ‘suicide in reality’일까?)과 ‘상징적 자살(symbolic suicide)’을 구별하고 있는데, (라캉식 구별에 따르면) 전자가 acting out이고, 후자가 passage a l'acte 아닌가? 그런데 지젝은 이 후자(상징적 자살)를 act라고 부른다(여기까지가 나의 추론인데, 내용을 자세히 아시는 분은 알려주시길). 해서, 요컨대 지젝을 읽을 때, act(행위)와 action(행동), 그리고 passage a l'acte(행위로의 이행)이 조금씩 다른 의미를 갖는다는 데 유의해야겠다.

(16) 앞의 인용문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면, ‘정신을 맑게 하는 경고’는 ‘a sobering warning’의 번역인데, 좀 무심한 번역이다. 이 경고는 자살에 의해서 촉발되는 것인데, 자살이 우리의 정신을 맑게 하는가? 나로선 동의하기가 어렵다. ‘정신이 바짝 들게 하는 경고’이라거나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경고’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17) 이어지는 문장, “그러므로 <스트롬볼리>가 깔아놓은 함정은 스스로를 ‘명백한’ 것으로서 제공하는 그것의 종결부를 읽는 것에 있다.”는 좀 어색하다. 원문은 이렇다: “The trap laid by consists therefore in the reading of its end that offers itself as 'obvious'.” 다시 옮기면, “<스트롬볼리>의 함정은 이 영화의 결말이 그 자체로 너무도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는 걸로 보는/읽어내는 데 있다.” 그러니까, 함정은 너무도 명백하고 당연한 결말이 아닐까라고 보는 데 있다. 반면에, 지젝은 이 영화의 결말이 모호하며 확정적이지 않다고 본다. 왜냐하면, “영화는 카린이 새로운 상징적 정체성에서 그녀의 장소를 발견하기 전에, 새로운 수행문, ‘새로운 창립사’ 앞에서 끝”나기 때문이다. 여기서, ‘장소(place)’는 ‘자리’라고 옮기는 게 더 적절해 보이고, ‘새로운 창립사(founding word)’는 따옴표가 잘못 쳐져 있는데, 나라면, “새로운 ‘자기정립의 말’”이라고 옮기겠다.

(18) “그렇지만, 라캉이 강조하는 바는, 그러한 상징적 자살이라는 ‘영점’의 통과는 이런 이름을 받을 가치가 있는 모든 행위 속에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에서 ‘이런 이름’은 무얼 받는 말일까? 우리말 문법에 따르자면, 이런 이름이 가리키는 건 앞에 나오는 ‘영점’이나 ‘상징적 자살’이다. 하지만, 원문에서 그것이 가리키는 건 ‘행위’이다. 직역을 하다보면, 이러한 번역투의 오역이 자주 나온다. 다시 옮기면, “... 상징적 자살이라는 ‘영점’의 통과는 ‘행위’라는 이름에 값하는 모든 행위 속에 작동하고 있다...”

(19) 98쪽에서, ‘잠정적인 엄폐(temporary eclipse)’는 ‘일시적인 소멸’로 옮기고 싶고, ‘행위는 덜 수 없는 위험에 의해 정의된다’에서, ‘덜 수 없는 위험(irreducible risk)’은 거의 ‘환원불가능한 위험’이라고 자동번역되지만, 문맥상 ‘제거할 수 없는 위험’이라고 옮기고 싶다. 이 대목은 행위의 정의와 관련하여 음미해볼 만하다. 지젝에 의하면, 행위의 최종결과는 궁극적으로 무의미하며, 엄밀히 말해서, 순수행위로서의 절대적인 거부(NO!)와 관련하여 부차적이다(strictly secondary in relation to the NO! of the pure act).

그리고 그에 따른 각주 26)도 중요하다. <햄릿>의 대사이기도 한, ‘out of joint’(탈구되어 있는 <시간>)는 데리다에게서도, 들뢰즈에게서도 아주 중요한 문구이므로, 이에 대한 설명은 주의해서 읽어둘 필요가 있다. 99쪽 연속되는 각주에서 “사물이 항상 ‘자기 자리를 원하는(wanting (at) its place)’ 우주”는 “사물이 항상 ‘자신의 장소에 자리하기를 원하는’ 우주”라고 하면 더 이해가 쉬울 거 같다. 즉 사물들이 제자리에 놓여 있지 않기 때문에, 자기 자리로 돌아가려고 하는 우주이다. 마찬가지로, 피투적 존재로서의 현존재(Dasein)란 자신이 있어야 할 장소에 있지 않다고 지각하는 존재, 즉 out of joint되어 있는 존재이다. 모처럼 하이데거 전공자로서의 지젝이 한마디 하고 있는 대목이다.

(20) 100-102쪽까지 이어지는 대목은 전부 ‘행위’의 구체적인 사례들이다. 흥미로운 것은 101쪽에서 행위의 범례적 사례들이 ‘여성적’이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안티고네를 유력한 예로 제시하는 부분이다. 지난번 방한 강연회 때, 이 책의 역자 주은우가 지젝에게 질문했던 내용이기도 한데(당신은 안티고네의 행위를 행위의 모범적인 모델로 간주하는가?), 이에 대해서 지젝은 안티고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은 다소간 부정적인 쪽으로 바뀌었다고 답변한 바 있다. 어쨌든 이러한 ‘여성적’ 제스처는 프랑스의 레지스탕스이자 가톨릭 신비주의자 신비주의자 시몬느 베이유에게까지 이어진다.

그런데 이 베이유가 런던에서 ‘자살적인 굶주림’에 의하여 삶을 마쳤다고 돼 있는데, 못 먹어서 죽은 게 아니라 안 먹어서 죽은 것이므로, ‘자살적인 음식거부’라고 해야 온당할 거 같다. 그 다음, 102쪽의 마지막 문장에서 ‘절망적인 시도(desperate attempt)’는 ‘필사적인 시도’라고 고치고 싶다. 아무튼 요 몇 페이지는 ‘행위’란 개념을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하면서도 유익하기 때문에(더불어 재미있고 쉽게 이해된다) 반드시 참조할 필요가 있다...

(2절 ‘세계의 밤’은 또 언제 다루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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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이래저래 바쁜데다가 심난한 일들이 쌓여가고 있지만, 벌여놓은 일이어서 마저 매듭을 짓기로 한다.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 85쪽이다. 각주13) 중간쯤, “외부의 우연한 사건에 의해 연결되는 커플은 처음에 사랑에 빠진 듯이 보이게 하며, 그 후 한 단계씩 외면적인 연결이 진정한 사랑으로 자란다.” 이건 앞에서 얘기된 ‘상징적 동일시의 변증법’을 다시 요약/반복하고 있는 대목인데, “사랑에 빠진 듯이 보이게 하며(first pretends to be in love)”는 좀 이상한 번역이다(pretend를 왜 ‘가장하다’라고 번역하지 않았을까?). “처음에는 사랑에 빠진 것처럼 서로 가장하지만”이란 뜻이다. 즉 가장(흉내)으로 시작했지만, 그것이 진정한 사랑으로 발전해간다는 것.

(10) 이제 다루어지는 영화 <유럽 ’51>의 주인공은 로마의 부유한 가정주부 이레네이다. 그녀는 사교생활에만 관심을 쏟는데, 그녀의 무관심에 대해 보복이라도 하듯이 어린 아들이 자살한다. 죄의식에 사로잡힌 그녀는 과거의 모든 생활을 청산하고, 공장에서 저임금으로 일하면서 빈민(역자는 ‘빈자’라고 옮겼다)들을 돕는다. 하지만, 온전한 위안을 얻지는 못한다. 좀도둑을 신고하지 않고 자수를 권하다가 그녀는 법정에 서게 되고, 보호감호 처분을 받은 후에 정신병원에 수감된다. 감방에 갇혀 있는 그녀의 주위로 그녀의 도움을 받았던 빈민들이 모여들면서 그녀를 새로운 성녀라고 부르고 영화는 끝난다.

이 영화에 대한 ‘명백한’ 독해, 즉 ‘즉자적인’ 이해는 이레네가 죄의식의 압력 때문에 무너져 내렸다는 것이다(Irene breaks down because of the unbearable pressure of guilt). 물론 지젝은 죄의식의 진정성을 물으면서 이러한 독해를 뒤집는다. 지젝의 요지는 87쪽에 상술돼 있는데, 그에 따르면(또 정신분석에 따르면), 우리는 큰 타자(the Other)에 편집증적으로 죄의식을 투사함으로써 우리가 맡아야할 책임을 제거하기도 하지만, 거꾸로 보다 ‘근본적인 외상’(radical traumatism; 역자는 ‘진정한 외상성’이라고 옮겼다)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서(역자는 ‘탈출’로 계속 옮겼는데, 부정적인 뜻이므로 ‘도피’가 더 타당하다) 죄의식을 뒤집어쓰기도 한다. 즉 우리는 죄의식‘으로부터’ 도피하기도 하지만, 죄의식 ‘속으로’ 도피하기도 하다(이에 대한 원문이 내 책엔 누락돼 있다).

(11) 뒤로 넘어가기 전에, 86쪽의 각주14)는 문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오역이다. “우리로 하여금 <독일 영년>에서 에드문트의 자살에 대한 로셀리니의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없는 듯한, 심지어 냉소적이기까지 한 논평을 ‘진정한
희망의 빛’으로 위치지을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이레네의 행위의 부산물로서 출현한 이 새로운 신자 공동체이다.” 좀 길지만 이에 대한 원문은 이렇다: “It is this new community of believers emerging as a by-product of Irene's act that enables us to locate properly Rossellini's seemingly unintelligible, even cynical comment on Edmund's suicide in as 'a true light of hope'” 그리고 인용문이 이어지는데, 이 문장은 어려운 구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It-that 강조구문이다), ‘이해할 수 없는’ 문장으로 번역돼 있다.

번역의 요지는 “로셀리니의 논평을 ‘진정한 희망의 빛’으로 위치지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이레네의 행위의 부산물로서의) 새로운 신자 공동체이다”인데, 'a true light of hope(진정한 희망의 빛)'이 받는 것은 ‘comment(논평)’이 아니라 ‘Edmund's suicide(에드문트의 자살)’이다. 해서 다시 옮기면, “<독일 영년>에서의 에드문트의 자살을 ‘진정한 희망의 빛’이라고 한, 로셀리니의 언뜻 이해할 수 없는, 심지어 냉소적이기까지 한 논평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바로 이레네의 행위의 부산물로서 출현한 이 새로운 신자 공동체이다.”

(12) 같은 각주에서, 중간의 ‘희망의 강세(accent of hope)’는 좀 어색하다. ‘희망에 대한 강조’가 어떨까 싶다. 그리고, ‘자살적인 근본적 움츠러듦의 행위(the suicidal act of radical withdrawal)’에서 ‘withdrawal’은 이후에 여러 차례 나오는 단어인데, 역자는 ‘물러남’ 등으로 매번 다르게 옮기고 있다. 가급적이면 통일시켜줄 필요가 있고, 나는 ‘물러남’이나 ‘철회’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뒤로 나앉는 행위를 말하는바, 이것이 자살적인 행위, 혹은 상징적 자살 행위이다(이 절의 제목은 “왜 자살은 유일한 성공적인 행위인가?”이다).

(13) 이후 88-89쪽에서 설명되는 것은 이데올로기적인 ‘큰 타자’의 기능이다. 그것은 ‘숨은 작인(hidden agency)’이면서 동시에 ‘순수한 외관의 작인(the agency of pure semblance, of an appearance)’이다. 그리고 90-92쪽에서 이 순수한 외관에 대한 강박적인 논리의 끝장을 보여주는 사례로 들고 있는 것이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셰스쿠의 몰락이다. 대중(mass: 역자는 ‘군중’이라고 옮겼는데, 이건 선택의 문제이지 싶다)이 그를 ‘큰 타자’로 간주하는 게임을 더 이상 계속하려고 하지 않게 되자 그는 무력하게 몰락했다(그는 원래 무력했다). 원죄의 메커니즘도 마찬가지인데, 신은 항상 이미 죽어 있지만(‘항상 이미’라는 건 데리다도 아주 즐겨 쓰는 문구이다), 인간이 원죄의식을 떠맡음으로써 그는 ‘비존재’의 경험에서 면제된다.

다시 <유럽 ’51>로 와서, 93쪽. 결론적으로 “그녀(이레네)의 시도는 실재계를 죄의식의 상징적 세계로 통합함으로써, 그것을 이데올로기적 장 내에 위치시키고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실재계의 외상적인 조우(그녀의 아들의 자살 행위)를 되찾으려는 절망적인 시도일 뿐이다.” 원문은 "Her attempt ... is to recover the traumatic encounter of the Real (her son's suicidal act) ..."로 나가는데, 나는 ‘recover’가 (물론 ‘되찾다’ ‘회복하다’란 뜻도 있지만) 여기선 ‘보상하다’란 뜻으로 옮겨져야 한다고 본다(외상적인 조우를 되찾고자 한다는 건 논리적으로 좀 이상하다).

‘절망적인(desperate)’은 ‘필사적인’으로 옮기고 싶고. 즉, 이레네는 (아들의 자살이라는) 실재와의 외상적인 조우를 상징계 속에 통합함으로써(간단히 말하면, 어떤 ‘의미’를 부여/할당함으로써) 그것을 보상하고자 시도한다. 조금 내려가서 ‘목적격적인 잔여-배설물(objectival remainder-excrement)’이란 표현이 나오는데, 언어학을 전공한 친구에게도 확인해 본 결과 objectival이란 단어는 ‘목적격(objective)’의 형용사로 쓰이지 않는다. 그냥 ‘대상적’이란 뜻이지 않을까 한다.

(14) 이제 세번째 영화 <스트롬볼리>. 에스토니안 망명객 카린의 이야기인데, 그녀는 2차대전시 이탈리아의 피난민 수용소에서 탈출하기 위해 스트롬볼리라는 화산섬에서 온 가난한 어부와 결혼한다. 그런데 섬에서의 가부장적인 폐쇄적인 생활에도 숨이 막힌 카린은 분화구가 있는 산길을 따라가다가, 분화구에서 올라온 증기에 질식되어 사라진다(“오 신이시여!”란 소리와 함께). 그녀가 떠나는 것인지 마을로 되돌아가는 것인지 이탈리아판에서는 열린 결말로 남겨놓는다. 이러한 결말에서 보면, 카린은 어떠한 행동(action)도 완수하지 못했지만, 그녀의 행위(act)는 완수되었다(action과 act는 그렇게 구별된다).

지젝이 계속 반복해서 얘기하는바, 이 행위란 상징적 자살(=zero point) 행위이다. 96쪽에서 행위에 대해 재정의하고 있는 대목: “라캉적 의미에서의 행위란 상실 속에는 상실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됨으로써 우리가 포기 자체를 포기할 수 있게 되는 이 물러남일 뿐이다.”(And the in the Lacanian sense is nothing but this withdrawal by means of which we renounce renunciation itself, becoming aware of the fact that we have nothing to lose in a loss.) 오역이랄 건 없는데, 조금 풀어서 다시 번역하면, “라캉적 의미에서의 ‘행위’란 바로 이러한 물러남(철회)일 뿐인바, 어떤 상실 속에서 우리가 상실할 것이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우리는 이 물러남을 통해서 포기라는 것 자체를 포기한다.”(포기할 게 없기 때문에.) 어느 쪽이든 자신이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면 그만이다.

이래가지고야 도대체 언제 끝날는지 알 수 없지만, 오늘은 여기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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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하 지젝은 로셀리니가 버그만을 주연으로 찍은 영화 <독일 영년>, <유럽 ’51>, <스트롬볼리> 3부작을 차례로 분석한다(유감스런 것은 내가 이들 영화들을 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내가 본 버그만 주연의 영화는 (헐리우드 영화인)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가스등> 등이다). 77쪽에서는 예비적으로 <로베레 장군> 얘기를 하는데, 독일 게슈타포가 전설적인 빨치산 로베레 장군을 닮은 좀도둑에게, 레지스탕스의 기밀을 빼내기 위해서 로베르 장군 역을 시키지만, 이 좀도둑이 진짜로 로베레 장군으로서 죽는다는 내용이다(하는 수없이, 독일군은 그를 ‘로베레 장군’으로서 총살한다).

가운데 부분에서, “독일인들에게 그들이 찾는 이름을 제공해주는 것이 아니라...”에서 ‘이름(names)’은 ‘이름들(명단)’로 복수형이 돼야 한다. 물론 이 ‘이름들’은 게슈타포가 찾는 레지스탕스 조직원들의 이름이다. 그러니 단수가 아니라 복수가 돼야 한다. 이 ‘가짜 로베레 장군’ 사례를 일컬어 지젝은 ‘상징적 동일시의 변증법’(혹은 ‘상징적 위임 떠맡기의 변증법’)이라고 부른다. 78쪽은 그에 대한 자세한 부연설명이다.

(5) “이러한 변증법에서 도출되는 결론은 모든 인간 행위(성취, 실행)는 궁극적으로 하나의 행위(자세, 가장)일 뿐이라는 통념적인 지혜에 정확히 반대되는 것이다.” 이게 요점인데, 나는 ‘자세(posture)’란 번역이 맘에 들지 않는다. 이건 가장(pretence)과 유사한 의미로서 ‘포즈’라고 옮기는 게 어떨까. 그러니까 우리의 통념적/상식적 지혜란 것은 모든 행위가 다 (진정성이 결여된) 포즈라는 것이다. 하지만, 상징적 동일시의 변증법에 의해서 이러한 지혜는 전복된다. 이어지는 문장, “우리가 뜻대로 할 수 있는 유일한 진정성은 인격화의 진정성, ‘우리의 행위(자세)를 진지하게 취하기’가 갖는 진정성이다.”(78쪽) 이것의 원문은 이렇다: “the only authenticity at our disposal is that of impersonation, of "talking our act(posture) seriously.”(34쪽)

역자는 ‘impersonation’을 ‘인격화’라고 옮겼는데, 물론 이 단어는 ‘인격화’ ‘의인화’란 뜻도 있지만, 여기서는 ‘흉내’란 뜻이다. 앞의 사례에서 좀도둑이 로베레 장군을 ‘흉내’냈다고 말하지, ‘인격화’했다고 말하지 않는다(‘인격화’란 ‘사물화’와 반대되는 말로서, 말 그대로 사물에 인격을 부여하는 걸 말한다). 그래서 다시 옮기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진정성은 흉내의 진정성, 즉 ‘우리의 (연기)행위(혹은 포즈)를 진지하게 하기’의 진정성이다.”(로베레 장군 역을 정말 진지하게 연기한 좀도둑처럼!)

여기에 붙어 있는 각주5)에 바로 나오는 것이지만, act란 말은 굉장히 다의적이다. 그것은 상상적 차원에서 fake, show, performance이고, 실재의 차원에서 doing, exertion, stroke이며, 상징적 차원에서는 edict, decree, ordinance, enactment이다. 또한 독일어에서 ‘Act’는 누드화(the painting of a nude human body)이기도 하다(영어에서도 act는 성행위란 뜻을 내포한다). 이상을 종합해서, 나는 ‘act’가 우리말로는 대략, 연기, 행위, 성행위, 법(조문) 등으로 번역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앞부분에서 ‘행위’ 대신에 ‘(연기)행위’를 고른 것은 그러한 문맥을 좀 살리기 위해서이다.

(6) 79쪽부터는 본격적으로 3부작 얘기이다. 지젝은 이 세 편의 영화에는 어떤 미끼(함정)가 있다고 말한다. 당연히 세 영화에 대한 손쉬운 독해/이해를 피해야 할 것이다. “즉, 만일 우리가 ‘자연발생적인’ 방식으로 그것을 지각한다면, 우리는 불가피하게 길을 잃게 되는 것이다.” 이것의 원문은 “if we perceive it in a 'spontaneous' way, we are inevitably led stray.”이다. 뭐가 문제냐고? 내가 맘에 안들어 하는 건, “‘자연발생적인’ 방식”이란 말이다. 번역은 단어를 옮기는 것이 아니라, 문맥을 옮기는 것이다(더 확장시켜서 거창하게 말하면, 문화를 옮기는 것이다). 일대일로 대응하는 단어들을 옮긴다고 해서 문맥이 옮겨지는 것은 아니다. 영어를 잘한다고 해서 번역을 잘 하는 게 아닌 것은 영어실력이 이러한 문맥에 대한 이해력을 보증해 주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가령, 한 여자친구가 <동갑내기 괴외하기> 같은 영화를 보고(오늘자 <씨네21>을 보니까 평론가 정성일이 이 영화 등과 ‘귀여니’ 현상에 대해서 다소 흥분한 글을 썼던데) 순진하게 받아들이며 재미있어 할 때(이 영화 정말 짱이다!), 우리는 그 여자친구가 이 영화를 ‘자연발생적’으로 이해했다고 말하지 않는다(“넌 영화를 너무 자연발생적으로 이해해!”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spontaneous' way”란 표현이 이 문맥에선 ‘깊은 생각(고려) 없이’란 뜻이므로, 똑같이 좀 현학적인 어휘이긴 하지만, 이럴 땐 ‘즉자적’이라고 하는 게 좋겠다. “즉, 만일 우리가 ‘즉자적인’ 방식으로 이 영화들을 본다면, 우리는 필시 길을 잃게 된다.”(원문에서 ‘it’이 받는 건 ‘each of these films’이다.)

(7) <독일 영년>의 내용은 1945년 점령지 베를린에서 10살된 소년이 나치 교사의 영향 하에 아버지를 죽이고 방황하다가 아파트 건물에서 뛰어내려 자살하고, 콘크리트 폐허 더미 속에서 발견된다는 것이다. 이 영화의 핵심은 이 마지막 장면이다. “영화 전체가 그것을 위해 찍혔던 장면이란 물론 베를린의 폐허 속을 헤매는 에드문트의 마지막 방황과 그의 자살이다.”(80쪽) 이것의 원문은 “The scene for which the entire film was shot is of course the final wandering of Edmund in the ruins of Berlin and his suicide.”(35쪽)이다.

번역문에 내용상 하자가 있는 건 아니다. 사소한 거지만, 우리말에서 ‘그것’이란 지시대명사는 앞엣말을 받지 뒤엣말을 받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이 번역문은 말 그대로 번역투의 문장이다. 좋은 번역, 좀더 섬세한 번역은 그러한 (우리말로는 어색하거나 비문법적인) 번역투의 흔적을 가급적 드러내지 않는 번역이다. 해서, 나라면, “이 영화 전체의 초점은 물론 베를린의 폐허 속을 헤매는 에드문트의 마지막 방황과 그의 자살 장면에 맞추어져 있다.”라고 옮기고 싶다.

이 영화에 대한 즉자적인 독해는 한 어린 소년이 못된 교사의 사주에 의해서 (부친살해라는) 엄청난 범죄를 저지르고 그 죄의식으로 자살했다는 것이다(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죄지은 자가 벌받는 이야기라고 읽는 식이다). 하지만, ‘뒤집기의 천재’인 지젝은 이 에드문트의 (자살)행위를 “어떤 종류의 이데올로기적인 ‘충분한 지반’에도 정초되지 않고 오직 자신에게만 정초된 행위”로서의 ‘자유의 행위’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그런 행위에서 에드문트는 ‘성자(saint)’이다.

(8) 역시 내용에는 지장이 없는 지적인데, 81쪽에서 “<독일 영년>을 만든 지 2년이 지난 다음 로셀리니는 성 프란시스에 관한 영화 <프란체스코>를 찍는다.”는 어떤가. 여기서 ‘프란시스(Francis)’는 이탈리아의 유명한 수도사 프란체스코의 영어식 표기이다. 이 번역의 우스꽝스러움은 가령, “플레이토(Plato)에 관한 유명한 영화 <플라톤>”이라고 대치시켜보면 알 수 있다. 당연히 ‘성 프란시스’는 ‘성 프란체스코’로 바뀌어야 한다. 이런 부적절한 번역은 (<사랑과 증오의 도착들> 번역에 대해서도 지적한 바 있지만) 91쪽에서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를 영어식 ‘부카레스트’로 옮긴 데에서도 반복된다.

한편, 각주 7)에서 ‘순수 지출점(a point of pure expenditure)’. ‘expenditure’는 바타이유에게서 흔히 ‘낭비’나 ‘탕진’으로 번역되는 단어이다. 하지만, ‘a point of pure expenditure’가 정확하게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다. <저주의 몫>에 나올 거 같기도 하고... 이 각주의 뒷부분(82쪽)에는 ‘인디언 신민들(Indian subjects)’란 말이 나오는데, 남미의 원주민은 ‘인디언’이 아니라 ‘인디오’라고 번역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subject'도 이 문맥에서 '신민들'이라고 옮기는 것은 너무 고상해 보인다. 해서, 나라면 '피지배 인디오들'이라고 옮기고 싶다.

(9) 82쪽 본문 맨아래줄. “모든 ‘병리적’ 동기화로부터 구출된 의지”에서 ‘구출된(delivered)’은 ‘해방된’으로 옮기고 싶다. 이후에 85쪽까지는 별 문제 없이 읽힌다. 84-5쪽에서 지젝은 로셀리니의 <독일 영년>이 어째서 히치콕의 <로프>보다 뛰어난 작품인가를 해명한다. <독일 영년>의 상황에 대입시켜서 말하자면, <로프>는 소년을 사주한 나치 교사에 대해서, “그러니까 애들한테 말을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라는 교훈을 제시하는 정도에 머문다는 것. 때문에, <로프>에는 ‘자유의 지점(point of freedom)’이 결여돼 있다.

(<유럽 ’51>부터는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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