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북리뷰들에서 크게 다루어진 책은 에이미 추아의 <제국의 미래>(바이북, 2008)다. 어제 지젝의 <지젝이 만난 레닌>(교양인, 2008)을 먼저 손에 들었기 때문에 나로선 여력이 없었는데, 550여쪽에 이르는 국역본의 부피가 미리부터 의욕을 꺾는 면도 있다(지젝의 책은 587쪽에 이르지만 개인적으로 절반은 한번 읽었던 터라 부담이 덜하다). 그럼에도 관심도서로 올려놓고 리뷰를 챙겨둔다. 더불어 한겨레21에 연재되고 있는 '김창진의 제국의 그늘'도 연상이 되기에 이번주 꼭지도 같이 옮겨놓는다(http://h21.hani.co.kr/section-021165000/2008/05/021165000200805220711050.html).

경향신문(08. 05. 24) 힘의 오만, 미국이 흔들린다

고대 페르시아와 로마, 동양의 당(唐)과 몽골, 서양의 네덜란드와 대영제국, 그리고 현대의 미국까지. 이들은 공통점이 하나 있다. 군사·경제적으로 세계적인 패권을 휘두른 극소수 국가들이라는 것. ‘제국의 미래’(원제 Day of Empire)는 바로 이들 초강대국(제국)을 다룬 책이다. 미국식 세계화의 위험성을 고발한 전작 ‘불타는 세계’(2002년)로 큰 반향을 일으켰던 저자(예일대 법학과 교수)는 이 책에서 제국의 흥망성쇠를 추적하면서 한 사회가 어떤 경로를 거쳐서 초강대국이 되고 또 쇠퇴하는지를 탐구했다.

책의 논지는 간단명료하다. 성공한 제국들은 하나같이 다원적이고 관용적이었다. 역으로 제국의 쇠퇴는 불관용과 외국인 혐오, 인종·종교·민족적 순수성에 대한 촉구와 함께 시작됐다. 저자는 “한 사회가 세계적 차원에서 경쟁자들을 물리치기 위해선 인종·종교·배경을 따지지 않고 인재들을 끌어들이고 동기를 부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관용’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마을이란 마을은 죄다 쑥대밭을 만든 몽골이나 적들을 말뚝에 꿰어 죽인 페르시아가 관용적이라고? 저자가 말하는 관용은 ‘인권’과 관련된 현대적인 의미가 아니다. 인종·종교·민족 등에서 이질적인 사람들이 공존·번영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자유를 뜻한다. 경쟁자들과 비교해서 더 관용적이냐, 아니냐 하는 ‘상대적’ 관용이다.

제국의 지배자들은 인종·종교·민족을 뛰어넘어 정치·문화적으로 피지배자들을 동등하게 대우했다. 최초의 패권국가 페르시아는 새로운 왕국을 정복하면 해당 지역의 법률과 전통을 포용하고 언어·종교·예식을 용인했다. 또 인종이나 종교에 개의치 않고 최고의 실력을 가진 장인·사상가·노동자·전사들을 동원했다. 이 같은 전략은 이후 등장한 제국들에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시민권’을 통해 피정복민을 공동체의 충실한 구성원으로 바꾼 로마는 “피지배민들의 충성심을 이끌어낼 수 있는 공통의 정체성을 만드는 데 가장 성공했던 제국”으로 평가된다.

물론 저자는 관용이 초강대국의 ‘충분조건’은 아니라고 말한다. 지리·인구·천연자원·지도력 등의 요소들이 합쳐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관용은 초강대국의 ‘필수 조건’이다. 역사상 인종주의와 종교적 광신을 토대로 한 사회가 세계적인 패권국가가 된 사례는 없다. 20세기 독일과 일본이 대표적이다. 또 ‘이단 심문소’로 대표되는 16세기 스페인의 불관용 정책은 비기독교도 주민들을 억압하고 추방해 인적 자본과 금융·사회자본을 잃고 세계 재패의 기회를 날려버렸다. 반면 유럽 전역이 종교적 광신에 휩싸여 있던 1579년 종교의 자유를 건국헌장에 포함시킨 네덜란드는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 전역으로부터 종교적 난민을 유인하는 ‘자석’이 되면서 초강대국으로 성장했다.

저자가 정작 말하고 싶은 것은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지만 그 지위가 흔들리고 있는 미국이다. 미국은 ‘이민자들의 나라’로는 처음으로 초강대국의 지위에 올랐다. 재능있고 진취적인 개인들을 배경에 관계없이 흡수해 그들에게 합당한 보수를 제공한 게 성공 요인이었다. 1990년대 미국을 초강대국으로 끌어올린 IT혁명도 이민자들의 능력과 진취성에 대한 개방적인 태도 덕분이었다.

저자는 그러나 “2001년 9월11일 모든 것이 바뀌었다”고 단언한다. “미국 군사력의 중요한 역할”을 강조하고 “선제 행동”을 할 권리를 표명하는 등 강력한 개입주의·일방주의로 돌아섰다는 것이다. 저자는 특히 미국의 이민정책이 불관용으로 돌아선 데 우려를 나타낸다. 역사상 초강대국들은 자신들의 ‘진정한’ 혹은 ‘순수한’ 정체성을 거듭 단언하면서 동화가 불가능한 집단들에 대해 배타적인 정책을 채택하는 순간 무너졌다. 저자는 “이민자들을 모든 문제의 원흉으로 몰거나 미국의 성공을 앵글로색슨과 개신교의 가치관에서 찾으려는 시도들은 그릇된 것”이라고 비판한다.

미국의 그늘 아래 살고 있는 수십억 사람들과 미국을 단단히 묶어줄 정치적인 ‘접착체’가 없다는 것도 제국으로서 미국이 직면한 문제다. 오히려 최근 미국은 자유시장과 민주주의를 포함한 서구적인 관용정책을 수출하려고 하면서 거센 ‘반미주의’의 저항에 직면해있다. 이 때문에 저자는 “미국이 다른 나라의 정권을 변화시키고 미국식 제도를 강제하는 일에 세계 최고의 군사력을 쓰”거나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세계의 패권을 지키겠다는 의도를 떠벌리고 다니는 것”에 우려를 표시한다. 나아가 미국이 전 세계를 자신과 똑같은 모습으로 개조하려는 무의미한 일을 자청하기보다는 ‘세계를 위한 본보기’가 되려고 노력하는 편이 훨씬 낫다고 조언한다. “미국이 초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은 초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려는 노력을 중단하는 것뿐”이라고도 꼬집는다.

책은 초강대국 후보라 할 만한 중국, 유럽연합, 인도의 가능성도 탐색한다. 그런데 중국은 뿌리깊은 외국인 혐오와 자민족중심주의에, 유럽연합은 이슬람교도에 대한 두려움과 큰 장벽이 존재하는 이민 정책에 발목이 잡힐 것으로 전망한다. 오히려 수십개의 언어와 수천개의 종교가 공존하는 세계 최대의 민주주의 국가 인도에서 더 큰 가능성을 두는 느낌이다.

이 책은 중국계 미국인 2세인 저자가 자신의 부모와 가족을 이끌어온 “미국의 관용에 바치는 책”이다. 저자는 이 책이 “미국이 성공할 수 있었던 진정한 비결은 언제나 예외 없이 관용이었다는 것과 지금 그 비결을 잃어버릴지도 모를, 그 어느 때보다 위험한 상황에 놓여있음을 경고하는 경고문”이라고 밝혔다.(김진우기자)

한겨레21(08. 05. 22) '이민자의 나라’에 울리는 조종

이국 땅 시애틀에서 마흔한 살 생일을 맞던 날 이른 아침, 미국 이민세관단속국(ICE) 관리들의 기습 체포로 애나 레예스(41)의 아메리칸드림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그와 함께 두 딸과 두 아들도 즉각 멕시코로 추방됐다. 만약 그의 수중에 밀수업자에게 건네줄 약간의 돈푼이라도 남아 있었더라면, 같은 처지에 놓인 다른 추방자들처럼 국경도시 티후아나에서 버텨보다가 미국으로 다시 들어갈 기회를 노려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17년간 농장 일꾼과 호텔 청소부로 일하며 근근이 네 자식을 건사하다 졸지에 내쫓긴 그에게는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리하여 애나는, 지긋지긋한 가난을 벗어나고자 고등학교도 채 마치지 못하고 탈출했던 시골 마을로 죽기보다 싫은 발걸음을 옮기지 않으면 안 됐다. 지난 한 해 87만 명이 넘는 ‘동포들’의 행렬에 끼여 추방되는 것으로 그의 ‘불법 체류자’ 생활은 끝이 났다.

아스피린만 처방했어도…
용선 하빌(52)씨는 조국이 아직 가난에 허덕이던 지난 1975년 주한미군과 결혼해 ‘꿈의 나라, 풍요의 땅’ 미국의 플로리다에 합법적으로 정착했다. 하지만 33년이 흐른 지금, 그는 한국으로 추방될 신세로 전락해 애리조나의 감옥에서 세상과 거의 절연돼 있다. 암투병 경력이 있는 용선씨는 처음 감옥에 도착했을 때 이미 다리가 퉁퉁 붓는 심한 육종에 C형 간염, 조울증, 고혈압, 공황장애 등을 앓고 있었고 복통 증세에다 코피가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지난 1년 동안 직계가족의 면회도, 변호사의 접견도, 심지어 의사의 진료마저도 봉쇄되고 있다. 미국 영주권자인 그는 바로 미국 땅 한켠에서 ‘우리에 갇힌 동물’ 대접을 받으며 사경을 헤매고 있는 것이다.

승용차 안에서 마리화나가 발견돼 마약 소지 혐의로 13개월을 복역하고 지난해 3월 출소 예정이던 용선씨에게 닥친 불행은 어이없게도 ‘장물 취득’ 혐의였다. 이미 10년 전 일로서, 장물인지 모르고 귀금속을 구입했다는 진술이 참작돼 집행유예로 마무리 된 사건이었다. 그런데 뒤늦게 당국은 이 사소한 지난 일을 들추어 그를 추방대기자로 분류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제 다른 수많은 구금자들처럼 다시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감옥 안에 방치된 채 비극적인 생을 마감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프리카 가나 출신 미국 이민자였던 유시프 오스만은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5년간 합법적인 신분으로 로스앤젤레스에서 생활하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ICE에 체포돼 샌디에이고 외곽에 위치한 추방자용 구금자 감옥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동료가 위조 신분증을 소지하고 있다가 체포된 뒤에 당국은 그에게 밀수 혐의를 씌웠으나 그는 부인했다. 그럼에도 힘없는 한 아프리카계 이민자가 ‘국가안보’라는 무시무시한 명분으로 ‘제국의 법’을 집행하는 관리들에 맞서 철창행을 피할 수는 없었다.

감옥에 도착한 직후 시간제 간호사가 평소 의례적인 업무대로 유시프의 건강 상태를 컴퓨터에 입력했다. 하지만 그녀는 유시프의 상태에 관한 검사기록이 없는데도 실수로 ‘완료’ 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그리고 석 달 뒤, 유시프는 심한 가슴 통증을 호소하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같은 방 동료가 간수를 소리쳐 불렀으나 그는 건성으로 들여다보고 간호사를 불렀다. 간호사는 환자의 병력 기록이 없는 것을 보고 위급상태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유시프에게 진료 요구서를 작성하라고만 말했다. 아무런 조처도 취해지지 않았다. 상황이 심각한 것을 알아차린 유시프의 감방 동료가 다시 소리를 지르자 다른 간수가 왔고, 다시 간호사를 불렀다. 이번에는 그녀가 환자를 병원으로 이송하자고 했다. 그로부터 40분이 지나 간수가 휠체어를 가지고 왔으나, 너무 늦었다. 그때까지 간신히 헐떡거리던 유시프의 심장은 곧 멎어버렸다. 그리고 다음날, 검시 결과를 확인한 두 의사는 환자가 즉각 처치를 받았더라면, “아마도 아스피린 같은 기본 처방만 받았더라도 목숨을 건질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때와 장소 가리지 않고 합법 체류자까지
유시프의 어이없는 죽음도, 용선씨의 기막힌 불운도, 애나의 속수무책 추방도 오늘의 미국에서는 결코 드문 일이 아니다. 현재 미국 전역의 수용소와 감옥에 약 3만3천 명의 구금자들이 최소한의 인간적 대우도 받지 못하면서, 마치 아무 예고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다른 축사로 옮겨질 짐승처럼, 추방될 날짜를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 와중에 지난 5년간 83명의 억류자가 야만적인 시설에서 귀중한 생명을 잃었다. 그중 대다수는 40살 미만의 젊은이였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개선되기는커녕 앞으로 점점 더 악화될 조짐을 보인다는 데 있다. 9·11 이후 신설된 국토안보부 산하 ICE가 최근 멕시코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캘리포니아 같은 남부 주들에서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불법 체류자’ 단속 작전을 밀어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대중교통, 공장, 학원, 가정집 등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합법 체류자들까지 마구잡이로 잡아들이고 있다. 지난 5월12일에도 ICE는 중부의 아이오와주에서 경찰과 함께 헬기까지 동원해 육류포장 공장을 급습했다. 그 결과 단번에 300명 이상을 체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대부분 멕시코와 과테말라 출신인 그들은 곧바로 지역 감옥에 넘겨졌고 조만간 추방될 것이다. 조지 부시 정권이 추진하는 ‘테러와의 전쟁’이 완전히 빗나가, 실상은 미국의 제조업과 농업, 서비스업의 밑바닥을 받쳐주는 가난한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전면전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아메리칸드림의 파탄을 여실히 증거해주는 이들 수용소의 실태는, 1941년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 이후 12만 명의 일본계 미국인들이 황량한 억류시설에 강제 격리됐던 상황을 떠오르게 할 정도다. 일단 구금자 수용소에 갇히게 되면 심지어 확정된 살인범보다 변호사 접견이 더 어려울 정도며, 일부는 테러범으로 지목된 알카에다 조직원들이 감금된 쿠바의 관타나모 수용소보다도 열악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들은 ‘법치국가’ 미국에서 법률·의료적 보호의 완전한 사각지대로 떨어지게 된다.

미국의 비참한 추방자 수용소 실태를 폭로한 <워싱턴포스트>는 이런 상황이 9·11 이후 부시 정권이 아무런 준비도, 결과에 대한 예측도 없이 갑작스럽게 밀어붙인 정책 집행의 결과로 보고 있다. 수용소 안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간수와 의료진의 업무태만, 행정관리의 미숙, 구금자 기록 관리의 어처구니없는 부실함, 의사·간호사·기술자의 태부족은 피할 수 없는 현상인 것이다. 그럼에도 연방 관리는 “수용자 관리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한다.

살인범보다 변호사 접견이 더 어려워
이렇듯 아메리카 제국의 안보를 강화한다는 명분으로 추진되는 ‘테러와의 전쟁’은 ‘이민자의 나라’라는 미국의 오랜 정체성에 종말을 고하는 조종처럼 보인다. 그것은 1950년대 매카시즘 광풍 이후 반세기 만에 다시 나타난, ‘내부의 적’을 색출하는 데 골몰하다가 자기 자신이 파멸에 이르는, 국가기관의 발작 증세라고 할 수 있다. 발작이 지속되면 국가기관은 정상적인 기능을 상실하게 되고, 그 결과 국가안보는 더욱더 취약하게 될 것이다.(김창진 성공회대 교수·사회과학부)

08. 0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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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5-24 22:51   좋아요 0 | URL
텍사스,아리조나,뉴 멕시코...다 예전 멕시코 땅인데 이웃 잘 못 만나서 다 뺏기고 이제는 국경 넘으려고 목숨 거는 처지...정말 안됐어요.20년 전엔가 한참 유행한 Don De Voy의 가사 번역한 것을 몇 년 전 알게 되었는데 정말 뭐라 말할 수 없는 느낌이었어요.

로쟈 2008-05-24 23:23   좋아요 0 | URL
Don De Voy가 그런 가사였군요. 덕분에 알게 됐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5-25 00:11   좋아요 0 | URL
그 노래 부른 티시 히노히사 누나가 정말 이뻤어요.로쟈 님도 본 적 있죠? 이제 40대 아줌마가 되었겠네요.

로쟈 2008-05-25 11:23   좋아요 0 | URL
얼굴은 본 적이 없는데요.^^

노이에자이트 2008-05-25 22:49   좋아요 0 | URL
Don De Voy검색하시면 얼굴과 스페인어 원문 국역문 나옵니다.근데 50이 넘었다는 설도 있네요.

로쟈 2008-05-26 22:56   좋아요 0 | URL
네, 나이는 들어보이는데요.^^
 

에릭 홉스봄의 <혁명가 - 역사의 전복자들>(길, 2008) 출간 소식은 이미 다룬 바 있는데, 간단한 리뷰기사가 있기에 옮겨놓는다.

경향신문(08. 05. 24) 혁명의 빈자리 채울 저항의 세계화 주창

마르크스주의자이자 세계적인 역사학자인 에릭 홉스봄은 1917년에 태어났다. 공교롭게도 그가 태어난 해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이 성공했다. 공산주의 국가의 탄생과 흥망성쇠를 모두 지켜본 이 노학자는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저술활동을 하는, 지적으로 왕성한 정력을 지닌 인물이다.



자본주의가 태동한 18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역사에 대한 탁월한 통찰력을 제시한 역사3부작,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를 저술한 홉스봄은 2002년 ‘미완의 시대(원제 ‘흥미로운 시간’)’라는 자서전을 내놓는다. 그리고 자서전을 출간하기 한 해 앞서 홉스봄은 ‘혁명가, 역사의 전복자들’을 재출간한다.

‘혁명가, 역사의 전복자들’은 1961년부터 73년까지 홉스봄이 마르크스주의와 관련해 각종 매체에 기고한 평론과 논문, 강연을 모은 책이다. 자서전 출간에 앞서 스스로의 지적 작업을 성찰하고 20세기를 되돌아 보는 과정을 담았다. 마르크스주의가 마치 사형선고라도 받은 양 치부되는 요즘, 이 책은 ‘구닥다리’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와 세계화가 진행되고 빈부격차가 한층 심화되면서 그의 통찰력이 다시 빛을 발하고 있다.

이 책은 유럽 각국 공산주의 정당의 성공과 실패 사례, 마르스크주의가 노동운동에 끼친 영향, 게릴라 활동과 군부의 정치개입, 1968년 유럽의 혁명운동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혁명과 관계하는 대부분의 주제를 망라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광범위한 지적 활동이 가능한 이유는 그가 20세기를 온전히 관통했기 때문이다. 히틀러의 집권을 경험하고 아바나에서 체 게바라를 통역하고, 소련에서 스탈린의 시체를 직접 목격했던 ‘역사의 참여관찰자’가 전해주는 통찰이다.

그의 성찰에 울림이 있는 또 하나의 이유는 소련과 스탈린의 교조적 공산주의에 대해 혹독한 비판을 하며 역사를 끊임없이 객관적으로 바라보려 노력했다는 데 있다. 이 책의 11장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대화는 마르스크주의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성찰에 기초하고 있으며, 그런 탓에 홉스봄의 책은 소련에서 금서로 지정됐다.

전 세계 국경을 넘나들며 막강한 힘을 자랑하는 자본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이 책은 어떤 메시지를 줄 수 있을까. 홉스봄은 더 이상 혁명이 가능하지 않은 시대를 맞아, 모든 피억압 계층이 연합해 자본에 대항하는 ‘인민전선’에서 해법을 찾아온다. 빈민과 중산층, 노동자와 농민과 샐러리맨, 좌파와 중도파를 아우르는 ‘저항의 세계화’가 필요한 시대라는 얘기다. 오늘 이 땅에서도 그가 말한 ‘저항의 연대’가 불가능한 것으로만 보이진 않는다.(김준일기자)

08. 05. 23.

P.S. 기사에서 눈길을 끈 언급은 홉스봄의 책이 소련에서 금서로 지정됐었다는 사실. 지금은 어떤가 궁금해서 검색해봤다. 그의 3부작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는 러시아어로는 지난 1999년에 출간됐고, 20세기사인 '극단의 시대'는 2004년에 번역되었다.

Эрик Хобсбаум Век революции. 1789 - 1848Эрик Хобсбаум Век капитала. 1848 - 1875

Эрик Хобсбаум Век империи. 1875 - 1914Эрик Хобсбаум Эпоха крайностей. Короткий двадцатый век 1914 - 1991 Age of Extremes. The short Twentieth Century. 1914 -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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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한겨레의 '우리시대 지식논쟁'에 기고한 글을 옮겨놓는다(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89298.html). '지젝 신드롬의 허와 실'이란 주제로 세 차례 정도 지면이 할애될 예정인 것으로 안다. 거기서 내가 맡은 역할을 지젝에 대한 '지지' 논변이다. 주제의 선정 취지는 아래와 같다. 

우리시대 지식논쟁 / 지젝 신드롬의 허와 실 ① 이유있는 열풍

철학에도 유행이 있다면, 오늘날 세계 철학계의 최신 유행은 슬라보예 지젝이다. 모든 첨단 유행이 그러하듯이 지젝 또한 시대의 상식을 파괴한다. 마르크스, 헤겔, 라캉을 접붙인 그는 독일 고전 철학에 바탕을 두고 정신분석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젖힌 뒤, 이를 디딤돌 삼아 다시 현대 철학의 새로운 사유를 개척하고 있다. 그는 ‘급진적인 정치 실천적 철학자’의 전형이기도 한데, 고국 슬로베니아에서 1990년 대통령 후보로 선거에 출마했다. 국내에서도 지젝 열풍은 심상찮다. 90년대 중반 한국에 처음으로 소개됐는데, 2000년대 들어 그가 직접 쓴 책만 10권 이상 번역·출판됐다. 대단히 ‘이례적’인 현상이다.

<한겨레>는 이번주부터 이 ‘지젝 신드롬’의 속살을 파고들려 한다. 그의 사유에는 과연 새로운 영감으로 삼을 만한 자양분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난해함 빼고는 건질 게 없는 서구적 언어 유희에 불과한 것일까? 지젝의 저작을 국내에 번역·소개하고 관련 논의를 이끌었던 학자들이 그 물음에 대한 나름의 답을 내놓는다. 인터넷 서평꾼으로 유명한 이현우 박사가 첫 번째 글을 썼다. 그는 지젝의 사유로부터 우리 시대의 이념 지형을 이해하고 돌파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본다. 레닌의 혁명 전략마저 넘어서는 전복의 기운이 지젝에게 있다는 것이다.(안수찬 기자)

한겨레(08. 05. 24) 가장 어렵고 가장 대중적인 ‘철학계 괴물’

“나는 인간이 아닙니다. 괴물입니다”라고 말하는 철학자가 있다. 자신의 말이 아니더라도 그의 책을 경탄과 함께 읽어본 독자라면 ‘당신도 인간인가?’란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세계 철학계의 이단아’라고도 하는 슬로베니아의 철학자이자 정신분석가 슬라보예 지젝이다. 아예 그의 이론만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학술잡지가 나올 정도로 지난 20년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주목을 받은 철학자이면서 동시에 ‘엠티브이(MTV) 철학자’라는 비아냥거림까지 들을 정도로 가장 ‘대중적인’ 철학자, 그리고 아마도 가장 많은 책을 써낸 철학자, 그가 지젝이다. 그래서 열광하는 독자들까지도 그의 책을 다 따라 읽는다는 건 불가능해 보일 정도다. 매년 두어 권씩 번역돼 나오는 ‘한국어 지젝’에만 한정하더라도 그렇다. 그런 이유만으로도, 한 비판자의 표현을 빌리면, ‘지젝주의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젝은 흔히 ‘슬로베니아 라캉주의 헤겔주의자’라고 불리지만 거기에 마르크스와 대중문화가 이론적 틀로 더해진다. 어떤 저자를 읽기 위해서 독일 관념론과 라캉 정신분석학, 마르크스주의와 현대 대중문화에 ‘정통’해야 한다면 보통은 다른 저자를 알아보는 게 낫지 않은가? 하지만, 그럼에도 지젝은 매혹적이다. 그는 가장 난해한 두 사상가, 헤겔과 라캉을 자유자재로 다루면서, 헤겔을 어떻게 라캉으로 읽을 수 있으며, 반대로 라캉은 어떻게 헤겔로 읽을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러한 독해가 우리 시대의 이념적 지형과 대중문화를 이해하고 돌파하는 데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지 보여주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매혹은 동시에 그에 대한 혐오를 낳기도 한다. 그의 담론이 세련된 라캉적 분석과 덜 해체된 전통적 마르크스주의 사이에서 정신분열적으로 분열돼 있다는 비판은 그의 이런 작업방식을 향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비판 옆에는 그의 철학 ‘퍼포먼스’가 고상한 철학을 대중문화로 더럽힌다는 비난도 빠지지 않는다. 독창성도 진정성도 없는 ‘철학적 재담꾼’ 정도에 불과하다는 식이다. 하지만 이런 세기적인 ‘재담꾼’을 갖는다는 게 과연 불행한 일인지? 가령, 급진적 철학자로서 자본주의를 비판하면서 그가 제시하는 ‘유토피아’에 관한 재담은 어떠한가?

지구의 종말을 상상하기는 너무도 쉽지만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변화를 기대하기는 점점 더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 우리 시대의 패러독스라고 지적하면서, 지젝은 그럼에도 우리가 유토피아를 발명해내야 한다고 반복적으로 주장한다. 그것이 우리 시대의 긴급한 요구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유토피아란 무엇인가? 그것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유토피아, 곧 ‘불가능한 이상적 사회’와는 무관하다. 유토피아는 어원 그대로 ‘자리가 없는’ 공간의 건설이다. 왜 자리가 없는가? 기존의 사회적 좌표계 내에서는 자리가 할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토피아적인 제스처의 사례로 지젝이 자주 드는 것은 1917년의 레닌이다.


레닌주의의 핵심은 자유주의적 ‘선택의 자유’ 대신에 선택 자체를 선택하는 데 있다. 곧 정치적 ‘활동’이 아닌 ‘행위’란 현 상황이 제시하는 강요된 선택 대신에 그러한 ‘정치적 계산’을 돌파하는 어떤 광기이다. 러시아 혁명을 가능하게 한 것은 불가능을 돌파한 레닌의 바로 그러한 ‘광기’였다. 하지만 레닌도 혁명 이후에는 대중의 창조적 역량에 대해 불신하면서 전문가 집단의 역할을 강조했고, 그것은 곧 스탈린주의로의 길을 예비하지 않았던가? 거대 은행이 없다면 사회주의는 불가능하다, 자본주의적 기구인 중앙은행을 더 크게, 더 민주적으로 국가가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지젝은 이 지점에서 국가의 관리에 대한 레닌의 ‘전체주의적’ 프로그램을 우리 시대의 상황에 맞게 다시 읽기를 제안한다. 중앙은행의 자리에 오늘날 ‘일반 지성’의 상징인 월드와이드웹을 갖다놓아 보자는 것이다. 자본주의 신경제의 첨병처럼 보이는 월드와이드웹에는 동시에 자본주의를 위협하는 폭발적인 잠재력이 있지 않은가? 따라서 이 경우 레닌적 제스처는 국가기구를 통해 마이크로소프트의 독점과 싸우는 대신에 그것을 사회화(국유화)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사회주의=전력화+소비에트 권력’이라는 레닌의 공식은 ‘사회주의=인터넷 무료접속+소비에트 권력’으로 변형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중요한 것은 ‘소비에트 권력’이라는 두 번째 요소이며, 그것을 통해서만 인터넷은 해방적 잠재력을 전개할 수 있게 된다. 이렇듯 ‘중앙은행 사회주의’에 대한 레닌의 전망을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의 월드와이드웹에서 정확하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지젝의 ‘재담’이다.

물론 그의 재담은 그 정도에서 그치지 않는다. 지젝은 또한 ‘소유의 종말’이 예견되는 디지털시대의 ‘탈소유 사회’에 대한 첫 번째 모형을 바로 스탈린시대 소련 사회에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알다시피 원칙적으로는 아무런 서열관계도 없는 평등한 사회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계급사회인 자본주의 사회와 달리 스탈린주의 사회는 계급이 없는, 무계급 사회였다. 하지만 동시에 ‘권력서열’이란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특권층인 노멘클라투라와 기술관료, 군대 등의 순으로 정확하게 서열화된 사회였다. 거기서 지배계급은 소유가 아니라, 사회적 권력과 통제수단, 물질적·사회적 특권에 직접 접근이 가능한가라는 ‘접속 가능성’으로 결정되었다. 바로 오늘날 현 단계 자본주의에서도 특권이 직접적인 소유가 아니라 뒤에서 조정하고 교육과 경영·정보 등에서 각종 특혜를 누리는 것에서 확인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우리가 당면하게 된 선택지는 사적 소유(사유재산)와 사적 소유의 사회화(국유화) 사이의 낡은 마르크스주의적 선택이 아니라 ‘위계적인 탈소유 사회’와 ‘평등한 탈소유 사회’ 사이의 선택이다. 여기서 선택은 물론 자명하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이다. 지젝은 다시 레닌적 제스처를 끌어온다. 그가 보기에 레닌주의의 핵심적 교훈은, 당이라는 조직 형태를 갖추지 못한 정치는 ‘정치 없는 정치’, 말로만 하는 정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한 비판은 ‘혁명 없는 혁명’을 원하는 것과 다름없는 ‘신사회운동’에도 가해진다. 과연 폴리페서(정치교수)들처럼 체제에 편승하거나 페미니즘에서부터 생태주의와 반인종주의에 이르는 신사회운동에 참여하는 것 말고는 ‘사회적 개입’의 방법이 따로 없는 것일까? 지젝이 보기에 이러한 운동의 한계는 보편성이 결여된 ‘단일 이슈 운동’이라는 데 있다. 곧 사회적 총체성과 연관돼 있지 않다는 것이며, 중도좌파와 좌파 자유주의에 대한 지젝의 비판은 이러한 맥락에서 제기된다. 백포도주냐 적포도주냐 하는 선택은 ‘근본적인’ 선택이 아니다.

지젝이 “레닌을 반복해야 한다”고 말할 때 그 반복이 뜻하는 것은 레닌으로 다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다. 레닌을 반복하는 것은 레닌이 했던 것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실패한 것, 그가 잃어버린 기회를 반복하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주장들이 한갓 ‘혁명을 연기하는 배우’의 제스처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는 것은 레닌을 전체주의자라고 비난하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다. 하지만 나는 이 ‘괴물’의 광기와 열정을 지지한다.

08. 05. 24.

 

 

 

 

P.S. '가장 어렵고 가장 대중적인'이란 수식어구가 타이틀에 붙었는데, 지젝을 수식하는 거라면 절반만 옳다. 그는 '가장 대중적인' 철학자이지만, '가장 어려운' 철학자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어려운 것은 헤겔과 라캉 같은 가장 난해한 철학자/정신분석가를 다루기 때문이지 그의 탓은 아니다(그들과 비교하자면 지젝은 너무나도 쉬운 철학자다! 나도 읽고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게다가 지젝은 기본적으로 계몽주의자이다. 일부러 어렵게 말하지 않는다. 좀더 깔끔한 번역본들이 나온다면 지젝 독해의 어려움은 상당 부분 해소될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본문에서 레닌과 관련하여 다룬 부분은 주로 <혁명이 다가온다>의 10장 '탈정치에 반대하여'를 정리한 것이다. 지젝의 혁명론에 초점을 맞추면 좋겠다는 애초의 주문도 있었고, 국역본의 이 대목이 부정확하게 번역돼 있어서 교정 차원에서 언급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지젝이 만난 레닌>이 곧 나올 줄 알았다면 생각을 달리했을 것이다. 이 책에서는 12장 '사이버 스페이스 레닌?'이 내가 이 글에서 언급하고 있는 부분이다. 쉽게 번역돼 있기 때문에 이해에 어려움을 주지 않는다. 만약 번역본이 좀더 빨리 나왔더라면 나는 다른 대목에 초점을 맞추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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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왜 지젝인가?
    from Dia's time capsule 2008-07-18 22:58 
    도착증자는 정신분석의 주체(환자)가 아니다. 그들의 도착적 향락은 법적으로 보호받아야 할 인권이거나 자본에 의해 개발되어야 할 상품이지 결코 치료의 대상이 아니다.6 우리의 모든 개별적인 특징과 특정한 욕구, 관심, 믿음을 제거했을 때 남겨지는 것이 바로 주체이다. 37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 토니마이어스 도서관에 다녀오니, 집이 잠겼다. 열쇠도 없고해서 극장엘 왔다. 5시에 인디아니존스를 본다. 지금 여긴 극장. 인디아나 존스에대한 기억?..
 
 
김상호 2008-05-23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앙은행에 대한 논제는 흥미롭군요. 제가 중앙은행에 다녀서 그런거긴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중앙은행의 지위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당히 기괴하다고 생각하고 있읍니다. 국가/시장의 이분법에서 양자 모두 혹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게 바로 중앙은행이죠.
예전에 제가 술먹고 혼자 망상을 한적이 있어요. 주인 담론은 고전적인 경제학 담론(빗금친 주체의 자리엔 추상적인 합리적 개인, 주인기표는 보이지 않는 손, 균형이라는 이데올로기) 등등이죠. 문제는 삑사리가 났다는 ㅠ.ㅠ

로쟈 2008-05-24 00:06   좋아요 0 | URL
라캉-지젝을 좋아하시는군요.^^

김상호 2008-05-24 0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하지 않는다면 책을 어찌 번역하겠읍니까 ^^

로쟈 2008-05-24 00:37   좋아요 0 | URL
아, '히치콕을 포기하고 라캉을 구할 사람'이시군요.^^

송연 2008-05-24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과 생각>에서 이 주제로 다음주부터 진행한다고 했을때 로쟈님이 나오시겠구나 하고 예상했었지요.^^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로쟈 2008-05-24 14:30   좋아요 0 | URL
제가 적격자라고 하긴 어렵지만, '전문가주의'라는 게 또한 反지젝적이란 생각에 나서게 됐습니다...

yoonta 2008-05-24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공개적인 논쟁의 중심에 서시는 군요^^

지젝의 혁명론은 저에게도 충분히 흥미롭습니다. 지젝이 소환하고있는 레닌은 그러니까 월드와이드웹을 국유화된 중앙은행처럼 사용하는 그러한 레닌이라는 말씀이시군요. 인터넷과 같은 소통수단을 사용하면 기존사회주의국가가 가졌던 국유화의 문제점을 극복할수있다는 주장인데 그런데 결국 문제는 혁명이후 권력을 누가 가지게 되는가가 아닐까요? "물론 중요한 것은 ‘소비에트 권력’이라는 두 번째 요소이며, 그것을 통해서만 인터넷은 해방적 잠재력을 전개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처럼 말이지요.

그래서 본문에서도 말씀하신 것처럼 신사회운동과같이 지엽적이지 않은 "보편적 사회운동"이 되려면 '당'을 통한 정치활동이 필수적이라는 논리가 도입되는 것이고요. 그렇다면 결국 권력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당에 의해서 독점되게 된다는 건데 이건 결국 구사회주의의 "당"들이 했던 행태를 반복할수있게 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요? 물론 "월드와이드웹"을 통한 권력/당이기 때문에 그러한 집중화된 권력은 제어가능하다라고 이야기할수있을런지는 모르겠으나 이 지점에서 의문은 여전히 남네요. 권력이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집중화되고 견제받지 않으면 부패하기 때문이지요. 지젝이 이야기하는 당이 정확히 어떤 당인가요? 권력이 소수에게 집중된 레닌주의적 전위당이 아닌 아래로부터의 요구와 주장을 수용할 수 있는 민주적인 의사소통 구조를 확보한 당인가요? 아닌가요? 그렇지 않다면 맑스주의나 레닌주의의 이러한 비민주적 성격을 비판했던 아나키즘적 조류로부터의 비판을 면하기는 힘들어 보입니다. 물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중앙집중적 당이 없이 어떻게 체제를 전복하는 혁명을 이룰수있는가? 하는 반론이 있을수 있죠. 저도 이런 반론에는 일정부분 동의합니다. 지엽적이고 이슈화된 조직화되지 못한 힘으로 이런 운동을 성공시키기는 거의 불가능죠. 그런데 문제는 이처럼 조직화되고 집중화된 당이 권력을 잡은 이후에 이를 견제할 수단은 또 무엇인가하는 문제가 대두된다는 겁니다. 여기에 혁명의 아포리아가 있는 것 아닐까요?

로쟈 2008-05-24 20:13   좋아요 0 | URL
'논쟁'이란 표현은 과하구요, '지젝 신드롬'이란 표현 자체에 문제는 다 제기돼 있는 것이죠(이 또한 '한국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노마디즘' 논쟁과 마찬가지로). 지젝이 이야기하는 당이 정확히 어떤 당인가는 지젝에게 물어보셔야 하는데요.^^ 제가 생각해보는 것은 1000만의 대의원을 가진 소비에트가 인터넷시대에는 가능하지 않느냐는 것이고요, 그것이 현행 대의제 민주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라는 건 많이들 지적하는 것이죠. 더불어 '혁명의 아포리아'에 대해서는 그러한 '실패' 혹은 '부패의 가능성'을 의식한다는 게 일단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그걸 의식하고 있다면 집중화된 권력도 조금 다른 식으로 움직이지 않을까요? 레닌이 실패한 지점에서, 그가 잃어버린 기회를 반복한다는 것을 저는 그런 쪽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마늘빵 2008-05-24 1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한겨레에서 로쟈님 글 봤습니다. :) 사진이 알라딘에 올라왔던 것보단 못하게 나왔어요. 알라딘엔 살짝 귀엽게(?) 나오셨는데. 전에 딸기님이 찍으셨던.

로쟈 2008-05-24 20:15   좋아요 0 | URL
워낙 사진을 잘 안 찍는데가 증명서 사진을 피해달라고 해서 강의하는 모습을 찍은 스냅사진이 들어가게 됐습니다...

드팀전 2008-05-26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지젝에 관심을 갖게된 것은 전적으로 로쟈님 덕분이었습니다.물론 여전히 어렵고 스스로 이해의 폭이 어느 정도인가에 대해서는 늘 의문이 생깁니다만 다 이해하지 않고 가면 또 어떡겠나 싶습니다. 창문을 열어 놓으면 언제였나 싶게 먼지가 덮이는 것처럼 낙천적으로 받아들이고 넘어갑니다.
제가 지젝을 만난 시점은 개인적으로도 시의적절했습니다. 왠지 예상치 않았던 뒤에서 날아오는 크로스카운터처럼 짜릿하더군요.^^ 로쟈님이 대중적인 지젝 책을 좀 써보심은 어떨지 모르겠어요.더 많은 팬클럽 가입을 위해 쉽게 쉽게....

로쟈 2008-05-26 22:53   좋아요 0 | URL
저도 기여한 바가 있군요.^^ 일단 발을 들여놓게 되면 일년에 두세 권씩은 읽어줘야 합니다!^^; 책을 쓰고 싶은 욕심은 저도 있지만 지젝이 어디부터 어디까지인지 아직 감이 안 와서요.--;
 

어젯밤에 읽다가 눈물이 난 기사를 옮겨놓는다. 쇠고기가 아니라 중국의 지진 참사에 관한 것이다. 사망자수가 5만명을 넘어섰다는 얘기도 들려오는 만큼 안타까운 사연들이 없을 수 없다. 기사는 그 중 세 사람이 남긴 유언을 전하고 있다. 중국은 이미 국가적인 애도에 나섰다. 측은지심이 국적을 가릴 수는 없는 노릇이며, 삼가 희생자들의 명복을 빈다... 

한겨레(08. 05. 23) ‘지진처럼 가슴 뒤흔든’ 유언들…중국이 울었다

“엄마 아빠 미안해요. 저 없이도 행복하게 사시길 바래요.” “사랑하는 아가야! 네가 살아난다면, 내가 널 사랑했다는 걸 꼭 기억해주렴.” “나는 꼭 살 거야. 나의 가장 큰 소원은 당신과 소근거리며 평생을 함께 하는 것이야.” 지진의 폐허 속에서 발견된 애절한 ‘유언’들이 13억 중국인들의 가슴을 뒤흔들고 있다. 콘크리트 더미에 깔려 숨이 잦아드는 상황에서 마지막 생기를 모아 사랑하는 이들에게 남긴 희생자들의 글은 거대한 지진이 돼 눈물샘을 자극하고 있다.

■ 엄마 아빠 미안해요 처음엔 아무런 글자도 보이지 않았다. 종이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것이었다. 뿌연 먼지가 낀 게 콘크리트 더미에서 방금 나온 듯했다. 20일 베이촨중학교에서 실종자를 찾던 구조대원들은 그런 종이조각을 든 채 고개를 떨군 교사가 의아할 뿐이었다. 의아함은 곧 전율로 바뀌었다. 교사가 종이조각을 햇빛에 비추는 순간, 나뭇가지 끝과 같은 날카로운 것으로 꾹꾹 눌러 새긴 글자의 흔적이 보이기 시작했다. 매몰됐던 학생이 연필이나 볼펜을 구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남긴 유언이 분명했다. 이 글을 남긴 학생은 이 학교 1학년 1반 장둥화이였다. 붕괴된 건물에 갇혀 사투를 벌이던 그는 부모에게 짤막한 유언을 남겼다. 자신이 없어도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는 아들의 마지막 편지를 본 부모는 억장이 무너져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 사랑하는 아가야 13일 베이촨의 한 무너진 가옥에서 구조대원들이 그를 발견했을 때, 그는 마치 절을 올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무릎을 꿇고, 윗몸을 구부린 채, 두 손으로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위에서 쏟아져내린 건물 잔해에 짓눌린 탓인지, 허리가 많이 무너져 있었다. 그는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그가 결사적으로 품고 있던, 노란 꽃무늬가 그려진 빨간 포대기에선 3~4개월된 아기가 상처 하나 없이 새근새근 숨쉬고 있었다. 한 의사가 그의 품을 헤쳐 포대기를 들어올리자 아기는 곤한 듯 잠에 빠져들었다. 포대기에서 휴대전화가 삐져나왔다. 의사는 무심결에 휴대전화를 들어 화면을 봤다. 거기엔 “사랑하는 아가야!”로 시작하는, 젖먹이에게 남긴 엄마의 마지막 메시지가 남아 있었다.

■ 당신과 평생을 함께 하고 싶어 천젠(26)은 15일 베이촨의 한 콘크리트 더미에서 발견됐다. 콘크리트 3개가 시루떡처럼 쌓여 내리누르는 비좁은 틈에서 그는 무려 73시간을 버텼다.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빗방울로 겨우 목을 축이는 상황에서도 삶의 의지를 꺾지 않았다. 그는 구조대원들이 다가오자 “나는 세계 최초로 세 덩어리의 콘크리트를 등에 진 사람”이라며, 오히려 구조대원들을 다독이기도 했다. “나는 꼭 살 것이다. 아이가 태어나 아빠가 누군지도 모르게 할 순 없다”는 그의 말에는 비장함까지 어렸다. 당시 그의 아내는 아기를 가진 상태였다. 구조장면을 생중계하던 <중국중앙텔레비전>(CCTV)이 그에게 전화로 아내를 연결해줬다. 그는 숨가쁜 목소리로 “지금 나의 가장 큰 꿈은 당신과 평생을 소근거리며 함께 하는 것이야”라고 말했다. 이게 그의 유언이 됐다. 구조대원들이 10분 뒤 그를 꺼냈을 때, 그는 더는 말을 하지 못했다.(청두/유강문 특파원)

한겨레(08. 05. 23) [세상읽기] 슬퍼할 줄 아는 사회

독일 뮌헨 근교 다하우의 유대인 수용 시설을 보러 가던 길이었다. 열 명 남짓한 청소년들이 담소를 나누며 경쾌한 걸음으로 나를 앞질러 갔다. 열일곱, 열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남녀 학생들은 인솔 교사를 따르고 있었다. 내가 수용소 입구로 들어섰을 때 그들은 추모탑 앞에 반원 형태로 서서 묵념을 올리고 있었다. 내가 추모탑을 둘러본 뒤 안내소 건물로 들어가 기본적인 정보를 얻고 나왔을 때 그들은 추모비 주변에 무릎을 꿇은 자세로 둥글게 둘러앉아 있었다. 서로 손을 잡고 고개를 깊숙이 숙인 자세였는데 놀랍게도 다들 울고 있었다. 환한 대낮에 많은 관광객 앞에서, 뱃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오열을 숨기거나 과장됨 없이 표현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 뒤에 얼어붙은 듯 멈춰 섰다. 현충일에는 묵념하고 광복절마다 순국선열을 기리는 의식에 참석했지만 그 과정에서 진심으로 울어본 적은 없었다. 빼앗겼던 조국이나 전쟁에서 잃은 삼촌을 위해 울음으로써 슬퍼해야 한다고 배운 적도 없었다. 나중에야 유대 문화에 특별한 애도 전통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애도란 슬픔의 감정을 충분히 느끼고, 그것을 충실히 표현하고, 잃은 대상을 잘 떠나보낸 뒤, 그것을 내면화시키며 성장하는 총체적 과정을 일컫는 말이다. 유대 문화의 애도 매뉴얼을 보면 혈육의 죽음을 맞았을 때 애도자는 충분히 슬퍼할 수 있도록 장례까지 3일 동안 종교적·사회적 의무가 면제된다. 장례 뒤 7일 동안은 집에 머물면서 방문객의 조문을 받고, 떠난 사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장례 후 한 달 동안도 여전히 슬픔을 표현하는 기간으로 정해 머리를 자르지 않고 사회활동을 최소화하고 매일 교회당에 가서 기도한다. 1년이 지나면 떠난 자를 기리는 특별한 의식을 행하고 그 뒤 매년 반복한다고 되어 있다.

한 인간의 정신을 형성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특별한 대상과 맺는 애착 경험이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마찬가지로 그 특별한 대상(사람뿐 아니라 조국·자유·이상·직위 등)을 잃었을 때 그것을 어떻게 애도하느냐에 따라서도 한 사람의 건강과 성장이 좌우된다. 개인뿐 아니라 사회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공동체의 집단 무의식 속에 깃든 박탈의 감정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그 사회의 건강과 성숙도가 결정된다.

현대로 접어들면서 거의 모든 공동체가 전통적인 애도 문화를 폐지하거나 외면했다. 부모를 잃어도 장례식장에서 간단하게 예식을 치른 뒤 슬퍼할 시간도 없이 차를 달려 일터로 돌아간다. 이성과 합리를 중시하는 사회는 슬픔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미성숙한 태도라 여긴다. 거부당한 개인적·사회적 슬픔들은 공동체 내부에 남아 현대 사회를 특징짓는 병리적 징후로 드러나고 있다. 슬퍼하지 못하는 사회는 폭력적으로 변한다.

내가 철들면서부터 들어온 친일파 문제를 아직도 듣는 이유는 잃은 조국에 대한 분노와 상실감이 제대로 애도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일본이 생각날 때마다 한 번씩 독도가 자기네 영토라고 주장하는 행위는 패전의 상실과 좌절감이 제대로 애도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사를 청산한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 말의 가장 본질적인 의미는 애도하기가 아닐까 생각하곤 한다. 공동체 구성원의 집단 무의식 속에 자리잡은 박탈의 감정을 충분히 경험하고 표현하고 떠나보낸 다음 성숙한 변화를 모색하는 일이 아닐까 싶다. 중국 정부가 쓰촨성 지진 희생자들을 위해 3일간 애도 기간을 정했다. 삼가 고인들의 명복을 빈다.(김형경 소설가)

08. 05.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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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8-05-23 17:45   좋아요 0 | URL
우리 사회가 슬퍼해야 마땅한 때에 슬퍼할 줄을 모르는 감정장애를 겪고 있는 것 같아요. 삼가 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로쟈 2008-05-24 14:27   좋아요 0 | URL
애도 기간에 게임을 할 수 없게 됐다고 PC방에서 욕설을 퍼부어대는 중국 여성도 있더군요...

마늘빵 2008-05-23 18:33   좋아요 0 | URL
마땅히 분노할 것에 대해 분노하고, 슬퍼할 것에 슬퍼할 줄 아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도.

로쟈 2008-05-24 14:27   좋아요 0 | URL
대리 분노, 대리 슬픔에 익숙해져가고 있는 게 문제지요...

2008-05-24 11: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5-24 14:26   좋아요 0 | URL
네, 생각할 때마다 눈물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L.SHIN 2008-05-26 23:51   좋아요 0 | URL
네, 슬퍼할 줄 아는 사회, 애도할 줄 아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이번주 한겨레21에 실린 '로쟈의 인문학 서재'를 옮겨놓는다. 최근에 '한길그레이트북스' 100번째 책으로 나온 아서 단토의 <일상적인 것의 변용>(한길사, 2008)을 실마리로 삼아서 단토가 말하는 '예술의 종말'이란 게 무엇인지 적은 글이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예전에 <예술의 종말 이후>(미술문화, 2004)를 여러 차례 다루면서 언급한 적이 있기도 하다(http://blog.aladin.co.kr/mramor/802981 등 참조).

한겨레21(08. 05. 27) 앤디 워홀의 비누상자

‘예술의 종말’이란 말을 들어보셨는지? 그거 뭐 유행 아닌가? (근대)문학, 철학, 역사 가릴 것 없이 떼로 종말을 고했다고 하는데, 예술이 끝났다는 게 굳이 새로운 소식은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럼 보다 구체적인 질문을 재차 드린다. 예술은 언제 종말을 고했다고 보시는지? 그리고 그 종말의 의미는 무엇이라고 보시는지? 너무 과한 질문인가? 얼핏 이런 질문에 답하려면 나름대로의 예술관과 예술철학으로 무장해야 할 듯싶다. 하지만 미국의 철학자이자 미술비평가 아서 단토에 따르면, 너무도 유명한 팝아티스트 앤디 워홀과 함께 박스 하나만 잘 기억해두면 된다. 비누 상자다.

‘예술’이라고 흔히 번역되는 ‘아트(Art)’가 여기서는 좁은 의미의 ‘미술’을 뜻하므로 엄밀하게 말하자면 ‘미술의 종말’이라고 해야겠지만, 어쨌거나 단토가 ‘예술의 종말’을 충격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은 1964년의 한 전시회에서다. 그는 당시 뉴욕 이스트 74번가의, 마치 재고품 창고 같은 모양새의 스테이블 갤러리에서 슈퍼마켓에서나 진열돼 있을 법한 ‘브릴로 상자’가 층층이 쌓여 있는 걸 보고 미적 혐오감을 넘어서는 철학적 흥분을 느낀다(‘브릴로’는 청소용 세제의 브랜드다. 이 비누 상자 옆방에는 켈로그 상자들도 쌓여 있었단다).

물론 워홀이 마켓에서 이 상자들을 사다가 미술관으로 그냥 옮겨놓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 상자들은 그가 브릴로 상자를 모방해서 직접 제작한 것이다. 즉 진짜 브릴로 박스는 골판지로 만들어졌지만 워홀의 브릴로 박스는 합판으로 만들어졌다. 문제는 이 재질의 차이가 육안으로는 식별이 가능하지 않다는 점이다. 해서 겉보기에는 똑같은 두 종류의 박스가 존재하게 되었다. 하나는 단순한 상품상자로서의 브릴로 상자, 그리고 다른 하나는 워홀의 팝아트 작품으로서의 브릴로 상자. 하지만 이 두 상자는 보는 것만으로는 식별되지 않는다. 흔히 무엇이 예술작품인가는 ‘보면 안다’고 흔히 말하지만 이 경우엔 ‘봐도 모른다’. 이것이 결정적이다. 미술이 시각(눈)의 문제에서 사고(머리)의 문제로 전환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미술은 더 이상 외관의 문제가 아니라 철학의 문제가 된다. 

그렇다면 철학적으로 따져보자. 똑같게 보이는 두 상자가 어떻게 해서 하나는 그냥 상자이고 다른 하나는 예술작품이 되는가? 어떤 사물이 예술작품인가 아닌가는 대체 누가 어떤 기준으로 결정하는가? 이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여 단토가 내놓은 대답이 ‘예술의 종말론’이다. 그리고 이 주장은 1965년에 발표한 ‘예술계’란 논문과 1981년에 출간되고 최근 번역돼 나온 <일상적인 것의 변용>(한길사 펴냄)을 통해서 제시된다. 그가 말하는 예술의 종말이란, 워홀의 브릴로 상자가 말해주듯이 무엇이든 예술이 될 수 있기에 이제는 예술에 대한 정의가 가능하지 않다는 인식에서 제기된다. 예술에 대한 정의가 더 이상 가능하지도 또 유효하지도 않다면 거기서 예술의 역사가 종말에 이르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은 나쁜 소식일까? 그렇지만도 않다.

사실 국내에는 단토가 1995년에 이 문제를 다시금 총정리해서 내놓은 <예술의 종말 이후>(미술문화 펴냄, 2004)가 먼저 소개됐다. 이 책에서 단토는 헤겔주의자로서 예술의 종말이 갖는 의미를 이렇게 정리했다. "예술의 종말은 예술가들의 해방이다. 그들은 이제 어떤 것이 가능한지 않은지를 확증하기 위해 실험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 우리는 그들에게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미리 말해줄 수 있다. 예술의 종말에 대한 나의 생각은 오히려 역사의 종말에 대한 헤겔의 생각과 비슷하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역사는 자유에서 종말을 고한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예술가들의 상황이다."

헤겔에 따르면 역사는 하나의 중대한 목적을 갖는다. 곧 자유의 확장이다. 모든 인간이 자유로운 시대에 도달하게 되면 역사는 종언을 고한다. 그것은 달리 역사의 완성이기도 하다. 예술 또한 마찬가지여서 모든 일상적인 것들이 예술작품으로 변용될 수 있고 누구나 예술창작자가 될 수 있다면 예술은 종말에 이른다. 예술의 민주주의가 곧 예술의 완성이다

08. 05. 21.

 

 

 

 

P.S. 애초에 단토의 책을 글감으로 삼은 건 '한길그레이트북스'의 100번째 책이라는 상징성을 고려해서였다. 최신간이라 다 읽어볼 여력은 없었고 한두 장 정도 읽어보고 간단하게 감상을 적으려고 했는데, 유감스럽게도 서문에서부터 책은 막히기 시작했다. 기념 띠지까지 두르고 나온 책으로서는 좀 민망한 일인데, 가령 단토가 '일상적인 것의 변용'의 선구적인 예로 뒤샹의 예술세계를 언급하고 있는 대목을 보라.

"나는 먼저 뒤샹을 살펴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일상적 존재의 생활세계(Lebenswelt)에 속하는 대상 - 빗자루, 병걸이, 자전거 바퀴, 소변기 등 - 을 예술작품으로 변화시키는 미묘한 기적을 처음으로 행한 사람은 미술사의 선구자인 바로 그이기 때문이다. 그의 행위는 하찮은 대상들을 모종의 미적 거리 안에 배치했고, 그 결과 그것들이 미적 향수(享受)에 부적합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간단하게 평가할 수도 있다. 즉 가장 가당치 않은 곳에서 모종의 아름다움이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을 실제로 입증하려던 시도로 볼 수 있다."(57쪽)

뒤샹의 작업이 갖는 의의를 설명하고 있는 부분인데, 얼핏 읽어도 셋째 문장과 넷째 문장은 서로 모순 아닌가? 그에 따르면, 뒤샹은 (1)일상의 하찮은 대상들이 미적 향수에 부적합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2)가장 가당치 않은 곳에서 아름다움이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는 것이 되니까. 어느 쪽이 맞는 말일까? 이 두 문장의 원문은 이렇다: "It is (just) possible to appreciate his acts as setting these unedifying objects at a certain aesthetic distance, rendering them as improbable candidates for aesthetic delectation: practical demonstrations that beauty of a sort can be found in the least likely places."

내가 보기에 일상의 하찮은 대상들이 "미적 향수에 부적합하다"는 건 "improbable candidates for aesthetic delectation"을 잘못 옮긴 것이다. 'improbable'은 물론 '있음직하지 않은', '사실 같지 않은'이란 뜻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리고 여기서의 강조점은 그럼에도 'candidates for aesthetic delectation', 즉 미적 향수(감상)의 후보(대상)가 되었다는 것이다. 바로 뒤샹에 의해서 말이다. 그것이 어떻게 "그것들이 미적 향수(享受)에 부적합하다는 보여주었다고 간단하게 평가할 수" 있는지는 역자만이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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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서 단토 교수님한테서 답장이 오다 (작성중)
    from 마음―몸―시공간 2008-06-03 07:05 
      최근 아서 단토 교수님의 저서 『일상적인 것의 변용 The Transfiguration of the Commonplace』(김혜련 옮김, 한길사, 2008, 448쪽) 한국어판에 대한 번역 논쟁이 로쟈 님의 블로그에서 진행중입니다. (로쟈 님의 글 「앤디 워홀의 비누상자」 참조 → http://blog.aladdin.co.kr/mramor/2102426). 저는 그 논쟁에 참여하여 나름대로 비판적인 견해를 제시했습니다. 제 견해가
 
 
노이에자이트 2008-05-22 0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 원문의 의미는 통상적으로는 도저히 아름다움과는 아무 상관없는 물건들이 뒤샹에 의하여 미적지위를 획득했다...이런 취지인가요? 그러면 improbable은 직접적인 해석을 해선 안되고 일종의 반어법? 어렵도다...역시 외국어는 어렵네요.

로쟈 2008-05-22 01:04   좋아요 0 | URL
그게 상식에 맞지요. 그냥 방점을 improbable이 아니라 candidates에 찍어서 읽으면 되는데(가능할 것 같지 않았던 후보), 역자가 너무 축어적으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뒤따라 나오는 문장들과의 호응도 무시할 만큼...

노이에자이트 2008-05-22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자번역을 넘어야 되는데...그건 그렇고 아서 단토를 몇 년전부터 많이 소개하시는군요.저는 여기 와서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qualia 2008-05-22 0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흥미로운 오역 사례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길그레이트북스》의 100번째 책, 『일상적인 것의 변용』 번역판 57쪽에서 인용하신 번역문은 원문을 보지 않아도 오역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앞뒤가 맞지 않는 (일종의 논리적) 비문이군요. 번역자 분이 앞뒤의 의미상 동치 구문을 180도 정반대로 번역했으니까요.

즉 원문의 〈his acts〉에 해당하는 〈setting these unedifying objects at a certain aesthetic distance, rendering them as improbable candidates for aesthetic delectation〉과 〈practical demonstrations that beauty of a sort can be found in the least likely places〉는 의미상 동치 구문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런데 번역문은 위 앞뒤 동치 문장을 완전히 180도 반대 의미의 대립 문장으로 옮겨 놓았네요. 번역자 분이나 편집자 분이 이 대목의 번역문에서 문맥이 전혀 논리적이지 않다는 점을 충분히 느끼셨을 법한데요. 아쉽습니다.

그리고 제 생각으로는 위 번역문에서 〈these unedifying objects〉를 〈하찮은 대상들〉이라고 옮긴 것도 미흡한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좀 더 정확한 의미는 앞뒤의 긴 문맥을 충분히 읽어봐야 알 수 있겠지만, 위 인용문의 내용으로 보건대, 〈these unedifying objects〉는 “미적 감흥(aesthetic delectation)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대상들”로 번역하는 것이 원문의 뜻(혹은 저자의 의도)을 훨씬 더 정확하게 전달하는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 하면, 원래 〈edify〉는 “지적으로, 도덕적, 정신적으로 교화하다”, “지성, 지적 능력, 덕성 따위를 기르다”라는 뜻을 지녔으므로(To instruct especially so as to encourage intellectual, moral, or spiritual improvement), 위 문맥에서는 〈edify〉의 원뜻에서 유추하여 “미적 감상, 미적 감흥, 미적 향수를 불러일으키다”로 충분히 의역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반대의 뜻을 지닌 〈unedifying〉이 쓰였으므로 “미적 감상/감흥/향수를 불러일으키지 않는” 따위로 번역해줘야 하겠죠.

따라서 〈these unedifying objects〉를 〈하찮은 대상들〉이라고 옮긴 것은 지나치게 단순하고 미흡한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열대 2008-05-22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It is (just) possible to appreciate his acts as setting these unedifying objects at a certain aesthetic distance, rendering them as improbable candidates for aesthetic delectation: practical demonstrations that beauty of a sort can be found in the least likely places."
-"이것은 그의 행위들이, 특정한 미학적 거리에다 품위없는 물건들을 놓아 두고 그것들을 미적 향수의 후보로 적합하지 않는 것으로 연출하고 있지만, 적어도 적합한 장소안에서는 아름다움이라 할만한 것들을 발견될 수 있게 실제적으로 증명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앞에서는 그의 행위를 미학적 거리에서 볼 때 전혀 미적이지 못할 만한 것을 놓아둔 것으로 평가할 수 있지만, 결론적으로는 (: practical demonstrations...) 특정한 장소안에서 그것을 아름답게 볼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어떻게 보면 뒤샹의 작업행위 자체가 모두 역설적이지요. ^^

qualia 2008-05-22 16:35   좋아요 0 | URL

규 님, 반갑습니다. 규 님께서도 번역에 관심이 많으신가 봅니다.

하지만, 규 님께서 제시하신 위 번역안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원문의 의미를 전혀 올바르게 전달하지 못하는 번역안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 하면 첫째, 규 님께선 원문의 문장 구성/형식을 전혀 잘못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둘째, 따라서 규 님께선 위 원문을 그 본디 의미에서 한참이나 동떨어진 완전한 재창작 수준으로 오독 · 오역하였으며, 셋째, 규 님의 번역안은 원문의 의미를 떠나 우리말 문장 구성만을 놓고 볼 때도 말이 되지 않는 비문이기 때문입니다.

① 위 원문에서 〈It is (just) possible ~ aesthetic delectation:〉 부분과 〈practical demonstrations ~ in the least likely places.〉 부분은 역접 관계로 이어진 것이 아닙니다. 본디 영문에서 쌍점(:, 콜론)은 앞 문장을 동일한 의미로 재차 설명하거나 부연 설명하는 뒤 문장을 이어주는 기능을 합니다. 영어로는 “that is to say”, “namely”, “viz”에 해당하고 우리말로는 “다시 말하자면”, “이를테면”, “즉” 따위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규 님께선 위 앞뒤 문장을 역접적으로 잘못 파악했고, 따라서 잘못 번역하셨습니다.

② 〈in the least likely places〉에서 “the least ~”는 “적어도”가 전혀 아닙니다. 최상급 “the most”의 부정어로서, 위 원문에서는 “가장 ~하지 않은”이라는 뜻으로 쓰인 것입니다.

그리고 〈rendering them as improbable candidates for aesthetic delectation:〉을 〈그것들을 미적 향수의 후보로 적합하지 않는 것으로 연출하고 있지만,〉으로 번역한 것은, 위에서 로쟈 님뿐만 아니라 제가 설명했듯이, 원문을 잘못 읽고 잘못 옮긴 것입니다. 원저자가 의도한 내용은 그 정반대입니다.

③ 규 님의 번역문 [이것은 그의 행위들이, 특정한 미학적 거리에다 품위없는 물건들을 놓아 두고 그것들을 미적 향수의 후보로 적합하지 않는 것으로 연출하고 있지만, 적어도 적합한 장소안에서는 아름다움이라 할만한 것들을 발견될 수 있게 실제적으로 증명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는 말이 잘 되지 않는 불완전한 비문입니다. 주어와 서술어가 전혀 호응하지 못하는 문장이며, 주절과 종속절도 전혀 호응하지 못하는 불완전한 문장이기 때문입니다. 능동과 피동이 뒤섞인 문장 구성도 문장의 자연스런 흐름을 막습니다.

이상과 같은 까닭들 때문에 〈뒤샹의 작업행위 자체가 모두 역설적이지요〉라는 규 님의 의미 있는 논평은 그 빛을 잃는다고 생각합니다.

coco 2008-05-22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esthetic distance는 여기서 '미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다'는 의미로 보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미적 기쁨을 주기에는 부적절한 후보로 묘사'했다는 말에 맥락이 부여되겠죠. 대강 정리해보면,

"미적인 것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이러한 다듬어지지 않은 대상들을 배치했다고 , 곧 그 대상들을 미적인 기쁨을 주기에는 부적절한 것으로 묘사했다고 그의 행위를 평가하는 것이 가능하다."

qualia 2008-05-23 00:50   좋아요 0 | URL

carboni68 님, 안녕하세요? 토론에 참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로쟈 님께도 유익한 토론 거리를 던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단 문제의 원문과 그에 대한 carboni68 님의 번역문을 인용해 놓고 말씀드리죠.

“It is (just) possible to appreciate his acts as setting these unedifying objects at a certain aesthetic distance, rendering them as improbable candidates for aesthetic delectation: practical demonstrations that beauty of a sort can be found in the least likely places.”

“미적인 것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이러한 다듬어지지 않은 대상들을 배치했다고 , 곧 그 대상들을 미적인 기쁨을 주기에는 부적절한 것으로 묘사했다고 그의 행위를 평가하는 것이 가능하다.”

① 위에서 〈aesthetic distance〉는 잘 알려진 문학 · 예술 분야의 전문 개념의 하나입니다. 〈미적 거리〉로 번역하고 통용하는 것이 맞습니다. “미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다”는 carboni68 님의 해석은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② 게다가 마르셀 뒤샹이 소변기를 뜯어와 「샘」이라는 제목을 떡하니 붙여놓고 눙치는 장난질 자체가 이미 예술 행위이고 미(학)적 행위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행위 자체는 소변기라는 대상에 대해서 이미 어떤 미적 태도/자세/관점을 취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일종의 미적 거리(aesthetic distance)를 유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즉 소변기를 하나의 미적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에, 바로 이런 정황을 언급하고 있는 원문 〈setting these unedifying objects at a certain aesthetic distance〉를 〈미적인 것과 거리를 둔 채 ~ 이러한 대상들을 배치했다〉고 독해하는 것은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오독임을 잘 알 수 있게 됩니다.

③ 그리고 능동적 현재분사형인 형용사 “unedifying”이 들어 있는 〈these unedifying objects〉를 〈이러한 다듬어지지 않은 대상들〉과 같이 수동적 과거분사형 어구로 번역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이러한 다듬어지지 않은 대상들〉이라는 독해 자체가 오독입니다. 〈these unedifying objects〉는 “빗자루, 병걸이, 자전거 바퀴, 소변기”와 같이 일상적으로는 〈미적 감흥을 거의 불러일으키지 않는 대상들〉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원문의 맥락에 더 잘 들어맞기 때문입니다.

④ 〈improbable candidates〉를 〈부적절한 것/대상/후보들〉로 옮기는 것 자체가 부적절한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서 단토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일상적인 것들이 예술적 대상으로서 적절한가 부적절한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지극히 일상적인 것들이 작가의 의도나 감상자의 해석에 따라 얼마든지 그럴싸한 예술 작품으로 변용되고 표현될 수도 있다는 점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주의 모든 사물들 중에 예술 작품의 소재로서 부적절한 게 어디 있겠습니까? 즉 모든 것이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될 수 있다면, 모든 것은 이미 예술적 대상으로서 적절한 것이고, 우주 만물이 예술 작품의 대상으로서의 지위를 원초적으로 지니고 있다면, 이미 그 적절함/부적절함의 문제 따위란 존재하지도 않는 문제일 것입니다. 다만, 그 모든 것은 작가의 의도와 감상자의 해석에 따라, 때론 예술 작품이 되기도 하고, 때론 그냥 사물 그 자체로 존재할 수도 있는 일종의 가능성/비가능성(probability/improbability)의 문제만이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위 원문의 문맥에서 〈improbable candidates〉를 〈부적절한 것/대상/후보들〉로 번역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⑤ carboni68 님께서 번역하신 위 번역문의 내용은 인용한 원문의 마지막 문장 〈practical demonstrations that beauty of a sort can be found in the least likely places.〉와 전혀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서로 반대의 내용을 말하고 있는 형국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원문의 마지막 문장은 앞 문장들을 부연 설명하고 있는 문장으로서 같은 내용을 말하는 동치 문장입니다. 즉, (앤디 워홀과 마르셀 뒤샹 같은 예술가들이) 평소에 아름다움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것으로 보였던 대상들에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미적인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을 실제적으로 보여줬다는 얘기죠. 따라서 carboni68 님의 번역은 전체적으로 오역이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남을 알 수 있습니다.

아열대 2008-05-22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다시 해보면,It is (just) possible to appreciate his acts as setting these unedifying objects at a certain aesthetic distance, rendering them as improbable candidates for aesthetic delectation: practical demonstrations that beauty of a sort can be found in the least likely places
-그의 행위는 미적 감흥을 불러 일으키지 않는 대상들을 특정한 미학적 거리에 배치하고, 그것들을 전혀 그럴듯하지 않음에도 그럴듯한 미적 대상의 대상으로 변모시킨 것으로, 다시 말해 가장 적합하지 않는 장소에 아름답다고 할 만한 것이 발견될 수 있도록 실제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렇게 될 수 있을까요? qualia님의 의견에 따라본 것인데, 훨씬 매끄럽군요. 덕분에 많이 배웁니다. ^^
(제가 처음에 그렇게 번역해본 것은 님이 말씀하신 반어법이 오히려 콜론 뒤에 있는 건 아닌가,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the least를 at least로 잘못 해석한 것이었군요.ㅋ)

qualia 2008-05-23 01:46   좋아요 0 | URL

규 님, 고맙습니다. 제 의견은 그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규 님의 독자적인 의견을 더 듣고 싶습니다.

제 생각에 위 번역문은 조금은 나아진 듯합니다만, 여전히 덜컹거리는 문장이고, 요령부득의 비문에서 벗어나지 못한 문장이라고 생각합니다. 뒷부분은 여전히 오역에 가깝고요. 그러나 다시 말씀드리지만 제가 그를 수도 있습니다. 비판적으로 봐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규 님의 토론에 감사합니다.

coco 2008-05-23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자가 틀린 부분은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improbable 부분이 아니라 at a certain aesthetic distance 부분입니다. 이것을 '미적 거리에 포함하고'라고 번역하니까 뒤샹의 작품이 나름 아름다운 것처럼 이해되어서 뒷부분의 imprbable이 나오는 문장과 내용상 모순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있는', '아름답지 않은' 이라는 내용으로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가장 뒷문장 "그럼으로써 그는 가장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을 법한 장소에서 일종의 미를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을 효과적으로(practical) 보여주었다."과도 아무런 모순이 없습니다.

at ... distance 관련하여 금성에이스 사전의 예문도 인용합니다.

⊙ He is usually kept at a respectful ∼. 그는 평소 경원(敬遠)을 당하고 있다.
(이 경우 at a respectable distance는 respect(존경)로부터 멀어져 있다는 의미입니다.)

로쟈 2008-05-23 00:21   좋아요 0 | URL
미적 거리, 혹은 심미적 거리aesthetic distance는 미학 용어입니다. 어떤 실제적 이해관계를 넘어서 미적인 인지와 감상이 가능하도록 해주는 '거리'를 말합니다. 배가 고픈 사람에게 책상의 사과는 심미적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식욕의 대상이죠). 하지만 식욕이 채워진 상태에서라면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사과를 미적인 대상으로 관조해볼 수 있겠죠. 그때 관여하는 것이 '심미적 거리'입니다...

coco 2008-05-23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요.. 그럼 그것이 개념어인가요? 그렇다면 위에서 관찰자의 미적이 아닌 다른 이해를 차단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언급되는 연관된 부분이 있나요?... 좀 더 생각해보기로 하죠^^

qualia 2008-05-23 01:48   좋아요 0 | URL

앗, 제가 carboni68 님의 글에 댓글을 다는 사이에 여러 개의 댓글이 이미 올라와 있었군요. carboni68 님의 견해에 대해서는 제가 위에서 자세하게 답변드렸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덕분에 공부가 됩니다. 좋은 의견 기대합니다. 고맙습니다.

coco 2008-05-23 0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맨 마지막의 the least likely places(가장 미적이지 않을 것 같은 장소)는 어디일까요? 바로 뒤샹의 작품 전시장이겠죠. 말하자면 그곳이 추(미의 반대라는 의미에서)해야 추한 곳에서조차 미는 발견된다는 생각을 관객들이 갖게 된다는게 뒤샹의 의도입니다. 그렇다면 이곳을 가장 미적이지 않게끔 만들었다는 뒤샹의 의도에 대한 설명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setting~ 과 rendering~ 의 두개의 동격의 동명사구에 의해 설명되고 있습니다. setting~ 과 rendering~ 구문은 동격의 구문으로서 뒤샹이 작품을 미적이지 않게 만들었다는 내용의 반복입니다. aesthetic distance가 미학용어가 되면 앞뒤 문맥이 맞는지요? 미적인 감상이 가능한 거리를 확보해 주었는데 왜 전시회장은 가장 미적인 것과 거리가 먼 장소가 되는 것일까요? 이렇게 문장이 심오해지기 시작하면 저자의 문제거나 우리의 독해력의 문제거나 둘 중 하나일 경우겠지요.

qualia 2008-05-24 02:13   좋아요 0 | URL

완전히 잘못 이해하시고 있습니다. carboni68 님뿐만 아니라 juin 님, 그리고 아래에 다시 댓글을 올리신 규 님까지 모두 아서 단토의 이야기를 엉뚱하게 오해하시고들 있다고 저는 결론적으로 판단합니다.

① 아서 단토의 위 원문에서 〈the least likely places〉는 “작품 전시장”(carboni68 님과 규 님 견해)도 아니고, “일상적인 공간”(juin 님 견해)도 아닙니다. 〈places〉라는 낱말의 표면적 의미(즉 장소)에 얽매여 전혀 엉뚱한 오해를 하신 것입니다.

예컨대 쉽게 말하자면, 그냥 냄새(혹은 환각적 냄새)가 코를 찌르는 소변기에 불과한 것을, 마르셀 뒤샹이 예술적으로 장난을 쳐서 「샘」이라고 해서 갖다놓으니까, 감상자들이 그걸 보고 “아하, 그럴듯한데!” 하고 일종의 미적 느낌을 말하더라 하는 것입니다. 이때 일종의 아름다움이 발현되어 나오는(beauty of a sort can be found in ~) 대상을 장소 개념을 동원해서 〈places〉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문맥에서 〈places〉는 굳이 “장소”라고 하지 않고 “대상”이라고 번역해도 될 것입니다. 전시장이나 일상적인 공간을 가리키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② carboni68 님의 위 설명은 전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완전한 오독을 근거로 하여 설명을 하시고 있으니, 당연히 그 다음은 말이 될 리가 없습니다. 두 개의 동명사구 〈setting ~〉과 〈rendering ~〉이 같은 내용을 반복하고 있다는 얘기도 맞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그 각각은 뒤샹이 소변기(혹은 일상적 기성품)를 가져와서 전시 공간 안에 배치한 행위의 측면을, 그 다음에 그런 행위로 말미암아 드러나는 일상적인 것의 예술적 변용의 측면을 각각 나눠 기술했다고 보는 것이 훨씬 더 타당하기 때문입니다.

③ 이해를 돕기 위해 문제의 원문을 우리말로 풀어서 제시해 보겠습니다.

“It is (just) possible to appreciate his acts as setting these unedifying objects at a certain aesthetic distance, rendering them as improbable candidates for aesthetic delectation: practical demonstrations that beauty of a sort can be found in the least likely places.”

㉠ 마르셀 뒤샹의 행위는 다음과 같이 해석이 가능하다.

㉡ 그는 전혀 미적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일상적 대상들을 특정한 미적 거리 안에 새롭게 배치했다.

㉢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그것들을 전혀 그럴듯하지 않음에도, 꽤 그럴듯한 미적 감흥을 자아내는 대상들로 변모시켰다.

㉣ 즉 그러한 작업은, 미적 요소라고는 전혀 없을 것 같은 대상들 속에서도 모종의 아름다움이 얼마든지 발현될 수 있다는 점을 실제로 보여준 것이다.

제가 제시한 번역 초안은 아서 단토의 의도를 어느 정도 정확하게 전달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해하기 좋게 하느라고 원문보다 길게 풀어서 번역했기 때문에 간결성이 떨어지긴 합니다. 혹 문제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비판바랍니다.

qualia 2008-06-01 07:56   좋아요 0 | URL

juin 님의 위 댓글에 간단하게 답변드립니다.

① juin 님 → 뒤샹이 미적 향수(저는 '심미적 쾌감' 정도가 더 와닿지만)를 문제삼았고 단토 또한 인지와 심미안을 미술작품의 본질에서 문제삼고 있는 맥락에서 볼 때, 저 문단은 부분적으로는 carboni68님의 해석이 맞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 carboni68 님의 해석이 부분적으로는 맞다고요? 제가 생각하기에 (이곳의 논의 문맥에서), carboni68 님의 말씀 전부는 옳고 그름을 떠나서 말 자체가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맞는지 틀리는지 얘기하는 것도 무의미합니다. 기본적 개념에 대한 초보적 이해조차 없이 문제의 개념들을 논한다는 것은 어불성설(난센스)에 지나지 않습니다.

② juin 님이 풀이한 해석 → “<뒤샹의 행위는 그러한 사물(오브제)들을 어떤 심미적 거리에 놓아서 새삼 관조의 대상으로 만들긴 했는데, 다만 심미적 쾌감에 호소하지 않는 채로 그렇게 했다(미술의 본질에 대한 문제제기를 위해). 이런 퍼포먼스를 통해 보여주고자 한 것 혹은 보여주게 된 것은 미(혹은 미 개념)라 할 만한 것은 대상 자체의 속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기 나름이라는 것이다.>”

⇒ “관조의 대상으로 만들긴 했는데, 다만 심미적 쾌감에 호소하지 않는 채로 그렇게 했다”고요? 이 해석은, 위 원문만 놓고 본다면, juin 님의 주관적인 확대 해석일 뿐입니다. 원문에는 역접적 표현이 없습니다(improbable의 역설적인 의미를 제외하고는).

심미적 쾌감에 호소하지 않았다는 얘기는 아서 단토의 문맥과 상치된다고 봅니다. 뒤샹의 변용 작업은 미 혹은 아름다움의 전통적/통상적 개념에 대한 반발 · 재고 · 수정 따위를 불러왔다는 것이지, 뒤샹의 변용 작업이 (처음부터) 심미적 쾌감에 호소하지 않았다는 얘기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뒤샹의 변용 작업이 심미적 쾌감에 호소했느냐, 호소하지 않았느냐 하는 문제는 ‘사후적인’ 문제입니다.

③ juin 님 → “위 서평기사에 헤겔이 언급되어 있긴 한데, 두 링크를 읽고 제가 이해한 바로는 여기서 '발현'이란 뒤샹이나 워홀이나 단토의 의도와 전혀 다르지 않나 싶은데요. 차라리 '발견'이라 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 그렇지 않아도 저도 처음에는 〈발견〉이라는 낱말을 넣어서 번역했었습니다. 즉 다음과 같이 번역했었죠.

㉣ 즉 그러한 작업은, 미적 요소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을 것 같은 대상들 속에서도 모종의 아름다움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을 실제로 보여준 것이다.

댓글을 작성해 올리면, 원래의 글 저자인 로쟈 님의 전자우편함으로 댓글이 자동으로 날아갑니다. 로쟈 님의 전자우편함에서 제 댓글을 확인하면 위와 같이 번역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발견〉이 적절하냐, 〈발현〉이 적절하냐 하는 문제는 부차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즉 〈beauty of a sort can be found in the least likely places〉라는 원문을 사물을 주어로 해서 번역할 것이냐, 수동으로 할 것이냐 능동으로 할 것이냐 하는 따위의 문장 구성 문제로서, 각각의 경우에 따라 〈발견〉도 가능하고 〈발현〉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발견〉이나 〈발현〉의 용어 선택 문제와 “뒤샹이나 워홀이나 단토의 의도”가 무엇이었느냐 하는 문제는 서로 번지수가 다른 문제라고 봅니다.

palefire 2008-05-23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로자님의 서재에 들렀는데 정말 흥미로운 번역논쟁이 진행중이군요. 전반적인 번역오류는 qualia님이 지적해주신 부분들이 맞습니다. 첨언하자면 improbable의 번역문제는 'aesthetic delerection('미적 향수'로 옮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뒤샹이 직접 했던 표현으로 "Apropos of Readymade"라는 1961년에 쓴 짧은 글에 나온 표현입니다.
"A point that I want very much to establish is that the choice of these "Readymades" was never dictated by aesthetic delectation.The choice was based on a reaction of visual indifference with at the same time a total absence of good or bad taste ... in fact a complete anaesthesia" (내가 정말로 확립하고자 했던 점은 이러한 '레디메이드'의 선택이 미적 향수에 결코 지배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선택은 좋은 취향 혹은 나쁜 취향의 총체적인 부재를 동반한, 시각적 무관심의 반응 - 사실상 완전한 무감각 - 에 따른 것이었다).
(이 링크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http://www.peak.org/~dadaist/English/TextOnly/readymades.html)
이 문맥을 참조할 경우 improbable candidate에서 'improbable'은 뒤샹 자신의 레디메이드에 대한 개념 - 즉 '미적 향수'에 대한 반란 -을 단토가 패러프레이징한 것으로 봐야 합니다. 즉 '그럴듯하지 않다/적합하지 않다'는 판단의 주체는 단토이기 이전에 뒤샹이었던 셈이겠죠. 물론 단토는 뒤샹의 이러한 개념적 전환을 포스트모던/개념주의 예술의 맥락에서 중요하게 취급합니다.(이와 관련해서는 http://www.csulb.edu/~jvancamp/361_r1.html에 실린 단토의 다른 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로자님이 지적하신 모호함의 의미가 풀립니다. 결론은 이런 맥락들이 제시되지 않고서는 지적하신 부분은 논리상 모순으로 보이기 딱 좋은 부분이므로('미적 거리'라는 개념에 대한 로자님의 지적은 맞습니다. 뒤샹이 변기를 전시장에 갔다 놨다고 해서 예술적 오브제와 관람자 사이의 미적 거리가 깨지는 건 아닙니다. 이건 지젝도 지적한 부분이죠), 역자가 각주처리를 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delelection은 enjoyment(향유)의 의미도 갖고 있지만 원래 delight와 동일한 의미라는 점에서 '쾌'에 해당하므로 '향수'라는 역어도 재고할 만한 대상으로 보입니다.

qualia 2008-05-24 02:26   좋아요 0 | URL

palefire 님, 도움 말씀 고맙습니다. 알려주신 글을 읽어봤는데요, 아서 단토의 글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더군요. 다만, palefire 님의 오타 몇몇 개가 매우 마음에 걸립니다.

coco 2008-05-23 0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또 한가지, 여기서 unedifying objects는 빗자루나 변기 등을 예를 들면 피카소식으로 변형하거나 칠하거나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가져다 놓았다는 뜻입니다.

qualia 2008-05-24 02:29   좋아요 0 | URL

오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위에서 설명한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coco 2008-05-23 0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기가 듣고 본 것들을 저 몇문장에 투사하며 과시하는 대회같은 분위기로 흘러가는 듯 하군요. 독해의 기본은 필자의 글에 대해 될 수 있는 한 내재적이어야 합니다. 내재적인 독해만으로 한계가 있을 경우 외부의 참조대상도 의미가 있겠지요. 하지만 일단은 내재적이어야 하며, 대부분의 글, 특히 유럽어의 글은 그렇게 외부대상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런 글이 있다면 퀄리티가 나쁜 글이겠지요. 저는 뒤샹에 관심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저 간단한 문장에 대해 기본적인 단어의 의미와 앞뒤 맥락만 확인하는 이상을 바라지 않습니다. 이질적인 분위기인 듯하니 저는 이만 뒤로 물러나겠습니다. 좋은 토론 되세요^^

qualia 2008-05-24 02:40   좋아요 0 | URL

웬 뜬금없는 말씀이신지요? 토론/논쟁은 본디 자기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동원해 상대방을 논박하고 논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주장을 충분한 논거로써 적극적으로 내세우는 행위입니다. 물론 상대방의 견해가 옳다면 얼마든지 받아들이는 상호작용 행위가 진정한 토론/논쟁이겠죠.

뜻하지 않게 서로 감정을 다치게 했더라도 끝까지 가는 것이 토론의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carboni68 님 덕분에 많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아열대 2008-05-23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로자님이나 qualia 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미적거리'라는 말은 미학에서 자주 쓰이는 개념어입니다. carboni68님처럼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일단 자주 사용되는 개념어까지 의심해가면서 번역을 한다는 것에는 좀 무리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단토의 책을 다 읽어 보지도 않고 미리 판단을 내리는 것 역시 무리이긴 하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요.^^)
그런데 juin님이 하신 말씀은 제가 전해 생각해 보지 못했던 거로군요. 왜냐하면, the least likely places에 대한 해석을, 저로서는 계속 그 장소가 '전시장'일 거라고만 생각했었기 때문에, 그게 '일상적 장소'라고 해석한다면 또 이야기가 180도 달라지거든요. 아무튼 님의 말씀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나저나 전에 제가 들었던 수업 중에 아서 단토의 텍스트를 가지고 번역하는 게 거의 전부였던 수업이 있었는데 그 때의 악몽이 다시 되살아나는 듯합니다. 머리가 뱅글뱅글도네요. ^^단토는 워낙 유명한 사람입니다. 난해한 걸로. ㅋ

아열대 2008-05-23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juin이 생각하신 것처럼 해석해 본다면, 뒤샹의 행위는 특정한 미적 거리에 these unedifying objects를 놓고, 미적향수를 위해서는 improbable한 candidates를 rendering함으로 해서, 결과적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아름다움을 발견하기엔 부적당한) 일상적인 장소에서조차 아름다움따위를 발견할 수 있게 증명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다. 정도가 되겠네요. 흠..

qualia 2008-05-24 02:45   좋아요 0 | URL

규 님, 규 님의 추가 의견에 대해서 답변이 될 수 있는 댓글을 위 carboni68 님 글 밑에 올려 놨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토론 참여에 감사합니다.

coco 2008-05-24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시장을 미적거리가 있게 세팅할 수도 (아닐 수도) 있고, 미적거리의 정도를 조절(a certain)할 수도 있나요? 그럴 수 있는게 미적거리인가요? 미적거리를 통제하고 꾸미는 법에 대한 관련 서적 좀 소개해주시죠.^^ 그리고 전시장을 세팅한다는 이야기가 나왔으면 당연히 뒤에 나오는 place는 전시장이지, place에 그렇게 심오한 뜻이 있는줄은 몰랐습니다. 그리고 백번 양보하여 다 맞다고 치면 뒤샹이 의도했던 바가 전시장에서 변기의 아름다움을 확인한 후 이후에도 집에서 변기를 아름답게 생각하라는 것인가요? 여기 참 문제가 심각하군요....

qualia 2008-06-01 06:37   좋아요 0 | URL
carboni68 님의 위 말씀은 “미적 거리(aesthetic distance)” 개념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음을 보여줍니다. 도대체 미적 거리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조차 없이 무슨 논의가 가능하겠습니까? 그리고 띄어 쓰기 좀 올바로 지켜주십시오.

① carboni68 님 → “그리고 전시장을 세팅한다는 이야기가 나왔으면 당연히 뒤에 나오는 place는 전시장이지, place에 그렇게 심오한 뜻이 있는줄은 몰랐습니다.”

⇒ “전시장을 세팅”하다니요? 여기서 〈미적 거리〉는 기본적으로 심리(주의)적 개념입니다. 공간적으로 혹은 물리적으로 재거나 조절할 수 있는 실제의 거리 따위가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미적 거리〉는 전시장 같은 물리적 공간과는 관련이 없는 개념입니다. 간접적이고 부차적인 관련은 있다고 할 수도 있지만, 애초에 〈미적 거리〉 개념은 그런 간접적 · 부차적 관련이 전혀 없이 성립할 수 심적인 거리 개념입니다.

② carboni68 님 → “그리고 백번 양보하여 다 맞다고 치면 뒤샹이 의도했던 바가 전시장에서 변기의 아름다움을 확인한 후 이후에도 집에서 변기를 아름답게 생각하라는 것인가요? 여기 참 문제가 심각하군요....”

⇒ 참으로 요령부득인 말씀입니다. 기본적인 개념 파악도 없으면 횡설수설할 수밖에 없습니다.

로쟈 2008-05-24 2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순하게 'improbable'이 오역돼 있다는 걸 지적하려고 했는데, 예기치 않게도 많은 분들이 댓글을 달아주셨네요.^^; 인용문을 다 해석해두었더라면 오해의 소지도 줄었을 거란 생각이 사후적으로 듭니다. 일일이 답글 달지 않고 이것으로 대신합니다. 인용문에 대한 제 해석은 qualia님의 해석과 대동소이합니다. 한가지 차이라면 'places'를 저는 그대로 '장소들'이라고 본다는 것뿐입니다. 'the least likely places'를 '가장 있음직하지 않은 장소' 혹은 '가장 예기치 않은 장소'라고 해석하구요, 그건 일반적으로 '변기'가 놓여있을 장소라고는 기대되지 않는 미술 전시장이죠. 그곳에 뒤샹은 자전거 바퀴나 변기 등을 갖다놓았고, 그럼으로써 이 오브제들의 전혀 예기치 않았던 '미적 감흥'이 발견될 수 있도록 한 것이죠...

로쟈 2008-05-24 21:45   좋아요 0 | URL
미적 감흥을 불러일으킬 확률이 가장 낮은 대상으로서이긴 합니다. 저로선 미적 감흥을 인지적 충격(이것도 예술인가?!)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qualia 2008-06-01 09:02   좋아요 0 | URL

로쟈 님과 juin 님께 답변드립니다.

① 로쟈 님 → “한가지 차이라면 'places'를 저는 그대로 '장소들'이라고 본다는 것뿐입니다. 'the least likely places'를 '가장 있음직하지 않은 장소' 혹은 '가장 예기치 않은 장소'라고 해석하구요, 그건 일반적으로 '변기'가 놓여있을 장소라고는 기대되지 않는 미술 전시장이죠. 그곳에 뒤샹은 자전거 바퀴나 변기 등을 갖다놓았고, 그럼으로써 이 오브제들의 전혀 예기치 않았던 '미적 감흥'이 발견될 수 있도록 한 것이죠...”

⇒ 위에 인용해 놓으신 아서 단토(Arthur C. Danto)의 원문을 놓고 볼 때, 그 내용의 내적인 논리상, 〈the least likely places〉가 〈가장 있음직하지 않은 장소〉 혹은 〈가장 예기치 않은 장소〉따위로서의 전시장을 가리킨다고 해석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아 보이고 이상해 보입니다. 아름다움 혹은 미(美)가 발견되거나 발현되는(beauty of a sort can be found in ~) 대상은 구체적 사물이고 작품인데, 그리고 인용 문장 전체가 그 대상/작품과 관련지어 얘기하고 있는데, 그리고 마지막 문장은 앞 문장을 같은 의미로서 재차 함축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문장인데, 그 마지막 문장에서 갑자기 전시장 얘기를 한다는 것은 내적인 내용 논리상 전혀 느닷없어 보입니다. 제가 파악하는 바로는 〈~ in the least likely places〉를 〈미적 요소라고는 전혀 없을 것 같은 대상들 속에서도〉정도로 해석해야 그 내적 논리에 잘 들어맞는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가 그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용 문장 자체가 지닌 내적인 내용 논리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해석하자면, 〈미적 요소라고는 전혀 없을 것 같은 대상들 속에서도〉따위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여전히 생각합니다.

이에 대한 해석의 문제를 저자이신 아서 단토 교수님께 직접 여쭤보기로 하고, 지난 5월 25일 몇 가지 질문을 적어 전자우편을 보냈더랬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답신이 없네요.

② juin 님 → “단토의 글을 보면, 그 오브제들이 예기치 않게 '미적 감흥'의 대상이 '된다'가 아니라, 여전히 '미적 감흥'과 상관이 없는 채 거기(미술의 장) 존재함으로써 미의 본질을 문제삼는 것이고 미술은 이제 개념과 철학의 문제이므로 그 어떤 사물이든 어떤 지각적 요소든 잠재적으로 자격을 획득한다는 것이 아닌지요.”

⇒ 아서 단토의 얘기는 문제의 오브제들이 “여전히 '미적 감흥'과 상관이 없는 채 거기(미술의 장) 존재”한다는 얘기가 전혀 아닙니다. 아름다움과는 지극히 동떨어져 보이는 대상들이 미적 거리 안에 놓이게 되자 예기치 못한 미적 감흥을 불러일으켰고, 그 사실이 아름다움/미에 대한 종래의 통념을 재검토하게 했다는 얘기가 아닙니까? 따라서 그 오브제들이 미적 감흥과 상관이 없이 거기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모종의 새로운 미적 감흥을 불러일으키며 거기 있는 것이죠.

그러한 새로운 미적 감흥이 있었기에, 즉 종래의 미 개념을 재검토 · 재정의할 만한 것이 있다고 봤기 때문에, 아서 단토가 문제의 예술철학적 저작을 쓰게 된 것 아닙니까?

로쟈 2008-06-02 13:15   좋아요 0 | URL
qualia님의 의견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에 읽을 때는 아무래도 'places'와 'objects'를 동일시하기는 어려웠지요(저는 뒤샹의 작업이 갖는 의의를 '장소의 이동'이란 관점에서 읽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다시 보니까 가능할 것도 같습니다. 여전히 모호하긴 하지만. 단토 교수로부터 답신을 받게 되면 알려주시길...

아열대 2008-05-24 2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댓글이 꼭 화면에서 본 순서대로 달리지 않다는 게 신기하군요.^^
저 역시 places를 장소로 보지 않고 대상으로 본다는 건 지나친 억측이라고 생각합니다. 뒤샹이 처음에 변기를 '전시장'에 가져다 놓지 않았다면 이 모든 헤프닝이 일어나지 않았겠죠. ^^

qualia 2008-06-01 09:08   좋아요 0 | URL
규 님, “지나친 억측”은 아닙니다. 인용문의 내적인 내용 논리상 저는 그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중에 그 뜻이 정확히 밝혀지겠지만, 그래서 제가 그를 수도 있겠지만, 지금 현재로선 제 주장이 내용 논리적으로 타당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coco 2008-05-24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the least likely ... 는 beauty에 연결됩니다. 이건 시가 아닙니다.

로쟈 2008-05-24 20:25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시가 아니며 어렵게 해석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qualia 2008-06-01 09:14   좋아요 0 | URL
carboni68 님, 위 말씀은 〈beauty of a sort can be found in the least likely places〉라는 짧은 문장에서 당연한 말씀 아닙니까? 동어반복이죠. 다만, 이 문장을 어떻게 해석하고 번역하느냐가 문제겠죠.

coco 2008-05-24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qualia 2008-06-01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아서 단토 교수님께 지난 5월 25일 밤에 몇 가지 논란점에 대한 질문을 적어서 전자우편을 보냈더랬습니다. 아서 단토 교수님의 정확한 답변을 듣고 나서 논의하고자 지금까지 댓글을 올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6월 1일 지금까지 답신이 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 중간에 다시 전자우편을 보냈습니다만, 아직까지도 수신 확인조차 안 된 것으로 나옵니다.

아서 단토 교수님께선 1924년 01월 01일 생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나이로 올해 여든 다섯 살이십니다. 혹시 너무 연로하셔서 인터넷에 접근이 뜸하시기 때문일까요?

그리고 『일상적인 것의 변용』 번역판에는 로쟈 님께서 지적하신 것 이외에도 (현재까지 파악한 바로는) 약간의 문제점이 있더군요. 예컨대, 227쪽 각주 6)에 〈찬사적 힘은 비언표적 힘(illocutionary force)의 한 사례이다.〉라는 문장이 있는데요, 여기서 〈illocutionary force〉를 〈비언표적 힘〉이라고 번역한 것은 오류입니다. 〈illocutionary〉의 접두사 〈il-〉은 결코 〈not; 비(非)〉를 뜻하는 것이 아니죠. 〈in, into, within; 안, 내(內), 속〉을 뜻하는 접두사죠. 수많은 국내의 화용론(pragmatics) 관련 논문, 책에서 〈illocutionary force〉를 〈비언표적 힘〉이라고 잘못 번역해 쓰고 있습니다. 그런 오류를 답습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올바른 번역어조차 천차만별로 중구난방의 극치입니다. 한국의 언어학계는 도대체 뭐하고 있는 것일까요? 전문 학술 용어는 통일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일상적인 것의 변용』 한국어판의 성과나 중요성은 크다고 생각합니다. 번역자 분의 노고가 크다고 봅니다. 몇 가지 오류 때문에 번역자의 공이 줄어들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qualia 2008-06-03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서 단토 교수님께서 드디어 답장을 보내주셨습니다. (받은 날짜 2008-06-02, 22:58). 일주일째 수신 확인이 되지 않아 아예 포기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어젯밤 혹시나 하고 제 전자우편함을 열어봤더니, 〈arthur danto Re: Dear Professor Arthur Danto, I have so...〉라는 답신 문구가 첫눈에 확 들어오더라고요. 너무나 기쁜 나머지 한밤 환호성을 질렀더랬습니다. ^^ 정말 감사합니다. 저를 비롯한 토론/논쟁 참여자 혹은 참관자 분들께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이미 제 블로그에 제 질문 편지와 아서 단토 교수님의 답신을 올려놨습니다만, 이곳의 댓글란에 그 전문을 올려서, 이 번역 토론/논쟁을 알차게 이어나가도록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아무런 논평 없이 편지 원문을 그대로 올립니다. (각각의 원문에는 몇몇 오타와 탈자가 있습니다만, 고치지 않고 그대로 올립니다. 단, 제 실명과 전자우편 주소는 익명으로 하겠습니다). 많이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콸리아qualia의 질문 편지 ---------------------------------

Dear Professor Arthur Danto,

(Excuse me, Sir. But I already sent you my email concerning some questions about the various interpretations of some sentences in your book three days ago, and I am afraid that you have not yet check out my email. I also suspect that my email was treated as spam automatically, and so I want to send you my email again. I hope that my email can be received safely. My email addresses are: mind◇◇◇@naver.com; ♡♡♡mind@hanmail.net. Thanking you in anticipation.)

Hi, Professor Arthur Danto. My name is H-O-N. I am a Korean and translator. I live in Seoul, South Korea. I am very pleased to email you. I have some questions about the matter of translation of the meaningful sentences in your book. Would you give me some answers to my questions?

One of the most important books that you have written in 1981, The Transfiguration of the Commonplace, was recently translated into Korean by Professor H. Kim, Cheonan University. I congratulate you on the publication of Korean edition of your precious book.

By the way, the heated debate over the interpretation of some sentences of The Transfiguration of the Commonplace is now going on in a Korean blog site. I am participating as a leading member in this interesting debate.

The sentences in your book that we are now enjoying debating on their correct interpretations are as follows:

“It is (just) possible to appreciate his acts as setting these unedifying objects at a certain aesthetic distance, rendering them as improbable candidates for aesthetic delectation: practical demonstrations that beauty of a sort can be found in the least likely places.”

I have some questions about the correct interpretation of the important words/concepts in the above sentences:

(1) What do “these unedifying objects” refer to? In my view, the meaning of “these unedifying objects” seems to be everyday objects that are not usually thought to give us any aesthetic delectation. Here, I interpret the word “unedifying” as ‘not evoking any aesthetic experience in our minds’ or ‘not wring any aesthetic feelings from us’. Is my interpretation corret? Other debater argues that “unedifying” means ‘undisguised’. Which one do you mean? I want to know what meaning you intended to express by the word “unedifying”.

(2) In the debate among us, the most intensively discussed problem is what the proper meaning of “improbable candidates” is. I suspect that the word “improbable” should entail antinomy or paradox that in the above context everyday objects can not only be the mere simple ordinary objects that usually give us no aesthetic enjoyment but also the probable art works that give rise to aesthetic delectation when set at a certain aethetic distance. In other words, it seems to have paradoxical double meanings that oppose each other. Some argue, however, that “improbable candidates” just means what is not suitable for aesthetic delectation. But I do not think so. What do you think about this problem?

(3) what is the exact meaning of “the least likely places”? Do “places” mean galleries or museums in the above sentences? Many of us think so. But I do not think so. I regard this word “places” as equivalent to ‘commonplace objects’. What is the correct interpretation?

We are very confused with your highly profound book. We need your help. I am very happy to look forward to your kind answers.

With best wishes,

H-O-N

▷ 아서 단토 교수님의 답장 --------------------------------------

Dear H-O-N,

Thank you for your kind letter, and for taking the trouble to write. I
realized when I re-read the sentence in your letter, that it is at once
high condensed, and at the same time rather casual, which was my style
at the time I wrote the book, and probably still is.

It is obviously bout Duchamp's readymades, which I took for granted were
unedifying. They were - and are - very familiar objects, with very
familiar uses, at least in American everyday life.
he snow shovel is meant to clear the ground of snow, the grooming comb
is meant to comb the hair of household pets etc. They are not
"edifying." in that they do not instruct, uplift, or make better persons
of us.

"Setting at an aesthetic distance." makes use of a familiar concept in
aesthetic theory, the idea of of "aesthetic distance" - it was an
expression first used by E. Ballough in a famous essay - and it means
displaying the object in such a way that there is no inclination to use
it, but merely to look at it. The notion of distance is metaphorical.
You would probably find Balloughh's essay in any anthology of Anglo
American aesthetics.

And the reference to beauty in "the least likely places" means: once we
set the object at an aesthetic distance, i.e., once we cannot use it,
then we might begin to see that the object is beautiful. The urinal that
Duchamp tried to exhibit in 1917 might have been set at an aesthetic
distance by virtue of its placement in an exhibition space, like a
gallery.There it would be unavailable for use, and one might be
impressed with the beauty of the form - something that we would be blind
to if we simply entered a men's room and urinated, without thinking of
the aesthetics of the receptacle.

The sentence was meant to be a little satirical. In fact the whole book
is full of satirical or ironical passages. This is one.

Thanks you for your interest, and your enthusiasm!

Good luck!

Arthur Danto

군말: 제가 아서 단토 교수님께 ‘서울’에 산다고 했는데요. 사실, 저는 지방 도시에 삽니다. 외국인한테는 한국의 수도를 말해줘야 감을 잡을 것 같아서, 편의상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 산다고 한 것이랍니다.

로쟈 2008-06-03 13:21   좋아요 0 | URL
qualia님 해석이 맞네요. 저자의 설명을 들으니 명쾌합니다. 답변을 얻어내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