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계속되고 있는 촛불시위에서 20년전(87년 6월)의 기억을 떠올리는 이들도 드물진 않다. 하지만 세상은 좀 달라졌고 시위문화 또한 그러하다. 웹2.0 기반의 인터넷이 새로운 '참여형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하고 있다는 진단은 그런 점에서 눈길을 끈다. '2.0 민주주의 시대'로 돌입하게 되는 것인지 사태의 추이가 주목된다. 오늘자 지면에 실리는 듯한 기사 두 편을 옮겨놓는다.

한겨레(08. 06. 03) '참여형 인터넷’이 민주주의 토양

새로운 정보화 기술을 이용한 온라인 ‘촛불시위대’가 집회·시위 문화에 일대 변화를 이끌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번 시위가 ‘웹2.0’의 전형적 특징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웹 2.0이란 공급자 중심이던 초창기 인터넷 이용과 달리, 서비스 업체가 플랫폼을 이용자에게 개방하며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면, 이용자 스스로 참여와 소통을 활성화하고 새로운 콘텐츠까지 만들어내는 ‘참여지향형 인터넷 이용 형태’를 말한다.

무선인터넷 활용한 현장 생중계= 과거에 특정 게시판과 사이트를 중심으로 정보교환과 연락이 이뤄지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무선인터넷 기술과 동영상 중계가 전면에 등장했다. 이런 변화는 대규모 장외집회가 열릴 때마다 이를 중계해온 <오마이뉴스>의 중계방식 변화에서도 나타난다. 오마이뉴스는 그동안 텍스트와 사진을 중심으로 편집한 기사를 ‘현장 O신’ 형태로 시차를 두고 올려왔지만, 이번에는 동영상 현장중계가 중심이었다.

오마이뉴스 이종호 방송팀장은 “현장에서 와이브로를 이용해서 중계센터로 송출해서 화면을 변환하고 자막을 입혀서 내보냈다”며 “전에는 생중계를 하려면 차 한 대 분량의 장비가 출동해야 했으나, 무선인터넷 덕분에 노트북과 캠코더면 충분해 기동성이 높아졌다”고 밝혔다. 이 팀장은 “1일 하루 인터넷 중계를 본 사람만 122만2천명으로, 사상 최고치였다”고 말했다.


인터넷에서 개인이 채널을 열고 실시간 방송을 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아프리카(www.afreeca.com)는 플랫폼 개방을 통해 이용자들의 적극 참여를 끌어낸 곳이다. 아프리카를 서비스하는 나우콤의 집계로, 촛불집회가 본격화한 지난달 25일부터 지난 1일까지 생중계된 인터넷 개인방송의 누적 시청자 수가 400만명을 넘어섰다. 갈수록 생중계 채널과 시청자가 늘어 1일에는 2501개 채널을 통해 시청자가 127만명을 넘어섰다. 2500개가 넘는 중계 채널이 만들어지는 이유는 채널당 200명인 접속자가 꽉 차면 자동으로 영상을 전달받아 방송하는 또다른 채널이 열리기 때문이다.

나우콤 박은희 팀장은 “노트북·캠코더·무선인터넷만 있으면 누구나 생중계가 가능하다”며 “현장에서 노트북에 물린 캠코더로 찍은 영상이 편집 없이 실시간 중계되는 방식”이라고 밝혔다. 박 팀장은 “중계방송을 보다 집회현장으로 달려나갔다는 사람들도 많다”며 “서비스를 한 지 3년간 이번처럼 많은 이용자가 몰리기는 처음”이라고 말했다.

청소년들의 앞선 정보화 마인드= 이번 집회에서 중심으로 나선 10대들의 앞선 정보화 마인드도 변화를 설명하는 요소다. 촛불집회를 주도한 청소년 세대는 휴대전화·캠코더 등 정보화 기기를 사용하는 능력이 20·30대에 비해 탁월하다. 이들은 게시판에 글을 올리고 읽는 용도로 사용되던 인터넷 기술을 획기적으로 업그레이드시켰다.

사이버문화연구소 박수호 사무국장은 “인터넷이 정보를 확산시키는 역할은 잘 하지만 구체적 행동을 끌어내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며 “게시판은 익명성이지만 휴대전화를 통해 친구에게 집회 참가를 제안할 경우 행동으로 이어지기 쉽다”고 말했다. 박 국장은 “인터넷을 통한 인지 확산과 휴대전화를 통한 네트워킹으로 실제 참여를 이끌어낸 데에는 정보화 마인드가 뛰어난 청소년들의 역할이 크다”고 설명했다.

그런 점에서 청소년들의 가담을 선동에 의한 것으로 보는 시각은 성급하다. 윤영민 한양대 교수(정보사회학)는 “선동이란 잠시 누군가가 잘못된 정보로 대중을 속이려는 것인데 웹2.0 시대의 인터넷에서는 선동이 통하지 않는다”며 “인터넷에는 수많은 정보채널이 있기 때문에 누군가 잠시 동안 일부를 속일 수는 있어도 오래가지 못한다”고 말했다.(구본권 기자)

한겨레(08. 06. 03) “공유와 연대는 우리의 힘”…실시간 ‘일파만파’

동호회 카페, 주부 모임 등 각종 온라인 소모임들이 빚어내는 인터넷 여론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새로운 싹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의 특성은 무엇보다도 기민한 대응력. 편을 가르고 탁상공론할 시간도 없이 실시간으로 여론을 형성하고 ‘행동’한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시위 과정에서 보여준 이들 온라인 풀뿌리 조직은 새로운 ‘피플파워’로 등장할 조짐이다.

■ 뒤흔든다=라인에서 형성된 ‘촛불 여론’의 힘은 시장까지 뒤흔들 정도다. 주방용 생활용품 전문업체인 락앤락은 1일부터 문화방송 라디오의 <정오의 희망곡 정선희입니다>에 협찬을 중단했다. 진행자인 정선희씨가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 비하 발언으로 논란에 휩싸인 뒤, 이 회사에 누리꾼들의 항의가 빗발친 때문이다. 이 회사 관계자는 “회사 홈페이지 게시판과 고객상담실에 정선희씨가 진행하는 정오의 희망곡에 협찬을 하는 데 항의하는 글과 전화가 쏟아져 6월부터 협찬을 중단하기로 결정하자 다시 격려하는 글이 올라오고 있다”고 말했다.

누리꾼들은 또 2일치 <조선일보>에 광고한 업체들의 목록을 게시판에 올려놓고 전화 돌리기 운동을 펴고 있다. ‘조중동’ 웹사이트에 배너광고를 게시한 업체에도 항의중이다. 이들 사이트에 1일까지 배너광고 내보냈던 지마켓은 2일 배너광고를 아예 내려야 했다.

■ 끝이 없다=포털사이트 다음의 토론방인 아고라와 주부들이 활동하는 82쿡, 마이클럽 등의 사이트에는 ‘조·중·동’ 3개 언론사에 광고를 실은 기업들 리스트가 올라온다. 기업 이름은 물론 고객 의견을 접수하는 전화번호, 사이트 주소까지 시시각각 ‘업데이트’된다. 한 누리꾼은 매일 주요 일간지 1면을 디지컬카메라로 찍어 블로그에 올리고 있다. 전날 촛불집회에 대해 어떻게 보도하고 있는지 비교하기 위해서다.

누리꾼들이 올리는 정보들은 제각각이지만 여러 정보들이 스크랩되고 퍼날라지면서 시너지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한 누리꾼이 ‘집회때 전경이 여학생을 밟았다’고 올리면 다른 목격담들이 합해져 포털 사이트에 올라간다. 곧 이어 언론매체에 관련 동영상이 뜨고, 학생의 신상이 나오고, 현장에서 치료했다는 의사의 얘기도 더해진다. 조각조각의 정보들이 합해져 누리꾼들은 ‘폭력경찰 규탄하자’는 대책을 논의하기에 이른다.

■ 빠르다=누리꾼들의 움직임은 실시간이다. 김이태 한국건설기술연구원(건기연) 연구원이 지난달 23일 ‘양심선언’ 글을 올리자 곧 이어 “김이태 연구원을 보호하자”는 글들이 포털 사이트에 올라왔고 일파만파로 퍼졌다. 이에 다음날 건기연 쪽은 “김 연구원을 처벌할 근거는 없다”는 의견을 밝혔다. 경찰청에서 지난달 “온라인 시위 주동자를 처벌하겠다”고 밝히자마자 시민들은 “나도 잡아가라”는 글을 실시간으로 올렸다. ‘새로고침’을 누르기가 무섭게 한 페이지씩 글이 올라오더니 경찰청 홈페이지는 결국 마비되기도 했다.

지난 1일 시위대와 경찰이 대치하자 한 누리꾼은 구글어스에 대치 위치를 표시해 올려놨고, 곧 이어 초 단위로 현재 상황에 대한 댓글들이 달렸다. 신광영 중앙대(사회학과)교수는 “누리꾼들은 이른바 관료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 자신들의 의견을 표출하기 때문에 사안에 빠르게 대처할 수 있다”고 말했다.

■ 성과 내기도=누리꾼들의 이런 양태는 구체적인 성과로 나타나기도 했다. 목우촌 등 조선일보에 광고를 실었던 기업들은 ‘국민들의 뜻을 헤아리지 못했다’며 광고 중단 선언과 함께 사과문을 올렸다.‘촛불집회 비하 발언’을 해 논란이 됐던 정선희씨는 자신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일부 광고가 중단되는 경험을 해야 했다.(송경화 박현정 기자)

08. 06.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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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필름2.0을 보다가 알게 된 건데, 오는 5일부터 개막하는 제9회 서울국제영화제에서 러시아의 여성 영화감독 스'베틀라나 프로슈리나'의 <최고의 날들>이 개막작으로 상영된다고 한다('프로스쿠리나 Svetlana Proskurina'란 이름이 왜 '프로슈리나'로 표기되는지 모르겠다). 내게도 생소한 이름이지만 알렉산드르 소쿠로프 감독과 공동작업을 하는 '러시아 예술영화의 대모'라고 한다(찾아보니 <러시아 방주>의 각본을 썼다). 관련소식을 옮겨놓는다. 영화를 몇 편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소식] 스베틀라나 프로슈리나 특별전

2008년 제9회 서울국제영화제가 국내 최초로 소개하는 특별한 프로그램이 여름의 시작과 함께 관객들을 찾아간다. 우리나라에서는 생소한 이름이지만 1990년 <우연한 왈츠(The Accidental Waltz)>로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황금표범상을 수상했고 올해 로테르담 영화제에서 회고전까지 열린 러시아 여성 감독 '스베틀라나 프로슈리나 감독 특별전'이 바로 그것!

첫 작품 <페어런츠 데이(Parent's Day)>부터 2008년 최근작 <최고의 날들(The Best of Times)>에 이르기까지 위태로운 인간존재의 모습과 내면을 특유의 세밀함으로 묘파해 온 프로슈리나 감독은 알렉산더 소쿠로프(Alexander Sokurov) 감독과 공동 작업을 하는 등 러시아 예술영화의 계보를 이어오고 있는 감독이다.

이번 서울국제영화제에서는 그녀의 특별전을 마련하면서 이 노년의 감독이 직접 방한해 자신의 장편 전 작품 6편과 그녀의 친구이자 멘토인 알렉산더 소쿠로프에 대한 개인적인 오마주인 다큐멘터리 1작품을 소개하고, 관객들과 직접 자신의 영화세계와 러시아 영화에 대해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는 '마스터 클래스'도 마련한다.

제9회 서울국제영화제가 마련한 '스베틀라나 프로슈리나 감독 특별전(Svetlana Proskurina Retrospective)' 에서 인물들 사이의 친밀성과 질투, 욕망과 죄 등 인간 실존의 조건들을 내밀하게 그러나 최소의 것으로 응집시키고 있는 작품들을 통해 그녀의 영화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을 만나는 특별한 시간을 가져보자.

Светлана Проскурина
биография

* '스베틀라나 프로슈리나 특별전' 상영작 목록

- <페어런츠 데이(Parent's Day)>
  Svetlana ProskurinaⅠRussiaⅠ1981Ⅰ30min
Molodost 영화제 신인감독상, 최우수단편상, 최우수여우주연상

- <플레이그라운드(Playground)>
스베틀라나 프로슈리나 Svetlana ProskurinaⅠRussiaⅠ1986Ⅰ77min
카를로비바리 영화제 경쟁부문



- <우연한 왈츠(Accidental Waltz)>
스베틀라나 프로슈리나 Svetlana ProskurinaⅠRussiaⅠ1989Ⅰ92min
로카르노 영화제 황금표범상
마르세이유 페스티발 여우주연상, 까르띠에 특별상
산 세바스티안, 토론토, 몬트리올, 이스탄불, 로테르담, 예테보리 영화제 상영

- <거울 속의 투영(The reflection in the mirror)>
스베틀라나 프로슈리나 Svetlana ProskurinaⅠRussiaⅠ1992Ⅰ80min
깐느 영화제 감독주간
뮌헨, 토론토, 몬트리올, 로테르담 영화제 상영
1995년 뉴욕 링컨센터 회고전



- <섬. 알렉산더 소쿠로프(Islands. Alexander Sokurov)>
스베틀라나 프로슈리나 Svetlana ProskurinaⅠRussiaⅠ2003Ⅰ38min

- <원격 접속(Remote Access)>
스베틀라나 프로슈리나 Svetlana ProskurinaⅠRussiaⅠ2004Ⅰ88min
베니스 영화제 경쟁부문
러시아 키노쇼크 영화제 최우수 여자주연상
모스크바 영화제 최우수 작품을 위한 필름클럽상
블라디보스토크 Pacific Meridians 영화제 최우수 감독상, 최우수 여우주연상, 최우수 여우조연상



- <최고의 날들(The Best of Times)>
스베틀라나 프로슈리나 Svetlana ProskurinaⅠRussiaⅠ2007Ⅰ93min
2008 로테르담 영화제 회고전

08. 06.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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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8-06-03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스터도 그렇고, <최고의 날들>의 주연들인가요? 배우들의 모습도 시선을 끄네요..

로쟈 2008-06-04 00:11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보고 싶은 영화들이긴 한데, 이번주도 올스톱이어서.--;

노이에자이트 2008-06-04 0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아는 소련 여배우는 루드밀라 사벨리에바가 제일 좋아요.<해바라기>에서 눈밭을 배경으로 등장하는 장면...관람석에서 탄성을 지르는 이들이 많았어요.이 장면에서...이런 누나들은 안 늙는 주사를 맞아야 하는데...
예전 교육방송에서 이 배우가 나타샤 역으로 나오는 전쟁과 평화 방영할 때는 너무 길어서 (며칠 한 것 같음)못 봤지요.근데 영화 해바라기를 검색창에 알아보니 김래원 허이제 주연 해바라기만 나오네요.인터넷 정보의 한계...

로쟈 2008-06-04 18:11   좋아요 0 | URL
<전쟁과 평화>가 데뷔작이었죠.^^
 

이번주 시사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129#). 존 터먼의 <미국이 세계를 망친 100가지 방법>(재인, 2008)을 읽고 적은 것이다. 이어서 '101가지'까지 계속 세면(저자도 이 목록은 한참 더 늘어날 수 있다고 했다) 한국과의 쇠고기 협상도 포함되리란 내용까지 적으려고 했지만 분량이 금세 차버렸고, 마감에 몰려 쓴 글인지라 따로 원고를 조정할 시간도 없었다(가장 쉽게 쓴 글이지만 편집부에는 가장 늦게 보낸 글이다. 지면에서 읽으니 복수로 적은 명사들이 모두 단수로 교정돼 있다)...

 

시사IN(08. 06. 07) 오만하고 저급한 제국을 발가벗기다

“기만이 만연한 시대에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은 혁명적 행위이다.” 미국 MIT대학의 국제학연구소장인 저자가 서두로 삼은 조지 오웰의 말이다. 곧 그가 보기에 ‘기만이 만연한 시대’가 바로 우리 시대이며, 이 시대의 진실이란 ‘세계최강대국’을 자임하는 미국이 그동안 세계를 망쳐놓았다는 것이다. 그것도 한두 가지가 아니라 100가지 방법으로. “그게 어디 100가지뿐이겠어?”란 생각이 먼저 드는 독자라면 굳이 펼쳐보지 않아도 좋을 책이다. 하지만 여전히 ‘아메리칸 드림’의 예찬론자이면서 “미국이 정말로 100여 가지의 방식으로 세계를 망쳐놓았을까?” 의구심이 드는 독자라면 하나, 둘 세면서 차근차근 읽어볼 필요가 있다.

이번에 나온 번역본은 영어본과 다르게 주제별로 재구성돼 있다. 그럼에도 미국의 ‘죄목’으로 제일 먼저 다루어진 항목은 공통적인데, 그것은 ‘지구의 기후 변화’에 끼친 미국의 악영향이다. 얼핏 미국의 패권주의적 외교정책과 침략전쟁 등에 견주면 죄상이 가벼워 보이지만 저자가 보기엔 매우 중차대한 문제다. 미국 문명 자체의 지속가능성에 대해서 의문을 갖게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이 미국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세계 최대의 오염원이며 온실 가스 최다 배출국이다. 통계에 따르면 전세계 인구의 4퍼센트가 사는 나라에서 지구 전체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25퍼센트를 대기중으로 쏟아내고 있다. 그럼에도 미국은 온실 가스 배출량을 규제하고자 하는 ‘교토의정서’에 서명하지 않고 있다. 세계 157개국이 서명하고 비준한 협약인데도 말이다.

이유가 무엇일까? 미국을 움직이는 거대 기업의 이익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부시 대통령은 아예 “교토 협약이 우리 경제를 파멸시킬 것”이라고 천명했다. ‘우리 경제’는 물론 ‘미국 경제’이며 환경파괴가 낳을 전지구적 재앙보다는 미국 경제와 미국 기업의 이익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 부시를 비롯한 미국 권력 엘리트의 판단인 셈이다. 거기서 ‘민주주의’란 대의는 한갓 허울에 불과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미국의 강한 권력은 바로 ‘돈’이다. ‘돈’이라는 권력은 국제 무역이나 환경 관련조치, 전쟁, 그밖에 지구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친다.” 테러와의 전쟁조차도 거대 군수업자들이 미 재무부의 예산을 더 뜯어내기 위한 술수였다는 것이 저자의 시각이다. 그렇게 돈에 의해 좌우되는 미국식 민주주의를 저자는 ‘금권(gilded) 민주주의'라고 이름을 붙인다.

이 ‘금권’의 관점에서만 보자면, ‘부자 나라’ 미국은 대단히 성공한 나라다. 전 세계적으로 순자산이 80억 달러가 넘은 사람 중 절반이 미국인이고, 나머지 절반의 반수 가량도 미국에 의존해 있다고 하니까 말이다. 이 부자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끌어들이는 데에만 전념한다. 악행을 저지르고, 자선에 인색하며 정부 특혜와 재정 혜택을 요구하고, 재산을 은닉하고, 세금 감면을 촉구한다. “미국은 이와 같은 부자들의 추악한 행위가 정점에 달한 나라이다.” 덕분에 점점 빈털터리가 되어 가는 세계인에게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도 부자가 되어 우리처럼 인생을 즐겨라!

그런데 한편으로 지난 30년간 미국의 가계 실질 소득은 증가하지 않았고 오히려 소득 불균형만 점차 늘어나고 있는 형편이라면 이 ‘아메리칸 드림’이야말로 불평등한 꿈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미국 빈곤층의 장시간 노동으로 이룩한 경제성장의 과실을 소수가 독식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미국 기업 경영진의 봉급은 노동자 평균 임금의 475배에 이른다고 한다. 일본이 11, 영국이 22배인 것과 비교해보아도 얼마나 터무니없는 차이인가를 알 수 있다. 과연 이러한 미국식 표준이 ‘글로벌 스탠더드’가 될 만한 것일까?

책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오만과 저급한 상업문화에 대해서 줄곧 신랄하게 비판한다. 하지만 서문을 쓴 하워드 진의 말대로 “이런 책을 쓰고 읽고 출판하는 행위야말로 민주주의를 고양하는 일”이다. 감상적인 자기애를 바로잡고, 스스로를 정직하게 바라보는 힘, 그래도 미국을 버텨주는 힘은 거기에 있을 것이다.

08. 06. 02.

P.S. 미국식 '금권 민주주의'를 화제로 다루었지만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대목은 '자기계발' 열풍에 대한 비판이었다. 요즘 출판계에서 유행하는 '시크릿' 열풍을 보면 한국사회도 얼마나 '미국화'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하긴 "부자 되세요!" 할 때부터 싹수가 노랗긴 했다). 연구해볼 만한 주제이다.

아침에 전철역에서 사읽은 이번주 시사IN에 실린 '외국IN 에세이' 꼭지에는 우연찮게도 '이산화탄소' 얘기가 실려 있다. 독일인 필자가 지적하고 있는 바에 따르면, "한국인에게는 슬픈 소식이지만, 한국은 1m당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나라다. 1km당 5000t에 이르는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는데 이 수치는 이산화탄소 세계 최대 배출국이라는 미국보다 8배 더 높다."고 한다. 우리에겐 '기후 변화'이전에 '호흡'부터가 문제인 것이니 경각심을 좀 가질 필요가 있다. '이산화탄소를 산소처럼 먹는 사람들'이란 핀잔을 듣지 않으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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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이 2008-06-02 1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Guilded가 금권으로 번역되었군요. Guilded는 보통 도금이라고 많이들 번역하던데 말이죠. Golden Age를 비판한 마크 트웨인의 Guilded Age, 도금시대도 있고...^^; 관심가는 책입니다.

로쟈 2008-06-02 22:35   좋아요 0 | URL
'도금 민주주의'란 말은 아무래도 좀 어색하죠.^^

Kitty 2008-06-03 0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크릿 저 책은 처음 보고 뭐 저런 책을 팔 생각을 했나, 누가 저렇게 저걸 많이 읽나 했는데 한국에서도 히트친 모양이군요;;;

로쟈 2008-06-03 13:21   좋아요 0 | URL
'대박' 수준입니다.--;
 

어제 KTX를 타고 지방에 다녀오며 기차에서 잠을 청했더니 자정이 넘어도 맨정신이다. 그렇다고 생산적인 일을 할 만한 두뇌 상태는 아니어서 '이달에 읽을 만한 책'의 리스트나 만들어둔다. 하던 대로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의 추천도서 목록에다가 최근에 나온 관심도서들을 덧붙인다. '읽을 만한 책'이라곤 하지만, 정작 읽을 시간을 내기는 어려운지라 반이상은 '안 읽고 넘어간 책'의 목록으로 남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1. 문학

문학분야의 책은 작가 신경숙이 추천한 김중혁의 <악기의 도서관>(문학동네, 2008)이다. 따로 추천이 아니더라도 지난달에 나온 국내소설 가운데 가장 평이 좋은 작품집이 아닌가 싶다(컬처뉴스의 리뷰는 http://www.culturenews.net/read.asp?title_up_code=001&title_down_code=002&area_code_num=113&article_num=9210 참조). 두번째 단편집인데, 이제 다음 순서는 장편소설이 되는 것인지? 개인적으론 이미 지난달에 '5월에 읽을 만한 책'으로 올려놓았기에 자세한 언급은 피한다(나는 몇 편의 단편을 읽었다). 이 두번째 소설집과 같이 읽을 만한 책은 데뷔작 <환상수족>에 이어서 두번째 시집을 낸 이민하의 <음악처럼 스캔들처럼>(문학과지성사, 2008)이다.

나는 구름! 나는 표범! 나는 나비!
살이 벗겨지도록 일광욕을 하며 기린초의 꿀을 빠는
노란 입술 빨간 종아리
울긋불긋 이름이 많은 나를 부르며 목이 쭉쭉 늘어나는
너를 기린이라 부를래
그러면 너는 흑마술 같은 울음
바늘이 되어 나의 이름에 꾹꾹 文身을 하는
너를 자꾸 통과하며 門身이 되는
나는 죽어서도 구름표범나비
표본실에 묻혀 사각사각 날개를 펴고 접으며
찍을 테면 찍어봐! 포즈를 바꾸며

꿈꾸는 시인의 '스캔들' 모음집? 이 소설집/시집들과 같이 읽어볼 만한 책은, "중국문학의 차세대 작가군을 대표하는 소설가"라는 비페이위(1964- )의 소설집 <청의>(문학동네, 2008)와 장편소설 <위미>(문학동네, 2008)이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지만 벌써부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듯하다. 루쉰상을 이미 두 차례나 수상한 작가라고 하니까 '명불허전'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이미 40대 중반의 작가이긴 하나 중국문학의 차세대 기대주의 작품들을 한국의 젊은 시인/작가들과 겹쳐읽는 것도 유익한 경험이 되겠다.

 

 

 

 

2. 역사

역사분야의 책으로 이덕일 소장이 추천한 책은 '그들이 본 우리' 총서의 첫 번째 책으로 나온 <임진난의 기록>(살림, 2008)이다. "저자 루이스 프로이스는 포르투갈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로서 1563년 일본에 파견되어 임진왜란이 끝나기 한 해 전인 1597년 나가사키에서 사망하는데, 이 책은 그가 집필한 <일본사>의 마지막 열 개 장을 번역한 것"이라 한다. 

소개에 따르면, "이 책은 선교사의 책답게 천주교 신자였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용감한 장수’라고 우호적으로 서술하는 한편, 경쟁자였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는 ‘사악한 이교도인’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일본군이 조선에서 겪은 일을 생생히 전해주면서 귀중한 일차 사료들도 보여주는데,(...) 일본선교사였던 서양인의 시각으로 본 임진왜란은 새로운 시각과 생각거리를 제시해 줄 것이다."

덕분에 기억난 책은 <임진왜란, 동아시아 삼국전쟁>(휴머니스트, 2007)이다. "2006년 서강대학교 국제한국학센터의 주최로 ‘임진왜란: 조일(朝日)전쟁에서 동아시아 삼국전쟁으로’란 주제로 열렸던 국제학술회의의 결과를 담고 있는 책"으로 "익히 한국과 일본의 전쟁이라고 알려진 임진왜란을 전근대 역사에서 한·중·일 삼국이 개입한 거의 유일한 대규모의 전쟁이라는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한다. 

덕분에 왜란을 전후로 조선사에 약간 관심을 갖게 되는데, 최근에 나온 책들 가운데 김찬웅이 엮은 <선비의 육아일기를 읽다>(글항아리, 2008)과 이건창의 글을 모은 <조선의 마지막 문장>(글항아리, 2008)이 눈에 띈다. 소재는 다르지만 조선시대 선비들의 삶과 글에 대한 감각을 살펴볼 수 있겠다.

 

 

 

 

한편, 요즘 이명박의 모습에서 선조를 연상하는 칼럼들이 올라오고 있는데, 가장 대표적으론 '선조와 이명박 대통령'(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290465.html),  백성을 버리고 떠난 임금들'(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90651.html)을 참조해볼 수 있다. 선조실록은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10>(휴머니스트, 2007)이 별권으로 나와 있다. 이 유약했던 임금에게 당대 최고의 학자들인 퇴계와 율곡이 각각 <성학십도>와 <성학집요>를 지어서 바친 일은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오만하고 어리석은 임금은 거유들도 구제할 수 없었다. 이 교훈을 이 시대에 다시 확인해야 하는 것인지? 강명관 교수는 이렇게 꼬집는다.

조선의 지배층, 곧 왕과 양반은 평시에 백성들의 생산 위에 풍요를 누렸고, 백성을 제 마음대로 죽이고 살리며 위세를 떨었지만, 다급해지면 자신들의 안위를 챙기느라 백성을 버리고 몰래 피난을 떠났다. 백성이 잡혀가도 속수무책이고 잡혀갔던 백성이 돌아오면 더럽혀졌네, 어떠네 하면서 쫓아내었다. 두 전쟁은 요컨대 양반 지배 체제의 속성을 드러내는 시금석이었던 것이다.

미국 쇠고기가 위험하다는 국민의 걱정을 괴담으로 치부하고, 국민 대다수가 반대하는 대운하를 계속 파자고 우기는 당신들의 정체는 무엇인가. 대한민국 헌법은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하고 있는데, 국민을 무시하는 권력을 행사하는 당신들은 누구인가? 혹 그 옛날 도성을 버리고 떠난 그분들의 후예는 아니신가. 아니면, 잡혀가는 백성들을 그냥 바라보고, 돌아온 백성들을 더럽다며 내쫓은 그분들의 후예는 아니신가.






 

 

3. 철학 

김상환 교수가 추천한 철학분야의 책은 권수현의 <문화철학과 자율성>(철학과현실사, 2008)이다. 외관상으론 딱딱한 철학서 정도인데, 소개는 좀 의외이다.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는 요즈음, 대중문화연구자들이 아니라 대중들을 위한 문화철학서가 새로 나왔다. <문화철학과 자율성>은 제목의 딱딱한 인상과 달리, 대중문화를 소비하거나 생산하는 일반인들이 편하게 읽고 쉽게 이해하여 대중문화에 대한 자신들의 태도를 생각해볼 수 있도록 마련된 책"이라니까. 분량도 150여쪽에 불과해서 그냥 앉은 자리에서 다 읽을 만하다.

책은 주로 대중문화와 관련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지만 '문화철학'이란 말에 이끌려 떠올리게 되는 철학자는 문화철학의 원조쯤 되는 에른스트 캇시러이다. 그의 대표작인 <인간이란 무엇인가>(창, 2008)이 최근에 다시 나온 때문이기도 하다. <문화과학의 논리>(길, 2007)도 비교적 최근에 나온 책이다. 20년쯤 전에 서점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게 그의 책들이었는지라 약간의 만감을 느끼게 된다.  

 

 

 

 

4. 정치

손호철 교수가 추천한 정치분야의 책은 이문영 교수의 자서전 <겁 많은 자의 용기>(삼인, 2008)이다. 출간 당시 언론의 주목을 받았던 책인데, 간략한 소개는 이렇다. "1970-1980년대 소위 민주교수로 여러 번 감옥을 간 사람 중에 이문영 전 고려대 교수가 있다. 사회참여에 적극적이고 감옥도 자주 간만큼 꽤나 급진적이고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겁 많은 사람이고 청교도적 자본주의를 신봉하는 보수주의자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지켜야 할 최소의 것들이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에 ‘겁 많은 보수주의자’가 용기를 내서 목소리를 높여야 했다는 것이다. 이문영의 자서전 <겁 많은 자의 용기>는 여러 면에서 한번쯤 읽어보아야 할 책이다. 이는 어두웠던 우리의 현대사에 대한 증언으로서 의미가 있다."

말하자면, 한 양심적인 지식인이 증언하는 한국 현대사 정도가 되겠다. 최근에 읽은 것으로 그런 '양심'을 보여주는 책은 존 터먼의 <미국이 세계를 망친 100가지 방법>(재인, 2008)이다. 제목 그대로 미국 지식인의 신랄한 자국 비판서인데 저자가 감옥에 갔다는 얘기는 없다. 물론 책의 말미에 실린 '미국이 세계에서 잘하고 있는 일 10가지'는 번역본에서 빠져 있기에 우리에게만 더 과격해보이는 탓도 있다. 하워드 진의 서문대로 "부당한 권리에 이의를 제기하고, 도전하고, 저항하며, 미국인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생명과 자유와 행복 추구의 권리를 가졌다고 주장하는 것은 우리 미국의 명예로운 전통이다. 그리고 존 터먼은 바로 그런 전통과 사상에 입각하여 이 책을 썼다. 이런 책을 쓰고 읽고 출판하는 행위야말로 민주주의를 고양하는 일이다." 그러니 오히려 이런 비판서를 부러워해야 할까? '우리가 잘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얼른 떠오르지 않는 걸 보면 말이다.



 

 

 

5. 경제/경영 

정운찬 교수가 뽑은 경제/경영서는 <중소기업, 인재가 희망이다>(삼성경제연구소, 2008). 나로선 손에 들 일이 전혀 없는 책이긴 한데, 요점은 이렇다고 한다. "이 책의 저자들이 거듭 강조하는 것처럼 중소·벤처 기업들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인재 발굴 및 육성, 시스템 경영 및 성과주의의 정착, 학습하는 조직문화의 구축 등이 절실히 요구된다. 책의 뒷부분에는 수많은 성과주의 인사 및 인적자원 개발 성공사례가 풍부히 실려 책의 매력을 더해주고 있다."

그래도 최근에 눈길이 경제학 책은 데이비드 워시의 <지식경제학 미스터리>(김영사, 2008)이다. '지식경영'이란 말보다는 드물게 접하는 용어여서 '지식경제학'이란 게 무엇인가 싶은데, 간단한 소개는 이렇다.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과 '핀 공장' 이론의 딜레마를 해결하고, 창발적 아이디어의 힘이 인류의 경제적 진보를 이끈다는 폴 로머의 '신성장 이론'을 탄생의 뿌리로 삼은 책. 신성장 이론이 탄생하기까지의 과정과, 애덤 스미스와 앨프리드 마셜, 존 메이너드 케인스를 비롯해 경제학의 새로운 흐름을 주도한 기라성 같은 석학들의 이론을 총망라하여 300년 경제학 이론의 총체적인 역사를 그대로 담고 있다."

 

 

 

 

경제학이론사로도 읽을 수 있다는 이야기겠다. 사실 원제는 '지식과 국가의 부(Knowledge and the Wealth of Nations)이다.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을 바로 연상하게 되는. 그러다 보니 얼마전에 김수행 교수의 <국부론> 번역 개정판이 나왔다는 사실도 생각난다(기억에 내가 갖고 있던 건 동아출판사판이었다). 찾아보니 도미니크 포레이의 <지식경제학>(한울, 2004)도 소개된 적이 있다.  









6. 사회

김문조 교수가 추천한 사회분야 책은 김누리의 <기부향기는 매콤한 페퍼로드를 타고>(아르케, 2008)이다. 평소 별로 기부를 하지 않는 나로선 눈길이 갈 만한 책이 아니지만 소개글 정도는 읽어본다. "<기부향기는...>는 우리 사회복지기관 실무자가 미국 비영리 모금단체를 단기 방문한 경험을 기록한 탐방기로서, 자선 행위가 기부활동을 통해 미국인의 일상사에 제도화되어가는 방식을 알기 쉽게 소개한 책이다. 돈은 제 발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매개하는 것임을 강조하는 저자는 미국의 모금단체들이 다양한 이벤트나 출장방문에 이르기까지 기부자 확보나 관리를 위해 얼마나 많은 열정과 공력을 투여하고 있는가를 일기 형식으로 생생히 기술한다." <미국을 세계를 망친 100가지 방법>과 같이 읽어볼 수도 있겠다. 

호기심에 '사회복지'를 검색해보니 사회복지사 자격증 관련서와 사회복지학 교재들만 잔뜩 뜬다. 차라리 '복지국가'가 사정이 좀 나은데, 번역서들로  프랑수아 메랭의 <복지국가>(한길사, 2000), 니클라스 루만의 <복지국가의 정치이론>(일신사, 2001), 그리고 폴 피어슨의 <복지국가는 해체되는가>(성균관대출판부, 2006) 등이 눈에 띈다. 스웨덴과 핀란드의 복지 모델을 소개하는 책들도 여럿 나와 있다.  



 

 




7. 과학

장경애 과학동아 편집장이 추천한 과학분야의 책은 존 타일러 보너의 <크기의 과학>(이끌리오, 2008)이다. 나도 서점에서 보고 재미있겠다 싶었던 책이다. "미국 프린스턴대 생태 및 진화생물학 명예 교수인 저자는 크기는 형태를 결정할 뿐만 아니라 생명체의 기능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크기의 차이가 자연선택의 중요한 원인이고 크기가 변한 뒤에 구조 변화가 일어나므로 크기가 진화에 결정적 역할을 수행한다고 설명한다." 이런 정도의 요지라면 예전에 스티븐 제이 굴드의 책 <다윈 이후>(범양사, 1988)에서도 읽은 바 있지만 이 책에서는 보다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최근에 나온 책으로는 후쿠오카 신이치의 <생물과 무생물 사이>(은행나무, 2008), 그리고 켄 앨더의 <만물의 척도>(사이언스북스, 2008) 등도 챙겨둘 만하다. 전자는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분자생물학의 화두를 가볍고 경쾌한 문장으로 풀었다는 책이고, 후자는 "현대 사회에서 국제 표준 단위계인 미터법의 탄생에 얽힌 우여곡절"을 다룬 책. 우리도 이 미터법에 따른다고 '평'이니 '자'니 하는 걸 다 날려먹은 바 있기에 관심이 좀 가는 책이다.

 

 

 

 

8. 예술

김춘미 교수가 추천한 예술분야의 책은 한달 먼저 찾아온 납량물이다. 백문임의 <월하의 여곡성>(책세상, 2008). 부제는 '여귀로 읽는 한국 공포영화사'. "지난 40여 년간 만들어진 여귀 공포영화를 문화적, 사회적, 그리고 심리적 관점에서 다양하게 분석하고 나아가서는 아시아의 공포영화가 갖는 공통점, 그리고 서양의 공포영화가 우리의 차이점 등을 흥미진진하게 풀고 있는 이 책은 단연코 여름 밤 읽을거리로 안성맞춤"이라는 것이 추천이 이유다.

이 주제와 관련하여 김소영 교수의 <근대성의 유령들>(씨앗을뿌리는사람, 2000)이 먼저 떠오르는데, 한국영화사를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다시 읽고자 하는 시도들이다. 한국영화와 관련해서는 두어 달 전인가부터 한국영상자료원에서 'FIlm Story 총서'를 펴내기 시작했는데, 그 중 정종화의 <한국영화사: 한권으로 읽는 영화 100년>과 김한상의 <조국근대화를 유람하기> 등을 같이 읽어볼 만하다. 특히 후자는 영화 <팔도강산> 시리즈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박정희 시대의 근대화 드라이브가 영화라는 매체를 어떻게 활용했는가를 잘 보여준다.

 

 

 

 

9. 교양

이한우 기자가 추천한 교양서는 나도 여러 차례 언급한 적이 있는, 마거릿 미드의 전기 <루스 베네딕트>(연암서가, 2008)이다(첵에 대해서는 http://blog.aladin.co.kr/mramor/2057513 참조). 덕분에 전기들로 교양분야의 책을 미리 채워보자면, 미드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분야에서 선구적이었던 여성 마리 퀴리의 평전 <퀴리 가문>(지식의숲, 2008)을 들 수 있겠다. 제목대로, 마리 퀴리의 평전이 아니라 '퀴리 가문'의 편전이다. 여섯 차례나 노벨상을 수상한 명문가인 만큼 자녀교육에 관심이 있는 부모들도 손에 들어봄 직하다. 더불어 과학자 제임스 맥스웰에 대한 전기 <모든 것을 바꾼 사람>(지식의숲, 2008)도 눈에 띈다. 물리 교과서에서나 접한 이름이긴 한데, "맥스웰의 전자기 이론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의 토대가 되어 20세기 물리학의 놀라운 성취를 이끌어낸 밑거름이 되었다"고 하는 그 맥스웰이다. 

사정상 한권만 골라야 한다면 나는 물론 이들 과학자들의 전기보다는 박상익 교수의 <밀턴 평전>(푸른역사, 2008)를 집을 것이다. 상식적으로 <실낙원>의 저자로만 알고 있는 "영문학사상 최고의 서사시인이자 셰익스피어에 버금가는 대시인이라는 세간의 일반적 평가 외에도 시력 상실의 아픔을 딛고 일어선 불굴의 의지와 국왕파의 온갖 위협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공화정에 대한 꿈을 견지한 이상주의자"였다는 사실을 세세하게 짚어주는 전기라고 한다(자세한 리뷰는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290727.html 참조).

 

 

 

 

밀턴은 <실낙원>의 저자이면서 <아레오파기티카>(소나무, 1999)의 저자이기도 하다. 역시나 박상익 교수에 의해서 옮겨진 바 있는 이 책은 '언론 자유의 경전'으로 불린다고 한다. 책의 의의에 대해서는 챙겨두도록 하자.

존 밀턴은 근대 최초로 ‘표현의 자유’를 주창한 사람이었다. 후대에 ‘언론 자유의 경전’으로 불리게 된 <아레오파기티카>가 그의 자유 사상 정신을 응집해 보여준 책이다. 밀턴은 이 소책자를 청교도 혁명이 한창이던 1644년에 발표했다. 집필의 계기가 된 것은 당시 혁명의회의 다수파였던 장로파가 주도한 ‘출판허가법’ 제정이었다. 출판허가법은 청교도 혁명으로 폐기했던 출판 검열제를 부활시킨 것이나 다름없었다. 밀턴은 왕당파와 국교파에 대항해 함께 싸웠던 장로파가 혁명 정신을 배반하고 새로운 지배세력으로 등장해 사상을 억압하자 이들에 맞서 자유 정신을 방어했다. 그리하여 <아레오파기티카>는 출판의 자유, 다시 말해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명시적으로 옹호한 최초의 저작이 되었다.

이 책에서 밀턴은 책을 생명과 진리의 담지자라고 강조했다. “사람을 죽이는 자는 신의 형상인 이성적 창조물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좋은 책을 파괴하는 자는 이성 그 자체를 죽이는 것이며, 말하자면 눈에 보이는 신의 형상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는 사전 검열이 사상의 자유 시장을 봉쇄하는 일이라고도 했다. “진리와 거짓으로 하여금 서로 맞붙어 싸우게 하십시오. 자유롭고 공개적인 경쟁에서 진리가 패배하는 일은 결단코 없습니다. 진리의 논박이야말로 (거짓에 대한) 최선의 억압이며 가장 확실한 억압입니다.” “진리가 전능한 신 다음으로 강하다는 것을 모르는 자가 누구입니까. 진리가 승리하기 위해서는 정책도 필요 없고 전략도 필요 없으며 검열제 또한 필요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오류가 진리의 힘에 맞서 싸울 때 사용하는 수단이며 방책입니다. 진리에게 자유로운 공간을 제공해주십시오. 진리는 묶여 있을 때는 진실을 말하지 않습니다.”

밀턴은 이 팸플릿에서 “나의 양심에 따라, 자유롭게 알고 말하고 주장할 수 있는 자유를, 다른 어떤 자유보다도 그런 자유를 나에게 달라”고 호소했다. 또 <아레오파기티카>를 출간하면서 표지에 이런 경구를 실었다. “국가에 대해서 건전한 조언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자유롭게 말할 수 있고, 그렇게 할 수 있고 할 의지가 있는 사람이 칭송을 받을 때, 그리고 그렇게 할 수도 없고 할 의지도 없는 사람이 침묵을 지킬 수 있을 때 이것이 진정한 자유다.” <아레오파기티카>를 우리말로 옮긴 박상익 교수는 이 도저한 자유 정신을 담은 저작에 대해 “사상과 표현의 자유에서 ‘마그나 카르타’(대헌장)”라고 평가한다.(고명섭 기자)



 

 

 

10. 아동

 

보통 아동물 대신에 평전류를 고르곤 했지만 '교양'쪽에서 미리 다룬 탓에 이번에는 그냥 추천도서를 따라가보도록 한다. 엄혜숙, 이상교 두 아동문학가가 추천한 책은 권정생의 <랑랑별 때때롱>(보리, 2008)이다. 지난달 1주기를 맞이하여 선생의 책들이 여러 권 출간됐는데, 그때 나온 '판타지' 동화다(http://blog.aladin.co.kr/mramor/2076051 참조). 나는 <우리들의 하느님>(녹색평론사, 2008)만 일단 구입했었는데, 나머지 책들도 여유를 보아 일독해볼 참이다. <랑랑별 때때롱>은 아이에게 읽히고...

08. 06. 01.

 

 

 

 

P.S. 자유 독서가 직업이 아닌 이상 나열한 책들을 다 읽어볼 도리는 없다. 하지만 제목과 목차만 확인해두더라도 나름대로 '공부'다. '이달의 읽을 만한 책'들을 달마다 계속 늘어놓는 이유이다. 그런 취지로 '이달의 고전'까지 골라본다.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서해문집, 2005)이다. 어느 책이 정본 번역서인지는 확인해보지 못했는데, 여하튼 여러 종의 책들이 나와 있다. 주경철 교수의 번역본(을유문화사, 2007)이 가장 최근에 나온 듯하다.

 

 

 

 

이 유토피아란 주제를 놓고 같이 읽을 만한 책은 <미래의 기억, 유토피아>(서해문집, 2007) 외에, 최근에 나온 <지젝이 만난 레닌>(교양인, 2008), <혁명의 시간>(교양인, 2008) 등이다. 6월에는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이 2008년 오늘 우리에게 갖는 의미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면 좋겠다. 우리가 배울 것은 '죽은 개'의 교훈이 아니라 '살아있는 정신'의 현실성이다.

20세기 미국과 소련(러시아)에서의 '대중 유토피아의 소멸'을 다룬 수잔 벅 모스의 <꿈의 세계와 파국>(경성대출판부, 2008)은 그러한 '현실성'을 다시 생각해보는 데 유익한 참조점이다. 시간이 된다면 '킹콩과 소비에트 궁전' 등에 대해서 6월에는 페이퍼를 써보고 싶다. 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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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니다 2008-06-02 1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벅 모스의 책이 드디어 출간됐군요. 원서나 번역서나 가격이 비슷하네요.^^ 번역서 표지가 아주 구리구리 하네요. 경성대 출판부는 표지나 본문 디자인에 신경을 아예 안쓰는 듯 합니다. 책값은 엄청 비싸면서 말이죠. 내용만 좋으면 된다는 것인지... 시국이 어수선합니다. 2MB 정부의 앞날이 순탄치는 않을 것으로 많이들 예상했었는데 그 우려를 가볍게 뛰어넘습니다. 대단한 내공이죠?^^ 그나저나 기말이 코 앞이네요. 성적 낼 거 생각하니 걱정이 앞섭니다.^^

로쟈 2008-06-02 22:37   좋아요 0 | URL
네, 무겁고 비쌉니다.^^; 기말이 와도 일들은 여전하니 어깨가 가볍지 않네요.--;
 

한겨레의 '우리시대 지식논쟁'은 지난주부터 '지젝 신드롬의 허와 실'을 다루고 있다. 두번째 주자로 나선 박정수씨는 그의 철학을 한마디로 '실천 없는 철학'이라 요약하고 있다(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90673.html). 이전의 비판(http://blog.aladin.co.kr/mramor/989000)보다 새로워 보이는 것은 지젝을 포이어바흐와 동치시키는 대목이다. "객관적 실재처럼 보이는 것을 주체의 창안물로 되돌려놓는 것, 이것이 지젝의 사유방법이다"라고 정리하고 있으니까. 더불어 그를 홉스주의자, 자유를 두려워하는 히스테리 환자,  헤겔 우파적인 국가주의 철학자로 새롭게 규정한다(하긴 지젝은 헤겔을 '숭고한 히스테리 환자'라 불렀다). 그러면서 그가 어떤 삶의 형식을 욕망하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기대보다는 부드러운 비판이다('관념론자 지젝'을 창안하고 있는 정도이다). 보다 신랄한 비판이 필요한 독자라면 이안 파커의 <지젝>(도서출판b, 2008)을 참조하셔야겠다. 

우리시대 지식논쟁 / ② 실천 없는 철학

이현우씨는 지난주 이 지면에서 “나는 이 ‘괴물’의 광기와 열정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헤겔과 라캉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슬라보예 지젝이 여러 면에서 ‘괴물’ 같은 철학자라 해도 그의 사유가 “우리 시대의 이념적 지형을 이해하고 돌파하는 데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두 번째 논자로 나선 박정수씨는 그 기여의 실체에 의문을 표시한다. “이데올로기적 현실의 비실재성을 비판하는 것(만)으로는 세계를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세계를 바꾸는 것은 해석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창안하는 실천”이라고 말한다. 지젝의 ‘결여’가 바로 이 지점에 있다는 게 박정수씨의 생각이다. 다음주에는 이성민씨가 지젝에 대한 또다른 견해를 밝힌다.(안수찬 기자)

한겨레(08. 05. 31) 현실 비판할 뿐 대안찾기엔 침묵

“‘우리는 어떻게 이 일상의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가’라고 묻지 말고 차라리 ‘이 일상의 현실이 그토록 확고하게 실존하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이 한 문장 속에 지젝의 비판 철학이 지닌 가치와 한계가 담겨 있다.

지젝은 헤겔주의자이며, 정치적으로 좌파이다. 헤겔 좌파로서 지젝은 물신주의적 믿음 위에 세워진 현실의 ‘근거 없음’을 폭로하는 데 탁월한 성과를 보여주지만 정작 어떻게 그 이데올로기적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거의 묻지 않는다. 모든 철학이 일상의 현실은 생각만큼 확고하게 실존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불교의 연기론은 만물이 서로 의존하여 발생하기에 고정된 실체는 없다고 가르치고, 플라톤은 현실이 이데아의 물질적 복사본에 불과하다고 한다. 지젝은 신이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게 아니라 그렇다고 믿는 주체(인간)의 상상적 창조물에 불과하다는 포이어바흐의 방법을 따른다. 객관적 실재처럼 보이는 것을 주체의 창안물로 되돌려놓는 것, 이것이 지젝의 사유방법이다.

신경증 환자의 실재인 ‘외상’도 마찬가지다. 외상이 신경증의 원인이 되는 것은 그것을 객관적 실재로 믿기 때문이다. 정신분석은 무의식 속에서 객체화된 외상을 주체 자신의 창조물로 되돌리는 작업이다. 객관성의 형식으로 환자를 괴롭히던 외상이 주체 자신의 창조물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환자는 치유의 길로 들어선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고백처럼 외상의 환상성을 깨달아도 신경증은 사라지지 않는다. 리비도의 체질을 바꾸거나 대안적인 인간관계를 찾지 못하는 한, 증상은 괴롭지만 살아갈 의미이기도 하다. 신이 인간의 창조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도 교회가 사회적으로 유용하다면 신앙생활은 지속되고, 민족이 상상의 공동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도 다른 민족과 더불어 살 의사와 능력이 없으면 민족주의는 지속된다. 화폐의 물신적 힘은 그것에 대한 믿음에서 생긴다는 걸 알아도 대안적인 교환 방법을 찾지 못하면 화폐 물신주의는 계속되며, 자본의 잉여가치가 노동력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아도 자본 권력을 대체할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체를 구성할 욕망과 능력이 없으면 자본가에게 좀더 많은 지분을 요구하는 것 말고는 다른 도리가 없다.

그래서 이데올로기적 현실의 비실재성을 비판하는 것으로는 세계를 바꿀 수 없다. 마르크스가 포이어바흐를 비판하면서 말했던 것처럼 세계를 바꾸는 것은 해석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창안하는 실천이기 때문이다. 그 실천은 자유로운 연합체를 구성하는 욕망들과 그 욕망들을 결합하는 프로그램에 의해 가능하다. 신ㆍ민족ㆍ자본이라는 초월적 환상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의 욕망이 구성하는 공통적(commune) 삶의 형식, 그것이 마르크스가 기획한 코뮨주의다. 그런 코뮨적 욕망은 누군가는 다른 누군가의 삶을 위해 노예가 되는 사회를 당연하다거나 불가피하다고 생각하는 환상 숭배자들에게만 안 보일 뿐 우리의 삶 속에 실재적으로 잠재해 있다.

지젝은 ‘인간’의 조건 속에서 이런 코뮨적 삶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에게 인간은 상징적 질서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상징적 질서는 인간을 자연(사물, 신체)과 분리시키고, 남자와 여자로 분리시키고, 낱낱이 떨어진 개별 인간들로 분리시킨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미지의 타자로 존재하는 상징적 질서 속에서 “인간의 욕망, 그것은 타자의 욕망이다.”

그렇다면 자유민주주의적 시장경제야말로 인간의 욕망에 충실한 삶의 형식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시장에서 인간의 욕망은 자유롭다고 한다. 아무도 타자의 욕망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평가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장에서 타자의 욕망은 배려의 대상일 뿐 아니라 유일한 가치척도이다. 시장에서는 아무도 ‘참아라’거나 ‘즐겨라’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다만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라’고 할 뿐이다. 타자의 욕망을 욕망함으로써 우리는 자유롭고 평등한 가치척도를 갖게 된다고 한다. 이런 시장 민주주의적인 가치척도를 위해 딱 하나 금지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타자의 욕망을 배려하지도 않고, 타자의 욕망을 척도로 삼지도 않는 것이다. 그런 ‘이기적’인 욕망에 대해서는 마땅히 ‘다수’의 이름으로 응징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인의 욕망을 저주하는 것, 이것이 자유민주주의적 시장 경제가 대중을 일반적 노예로 만드는 방법이다.

물론 지젝은 ‘너무나 인간적인’ 이 시장경제를 반대하고 그것을 넘어선 세계 질서를 언급한다. 인간의 조건에서는 불가능한 이 기획은 인간 속에 있는 ‘괴물’을 승인하면서 시작된다. 홉스가 말한 ‘국가’라는 괴물. 지젝은 프로이트의 문명론에 내재한 홉스주의를 충실히 반복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 문명은 ‘법’과 ‘초자아’를 필연적으로 요청한다. 욕망을 억압하는 법과 억압을 욕망하는 초자아가 없으면 인간 무리는 욕망의 충족을 향한 만인의 전쟁 상태에 빠지기 때문이다. 지젝 역시 상징적 질서 속에서 만인은 만인에 대해 미지의 타자이며, 평화로운 이웃들의 이면에는 ‘괴물’이 도사리고 있다고 한다.

이 욕망의 시장 체제를 초극하는 유일한 방법은 보편적 주체 형식으로서의 국가 체제를 수립하는 것이다. 모든 작은 타자들을 하나의 총체적 집합으로 통합하는 예외적 큰타자, 곧 헤겔의 입헌군주와 모든 작은 괴물들의 욕망을 중화시키는 보편적 욕망의 괴물, 곧 레닌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결합한 글로벌한 국가체제(제국)를 수립하자는 것이다.(솔직히, 지젝의 기획이 정말 이걸까 의심했는데, 이현우씨의 독해에 따르면 그렇다.)

헤겔의 입헌군주가 정말 ‘텅 빈’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는 상징적 존재로만 남아 있을까? 프롤레타리아 국가기구의 관료집단들이 정말 ‘비계급’으로서의 보편계급을 대변할까? ‘지젝의’ 레닌주의에 따라붙을 이런 의문들은 사실 본질적인 게 아니다.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지젝의 말처럼, 미래를 예견하는 실천은 가짜 행위다. 실천의 근거는 과거의 경험이나 미래의 예견에서 찾을 수 없다. 혁명의 실천은 전대미답의 세계를 창조하는 자유로운 행위이기 때문이다. 혁명의 유일한 근거는 그로 인해 창조되는 세계가 좋은 세계라는 자기 확신뿐이다. 지젝은 정말 그걸 확신하고 있을까?

지젝은 ‘자유’를 원하면서도 두려워하는 것 같다. 히스테리 환자처럼 타자의 규정으로부터 자유롭기를 원하지만(그래서 도대체 네가 원하는 게 뭐야? 라고 물어보게 만들지만) 그런 만큼 자유를 두려워하는 게 아닐까?(자유는 불가능한 몸짓이다!) 그래서 텅 빈 상징으로 존재하는 주인에 의존할 때만 자유롭다는 결론에 도달한 게 아닐까. 주인의 욕망을 저주하는 시장의 노예가 되지 않는 유일한 길은 단 하나의 상징적 주인 밑에서 보편적 노예가 되는 것이라고 결론 내릴 때 지젝은 더는 지배적 현실의 환상성을 비판하는 헤겔 좌파가 아니라, 유일한 지배자의 환상으로 수립된 현실을 추구하는 헤겔 우파의 자리에 선다. 그것도 좋다. 좌파든 우파든 중요한 건 자리가 아니다. 그 자리에서 어떤 삶을 창안하고 싶은가, 어떤 삶의 형식을 욕망하는가? 지젝의 흥미진진한 비판의 뒷맛으로 그가 욕망하는 삶을 느끼고 싶다. 무리인가?(박정수 수유+너머 연구원)

08. 05. 30.

P.S. 이번에 나온 <지젝이 만난 레닌>(교양인, 2008)은 지젝에 관한 최적의 입문서이다. 무엇보다도 가독성이 좋은 번역 덕분에 지젝의 '레닌주의'와 '레닌주의적 실천'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아무런 우회 없이 이해할 수 있다. '실천'의 의미에 대해서도 지젝은 제2부의 서두에서 밝혀놓고 있다. 그는 마르크스의 (포이어바흐에 관한) 11번째 테제를 뒤집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고 말한다: "오늘날 첫번째 과제는 행동하고 싶은 유혹, 직접 개입하여 사태를 변화시키고 싶은 유혹(이렇게 되면 막다른 골목에, 즉 '전 지구화된 자본주의에 맞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뭔가?'하는 맥 빠지는 불가능성에 이를 수밖에 없다)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헤게모니를 쥔 이데올로기 좌표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268쪽) 지젝이 곧바로 인용하는바, 아도르노는 이렇게 말했다.

"나로서는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모르겠다'라는 말만이 진실한 답변일 경우가 매우 많다. 나는 있는 것을 엄격하게 분석하려고 노력할 수 있을 뿐이다. 이 점에서 사람들은 나를 책망한다. 당신이 비판을 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더 낫게 만들지 말해줄 의무도 있는 것 아니냐. 내 생각에 이것은 논란의 여지 없는 부르주아적 편견이다. 역사에서는 순수하게 이론적인 목표만을 추구한 작업이 의식을 바꾸고, 그럼으로써 사회적 현실까지 바꾼 사례가 아주 많다."

마르크스도 바로 그러한 사례가 아닌가? 지젝이 하고자 하는 일은 그러한 '분석'이고 '의문의 제기'이다. 그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지까지 말해달라고 요구하는 건 (아도르노에 따르면) 부르주아적 편견이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지젝은 '전부'가 아니고 '메시아'도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지젝에 대한 신앙이 아니다. 다만 그와 함께 현실의 좌표를 다시 읽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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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8-05-30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로쟈님때문에 이 책을 또 사야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2008-05-30 23: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6-02 13:4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