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사이드의 <저항의 인문학>(마티, 2008)을 읽다가 이탈리아의 사상가 잠바티스타 비코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났다(사이드와 비코에 대해서는 http://blog.aladin.co.kr/mramor/2019521 참조). 그래서 그의 <새로운 학문>(1744)을 비롯한 몇몇 관련서를 독서목록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관련자료를 잠시 검색해보다가 기사 하나가 눈에 띄기에 옮겨놓는다. 역사학자 조한욱 교수가 쓴 비코 학회 참관기이다.  

한겨레(05. 11. 25) 여기는 나폴리 역사학 주춧돌 앞에 서다

잠바티스타 비코(1668~1744)는 서양 역사학의 기틀을 세운 이탈리아 학자다. 서구는 물론 중국·일본의 학계에서는 그를 인문학의 마르지 않는 원천으로 삼는다. 그의 사상이 근대와 탈근대의 문제의식에 두루 영감을 줬다고 평가한다. 반면 한국에서 그 이름은 너무도 낯설다. 비코에 대한 이해를 통해 한국 인문학의 바탕이 넓어질 수 있기를 바라는 조한욱 한국교원대 교수가 글을 보내왔다. 지난 10일부터 사흘간(현지시각) 나폴리에서 ‘잠바티스타 비코: 중국,일본,한국’을 주제로 열린 국제 학술대회 참관기다. 그의 글이 비코에 대한 국내 학계의 관심으로 이어지길 기대한다.

마르코 폴로 탄생 750주년을 기념해 이탈리아 곳곳에서 방대한 학술대회가 열렸다. 마르코 폴로는 동서 교류의 문을 연 사람이니, 동서 문화의 융합 가능성을 모색하는 데 전체 학술대회의 초점이 맞춰졌다. 이탈리아의 동양학자와 이탈리아를 연구하는 동양의 학자들이 모일 기회가 마련된 것이다. 나폴리에서는 그들이 자랑하는 철학자 비코에 초점을 맞췄고, 나는 여기에 초청받았다.

비코가 누구이기에 이탈리아의 거국적인 행사에 그에 대한 국제 학술대회가 포함되었을까? 비코는 보통 시대를 앞서 태어난 천재로 알려져 있다. 데카르트의 영향 아래 수학적 지식만이 진리의 근거라고 여기던 시대에 그는 “인간이 만든 것은 인간이 알 수 있다”는 명제를 내세움으로써 인간 사회와 인간의 역사가 연구의 합당한 대상이라고 설파했다. 역사학을 비롯한 인문학 전반의 존립 근거를 확인해준 것이다. 그는 인간 사회를 이해하는 실마리를 그 시대가 사용하는 언어에서 찾았다. 원시시대에는 신화와 민담과 같은 것이 사람들의 언어였기 때문에, 한때는 무시당했던 그런 자료가 그 시대에 대한 이해의 단초를 제공해주는 중요한 입구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비코에게서는 ‘언어적 전환’, ‘담론 분석’, ‘상징적 해석’ 등등 현금의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주류를 이루는 방법론의 선례를 찾을 수 있다. 제임스 조이스, 헤이든 화이트, 게오르그 가다머, 에드워드 사이드와 같은 인물들이 비코를 영감의 원천이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데카르트 과학적 방법론과 대적
열성가들의 간헐적이고 고립적인 노력으로 간간히 빛을 보던 비코는 1968년 탄생 300주년을 기념하는 국제 심포지엄이 뉴욕에서 열린 것을 계기로 무대의 전면에 나서게 됐다. 어떤 한 사상가를 기념하는 학술 대회로서는 최대 규모였던 이 심포지엄의 논문집은 1970년과 1973년 사이에 거의 90개에 달하는 학술 잡지에서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이후 미국과 나폴리의 비코 학회 주관으로 비코에 대한 학술대회가 거의 매년 열려 국제적인 학문 교류의 가교 노릇을 하고 있으며, 이번 학술대회는 올해가 갖는 의미를 고려하여 특히 이탈리아 정부의 지원 아래 거국적으로 열린 것이었다.

11월10일 오후부터 본격적인 발표와 토론이 시작됐다. 첫번째 주제는 ‘비코의 동양’이었다. 그 중 두드러진 것은 장롱시 홍콩 성시대학 교수의 발표였다. 비교문학자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장롱시는 비코가 동서의 교차 이해에 한 축이 될 수 있음을 역설했다. “인간이 만든 것은 인간이 알 수 있다”는 비코의 원리야말로 다른 문화에 대한 미적인 감수성을 계발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동서 문화의 융합에 초석이 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논지였다.

11월11일 오전에 두번째 주제인 ‘동양의 비코 연구’에 대한 발표가 있었다. 우에무라 타다오 도쿄 외국어대학 교수는 비코의 <이탈리아인 태고의 지혜>를 번역한 노학자로서, 자신이 어떻게 하여 소렐과 크로체를 통해 비코를 알게 되고 마침내 후설의 안내로 비코를 새롭게 ‘발견’하게 됐는지 감명 깊은 여정을 술회했다. 마리오 사바티니 베네치아대학 교수의 ‘주광키안과 비코’가 이어졌다. 주광키안은 <새로운 학문>을 중국어로 번역한 사람이다. 사바티니 교수는 본디 미학 교수였던 주광키안의 인생 역정을 소개하며, 니체와 크로체와 마르크스를 거쳐 마침내 비코의 <새로운 학문>에서 학문과 예술에 합당한 전망을 찾게 된 과정을 상술했다.

다음으로 나의 발표가 있었다. 한국에서 비코 연구는 거의 전적으로 역사학자들에 의해 이뤄져왔다고 밝히며 이종흡 경남대 교수의 책 <마술, 과학, 인문학>과 나의 학위 논문 <미슐레의 비코를 위하여>의 내용을 소개했고, 앞으로 비코 연구가 발전하기 위해 관심 있는 학자들의 연대가 필요하고, 원전으로부터 옮긴 비코 저서의 충실한 번역본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오후에 세번째 주제인 ‘비코의 테마에 따른 동양과 서양’에 대한 발표가 있었다. 주로 언어의 문제를 다룬 것으로서 상형문자를 사용하는 중국어가 상징적으로 갖는 의미에 초점이 맞춰졌다. 가장 뛰어난 것은 미국 펜실베이니아에 있는 모라비아 대학교 정화열 교수의 ‘비코와 중국어원학 재검토’였다. 사정상 불참하여 다른 사람이 대독한 논문에서 그는 중국어를 분석하며 그것이 인간의 몸과 관련된 기호임을 증명했다. 몸과 관련된 언어란 모든 인류에게 공통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있는 언어다. 이러한 ‘문자 이전의 언어’를 통해 인류가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은 비코야말로 자신의 시대를 훨씬 뛰어넘은 사상가라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다. 정 교수의 역량을 체득하는 순간이었다.



포스트모더니즘 영감의 원천
마지막 날, 장소는 나폴리 동양대학교로 옮겨 속개됐다. 전날 오후의 주제가 오늘은 역사, 인류학, 종교의 분야로 이어졌다. 이 학술대회 전체를 조직했던 다비드 아르만도 이탈리아 학술원 연구원이 동양과 서양의 봉건제도의 차이에 대해 발표한 뒤, ‘비코 시대 유럽 문화에 비쳐진 동양인의 성격’, ‘비코와 보쉬에에게서 보이는 유교’, ‘잠바티스타 비코와 노리나가 모토오리’와 같이 흥미로운 주제에 대한 발표가 이탈리아 학자들에 의해 이어졌다.

발표 뒤 곧바로 비코를 동양어로 번역하는 문제에 대한 원탁토론이 벌어졌다. 비코를 직접 일본어와 중국어로 번역한 학자들이 체험담을 이야기했고, 나는 앞으로 비코를 원전으로부터 번역할 때 예상되는 문제점에 대해 말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학자들은 번역에 개재된 일반적인 문제점을 지적했다. 관중석과 질의응답이 있은 뒤 학술대회는 막을 내렸다.

학술대회는 낮에만 열린 것이 아니었다. 밤마다 만찬이 벌어졌다. 여기에서 많은 외국의 학자들과 교감을 나눌 수 있었다. 이탈리아 철학을 전공하는 프랑스 학자인 피에르 지라르는 나의 발표에서 미슐레가 나오는 바람에 놀랐다고 말하며, 내가 인용했던 프랑스의 비코 학자 알렝 퐁스가 자신의 친구라고 한다. 가오이 베이징 대학교수와 나눈 대화도 기억에 남는다. 그는 모더니즘을 산업화와 동일시했다. 그 정의가 너무 협소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대해 그는 “미적 모더니즘과 같은 것은 사소하다”고 말함으로써 산업화의 단계로 넘어가는 중국의 절박함 또는 부박함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보였다. 어쨌든 한국과 중국의 프랑스사 전문가들이 함께 만날 기회를 마련해보자는 취지에는 공감했다. 키마에 도시야키 오사카대 교수와도 친해져, 내년 3월 오사카대에서 열리는 학술대회에 초청하겠다고 꼭 참석하여 달란다.

가장 친밀감을 느낀 인물은 가장 말이 통하지 않았던 우에무라였다. 작년에 뇌에 문제가 있어 거의 사경에 이르렀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던 그는 건강 때문에 부인이 동반했다. 부인은 젠더 문제를 연구하는 학자이다. 우에무라는 내가 번역한 카를로 긴즈부르그의 <마녀와 베난단티의 밤의 전투>를 일본어로 번역했다 한다. 그밖에도 여러 가지 학문적 문제에 있어 나는 그와 공감하는 점이 많았고, 그의 삶의 태도에는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한·중·일 학자 번역문제 공감
학술대회 틈틈이 크로체와 비코의 생가를 찾았다. 지금은 인문학 연구소로 쓰이는 크로체의 방대한 저택과 달리 비코의 집은 시장 속 좁은 길에 있었다. 50여 년 전 로버트 카포니리는 비코의 역사 이론을 다룬 저서에서 비코가 자라난 나폴리의 풍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나폴리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분주한 삶이 좁고 꾸불꾸불한 길을 따라 들끓듯 소란스럽게 펼쳐진다. 낡은 성문 앞에서 행상인들은 팔 물건을 소리치고, 등뼈가 부러질 정도로 짐을 실은 당나귀들은 그에 못지않게 많은 짐을 진 사람들과 갈 길을 다툰다. 탑의 그늘에는 불쌍한 중생이 앉아 신과 행인에게 탄원과 구걸의 목청을 높인다.” 지금도 그 풍경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단지 당나귀 대신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사람들과 함께 그 길을 달리고 있을 뿐이다.

그 나폴리에서 비코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비코는 자신에게 내려진 가혹한 운명을 오히려 적극적으로 수용해, 신이 인류를 위하여 <새로운 학문>을 쓰도록 만들어준 기회라고 받아들이지 않았던가? 비코는 좁고 붐비는 시장 길에서도 방문객들에게 조금의 불편도 끼치지 않도록 관대하게 배려하는 나폴리 사람들의 마음 속에 살아 있었다. 그다지 크지 않은 도시로 세계의 학자들을 불러 모은 나폴리 학자들의 애정 속에 살아 있었다.(조한욱 한국교원대 교수)

08. 06. 15.

 

 

 

 

P.S. 비코 관련서는 몇 권 되지 않는다. 중역본 <새로운 학문>(동문선, 1997) 외에, 비코의 생애와 사상을 소개한 박홍규 교수의 <처음으로 돌아가라>(필맥, 2005), 그리고 기사에서 언급되고 있는 이종흡 교수의 <마술 과학 인문학>(지영사, 1999), 그리고 이사야 벌린의 <비코와 헤르더>(민음사, 1997) 등이 내가 떠올려볼 수 있는 책들이다. 참고로, ‘비코의 동양’이라는 발표를 했다는 장롱시 홍콩 성시대학 교수는 내가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는 책 <도와 로고스>(강, 1997)의 저자인 듯싶다.

기사에 따라 비코 사상의 의의를 압축하면 "데카르트의 영향 아래 수학적 지식만이 진리의 근거라고 여기던 시대에 그는 “인간이 만든 것은 인간이 알 수 있다”는 명제를 내세움으로써 인간 사회와 인간의 역사가 연구의 합당한 대상이라고 설파했다. 역사학을 비롯한 인문학 전반의 존립 근거를 확인해준 것이다." 정도가 되겠다. 사이드가 <저항의 인문학>에서 짚어주고 있는 요점도 이와 다르지 않다.

"비코가 <새로운 학문>을 쓴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데카르트 학파의 명제, 즉 명백하고 분명한 관념들이 있을 수 있고, 이 관념들을 역사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속해 있는 실제 정신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다는 명제를 논박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비코에 따르면 이러한 종류의 생각은 개개인의 인문학자와 역사가 서로 관련되어 있는 곳에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31쪽)

때문에 "인문주의적 지식과 실천으로부터 중립적이고 수학적인 학문을 도출하는 일은 무익"하다. 여기서 '데카르트 vs 비코'라는 구도는 '수학 vs 역사학', '철학 vs 문헌학'으로 변주될 수도 있겠다(지젝이라면 '관념론 vs 유물론'이라고 불렀겠다). 아무튼 현재의 '인문학의 위기'와도 관련하여 '데카르트적 학문'과는 다른 '비코적 학문'에 대해서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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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8-06-15 19:54   좋아요 0 | URL
오명가명 얼핏 이름만 듣던 학자였는데, 데카르트와 대립구도를 이루는 사상가였군요.
좋은 정보 얻어 갑니다: )
매일 들르며 흔적을 남길때마다 포스트와 상관없는 질문을 남기게 되어서 송구스럽지만. 사실은 오늘도 호기심을 참지 못해 들렀습니다.
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4970479X
헤겔 역사철학강의가 '새로이'(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번역된 모양인데 출판사에 대해 (특히 인문서적의 경우) 개인적으로 그리 신뢰가 가지 않아서요, 학계나 인문 출판계에서 이 번역에 어떤 평이 있는지, 혹 자문을 구할까 해서 글을 남겨요.
후후. 매력적인 책인데.. 혹시라도 번역(오역)으로 인해 허우적 거리고 싶지는 않아서요.

로쟈 2008-06-15 20:06   좋아요 0 | URL
제가 아는 한 별다른 서평은 나와 있지 않구요, 사실 전공자들은 번역서를 인용하는 경우가 드물어서 오역서들에 대한 지적도 별로 없습니다. 예전에 삼성출판사에 나온 <역사철학강의>와 같이 읽으시면 좀 낫지 않을까 싶고, 영역본 등의 다른 번역본을 더 참조하시는 게 안전할 거 같습니다...

열매 2008-06-18 02:12   좋아요 0 | URL
책값이 싼 맛에--세로줄 2권짜리 삼성판이 읽기 불편하기도 해서--사서 비교해 읽어보았는데 가독성이 훨씬 좋습니다. 권기철씨의 <헤겔과 독일관념론>도 수월하게 참고할 수 있을 듯 싶습니다. 동서문화사 '세계사상'시리즈는 회복출판물들이라는데, 예전에 헌책방에서 구입한 적이 있었던 마치 서양백과사전처럼 두 단락으로 나누어 빽빽했던 전집인 것 같습니다. 재번역은 아닌듯하고 원로교수님들을 번역물을 다듬은 듯 합니다. 중역본도 있는데 <수상록>완역본 등 몇몇은 구입할 만 한듯 합니다.

로쟈 2008-06-18 21:37   좋아요 0 | URL
네, 저도 몇 권 구입했습니다. 새 번역은 아니지만 저렴해서요.^^

redology 2008-06-18 20:19   좋아요 0 | URL
별로 중요한 건 아니지만, 중간에 나온 "주광키안"은 주광잠(朱光潛)을 말합니다. 현대중국어 표기인 주광첸(Zhu Guangqian)을 주광키안으로 읽은 것 같습니다..그의 국내 번역은 <시론>(동문선)이 있습니다.

로쟈 2008-06-18 21:36   좋아요 0 | URL
별로 중요하진 않더라도 아주 요긴한 정보인데요. 감사.^^

노이에자이트 2008-06-18 23:26   좋아요 0 | URL
데카르트와 비코의 대비는 서양사학사에선 널리 퍼진 등식 같습니다.콜링우드의 역사학의 이념에도 나오고요.트뢸치는 말년에 데카르트의 자연주의는 극단으로 가면 인간의 황폐화를,비코의 역사주의는 상대주의 특유의 허무주의를 가져오니 중용을 취해야 한다고 말했구요.독일에선 비코를 낭만주의쪽에서 받아들였고 그래서 독일 낭만주의와 역사주의는 겹치는 게 많죠.그 대표가 헤르더죠.비코가 민족의 전승문화 쪽에 대한 방법론에서 주목할 만한 내용이 많아서 영불에 비해 뒤떨어진 독일 지식인들이 자국의 옛 전승을 연구할 때 영감을 많이 받았을 겁니다.
헤르더가 리가에서 살았기 때문에 이사야 벌린이 헤르더에 관심이 많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그쪽이 러시아 령이라서 슬라브에 대한 관심이 헤르더에겐 많았죠.

로쟈 2008-06-19 00:03   좋아요 0 | URL
톨스토이도 <전쟁과 평화>에서 헤르더 얘기를 많이 합니다. 맞습니다, 벌린도 리가 출신이죠...

노이에자이트 2008-06-19 00:59   좋아요 0 | URL
헤르더는 민족고유의 문화를 강조하긴 했지만 국수주의는 배격한 열린 사나이였죠.그래서 러시아 쪽에서도 호감을 가진 모양이군요.
비코는 헤르더가 독일에 소개했으니 미슐레가 프랑스에 소개한 것보다 더 앞서죠.미슐레는 헤르더의 VOLK개념을 수용했다고 합니다.우리나라의 민중개념과 비슷한 것 같아요.윌슨의 <핀란드역으로>에서 제일 처음 나오는 인물이 미슐레죠.

로쟈 2008-06-19 23:17   좋아요 0 | URL
'VOLK'는 영어로는 그냥 'people'로 번역되는 듯한데, 우리말로는 좀 애매한 거 같습니다. 철학쪽으로 오면 여러 번역어가 혼용되고 있어서요...
 

이런저런 이유로 아직 손에 들지 못하고 있는 책이 가라타니 고진의 <역사와 반복>(도서출판b, 2008)이다. 자세한 독해는 내달로 미뤄놓지만 일단은 리뷰라도 챙겨놓는다(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293225.html). 

 

한겨레(08. 06. 14) "종언도 결국 역사 속의 ‘반복’일 뿐”

일본의 사상가·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은 ‘근대문학의 종언’ 주장으로 센세이셔널한 반향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역사와 반복>은 가라타니의 근대문학 종언론의 출발이 되는 저작이자 그 종언론의 진화와 확장을 살필 수 있는 저작이다.

이 저작은 다소 복잡한 경로를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 이 책의 원텍스트는 <종언을 둘러싸고>라는 이름으로 1990년에 출간된 바 있는데, 1989년께 쓴 문학비평 논문들이 수록된 책이었다. 1989년이면 동유럽 사회주의가 붕괴하던 때였고, 일본에서는 쇼와 천황이 사망한 해였다. 프랜시스 후쿠야마 부류가 ‘역사의 종언’이라는 말로 시대를 규정하던 때였다.

가라타니는 2000년대에 들어와 자신의 저작을 수정·증보해 다섯 권의 ‘정본집’으로 묶어내는 작업을 했는데, 2004년 다섯번째 권으로 출간된 것이 <역사와 반복>이다. <역사와 반복>에는 <종언을 둘러싸고> 말고도, 1990년대 후반에 쓴 두 편의 역사해석 논문이 포함됐다. 가라타니는 이 증보과정에서 원텍스트들을 대폭 고쳐 썼다. 따라서 <역사와 반복>은 2004년 시점에 쓴 텍스트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그런 재편집 과정을 거쳤다 해도 이 저작에는 어쩔 수 없는 내적 균열이 있다. <종언을 둘러싸고>에 수록됐던 글들에는 미시마 유키오, 오에 겐자부로,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일본 작가들과 대결함으로써 ‘근대문학의 종언’을 끌어내는 비평가 가라타니가 있다. 이와 달리 역사해석 텍스트에는 ‘역사의 반복’이라는 주제와 씨름하는 사상가 가라타니가 있다. 이 두 모습이 균열된 채로 결합해 이 저작은 ‘종언을 포함한 반복’이라는 역사철학적 관점을 보여준다.

가라타니가 이렇게 역사에 대한 나름의 새로운 관점을 확보하는 데 결정적 준거로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 카를 마르크스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이하 ‘브뤼메르 18일’)이다. 마르크스의 이 저작은 나폴레옹의 조카 루이 보나파르트가 1848년 2월혁명 뒤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다시 쿠데타를 거쳐 황제 나폴레옹 3세가 되는 과정을 풍자적으로 고찰한 글이다. ‘브뤼메르 18일’이란 1799년 나폴레옹이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날을 가리킨다. 이 저작은 ‘역사의 반복’이라는 문제를 다뤘다는 점에서 주목할 저작이라고 가라타니는 말한다.

마르크스는 그 반복의 문제를 이 저작 첫머리에서 먼저 밝히고 있다. “헤겔은 어디에선가, 모든 거대한 세계사적 사건들과 인물들은 두 번 나타난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이 덧붙이는 것을 잊었다. 한 번은 비극으로, 다른 한 번은 소극으로.” 나폴레옹이 황제로 등극할 때에 고대 로마의 카이사르를 반복했다면, 루이 보나파르트는 다시 숙부 나폴레옹을 반복했다. 마르크스는 루이 보나파르트가 나폴레옹의 겉모습만 흉내내는 광대짓을 하고 있다고 비꼬듯 쓰고 있는데, 가라타니는 여기서 그 풍자적 분위기를 걷어내고, ‘반복성’의 문제에 주목한다. 그는 이 저작이 “역사가 일종의 반복강박 안에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고 말한다.

반복강박이란 말은 본디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정신분석 용어로 만든 말이지만, 가라타니는 역사의 반복강박을 이해하는 데 굳이 프로이트를 끌어들일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한다. 마르크스의 <브뤼메르 18일>을 정독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 반복강박은 경제 영역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호황과 침체를 반복하는 ‘경기순환’이야말로 반복강박의 가장 적실한 사례인데, 가라타니는 정치 영역에서도 이 반복이 나타난다고 말한다. 그때 경제의 반복은 정치의 반복의 조건을 이룬다. 일례로 1851년의 공황 때 루이 나폴레옹의 쿠데타가 일어났다.

그 정치적 반복을 설명하기 위해 가라타니가 꼼꼼하게 살피는 것이 <브뤼메르 18일>에서 분석되는 ‘보나파르트주의’다. 보나파르트주의는 노동자계급/자본가계급과 같은 적대적 계급 가운데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제압하지 못하고 팽팽하게 균형을 이룰 때 등장하는 독재적 권력의 성격을 가리킨다. 더 중요한 것은 보나파르트주의가 보통선거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민의 보통선거를 통해 독재 권력이 성립되는 것이다.

가라타니는 20세기의 파시즘들, 곧 이탈리아 파시즘, 독일 나치즘, 일본의 ‘천황제 파시즘’이 모두 이 보나파르트주의의 변종이라고 말한다. 또 미국 대공황기에 집권한 루스벨트 대통령도 보나파르트주의적이었다고 해석한다. 그렇게 보면 보나파르트주의는 60년 정도를 주기로 하여 다시 등장한 셈이 된다. 이런 정치의 반복을 포함해 역사의 반복이 일국적으로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나타난다고 가라타니는 말한다. 그런 반복 속에 문학의 반복도 있다고 가라타니는 암시한다. 가라타니의 결론은 이렇다. “내가 생각하기에 ‘종언’은 역사에서의 ‘반복’의 한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고명섭 기자)

08. 0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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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6-18 23:17   좋아요 0 | URL
1848년 2월 혁명에서는 세상을 다 바꿔버릴 것 같더니 몇 달 안 가서 투표로 나폴레옹3세 당선...우리나라 87년 6월항쟁 후 얼마 안가서 노태우 당선과 비슷해서 <루이 보나파르트의 부뤼메일 18일>에 관심이 많이 갔고 지금도 많죠.그래서 1848년 혁명과 그 이후 반동정권들의 등장에 관한 책들을 모으고 있습니다.마르크스의 철학이나 경제학 서적보단 <루이...>가 얇고 비교적 읽기 편하다는 이점도 있어서 다 읽었죠.
그런데 가라타니 상의 주장 중 루즈벨트가 보나파르트주의자라는 주장은 동의하기 어렵습니다.자본주의 위기를 넘기기 위한 방법이라는 공통점 외에 보나파르트와 루즈벨트는 차이점이 더 많은데...오히려 뉴딜 반대파들이 반동적이라는 면에서 보나파르트주의자에 가깝다는 생각입니다.뉴딜-반 뉴딜 대결에서 뉴딜이 이기고 좀 더 진보적인 뉴딜 파가 반 파시즘 진영에 가담해서 다행이었죠.

로쟈 2008-06-19 00:00   좋아요 0 | URL
<역사와 반복>은 저도 엊그제 받아서 아직 들춰보지 못했는데요. 내주에는 서평이라도 써볼까 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6-19 01:01   좋아요 0 | URL
저도 어제 서점에서 신간이 나왔길래 훑어보고 썼을 뿐입니다.우연히 요즘 1848년에 대해 공부한 게 겹치기도 했구요.

노이에자이트 2008-06-19 01:19   좋아요 0 | URL
그런데 서울대의 모 원로교수가 근대문학의 종언을 표절했다는 스캔들은 사실인가요?

로쟈 2008-06-19 23:15   좋아요 0 | URL
출처를 확실하게 표시하지 않은 걸로 압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6-20 00:13   좋아요 0 | URL
그러면 표절이 맞네요.
 

개인적으로 주목하는 작가의 소설집이 출간됐다. 정미경의 <내 아들의 연인>(문학동네, 2008). 표제작 외에 몇 작품을 읽은 기억이 있는데, 특히 '내 아들의 연인'은 소위 '대한민국 1%'의 내면에 대한 섬세한 묘사가 특출한 작품이었다. 평론가 김형중의 평을 빌면, "'내 아들의 연인'은 유한계급에 속하는 중년 부인을 화자로 등장시켜 계급간 단절의 강고함을 다룬다. 계급은 경제의 산물일 뿐만 아니라 부르디외 식으로 표현해 문화적 ‘구별짓기’의 산물이기도 하다는 사실, 그리고 계급간 갈등이란 강자가 약자에 대해 베푸는 온정이나 약자가 강자에 대해 행사하는 투쟁만으로 해소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란 사실을 세심하게 보여준다. 19세기 영국 소설들의 예에 육박하는 섬세한 세부묘사와 심리묘사가 가히 압권이거니와, 손쉬운 온정주의와 도식적인 화해를 거부한 작가적 치열함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내가 바라는 건 이런 작품들을 더 많이 읽을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한국일보(08. 06. 14) 자본주의에 새겨진 계층의 골 선연히…

정미경(48ㆍ사진)씨가 2001년 늦깎이 소설가 등단 이후-1987년 신춘문예 희곡 부문에 당선됐지만 큰 활동 없이 가정주부로 살아왔다- 보여주는 활력은 대단하다. 2002년 오늘의작가상 수상작<장밋빛 인생>을 비롯한 두 편의 장편과 2004, 2006년 각각 출간한 소설집에 이어 이번에 세 번째 소설집을 펴냈다. 2006년 이상문학상 수상작 ‘밤이여 나뉘어라’와 같은 해 한국일보문학상과 황순원문학상 최종 후보에 올랐던 표제작을 비롯, 수록작 7편은 외적 후광 없이도 스스로 빛을 발하는 완성도를 갖췄다.

한국소설에서 드문 “유한계급의 삶의 세밀한 묘사”(평론가 김형중)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화제가 됐던 표제작은 가난한 여자와 교제하는 아들의 연애를 지켜보는 상류층 여성의 복잡한 심사를 그리고 있다. 가족과 컨테이너에 산다는 아들의 애인을 직접 만나보고 호감을 품으면서도 그녀는 “어째 착 붙는 느낌이 오지 않”음을, 그 이물감이 단순히 “컨테이너 때문은 아니”란 점을 직감한다.
아들의 일기를 통해 두 연인의 관계가 점차 멀어지고 있음을 알아채면서 그녀는 아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스스로도 “우울한 안도감”을 느낀다. “현이, 넌 걔의 가난이 싫은 거야. 간단한 얘기 복잡하게 하지 마라.” 끝내 빈부의 아비투스(습속) 차이를 극복 못하는 연애담에, 상류층의 삶의 감각을 보여주는 일상적 에피소드를 여러 겹 덧씌우면서 작가는 자본주의 사회에 아로새겨진 계층의 골을 선연히 보여준다.

물질사회 속 비틀린 관계의 양상은 ‘너를 사랑해’에서 더욱 극적으로 드러난다. 한 재력가의 개인 자산관리사로 고용된 ‘나’는 저조한 실적을 무마하려 7년을 사귀어온 애인 Y를 여동생 친구로 속여 ‘영감’(재력가의 별칭)에게 소개한다. 영감이 Y에게 호의를 품고 물량 공세를 퍼붓는 것은 바라던 바이지만, 영감의 구애에 점차 끌려들어가는 Y를 향한 나의 질투와 원망은 미처 예측 못한 감정이다. 분노와 무기력으로 참담해하는 ‘나’에게 Y가 말한다. “우린 꽤나 멀리 왔어. 돌아서면, 그 순간 우린 둘 다 소금기둥이 되는 거야.” 돈과 욕망을 연료로 폭주하는 영구기관에서 도로 내릴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다른 다섯 편은 욕망의 문제에 집중한다. ‘밤이여, 나뉘어라’는 의대 출신 영화감독 ‘나’와, 평생 그를 주눅들게 한 의사 친구 P의 이야기다. 주체 못할 재능과 욕망 속에 몰락해가는 P와, 그를 의식하며 꾸려온 자기 삶을 지키고자 친구의 추레한 모습을 기억에서 지우려 하는 ‘나’의 전도된 관계가 삶을 추동하는 욕망의 본질을 들춘다.

어긋난 욕망의 비극적 이중주는 ‘들소’와 ‘매미’에서도 들을 수 있다. ‘바람결에’는 한 불임부부의 거듭된 인공수정 시도가 정상가족 회복의 욕망에서, 파탄난 결혼생활을 기신기신 잇는 수단으로 전락해가는 과정을 묘파한다.

안정된 서사 구조, 미세한 정서를 포착해내는 문장이 정씨의 작품을 빛낸다. “계층이나 직업을 묘사할 때 입체감을 주려 디테일 리서치를 많이 한다”는 작가의 성실성은 의사, 영화감독, 조각가, 대학강사 등 작품집 속에 등장하는 다종한 전문직 종사자들의 생생한 모습을 통해 증명된다.(이훈성기자)

08. 06. 14.

P.S. 작가에 대한 간략한 소개는 http://blog.aladin.co.kr/mramor/99455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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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두부 2008-06-14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함 읽어볼께요..감솨!

로쟈 2008-06-14 16:21   좋아요 0 | URL
^^

다락방 2008-06-14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신문에서 정미경의 이 소설집이 나왔다는 걸 알고(조선일보였어요 --)앗 정미경이로구나, 하면서 구매하려고 알라딘에 들어왔는데 로쟈님의 이 페이퍼가 있네요. 정미경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국내 작가예요. 그녀의 모든 작품을 읽은 것 같은데(확실치는 않지만) 저는 특히 [장밋빛 인생] 과 [발칸의 장미를 내게 주었네]가 좋았어요. 로쟈님께서도 주목하시는 작가로군요!

로쟈 2008-06-15 11:04   좋아요 0 | URL
네, 안정감을 주는 작가입니다...

비로그인 2008-06-15 0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미경의 소설집이 나왔군요. 저도 좋아하는 작가인데 기대가 되네요.

비로그인 2008-06-15 0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rss에 추가해서 수시로 들르는 눈팅유저입니다.^^

로쟈 2008-06-15 11:04   좋아요 0 | URL
99%에 속하시군요.^^
 

중대 대학원신문의 서평기사를 담비에서 옮겨온다(http://www.dambee.net/news/read.php?section=S1N5&rsec=&idxno=10644). 아주 두툼한 책 <The left, 1848~2000: 미완의 기획, 유럽 좌파의 역사>(뿌리와이파리, 2008)에 대한 리뷰이다. 전국민적인 촛불집회 덕분에 우리는 현단계 민주주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볼 기회도 얻게 되었는데, 그러한 성찰/상상에 요긴한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담비(08. 06. 07) [구양봉의 橫書竪說] 민주주의의 확장을 상상하기 위한 필독서

무려 1천28쪽에 달하는 <The left, 1848~2000: 미완의 기획, 유럽 좌파의 역사>(2002)는 영국의 역사가 제프 일리가 20여 년에 걸쳐 집필한 역작이다. 20여 년에 걸쳐 유럽 좌파의 150여 년을 정리한 이 책을 10여 개월에 걸쳐 전문 번역가 유강은씨가 깔끔히 번역해냈고, 이런 노고가 빛을 발했는지 5만 원의 고가인데도 불구하고 벌써 3쇄(총 발행부수 3천500 부)까지 찍었다고 한다.

현재 미국의 미시건대학 칼 포트 석좌교수로 재직 중인 일리는 원래 독일사 전문가이다. 일리가 먼저 유명세를 타게 된 것도 독일사 부문으로서, 동료인 데이비드 블랙번과 공저한 <독일 역사기록의 신화>(1984)는 독일이 여타 유럽 국가들과는 다르게 발전해왔다고 주장하는 독일 역사계의 이른바 ‘특수한 길’(Sonderweg) 테제를 정면으로 비판한 ‘숨겨진 걸작’ 이다. 이 책은 같은 해에 <독일사의 특수성(The Peculiarities of German History)>이라는 제목으로 영역됐고, 국내에도 작년에 <독일 역사학의 신화 깨트리기> 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 물론 이 책은 적어도 지금까지 별다른 ‘재미’를 보지 못했고, 그래서 유독 ‘한국에서만’ 숨겨진 걸작이 되어 버렸다.



일리의 정치적 성향을 굳이 추적하자면 정통 맑스주의자는 아니지만 넓은 의미에서 좌파이고, 좀 더 한정해서 말하자면 그람시주의자에 가깝다. 일리의 이런 성향은 이처럼 자칫 헛발을 내딛기 쉬운 거대한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동력의 하나가 된 듯하다. 일례로 일리는 좌파 역사가들이 좌파가 밟아온 지난날의 영광과 오욕을 다루면서 종종 누락하고 있는 여성운동과 환경운동 등을 정당하게 복권하고 있는데, 이 점은 일리의 이 책에 버금갈 만한 유일한 책인 도널드 사순의 <사회주의 1백 년: 20세기의 서유럽 좌파>(1988)가 상대적으로 여성운동과 환경운동에 지면을 아끼고 있는 점과 비교해 볼 때 더욱 더 빛을 발한다.



이런 점에서 일리가 자신의 책에 원래 “민주주의 벼리기”(Forging Democracy)라는 제목을 단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셈이다. 일리가 좌파의 역사를 기록하게 된 이유가 바로 “모름지기 좌파의 역사는 인간의 잠재력을 제한하고 왜곡하며, 공격하고 억압하고, 때로는 심지어 완전히 없애버리려고 하는 불평등의 체제에 맞서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좌파가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싸움에 별반 기여하지 않았다면 일리는 좌파의 역사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일리가 유럽 좌파의 역사를 뒤바꿔놓은 분기점 중의 하나로 꼽는 1968년의 유산을, 그리고 그 유산에 기대어 등장한 정체성의 정치학(특히 동성애 운동과 성애의 정치학 등), 혹은 말 그대로 새로운 정치학(반문화 운동과 빈집점거 운동 등)을 비교적 호의적으로 평가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즉, 일리가 보기에 이 새로운 운동‘들’은 “민주적 실천의 새로운 영토들을 지도상에 기입”함으로써 “민주주의가 가질 수 있는 의미 역시 변화”시켰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다.(이런 점에서 이 책은 J. 호머먼의 재기발랄한 책 <붉은 아틀란티스: 공산주의가 부재한 공산주의 문화>와 겹쳐 읽을 만하다. 공산주의를 ‘20세기 최대의 미학적 프로젝트’로 해석하는 이 책은 공산주의가 열어놨지만 우리가 간과해 왔던 ‘새로운 영토들’을 보여주고 있다.)

앞표지

물론 이 책에서 굳이 아쉬운 점을 찾으면 없는 것도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일리가 스페인, 더 나아가 세계 곳곳의 아나키즘에 별반 주목하지 않은 게 못마땅하다. 일리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성과는 오직 혁명을 통해서만, 또는 적어도 내가 유럽 근대사회의 위대한 헌법제정 국면들이라고 부르는 몇몇 집중적인 변화의 시기를 통해서만 획득될 수 있었다”고. 그렇다. 일리의 이 말을 되받아 말하면 나는 아나키스트들이야말로 이런 혁명, 이런 국면들을 앞장서 열어젖힌 인물들 중의 하나라고 말하련다. 어떤 점에서 사회주의자들(공산주의자들)은 아나키스트들이 맺어놓은 열매를 받아먹거나 망쳐오지 않았을까? 1848년, 1871년, 1917년, 1968년이 모두 그랬다.



올해는 “잃어버린 10년”에 분통을 터트리던 보수 우파들이 승리의 샴페인을 터트린 해이다. “잃어버린 10년” 운운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해방 이후 50여 년을 도둑맞았다”라고 비웃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손쉬운 일일지도 모른다. 일리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20세기의 좌파가 추구했던 미래의 일부를 살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여기에 덧붙이자면, 우리는 미래의 나머지를 살아가야 할 것이다. 이 ‘나머지 미래’에 뭔가를 변화시키려면, 우리는 20세기 좌파의 유산 속에서 “실행 가능한 형태의 민주주의의 확장을 다시 상상하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것이 이 책이 갖고 있을지 모를 단점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일독을 강력히 권하고 싶은 이유이기도 하다.

08. 06. 11.

P.S. 리뷰를 읽다가 개인적으로 일리의 <민주주의 벼리기>보다 더 관심을 갖게 된 책은 호버만의 <붉은 아틀란티스>다(도서관에 없길래 해외주문을 넣었다). 찾아보니 LRB에 피터 울른(웰렌)의 리뷰가 지난 1999년에 실린 바 있다(http://www.lrb.co.uk/v21/n23/woll01_.html). 울른은 언젠가 언급한 적이 있는데, <영화의 기호와 의미>(영화진흥공사, 1990)의 저자이다. 리뷰의 제목이 'Stalin at the Movies'인 것으로 보아 책은 스탈린시대를 다루고 있는 듯하다. 궁금하고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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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akim 2008-06-11 22:04   좋아요 0 | URL
피터 월렌은 작가-구조주의를 표방한 이론가로 바쟁의 리얼리즘을 비판하죠.^^ 근데 저 책의 번역은 좀 그래요^^ 워낙 월렌의 글이 명료해서 그나마 의미가 통한다고 해야하나....

로쟈 2008-06-12 08:07   좋아요 0 | URL
그래서 영어본까지 구했던 기억이 나네요...

노이에자이트 2008-06-12 23:22   좋아요 0 | URL
돕 -스위지 논쟁이 자본주의 이행논쟁의 전부인줄 아는 이들에게 일리-블랙번의 주장을 들어보라고 하고 싶어요.저는 독일 역사논쟁 중 두번째로 흥미로왔어요(가장 흥미로운 논쟁은 하버마스_놀테 논쟁).
독일은 시민계급이 약해서 절대주의에 가까운 프로이센,제 2제국,나치 등의 독재가 생겼다는 기존의 주장에 맞서 독일도 이미 자본주의의 길은 걸었으며 독일의 특수한 길과 반대되는 정상적인 그런 자본주의 발전이라는 게 있느냐...영국 자본주의라고 순탄했는줄 아느냐고 일갈했는데 어쩐지 이진경이 사과방에서 식민지 반봉건론자를 비판할 때 내세운 주장과 비슷하다고 여겼어요.외국인이 도발적인 문제제기를 했기에 독일역사학계에서 대단한 논쟁이 일어났다는데...우리나라에선 진짜 조용하네요.

로쟈 2008-06-12 23:54   좋아요 0 | URL
그런 대목들을 짚어주는 글을 한번 써보시죠.^^

노이에자이트 2008-06-18 23:52   좋아요 0 | URL
사회사학파(빌레펠트 대학학파)의 구조적 연속론(독일의 시민계급이 약해서 제2제국,나치가 생겼다는 이론)에 대항해서 싸우던 독일 보수파(기민-기사당 지지자)들은 일리ㅡ블랙번의 이론을 대대적으로 환영합니다.진보파(사민당 지지자)인 사회사학파들은 난데없이 같은 편인줄 알았던 좌파에게 얻어맞죠.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너 자이퉁의 문화부장이던 요아힘 페스트는 1982년경 이 신문에 일리-블랙번을 호의적으로 소개합니다.이어 후속편은 1986년 역사논쟁.여기서는 페스트,놀테에게 콜 수상이 편들어 주면서 하버마스와 사회사학파의 거물들을 난타합니다.이때 페스트,놀테는 <나치는 볼세비키를 방어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주장을 내세웁니다.당연히 반공색채가 강한 미국 레이건 정부까지 독일 보수파의 손을 들어주죠.결국 독일 통일로 보수파 승리.역사논쟁은 당파성이 강하다는 걸 증명해주는 사건입니다.

로쟈 2008-06-18 23:58   좋아요 0 | URL
놀테와 역사논쟁은 지젝도 자주 언급하기 때문에 익숙한데, 사회사학파 얘기는 처음 듣습니다. 해서, 댓글로 읽기에는 아까운데요.^^

노이에자이트 2008-06-19 23:26   좋아요 0 | URL
사회사학파의 대표인 한스 울리히 벨러와 위르겐 코카의 책은 국역도 되어 있고 요즘 신문에 글 자주 쓰는 김호기 씨가 빌레펠트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어요.역사가 논쟁 때 벨러는 당연히 하버마스 편에 섰고 보수파인 미하엘 슈티르머(당시 콜 수상 브레인)는 놀테 편에 섰습니다.벨러와 슈티르머는 똑같이 비스마르크 전공인데 벨러는 독재자로 그리고 슈티르머는 사회주의 탄압법을 옹호하는 등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지젝 신드롬의 허와 실'을 다룬 한겨레의 '우리시대 지식논쟁'에서 마지막 꼭지를 옮겨놓는다. '지젝 전문' 번역자이기도 한 이성민씨의 글이다(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91981.html).

우리시대 지식논쟁/ 지젝 신드롬의 허와 실 ③ 지젝을 제대로 읽는 법

슬로베니아 출신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에 대한 마지막 글이다. 3주 전, 논쟁의 운을 뗀 이현우씨는 우리 시대의 이념적 지형을 이해하고 돌파하는 데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다며 지젝의 급진성에 주목했다. 박정수씨는 이러 주장을 반박하며 지젝의 사유에 새로운 세계를 창안하는 실천적 돌파구가 결여돼 있다고 했다. 이 논쟁의 마지막 글을 맡은 이성민씨는 박정수씨를 다시 반박한다. 지젝이 말하려는 것은 혁명 그 자체가 아니라 ‘혁명의 조건’이라고 지적한다. 그 조건의 핵심은 욕망하고 향유하는 각 개인, 곧 주체다. (제도로서의) 대안을 말하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바로 욕망을 향유하는 개인의 변화다. 그런 변화는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이것이야말로 지젝이 던지는 급진적 사유의 중핵이라는 게 이성민씨의 생각이다.(안수찬 기자)

한겨레(08. 06. 07) 혁명의 주체가 혁명의 대상이다

오늘날, 미국식 세계 자본주의가 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지구상에서 혁명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물론 오늘날 미국적 문명 자체의 궁극적인 위태로움이 조금씩 감지되고 있지만 말이다. 아마도 빙하가 녹아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는 정도로 사람들은 또한 저 위태로움을 감지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마치 혁명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모르기라도 하는 듯 끊임없이 ‘혁명’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이 한 명 있는데, 그가 슬라보예 지젝이다. 그런데 그의 책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는 누구보다도 혁명이 오늘날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유럽문명의 미래와 관련하여, 혁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지젝의 정치적 저술들을 읽을 때 한 가지 유의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는 그것들을 혁명에 대한 직접적인 요청으로 읽을 때 반드시 그를 잘못 읽게 된다. 박정수씨는 지젝의 정치적 기획이 레닌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결합한 글로벌한 국가체제(제국)를 수립하는 것에 있다고 하면서, 이현우씨의 글을 오독했을 뿐 아니라, 지젝 자신을 오독했다. 지젝은 그런 말을 한 적이 단적으로 없다. 게다가 이러한 오독을 염려하여, 지젝은 레닌의 반복이 레닌으로 다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님을 명시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오히려 그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비롯한 레닌의 방식들을 따져보면서, 오늘날 혁명의 조건 그 자체를 탐색하고 있다.

이렇게 말해본다면, 지젝은 혁명 가능성의 조건을 탐구하는 사람이다. 그는 오늘날 혁명이 가능하다고 말하기에 앞서서 반드시 묻지 않으면 안 될 물음을 묻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생략될 수 있는 물음이 아니다. 그것은 혁명에서 혁명적 주체를 생략할 수 없는 만큼 생략할 수 없는 물음이다. 그런데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으면서 지젝은 전통적으로 정치적 혁명에 대해 가장 회의적이었던 사상을 끌어들인다. 그것은 바로 프로이트에 의해 개시된 정신분석이다. 프로이트는 볼셰비키 혁명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회의적이었다. 라캉이 서유럽의 68혁명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회의적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지젝의 혁명에 대한 단적인 규정은 이렇다. “근본적 혁명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오래된 해방적인 꿈을 실현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들의 꿈꾸는 양태 그 자체를 재발명해야만 한다.” 정신분석적 통찰을 담고 있는 이 말은 무의식을 건드리지 않는 혁명은 혁명이 아니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혁명은 단지 국가를 전복하는 행위에 불과하지 않다. 그런 일이라면 사실, 서유럽인들은 몰라도 한국인들은 이미 여러 번 해본 경험이 있다. 정신분석이 혁명에 대해 회의적인 이유는 주체 편에서의 변화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술에 의지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저 유명한 남자들이 자신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지젝이 이와 같은 정신분석적 통찰을 자신의 정치적 사유에 끌어들이는 것은, 그렇기 때문에 혁명을 하지 말자고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혁명에 대한 더욱 근본적인 규정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다.

그런데 혁명에 대한 이와 같은 규정은 생각해보면 결코 새로운 규정이 아니다. 그것은 예컨대 새로운 학문적 발견이 아니다. 그것은 실상 우리가 심중에서 잘 알고 있는 진리이다. 하지만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어떤 것이다. 오늘날 진보적인 정치학자들이나 활동가들은 지금도 새로운 변혁의 전략을 짜느라고 분주할지 모른다. 혹시 그들이 진보를 믿고 있다면 말이다. 오늘날의 상황이 좌파에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은, 이명박씨의 눈물 나는 참회가 잘 알려주듯이, 우파에게도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우리의 자부심인 민주주의는 바로 이만큼 정치가들에게 공평한 것이다.

민주주의에 대해서 조금 더 말해보자. 한때 지젝은 민주주의를 최선책은 아니지만 차선이라고 하면서 옹호했다. 서유럽 학자들이 근본적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을 때, 그도 이러한 희망에 동참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얼마 후 이러한 자신의 입장을 취소했으며, 민주주의는 궁극적 대안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궁극적 대안이 무엇인지 자기 나름의 의견은 전혀 밝히지 않으면서 말이다. 언뜻 위선적으로 보이는 그의 제스처에서 진리를, 이 시대의 증상을 읽어보자.

이 시대는, 이렇게 말해본다면, 문명사적 문제를 우리에게 서서히 내밀고 있다. 이는 단지 국가와 국가의 관계가 문제라거나 어떤 전지구적 문제가 있다는 모호하거나 동원력이 없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류가 스스로의 소비와 향유방식에 대해서 전면적으로 재고해야 하는 때가 도래하고 있다는 말이다. 예컨대 오늘날 인류가 처한 환경적 재앙의 문제가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본연의 환경 운동은 오늘날, 정치적 장을 벗어나 광범위한 소비 운동과 병행되고 있다.

이러한 문명사적인 문제는 단지 정치적 제도나 경제적 제도 내에서만 제기되는 것이 아니라, 학문이나 예술이나 교육이나 연애 등을 비롯해서 인간의 문명적 활동 전 영역에서 제기되는 것이다. 지젝은 향유를 정치적 요소로서 보아야 한다고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 이는 오늘날 향유와 향유의 방식 그 자체가 문제라는 핵심적 요점을 담고 있기에 올바른 방향에 서있는 말이다.

아마도 미국인들이 북한에서 발견하고 싶은 첫 번째는 코카콜라나 맥도널드 광고판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자신들의 향유 방식이 이슬람권이든 북한이든 가리지 않고 전세계에 유통되기를 원할 것이다. 아시아인들이나 유럽인들은 그 방식이 얼마나 저급한 것인지를 알 정도의 문명적 존엄감을 아직은 잃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라캉의 가르침에 따라서, 향유를 정치의 핵심적 요인으로 제출하는 지젝의 제스처를 우리가 함께 떠맡을 준비가 되어 있다면, 동시에 우리는 민주주의나 여타의 대안적 정치 체계에 대한 논의보다 훨씬 중차대한 과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감각을 획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대안적인 구체적 정치 체계에 대한 지젝의 집요한 침묵에서 내가 읽고 싶은 진리는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문명을 구성하는 일체의 것을 재발명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다면, 오늘날 각자가 스스로 선택한 영역에서 해야 할 일은 실로 너무나도 많은 것이다. 이것이 내가 지젝의 통찰을 빌려, 욕망을 상실한 오늘날의 우울한 주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다.(이성민/도서출판 b 기획위원)

08. 06.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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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2008-06-07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을 접하게 된 것이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였는데, 당시 지젝이라는 이름조차 생소했던 상태에서 무엇인가 '발견했다'는 기쁨을 느끼게 해준 책이었습니다. 물론 '이해한다는 것'은-그것이 창조적인 오독이라 할지라도- 무척 어려웠지만.....때로는 이해에 앞서서 무엇인가 전율과 진실을 느끼게 하는 글들이 있는데 지젝의 경우가 그런 경우가 아닌가 싶습니다. 선생님(?)의 번역 덕분에 느낄 수 있는 행복이었습니다.
이제는 이 서재에 매번 들르는 것이 습관이 되었습니다.^^
건강하시길 빕니다. 앞으로도 멋진 번역 부탁드립니다.....

참, 우문 한 가지~ 지젝이 꼽은 네번째 주저 "The Parallax View"는 현재 번역 중에 있는건가요?^^+

로쟈 2008-06-08 22:13   좋아요 0 | URL
제가 번역한 게 아닌데요.^^; <시차적 관점>은 짐작에 하반기나 내년에 나올 거 같습니다. 저도 번역을 맡을 뻔하긴 했지요. 저는 좀 짧은 논문 한편을 번역하게 될 거 같습니다...

김상호 2008-06-10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근데요. The Parallax View를 어떻게 번역해야 하는건가요? 똑같은 이름의 영화는 '암살단'으로 번역되거든요. 궁금궁금

p.s. 그 책 뒷 날개 사진이 참 재미있던데요.

로쟈 2008-06-10 13:12   좋아요 0 | URL
'시차적 관점' 정도로 나오지 않을까 싶은데요. 시간차가 아니라 시선(시각)의 차란 뜻의 '시차'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