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한겨레21에 실린 '로쟈의 인문학서재'를 옮겨놓는다(http://h21.hani.co.kr/section-021162000/2008/06/021162000200806190715043.html). <지젝이 만난 레닌>(교양인, 2008)의 한 대목에 대해 정리한 것인데, 다시 번역돼 나온 마르크스의 <자본>(길, 2008)에 대한 소회를 덧붙였다(물론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한 관심을 다시 부추긴 건 최근의 촛불시위다). 내친 김에 새 번역 <자본>에 대한 소개 기사를 먼저 읽어보는 것이 좋겠다(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245#).  

시사인(08. 06. 17)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분석틀 여전히 유효”

지난 6월 초, 합쳐서 1100쪽이 넘는 두툼한 양장본 두 권을 받았다. <자본> 1-1과 1-2. 전체 세 권 중 제1권을 두 책으로 나누어 번역했는데, 2, 3권은 내년쯤 펴낼 예정이라는 게 도서출판 길 이승우 기획실장의 설명이다. <자본>(<자본론>)을 받아쥔 느낌은 독특했다. 21세기에 칼 마르크스의 ‘신간’이라니.

1867년 초판이 나온 이 책만큼 논란을 겪은 책도 드물다. 새 밀레니엄을 앞두고 영국 BBC는 지난 1000년간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을 발표했는데, 그 첫 번째가 <자본>이었다. 올해 초 교수신문이 국내 계간지와 학술지 편집위원에게 설문한 결과 이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 또한 <자본>이었다. 물론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이 책의 수요는 급감했고, 19세기 자본주의를 분석 대상으로 삼았기에 21세기 현실에 적용하기에 맞지 않는 대목도 많다. 그럼에도 자본주의의 힘을 완벽하게 묘사한 상품의 시인 마르크스, 혹은 우리 일상 생활의 소외와 물화를 보여준 ‘문화 연구’의 마르크스가 여전히 호소력을 가지고 있는 한 <자본>의 상징성은 크다. 더구나 ‘혁명의 시대’가 끝나서 ‘위험성’마저 줄어든 마당이니! 슬라보예 지젝의 시니컬한 표현을 빌리자면 “오늘날에는, 심지어 월 스트리트에도, 여전히 마르크스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새로 나온 <자본>이 실은 온전한 신간은 아니다. 1987년 출판사 이론과실천에서 국내 최초로 <자본>을 완역했던 강신준 교수(54·동아대 경제학)가 21년 만에 이 책을 새롭게 다시 번역했다. 새 번역본은, 쉽게 읽히도록 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는 강 교수의 말처럼 문장이 깔끔하고 유려한 편이다. ‘상품’을 설명하는 앞부분은 여전히 난삽하고, 독일 관념철학의 개념어를 그대로 옮긴 듯한 단어가 가끔 툭툭 튀어나오지만, 중반 이후 등장하는 역사적 사례 등은 역사소설을 읽듯 생생하고 재미있다.

“당시는 시대적인 요청 때문에 서둘러 내느라 번역 오류가 많았고, 그나마 모두 절판됐다. 지금 서점에 있는 김수행 선생 번역본(비봉출판사판)은 영어판 중역본이라서 독일 관념철학을 토대로 한 변증법적 유물론 부분을 옮기는 데 한계가 있다고 봤다. 묵은 빚을 갚는다는 심정으로 다시 번역을 마쳤다.”

강 교수가 한국 최초로 <자본> 번역자가 된 데에는 재미있는 사연이 숨어 있다. 1987년 그는 서울 서대문에 있는 농협 조사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근처에서 출판사 이론과실천을 운영하던 친구 김태경 사장이 퇴근길에 들르라고 해서 갔더니 원고 한 꾸러미를 주는 것이었다. “‘빵잽이’(민주화운동으로 복역하고 출소한 학생들) 여섯 명한테 <자본>을 나눠서 번역하게 했는데, 원고 상태나 봐달라”는 부탁과 함께. 당시 <자본>은 금서 중의 금서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원고를 집에 가져가서 읽었다. 거칠고 오역이 많다는 말과 함께 원고를 돌려준 며칠 뒤, 김 사장에게서 “문제가 많지만 나온다는 게 중요하다, 심각한 부분만 교열을 봐달라”는 연락이 다시 왔다. 그는 두 달 정도 원고를 교열해서 넘겨줬다. 그렇게 해서 ‘역자 김영민’이라는 가명으로 한국어판 <자본> 1권이 출간됐다.



김수행 번역본은 영어판을 옮긴 것

당시 <자본> 출간의 여파는 컸다. 책은 당연히 금서가 됐고, 수배령이 떨어진 김태경 사장은 한동안 도망다니다가 자수했다. 김 사장의 약혼자였던 강금실 판사(전 법무부 장관)가 법복을 벗고 변호를 맡을 채비까지 갖추었다. 하지만 검사가 이적성을 입증하지 못해 공소를 포기하는 바람에 재판은 열리지 않았다. <자본>은 그렇게 한국에서 해금됐다. 강 교수는 이듬해 박사논문을 끝낼 목적으로 휴직서를 낸 뒤 2, 3권까지 번역해서 이번에는 본명으로 출간했다. 17년째 동아대에서 마르크스 자본론을 강의하고 있는 그에게 마르크스 이론이 아직까지 현실에서 효용 가치가 있는지를 물었다.

“수강생이 계속 줄다가 최근 조금씩 느는 추세다. 신자유주의가 심화하면서 학생들의 위기감이 그렇게 반영되는 것 같다. 자본주의 체제가 계속되는 한 마르크스가 제시한 분석틀은 여전히 생명력이 있다고 본다.”

강 교수는 옛 동독의 디츠 출판사에서 1956년에 발간한 마르크스-엥겔스 저작집(일명 ‘메프(MEW)’)에 들어 있는 <자본>을 번역했다. 메프는 옛 사회주의권에서 이론 수뇌부 구실을 했던 동독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가 편집을 맡아서 이른바 사회주의권의 ‘정본’ 취급을 받았던 저작집인데, <자본> 1권은 1890년 엥겔스가 편집한 4판이 실렸다.

<자본> 1권은 다양한 판형이 존재한다. 1867년 나온 초판과 현재의 책은 많이 다르다. 마르크스는 너무 난삽하고 어렵다는 조언을 듣고 1873년에 <자본> 1권의 2판을 거의 새롭게 고쳐 썼다. 3, 4판은 1883년 마르크스가 죽은 후, 마르크스의 친구이자 평생 동지였던 엥겔스가 주석을 덧붙여서 펴낸 책이다. <자본> 2, 3권은 마르크스가 초고만 써놓은 뒤 죽었기 때문에 엥겔스의 손을 거쳐 1885년과 1894년에 각각 출판됐다.

<자본>의 번역본은 1872년 러시아에서 처음 나왔다. 러시아판은 독어본 원본보다 훨씬 많이 팔렸는데, 사회주의를 겨냥해 복지 정책을 폈던 독일 비스마르크 치하에 비해 차르 체제의 러시아에서 사회 모순이 더 심했던 탓이 컸다. 프랑스어판도 1872년에 나왔다. 마르크스가 살면서 <자본>을 집필했던 영국에서는 마르크스 사후인 1886년에야 영어판이 출간됐다. 김수행 교수가 번역한 <자본론>(비봉출판사)은 1976년 펭귄출판사에서 출간한 책을 번역한 것이다. 이 책에는 제4인터내셔널 서기를 지낸 트로츠키주의 이론가 에르네스트 만델이 쓴 75쪽 분량의 서문이 붙어 있어서 흔히 ‘만델판’이라고도 불린다.(안철흥기자)

한겨레21(08. 06. 19) 2008년 6월, 레닌

지난봄 <교수신문>에서 학회지와 계간지 편집위원들을 상대로 ‘광복 이후 한국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이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던지니 마르크스의 <자본론>이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고 한다. 이 설문 결과는 개인적으로 좀 의아했다. <자본론>이 ‘한국 지식인 사회’에 끼친 영향이라면 몰라도 ‘한국 사회’에 끼친 영향? 얼른 생각해보아도 <자본론>의 번역본이 나온 것은, 완역본을 기준으로 채 20년도 되지 않는다. 때문에 내게 떠오른 두 가지 의문점. 그 이전 40년 동안에는 한국 사회에 그만한 영향을 끼친 책이 전혀 없었다는 것일까?(가령, <전태일 평전> 같은 경우는?) 더불어 <자본론>을 제대로 읽어본 사람은 드물다는 속설에 기대면, <자본론>의 영향력은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나로선 뾰족한 대답을 갖고 있지 않은데, 다만 <자본론>의 출간 타이밍만큼은 절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국역본 <자본론>의 초판이 ‘운동권 빵잽이’들의 번역을 통해 나온 게 6월항쟁이 있던 1987년이고, 이번에 그 교정을 맡았던 강신준 교수가 독어판을 새로 번역한 <자본> 1권을 출간한 시점은 우연찮게도 촛불시위로 한국 민주주의의 새 역사를 쓰고 있는 2008년의 6월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마르크스의 <자본론>보다도 지금, 우리에게 더 긴요한 책은 <지젝이 만난 레닌>(교양인 펴냄)이 아닌가 싶다. 책의 1부 ‘문앞에 다가온 혁명’은 1917년 3월부터 10월까지 러시아혁명 전야에 레닌이 쓴 글들을 모은 것이고, 2부 ‘레닌의 선택’은 그에 대한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주석’이다. 주석의 초점은 여느 책들과 달리 ‘레닌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가 아니라 ‘레닌을 어떻게 반복할 것인가’에 맞춰져 있다.

레닌을 반복한다고? 지젝의 이러한 기획에 대한 반응은 그가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다시피 ‘빈정거리는 폭소’다. ‘자본주의의 힘을 완벽하게 묘사한 상품의 시인’ 마르크스는 오늘날 월스트리트에서도 좋아한다. 하지만 레닌은 뭔가? 마르크스주의를 실천에 옮기려는 노력의 ‘실패’이자 ‘현실사회주의’ 실험이라는 커다란 ‘재앙’의 상징적 인물 아닌가? 하지만 지젝이 다시 건져내고자 하는 레닌은 그러한 ‘낡은 교조적 확실성’을 가리키는 이름이 아니라 재앙에 가까운 상황에 내던져지는 근본적인 경험을 한 레닌이며 그런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마르크스주의를 다시 만들어야 했던 레닌이다.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과학적 무기’로서 <자본론>을 치켜세우곤 하지만, 레닌은 자신이 직면한 새로운 문제들에 대해 이렇게 토로한 바 있다. “이 문제에 관해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레닌이 처했던 재앙적 상황이란 1914년의 상황이다. 전 유럽이 군사적 갈등 상황 속에서 둘로 쪼개져 대립하고 있었고, 유럽의 모든 사회민주주의 정당들마저도 ‘애국주의 노선’을 채택해 레닌에게 충격을 던져주었다. 그렇지만 레닌은 그렇게 사회주의 운동 자체가 소멸한 것 같은 절망적인 시점에서 ‘혁명의 독특한 기회’를 포착한다. 알려진 대로 역사학자 홉스봄은 20세기를 자본주의의 평화적 팽창이 끝난 1914년에서 현실사회주의가 붕괴한 1990년까지로 규정했다. 지젝의 제안은 우리가 레닌이 1914년에 대응해 한 일을 1990년에 대응해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가능성은 없어. 민주적 합의에 충실해야 돼”라는 일종의 ‘사고 금지’에 대응해 다시금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 그것이 ‘레닌’이란 이름이 우리에게 상기시켜주는 것이다.

혁명에는 두 가지 모델, 두 가지 양립 불가능한 논리가 있다. 하나는 역사적 진화의 필연성에 따라 ‘적절한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적절한 때’라는 것은 따로 없으며 혁명적 기회가 나타나면 ‘정상적인’ 발전 과정을 우회해서라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레닌은 1917년 10월에 이렇게 주장했다. “2천만 명은 안 되더라도 1천만 명으로 이루어진 국가기구는 즉시 가동할 수 있다.” 지젝의 말을 빌리면, 이것이 ‘진정한 유토피아’다. 그리고 그가 보기에 우리가 고수해야 하는 것은 레닌주의의 이러한 유토피아적 광기다. 그것은 과연 지금 우리에게도 가능할까?

08. 06. 19.

P.S. “이 문제에 관해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때문에 레닌이 새롭게 고안해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 흔히 '마르크스-레닌주의'라고 불리는 그만의 마르크스주의이다. 사정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 아닐까?(이번엔 레닌도 말해주지 않은 문제들과 우리는 직면하고 있다!) 나는 당장에 <자본> 번역을 무료로(혹은 아주 저렴하게) 인터넷에 공개하는 것이 레닌주의식의 '유토피아적 광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사실 영역본 <자본>은 마르크스/엥겔스의 다른 저작들과 함께 모두 인터넷에 공개돼 있다(http://www.marxists.org/archive/marx/works/1867-c1/). 가장 먼저 번역되고 독어본보다도 많이 팔렸다는 러시아어본도 마찬가지다(http://www.marxists.org/russkij/marx/1867/kapital.htm). 고가의 '양장본 고전'으로서의 <자본>과 촛불시위에도 들고 다닐 수 있는 저렴한 문고본 <자본>의 차이는 결코 작지 않다. 그러한 '출판혁명'이 도래하지 않는다면 "한국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이란 수식어는 한갓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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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6-20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본주의 붕괴가 필연적이라면 굳이 혁명가들이 나설 필요가 있느냐 하는 질문은 정말 어렵죠.그래서 맑시즘 정통의 대부였던 플레하노프나 카우츠키도 먹칠을 하고 맙니다만...요즘 관심을 갖고 있는 비코의 다음과 같은 촌철살인은 레닌이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할겁니다.
...상품과 달리 사상은 각 민족이 자기들 발전의 주어진 단계에서 필요한 것을 독립적으로 발견함으로써 퍼진다...물론 이 주장이 극단적으로 가면 일종의 특수주의가 되고 맙니다만.

로쟈 2008-06-20 12:53   좋아요 0 | URL
레닌에게서는 '민족' 대신에 '상황'이라고 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상황'의 경우엔 보편적 특수성이죠. 반복되니까요...

paul 2008-06-20 0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개인적으로 <자본>의 초판본을 볼 수는 없는 것인지...궁금하군요. 가라타니 고진의 경우도 자본의 초판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대목을 읽은 기억이 어렴풋이 나는군요. 지나치게 난삽해서 수정을 거쳤다고 하는데, 오히려 수정이 가해지기 전의 거칠지만 원석의 형태를 보존하고 있는 사유의 흔적을 보고 싶은 것은 지나친 욕망일까요^^+

로쟈 2008-06-20 12:53   좋아요 0 | URL
가라타니 같은 비평가가 국내에선 나올 수 없는 이유도 그런 데 있지 않을까 싶네요...

solico 2008-06-20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나가다 무뢰하게 말씀드립니다만, 강신준 교수가 90년대에 개역한 이론과실천판 자본 1권 3개 분책도 있습니다. 저는 흰색의 초판본이 아닌 개역판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과 '20년'만의 개역판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서점에 갈 시간이 없어서 비교는 못해봤습니다만, 강교수 자신도 언급하지 않고 아직 어디에도 언급되지 않아서 궁굼해집니다. 90년도 이후에는 이걸로 나왔던 것 같은데요.
개역판이라지만 별로 개역한게 없고 표지만 이쁜색으로(2~3권과 같습니다) 맞추기 위해 그런건지(여기 서문에도 많은 부분을 개역했다고 나오기는 합니다), 아니면 새 번역에 포커스를 주기 위해서 그런건지 궁굼해지네요.

로쟈 2008-06-20 12:55   좋아요 0 | URL
저도 강신준 교수의 번역은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김수행본도 1권만 조금 뒤적거린 정도라서요. 짐작엔 90년대본은 오탈자나 손보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소경 2008-06-20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에 강신준 교수 판 <자본> 구입해서 선배랑 같이 읽어 볼 기회가 생겼는데, 선배가 헌책방에서 구입한 것은 김수행교수 판이더군요. ^^:;

로쟈 2008-06-20 12:55   좋아요 0 | URL
덕분에 비교독해가 가능하겠네요.^^

비로그인 2008-06-20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로쟈님의 P.S.에 담긴 의견에 동의합니다. 마샬 버먼이 자신의 글 모음집 <맑스주의의 향연>에서 언급한 <경제학-철학 수고>와의 만남의 희열 그리고 싸고 알차게 나온 보급판 <경*철 수고> 10권? 20권?을 주머니를 털어 구입하고는 주위 사람들에게 보급하며 전한 흥분이 생각나네요.
이번 <자본>은 정말 가격이 두껍군요.
그래도 강유원씨 번역으로 나온 <경*철 수고>는 판형이 좋고, 가격도 <자본>만큼의 두께는 안하지만.. 버먼의 경험이, 아직 이 곳 사회에서는 요원해 보입니다.

로쟈 2008-06-21 11:58   좋아요 0 | URL
네, 가격이 두껍습니다! 저도 손에 들었다 놓았지요.^^;

노이에자이트 2008-06-20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레닌의 혁명이 성급한 것이었다면서 엥겔스가 했다는 말-조급하게 성공한 혁명(충분히 산업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회주의자가 집권하는 것)은 비극을 부른다-을 인용하더군요.이사야 벌린은 레닌이 혁명을 앞당기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러시아의 자본주의 발달단계를 과장했다는 주장까지 합니다.
원래는 당시의 혁명가들은 혁명가능성이 높은 나라로는 독일을 꼽았다는데...

로쟈 2008-06-21 12:01   좋아요 0 | URL
그게 혁명에 대한 양립불가능한 논리겠지요. 러시아 혁명에 대해서는 워낙에 설들이 많지요. 그 중 하나는 '러시아'이니까 가능했다는 것이고, 또 '러시아'라서 마르크스가 욕봤다는 얘기도 있고요...

노이에자이트 2008-06-21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역본 자본론이 인터넷에 공개되면 달성되는 우리나라의 유토피아적 광기의 모습을 대충 알려주실 수 있는지요?

로쟈 2008-06-21 23:55   좋아요 0 | URL
제가 '유토피아적 광기'라고 한 건 그 공개 행위 자체입니다. '자본의 논리'에 역행하는...

노이에자이트 2008-06-22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역본이나 노역본은 공개되는데 왜 우리는 안 될까요? 사실은 인터넷을 통한 공개도 자본의 논리에 역행하지 않으니까 허용되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듭니다만,,,

로쟈 2008-06-22 00:05   좋아요 0 | URL
'자본의 바깥은 없다'는 체념은 너무 염세적인 쪽으로 흘러갈 수 있지 않을까요? 압도적이지만 전부는 아니죠. 혹은 전부는 아닌 것으로 만들어야죠...

노이에자이트 2008-06-22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에서 공개하라는 요구는 역자나 출판사에 너무 무리한 요구일까요?

로쟈 2008-06-22 11:14   좋아요 0 | URL
불가능한 가능성이죠.^^;
 

'美 저명 미학자 아서 단토의 책 오역논쟁'이란 기사 타이틀이 있기에 뭔가 해서 클릭해봤더니 '로쟈의 저공비행'에서 벌어진 일을 정리해놓은 기사다(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806/h2008061802344784210.htm). '알라딘통신'에나 들어갈 만한 내용이 일간지에 실려 있어서 흥미롭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다. 필경 기사거리가 부족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렇다 하더라도 관심있게 읽어주는 분들이 있다는 건 불쾌한 일이 아니다. 기사를 자료 삼아 '창고'에 넣어둔다. 

한국일보(08. 06. 18) 美 저명 미학자 아서 단토의 책 오역논쟁

미국 저명 미학자ㆍ미술평론가인 아서 단토(84)의 국내 번역 저서를 둘러싼 인터넷 상의 오역 논쟁에 저자까지 가세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최근 국내 소장학자 및 번역가들이 인터넷을 통해 펼치는 번역비평의 수준과 활력을 보여주는 사례다.

발단은 ‘로쟈’라는 필명으로 잘 알려진 러시아문학 전문가 이현우씨가 지난달 21일 자신의 알라딘 블로그(http://blog.aladin.co.kr/mramor)에 지난달 번역 출간된 아서 단토의 <일상적인 것의 변용>(김혜련 옮김)의 일부 구절에서 발견한 오역을 지적한 일이었다. 이 책은 한길사에서 1996년부터 출간 개시한 고전 시리즈 ‘그레이트북스’의 100번째 책이다.

이씨는 남성용 소변기를 ‘샘’이란 제목으로 미술전에 출품하는 등 일상적 소재를 예술 영역으로 끌어들인 작업으로 유명한 프랑스 조각가 마르셀 뒤샹의 예술 세계를 설명하고 있는 이 책 57쪽의 두 문장을 오역 사례로 제시했다. 해당 구절은 이렇다. “그(뒤샹)의 행위는 하찮은 대상들을 모종의 미적 거리 안에 배치했고, 그 결과 그것들이 미적 향수(享受)에 부적합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간단하게 평가할 수도 있다. 즉 가장 가당치 않은 곳에서 모종의 아름다움이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을 실제로 입증하려던 시도로 볼 수 있다.”

이씨는 두 문장이 얼핏 봐도 모순적이라며 번역자가 앞 문장 ‘그 결과…’ 이하 구절에 해당하는 원문 ‘rendering them as improbable candidates for aesthetic delectation’에서 ‘improbable’(가능할 것 같지 않은)의 반어적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 결과 가능할 법하지 않은 그것들(빗자루, 병걸이, 자전거 바퀴, 소변기 등)을 미적 향수의 대상으로 연출했다’로 번역해야 옳다는 것.

글이 게재된 다음날부터 ‘노이에자이트’ ‘juin’ ‘규’ ‘qualia’ ‘carboni68’ ‘palefire’을 각각 필명으로 쓰는 알라딘 블로거가 차례로 ‘댓글 논쟁’에 가담했다. 이 중 ‘지방 중소도시에 사는 번역가’로 자신을 소개한 ‘qualia’는 이씨의 지적에 동의하면서 문제의 두 문장에서 두 개의 쟁점을 새로 제시하며 논쟁을 주도했다.

하나는 번역자가 ‘하찮은 대상들’로 번역한 ‘these unedifying objects’는 ‘미적 감흥을 불러 일으키지 않는 대상들’로 표현해야 정확하다는 점, 또 하나는 ‘가장 가당치 않은 곳(the least likely places)’에서 ‘places’를 ‘전시장’으로 해석하는 다른 논쟁자들에 맞서 그 단어는 소변기, 빗자루 등 뒤샹의 ‘전시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는 “자기가 듣고 본 것들을 몇 문장에 투사해 과시 대회 같은 분위기로 흘러간다”면서 논쟁에서 빠지겠다고 쓴 한 블로그를 “뜻하지 않게 서로 감정을 다치게 했더라도 끝까지 가는 것이 토론의 기본이라고 생각한다”고 설득, 마음을 돌리기도 했다. 인터넷 논쟁 문화의 성숙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50개의 댓글이 달리며 열흘 넘게 진행된 논쟁을 끝맺은 사람은 저자 아서 단토였다. ‘qualia’가 지난달 25일 세 쟁점에 대한 해답을 요청하며 보낸 이메일 질문지에 이달 2일 답신을 한 것. 단토는 “관심과 열정에 감사한다. 복잡하고 평이한 문장을 함께 구사하는 내 글쓰기 스타일에서 비롯된 의문 같다”면서 질문마다 명확한 입장을 밝혔다. 모든 쟁점에서 ‘qualia’의 손을 들어주는 답장이었고, 논쟁은 유익하고 평화롭게 마무리됐다.(이훈성기자)

08. 06. 18.

P.S. 내가 쓴 페이퍼는 '앤디 워홀의 비누상자'(http://blog.aladin.co.kr/mramor/2102426) 이고, qualia님의 관련 페이퍼는 '아서 단토 교수님, 답장을 보내주시다'(http://blog.aladin.co.kr/qualia/2120870) 이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Gene님의 의견은 http://geneghong.blogspot.com/2009/01/9.html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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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 로스의 <미국 사회과학의 기원1,2>(나남, 2008)에 대한 소개기사를 올려놓은 적이 있는데(http://blog.aladin.co.kr/mramor/2122007), 막상 서점에서 손에 들어보니 쉽게 읽게 될 성싶지 않았다. 당면한 일들과는 좀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냥 덮어놓긴 뭐해서 조금 더 자세한 서평기사를 하나 더 챙겨놓는다(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6380). 미국 학문의 '역사성'에 대한 주목은 우리에게도 통용되고 있는 학문의 '미국식 표준'에 대해서 진지하게 재고해볼 것을 요구한다.

교수신문(08. 06. 16) 자연과학·개인주의에 충실한 ‘미국 예외주의’ 비판

우리는 언제 족보(族譜)를 따지는가. 대체로 먹고살만해졌을 때, 아니면 가족사에 뭔가 문제가 발생했을 때다. 학문 활동에 몰두하는 전문가도 마찬가지다. 자기 전문분야의 기원을 돌아보는 일은 매우 드물다. 학계의 경우 십중팔구는 해당 분과가 난관에 봉착했을 때 기원을 돌아보게 된다.

도로시 로스(Dorothy Ross)의 『미국 사회과학의 기원』(The Origins of American Social Science, 1991)도 그러하다. 그는 20세기 미국문화가 점점 더 방향성을 상실하고, 사회윤리가 지속적으로 침식됨에 따라 미국 사회과학을 지배해온 자연과정에 입각한 사회모델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저자는 ‘미국 예외주의적 사고 자체를 역사화’하려는 노력의 일부분으로 ‘미국 사회과학을 역사화’하고자 이 책을 썼다고 지적한다.  

미국 예외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해 저자는 그것을 미국의 독특성으로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판 국가주의(nationalism)로 비판하는 입장을 취한다. 미국의 국가주의는 미국을 유럽으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해 형성됐으며, 미국과 유럽을 상극으로 보려는 성향에 의해 고취됐다. 또한 미국 예외주의 담론의 두 번째 특징은 이상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을 융합시키는 경향인 ‘이상주의의 형이상학’이다. 처음부터 미국 국가주의자들은 미국 역사에 개인의 자유와 정치적 평등, 사회적 조화, 그리고 어느 정도 사회적 평등까지 결부시켰다. 그렇지만 이런 사고는 때때로 제국주의적 충동을 일으키기도 했다고 본다.

저자는 미국 사회과학의 삼대 핵심 분야인 경제학, 사회학, 정치학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있다. 역사학, 심리학, 인류학과 그 밖의 사회과학 분과학문들은 체계적으로 포함시키지 않고 다만 선택적으로 가끔 언급할 뿐이다. 이 책은 미국 사회과학 분과학문들의 형성기인 대략 1870년에서 1929년 사이의 기간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사실 계량모델이나 체계분석, 기능주의 그리고 행태과학 등이 크게 유행했던 1950년대에 미국 사회과학의 과학적 열망이 최고조에 달했다. 그렇지만 저자는 사회역사과정을 자연과정의 한 영역으로 보는 기본 관점과 자연과학적 방법을 추구하려는 결정은 이미 1920년대에 이뤄졌다고 본다.

이처럼 미국의 사회과학이 역사학보다 자연과학에 더 기울고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라는 고전적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연유를 추적하면서, 저자는 이것이 ‘미국 예외주의(American exceptionalism)’라는 미국식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에 입각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미국은 세계사상 특수한 지위를 차지한다는 예외주의 이데올로기가 청교도이념, 자유주의 그리고 공화주의에 깊이 스며들어 미국 사회과학에 경로의존성을 부과했다는 것이다. 저자가 미국 예외주의를 지목해 역사적 비판을 가하는 의도는 앞으로 그것의 영향력을 줄여나가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 사회과학이 선택한 특수한 과학주의적 입장은 그들의 특수한 역사의식에 의거하지 않고는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미국 사회과학이 실용적인 양키들에 의해 발전된 것이 아니라, 도적철학에 뿌리를 두고 미국 사회의 엘리트층 가치를 신봉하는 학자층에 의해 이뤄졌다고 본다. 그런데 미국의 학자층은 실제로는 현실권력에 관계했으면서도 스스로는 권력과 거리가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저자는 1965년 콜롬비아대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프린스턴대, 버지니아대를 거쳐 현재 존스 홉킨스대 역사학 교수로서 미국 지성사, 현대 사회사상과 정치사상, 인문과학사를 강의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 사회과학의 핵심 흐름을 이루는 담론을 재구성하는 지성사의 방법을 동원한다. 그리하여 미국의 역사와 사회과학을 연결시키는 한편, 사회과학자들이 전제하는 가치들이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방식을 탐구한다. 저자는 역사적 전환점마다 담론을 주도한 인물을 중심으로 사회과학담론을 소개하고 있다. 그의 논의는 근대 사회와 정체 그리고 경제를 둘러싸고 진행된 학계의 논의와 미국 예외주의를 둘러싼 국가 엘리트들의 논의에 국한된다.

책의 메시지는 무척 명료하다. 미국 사회과학의 역사는 한마디로 각 시기별로 가장 중요한 사회문제들과 지적, 정치적으로 대결해온 역사라는 것이다. 미국 예외주의와 자유주의가 결합해 미국 사회과학계에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합의가 형성됐다. 따라서 사회과학자들은 자유주의 사회를 어떻게 통치해나갈 것인가에 집중했다. 저자는 자신의 의도가 “미국 사회과학을 역사화하는 것”이며, “역사세계를 자연화하려는 미국 사회과학의 노력 자체가 바로 역사적 기획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정리한다. 사회과학자들이 과학주의적 선택을 한 데는 ‘충분한 이유들’이 있었겠지만, 그 이유들은 역사적 의도들에 의해 항상 제약된 이유들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객관적 과학’이라는 미국 사회과학의 실증주의적 자기묘사를 부정하는 것이다. 미국에서 공부한 사회과학자들은 거의 대부분 미국 사회과학의 가치중립성, 객관성, 전문성을 옹호한다. 문제의식은 ‘가치부하적’, ‘주관적’이고 따라서 ‘과학적’이거나 ‘전문적’이기 어렵다고 기각한다.

그런데 미국 사회과학의 과학주의 자체가 ‘역사적’인 것이라면, 우리가 미국 사회과학을 바라보는 시각은 뿌리부터 바뀌어야 할 것이다. 미국 사회과학자들에게 학문의 과학성은 국가에 대한 헌신이나 국익 또는 기업이익에 대한 봉사와 전적으로 양립가능한 것이다. 아니, 과학적이어야 더욱 더 권력효과를 창출할 수 있다고 믿는다.  



나는 역사사회학 전공자로서 한미관계를 주로 연구한다. 최근에 기밀해제된 미국 정부문서를 읽으면서 가끔씩 미국 사회과학자들이 정부의 프로젝트를 수행한 보고서들을 접하곤 한다. 로스토우 교수와 헌팅턴 교수의 보고서가 기억에 남는다. 둘 다 월남전 관련 보고서를 미국 정부에 제출한 바 있다. 로스토우 교수는, 우리에게는 ‘개발경제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미국의 월남전 개입에 결정적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유명하다. 헌팅턴 교수는, 우리에게는 ‘민주주의의 제3의 물결’이나 ‘문명충돌’로 유명하지만, 월남전 당시 ‘베트콩’의 게릴라전술에 맞서 물고기를 없애기 위해서는 물을 말려버려야 한다는 전술 즉, 강제 도시화를 추진해야 한다는 제안을 한 장본인이었다. 미국 사회과학계가 미국정부나 기업계와 맺는 관계는 한국의 그것보다 훨씬 전면적이고 제도적이다. 우리가 미국 사회과학계는 가치중립적이며 엄격한 과학적 방법론에 입각해 연구와 강의를 진행해나갈 것이라고 믿는 동안 그들은 국익과 사익을 위해 열심히 복무했다.

공역자인 백창재 교수와 정병기 교수는 한국학술진흥재단 학술명저 번역총서의 일환으로 이 책을 옮겼다. 옮긴이는 1권 끝에 보론으로 「한국 사회과학 정체성 논의」를 싣고 있다. 또 2권 끝에는 이 책의 해제를 싣고 있다. 아마도 이 책을 번역해냄으로써 문제의식의 중요성을 발견하고 과학주의를 넘어서려는 작업에 동참하고자 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미국 사회과학의 기원을 파헤치는 작업소개는 한국 사회과학의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노력과 맞닿아 있는 것 같으면서도 기실은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 사회과학의 정체성은 지금, 여기에서 우리의 문제를 우리의 머리로 고민하는 데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지난 100여 년 간 한국의 근대화는 ‘타율적 근대화’라 부를 만큼 바깥으로부터의 도전에 대한 때늦은 응전, 그것도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한, 대응이었다. 지금부터라도 날개(wings)와 뿌리(roots)를 함께 보듬고 나가는 한국 사회과학을 실천해야한다. 미국의 사회과학이 우리에게 덧입힌 ‘과학주의’의 속박에서 벗어나 주체적 문제의식과 독특한 문제틀을 제시할 때다. 그러기 위해 한국 사회과학에 뿌리내린 미국 사회과학에 대한 성찰은 필수적이다. 한국 사회과학의 정체성이란 우리와 마주한 상대방과의 관계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정일준/ 고려대·사회학과)

08. 06.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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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6-18 23:39   좋아요 0 | URL
로스토우나 헌팅턴이 베트남전 당시에 했던 구린 짓은 촘스키와 허만이 근거 자료까지 인용해서 시원하게 두들겨 줬죠(워싱턴 커넥션과 제3세계 파시즘).거기에 베트남사 전공교수인 더글라스 파이크도 별책부록으로 가볍게 한 방...파이크는 로스토우나 헌팅턴 정도의 파렴치한은 아니라고 여겼던 모양입니다.

로쟈 2008-06-19 00:07   좋아요 0 | URL
그런데, 그 '구린 짓'이 저로선 사례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가 아닌가 싶어요. 사이드도 지적하고 있는데, 그보다 더 주의할 문제는 오히려 '전문분야'주의라고 생각합니다. 여전히 비판받지 않으면서 통용되는...

노이에자이트 2008-06-19 00:53   좋아요 0 | URL
그래요.촘스키와 허만도 그 책에서 그 문제를 지적합니다.미국 국방성과 CIA가 종속국들의 군인들을 데려다 친미사상을 주입하고 개인적 친분관계를 이용해서 제3세계 군부를 친미일색으로 만드는 과정을 파헤쳤죠.이번에 광우병이 안전하다고 군대에서 정신교육 시간에 사병들에게 홍보하는 우리나라 군대를 보면...군인들만 그렇겠어요.제3세계 유학생들을 뭣 때문에 유치하겠습니까?이윤기의 <하늘의 문>을 보면 미국과 자국의 이익이 부딪히는데 충성스럽게도 미국 편이 되는 후진국 지식인 이야기가 나옵니다.자기를 미국인과 동일시하는 거죠.당연히 미국 유학생 출신.
 

고려대 대학원신문의 한 기사를 학술저널 담비에서 옮겨온다(http://www.dambee.net/news/read.php?section=S1N5&rsec=&idxno=10777). 점심을 먹고 커피도 마신 뒤라 잠시 '여흥' 삼아 읽은 '춤' 관련기사이다. 젊은 세대들에겐 왕가위의 영화 <해피 투게더>로 각인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춤, 탱고의 문화사를 잠시 짚어주고 있는데, 가난한 이민자들의 애환이 탱고에는 서려 있다는 걸 알게 한다(비슷한 근대화를 경험한 우리에겐 왜 이런 춤이 없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그냥 캬바레 춤이 아닌 것이다. 생각해보니 우리에겐 자유만 부족한 것이 아니라 춤도 부족하다... 

고려대 대학원신문(147호) 아르헨티나 근대문화로서의 탱고

부에노스아이레스는 항구도시다. 항구도시는 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문화의 집결지라는 특성이 있다. 또한 외지인이 빈번하게 드나드는 가운데 이들이 경험하는 서러움과 고독, 향수 등이 풍요로운 문화를 낳기도 한다. 뉴올리언스 항에서 재즈가 탄생한 것이 그렇고, 리버풀이 비틀스를 탄생시킨 것이 그러하다. 부에노스아이레스처럼 외지인의 유입이 국가 정책적으로 이루어진 곳이라면 더할 나위가 있을까. 탱고는 바로 이 부에노스아이레스 항구, 그 중에서도 가장 남쪽 하구였던 보카에 정착한 이민자들 사이에서 탄생했다.

19세기 후반의 아르헨티나는 근대국가로 자리잡기 위해 박차를 가하던 시기였다. 국가헌정을 수립하고 유럽인이민정책 및 무상 공교육제도를 통해 공화국을 ‘문명화’하는 것이 실증주의자였던 이 시기 통치자들의 최대목표였다. 이민정책의 첫 번째 목적은 인디오를 축출한 지역에 사람을 거주시킴으로써 광활한 대지를 개척하고자 함이었지만, 유럽인의 유입이 선진적인 문명을 도입하는 데 기여하리라는 계산도 있었다. 통치자들은 ‘유럽화’를 곧 ‘문명화’와 동일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들어온 이민자들은 부유한 유럽국의 중산층이 아니라 가난한 남유럽 출신의 하층민들이었다. 특히 내 소유의 땅을 갖겠다는 꿈을 안고 온 남부 이탈리아의 농민들이 상당수였다. 돈을 벌겠다고 떠난 엄마를 찾아나선 이탈리아 소년의 이야기인 <엄마 찾아 삼만리>도 이 역사를 배경으로 한 것이다. 그러나 이민자들은 뿌리깊은 대토지 소유제 때문에 꿈을 이루지 못하고 대부분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일용 잡부로 전락했다. 이민자들이 주로 정착한 곳은 보카 지구였다. 남아메리카와 유럽을 잇는 주요 하구였던 보카는 일용직을 구하기 쉬웠기 때문이었다.



고달프고 서러운 항구의 노동은 태양이 서쪽 지평선으로 사라질 즈음에야 끝이 나고, 어둑한 선술집에서 서민적인 음악을 들으며 술잔을 기울이는 것으로 이민자들의 고단한 하루가 또 저문다. 때로 여흥으로 술파는 여인들과 춤을 추기도 한다. 대부분 돌아갈 것을 기약하고 가족을 두고 온 남자들이거나 미혼이었던 이민자들은 이 여인들과 외로움을 달래기도 한다. 이렇게 탱고는 향수에 시달리던 이민자들과 몸 파는 여자들 사이의 춤에서 비롯되었다.

하층민의 춤으로 탄생한 탱고는 처음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안에서도 보카 지역에만 머물러 있었다. 유곽에서 탄생했다는 원죄 때문이었다. 더구나 춤을 춘 사람들이 대개 유럽에서 온 이민자들이었고, 당시에 이민자들에 대한 토착인들의 편견과 증오심이 팽배해 있던 상황을 고려하면 토착 아르헨티나인들이 탱고에 대해 느꼈을 거부감이 충분히 짐작된다. 서로 몸이 스치고 다리를 교차시키기도 하는 춤 동작이 외설스럽다고 여기기도 했거니와 빈민촌에서 탄생한 춤이다보니 더더욱 아르헨티나 상류층은 탱고를 경멸했다.

그러던 탱고가 유럽에 전파된 것은 유명한 탱고 작곡가들이나 빈민촌을 드나들며 탱고를 배운 일부 부유층 남자들이 유럽 여행을 통해 선보이기 시작하면서였다. 유럽 대륙은 탱고의 에로틱한 춤 동작에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당시 유럽 사교춤에는 탱고처럼 남녀가 몸을 가까이 맞대는 예가 없는 데다 탱고가 남미의 끝자락에서 건너온 춤이라는 이국성도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탱고가 유럽 상류층의 호응을 받자 탱고를 저속하고 수치스러운 춤이라고 배척하던 아르헨티나 상류층의 태도에도 변화가 생겼다. 유럽으로 수출되었던 탱고가 다시 아르헨티나로 역수입되는 기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탱고의 확산은 아르헨티나 정치 지형의 변화와도 맞물려 전개되었다. 1912년 보통선거법이 제정되고 하층민들도 투표권을 갖게 되면서 중하류층을 대변하는 급진시민당의 후보가 대통령이 되었다. 이렇게 하류층의 참정권이 보장과 급진당 세력의 확산의 결과 하류층 문화도 제도권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탱고의 확산도 이러한 사회적 수용의 분위기에 힘입었음은 물론이다.

탱고는 근대국가 아르헨티나가 그 정체성의 기초를 마련하던 시기의 문화 산물이다. 탱고가 탄생한 곳은 도시와 농촌이 만나는 접경지대, 이민자와 크리오요 사이의 갈등이 상존하던 빈곤의 공간이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라는 대도시 문명과 크리오요 농촌 전통 사이에 존재한 근대적 삶의 긴장이 탱고를 낳은 것이다. 탱고의 탄생지인 빈민촌, 그 변두리 공간은 바로 근대화 시대의 산물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가 겪은 근대화, 도시화, 유럽화의 역사가 없었더라면 탱고라는 춤은 발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혹은 부에노스아이레스가 연방수도로 변모하지 못하고 일개 주(州) 수도에 머물렀더라면, 탱고 또한 한 지방의 민속음악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19세기 말의 부에노스아이레스, 세계화되어가던 연방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가 있었기에 탱고의 탄생이 가능했다는 뜻이다. 근대도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모든 욕망과 애환은 바로 탱고 속에 오롯이 담겨있는 것이다.(조영실/ 서울대학교 서어서문학과 강사)

08. 06. 16.

P.S. 탱고하면 <해피 투게더> 말고도 떠오르는 영화는 많다. 먼저, 샐리 포터가 감독과 주연을 맡은 <탱고 레슨>. 일단은 스텝이라도 배워야 출 것 아닌가? 그녀가 파블로 베론과 추는 탱고는 http://kr.youtube.com/watch?v=yi1dprxgEz8 에서 볼 수 있다. 영화 <여인의 향기>에 나오는 알파치노의 탱고도 너무 유명하니 빼놓을 수 없겠다(http://kr.youtube.com/watch?v=dBHhSVJ_S6A). 아니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도 있군(http://kr.youtube.com/watch?v=qX_4A6d_Q-U). 내친 김에 <해피 투게더>의 한 장면까지(http://kr.youtube.com/watch?v=ea1pM0qhudI).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밤거리를 피아졸라의 음악과 함께 잠시 둘러보아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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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두부 2008-06-16 22:26   좋아요 0 | URL
덕분에 '여인의 향기' 동영상 감사하게 다시 볼 수 있었네요...

로쟈 2008-06-17 00:29   좋아요 0 | URL
^^

노이에자이트 2008-06-18 23:32   좋아요 0 | URL
아스트로 피아졸라의 오블리비옹...좋죠.
 

미국산 쇠고기 수입조건에 대한 재협상도, 내각의 쇄신도 모두 지지부진한 상태에서 화물연대의 파업까지 가세한 탓에 정국은 더욱 어수선하다. '불도저'란 기대치에 걸맞지 않게 정말로 '대책 없는' 정부와 마주하고 있는 탓에 '촛불' 국면 또한 당분간 해소되지 않을 듯하다(물론 국민의 '정치의식'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켜놓은 건 이명박 정부의 최대 공로다. '경제 대통령'은 아무래도 헛말이었다). 국정을 책임질 의사나 능력이 없다면 일찌감치 '사후'를 대비해야 하지 않나 싶기까지 하다. 혹 브레히트의 시집이 그럴 때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씨가 어떤 시들을 읽어야 할지도 친절하게 짚어주고 있다.  

한겨레21(08. 06. 12) 브레히트가 대통령에게

참여정부가 물러나고 ‘오해정부’가 들어섰다는 농담을 들었다. 영어몰입 교육도 오해, 숭례문 국민모금도 오해, 언론사 성향조사도 오해, 급기야 검역주권 포기도 오해. “이해란 가장 잘한 오해이고 오해란 가장 적나라한 이해”(김소연, <마음사전>)라는 한 시인의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불과 100일 만에 이 정부의 정체를 ‘적나라하게’ 이해한 셈이다. 국민이 정부와의 결별을 심각하게 고민하자 이 정부는 그제야 소통 운운하면서 반성하는 척한다. 다들 알다시피 부인에게 폭력을 일삼는 남편도 술 깨고 나면 처절하게 반성은 잘하는 법이다. 이 정부는 도대체 소통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심란한 마음으로 신간 시집을 뒤적였으나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 그러다 오랜만에 브레히트의 시집을 꺼내 읽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당신이 필요해요.”// 그래서/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길을 걷는다/ 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면서/ 그것에 맞아 살해되어서는 안 되겠기에.”(‘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전문)

나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기 전에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으나 “당신이 필요해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생기면서 나는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이제 나는, 나를 사랑하는 바로 그 사람을 위해, “정신을 차리고” 산다. 행여나 빗방울에 맞아 죽을까봐 두렵다는 이 엄살은 또 얼마나 애틋한가. 정부와 국민의 소통이란 이런 것이다. 당신의 말을 듣고 당신을 위해 산다.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듣는 것이고, 당신을 바꾸는 게 아니라 내가 바뀌는 것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하고 있는 ‘소통’은 정반대에 가깝다. 일방적으로 말하려 하고 오히려 국민을 바꾸려 한다.

“6월17일 인민봉기가 일어난 뒤/ 작가연맹 서기장은 스탈린가(街)에서/ 전단을 나누어주도록 했다./ 그 전단에는, 인민들이 어리석게도/ 정부의 신뢰를 잃어버렸으니/ 이것은 오직 2배의 노동을 통해서만/ 되찾을 수 있다고 씌어져 있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정부가 인민을 해산하여버리고/ 다른 인민을 선출하는 것이/ 더욱 간단하지 않을까?”(‘해결방법’ 전문)

이미 다른 칼럼에서 한 번 인용했지만 다시 옮겼다. 1953년 6월에 스탈린이 사망한 직후 동독의 노동자들이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동독 정부의 대답이 걸작이다. ‘정부는 인민들에게 실망했다.’ 브레히트의 냉소는 더 걸작이다. ‘차라리 인민을 다시 뽑아라.’ 이명박 정부도 2 대 8로 싸우려거든 차라리 국민을 다시 뽑는 편이 낫겠다.

이 두 편의 시는 소통의 극과 극을 보여준다. 앞의 시는 “아침저녁으로” 곱씹어야 할 진정한 소통의 방법을, 뒤의 시는 실로 간단하기 짝이 없는 “해결방법”을 알려준다. 이 시들을 대통령과 함께 읽고 싶다. 이 정부는 어떤 쪽을 선택할 것인가. 그래도 감을 못 잡으실까봐 한 편 더 읽는다.

“이제 한 사람의 지도자가 된 당신은 잊지 말아라,/ 당신이 옛날에 지도자들에게 의심을 품었었기 때문에, 당신이 지금 지도자가 되었다는 것을!/ 그러므로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의심하는 것을 허용하라!”(‘의심을 찬양함’에서)

그래도 안 된다면, 그래서 만약 쇠고기 문제 어물쩍 넘어가고 마침내 대운하까지 강행한다면, 그때는 이런 시.

“칠장이 히틀러는/ 말했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나에게 일할 기회를 주십시오!/ 그리고 그는 갓 만든 회반죽을 한 통 가져와/ 독일 집을 새로 칠했다네./ (…) 이 신축가옥은 곧 완공됩니다!/ 그리고 구멍 난 곳과 갈라진 곳과 빠개진 곳들/ 모든 곳을 모조리 발라버렸다네./ 모든 똥덩이를 온통 발라버렸다네.// (…) 칠장이 히틀러는/ 색깔을 빼놓고는 아무것도 배운 바 없어/ 그에게 정작 일할 기회가 주어지자/ 모든 것을 잘못 칠해서 더럽혔다네.”(‘칠장이 히틀러의 노래’에서)

청년기에 화가를 지망했던 히틀러를 ‘칠장이 히틀러’라 조롱하고 있는 시다. 대운하 강행을 발표하는 순간 우리는 ‘칠장이 히틀러’를 ‘불도저 이명박’으로 바꿔 읽으려 한다. 우리가 뽑은 대통령을 20세기 최악의 정치인과 비교하는 사태가 오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신형철_문학평론가)

08. 06. 15.

P.S. 스탈린주의자로서의 브레히트의 면모에 대해서는 <지젝이 만난 레닌>(교양인, 2008)의 2부 3장을 참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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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8-06-16 00:08   좋아요 0 | URL
안그래도 지젝이 읽은 브레히트를 재미있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도 아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로쟈 2008-06-17 00:27   좋아요 0 | URL
^^

마립간 2008-06-16 15:21   좋아요 0 | URL
나경원 대변인이 방송에서 '그럼 대통령을 바꾸시겠습니까?'라는 이야기한 것을 동영상으로 보았은데, 상대편에서 '그럼 국민을 바꾸시겠습니까?'라고 맞받아 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로쟈 2008-06-17 00:28   좋아요 0 | URL
그러게 말입니다...

연두부 2008-06-16 13:03   좋아요 0 | URL
재미있게 읽었습니다...책장 어딘가에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있을건데 함 다시 읽어봐야 겠네요..ㅎㅎ

로쟈 2008-06-17 00:28   좋아요 0 | URL
한때 많이 읽히던 시집이죠...

노이에자이트 2008-06-18 23:31   좋아요 0 | URL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제의 신조-불평은 얼마든지 말하라 그러나 나는 복종시키겠다
지금의 이명박 정부는 프리드리히를 부러워하지 않을까요.오...모름지기 지배자란 저래야 하는데...하면서...

로쟈 2008-06-19 00:01   좋아요 0 | URL
프리드리히의 신조는 칸트의 그것이기도 하잖아요. 비판하라, 하지만 복종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