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게 핀 봄꽃들이 여름꽃 행세하고
구름 낀 오늘 햇볕은 잠시 봄볕

시간은 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아
가끔은 쏟아진 물을 되담는 시간

지난 세기의 첫사랑도 아직 풋풋한 사랑
그건 심하다 싶어
아직 한 권의 책도 내지 않았던 시절
내년이면 만 십년이 되겠네

아마도 십년 전 이맘때 종로에서
노총각 편집자들과 맥주 마시던 기억
갓 마흔에도 나는 한권의 책도 없었구나
저자도 아니었구나
대신에 나는 굉장한 책을 쓸 거라고

한 아이가 태어날 때
모두가 마음껏 소망을 빌었지
아직 똥도 한번 싸보지 못한 아이에게
건강과 행복을 빌었지
모두가 그런 아이였지

열권 넘게 책을 썼네
아직도 열권 넘게 남아 있네
나는 굉장한 책을 쓸 수 있을까
아이에게 물어보네
너는 무엇을 알게 되었니

지난 세기의 첫사랑도
공장에 다닐 거라던 첫사랑도
어쩌면 할머니가 되었을 시간
열여섯 살 그 모습으로만
나는 기억하네

우리 인생의 나이는 몇 살인가
영정 사진의 나이가 우리의 나이인가
기억 못할 순간의 나이가
오래도록 기억될 나이인가
봄꽃 같았던 그 시절의 나이인가

아무것도 아니었던 시절
거리낌이 없던 마음도
지금은 현자의 마음을 닮아서
똥과 오줌을 가리지

계절마다 다른 꽃이 피고
여름에는 폭설이 내리지 않지
그래도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그대 입술에 되담을 수 있다면

첫울음을 터트리고
첫사랑에 설레고
첫 책을 내겠다고 마음을 굳히고
그날도 저녁 광화문 거리에는
오늘처럼 꼭 이런 산들바람이 불고

무엇이 지나가고 무엇이 되돌아오는지
늦게 핀 봄꽃들은 알까
살갗을 간지르는 바람만 몇 걸음 앞서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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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트50 2018-06-04 2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Time in a bottle.
로쟈님 시에 여러번 등장하는 투명유리병. 뭐를 담고 있기도 하지만... 세월의 덧없음...시상의 주요 흐름이리라는 짐작이...불현듯.

로쟈 2018-06-05 00:01   좋아요 0 | URL
병속의 시간은 덧없음은 아니고 시간을 보존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아침을 먹기 전
일요일 아침은 친구처럼 문앞에서
기다려준다고 얼른
나오라고

언젠가 죽음도 친구처럼
기다려준다고
아침도 먹는 둥 마는 둥
금방 나갈게

어느 햇살 밝은 날
아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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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0sun 2018-06-03 1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베르너가 확신한
어느 아름다운 아침에 내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
거기에 하나 더하는 페초린
아주 더러운 어느 날 저녁에 내가 태어나는 불행을 겪었다는 사실.

어제 페초린때문에 진심 울컥했다가
바로 다음 페이지에서
얘 뭐니~~~~ㅎㅎ

로쟈 2018-06-03 17:36   좋아요 0 | URL
우리시대의 영웅을 다시 보셨군요.~
 

꽁치 김치찌개를 혼자 먹으며
가족도 아니고
고양이도 아니고
생각나는 사람이 오즈라니
동경 이야기도 아니고
오즈 야스지로를
꽁치로 기억하다니
꽁치가 먹고 싶습니다로
기억하다니
꽁치는 언제건
혼자 먹기는 글렀구나
한 토막만 건졌다가
하나 더 건진다
앗, 밥이 모자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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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0sun 2018-06-02 2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는 관심밖이라
오즈 야스지로에 대한 관심보다는
하스미 시게히코에대한 관심때문에
(염불보다 잿밥에 관심)
<감독 오즈 야스지로>를 읽을까어쩔까 하는중~

로쟈 2018-06-02 20:46   좋아요 0 | URL
역시 절판되긴 했지만.~
 

가스점검과 함께 맞은 아침
점검은 내년 상반기에 다시

이건 일년에 한번이구나
한번 다녀가면 일년씩

이어서 다녀간 건 콧물과 재채기
알레르기 행진이 요란스레 지나갔다
여름맞이 퍼레이드하듯

어제 시험삼아 켜본 선풍기를 다시 켠다
일년만에 바람 맞는다

점검이 끝났으니 나는 파리로 가야겠다
말테 브리게가 묵고 있는
파리 툴리에가 11번지

사람들은 살기 위해 이곳에 온다
하지만 여기서는 모두 죽어 간다

그곳은 벌써 가을이로군
릴케도 콧물을 흘렸을까

가스점검원처럼 초인종을 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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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0sun 2018-06-02 2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새벽에 파리와 모스크바를 오가고 있었네요
릴케와 츠베타예바와 파스테르나크 사이를~
근데 번역이 안되어 있어서 읽을수가 없네요
이들의 편지도 그녀의 시도.

로쟈 2018-06-02 18:48   좋아요 0 | URL
네 번역돼나오면 좋을텐데요.^^

로제트50 2018-06-02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테의 수기>를 2번 읽었습니다.
오랜시간 간격을 두고, 두 번 다 여름
에요. 그래서 말테의 수기와 여름햇살이 동시에 떠오릅니다.
페소아의 <불안의 서> 를 시작했는데 말테와 비슷한 분위기를
느꼈어요. 이런! 분위기 따위의 느낌이 아닌 이성으로 읽어야하는데
말이죠!^^ 암튼 식탁옆 책장에 나란히
꽂혀있는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 <불안의 서>, 아주 가끔가끔 일요일 아침에 펼쳐보는
책이랍니다^^*

로쟈 2018-06-02 18:49   좋아요 0 | URL
아주 가끔이어서 다행입니다.^^

로제트50 2018-06-02 1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요?@@

로쟈 2018-06-02 20:45   좋아요 1 | URL
‘매달린 절벽‘과 ‘불안‘이 불안해서요.^^
 

저녁 먹고 자다 일어나니
배송된 책이 인생은 짧다
카르페 디엠
짧은 줄 몰라서 주문하진 않았지
짧아서 주문했지

오늘을 붙잡아라
오늘의 꼬리를 붙잡아라
하루는 새벽에 주어지고
해질녘에 달아난다
사르트르가 말했네

인생은 하루씩 주어지는 것
받아놓을 수도 없는 것
하루를 놓칠 때마다
주문을 걸지
카르페 디엠

당신을 붙잡아야 했지
오늘을 붙잡듯이
당신의 꼬리를 붙잡아야 했지

어제까지만 봄이었네
밤에 끓이는 미역국 냄새가
한 생애를 압축하네

생일이 아니어도
모든 오늘이 인생의 생일이지
오늘을 붙잡아라

아홉 살때부터 알고 있었네
모든 날이 생일이란 걸
하루는 지나간다는 걸

그래서 밤에 적네
카르페 디엠
언젠가 오늘이 생의 마지막 날
우리는 오늘 태어나서
오늘 죽는다네

오늘을 붙잡아야 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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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0sun 2018-06-02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어때?
나야 늘
어제가 오늘 같고
내일도 오늘 같지, 뭐~~
라고 습관처럼 말해요.
근데
이거 곱씹어보니
어제도 오늘로 살았고
내일도 오늘로 살거란 말?
오늘을 붙잡고말고 할것도 없네요.
전 늘 오늘을 살고 있었던걸로~ㅎ
(비겁한 변명?)

로쟈 2018-06-02 11:32   좋아요 0 | URL
두번째 단계가 영원히 반복되어도 좋은 오늘을 사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