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 프로이트의 범성욕주의(pansexualism)라고 말해지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고 어떤 말을 하든 간에 우리는 궁극적으로 항상 그것에관해서 생각하고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의미의 궁극적인 지평은 성행위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이다."(<진짜 눈물의 공포>, 304쪽) 이러한 일반적인 견해를 반박하기 위해서 지젝이 (각주에서) 도입하고 있는 것은 한술 더 떠서 그러한 범성욕주의적 관점으로 근대철학사를 재기술하는 것이다: "성관계에 대한 이러한 개념을 궁극적인 준거점으로 받아들이면 근대철학사 전체를 그런 용어들로 다시 쓰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된다."(지젝의 각주16)은 국역본 319-320쪽, 원서 204-5쪽에 나온다). 

이럴 경우 만우절 행사를 겸하여 지젝의 '진지한' 농담을 옮겨놓고 잠시 음미하고픈 유혹을 나는 느끼게 된다. 번역은 필요할 경우 약간씩 수정하기로 한다(국역본에서 점잖게 '성교'라고 옮겨진 'fuck'를 나는 비속어에 걸맞게 '빠구리'라고 옮기려다가 체면을 생각해 참아두었다. 읽으시는 분들이 알아서 요령껏 읽으시길 바란다).

  

-데카르트: "나는 성교한다, 고로 존재한다." 즉, 강렬한 성행위 속에서만 내 존재의 충만함을 경험한다는 말씀이며, 이것을 라캉식으로 탈중심화하면,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성교하며, 내가 성교하는 곳에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가 될 것이다. 즉, 성교하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그것이 성교한다'는 것.

-스피노자: 성교로서의 절대자(coitus sive natura) 안에서 우리는 능산적 자연(natura naturans)과 소산적 자연(natura naturata) 간의 구별에 따라, 능동적으로 성교하는 삽입과 성교를 당하고 있는 대상을 구별해야만 한다. 세상에는 성교를 하는 자와 성교를 당하는 자가 있다.

-의 경험론적 회의: 우리는 하나의 관계로서 성교가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오직 그 움직임들이 서로 잘 맞아떨어지는 것처럼 대상들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회의주의적 위기에 대한 칸트의 대답: "성교의 가능조건이란 동시에 성교 대상의 가능조건이다." 

-피히테는 이러한 칸트의 혁명을 급진화한다: 성교는 스스로를 성교하는 자와 성교를 당하는 대상으로 나누는 자기-정립적인 무조건적 행위이다. 그 대상, 즉 성교를 당하는 자를 정립시키는 것은 바로 성교하기 그 자체이다.

-헤겔: 성교를 단지 실체(우리를 압도하는 실체론적인 충동)로서만이 아니라 주체(정신적 의미의 맥락에 포함돼 있는 반성행위)로서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마르크스: 관념론의 자위행위적 철학하기에 맞서 우리는 진짜 성교행위로 회귀해야만 한다. <독일 이데올로기>에 쓴 것처럼, 진짜 실제 삶이 철학에 대해 갖는 관계는 진짜 성교가 자위행위에 대해 갖는 관계와 같다.

-니체: 의지란 그 가장 근본에 있어서 성교에의 의지(Will to Fuck)로, 그것은 '나는 좀더 원한다'라는, 즉 영원히 계속되는 성교라는 영원회귀에서 정점에 달한다.

-하이데거: 기술의 본질이 결코 '기술적인' 것이 아닌 것처럼 성교의 본질은 단순히 존재적 행위로서의 성교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오히려 '성교의 본질은 본질 그 자체의 성교이다.' 즉, 우리의 존재이해를 성교하는 것은 우리 인간들만이 아니다. 본질 그 자체가 이미 교접하고 있다.(*'fuck'에는 망가뜨리다란 뜻도 있으며 국역본은 그렇게 옮겼다.)

-끝으로, 본질 자체가 어떻게 이미 교접하고 있는가에 대한 이러한 통찰은 라캉의 "성관계 같은 것은 없다"라는 주장으로 귀결된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진부한 이해에 반대하여, 프로이트적인 혁명은 바로 그와는 정반대의 제스처에 놓여 있다고 주장해야 한다. 전체 우주를 '성화'하여 우주의 기본구조를 남성적인 원리와 여성적 원리, 곧 음과 양간의 긴장으로 보고, 그러한 긴장이 심지어 다른 더 높은 수준(빛과 어둠, 하늘과 땅)에서 반복되기 때문에 현실 자체가 이러한 두 원리의 우주적 성교의 결과로 등장한다고 이해한다는 것은 바로 전-근대적인 이데올로기적 세계에서이기 때문이다"(304쪽)

-"프로이트가 이룩한 것은 바로 세계의 근본적인 탈성화(desexualization)이다. 정신분석학은 세계의 근대적인 '탈주술화'로부터 궁극적인 결론을 끌어내는데, 그 결론이란 이 세계는 의미없고 우연적인 다수(the universe as a meaningless, contingent multitude)라는 관념을 말한다... 문제는 우리가 다른 일상적인 일들을 하고있을 때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하고 있을 때' 무엇을 생각하는가이다."

-"'성관계는 없다'는 라캉의 개념이 궁극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하고' 있는 동안, 즉 우리가 성행위에 참여하는 동안 어떤 환상적 보충을 필요로 하며 다른 무엇인가에 관해 생각해야(환상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305쪽) 다르게 말하면, 두 사람이 성교할 때 각자의 환상적 보충물까지 거기에 끼여들기 때문에 언제나 넷(적어도 셋)이 성교하는 게 된다. 그게 '성관계는 없다'의 의미이다! 

만약에 그런 환상적 보충물이 결여된다면, 차이밍량의 <흔들리는 구름>에서와 같은 '삭막한' 성교, 곧 'fucking as the real'이 될 것이다. 영화를 곧 보기는 해야 할 텐데...

06. 04.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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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04-02 0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꾹.
 

 

 

 

 

제목은 '바디우와 레비나스'라고 붙였지만 이 글은 두 철학자 간의 비교라거나 대조와는 거리가 멀다. 단지, 필요 때문에 바디우의 <윤리학>(동문선, 2001)에서 2장 '타자는 존재하는가?'를 읽었고, 이 장은 순전히 레비나스의 윤리학에 할애돼 있기에 자연스레 '바디우와 레비나스'란 이름 혹은 주제를 떠올려 보았을 뿐이다.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는 바이지만, 알랭 바디우(1937- )는 들뢰즈/데리다 이후의 프랑스 철학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철학자의 한 사람이다. 한데, <윤리학> 외에 <철학을 위한 선언>(백의, 1995)과 <존재의 함성>(이학사, 2001) 정도가 그의 책으론 더 번역돼 있고, 지젝의 <까다로운 주체>(도서출판b, 2005)에서도 그의 철학이 핵심적으로 다루어지고 있지만 아직 <존재와 사건> 같은 그의 주저들이 번역/소개되지 않은 탓에 왜 그가 그 정도로 중요한 철학자인지는 실감이 되지 않는다.

나는 그저 지젝이 동시대를 대표할 만한 철학자로 아감벤과 함께 바디우를 들고 있는 터여서,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바디우의 책들을 주섬주섬 긁어모으고는 있다(대부분의 저작이 영역돼 있으며 최근에는 연구서들도 '매우' 활발하게 출간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읽으면 '친화감'을 갖게 되는 아감벤과는 달리 바디우는 여전히 나에겐 '타자'이다. '친구의 친구'로 소개받기는 했지만, 아직은 서먹한 관계인 것.

한데, 그 이유가 순전히 바디우에게만 있는 건 아니다. 그의 두툼한 주저들을 독파해나갈 만한 형편은 아니어서 좀 편안한 번역본들이 나오길 기다리고는 있는데, 이제껏 나온 번역본들은 '편안함'에 대한 기대를 별반 충족시켜주지 못했다. <존재의 함성> 같은 경우는 서론 정도만을 읽었기 때문에 아직 뭐라 말할 수 없지만, <철학을 위한 선언>이나 <윤리학>은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자갈밭 같은 언어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결코 편안한 독해를 허용하지 않는다(<선언>의 경우엔 나중에 부득불 영역본과 러시아어본을 구했고, <윤리학>도 영역본을 구한 뒤에야 다시 들춰볼 수 있었다).

가령, '타자는 존재하는가?'란 장의 첫문장은 이렇다: "'타자에 대한 윤리' 또는 '차이의 윤리'로서의 윤리라는 관점은, 칸트의 명제들이 레비나스의 명제들로부터 시작된다."(33쪽) 내용을 따져보기 이전에 통사적으로 이미 비문이다(주어 '관점은'을 받는 술어가 없다). 그리고 내용상으로도 오류이다. 영역본상으로 이 문장은 "The conception of ethics as the 'ethics of the other' or the 'ethics of difference' has its origin in the theses of Emmanuel Levinas rather than in those of Kant."(18쪽)에 대응하며, 그 뜻은 "'타자에 대한 윤리' 혹은 '차이의 윤리'로서의 윤리라는 개념은 칸트의 명제들보다는 레비나스의 명제들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정도이다.

이 <윤리학> 국역본의 경우 출판과정에서 해프닝이 좀 있었고 곧바로 내용이 부분 교정된 2쇄가 나온 걸로 알지만(해서 오역/오류들이 전적으로 역자의 책임은 아니라지만), 반가운 마음에 단박 초판 1쇄를 구입한 나 같은 독자는 이런 '비문'을 그대로 뒤집어써야 한다(도서관에 들어와 있는 책도 1쇄본이어서 교정내용을 아직 확인해보지 못했다). 정상적이라면, 이 첫문장은 필히 교정돼 있어야 한다.(한데, 형이상학의 '사유(thought)'를 '사고'로 옮기는 것 등의 취향도 역자가 아닌 편집자의 것일까? '악에 대한 의식에 관한 에세이'라는 한국어 구문상 어색한 부제도?) 그런 맥락에서, 이전에 제1장 '인간은 존재하는가?'를 읽고 불만을 적어놓은 걸 여기에 다시 정리해서 옮겨놓는다.  

이 책의 번역에 좀 문제가 있다는 건 이미 여러 사람들에게서 지적된 바이다. 역자의 책들을 여러 권 갖고 있는 나로선 좀 유감스럽지만, 나는 그를 신뢰할 만한 저자로는 분류하고 있지는 않다. 그 주된 이유는 물론 그의 번역이 미덥지 못하기 때문이다(바디우의 책으로 그는 <철학을 위한 선언>도 번역한바 있는데, 이 또한 인용하기 껄끄러운 번역이다). 모든 훌륭한 저자가 훌륭한 번역자인 건 아니지만, 적어도 부실한 번역자일 수는 없다는 게 나의 편견이다(방안이 없는 건 아니어서, 굳이 번역 같은 허드렛 일에 손대지 않고 좋은 책들의 저자로만 남으면 된다).

개인적으로 번역에 대해서 내가 갖고 있는 기준은 인용가능성의 유무이다. 번역문 그대로 다른 글에, 혹은 논문에 인용할 수 있다면, 그건 나름대로 좋은 번역이고 신뢰할 만한 번역이다. 그리고 그러지 못하다면, 유감스러운 번역이자 (최악의 경우엔) 차라리 없는 게 더 나은 번역이다(유감스럽게도 그런 번역이 드물지 않다). <윤리학>에 대해서는 역자와 출판사간의 마찰설까지 흘러나왔지만, (출판사에서 함부로 개칠한 번역이 아닌 이상) 그렇다고 해서 역자의 책임이 면제될 수는 없다.

알라딘에서 읽어본 한 서평에서는 이 책이 "동문선 출판사에서 나온 다른 번역들에 비하면 비교적 나은 편에 속하고, 바디우에 관해 학문적인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은 일반 독자들이 읽기에는 무난하지만, 이 번역서는 여러가지 세부적인 문제를 지니고 있어서 학문적으로는 신뢰하기 어렵[다]."(balmas님)고 돼 있는데, 나로선 학문적으로 신뢰하기 어렵다는 데에 동의하지만, 일반독자들이 읽기에는 무난하다는 평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오히려 일반독자들이 무난하게 읽을 수 있는 번역이 좋은 번역이며 따라서 어려운 번역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책은 '일반독자'(나는 불어 원서를 대조해볼 수 있는 '전문독자'가 아니다)인 나로선 무난하게 읽을 수 없는 번역이었다.

먼저, 서론에서 저자가 책의 요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대목: "윤리에의 준거의 사회적 인플레이션에 맞서서 현재의 관건은 이중적이다"(9쪽) 이에 대한 영역은 "With respect to today's socially inflated recourse to ethics, the purpose of this essay is twofold:"(2쪽) 나는 역자만큼 불어를 잘 하지 못하지만 이런 대목들은 불어본을 구해서 확인해보고 싶은데(도서관에 없길래 참아두었다) 하여간에 영역본이 좀더 이해하기 편한 건 사실이다. '현재의 관건'을 '이 에세이의 목적'이라고 풀이한다는 점에서.

바디우는 이 컴팩트한 분량의 책 서문에서 자신의 요점을 분명히 하는데, 그가 전제하고 있는 것은 일종의 '윤리 인플레이션'이다. 개나 소나 다 '윤리(학)'를 떠들어댄다는 것.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그는 무얼 말하고 싶은가? "첫째, 의견들과 제도들 속에서 통용되는, 현시점의 주된 '철학적' 경향인 이 현상의 정확한 성격에 대한 검토를 행해야 한다. 우리는 이 현상이 실상은 진정한 허무주의에 불과한 것임을, 모든 사고에 대한 위협적인 부인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9쪽)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은 아니지만, (영역본을 참조하건대) '이러한 철학적 경향'(=윤리 인플레이션)의 정확한 성격에 대해서 "검토해볼 것이다" 정도가 왜 "검토를 행해야 한다"라는 의무로 번역되는지는 잘 모르겠다(이어지는 문장들도 다 그냥 미래시제이기 때문이다).

"의견들과 제도들 속에서 통용되는"은 영역으로 "as much in public opinion as for our official institutions"인데, 나라면 "공론장에서뿐만 아니라 대학 제도 내에서도" 쯤으로 옮기고 싶다. 짐작에 official instituitions란 주로 대학 등의 제도권 기관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뒷문장을 옮기면, "나는 이러한 현상이 그 실상에 있어서는 순전한 허무주의에 불과하며 사유 자체에 대한 위협적인 부정이라는 걸 입증하고자 할 것이다."(I will try to estblish that in reality it amounts to a genuin nihilism, a threatening denial of thought as such.")

그의 두번째 목적: "우리는 윤리라는 단어에 완전히 다른 의미를 부여하면서, 그 경향으로부터 이 단어를 탈환할 것이다.이 단어를 추상적 범주들(인간, 권리, 타자...)에 연결시키기보다는 '상황들'에 관계지을 것이다. 이 단어를 희생자들에 대한 동정의 차원으로 삼기보다는 개별적 과정들에 대한 지속 가능한 준칙으로 삼을 것이다. 이 단어를 보수적인 양심의 무대로 삼기보다는 그 속에서 진리들의 운명을 문제삼을 것이다."(9쪽)

먼저 첫문장에 대한 영역은 이렇다: "I will then argue against this meaning of the term 'ethics', and propose a very different one." (확인해볼 수는 없지만) 짐작에 영역본은 약간 의역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하여간에 영역본이 더 이해하기에 용이하므로 그에 준하여 다시 옮겨 보면, "나는 (윤리 인플레이션에서의) '윤리'란 말의 이러한 의미(사용)를 반박하면서 완전히 다른 의미를 제안할 것이다."

이어지는 영역은 "Rather than link the word to abstract categories (Man or Human, Right or Law, the Other...), it should be referred back to particular 'situations'. Rather than reduce it to an aspect of pity of victims, it should become the enduring maxim of 'singular processes.' Rather than make of it merely the province of conservatism with a good conscience, it should concern the destiny of truths, in the plural."(3쪽)

계속 이어서 옮겨보면, "즉, 윤리란 말은 (인간이나 권리, 타자 등과 같은) 추상적 범주와 연결되기보다는 개별적인 '상황들'과 연계되어야 한다. 윤리는 희생자들에 대한 연민의 차원으로 축소되기보다는 '단독적인 과정들'의 영속적인 준칙이 되어야 한다. 윤리는 양심을 들먹이는 보수주의의 영역에 남겨지기보다는 (복수로서의) '진리들'의 운명과 관련지어져야 한다." 요점은 유행/경향으로서의 윤리에 대한 바디우의 전면적인 비판/반박과 새로운 윤리의 제안이 이 책의 줄거리가 될 거라는 점이다. 

이제 1장으로 들어가서 바디우는 '윤리'와 가장 밀접하게 연관되어 쓰이는 말인 '인권'에 대해서 검토해 들어간다. 윤리란 이런저런 '자명한'/'자연적인' 권리들의 수호/존중과 관련된 문제라는 게 우리 시대의 통념이다. 요컨대, '자연권으로의 회귀'(혹은 '퇴행')이 이 시대의 증상이며, 그것은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과 관련된다: '인간의 자연권이라는 낡은 교리로의 이러한 회귀는, 물론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와 그에 의존하는 진보적 개입의 모든 형상들의 붕괴에 연관된다."(13쪽)

이 대목의 영역은 "This return to the old doctrine of the natural rights of man is obviously linked to the callapse of revolutionary Marxism, and of all the forms of progressive engagement that it inspired."(4쪽)이고, 이에 대한 번역은 "인간의 자연권이라는 낡은 교리로의 이러한 회귀는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와 그것이 영감을 불어넣었던 모든 형태의 진보적 현실참여가 몰락하게 된 사정과 분명 연관된다." 이어지는 대목은 모두 바디우의 현실진단이다: "모든 집합적 지표를 상실하고, 역사의 의미'에 대한 사고를 박탈당한 채 사회혁명을 더 이상 희망할 수 없는 상황에서 수많은 지식인들, 그리고 그들과 더불어 의견을 만들어내는 많은 부문들은 자본주의적 형태의 경제와 의회민주주의에 동조해 버렸다."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있지만, 상당히 투박한 번역이다. 그리고, 영역본에 근거하자면, 바디우는 (1)현실정치와 (2)철학이라는 두 가지 영역에서의 현 정세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는데, 국역본에서는 이러한 대비가 드러나지 않고 있다. 먼저 이 대목의 영역은 "In the political domain, deprived of any collective political landmark, stripped of any notion of the 'meaning of History' and no longer able to hope for or expect a social revolution, many intellectuals, along with much of public opinion, have been won over to the logic of a capitalist economy and parliamentary democracy."이고, 우리말로 옮기면, "정치 영역에서는, 모든 집단적인 정치적 지향점(지표)을 상실하고 '역사의 의미'에 대한 모든 관념을 박탈당한 채 더이상 사회 혁명에 대한 아무런 기대나 바람도 가질 수 없게 된 많은 지식인들은 다수의 여론과 더불어 자본주의 경제와 의회민주주의의 논리에 투항하고 말았다."

그리고 철학. "철학에 있어서 그들은 과거 그들의 적들의 불변하는 이데올로기가 지니고 있는 덕목들을 발견했다. 인도주의적 개인주의, 그리고 모든 조직화된 참여의 강제들에 대항하는 권리들의 자유주의적 방어가 그것이다. 집합적 해방을 위한 새로운 정치 용어들을 모색하기는커녕, 결국 그들은 기존의 '서양적' 질서의 준칙들을 받아들였다."(14쪽)

이에 대한 영역은 "In the domain of 'philosophy', they have rediscovered the virtues of that ideology constantly defended by their former opponents: humanitaruian individualism and the liberal defence of rights against the constraints imposed by organized political engagement. Rather than seek out the terms of a new politics of collective liberation, they have, in sum, adopted as their own principles of the established 'Western'order."(5쪽)

우리말로 옮기면, "철학의 영역에서 이 지식인들은 과거 자신의 적대자들이 항상 옹호하던 이데올로기의 미덕들, 가령 휴머니즘적 개인주의와, 조직화된 정치참여가 강제하는 억압들에 맞설 권리의 자유주의적 옹호 같은 걸 재발견했다. 새로운 집단적 해방의 정치학을 위한 용어들을 모색하기보다는 요컨대, 그들은 기존 '서구적' 질서의 원리들을 자신들의 원리로 받아들였다." 여기서 서구적 질서의 원리들이란 건, 앞에서 언급된 '자본주의 경제체제'와 '의회민주주의' 같은 게 아닌가 한다.

바디우의 진단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현 상황은 사회혁명에의 전망 상실이 가져온 일종의 '패배주의'적 상황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이 보수주의적 '윤리'이고 '윤리의 인플레이션'이다. 이러한 진단하에서 그는 인권의 윤리학과 (레비나스-데리다의) 차이의 윤리학에 대항하여 '진리들의 윤리학'을 새롭게 정초하고자 한다. 그것이 내가 가늠하고 있는 이 책의 윤곽이다. 하지만, 이 윤곽을 다 드러내는 것은 좀더 시간을 필요로 한다. 

거기까지 읽고서 이번에 읽은 2장은 그래도 후반부로 가면 요지를 파악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는 번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문단들에 대해서 나는 불편함을 느낀다: "레비나스는 타자의 고유성이 실험되는 일련의 현상학적 테마들을 제시한다. 그 중심에는 얼굴의 테마, 자신의 몸의 현시를 통한 타자의 개별적이자 '사적인' 주어짐의 테마가 자리잡는다. 이 테마는 닮음을 통한 인정(나와 동일한 동류로서의 타자)을 체험케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드러남으로써 타자에게 '바쳐진' 것, 나의 존재 속에서 그러한 소명에 예속된 것으로서의 나를 윤리적으로 체험토록 해주는 것이다."(34-5쪽) 

특히 마지막 문장이 자갈밭인데, 부분적으론 오역이기도 하다(바디우 자신도 레비나스를 단순화시키는 경향이 있지만 짐작에는 역자도 레비나스를 참조한 것 같지 않다). 이 대목의 영역은 이렇다(전체가 한 문장이다): "Levinas proposes a whole series of phenomenological themes for testing and exploring the originality of the Other, at the centre of which lies the theme of the face, of the singular giving[donation] of the Other 'in person', through his freshly epiphany, which does not test mimetic recognition (the Other as 'similar', identical to me), but, on the contrary, is that from which I experience myself  ethically as 'pledged' to the appearing of the Other, and subordinated in my being to this pledge."(19-20쪽) 

삽입구가 많이 등장하는 탓에 좀 까다로워 보이는 건 중간에 나오는 관계사 'which'의 선행사를 찾는 것인데(역자는 '테마'로 보았다. 불어본의 경우에는 선행사를 식별하기가 더 쉬운지는 모르겠다), 다행스러운 건 'epiphany'나 'the Other'나 'theme of face'나 거의 같은 내용을 지시하므로 아무거나 잡아도 크게 오역은 아니라는 것. 나는 타자의 육체적 현현으로서의 '얼굴'을 그 선행사로 보고 다시 옮기도록 하겠다. 

"레비나스는 타자의 고유성(근원성)을 테스트하고 탐구하기 위한 일련의 현상학적 주제들을 제시하는데, 거기서 중심에 놓여 있는 것은 얼굴이라는 주제, 즉 고유한 것으로 주어지는 타자, 육체적 현현을 통해 '실물로서' 제시되는 타자라는 주제이다. 이것은 얼마나 닮았느냐라는 인정 테스트의 대상(나와 '유사한', 나와 동일한 자로서의 타자)이 아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나는 그것으로부터 나 자신을 윤리적으로, 즉 이 타자의 출현에 저당잡혀 있는 것으로, 나의 존재가 이러한 저당하에 놓여 있는 것으로 체험한다." 

번역에 관한 나의 윤리는 '충실성이냐 가독성이냐' 이전에, 자신이 이해한 것을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옮겨놓는 것이다. 해서, 잘못 이해했다면 잘못 옮겨놓는 것이 윤리이다! 하지만, 잘 이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잘못 옮기는 건 윤리적이지 않다. 바디우의 <윤리학>을 읽다가 나는 엉뚱하게도 번역의 윤리에 대해서 다시금 되새겨본다...

06. 03.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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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3-01 1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전에 바디우에 대한 개략적인 강의를 들었는데
기대한 것 만큼 대단한 철학적 바람을 일으킬 것 같지는
않다는 게 제 솔직한 생각입니다. 제 생각엔 들뢰즈와 바디우는
같은 아버지를 가진 형제 같다는 ....(물론 개성이 아주 강한.)

로쟈 2006-03-01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철학적 바람'의 크기 한 철학자의 크기에 비례하는 것 아니겠지요. 저는 바디우가 자기 철학체계를 구축하는 데 있어서 분명 강자일 거라고 봅니다. 하지만, 다른 철학자들을 읽는 데 있어서 데리다나 들뢰즈만큼의 섬세함 혹은 독창성을 갖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종류가 다른 거겠죠...

madflora 2006-03-20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긴 글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그러나, 바디우 "윤리학" 의 역서가 출판과정에서 출판사와의 잘못된 교정으로 인해 바로 수정본이 나왔다면, 그 수정본을 가지고 얘기를 해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잘 못 출판된 책을 가지고 논쟁을 하게되면, 주장이나 반론 모두 설득력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또한, 마찬가지로, 번역상의 오류를 지적하고자 한다면 바디우의 원본을 가지고 지적을 해야겠지요. 영역본이든, 국역본이든 어차피 둘 다 역서입니다. 영역본을 가지고 국역본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은, 마치 영역본이 국역본의 오류를 검증해줄 어떤 권위라고 지니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__^

하여간, 동문선 출판사에서 잘 못된 책은 바꾸어 준다니,
바꾸어 읽으셔도 좋을 듯합니다.







로쟈 2006-03-20 1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적 감사합니다. 한 독자로서 순전히 '오역'을 지적하기 위해 몇 가지 교정됐다는 책을 또 구해봐야 한다는 것은 저로선 비생산적인 일입니다. 저는 단지 불만스러운 대목들을 지적했을 뿐이고, 불어본을 읽은 독자들 중에 이견이 있으시다면 또한 지적하실 수 있겠죠. 저는 러시아문학이 전공이지만, 가령 영역본을 읽고서도 오역을 지적할 수 있는 러시아 번역들도 많습니다. 그런 경우에, 오역을 지적하려면 독자들에게 반드시 러시아어 원본을 읽고 해야 한다고 말하진 못하겠습니다.

어떤 번역이건 얼마간의 오역의 불가피하게 수반될 수 있습니다. 한데, 영어나 불어나 동족어인지라 국역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유리한 면이 있으며 모든 언어에 능숙하지 않는 한 그런 면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영역본의 권위'라는 건 방점이 잘못 놓여진 것이며(저는 아도르노의 일부 영역본들을 혐오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오해가 없으시길 바랍니다...

nostalgia 2006-03-23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종영씨의 최근 저서 '정치와 반정치'를 재밌게 읽은 사람으로써 그가 신뢰할 만한 저자가 아니라는 주장은 저에게는 조금 어색합니다. 마치 제가 바보인 양 보입니다.ㅠㅠ; 이글은 그래서 제가 바보가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는 글은 또한 아닙니다. 그냥 드는 생각을 말하는 것이구요.

 로쟈님의 말씀처럼 단지 오역을 지적하기 위해 교정된 책을 또 보는 것은 비생산적인 일일 수 있고, 영어번역본이 더 정확할 가능성은 있습니다(가능성이죠..). 또 전 출판사와 문제가 있었다는 말은 처음 들었네요. 윤리학을 읽긴 했지만 그런 저간의 사정을 알 수 없는 사람으로써는 아..그렇구나의 느낌 정도만 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문제가 있었어도 자신의 이름으로 나간 책이기 때문에 전량 모두 수거해서 재배포하지 않는 이상에야 저같이 사정을 모르는 사람에게는(또한 사정을 안다고 해도 어느 정도는) 그냥 역자의 책임으로 돌려지겠지요. 그리고 이부분은 역자가 어느 정도는 감수할 수 밖에 없지 않나 싶습니다. 안타까울 현실이지요...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점을 감안한다고 해도, 과연 영어 번역이 과연 얼마만큼 불어책을 성실히 번역했는가의 문제는 있습니다. 번역자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얼마나 성실한 사람인지 그리고 성실여부를 떠나서 기본적으로 번역이 갖는 고유한 국가마다의 맥락이 있고 아픔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로는 님께서 출판사와의 문제를 알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모르신다고 해도 역자가 신뢰할 만한 저자가 아닌가 하는 일종의 단정에 대해서 입니다....전 이 두가지 모두 해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종영씨의 책을 읽었던 사람으로써 과연 그러한가이죠. 제 생각은 지나치게 빨리 단정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 사람은 이렇다라는 단정을 내리기 전에 한번 꼼꼼히 읽어보시는 시간적 여유를 가지시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아무리 개인적 판단이라고 해도 지나치게 단정적인 판단보다는 한번 되짚어볼 여유가 있으시면 어떤가 합니다. 시간이 없어서 그럴 수 없다라고 하신다면 뭐 저도 할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유를 내신다면 여전히 비판적이라고 할 지라도 이전과는 다른 관점에서의 비판적 관점을 갖게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재미있어 하실수도 있고요. 돈들여서 책을 사셨는데, 안 읽어보면 아깝지 않나요...?(음..생각해보니 이건 나한테 할 소리이군요..쩝..) 그럼 이만...가보겠습니다.


로쟈 2006-03-24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본문에서 적었지만, 저는 저자로서의 이종영씨에 대해서는 불만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저도 두어 권을 책을 갖고 있습니다). 제가 갖는 불만은 그의 번역에 대한 것이며, 그것이 전반적으로 그의 저작의 신뢰성에 의문을 갖게 한다는 것 정도입니다. 저서에서 보여주는 (유려함이라는 차원은 배제하더라도) 논리적인 문장들을 번역서들에서 읽을 수 없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해하기 곤란한 일입니다. 영역본 문제를 몇 분이 제기하시는데, 제 기준은 제가 읽고 이해할 수 있는가 여부입니다. 한국어로 된 책을 다른 언어로 된 책의 도움을 받아야 읽을 수 있다면 그건 저에게도 번거로우면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2006-05-02 0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 돌아다니는 사이트 마다 로쟈님을 만나는 걸 보니 아무래도 관심사가 비슷한 것 같군요. 뭐 이런 경우 있잖아요? 어 또 이 양반이 있네. ㅎㅎ 그건 그렇고 몇 가지 언급하고 싶군요. 첫째, 바디우에 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는 글이 한 권 더 있습니다. 실뱅 라자뤼스, <<이름의 인류학>>, 새물결, 2002입니다. 역시 이종영 번역이고요. 이 책의 한국어본 서문에 실린 글은 바디우가 라자뤼스의 글을 서평한 것이고, 바디우의 Metapolitics에 실려있습니다. 참고로 라자뤼스는 바디우와 60년대부터 이론적, 정치적으로 같이 활동한 인물입니다. 둘째, 바디우가 데리다, 들뢰즈에 비해서 다른 이론가들을 읽는데 섬세함과 독창성이 부족하다 평하셨는데요. 판단이 이르다고 봅니다. 바디우의 글을 보면 자신의 상대들을 향한 날카로운 주장들을 펼치고 있습니다. 명백히. 한 철학자가 다른 철학자들을 논박할 때는 세심한 독해가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고, 나아가 알튀세르의 제자로서 이론적 실천으로서 적들을 공격할 때 그것은 더욱 분명하겠죠. 특히 프랑스처럼 학파에 따라 이론적/정치적 지형을 달리하는 풍토를 가면한다면, 단지 글쓰는 방식이 철학사가와 다르다고 해서 그 날카로운을 폄하할 수는 없겠죠. 가령 <<윤리학>>에서 진리의 공정이 배신으로 전락하는 것은 누구를 가리키겠는지요? 바디우가 미테랑주의를 지목할 때, <<존재의 함성>>에서 언급되듯이 메테랑주의와 연루/묵인한 자들을 가르키지 않는지요? <<존재의 함성>>에서도 철학 전통에 대한 나름의 충실한 독해를 하고 있지 않는지요? 셋째, 이종영의 번역에 관해서 인데요. 저도 번역은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번역투에다가 한국어의 논리구조에도 맞지 않는 경우가 많죠. 하지만 그것이 그의 저작의 신뢰성에 의문을 갖게 한다는 점은 좀 비약입니다. 만약 언어 물신주의에 빠져있지 않다면, 번역과 이해는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종영은 한국적 지형에서 좀 특이한 작업방식을 가지는데, 그의 저작들은 그 고유성을 존중해줘야 합니다. 소위 이론적 작업을 하는 사람들 중에 그렇게 격렬하게 문제제기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물론 그의 논의의 동의 여부를 떠나서 말이죠.) 마지막으로 아마 가을 쯤 바디우의 <<조건들>>이 번역 출판될 것입니다. 역시 번역이 좀 거시기 하겠지만, 바디우의 주저 중에 한 권이기 때문에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로쟈 2006-06-22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이 더 있었네요.^^ 바디우의 주저들이 출간된다면 오해나 편하는 시정될 수 있을 터입니다. 한데, 이정우씨가 쓴 <존재의 함성> 서평에 보면 '바디우, 대실망이다!'란 투로 돼 있는데, 제가 그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바디우의 몇몇 주저들을 영역본으로 갖고도 있고요. 이종영씨의 작업 자체에 대해서 폄하하는 건 아닙니다. 제가 의문을 갖는 건 그의 '매끈한' 저작과 '울퉁불퉁한' 번역 사이의 부조화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한...

기인 2007-02-07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디우 최근에 관심이 생겨서 퍼갑니다. 바디우 관련하여 바디우 제자인 서용순 선생님께서 책을 준비하고 계신다고 알고 있어서, 공부해볼 생각입니다.

로쟈 2007-02-07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다가 공익계의 석학이 되시는 거 아닌가요?^^
 

 

 

 

 

 

 

 

파일들을 정리하다가 오래전에 임지현 교수의 글 '20세기와 잃어버린 마르크스주의'(<문학과사회>, 1999년 여름호)을 읽고 정리/인용해둔 글을 발견했다. 이 글은 두해 뒤에 나온 <이념의 속살>(삼인, 2001)에 실려 있다. 인용 쪽수는 <문학과 사회>의 것이기에, 그리고 <이념의 속살>은 내가 안 갖고 있기에 여기서는 생략한다. 나름대로 생각할 거리들을 많이 던져주는 글이었다. 부분적으론 군말들을 붙였다.

 

-지성사의 관점에서 보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사실상 운명적 적수가 아니었다. 비록 길은 달리했지만, 그것들은 모두 계몽으로서의 이성에 대한 유럽 지성의 고상한 꿈을 실현하는 현실적 기제였다.(A. and M. Kroker,  "Ideology and Power in the Age of Lenin in Ruins"(New York, 1991, p.ⅹ.)  같은 ‘미래파’ 운동이 이탈리아에서는 파시즘의 지지세력이 되고 러시아에서는 볼셰비즘에 친화력을 지녔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가 여기에 있다. 생산 체제의 관점에서 본다고 해도, 근본적으로는 생산력 중심주의에 기초한 ‘근대’의 경제가 있을 뿐이다. 근대적 기획으로서의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는 생산력 중심주의의 서로 다른 얼굴일 따름이다.(이마무라 히토시, <근대성의 구조>(민음사, 1999)(*하면 자본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의 거리는 생각만큼 멀지 않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각각 표방하였던 시장 합리성과 계획 합리성은 근대성이라는 공통 분보를 기반으로 했다는 점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차이보다는 공유하는 것이 더 많았다. ‘전근대’를 탈출하여 ‘근대’라는 공통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양자는 서로 다른 길을 걸었을 뿐이다... 사회주의의 역사적 실패는 기본적으로 그것이 ‘근대 이후’를 겨낭하지 못하고, ‘전근대’를 탈출하는 이념적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데 있다. 그 결과는 사회주의는 더 이상 자본주의적 ‘근대’를 극복하는 해방의 이데올로기이기를 그치고, 자본주의적 ‘근대’를 따라잡기 위한 동원 이데올로기로 전락하였다. 그것은 사상의 패배였다.

 

-이 패배는 마르크스가 도모했던 프로메테우스적 진보의 길에 잠재된 위험이기도 했다. 생산성과 물질적 진보를 달성하기 위한 인류의 헌신적 노력을 상징하는 프로메테우스의 영웅관은 노동을 타도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을 신성시한다. 이 점에서 프로메테우스는 마르크스의 영웅이자 부르주아지의 영웅이었다.(*이하 모든 강조는 나의 것. 프로메테우스 신화에 대해서는 얼마전에 '프로메테우스의 두 얼굴' 등의 글을 정리해놓은 바 있다.) 

 

 

-마르크스의 문화적 영웅을 프로메테우스에서 오르페우스나 나르시소스, 디오니소스로 대체하자는 마르쿠제의 빛 바랜 지적이,(H. Marcuse, "Eros and Civilization"(New York, 1962, pp. 146-47.) 내게 새삼 절실한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이다. 1929년 초현실주의자 앙드레 타리옹이 ‘노동 타도!’의 슬로건을 제시했을 때, 1935년 혁명 러시아는 노동 영웅 스타하노프의 신화를 만들어냈다. 7톤의 할당량 대신 102톤에 이르는 경이적인 양의 석탄을 캐낸 돈바스 탄광의 전설적 광부 스타하노프가 해방된 육체 노동자였다면, 노동을 거부한 초현실주의자 티리옹은 ‘초’해방된 지식 노동자였다. 스타하노프와 티리옹은 각각 프로메테우스적 해방과 디오니소스적 해방을 상징한다.

 

-나는 마르크스주의가 자신의 문화적 영웅을 프로메테우스에서 디오니소스로 대체할 때, 인간 해방과 노동 해방의 이데올로기로서 자신의 잃어버린 정체성을 되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근대’의 물적 진보가 ‘게으를 수 있는 권리’의 토대가 될 때, 명징한 이성이 술에 취할 줄 아는 지혜와 결합될 때, 순백한 이성이 감성의 인간적 얼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때, 방법주의의 정확성이 에세이적 스타일의 유연한 사고에 포섭될 때, 인간과 자연을 기계화하는 총체적 사물화라는 근대의 고질병은 치유될 수 있을 것이다.(*여기서 '디오니소스'는 바타이유의 테마이기도 하다. 비생산적 소비로서의 에로티즘과 디오니소스주의.)

 

 

 

 

 

 

 

 

 

-혁명 후에 쿠바 중앙은행 총재로 임명된 체 게바라가 32층짜리 중앙은행 사옥 신축 공사 과정에서 보여준 일화는 이 점에서 시사적이다. 게바라는 이 고층 빌딩에 엘리베이터가 필요하다는 건축가 퀸타나의 논리를 끝내 수긍하지 못했다. 천식을 앓는 자신이 계단을 오르내릴 수 있다면 건강한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못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르트르가 “우리 세기의 가장 완전한 인간”이라고 극찬했던 ‘60년대의 영웅’ 게바라였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의 영웅적 헌신을 일반 노동자 대중에게까지 요구하다는 것은 무리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바라는 “자기 희생을 할 수 없는 인간은 새로운 인간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면서, 모든 쿠바 국민들이 자신과 같은 프로메테우스적 영웅의 길을 걸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현실 사회주의의 메커니즘 속에서 결국 ‘전인민의 노동 영웅화 혹은 프로메테우스와’는 근대화라는 국가적 목표 아래 디오니소스적 삶에 대한 인민들의 절실한 욕구를 억압하는 신화적 기제였을 뿐이다.(*나는 이것이 '체 게바라주의'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여타의 겉멋과 구별되어야 하는. 게바라뿐만 아니라 대문자 인간(Man)을 요청하는 모든 휴머니즘은 언제나 범속한 인간들에게 '자아비판'을 요구한다. 이때 동원되는 논리가 '품성론'이고, 그 상용구가 '모름지가 인간으로서'이다. 그리고 그러한 요구를 감당하지 못할 때, 범속한 인간들은 이기적이며 반동적인 '벌레보다 못한 인간'으로 전락한다. 사회주의적 휴머니즘은 '사촌이 땅사면 배아픈' 인간들을 상대하지 않는다. 반면에 자본주의는 바로 그러한 '이기적인 인간'을 기본단위로 설정한다. '거저 대충 남들이 죽거나 말거나', 그게 성공의 비결 아닌가?)   

 

-사회주의 유토피아의 기획이 자주 ‘전인민의 프로메테우스화’를 요구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삶의 리얼리즘을 놓고 볼 때,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요구일 뿐이다. 결국 이성의 기획이 순수하고 정확할수록, 그것은 일상적 삶의 현실과 멀어진다는 역설이 성립하는 것이다. 20세기의 역사가 잘 보여주듯이, 자신의 기획을 완성하기 위해 공동체를 통제하고 관리하며 계획하는 이념의 순수주의는 결국 그것을 거부하는 성원들을 배제함으로써, 스탈린주의나 파시즘 같은 전체주의를 배태한다.(*전체주의의 '배제'에 상응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방치'이다. 전자는 '죽이고' 후자는 '죽게 내버려둔다'. 어느 편이 더 '인간적'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노동의 소외를 극복하고 자아의 자유로운 발전을 주장한다고 해도, 마르크스의 노동 가치론은 노동의 물신화로 떨어질 위험을 안고 있는 것이었다. 마르크스가 전세계를 하나의 거대한 노동의 집으로 개조하려 했다는 아도르노의 비판이나, 노동을 강조하는 속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연 지배라는 면에서 진보만 알았지, 사회의 진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결국 파시즘에서 엿보이는 기술 관료적 속성을 드러낸다는 벤야민의 비판은 실로 예리한 통찰력을 보여준다.(마틴 제이, <변증법적 상상력>, 돌베개, 1981)  

 

-한편 아도르노나 마르쿠제 혹은 벤야민에 앞서, 노동의 물신화를 정면으로 거부한 최초의 사회주의자는 마르크스의 사위 라파르그(Paul Lafargue)였다. 물레토의 피가 섞인 이 독특한 사회주의자는 <게으를 수 있는 권리>에서 노동의 물신화를 단호히 거부하고 노동과 놀이의 조화에 기초한 푸리에의 ‘매력적 노동’ 혹은 모리스의 ‘예술가적 노동’관을 추구했다...

-부르주아지의 노동 물신화와 금욕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하여, 디오니소스적 노동 해방을 부르짖은 이 저작이 20세기의 사회주의 근대화론에 시사하는 바는 간단하다. 스탈린주의의 프로메테우스적 진보의 주술에 걸린 현실 사회주의의 노동 영웅들을 구출하고, ‘사방이 술에 잠기는 축제’를 통해 그들의 탈진한 원기를 회복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근대 문명의 프로메테우스적 진보는 디오니소스적 해방의 디딤돌이 될 때, 포스트모더니즘의 무차별 공세에 맞서 자신의 진정한 역사적 성과를 지켜낼 수 있을 것이다.(*한데, 탈합리적 디오니소스주의와 '역사적 방향성'은 궁합이 맞을 수 있는 것인지? 즉, 그것은 역설이 아닌가?)

 

 -탈이념의 시대에 이념의 문제를 고민하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프로메테우스적인 자기 헌신과 반역 정신이 동시에 요구된다. 디오니소스적 해방의 길이 디오니소스적 정서가 아니라 프로메테우스적 정신으로 모색되어야 한다는 것은 역사의 또다른 역설이다. 궁극적으로 그것은 삶의 역설이기도 하다. 역설은 일직선적 진보의 논리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프로메테우스의 직선적 해방이 아니라 디오니소스의 휘돌아가는 곡선적 해방이 요구되는 것은 아닐까.     

 

이후에 내가 기대한 건 이 '곡선적 해방'에 대한 이론적 모색이었다. 하지만, '이념의 속살'을 매만지던 저자는 이내 '일상적 파시즘'과 '대중독재' 비판으로 물꼬를 돌렸다. 그게 일관된 논리에 근거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06. 0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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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6-02-27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류사가 고민해온 문제를 '한해' 고민해서 해결할 수는 없겠지요. 다만, 근사치의 답들은 내놓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바람구두님의 의견도 언제 듣고 싶군요...

로쟈 2006-02-27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에 봉착한 역설을 수용하자면, 제 생각엔 어떤 '프로그램 없는 프로그램'이 요청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프로그램 없음'이라고 투항하는 이들과, '확실한 프로그램'을 여전히 주장하는 이들을 저는 지지하지 않으며 신뢰할 수 없습니다. '프로그램 없는 프로그램'? 물론 아직 말할 수 없는(혹은 말해지지 않는) 프로그램입니다. 약간의 유희를 보태자면, 저는 그걸 '파라그램'이라고 부릅니다...
 

콜린 데이비스의 <엠마누엘 레비나스 - 타자를 향한 욕망>(다산글방, 2001)은 최적의 레비나스 입문서이자 내가 좋아하는 책이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좋아하는 책은 Colin Davis의 원저 'Levinas: An Introduction'(Polity Press, 1996)이다. 레비나스에 관한 이런저런 책들을 나는 20여 권 이상 갖고 있는 듯한데, 데이비스의 책은 드물게도 내가 완독한 거의 유일한 책이고, 당연한 일이지만 레비나스에 대한 나의 이해의 절반 이상은 이 책의 완독에 힘입은 것이다(나머지는 핑켈크로트의 <사랑의 지혜>와 여러 한국어 논문들이 채워주고 있다).

그때가 1999년 1월이었고 나는 160쪽 정도의 이 원서를 일주일 정도 걸려서 아주 '맛있게' 읽었던 듯하다. 하니, 이 책의 국역본 출간은 나로선 반가운 소식이었다. 하지만, 책은 바로 사지 않았었는데, 그건 굳이 다시 읽을 필요가 없어서였다. 그리고 몇 년 뒤에서야 국역본을 구입한 건 순전히 '레비나스 컬렉션'을 위해서였다. 이번에 다시금 이 책을 읽고 있는데(나는 '현상학'에 관한 1장을 읽었다) 여전히 만족스러우며 (과문한 탓이긴 하지만) 이만한 분량에 이보다 더 좋은 입문서는 없어 보인다. 단, 국역본은 가독성이 좋은 편이긴 하지만 드문드문 오역을 포함하고 있어서 다소간의 주의가 필요하다.

나는 다른 독자들에게도 이 책이 유익한 입문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내가 오역이라고 보는 부분들을 지적하고 이에 대한 견해를 보태고자 한다. 그러니까 약간의 때를 벗겨냄으로써 충분히 '재활용' 혹은 '인용' 할 수 있는 책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인용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번역서의 수준을 판가름하는 가장 유력한 기준이다. 국역본 <엠마누엘 레비나스>는 읽을 만한 책이지만 인용시에는 주의가 요구되는 책이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내가 이 책을 사랑하기 때문이고 레비나스에 관심있는 독자들이 보다 많이 읽을 수 있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데이비스의 책은  폴리티출판사의 '우리시대의 핵심 사상가들(Key Contemporary Thinkers)' 시리즈의 한 권으로 나온 것인데, 같은 시리즈의 책들로 국역본이 나와 있는 것으로는 조지아 원키의 <가다머>(민음사, 1999)와 그램 질로크의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효형출판, 2005), 그리고 숀 호머의 <프레드릭 제임슨>(문화과학사, 2002) 등이 있다(분량과 내용 면에서 권장할 만한 시리즈이기에 더 많이 소개되었으면 싶다). 이 중 번역이 가장 좋은 것은 <가다머>이다.

일단 서론으로 들어가보자. "단순하지만 광범위한 생각, 곧 서구 철학은 지속적으로 타자(the Other)를 억압해 왔다는 생각이 레비나스의 사상을 지배한다."(9쪽) 단순하게 말하자면, 레비나스의 철학은 바로 이 타자에 관한 철학이며, 이를 통해서 서양철학의 패러다임을 '동일자의 존재론'에서 '타자의 윤리학'으로 전환하고자 하는 것이 그의 거시적인 프로그램이다. 이 "레비나스 윤리가 현대에 중요한 것은 그것이 타자성이라는 문제에 던지는 중대한 역할 때문이다."(12쪽) 한편으로 레비나스의 동일자/타자 구도는 벵상 데콩브의 프랑스 현대철학사 <동일자와 타자>(인간사랑, 1990)의 표제가 말해주듯이, 현대철학의 핵심구도를 규정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레비나스적 의미에서의 윤리(학)란 무엇인가? 교과서적인 윤리학 책들을 몇 권 이미지로 나열했지만, 짐작에 '레비나스의 윤리학'이 다루어지고 있는 윤리학 개론서는 없다. 특히나 영미적 전통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콜린 데이비스의 설명을 따라가자면, "레비나스는 도덕 행위를 위한 규범이나 잣대를 세우는 데 관심이 없으며 윤리적 언어의 본질이나 잘 살 수 있는 조건들을 연구하는 데에도 관심이 없다."(13쪽) 한데, 영미적 전통에서는 바로 그러한 것이 윤리학의 영역 아닌가.

해서 "거의 모든 맥락에서 레비나스가 쓰는 프랑스어 l'ethique를 '윤리(ethics)'보다는 '윤리적인 것(the ethical)'으로 옮기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윤리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더욱 제한된 의미에서 정치와 구별되는)과 같이, 그 어떤 인간이라도 소외시킬 수 없는 영역을 뜻한다."

원문은 "In most contexts, the French word used by Levinas, l'ehique, might just as well be translated by 'the ethical' as by 'ethics'; and the ethical, like the political (as distinct from politics in the more restricted sense), refer to a domain from which nothing human may be excluded."(3쪽)

뒷문장을 다시 옮기면, "윤리적인 것은, (보다 제한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정치'와는 구별되는) '정치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적인 것은 어떠한 것도 배제되지 않는 영역을 가리킨다."

요컨대, '제1철학'으로서의 레비나스의 윤리학은 모든 인간의 근간이며, 인간에 관한 모든 것을 포섭한다. 분량상, 이 '입문'은 몇 차례로 나누어야 할 듯하다. 다음번에는 '현상학을 넘어서'란 주제가 될 것이다.

06. 02. 20-22. 

P.S. 'Emmanuel Levinas'는 '에마뉘엘 레비나스'라고 읽어주는 게 현지음에 가까운 모양이다. 그건 강영안, 서동욱 교수 등의 최근 표기를 보아 짐작되는 것이다. 하지만, 강영안 교수조차도 <시간과 타자> 등을 번역/소개할 당시에 '엠마누엘 레비나스'로 표기했다(그 책에서 '베르그송'은 '베르크손'으로 표기됐다가 이번에 나온 <타자의 얼굴>에서는 '베르그손'으로 수정됐다). 번번이 지적하는 바이지만, '현지음'이란 건 표기의 고려사항이지 절대적인 표기원칙이 될 수 없다. 더구나 '에마뉘엘'이란 이름에는 우리에게 보단 친숙한 '엠마누엘'이 갖는 성서적/문화사적 의미가 포함돼 있지 않다. 나는 그런 의미의 '두께'를 얄팍한 '현지음'에 양보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에마뉘엘 레비나스'는 학술논문에서나 써주면 될 것이다).

더구나 '엠마누엘'은 우리의 '마담 엘마누엘'도 환기시켜주는 효과가 있다. 불경스럽다고? 그렇다면, 당신은 레비나스에 대해서 별로 읽어본 바가 없다는 뜻이다. '애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절절한 철학적 성찰을 담고 있는 책이 또한 <시간과 타자>이기 때문이다. 국역본에만 있는 것이지만, <엠마누엘 레비나스>의 부제는 '타자를 향한 욕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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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연 2006-04-12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연히 알게된 공간입니다. 너무 재밌어서 몇시간째 님이 쓰신 글들을 읽어보고 있습니다. 하지만...음...엠마누엘레비나스의 부제인 '타자를 향한 욕망'에서의 욕망은 그 욕망이 아닌것으로 알고있습니다만...^^;

비로그인 2008-06-16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엠마누엘 레비나스: 타자를 향한 욕망>은 사려고 하지 않았는데, 결국은 사게 되버린 책입니다. 지난주에 주문해서 오늘 받았는데, <사랑의 지혜>를 오늘 다 읽었고 이제는 <엠마누엘 레비나스>를 읽으려고 합니다. 로쟈님 페이퍼에 실린 이 글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데요. 바쁘신 와중이란 것 얼핏 간추려 짐작은 하지만서도.. 시간 짬이 나고 기억이 나실 때, 관련 페이퍼를 더 올려주실 수 없나요?^^ 꼼꼼히 대조해보거나 깊이 한권을 파고 드는 독서를 잘 못하지만, 사소한 것에서 의외의 큰 도움을 얻는다고.. 로쟈님의 페이퍼를 통해 좀 더 비판적인 독서가가 됩니다.
 

레비나스의 <존재에서 존재자로>(1947)는 같은 해에 나온 강연록 <시간과 타자>(1947)와 함께 후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에서 출발했지만 바야흐로 자신의 독자적인 철학을 구축하기 시작한 레비나스의 '야심작'이다. 비록 아담한 판형에 분량도 100쪽이 조금 넘을 정도로 소략하지만(영역본은 100쪽이 되지 않는다), 자신이 20세기의 '철학사적 사건'이라 명명한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1927)에 대해서 정면으로 도전장을 던지고 있는 책이기에 그러하다(두 사람의 대결을 제대로 관전하기 위해선, 따라서 하이데거에 대한 예비적인 독해가 필요하다. 하이데거가 얼마나 강자인가를 확인해두어야 이 '도전장'의 의미가 음미될 수 있다. 가서 하이데거에게 얻어맞는 일은 각자가 해보시길).

잘 알려진 바대로, '존재자에서 존재로'(하이데거)에 대항하는 레비나스의 구호는 '존재에서 존재자로'이다. <존재와 시간>이 '철학사적 사건'이라면 '논리적으로 볼 때' <존재에서 존재자로> 또한 그에 버금하는 사건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물론 팜플렛적인 저작으로서 <존재에서 존재자로>는 '레비나스 사건'의 프로그램적 윤곽 정도를 그리고 있을 따름이며(그러니까 이건 '전체주의' 철학의 거두 하이데거에 던지는 레비나스의 잽이다), '사건'의 전말이 다 드러나게 되는 것은 <전체성과 무한>(1961)에 와서이다(이게 어퍼커트이다). 

<전체성과 무한>은 아직 우리에게 번역/소개되지 않은 관계로(물론 해설들은 차고 넘친다), 우선은 레비나스의 잽만 맛보기로 한다. 그런 생각으로 집어든 것이 오래전에 사둔 국역본 <존재에서 존재자로>(민음사, 2003)이다.  당시에 내겐 비교해볼 만한 영역본이나 러시아어본이 없었기 때문에 독서는 자연스레 미루어졌는데, 어느덧 3년전이다. 한데, 이번에 주문받은 글도 있고 해서 (없는 시간이지만) 이참에 완독해보리라 책을 펼쳤다. 알폰소 링기스의 영역본(3판, 1995)과 러시아어본(2000)도 백업으로 준비하고서.  

한데, 분량상 수월하게 읽을 줄 알았던 국역본은 초반부터 막히기 시작했다. 인문 번역서의 첫페이지부터 오역이 등장하는 건 절대로 드문 일이 아니지만(차라리 그런 게 고마운 일이긴 하다. 책에 대한 '판단'을 빨리 할 수 있도록 해주니까), 이 공들인 번역서에서(역자는 부록에서 번역어에 대한 해설과 일람표까지 제시하고 원서의 오기까지도 교정하고 있다) 어떻게 첫문장에서부터 오역이 튀오나올 수 있는지 정말 미스터리하다('철학책'들이 '추리소설'과 얼마나 동종적인가를 새삼 확인시켜주는 역자의 고난도 유머가 아닌가란 생각도 했다). 서론의 그 첫문장이다.

"존재하는 것과 그것의 존재 자체 사이의 구별, 개별자, 유, 집단, 신 - 이런 것들은 명사들 및 그것들의 존재 사건 또는 존재 활동을 통해 나타나는 것인데 - 사이의 구별은 철학적 성찰을 요구한다."(19쪽)

단어들에 병기된 불어는 인용에서 삭제했는데, 중간의 삽입절까지 삭제하면 이 문장의 요체는 이렇게 된다: "존재하는 것과 그것의 존재 자체 사이의 구별, 개별자, 유, 집단, 신 사이의 구별은 철학적 성찰을 요구한다." 

여기서 철학적 성찰을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번역문에 따르면, (1)존재하는 것과 그것의 존재 자체 사이의 구별, (2)개별자, 유, 집단, 신 사이의 구별이다. 그리고, 조금 주의깊은 독자라면, 구문적으로 병행적인 이 두 가지 구별이 실상 같은 사실을 반복진술하는 것일 터이기에 뭔가 아귀가 안 맞는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1)에서 '존재하는 것과 그것의 존재 자체 사이의 구별'은 다시 말해서 존재자와 존재 사이의 구별이지만, (2)에서 나열된 "개별자, 유, 집단, 신"들은 모두 '존재자'이므로 이건 그냥 존재자들 사이의 구별이기 때문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 두 가지 구별은 같지 않으며, '존재자들 사이의 구별'은 하이데거나 레비나스에게서 상대적으로 아무런 철학적 의의도 갖지 않는다.  

이해의 편의를 위해 영역본을 옮겨오면 이렇다(집에 놔두고 온 불어본의 경우도 내가 아는 한 같은 내용이다): "The distinction between that which exists and its existence itself, between the individual, the genus, the collective, God, beings designated  by substantives, and the event or act of their existence, imposes ifself upon philosophical reflection."(17쪽) 

이 문장의 통사적 핵심은 두 차례 등장하는 'between A and B' 구문에 있다. 해서, "A와 B 사이의 구별, 즉 C와 D 사이의 구별은 철학적 성찰을 요구한다"는 게 문장의 내용이다. 국역본의 역자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것은 여기서 두번째 'and'이다. 그걸 연결된 수식어구로 본 것(그래서 '및'이라고 옮긴 것이리라). 영어본 문장에서 수식어구를 삭제하면 이렇게 된다: "The distinction between that which exists and its existence itself, between the individual, the genus, the collective, God and the event or act of their existence, imposes ifself upon philosophical reflection."

'존재하는 것(ce qui existe; that which exists)'이 소위 '존재자(existant; existent/being)'이다. 즉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존재(불어, 영어로 existence)'라는 건 존재자들의 '존재함이라는 사건 혹은 행위'(existing; Being)를 가리킨다. 이 '존재'를 흔히 우리말로 '있음'이라고도 옮기는데, 나는 '있다는 것'으로도 새긴다. 그러니까 '있는 것들'과 그것들이 '있다'는 사실 자체 사이의 구별이 존재자와 존재 사이의 구별이며, 이 둘 사이의 차이, 즉 (하이데거의 전매특허이기도 한) '존재론적 차이'가 레비나스가 하이데거의 가장 중요한 기여로 꼽고 있는 바이기도 하다. 덧붙이자면, 하이데거에게서는 이 존재자(=있는 것들)와 존재(=있음)가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그래서 하이데거에게서 존재는 항상 '존재자의 존재'이다. 반면에 레비나스는 그 둘 간의 분리를 가정한다. 소위 '존재자 없는 존재' 그것이 레비나스 철학의 출발점이다.    

어쨌든 첫문장이 왜 오역인지는 확인한 셈이다. 사실, 영역본이나 러시아어본과 대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지만 나는 왜 이런 '실수'가 빚어졌는지 궁금해서 불어본(1947년판이었다)을 도서관에서 복사하기까지 했다. 한데, 원서라고 해서 특별히 미스터리한 구석을 찾을 수는 없었다. 내가 갖게 된 결론은 독자들뿐만 아니라 역자나 교정자도 책을 그다지 꼼꼼하게 읽지 않는다는 것. 먹고 살 만한 고상한 독자들은 번역서를 외면하며 일반독자들이라면 이런 고상한 철학서는 일찌감치 독서 목록에서 제외된다.

하여, 이 책이 작년에 학술원 주관으로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된 데는 그런 이유가 숨어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 정도 흠이라면 문제삼을 만하지 않다는 판단을 심사위원들이 했었는지 모르겠지만(나는 그보다는 아무도 읽지 않았을 거라는 데 내기를 걸겠다), 만일 그런 경우라면 대한민국 학술원은 우리의 학술 수준을 대단히 얕잡아보고 있음에 틀림없다(일리가 없지는 않으나 그렇게 노골적으로 말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적어도 체면이 있지 않은가?). 왜냐면 오역은 이 첫문장에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서문에서 처음 이런 문장을 발견했을 때 나는 나름대로 '옥에 티'를 발견한 거라 생각하여 부듯했다: "존재 안의 이 자리는 현재의 노동이라는 주제로 제한된다."(9쪽) 이 대목의 영역은 "The theme of the present work is limited to this position in Being."(15쪽)이고, "이 책의 주제는 존재 안의 이러한 자리로 한정된다." 정도의 뜻이다. 'present work'를 '현재의 노동'으로 옮긴 것인데(역자는 불어의 'travail'를 번역 일람표대로 '노동'이라 옮겼다! 한데, 다른 대목들에선 '연구'라고 옮기기도 했으므로 역자가 문맥을 잘못 본 것이라고 할 밖에) 번역이라는 노동이 얼마나 험난한 것인가를 다시 확인하게 해준다.

그렇게 한번 웃으면서 지나갔지만, 막상 서론의 첫문장과 대면하니까 이게 웃을 일이 아니었다. 이 국역본이 런닝 바람으로 읽을 수 있는 책이 전혀 아니며 중무장을 요구한다는 걸 말해주는 것이기에(이젠 조금이라도 뜻이 들어오지 않으면, 불어본과 다른 두 번역본을 뒤적여야 한다).

서론의 25쪽도 그런 대목이다. '목적을 향한 탈자태'(영역은 'toward the end')에서 'fin'을 '목적'이라 옮긴 건 '유한성'을 다루고 있는 문맥상 '종말'이 더 적절했을 거라는 건 아쉬움이지만, "불안 없는 존재란 무한한 존재일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무한한 존재라는 개념은 모순이 아니다."라는 번역문은 유감이다. 영역은 "A being without anxiety would be an infinite being - but that concept is self-contadictory."(20쪽)

이 대목의 불어문장은 내가 보기에 가정법 문장이고, 러시아어본도 가정법으로 옮겼지만("만약에 이 개념이 모순이 아니라면") 영역본과 국역본은 직설법 문장으로 바꿔 옮겼다. 그런데, 뜻은 정반대이다. 영역본에 따르면, '무한한 존재'라는 개념은 자기모순적이며, 국역본에 따르면 '모순이 아니다'. 역자가 참고했을 것으로 보이는 독역본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가 읽은 불어본과 러시아어본, 영역본은 모두 같은 뜻이며 '무한한 존재(infinite l'être)'를 개념적으론 모순형용이라고 진술한다. 그건 내가 보기엔 '무한한 존재자'라고 해야 한다.

우리말 '존재'도 그렇지만, 불어의 'l'être'도 모든 문맥에서 하이데거의 'Sein'에 상응하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사실 역자도 "존재라고 번역하는 l'être가 문맥에 따라 '존재자'의 의미로 이해되어야 하는 경우가 있다는 걸 염두에 두기 바란다"(175쪽)고 적고 있지 않은가? "대부분 문맥상 어떤 뜻인지 쉽게 구별할 수 있다"고 했는데, 바로 이런 경우가 아닌가 싶다.

물론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구별은 단어상으로는 혼란스러운 게 사실이다(레비나스는 어감상의 이유로 기존의 역어 대신에 'existence/existant'를 사용함으로써 혼란을 더욱 가중시킨다). 그러한 혼란은 영역본 등의 다른 번역본들에서도 해소되지 않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내가 읽은 바 이 대목의 다른 번역들은 국역본을 지지하지 않는다. 국역본을 내가 충분히 신뢰할 수 없다고 보는 이유이다.

일반적으로 번역 작업은 '번역자에서 번역으로' 이행하지만, 이 레비나스 국역본은 부득불 '번역에서 번역자로' 관심을 돌리게 한다. '신뢰할 수 없는 번역'과 '신뢰할 만한 번역자'(그는 같은 세대의 훌륭한 인문학자이면서 경탄할 만한 논저들의 저자이다) 사이에서  나는 잠시 길을 잃는다. 이 '미스터리 극장'에서...

06. 02. 20.

P.S. 일견 단순해 보이는 오역들이어서 나는 2쇄 이후에 번역문이 혹 수정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구내서점에 가보았지만 재고가 없었다(내가 갖고 있는 <존재에서 존재자로>는 1판 1쇄이다). 혹 출간 직후의 서평들에서 이러한 일부 오역들이 지적되지 않았을까도 싶지만 아직 찾지 못했다. 가까이에서 찾을 수 없기에 일단 이 번역서에 대한 비판적인 의견을 올려둔다.  

P.S.2. 충실한 역주와 해제 등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모범적인 번역의 사례로 꼽힐 만하지만, 이 책의 '번역원칙' 한 가지는 나로선 불만스럽다. 그건 'existence'와 'existant'의 역어로서의 '존재' '존재자'에 대해서는 항상 원문을 병기해준다는 원칙이다. 즉, 본문에서는 항상 '존재(existence)'와  '존재자(existant)'로 기재된 형태만을 만나볼 수 있다. 두 용어는 레비나스 자신이 하이데거의 '존재(Sein)'와 '존재자(Seindes)'의 역어로 채택한다고 밝힌 바 있고, 역자 또한 이를 분명하게 언급해주고 있는데도 불구하고(그렇다면 같은 개념인 etant/l'être와 혼동의 여지가 없는 거 아닌가?) 매번 원문을 병기해준다는 것은 '원문에의 충실성'이라는 강박관념의 소산으로 보인다. 덕분에 훼손된 건 우리말 번역문의 말끔함이다. '존재'/'존재자'란 우리말 역어가 그렇게 못 미덥다면, 그냥 원문을 그대로 노출시키는 게 낫지 않을까? 아무리 '타인의 취향'이라고 해도 동감할 수 없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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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수록 2006-02-20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체성과 무한'은 번역본이 없는 고로 국역본 '전체성과 무한'을 본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네요. 혹, '존재에서 존재자로'를 혼동하신 걸까..책이 없어 확인불가입니다. 이번 비판에 당첨된 역자분은 다소 의외군요. 번역의 길은 멀고 끝fin이 없어라~

로쟈 2006-02-20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타였습니다...

비로그인 2006-02-20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동욱 같이 깐깐한 양반이 당첨되다니요.

yoonta 2006-02-21 0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동욱씨처럼 전도유망한 철학자께서 저런 실수를 하시다니 실망이군요..-_- 존재에서 존재자로정도의 책이면 외울정도로 많이 봤을텐데(아닌가?-_-) 저런 오역을 하다니.. 번역이라는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다시한번 느끼게 되네요..더불어 그것을 찾아내는 로쟈님의 능력도 대단하다고 할밖에는..^^

로쟈 2006-02-22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제 능력이 좀 '대단'했으면 싶지만 실상은 대수롭지 않은 능력이며, 여기서 꼬집은 오역들도 사실 너무 코미디 같은 오역들입니다(사실 실수는 누구나 하는 것이지만, 이번의 경우는 너무 의외의 실수입니다). 마치 '도둑 맞은 편지'를 찾는 것 같은. 그냥 국역본만 읽어도 말이 안 되는 것이니까요. 인용할 만한 역서를 만난다는 게 정말 힘들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