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의 저자'는 오래만에 한국 작가 3인으로 골랐다. 중견작가들이 나란히 장편소설을 펴냈기 때문. 먼저 김인숙의 <모든 빛깔들의 밤>(문학동네, 2014). 장편으로는 <소현>(자음과모음, 2010)과 <미칠 수 있겠니>(한겨레출판, 2011) 이후 오랜만에 나온 작품이다(3년 정도의 터울이라면 과작은 아니지만).

 

기차가 전복되는 사고가 발생한다. 그 안에는 희중의 아내 조안과 그들의 어린아이가 타고 있었다. 조안은 기차에서 아이를 살리고자 창밖으로 던졌으나, 바로 그 판단 때문에 아이가 죽고 그녀 혼자만 살아남는다. 희중은 소중한 존재를 모두 잃을 뻔했지만, 사랑하는 아내가 살아 돌아왔기에 묵묵히 그녀를 돌본다. 조안은 사고의 충격과 상실의 슬픔으로 심인성 기억상실증에 빠지고 자신이 아이를 죽게 만들었다는 사실에 대해 잊는다. 이제 극심한 비통함은 오로지 희중의 몫으로 남는다...

'상실을 둘러싼 비극과 미스터리'를 담은 작품이라고.

 

 

활발한 행보를 보여주는 권여선 작가도 새 장편소설을 펴냈다(2004년에 나왔던 <처녀치마>도 이번에 개정판으로 다시 나왔다). <토우의 집>(자음과모음, 2014). 토우란 '진흙소'를 가리킨다. 어떤 내용인가.

소설 <토우의 집>의 주 배경인 '삼벌레고개'는 삼악산의 남쪽을 복개하면서 산복도로를 만들고, 그 시멘트도로 주변으로 지어진 마을과 그 골목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제집 사는 사람, 전세 사는 사람, 월세 사는 사람'들이 모인 마을, 주인공 '안 원'에게는 언니 '영'과 동생 '희'가 있다. 이 세 자매는 주인집에 세들어 살고 있으며, 주인집 아들 '은철'이와 마을의 비밀을 조사하는 스파이가 되기로 한다. 하지만 원이의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사라지고 '감옥에 갇혔다는' 소문이 무성히 돌았으며, 아버지는 세 아이들의 이름처럼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 '인혁당 사건'을 연상케 하는 이 소설은 '토우가 되어 묻힌' 사람들의 자리, '토우의 집'이다.

작가의 말에서 권여선은 "고통 앞에서 내 언어는 늘 실패하고 정지한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내 어린 고통이 세상의 커다란 고통의 품에 안기는 그 순간의 온기를 위해 이제껏 글을 써왔다는 걸."이라고 적었다.

 

 

원숙한 나이에 접어든 중견작가 최인석의 신작은 <강철무지개>(한겨레출판, 2014)다. 제목은 물론 이육사의 시 '절정'에서 가져온 것이다.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20대 이상의 활달한 상상력을 보여주는 저자의 새로운 컨셉은 100년 후의 미래상을 그린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첨예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견고한 작품 세계를 축적해온 중견작가 최인석의 열두 번째 장편소설. SS 울트라마켓의 계산원 '지니(차지연)'와 서울클라우드익스프레스의 화물 배달기사 '제임스(윤재선)', 세상을 바닥부터 경험하며 분노와 복수로 살아온 '멜라니(안영희)'와 어떤 상황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 간호사 '아이리스'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2105년을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은 기계의 연장이 되어 쳇바퀴를 돌듯 반복적인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누군가의 삶을 진술하는 동시에, 언제든 해고로 몰릴 수 있는 불안정한 고용 현실, 편리를 가장한 '감시' 기술과 체제의 발전, 대체 에너지를 둘러싼 기업의 경쟁 등 예측 가능하면서도 피할 수 없는 우리의 디스토피아적 사회상을 그려나간다.

한국문학에서는 보기 드문 시도라 주목하게 된다. 하지만 모든 디스토피아 소설이 그렇듯이, 궁극적으로 겨냥하는 것은 바로 지금 우리의 현실이다. 김인숙, 권여선, 최인석, 세 작가가 공통적으로 묻는 것이기도 한데, 그것은 현재 우리가 살 만한 삶을 살고 있는지, 이렇게 살아도 좋은 것인지, 란 물음이다. 이렇게 살아도 좋은 것인지...

 

14. 12.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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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을 목전에 둔 11월의 마지막 주말, 이라고 해도 특별한 감회는 없고 오후에 일정이 있을 뿐이다. 외출하기 전에 '이주의 저자'를 골라놓는다. 국내 저자로만 골랐는데, 작고한 재일 은둔작가 손창섭을 머리에 올린 건 정철훈의 <내가 만난 손창섭>(도서출판b, 2014) 때문이다.

 

 

몇년 전에 <잉여인간> 등 손창섭의 대표작 몇 편을 강의한 적이 있고 그때 연구자료도 여러 권 구해 읽었었다. 그래도 <내가 만난 손창섭>이 미리 나왔더라면 아주 요긴했을 것 같다. 거꾸로 이제라도 손창섭을 읽어보려는 독자들에겐 유익한 참고가 되겠다. 부제는 '재일 은둔 작가 손창섭 탐사기'. 손창섭의 독자라면 자전적 단편 '신의 희작'이 얼마만큼 실제에 부합하는지 궁금할 텐데, 이 역시 탐사기에서 확인할 사항. 이 탐사기의 출간과정에 대한 소개는 이렇다.

손창섭(1922-2010). 전후(戰後) 문학의 대표적 작가인 손창섭은 월북 작가도 아닌데, 생몰 연대 가운데 한쪽은 지난 30년 간 비어 있었다. 1973년 일본인 아내 우에노 지즈코와 딸 도숙을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간 뒤 국내 문단과 소식을 끊고 있었던 재일(在日) 은둔 작가 손창섭을 찾아나선 이는 시인이자 소설가이면서 문학저널리스트인 정철훈(55)이다. 일찍이 단편 '신의 희작'(1961)에서 “껄렁껄렁한 시나 소설이나 평론 줄을 끄적거린다고 해서 그게 뭐 대단한 것처럼 우쭐대는 선민의식. 말하자면 문화적인 것 일체와 문화인이라는 유별난 족속 전부가 싫은 것이다.”라며 이 땅의 시인과 소설가들의 선민의식을 냉소했던 손창섭의 행방이 궁금했던 지은이는 2005년 <손창섭 단편 전집 1.2>(가람기획)과 장편소설 <유맹>(실천문학사)의 국내 출간을 계기로 “이 책들의 인세는 과연 손창섭에게 제대로 전달되고 있는가?”라는 의구심을 품고 손창섭의 행방을 수소문한다. “손창섭을 아는 분 누구 없습니까?”라고 물은 지 4년. 아무 응답도 들려오지 않자 정철훈은 과거 손창섭과 알고 지냈던 국내 출판계와 문학계 인사들을 직접 수소문한 끝에 손창섭의 일본 주소를 손에 넣은 뒤 무작정 일본으로 향한다.

이 책은 그 결과물인 셈.

 

 

 

작가 황석영 선생의 <여울물 소리>(창비, 2014)가 개정판으로 다시 나왔다. 초판을 읽지 않았기에 오히려 가뿐한 마음이다. 장편소설로 보자면 <바리데기>와 <강남몽>에 이어지는 작품. 작가의 말에서 "어쨌든, 나는 이 작품으로 한 시기를 끝내면서 새로운 들판을 찾아 떠나려 한다"고 적었다. 그렇게 읽어달라는 주문으로도 읽힌다.

시대의 거장 황석영 작가의 장편소설. 작가는 초판본(2012)의 오류를 바로잡고, 1년여에 걸친 치열한 퇴고를 통해 한결 정갈한 작품으로 <여울물 소리>를 재탄생시켰다. 1894년 사회적으로 고착된 부패와 외세의 내정간섭에 맞서 들불같이 타오른 혁명의 현장을 배경으로 작가는 피폐해진 민중의 삶과 그 속에서 피어난 사랑을 생생하게 되살려낸다. 소설은 '반동의 시대'인 19세기 후반부를 시대적 배경으로 이야기꾼(전기수)이자 혁명가인 주인공의 생애를 무게감 있게, 때때로 판소리처럼 구성지고 경쾌하게 그려낸다. 임오군란(1882)과 동학혁명(1894), 청일전쟁과 갑오개혁(1894) 등 굵직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이 전면과 배면에 등장함으로써 마치 대하소설을 읽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도 만든다.

올해 나온 황석영의 작품으론 한국문학전집판으로 다시 나온 <개밥바라기별>(문학동네, 2014)과 김석만 등이 각색한 <한씨연대기>(지만지, 2014)가 있다. 그렇게만 모아서 읽어봐도 좋겠다.

 

 

재일 지식인이자 저술가 서경식 선생의 <나의 조선미술 순례>(반비, 2014)가 출간됐다. '순례'로는 <나의 서양미술 순례>(창비, 1992/2002), <나의 서양음악 순례>(창비, 2011)에 이어지는 것이다.

<나의 서양미술 순례>의 저자 서경식이 ‘조선 민족’ 미술가들과의 만남과 대화를 토대로 묶은 미술 순례의 기록이다. 저자는 55세가 되었던 2006년부터 2년 동안, 연구를 위해 한국에 체재하게 되었고, 너무 늦어 때를 놓친 감이 없지 않았지만 이참에 같은 민족의 언어, 습관뿐만 아니라 문화, 특히 미술에 대해 가능한 많이 알고 싶다는 욕심이 생겨 그 바람을 조금씩 이루어나갔다. 조국의 민주화를 갈구하며 머나먼 이국에서 미술관들을 순례한 지 20년, 서경식은 먼 길을 돌아 마침내 ‘조선’의 미술, 미술가들과 만났다. 이 책은 그 길고 긴 여정의 중간보고다.

'중간보고'라고 하므로 저자의 순례는 앞으로 더 이어지는 모양이다. 서양미술과는 달리 '조선미술'은 비교적 쉽게, 그리고 가까이 접할 수 있을 듯싶어서 그의 순례기가 기대된다. <나의 서양미술 순례>가 그랬듯이 미술을 바라보는 속깊은 눈을 우리는 조선미술에 대해서도 갖게 될 것이다...

 

14. 1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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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저자'를 골라놓는다. 한 명의 철학자와 두 명의 동서양 작가를 골랐다. 먼저 <호모 사케르>의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의 신작이 나왔다. <벌거벗음>(인간사랑, 2014). <사물의 표시>(난장, 2014), <도래하는 공동체>(꾸리에, 2014)까지 포함하면 올해 나온 세번째 책이다.

 

 

10편의 에세이로 구성돼 있는데, 제목 그대로 '벌거벗음'에 대한 다양한 철학적, 신학적 성찰을 읽을 수 있다. 아래는 바네사 비코로프트의 전시작품(<벌거벗음>, 109쪽).

 

 

개인적으로는 카프카의 <소송>과 <성>을 다룬 에세이들에 우선적으로 관심이 간다. 내년초에 카프카의 작품들을 강의에서 다룰 예정이어서 더 눈여겨보게 된다.

 

 

두번째 저자는 로맹 가리. 주요 작품들이 계속 번역되고 있어서(올해만 세 권이 더 나왔다) 그의 신간 출간이 뉴스는 아니지만 이번에 나온 <인간의 문제>(마음산책, 2014)는 국내에 소개된 첫 산문집이라는 데 의의가 있다. 1957년부터 권총자살한 1980년까지 쓴 글들을 모은 것인데, 인터뷰도 몇 편 포함돼 있다. 로맹 가리 독자들에겐 좋은 연말 선물이 될 듯하다.

로맹 가리 탄생 100주년을 맞는 올해 마음산책의 여덟 번째 로맹 가리 책이자, 국내에 소개되는 그의 첫 산문집 <인간의 문제>가 출간되었다. 1956년 12월 <하늘의 뿌리>로 공쿠르상을 수상한 뒤부터 세상을 뜬 1980년까지 그가 다양한 매체에 발표한 33편 글을 엮은 최초의 책이다. 당대, 역사, 그리고 일반적인 인간 문제 전반에 관해, 에세이, 특별 대담, 각종 신문이나 잡지, 여러 책에 수록한 글들이 시간순으로 배열되어 그의 도저한 작가적 여정은 물론 개인사까지도 아우르며 소설과 영화만으로 도달할 수 없었던 로맹 가리라는 대지의 새로운 발견을 선물한다. ‘로맹 가리’ 또는 ‘에밀 아자르’의 가면에 가려 보이지 않던 ‘인간’ 로맹 가리의 모습을, 그가 일궈온 문학 세계를 보다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로맹 가리는 1914년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인도 작가 쿠쉬완트 싱.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델리>(아시아, 2014)가 개정판으로 다시 나왔다(1993년에 처음 소개됐던 작품. 원작이 1990년작이므로 바로 번역되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우리에겐 생소한 편이지만 쿠쉬완트 싱은 인도에서 가장 저명한 작가의 한 명. 가디언지는 이렇게 소개했다.

 

99세의 나이로 사망한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쿠쉬완트 싱은, 체제 비평과 위선에 대한 도전자로서 인도에서 특별한 위치에 있었다. 인도 최고의 편집자이기도 했던 싱은 많은 젊은 작가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그는 언제나 풍부하고 열린 정신과 혁신적인 사고방식을 추구했고, 무엇보다도 관대했다.

국내에는 <델리>와 함께 절판된 <몬순>(혜문서관, 1992)밖에 소개된 적이 없어서 전모를 가늠하긴 어렵다. 몇 작품 더 번역되면 좋겠다. 참고할 만한 소개는 이렇다.

쿠쉬완트 싱이 일흔다섯 나이에 발표한 이 작품은 저자가 25년여의 시간을 들여 완성했다. 1950~60년대의 왕성한 활동 이후, 일흔의 노구로 다시금 활발한 활동을 하게 된 시발점과 같은 작품이다. 완성도는 물론 소재와 주제의 강렬함 때문에 출간 즉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소설이 출간되자 인도에서 호평과 악평, 극과 극의 의견이 충돌했다. 호평은 인간의 본성을 여실히 그려냈을 뿐 아니라 델리의 역사를 다채로운 기법으로 소설적 구성 속에 담아냈다는 것이었고, 악평은 쿠쉬완트 싱을 <악마의 시>로 유명한 살만 루시디와 동일시하여 <델리>가 소설의 형식을 빌려 이슬람교를 음해하려는 선전 캠페인이며 베스트셀러가 된 것도 순전히 에로틱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한편 <델리>는 소위 ‘잘 나가는’ 인도 소설의 대표 주자이다. 인도를 대표하는 7대 소설을 뽑자면, 인도의 국민 작가 쿠쉬완트 싱의 <파키스탄 행 열차>와 <델리>, 아라빈드 아디가의 <화이트 타이거>, 로힌턴 미스트리의 <적절한 균형>, 비카스 스와루프의 <슬럼독 밀리어네어>, 줌파 라히리의 <축복받은 집>, 아룬다티 로이의 <작은 것들의 신>을 들 수 있다. 이 작품들은 하나같이 문제작이자 부커 상 같은 큰 상을 수상한 걸작이기도 하다.

 

 

거명된 일곱 작품 가운데 쿠쉬완트 싱의 <파키스탄행 열차>만 아직 번역되지 않은 셈이니 조만간 구색이 맞춰지길 기대한다. <화이트 타이거>와 <적절한 균형>도 조만간 구해놓아야겠다...

 

14.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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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저자'를 번외편으로 한번 더 적는다(건너뛰는 주가 있다 했더니 두 번 적는 주도 생기는군). 여행기 혹은 답사기의 저자라는 공통점이 있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창비)는 사실 군말이 필요하지 않은데, 이번에 '교토의 명소'를 다룬 '일본편4'가 출간됨으로써 일본편이 마무리되었다. 지난해 7월 1권이 나왔으니까 1년 4개월만에 일본 답사를 완보한 셈. 4권의 부제는 '교토의 명소, 그들에겐 내력이 있고 우리에겐 사연이 있다'이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4권에서는 국내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관광지이자 일본 역사와 문화의 정수가 모여 있는 교토 구석구석에 남은 한반도 도래인의 발자취와 함께, 우리의 기술과 문화를 토대로 스스로의 문화를 꽃피운 ‘그들’의 이야기를 오늘날 ‘우리’의 관점에서 읽는다. 고려불화부터 윤동주·정지용의 시비까지, 일본에 새겨진 한일 양국의 오랜 문화적 왕래의 자취를 찾아가는 답사여행을 통해 우리 선조들의 문화적 우수성을 확인하고, 더불어 한일 문화교류의 역사를 돌아보며 바람직한 한일 관계의 미래를 모색한다.

일본 여행을 다녀온 편집자들로부터 간간이 여행 소감을 들어보긴 했지만 나는 한번도 일본 여행에 대한 열망을 품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내년 하반기쯤 일본 근현대 작가들을 강의에서 다루게 되면 관심이 부추겨질지 모르겠다.

 

 

그럴 때를 대비해 '문학의 광장' 시리즈 가운데 일본편 두 권, <문명개화와 일본 근대문학>과 <오늘의 일본문학>(웅진지식하우스, 2011)도 구입해놓았다(요즘 반값할인을 하고 있기도 하다).

 

 

이어서 동양사학자 서인범 교수. 최부의 <표해록>(한길사, 2004)를 공역하고 그 발자취를 따라간 <명대의 운하길을 걷다>(한길사, 2012)를 펴낸 바 있는데, 이번에는 중국에 사신으로 파견된 연행사들의 발자취를 좇았다. '압록강을 넘은 조선 사신, 역사의 풍경을 그리다'를 부제로 한 <연행사의 길을 가다>(한길사, 2014). 명청시대에 조선을 평균 연3회 가량 연행사를 중국에 보냈기에 13-19세기 사이에 연행사를 파견한 횟수가 1,797회에 이른다고 한다. 이들이 남긴 기록이 <연행록>이나 그 분량 자체도 방대하기 이를 데 없을 듯싶다. <연행록> 입문으로도 읽을 수 있는 책.

<연행록>은 대중외교길에 오른 조선 사신들의 기행문이다. 이 책은 <연행록>의 전문가 서인범이 철저한 사료 검증과 현지답사를 통해 조선 사신들이 걸었던 길을 직접 밟아가며 조선시대 대중외교의 본질과 지혜를 문학적 문체로 유려하게 서술한 역사답사기다. 서인범은 조선의 외교가 지나치게 명분에 휘둘린 점도 있지만 단지 사대에 그치지 않고 자국의 이익을 위해 고군분투했음을 밝혀낸다.

 

끝으로 '글쓰는 셰프' 박찬일의 음식기행, <백년식당>(중앙M&B, 2014). 이탈리아에서 음식과 와인을 배운 유학파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한국의 오래된 식당들을 찾아나섰다. 부제가 '요리사 박찬일의 노포(老鋪) 기행'인데, '늙은 점포'를 뜻하는 '노포'는 여기서 '맛있어서 오래된 식당'을 가리킨다. 모두 18곳의 오래된 식당이 소개된다.

이 책은 해장국의 참맛을 이어가고 있는 '청진옥'에서 '스탠딩 갈비 바'의 원조 '연남서서갈비'까지, 세대를 이어 운영하며 '백년 식당'을 꿈꾸는 한국형 노포의 역사를 담아두기 위한 첫걸음이다. 그는 마치 시간여행자처럼 시간과 공간을 지켜온 맛을 찾아다니며 주인장들의 기억을 끄집어내고 우리 음식문화와 관련된 여러 문헌들을 찾아내 '그 집'만의 특별함을 기록했다. 1년여의 취재 시간 동안 어렵게 찾아내고 담아낸 18곳의 노포는 고단했던 현대사의 뒤안길은 물론 대를 이어 전수한 음식 맛의 비밀까지 인심 좋은 후덕함으로 시원스레 내어줄 것이다.

고급 레스토랑 순례기라면 '그림의 떡'이기 십상일 테지만, 노포 정도라면 어디에 있는지만 알아도 유익한 정보겠다. 동선이 닿는 곳이라면 한번 찾아가봐야겠다...

 

14. 1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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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기 전에 '이주의 저자'를 골라놓는다. 이번 주에는 국외 저자로만 세 명을 채웠다. 먼저 프랑스의 비평가 롤랑 바르트. 에세이 <소소한 사건들>(포토넷, 2014)이 출간됐는데, <작은 사건들>(동문선, 2003)이라고 나왔던 책이다. 아마도 저작권이 옮겨간 듯.

 

1968-9년 모로코, 주로 탕해르와 라바트 그리고 남부에서 보고 들었던 장면들과 그 이후 평생을 함께 했던 어머니를 여의고, 자신의 삶을 마감하기 직전인 1977-9년까지 파리에서의 저녁 모임들을 기록한 글에서 그는 스냅 사진 찍듯 인물과 풍경, 일상을 묘사한다. '남서부의 빛', '소소한 사건들', '팔라스 클럽에서 오늘 저녁…', '파리의 저녁들'이 수록되어 있으며, 일기 형식으로 쓴 '파리의 저녁들'에서는 동성同姓에 이끌리는 비밀한 내면을 드러내기도 한다. 기존 책의 오역을 바로잡고 바르트의 문체를 최대한 살려 번역했으며, 책의 의미를 바르트의 작업 전체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전문가의 해설을 덧붙여 보다 면밀하게 바르트를 만날 수 있다.

더 나은 번역으로 바르트와 만날 수 있다고 하니까 기대해봄직하다.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동녘, 2013)도 더 얹어서 읽어봐도 좋겠다.

 

 

<자유죽음>(산책자, 2010)으로 처음 소개됐던 아우슈비츠 생존작가 장 아메리의 책도 출간됐다. 에세이 <늙어감에 대하여>(돌베개, 2014). 1968년에 초판이 나왔으니까 <자유죽음>(1976)의 전작인데, 저자는 1977년에 4판 서문도 적었다. 그 이듬해 아메리는 자유죽음(자살)을 선택했다. <늙어감에 대하여> 같은 책의 제목이 가깝께 느껴진다는 게 그닥 좋은 소식이라고 할 순 없는데, 그럼에도 불가피하다. 부제대로 '저항과 체념 사이에서' 우리는 오래 머뭇거리게 될 것이다. 그런 머뭇거림에 아메리의 성찰이 좋은 참고가 될 수 있겠다.

늙어감의 불가피한 인간 실존과 운명을 도저하게 사유한다. 이 책이 질문하는 것은 “나이를 먹어가는 인간이 시간을, 자신의 몸을, 사회를, 문명을, 그리고 궁극적으로 죽음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는가 하는 점이다.” 다시 말해 늙어감이 인간에게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를 ‘살아낸 주관적 현실’의 차원에서 다룬다.

 

세번째 저자는 인류학자 메리 더글러스(알라딘에는 저자가 '브루스 링컨'으로 오기됐다). 우리에겐 <순수와 위험>(현대미학사, 1997)도 처음 소개되었는데, <자연 상징>은 그 속편 격이라고. 어떤 책인가.

현대 인류학의 가장 중요한 저서 중의 하나이자 고전적인 저서로 평가받는 <자연 상징>은 에번스 프리처드,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클리퍼드 기어츠 등과 함께 현대의 가장 뛰어난 인류학자로 꼽히는 메리 더글러스의 대표작이다. 출판된 지 거의 50년이 되어가지만, 이 책은 몸의 사회적 의미부터 종교 우주론에 이르기까지, 지적 논쟁에서 가장 쟁점이 되는 분야를 앞서 보여준다. 더글러스는 원시사회, 고전 종교, 현대사회를 넘나드는 세련되면서도 강력한 비교를 통해 자신의 작업을 우주론 탐구로 확장하며, 다양한 사회의 유형과 우주론의 관련성을 도식화한다. 이 책은 1960년대 말의 68혁명을 배경으로 저술되었기 때문에 당대의 혁명적 분위기를 진지하게 다룬다. 그러나 메리 더글러스는 지배하고 억압하는 의례와 상징을 파괴하는 대신에, 그것에 대한 보다 나은 이해를 통해서만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이 책에서 명료하고 역동적으로 표현된 격정적인 분석은 지금까지 서술된 인간 행위 연구 중 가장 풍부한 결실을 맺은 연구로 남아 있다.

제목은 밋밋하지만('자연 상징'이 떠올려주는 게 별로 없다) 인류학의 고전 가운데 하나라니까 욕심을 내보게 된다. <순수와 위험>도 어느 구석에 꽂혀(쌓여) 있는지 한번 찾아봐야겠다...

 

14. 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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