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형만 보고서 짐작할 수 있었는데 프랑스의 대표적 문고판 ‘끄세즈‘의 한권이다. 고려대 불문과에 재직했던 강성욱 교수의 번역본을 제자들이 개정하여 펴냈고(19세기 시와 소설) 보들레르에 관한 책을 추가했다. 봄학기에 프랑스문학 강의가 있기도 해서(오늘은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을 읽는다) 진작에 구입한 책들이다. 그 중 가장 먼저 손에 든 책이 <프랑스 19세기 문학>이다.

프랑스문학 전공자가 입문용으로 읽기 좋은 책인데 프랑스문학사에 대한 보충도 된다. 그러고 보면 랑송의 불문학사와 레몽의 프랑스 현대소설사와 현대시사를 제외하면 마땅한 불문학사 책이 있는지 궁금하다. 내가 기대하는 건 문고판보다는 더 심화된 내용의 책인데 아직은 적합한 책이 눈에 띄지 않는다. 발자크만 하더라도 츠바이크의 평전을 제외하면 깊이 있는 우리말 참고서가 부족하다(김화영 교수의 <발자크와 플로베르> 정도일까?). 나대로 이해한 프랑스문학에 대해선 내년까지 책을 내려 하는데 교양으로 읽을 만한 이 분야의 책이 더 나오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4월 마지막날에 이르니 긴 터널을 지나온 것 같다(실제 매주 지방강의에 가고오는 길에 터널을 통과했다. 그 터널을 이어놓으면 ‘긴 터널‘이 되겠다). 오랜만에 서점에 들러, 시집 코너에서 제법 서 있다가, 이성미 시집을 손에 들었다. <다른 시간, 다른 배열>(문학과지성사). 문지시인선으로는 551번째. 이 또한 돌이켜보면 처음이 안 보일 정도다(기억에 황동규의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가 첫 시집이었지. 그 바퀴가 아득하다). 시집의 두번째 시가 ‘터널과 터널‘이다.

가을로 들어가서 겨울로 나왔어. 길고 긴 기차처럼.

터널은 달리지 않는 기차인 것처럼, 있었지. 서 있는기차에서 나는 달렸어. 기차처럼.

풍경을 뒤로 밀었지. 달리는 것처럼, 의자를 타고 달렸어. 잠깐이라도 생각을 하면 안 돼요.

이 어둠에 끝이 있을까. 라는 문장 같은 것. 그런 순서로 불안을 배열하면 안 됩니다. 기차는 기차니까 길고, 나는 그전에

늦가을 비를 맞았다. 어쩌면 겨울비. 옷은 늦가을 비에 젖어 축축했고 무거웠고.

겨울비 내리던 날이라는 노랫말이 있었지. 가을비가 아니라 이건 겨울비. 그렇게 생각하면 겨울비 노래가 입에서 흘러나온다.

이렇게 흘러나와서 흘러가는 시다. 말도 심정도 복잡하지 않다. 기차가 있고 기차를 흉내내는 말의 배열이 있고 적당한 감상이 있다. 축축하고 무거웠다는 말도 그렇게 축축하지 않고 무겁지 않게 느껴진다. 말을 이기려고 하거나 말에 휘둘리는 시집들 틈에서 상쾌하게 느껴져(상큼하게라고 적을까 했다) 구입하고서 검색해보니 시인의 세번째 시집이다. 2001년등단. 20년째 몰랐던 시인이라니.

앞서 나온 두권도 주문했다. 이 정도로 취향에 맞는 시를 만나는 일도 드물어졌기에. ‘터널과 터널‘은 처음 네 연이 경쾌하고 좋다. 다시 읽으니, 늦가을 비를 맞았다는 건 좀 생뚱맞다. 절반이라도 맘에 드는 시가 드물어졌으니 이 정도도 오늘의 이득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번주 주간경향(1425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독재자 소설이자 총체 소설로 분류되는 바르가스 요사의 <까떼드랄 주점에서의 대화>(창비)에 대해서 적었다. <녹색의 집>과 함께 바르가스 요사의 초기 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이자 현대소설의 걸작이다.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독재자 소설로 <족장의 가을>과도 비교해봄직하다...
















주간경향(21. 05. 03) 라틴아메리카 ‘독재자 소설’의 모범작


라틴아메리카의 현대사를 배경으로 탄생한 특별한 장르가 ‘독재자 소설’이다. 과테말라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앙헬 아스투리아스의 <대통령 각하>를 포함해 이 지역의 걸출한 작가들이 각자의 독재자 소설을 갖고 있다. 자기 시대의 충실한 재현이 현대소설의 몫이라면 강압적 독재 시대의 경험이 독재자 소설로 표현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페루의 간판 작가이자 노벨상 수상작가 바르가스 요사도 독재자 소설에서 상당한 지분을 갖고 있는데, 국내에는 먼저 소개된 <염소의 축제>(2000)를 통해서도 그의 역량을 가늠할 수 있다. 도미니카공화국을 30년간이나 철권 통치했던 트루히요의 암살사건을 계기로 그의 시대를 되돌아보는 소설이다.


















흥미로운 것은 페루 작가가 도미니카의 독재자를 소재로 소설을 썼다는 사실이다. 같은 스페인어권이라 그런 ‘품앗이’도 가능한 것인가 싶었는데, 초기작인 1969년 <까떼드랄 주점에서의 대화>(이하 <까떼드랄>)를 읽으며 의문을 풀 수 있었다. 작가가 30대 초반에 쓴 <까떼드랄>은 독재자 소설의 모범이면서 현대소설의 걸작 가운데 하나로 손색이 없어서다. <염소의 축제>는 <까떼드랄>에서 보여준 역량을 한 번 더 확인시켜준 작품이라고나 할까. 작품의 주된 배경은 1950년대의 페루다. 1948년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마누엘 오드리아의 집권기로 독재는 1956년까지 이어진다. 작가는 그 8년의 시간을 억압적이었던 ‘어둠의 시대’로 기술한다.


독재정권의 각종 범죄와 인권유린도 문제였지만, 작가가 더 심각하게 본 것은 사회에 만연한 부정부패였다. 권력의 상층부부터 밑바닥까지 해묵은 부패로 조국 페루는 만신창이가 돼갔다. 소설의 주인공 산티아고 사발리타가 서두에서 던지는 질문이 ‘언제부터 페루가 이 꼴로 변해버린 걸까?’인 것은 그래서 자연스럽다. 동시에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그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 그의 방법은 당대 페루 사회 전체의 모습을 소설에 담아내는 일종의 ‘총체 소설’을 발명하는 것이다.

기본틀은 페루 부르주아 가정의 차남이자 신문기자인 산티아고와 그의 집 운전기사였던 암브로시오가 우연히 재회해 그들이 지나온 시대를 되돌아보는 것이다. 산티아고의 아버지인 사업가 돈 페르민은 독재정권의 유력한 협력자로서 정권의 보위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보안총국장 베르무데스와 거래한다. 그리고 하층계급에 속하는 암브로시오는 처음에는 베르무데스의 운전기사였다가 나중에는 돈 페르민의 기사가 된다. 돈 페르민과 베르무데스가 권력층의 시점과 이해관계를 대표한다면, 대학생이 돼 반독재 학생운동에 가담했다가 기자가 되는 산티아고는 지식인을, 암브로시오는 민중을 대표한다. 이러한 기본 인물 구성과 그에 따른 연결망 그리고 실험적인 서사기법을 통해 작가는 오드리아 정권기 페루 사회의 전모를 그려내고자 한다.

기획에서만 보자면 <까떼드랄>은 작가가 모범으로 삼은 발자크의 ‘인간극’을 떠올리게 한다. 그의 ‘인간극’은 당대 프랑스 사회의 전체 모습을 담은 거대한 벽화를 그리고자 한 시도였다. 19세기 소설의 충실한 계승자이기도 한 바르가스 요사는 리얼리즘적 세계관과 모더니즘적 서술기법의 이상적인 결합으로 읽히는 <까떼드랄>을 통해 그러한 총체성의 구현이 현대소설에서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번주 한겨레에 실은 북칼럼을 옮겨놓는다. 최근 강의에서 다시 읽은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1965)에 대해서 적었다...
















한겨레(21. 04. 16) 책에 눈뜬 인간,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하리


출간 당시 주목받지 못했다가 뒤늦게 화제가 되며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책들이 있다.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1965)도 대표 사례다. 뒤이어 발표한 <아우구스투스>로 전미도서상까지 수상했지만 윌리엄스라는 이름은 오래 기억되지 않았다. 반전은 소수의 독자들에게만 입소문으로 알려지던 작품이 2000년대에 재출간되면서 이루어진다. ‘당신이 들어본 적 없는 최고의 소설’이라는 평판과 함께 급기야는 출간 반세기 만에 ‘역주행 베스트셀러’에까지 등극한다. 윌리엄스 역시 ‘완벽한 소설을 쓴 작가’로 재조명된다.


<스토너>는 누가 읽는가에 따라 독후감이 달라지는 소설이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대학의 평범한 문학교수로 생을 마친 윌리엄 스토너의 일대기’가 어째서 반세기 만에 새삼스레 주목받으며 최고의 소설로까지 꼽히는가? 스토너가 영문학 교수라는 사실에서 암시를 얻을 수 있는데, <스토너>에 대한 열광적인 지지자들은 대개 비슷한 지적 배경과 관심을 갖고 있는 독자나 비평가다. 그리고 스토너와 독자들의 공통적인 경험은 책이 인생을 바꾸어놓았다는 것이다. 반대로 그런 경험이 없는 독자라면 <스토너>에 대한 찬양은 과도하게 비칠 수 있다. 작품 속에서도 스토너는 가족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동료 교수들로부터는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 <스토너>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도 온도차는 있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렇더라도 <스토너>에서 인상적인 대목은 따로 지목할 수 있다. 가난한 농부로서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아들을 대학에 보낸 스토너의 부모를 다룬 부분이다. 지역 대학교에 농과대학이 생겼다는 군청 직원의 귀띔에 아버지는 아들을 대학에 보내기로 하는데,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대학에서 새로운 농사기술을 배워오길 바라서다. 평생 농사를 지어오며 학교 교육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땅이 척박해지고 농사일이 점점 힘들어지면서 아들의 교육에 기대를 건 것이다. 일을 거들던 아들 역시 별다른 생각이나 감정 없이 대학 공부를 시작한다. 1910년의 일이다.


평균적인 성적으로 2학년이 된 스토너는 토양화학 같은 전공과목 외에 교양필수과목으로 영문학개론을 듣는다. 다른 학생들은 두려워하거나 싫어하던 담당교수에게 뭔가 끌리던 스토너는 결정적으로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강의 시간에 책의 세계에 눈뜨게 된다. “셰익스피어가 300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자네에게 말을 걸고 있네, 스토너 군. 그의 목소리가 들리나?”라는 교수의 질문이 그를 말하자면 ‘책의 인간’으로 바꾸어놓았다. 단순히 전공을 영문학으로 변경하고 대학원에 진학하는 수준을 넘어, 종교적 개종 이상 가는 존재 자체의 변화였다.


농민의 아들이었던 스토너는 책의 인간이 되면서 부모의 세계와 작별한다. 대학원 공부를 시작하고도 방학에는 집에 내려가 아버지를 돕고자 했지만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몫까지 해내고 있었다. 부모는 아들을 반겼고 아들 역시 부모를 사랑했지만 그들은 점차 낯선 타인들처럼 변해갔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스토너 가족의 경험은 인류사의 이행을 상기시켜준다. 서양 중세 말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발명과 함께 새로운 은하계(책의 세계)가 탄생했던 사실을 떠올려보라. 책의 인간이 되어가는 스토너의 변신 과정은 그러한 역사적 이행을 압축하는 이야기로도 읽힌다. 책을 읽게 된 인간은 결코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세계 책의 날’(4월23일)을 앞두고 한번 더 되새기는 생각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8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1-04-17 21: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4-18 23: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전출처 : 로쟈 > 호손과 멜빌의 가정소설

3년 전 페이퍼다. 각국 내지 각지역별, 그리고 작가별로 진행중인 세계문학 강의는 얼추 내년까지는 한 순번을 돌게 된다. 이후에는 장르별 순례에 나설까 싶다. 가령 가정소설이나, 범죄소설, 교양소설 등등. 목록 작업부터 진행해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